[오이스가] 새장 안의 작은 새 8.





***


   궁 안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그는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침소로 향했다. 거친 발걸음 소리에 시종들이 놀라 길을 비켰다. 시종장이 그를 황급히 막아섰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 하옵니다. 고하는 그에게 죄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자루를 잡았다. 나는, 왕을 뵈어야 한다. 강직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잘 갈린 금속마냥 날카로웠다.


   “이와, 죄 없는 시종을 괴롭히면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살지 않잖니.”


   창호지를 바른 문 너머에서 오랜 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이즈미는 수도 성벽에 닿은 어제 밤에서야 전해들은 그 지독한 장난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말해 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상이 혼례복을 입었으며, 그걸 본 죄 없는 시동들이 궐 안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 자체를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강직하며 사리분별이 정확한 남자였다. 들라 하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라기에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여러 겹의 문 너머, 오이카와는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길게 늘어진 흰 옷을 보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화 내지 말아줘,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길고 긴 애원을 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가. 이와이즈미는 친우로서 말했다. 그는 이 허술한 서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싸구려 연극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왕의 주도 하에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쿠니미가 아프다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린은 나라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앓지 않는다. 이와이즈미의 진한 침묵을 헤아리던 오이카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니 어쩔 수 없단다, 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식탁에는 조그마한 다과와 다구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창 너머에서 들어왔다. 그의 방 안에 있던 새장 안에 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왕의 침소에서 발견되는 모든 정황들은 불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 예전, 이와이즈미가 올바르게 맞춰놓은 조각을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스로 흩트리고 있었다.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이와이즈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의 웃음과 시선은, 한 구석에 있는 새장 안에 쏠려 있었다. 그 안에는 유리로 세공한 까마귀 장식이 들어 있었다. 악취미, 하고 질려하는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는 무응답으로 화답했다.


   “스가는, 이제 한 나라의 재상이야.”

   “그럼, 이와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오이카와,”


   이와, 난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내가 과거에 매여 있을 뿐이지. 오이카와는 먼 새장을 보며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이 독대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데, 이와이즈미는 따져 물었다. 그의 언사는 왕에게 하는 것이라기엔 건방진 것이었다. 허나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목을 덮어 내려온 비단 소매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야, 왕에게 직언하는 신하 정도는 있어야 성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질 나쁜 장난에 대한 대답과 해명을 듣고 싶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각 ‘계절’과 야하바 정도였다. 한 나라의 대신을 욕되게 한 것이 새어나간다면, 이와이즈미는 최악의 가정을 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는 걱정이 너무 많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식은 찻잔을 집었다. 식어버린 녹차에서 쓴 맛이 강하게 우러났는지 그의 미려한 얼굴이 구겨졌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자신의 눈에 담아냈다. 그 시선이 불편한 듯, 오이카와는 찻잔에 고인 달을 바라보았다. 대답, 해. 그가 요구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눈을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의 눈이 그랬고, 자신을 보는 쿠니미 또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령을 부려 카라스노로 떠난 자신의 기린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실도하실 겝니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뇌리에 선했다.


   잘못 된 집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 많은 기간 동안 그의 전에 들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내 궁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몸뚱이를 불렸을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오이카와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릇 된 일이야. 이상한 방식이었고, 너는 흔들려선 안 된다. 이와이즈미의 충언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까마귀 같은 짓이었다. 그의 손끝은 식은 찻잔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들어 놓은 보험에 대하여 셈하였다. 결론을 낸 그는 스가와라는 절대 내가 한 일을 말하지 않을 거야, 라고 느릿하게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그를 노려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떠나보냈던 그 밤을 회상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던 날이었다. 국경께의 서원. 쿠니미와 스가와라의 마차가 향한 곳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날의 일들은 언제나 그에게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사무쳤다. 다신 그러지 않을게, 그는 형식적인 사과를 내뱉었다.


   “왕이시여.”

   “이와.”


   이제 스가와라는 곧 카라스노에 돌아갈 거야. 꿈결 같은 시간은 지났고, 나는 이제 카라스노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전쟁을 하기엔 우리는 모두 지쳐있고, 아오바죠사이를 상대하기에 그 나라는 너무나도 약해. 오이카와 씨는 앞으로 그 쪽에 머리를 두고 자지 않을 거란다. 오이카와는 느릿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감언이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남자였다.


   정에 약한 그는 언제나 사랑하고 싶어 했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오히려 오이카와답다면 오이카와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으로써 그는 최악의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를 왕으로 옹립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 해 본적이 없었다. 아오바죠사이에는 그가 반드시 필요했다. 기린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네게 쿠니미의 사령이 달려갔던 이레 전 출발했으니 이게 서서히 오겠구나. 오이카와는 셈하여 대답했다.


   “사랑해서 그랬어."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것도 같았고 지나치게 추억을 마신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침대로 몸을 옮겼다. 그는 비단 이불 위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미련이란 이름의 씨앗이 눈 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자리에 오른 이상 버려야만 할 것이었다.


    이제 나가 보렴. 오이카와는 권유하며 말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이와이즈미의 검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에 달빛이 들어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검자루를 보다가, 문득 그에게 자신을 믿느냐 물었다. 이와이즈미의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인간적인 감정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부유하는 상념들은 허무맹랑한 망령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왕으로써 오이카와가 내린 명령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의 왕은 언제나 옳으며, 언제나 존엄하신 분이었다. 그에게 틀린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을 반추했다. 언제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이와이즈미의 왕은 흔들리더라도 다시 축을 잡아 일어 설 것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대나무 숲을 잠시 스쳐가는 바람의 짓이라 믿기로 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든 진심을 끌어 모은 말이 공중에 울렸다.


   “나는 당신의 결정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습니다.”






***


“이 곳에 계시면 카라스노 쪽에서 데리러 오실겝니다.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해와 같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스가와라는 말갛게 웃었다. 쿠니미는 달빛을 받은 그를 보다가 살짝 머리를 까딱였다. 그의 대랍시 기두에 달린 푸른 술이 흔들렸다. 어린 기린은 스가와라가 작은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본 뒤에야 뒤를 돌았다. 그는 목이 답답하다 느꼈다. 그는 옥색 의복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갈 길이 멀었다. 사령을 이용한다면 빠르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괜히 국경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곳은 난민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지 않았다. 국경에 있던 하나마키를 수도로 불러들인 탓이었고, 재상이 난데없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왕의 잘못 된 결정 때문에 몇 가지의 일이 틀어졌는지. 쿠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숨결에 그의 대랍시 기두가 흔들렸다. 왕실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비단 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상상하다가 턱을 괴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 마다 그의 대랍시가 흔들렸다. 쿠니미의 정수리 위쪽에는 비단 꽃이 풍성하게 자리했고, 은색으로 만들어진 이파리가 봉황의 모양을 한 채로왼쪽에 달려 있었다. 오른쪽은 수국과 자잘한 쪽색 비단 꽃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어깨에 두른 망토를 좀 더 끌어 올렸다. 오늘따라 밤이 추웠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쏘아야 합니까.”


   쿠니미는 며칠 전 꿈을 반추했다. 아직도 뒷맛이 썼다. 그는 개의 모양을 한, 작은 사역마를 불러냈다. 쿠니미의 손길에 어둠이 뭉쳐져, 온기를 가진 짐승이 되었다. 쿠니미는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이 가진 온기라도 끌어다가 덮고 싶었다. 수도에 있을 정인이 간절하였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굴복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문득 웃었다. 여러모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라꼴이 미쳐가는 게지, 쿠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머리를 쓸었다.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쪽 지어 준 것은 그의 정인이었다. 사랑의 형태는 언제나 은유적이었다. 사랑이라는 그 두 글자가 무엇이기에. 쿠니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라지 않는 이유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쿠니미 아키라는 공범이었다. 이미 같은 배에 올라탔음에, 뒤를 돌 수 없었다.


   “꼴에 잘 웃는구나.”


   낯선 목소리에 쿠니미의 무릎에 있던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전방을 경계하였다. 쿠니미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 셋 있다는 흑기린 중 하나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비릿하게 웃었다. 넌 참 예의 없게 오는구나,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안광이 빛났다. 무례한 것은 너희겠지.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단호하였다.


   “참지 못하고 화풀이라도 하러 온 게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쿠니미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불안했다. 그의 마차에 들어온 것도 충동적인 일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두 눈을 제 안에 담았다. 떨리는 것이 꼴사나워,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가린 손가락에는 금으로 만든 호갑투가 씌워져 있었다.


   주인을 풀어주었더니 그 개가 나를 물려하는구나. 쿠니미는 손가락을 살랑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호갑투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옛날,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작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면서 미소 짓는 어린 기린의 모습을 본 카게야마는 성급하게 소리 질렀다.


   “쿠니미!”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하거라.”


   쿠니미는 그를 나른하게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 속에는 순도 높은 불안함이 서러 있었다. 스가와라가 아오바죠사이에 연금되었던 것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미 잃은 새끼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 하얀 새를 연모하기라도 하느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그 표정에 담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애매한 질투,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경멸. 불안함과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울렁임. 쿠니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웃겼다. 애초에 하늘이 기린을 내릴 때,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용건이 없으면 내리거라, 쿠니미는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말하였다.


   “겁이 나느냐? 네 감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조용히 해라.”

   “마음에, 그 하얀 새를 품기라도 했던 것이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모라도 하였느냐? 불안하였느 사랑하였느냐? 그 사람이 너의 정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왜, 마음에라도 품었더냐? 진심이었느냐? 그래서 이렇게 불안하여 타국의 마차에 몸을 실었느냐? 나에게 무엇이라도 화풀이 하고 싶었느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두 기린의 몸을 잔혹하게 짓이겼다. 쿠니미, 하고 카게야마가 낮게 그의 이름을 말하였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같은 말이었다. 쿠니미는 호갑투를 살랑거렸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손이 어린 기린의 목을 두 손으로 세게 잡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그의 두 손가락이 쿠니미의 목을 세게 눌렀다. 숨이 막혀왔다. 그의 머리에 가지런히 올려 있던 대랍시가 흐트러졌다. 의자에 등을 세게 부딪친 충격에 머리가 아팠다. 쿠니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악력 차이가 나는지라, 그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찔한 어둠이 그를 가득 덮었다. 카게야마는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쿠니미는 몸을 떨며 기침했다. 내 스가와라님을 모욕하지 마, 그는 소리쳤고, 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비단 창 안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 흑기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가리던 호갑투가 마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게야마의 표정을 보며 쿠니미는 확신했다.


   “미친 놈.”


   쿠니미의 조소에 카게야마는 그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손을 떨었고, 쿠니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았다. 대랍시에 달려 있던 커다란 비단 꽃망울이 떨어졌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마차 벽면에 부딪힐 때, 쿠니미의 화려한 머리장식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술이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럼에도 웃었다. 기침과 섞인 웃음이 기묘하게 들렸다.


   연정.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역병이 모두에게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미쳐가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 외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정도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왜 왕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라고 했는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깨달음을 지금 당장 입 밖으로 내보낸다면- 가장 공감할 흑기린은 제가 한 짓에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속셈이냐.”


   카게야마가 다시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너머에 있는 모든 의미를 카게야마 토비오는 알지 못하였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기침했다. 그는 비단 발을 걷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이, 그에게 괜찮으냐 물었다. 어린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친우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는 별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빈껍데기 같은 시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는 서원에 스가와라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꼴에 자존심이 있는지, 카게야마는 말없이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처음 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차에서 그림자의 형태로 녹아내리려던 카게야마가, 멈추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왕의. 뜻을 지켜볼 뿐이다.”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소리 없이 카게야마는 서원으로 떠났고, 마차 안에 홀로 남은 쿠니미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인지, 목 끝이 따끔거렸다. 그는 숨을 천천히 뱉었다. 쿠니미는 분홍색 작은 꽃잎이 연달아 수놓아진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너무 지나친 비일상들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쿠니미는 처음부터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목을 잘라 효시하는 상상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아오바죠사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카라스노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득한 어둠이 몰려왔다.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기에, 그는


   하나마키가 보고 싶었다.






***


   스가와라는 먼지 쌓인 서원의 안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날과 변한 점은 거의 없었다. 그는 카게야마와 같이 쓰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비밀 방이 나타났다. 카라스노의 전대 왕. 그 인정받지 못한 폭군이 사와무라를 찾으려고 군대를 보낼 때 마다 그를 숨기던 공간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그 곳에 들어갔다.


   그동안 있던 일이 꿈결 같았다. 그에게 이 서원을 마련 해 준 것은 오이카와였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거둔 것은 아오바죠사이의 현대 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얄팍한 약조를 아직까지도 품고 있는 오이카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왕이 되면 모든 감정을 거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좁은 공간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어린 카게야마는 군대가 올 때만 항상 제가 숨고 싶어 했다.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기 때문이었고, 피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모습이 자라고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도. 심지어 인간 아이가 아니라 기린이라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스가와라에게 아이 같았다.


    이제 드디어, 돌아 갈 수 있다. 그는 궁 안에 마련 된 자신의 공간에 발을 디디고 싶었다. 사와무라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던 그 시절이 사무쳤다. 그는 그 비밀 방 안에서 멀리 보이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자리였던 곳이었다. 그는 그 전각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지체 높은 귀족 자제가 이 서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와무라는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념의 끝은 언제나 번뇌일 뿐이다. 스가와라는 그 방에서 천천히 나가, 전각으로 향하였다. 오이카와가 좋아하던 자리는 인공 호수 위의 복숭아꽃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사랑가를 부르던 한량은 어느새 왕이 되어 아오바죠사이 전체를 호령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스가와라는 실감하고 있었다.


   현재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과거로는 돌아 갈 수 없다. 오이카와도 이번 볼모행을 통하여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던 그의 모습과, 애잔하게 울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애써 지워냈다. 연모한다는 말을 담을 수 있는 것은 허락받은 자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멀리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림자 진 자리에서 형체가 올라왔다. 카게야마, 하고 부르자 상기 된 얼굴을 한 기린이 그에게 다가왔다. 스가와라와 이 서원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큰 키와, 몸이 흘러간 세월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슨 일, 없으셨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문제였다. 혼자만 간직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돌아갈까?”


   카게야마의 선생이던 시절처럼, 스가와라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 듯, 카게야마는 전각을 이리저리 둘러 보다, 복숭아꽃이 가장 보이지 않는 장소로 스가와라를 끌었다. 옷자락이 끌리자 넘어지듯 스가와라는 그 곳에 자리했다. 그 곳에 계신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발치에 있던 그림자들이 사령이 되어 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모두가 기다리는 그 곳으로 스며들며,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카라스노의 땅을 디딜 것이었다. 피로하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카게야마의 요청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피로 대신 그의 어깨에 올라 탄 미련이, 그의 머리를 자꾸만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가와라는 스스로, 새장의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