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스가와라 소년』中, 19장
오이스가 트친오락관에 참여한 글입니다. ' 착각 '을 주제로 썼던 글이에요>ㅁ<)/ 이거 쓸 때 일부러 뒷 주자분 햇깔리라고 '봄'이랑 '고백'을 섞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백 받은 다음에 두근두근거리는 스가와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고백에 면역 없는데다가, 진짜진짜 좋아해서 저게 장난이면 어쩌지ㅠ 고민하는 슈가는 분명 사랑스러울거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거대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가장 환상적인 연극. 주연은 ‘나’라는 이름의 자신. 배우는 막이 걷히는 그 순간, 가면을 쓴다. 스가와라는 봄볕을 받으며 샤프를 까딱였다. 한 뼘 정도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다가와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봄바람은 저 멀리, 교실 구석부터 다가온 것이었다. 그는 멀리 창가를 보다가, 정면에 있는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칠판 가득 수식이 적혀 있었다. 미분이니 적분이니 하는 이름이었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 쉬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산더미였다. 그는 연습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들을 간질였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수식 앞에 limit를 붙였다. ‘극한’ 이라는 말이었다.
리미트. 그 밑에 영, 그리고 화살표. 화살표의 뾰족한 부분은 8을 눕혀놓은 무한대로 향한다. 스가와라는 그 당연한 규칙에 의문을 품었다. 과연 한계 없는 영원이 가능한가. 제약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는 연습장에 하트를 그렸다. 안을 채우지는 않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가벼운 어조를 생각했다. 봄바람 같은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수식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묘한 떨림이 그가 수식을 풀어내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배구 코트에 들어 가 있는 기분이었다. 러너즈 하이를 똑 닮은 느낌이기도 했다. 머릿속이 간질거렸고,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로 침식되었다. 그는 그 침식이 ‘부식’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점점 녹슬고 있었다. 그에게 그의 고백은 딱 그 정도의 무게였다.
수열의 ‘극한’에서 나오는 답은 근사치이다. 정확한 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랑이라는 비정확하고 무한정이라 여겨지는 감정의 답을 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가와라는 감히 확언할 수 없었다. 그는 연습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어냈다. 동글동글한 글자 두 개가 자리했다. 그는 히라가나 아래에 한자를 적었다.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는 유달리 꽁꽁 싸매진 느낌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가 고민한다고 해도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애매한 문제였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둘째 가는 문제였다.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랑이 그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애매한 생각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 안을 더듬었다.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아즈마네와 사와무라가 함께 있는 단체 대화방을 틀어 낸 스가와라는 어제 밤부터 꾸준히 입력하려고 했던 말을 써냈다가 지웠다. 이런 생각을 남에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를 믿지 못한 걸 동네방네 떠벌리는 꼴과 다름없었다.
날 좋아하는 게 착각은 아닐까.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핵심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개의 수식을 겹쳐 풀어야 하는 문제처럼, 혹은 사인 - 코사인 - 탄젠트를 적절히 배합해서 풀어야 하는 삼각함수와 수열의 극한 문제처럼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가와라’라는 이름의 연극의 19막에서, 지금이 가장 뜬금없는 대목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라는 글자 또한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처럼 단단하고 유려했다. 이름 글자마저도 잘 생겼네, 그는 짧은 감상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오이카와가 보낸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멋없는 고백이 별 파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미리보기했다. 차마 대화방으로 볼 용기는 없었다.
「배고픈데 아직점심시간도아니다상쾌군은어때 어제일아직」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애매한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그는 샤프를 손끝에서 돌렸다. 그는 다시 칠판을 보고, 멀리서 불어오는 따사로운 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았다. 봄,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쌀쌀했었는데,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는 괜히 춥다고 말하면서 연습장에 수식을 적어 내려갔다. 수학문제처럼 쉽게 풀리는 문제면 좋을 텐데. 그는 목 끝을 간질이는 재채기를 뱉어냈다.
연극이 아닐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신용해야 하는 문제일까. 과연 그의 사랑이 막힘없이 저에게 수렴하는 것을 믿어야 할까. 스가와라는 진한 착각 속에서 표류했다. 일랑일랑, 일렁이는 봄바람이 그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뒷목을 쓸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질 문제가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대답해야 할 문제였다. 착각이면 어쩌지,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꺼풀 위에 짧은 어둠이 내리 앉았다.
그는 머지않은 일을 회상했다. 꿈결 같은 일이었다. 아직 쌀쌀함이 가득한 저녁, 둘은 잠시 만났다. 오이카와는 월요일이라 연습이 없었고, 스가와라는 연습 도중에 성급하게 빠져나왔다. 학교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가로등이 하나하나 빛을 먹어갔고, 멀리서 노을이 차츰차츰 밤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얼마 전에 본 책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밤하늘을 ‘장막’이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라는 말이었다.
밤이 장막이라면, 지금은 무대 뒤가 되는 걸까?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렇겠지? 하고 대답했다. 그는 그것이 고백의 초석이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너한텐 항상 솔직해야 겠네? 오이카와는 진지하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내리 앉은 목소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는 멀리 내린 봄바람을 보다가 어깨를 쓸었다. 좀 춥네, 하고 말하자 오이카와는 자신이 걸친 후드 집업을 벗어주려고 했다.
가로등 아래의 반짝임 속에서 둘은 걸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 침묵을 좋아했다. 딱히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서로 편한 관계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반 보 정도 앞에서 걸어가는 오이카와의 흔들리는 손을 보는 걸 좋아했고,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바람이 들어가 새의 걸음걸이처럼 총총 뛸 때면 사랑이 폼폼 돋는 것도 같았다.
그가 애매한 짝사랑을 되새김질 하고 있을 때 오이카와는 반 보 차이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그 보다 반보 앞에 서서 살짝 몸을 돌렸다. 둘 밖에 없는 길에서 오이카와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는 요즘 고백의 트렌드에 대해 아느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결심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스가와라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랄하게 걸었다.
스가와라의 걸음이 그의 걸음보다 세 보 정도 앞섰을 때, 오이카와는 그를 불렀다. 코우시, 하고 내리 앉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것이었지만 좀 더 무거웠다. 스가와라가 뒤를 돌자 그는 정말 좋아해, 라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멋없었고, 뜬금없는 말이었다. 스가와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손을 내밀어왔다. 스가와라는 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저기 스가, 하고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 진득한 목소리에는 끝이 담겨 있을까, 아니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일렁이는 착각이 꽃처럼 피어 거짓말로 다가온 것이었을까.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번뇌도 이 일의 파생이었다. 스가와라는 제 심장에 뿌려진 씨앗, 그 곳에서 싹을 틔운 꽃을 떠올렸다. 한숨을 쉴 때 마다 가지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봄바람이 그의 손끝에 잡혀있다, 이내 흘러갔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봄바람 같은 남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느긋한 한낮에 찾아오는 춘곤증을 닮아있었다. 그랬기에 착각 한 것이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 맥 빠지는 고백은 ‘키스해도 괜찮고, 섹스 할 만큼 사랑하는’의 뜻이 아니라 ‘친구로서 좋아해’일 게 분명했다. 그의 생각은 갈수록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쓴 가면의 이름이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칠판 안에는 여전히 수식이 가득했으며, 스가와라는 착각의 이름만을 연습장에 적고 있었다. 그는 계산할 수 없었고 답에 확신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그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이카와가 보낸 메시지의 미리보기가 바뀌어 있었다. 미안해, 그 짧은 말에 스가와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오이카와가 사과 할 문제가 아니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였다.
핸드폰 액정 위에서 스가와라의 손가락이 방황했다. 시급하게 대답 할 일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좋아, 라고 대답 했을 때 ‘몰래카메라 였습니다-’라는 구식 포맷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스가와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다. 그의 상상은 봉우리를 부풀리기 시작한 꽃잎처럼, 그 속에 봄을 가득 머금고 있는 벚꽃처럼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이건 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무대에 ‘착각’이라는 무대장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연극, 19장에서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 계속, 계속 상상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의 망상을 돕는 기폭제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쓰고 있을 가면과, 자신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착각을 기조로 한 무대미술 위를 걸었다.
수업종이 울려도 그의 생각은 끝을 낼 줄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봄바람이 그의 볼을 분홍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가로등 아래의 멋없는 고백이 그의 머리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후후,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숨이 봄바람과 섞여 그의 마음을 더 부풀렸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좋아할까, 좋아할까, 좋아할까. 스가와라는 점심시간에 꽃이라도 따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꽃잎이라도 뜯고 싶은, 그런 봄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 벚꽃은 피기 전이었고, 스가와라 소년의 연극의 19장은 느리게 또 느리게, 봄날 춘곤증처럼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엉망인 연습장 페이지를 뜯어냈다. 부디, 착각만은 아니길. 그는 기원을 담아 종이를 구기고, 그 마음을 가방 안에 넣어 지퍼를 닫았다. 봄 햇살이 그의 얼굴에 짙게 내렸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