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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스가] 사랑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

:3c 2015. 1. 11. 22:26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오늘은 '커피'라는 주제였습니다. 

얼마 전 잡아 썼던 슈님의 소재가 '커피'와 관련되어 있기에 가볍게 후일담을 적은 느낌입니다.

이왕이면 '커피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를 봐주셨으면 좋겠지만, 보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원두를 덖으면서 생각했다. 불을 받은 원두가 향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원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그는 과거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스가와라의 첫사랑이었다. 그에게서는 지금처럼, 언제나 진한 원두 냄새가 났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스가와라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카페에서 시간 때우기’였다. 그가 신입생이던 시절에 카페란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어른의 향기가 나는 공간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가서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와 스무디 따위를 먹는 곳. 혹은, 편안한 비즈니스를 위해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 그것이 그가 가진 인식의 전부였었다.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원두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목소리가 좋았던 것도 같았다. 항상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의 그 신중한 손길, 그 손가락과 손등, 팔뚝으로 이어지는 굵은 핏줄 따위에 설렜던, 그런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확실하게 그 사람에게 반했었다. 그는 그 날부터 한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노부터 시작했다. 카페에 혼자 가고 싶다는 스가와라에게 동기 여자아이는 ‘에스프레소’는 라일락 이파리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커피였다. 고소한 커피 향과 다르게 그의 입맛에 아메리카노는 탕약처럼 다가왔다. 한 입을 마실 때 마다 소태를 먹듯, 얼굴을 찌푸리는 스가와라에게 그는 스틱 설탕 몇 개를 가져다 줬다.


   이거, 우리 가게에만 있는 건데 저으면 달아져요-였던가, 아니면 이거 요즘 유행하는 건데 적으면 녹으니까-였던가. 스가와라는 그가 개인적으로 내뱉은 첫 마디를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타인’이 설탕이 커피에 녹아드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는 그게 매우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했던 말 중에서 스가와라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인생은 커피, 커피는 곧 사랑. 그가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면서 종종 중얼거리곤 하던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이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는 것은 곧 하나의 원두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느냐’라고 다시 말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보다 로맨틱한 말은 자신의 인생에선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가 좋아하던 사람은 몇 해 전 결혼했다. 나한테 커피 알려줄 때는 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못 먹는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같은 꼴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스팅한 커피 향을 맡았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렸다. 그는 로스팅실의 유리벽으로 출입구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 소년’이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까마귀 소년’ 그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유리문을 열었다.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서늘한 인상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언제나 이 시간 즈음에 카페를 찾아오곤 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져지를 입고 있었다. 자기가 OB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을까, 스가는 다른 생각을 하며 그의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는 언제나 충실히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는 그가 이 커피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 모를 ‘까마귀 소년’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언제나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스가와라의 앞에 섰을 때는 제법 당돌하게 눈을 마주쳐 온다. 그는 천장에 달려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음, 하고 고민하는 척 하지만 결국 언제나 ‘늘 마시던 거요’라고 회귀하는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주문을 들을 때 마다 느와르 영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소년’의 느낌은 바에서 마스터,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단단한 성인 남자의 섹시함과는 달랐다.


   5월에 활짝 피는 라일락. 스가와라는 그 흰 꽃을 떠올렸다. 그는 풋풋했으며, 어수룩했다. 소년 특유의 다 자라지 않은 느낌이 몰아칠 때 마다, 스가와라는 ‘잔 안에 부는 폭풍’ 따위의 구절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진동벨과 카드와 영수증을 건넸다. 오늘 주문이 조금 많아서, 늦게 걸릴지도 몰라요. 그의 당부 같은 말에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지정석’으로 다가갔다. 그의 지정석은 해피트리와 키 큰 로즈마리가 있는 햇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스가와라는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둥그런 정수리가 귀여웠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가 카드에 하는 서명을 몇 번이고 유심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글씨를 해독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년의 사인은 매번 바뀌었다. 어느 날은 사랑 애(愛)가 들어가는 것도 같았고, 좋을 호(好)를 쓰기도 했다. 그림자 영(影)자 옆에 우산을 그려놓고, 그 옆에 근원 원(原)을 적기도 했다.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 유행일까. 스가와라는 오늘자 영수증의 ‘Suga r'라는 글자를 보면서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었다. 그의 마음속에 두근거림이 돋았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스가와라는 소년의 ‘싸인’이 의미 없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닌 척 시선을 돌리거나, 그 직후에 핸드폰의 액정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할 때, 그것이 그 나름의 소심한 표현이 아닐까 추측했다. 스가와라는 다른 손님에게 음료를 건네면서 자신이, 여전히 그의 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과 카운터 사이의 거리. 딱 그 정도가 그와 그의 마음의 거리였다.


   소년은 과묵하다와 서투르다의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쫓는 것은 오로지 스가와라뿐이었다. 그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몇 해 전 접은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 느낌에 간질거리기도 했고, 그가 다가와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소년의 눈길만으로 스가와라는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커피는 사랑, 원두는 어느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처럼 진해질 수도, 달달 해 질 수도 있으며, 그 위에 휘핑을 얹어 화려하고도 포근하게 사랑할 수도, 아이스크림에 뿌려 짜릿하게 변할 수도 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시키는 아메리카노가 자신을 향한 ‘돌직구 같고 정석적인 마음’이 아닐까 넘겨짚었다. 아직 씁쓸한 맛이 짙은 소년의 사랑에는 설탕이란 이름의 사랑이 폭탄처럼 짜릿하게 퍼져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짧게 웃었다. 그는 신경을 써서 물을 부었다. 소년은 여전히 스가와라를 보고 있는 듯,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햇살이 내리 쬐는 느낌마냥 간지러웠다. 스가와라는 자신 또한 ‘그 사람’에게 그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매일 소년에게 줄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속 안에 잠들어 있던 원두가 드디어 커피로 탈바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짝사랑도, 사랑도 아닌 애매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씨앗의 발아는 과연 자의적인 과정일까. 원두가 커피가 되는 과정 또한 자의에 의한 일일까? 스가와라는 두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햇살이라는 명백한 타의적인 원인과, 뜨거운 물이라는 원인을 떠올렸고, 그것이 카라스노 배구부 져지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시선과 닮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가와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원두가 커피가 되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그가 원인이었다. 스가와라는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얼굴에 김이 올랐다.


   스가와라는 진동벨을 눌렀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스가와라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그는 쟁반에 아메리카노를 올려 건넸다. 소년은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학생, 오늘도 물 탄 거요. 스가와라가 말을 걸자 그 떨림은 더욱 더 진해지고 있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웅얼거리기에 듣기가 힘들었다. 스가와라는 제가 더요, 하고 대답했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소년은 당황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에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그가 적어내던 ‘사인’의 의미와, 가끔씩 적던 우산 아래의 그림자 영(影)과 근원 원(原)이 어떤 몸짓이었는지를 알아챘다. 스가와라는 그러기에 더 그의 이름을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년이 자신에게 좀 더 다가오길 바랐다.


   스, 스가, 스, 하고 소년은 스가와라의 이름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려는 순간일까, 스가는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이 처음 설탕 스틱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그 사람의 첫 마디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이 당돌한 소년 때문일 것이다. 스가와라는 소년을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의 미소에 그는 더 당황한 듯 했다. 고작 네 어절인 이름을 소년은 어렵게 입에서 내려 했다. 그가 저는 말 마저도 스가와라는 설탕 같이 달다 생각했다.


   “슈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년의 어깨가 추욱 내려졌다. 스가와라는 그가 배구를 할 때도 이런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접고, 그에게 설탕 코너를 안내했다. 그 나름의 ‘밀당’이었지만 소년은 것두 못 알아차린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의 서투름이 귀여웠다. 그것은 스가와라가 처음 내리던 커피처럼 매우 볼품없는 도전이었지만, 결국 맛있어질 내용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그 느낌을 실컷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몇 번 만지다 다시 스가와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이름글자 하나 중 그림자 영(影)처럼 맹목적으로 다가오는 눈길이었다. 햇살만큼이나 집요한 그것은 명백한 사랑의 형태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커피가 조금 더 달달해지고, 휘핑이 올라가 폭신해질 순간을 기다렸다. 스가와라는 상쾌하게 웃으면서 카라스노 배구부의 소년에게 내어 놓을 서비스는 바나나가 좋을지, 오트밀 쿠키가 좋을지 고민했다.


    소년은 한 움쿰 집어 간 설탕을 모두 다 아메리카노에 넣고 있었다. 인생은 커피, 사랑은 커피. 스가와라는 자신의 인생관과 같은 카피를 입 밖으로 냈다. 곧 소년의 사랑도 달아 질 순간이 올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조만간 카라스노 배구부 소년이 당뇨에 걸리지 않도록, ‘섞어 나눠줄’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커피는 곧 딱 먹기 좋은 달달한 두 잔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앉아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