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마법 같은.
슈렝님이 분명 이 비슷한 내용으로 리퀘를 해 주셨던 것 같은데 디테일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별찍어 놓은 게 사라졌나봐요.. 앞으로 트위터에서 무분별한 별닌자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렝님 사랑합니다... 저는 렝님의 노예.....(렝님 : 반품해주세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저는 오이카와에게 제 최애팀 유니폼을 입히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화려한 빨강이랑 오이카와랑 나름 잘 어울리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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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는 전공을 선택할 때 신중하다던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스승의 날도 아니었고, 뭔가 기념할만한 날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느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작년 까지만 해도 그에게 1월은 ‘새해의 시작’이라는 의미 말고는 아무런 달도 아니었다. 그저 열 두 개의 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을 두 번 넘겨 라인을 열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이카와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는 뒷머리를 쓸었다. 한국 배구는 지금이 ‘시즌’이었다. 새해 첫 해부터 리그를 할 건 뭐람. 그는 붉은 유니폼을 입고 두 손으로 브이를 그린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야속한 웃음을 엄지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장을 봤다. 항상 한 팩을 사던 고기는 반 팩, 양배추도 사분의 일 토막을 구입했다. 먹는 입이 줄었으니 장보는 양도, 만드는 양도 줄었다. 그는 그 ‘반절’ 분이 매우 아쉽다고 느꼈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전공을 신중하게 정하라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스포츠의학과를 갔어야 했나, 고민했다. 그는 팩에 들어있는 파인애플을 집어 들었다.
파인애플을 바구니에 담으면서 스가와라는 옆으로 이동했다. 우유빵이 한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빵을 집었다가 곧 내려놓았다. 이걸 한국으로 보낼 순 없잖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며칠 전 오이카와가 우유빵이 먹고싶다고 땡깡을 부린 걸 기억했다. 국제전화를 걸어 놓고 하는 소리가 고작 그 정도라서 짜증을 냈던 기억은 1+1 행사상품처럼 묶여 따라왔다.
그렇지만 그는 우유빵도 바구니에 담았다. 꽃빵에 부추잡채를 넣어서 먹는 것처럼 마파두부라도 올려 먹지 싶었다. 스가와라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제 암호 같은 한국어를 들어가며 경기를 챙겨 본 탓이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숫자를 겨우 읽어가며 찾아 본 경기들은 다 앞부분이 잘린 것들이었다. 그는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서 ‘풀 영상’을 겨우 볼 수 있었다. 풀영상을 찾기 위해서 허비한 두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혼자 일본에 남아서 편한 점은 메뉴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영양소를 균형 맞춰 먹지 않아도 괜찮았고, 타바스코 소스를 양껏 뿌려도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 스가와라는 이 편리한 식생활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될 때 마다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데도 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나오는 경기는 빠짐없이 챙겨보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배가 고팠다.’
외로움과 함께 찾아오는 기묘한 허기. 스가와라는 어제 새벽을 회상했다. 기어코 풀 영상을 찾아보던 때의 일이었다. 영상은 선수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LIG 손해보험 선수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라는 목소리와 함께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였다.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입니다. 세터진이 약한 손해보험을 뒷받침 해주는 좋은 세터죠, 라는 목소리와 함께 클로즈업 되는 그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뭔가 변한 것도 같았다. 한국에서 머리를 새로 했다더니 예전과 느낌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통역 없이 어눌하게 한국어를 발음했다. 예전 유니폼과 다른 붉은 색의 유니폼 또한 어색했다. 그가 들어간 LIG 그레이터스의 유니폼은 민소매였다. 몸에 잘 달라붙는 유니폼 아래에 그는 검은 서포터를 받쳐 신었다. 그 모습이 여자애들이 칠부 레깅스를 신을 때의 모습과 닮았다. 잘 빠진 다리라인을 보면서 농담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스가와라와 오이카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지는 것이 연인인데, 롱디는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김요한과 에드가에게 정확하게 토스를 올리던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그는 속공과 백어택 등을 잘 조합하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모습과 별반 차이 없는 것 같았다. 한국 적응 문제 때문에 바로 활약하기는 어렵겠다던 일본의 언론도 어느새 오이카와의 활약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전공이 스포츠의학이었다면 한국에 전용 의료진으로 따라갈 수 있었을깔 고민했다.
적어도 한국어 전공이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고, 그럼 통역으로 따라갈 수 있었겠지. 스가와라는 카레가루를 집어 들었다. 홍합탕을 끓일까 했지만 귀찮은 일이었다. 먹어 줄 사람도 없는데 손이 가는 음식을 하는 건 사치였다. 스가와라는 코를 킁킁거렸다. 혼자 장을 볼 때 무심코 양을 줄이거나 즉석에서 메뉴를 바꿀 때 그는 외로워지곤 했다. 오이카와가 한국으로 간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유일한 감정이었다.
평소보다 가벼워진 짐에 장바구니가 홀쭉했다. 스가와라는 그걸 한 손에 들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미미하게 울렸다. 그는 어서 전화를 꺼냈다. 오이카와,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급한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지직거리는 것도 같았다. 너 돈 잘 벌어? 국제전화 막 하지 말란 말야. 스가와라의 잔소리에 오이카와는 자기 거한테 전화를 거는데도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슬프다고 대꾸해왔다.
나 전공 선택을 한국어나 스포츠의학으로 할 걸 그랬나봐. 스가와라가 한탄하듯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내가 보고 싶어? 하고 물어왔다. 눈치가 빠른 애인은 이래서 귀찮다. 스가와라는 괜히 ‘아니’ 라고 대답했다. 어제 경기 봤어?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인터넷으로 찾아 봤다는 말을 건넸다. 어제 토스 좋더라. 점프 서브도 잘 넣고, 그는 힘없이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잔잔히 웃다가 다음 경기가 언제인지 아느냐 물었다.
“너희 올스타전 한다며.”
“잘 아네.”
“번역기 돌렸어.”
애인 소식을 번역기 돌려서 알아야 한다니 너무 슬픈 일이야. 슬픈 게 한이 없어. 스가와라는 골목길을 돌았다. 손에 든 장바구니는 여전히 가벼웠고 그의 빈자리를 실감하게 하고 있었다. 장바구니 들어 줄 사람도 없고, 스가와라는 한탄했고 오이카와는 나도 장바구니 들어주고 싶은데, 하고 대답했다. 멀리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경기에서 뭐가 인상적이였냐면, 김요한 선수 잘 생겼더라. 문신 멋있어. 까마귀 날개 같아. 스가와라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늘어지기 시작한 노을이 그의 그림자를 늘렸다.
그것뿐이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세터 칭찬도, 잘 생긴 김 선수 칭찬도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대꾸했다. 가장 중요한 말을 안 했잖아. 오이카와는 따지듯 말했다. 토오루?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거 말고, 오이카와는 오늘 따라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골목 너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음, 그리고 아, 어제 발로 디그한 거 멋있었어. 그는 잊고 있던 칭찬을 내뱉었다. 그것도 아니야, 오이카와는 샘이 난 듯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원하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인 걸 눈치 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데, 멀리 있으면 얼마나 보고 싶은지 그는 아마 한 톨도 모를 것이었다. 한국에 적응 하느라 힘들텐데 보고 싶은 마음까지 가져달라는 건 투정 같았다. 스가와라는 보고 싶어, 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오늘 장을 봤는데, 네 몫을 하나도 안 샀어. 근데 그게 당연한 건데 허전했어. 그는 읍소하듯 중얼거렸다.
얼마만큼 보고 싶어?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골목에 통화음이 울리는지 계속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하늘만큼- 땅만큼. 스가와라는 웃을 기운도 없다면서 말을 내뱉었다. 혀끝에서 툭툭 던지는 말이 그렇게 기쁜지 오이카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너 지금 가게 들렀다가 골목길이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너랑 얼마 전 까지 같이 걸었던 길이네요, 스가와라는 완전히 진 것 같았다.
얼굴을 보지 않으니까 솔직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도 같았다. 혹은 만난 지 오래 됐기 때문에 솔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됐든 스가와라는 그를 놀릴 기운도 없었다. 내가 네 앞에 나타나는 마법을 걸게,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다면 장바구닐 던지고 백덤블링이라도 할 수 있겠다면서 투덜거렸다. 줬다 뺏는 사람과 희망을 주면서 설레게 하는 사람이 가장 질이 나쁜 사람 이야.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게 뭐야,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라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장바구니를 흔들었다. 십, 구, 팔, 칠 하며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숫자를 셌다. 스가와라는 육, 오, 사, 삼 하면서 그의 목소리를 이었다. 너 진짜 없으면 죽어, 라는 말에 오이카와는 백덤블링 할 준비나 하라며 코웃음 쳤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의 장난기를 받아들여 스가와라는 이, 일, 영, 하고 나머지 수를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골목길을 돌았다. 짜잔, 하고 오이카와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현 소속팀의 검은색 져지를 입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놀라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야, 너 핸드폰 망가지면 전화 못한단 말야. 오이카와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진짜 토오루? 스가와라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마치 귀신을 보는 듯 했다.
오이카와는 몸을 숙여서 핸드폰을 주웠다. 그는 능숙하게 스가와라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진짜 1인분씩만 샀네. 그는 소녀처럼 발랄하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볼을 잡아 당겼다. 아파, 나, 진짜야, 올스타전에서 나 안 뽑혀서, 그 틈에 잠시 귀국했어, 한국이랑, 일본이랑 별로,
시간도, 안 걸리고 그러니까 놓아주지 않을래? 오이카와의 말이 점점 템포를 빠르게 했다.
스가와라는 손을 내렸다. 마법 같아, 라며 속삭이는 말에 오이카와는 손으로 브이를 그려보았다. 스가와라는 그걸 꼭 잡았다. 보고 싶었어, 오늘 진짜 내 전공부터 후회 할 만큼.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말이 예쁜 듯 그를 꼭 끌어안았다. 골목길 안에 내리는 노을이 그들의 그림자를 하나로 묶어두었다. 오이카와에게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오늘 저녁 뭐야? 그는 일상인 듯 물었다. 스가와라는 장을 다시 봐야겠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나 자주 올 건데. 오이카와는 웃으며 말했다. 올스타전 없으면 오지도 못 하는 주제에, 스가와라는 그의 정강이를 찼다. 오이카와가 주저앉으려 할 때 그는 오이카와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장바구니를 놓쳐 안에 들어있던 감자와 당근이 골목길을 질주했다. 스가와라는 급하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더했다. 숨과 숨이 부싯돌처럼 부딪히는 소리가 질척하게 골목 안을 울렸다.
보고 싶었어, 스가와라는 그의 목 너머로 그 말을 넘겼다.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익숙하게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어왔다. 그 따듯한 온기에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마법 같은 노을이 그들 사이로 내리며 긴긴 밤을 불러오고 있었다. 골목 안에 떨어진 야채들의 그림자가 점점 늘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