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나는 이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이 그림을 봤습니다. 짝사랑이 좋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나 라벨의 '물의 유희'를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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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한 장 본 적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여러 번 덧발린 회색이 꼭 그를 생각나게 했다. 담담하게 발린 눈들은 멀리 돌아 먼 숲을 비췄다. ‘유화’라는 단어에 으레 붙어 있곤 하는 거친 붓 느낌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복사본을 잘라내, 책 안에 담았다. 녹지 않은 길, 그 너머 쌓인 먹구름들은 꼭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의 겨울이었다.
목 끝까지 얼어붙은 계절을 겪다보면 그 뒤에 봄이 있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카게야마는 옷깃을 여몄다. 패딩 너머로 겨울이 스몄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겨울」과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는 먼 길에 있던 흰 나무숲을 상상하며 걸었다. 발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계절만 되면 그를 떠올리곤 했다. 카게야마의 겨울은 ‘그’와 마주닿아 있었다. 그에게 봄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끝에 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겨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그 일방적인 쌀쌀함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대용품이었다.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대신하는 편의점 초코파운드 빵이나, 눈이 내리는 모양을 흉내낸 스노우볼이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또 멀리 떠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조금 추웠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랭한 방이 그를 반겼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 정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카게야마는 화가의 이름 중에서 ‘알렉세이’라는 단어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다음을 쫓아오는 이름은 그에게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그 네 음절을 맘에 담아둔 것은,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 닮은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에게 의미 있는 계절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발 끝부터 톱밥이 차오름을 느꼈다. 겨울이 찾아올수록 속이 마모되는 것 같았다. 추위는 따듯함을 먹는 짐승이었음으로,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리 걸려있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겨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봄은 찾아오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겨울과 봄, 그 어드매의 ‘아무것도 아닌 계절’을 살고 있었다. 스페어 키, 스노우 볼, 싸구려 초코 파운드, 준초콜릿, 그는 자신과 비슷한 물건들을 나열하다 소파에 누웠다. 겨울 향기가 짙게 났다.
보자고 했으면서요, 카게야마는 뒤늦게 문자를 보냈다. 죄책감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었다. 그사람은 선배가 친구밖에 안 될걸요, 그는 괜한 말을 덧붙였고, 전송했다. 손가락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는 가끔씩 최소한의 온기마저 앗아간다. 뼈가 굳는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각이었으나, 이 계절에는 흔해 빠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먹구름이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회상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 다 읽은 편지, 낡아빠진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로 손을 쓸었다. 겨울이 쓸었던 자리였다. 그의 지문이 묻은 자리들은 미미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손끝은 따듯한 편이었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고장 난 메트로놈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나, 그 사람이랑 키 비슷해요. 완벽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선배보다 크니까요,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을게요. 당신 몸에 흔적 하나 내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와 당신이 봄을 찾을 때 까지만 날 이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카게야마가 서툴게 내민 손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잡았다. 그 또한 겨울날, 온기가 간절했을 것이었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기에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뒷모습, 그 발끝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카게야마 어느 날 스가와라가 흘리듯 했던 말을 반추했다. 이름에 그림자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 할 수 없었다. 웃었던가, 혹은 울었던가. 그는 그가 뒤돌길 그저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봄을 흉내 내는 계절이었다. 껍데기 같은 사랑, 박제품 같은 사랑, 카게야마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싸게 구한 복제품이지만 그 아득함은 깊게 담겨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나무 숲은 멀리 있고, 드문드문 자라있는 풀들은 색이 없었다. 그 끝없는 겨울, 그 짝사랑.
둘이 겪고 있음에도 이어지는 짝사랑. 둘이서 하고 있지만 혼자서 하는 연극, 모노드라마. 여러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연기, 그 향은 기억할 수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배구공이 손에 잡혔다. 그는 배구공을 위로 올렸다, 다시 받고 위로 올리길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니, 겨울이 겨울임을 알았기 때문에 봄을 자처했었나, 카게야마는 배구공을 아래로 내렸다. 공은 힘없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혔다. 꼭 저 같은 꼴이었다. 그는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방안에 외풍이 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찬 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속은 온통 톱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박제된 채, 틀린 방향으로 이어간 사랑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알렉세이가 그린 「겨울」에는 길이 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얇은 부분은 온전히 숲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고정된 길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겨울에게는 봄이 필요하다. 얼어붙은 제 몸을 녹이고, 따듯함을 찾기 위해선 봄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는 회전한다. 카게야마는 소파 등받이를 보고 돌아누웠다. 눈꺼풀에 먹구름이 올랐다.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얼어있는 채로 가만히,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다. 지독한 슬픔이었다. 유화에서 색을 만든 것처럼, 그의 사랑은 슬픔에 개어 캔버스에 여러 번 덧바른 채 겨울로 나타났다. 그는 입술을 쓸었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숨결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딪히지 않는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몸 위에 안개처럼 서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봄이 될 수 없었다. 혼자 누운 소파는 한 사람분의 슬픔을 담았다.
겨울이 돌아야 봄이 온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그 그림은, 스가와라의 짝사랑과 닮았던 그림은 어느새 카게야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걸음쯤을 앞으로 다가갔고, 액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깰 수 없었다. 던질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속삭였다. 사람의 바람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액자 뒤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액자 뒤편을 감싼 판, 그 판을 갈아 놓은 톱밥같은 것이 그의 목 끝을 답답하게 덮었다. 그의 그림자에 서리가 피어올랐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다시 속삭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