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커피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
카게야마는 늦은 일요일 낮에 하던 영화극장을 떠올렸다. 개봉한지 좀 된 외국영화를 더빙해서 틀어주는 코너였던 게 기억났다. 그는 느린 아침이 햇살에,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위로 내리던 먼지 우주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느린 템포의 느와르영화를 반주했다. 분명 상처 입은 남주인공은 바에 앉아있고, 공허함에 술을 마셨다. 그러다 그의 담배에 불이 붙고 성냥을 두어 번 털어 불꽃을 버릴 때, 한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남자의 옆에 당당히 앉고 이렇게 말했다.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카게야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색이 엷은 머리카락에 햇살이 비칠 때면, 그 때 보이던 먼지우주와 같은 반짝임이 보였다. 그는 스가와라 코우시, 라고 적힌 명찰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진동벨과 카드를 카게야마의 손에 돌려주며 주문이 밀려서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그의 웃음은 햇살 아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같이 상쾌했다. 카게야마는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 테이블 옆에는 해피트리와 쟈스민, 로즈마리 따위가 놓여 있었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해피트리 나뭇잎 사이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는 좀 섹시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남자의 옆에 삼각 글라스에 담긴 칵테일을 받아 앉는다. 그녀는 넓은 잔 입구를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쓸고, 그에게 애정과 사랑을 갈구하곤 했다. 카게야마는진동벨을 노려보다, 스가와라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살펴 보았다.스가와라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그게 조금 슬펐다.
카페에서는 얼마 전 유행했던 독립영화의 OST가 흐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 앨범을 좋아하는 듯 했다. 그가 있는 시간에는 꼭 이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다. 홀드 온, 홀드 온, 홀드 온, 하는 어린 목소리들이 반복되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이 음악을 좋아하느냐 묻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 하고 목소리를 냈다. 주문을 할 때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조금 더 ‘떨림’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소리였다. 카게야마는 아, 아, 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저기, 스가와라 씨는 이 음악을 좋아하나요? 그는 허공에 물었다. 작은 소리가 바람처럼 빠르게 흘렀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녹기 전의 설탕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 음악을 좋아하나요? 그가 다시 물었다. 열린 문에서 나온 바람에 로즈마리 이파리가 흔들렸다. 네, 좋아해요, 라고 대답하는 모습 같아서 카게야마는 괜히 뒷목을 쓸었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그는 멀리 보이는 메뉴판을 봤다. 스가와라의 붕 뜬 머리카락은, 그가 선반을 오갈 때 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메뉴판을 천천히 읽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바닐라라떼, 카페모카, 카게야마는 메뉴판에 적힌 커피이름들이 마치 ‘간장공장공장장’으로 시작하는 발음연습을 적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몇 주 째 마시고 있는 쓴 물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것’이라는 것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뒷맛은 깔끔했고 첫맛은 고소했다. 달달한 게 에스프레소보다는 훨씬 마실 만 했었다. 카게야마는 에스프레소를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간혹 명화극장에서 나오는 옛날 영화에서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있었다. 이러한 영화들에서는 신과 요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음향장치를 사용하곤 했다. ‘상투스’나 ‘울게 하소서’, 혹은 ‘리베라’ 같은 찬송가를 넣어 천사를 신성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몇 주 전 카게야마는 시간을 때우러 들어 간 카페에서, 아주 우연히 그러한 영화 연출을 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스무디처럼 보이는 하얀색 음료와, 휘핑크림을 쓰러질 것 처럼 올린 커피를 키 작은 여자에게 건네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카게야마가 스가와라를 처음 보았을 때 울리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투 테이크 어 스텝, 유 캔 테잌 백, 하면서 여자가 내뱉듯 소리쳤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와 눈을 처음 마주쳤을 때를 반추했다. 그것은 입 안에서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환상적인 일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그의 머리카락에 내리는 윤슬 같은 햇살과, 천사 같은 미소에 심장이 쥐여 짜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카페에서 그는 말 못하는 사람처럼 한참을 버벅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꺼낸 말은 ‘에스프레소’ 주세요,였다. 암호문 같은 메뉴 중에서 그나마 들어 본 이름이었으며, 뭔가 있어 보이고, 뭔가 가격이 싼 커피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앞에서 꽤나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커피가 쓴 데 괜찮으시겠어요?
―저 쓴 거, 잘 먹어요.
저 쓴 거, 잘 마셔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 때 말했던 부끄러운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작은 잔에 나온 커피 원액과 각설탕들을 떠올렸다. 각설탕을 무시하고 원액을 혀에 닿았을 때는 라일락 잎사귀만큼 쓴 맛이었다. 각설탕 두 개를 넣고 입에 에스프레소를 넣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콤함은 눈 깜빡할 사이에 녹았고 커피는 그의 입에 진득하게 남았다.
카게야마는 괴로웠다. 그는 해피트리 밑둥에 커피를 다 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그래선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그 때 강림한 것은 스가와라였다. 아메리카노로 바꿔 드릴까요? 그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청량했으며, 어색하지 않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입가에 댄 주먹 쥔 손까지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 느꼈다. 자신은 계속, 이곳을 들락날락하게 될 것이란 걸.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커피’의 이름을 몰랐고, 스가와라의 이름만 일방적으로 아는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언젠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상상을 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자신이 우물쭈물하는 게 아닐까 싶어 카게야마는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렇지만 딱히 급하게 잡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도 같았다. 그는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에 위치한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의 진동벨이 울렸다. 상대편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점프서브를 넣는 기분이었다. 그는 부자연스럽게 일어나 삐걱거리며 걸어갔다. 스가와라가 있는 카운터는 너무 멀었다.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학생, 오늘도 ‘물 탄 거’요. 스가와라가 먼저 그에게 말했다. 카게야마가 시뮬레이션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카게야마는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스가와라는 그의 웅얼거림에 되물었다.
카게야마는 당혹스러웠다. 그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지칭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라고 말하면서 끝이었을 거고, 카게야마는 달달한 ‘에스프레소에 물 탄’ 커피를 마시다가 스가와라를 관찰하기만 했을 거다. 평소와는 다른 템포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점프서브로 공을 홈-런 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 때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그,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힘들게 내뱉었다. 그의 말을 이제야 알아 들었는지 스가와라는 그의 쪽으로 접시를 내밀며 제가 더요, 하고 웃었다.
뭐가 더 감사하다는 걸까. 카게야마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는 좀 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을 사용할 때가 있다. 그는 지금이 스가와라의 목소리로 스가와라 코우시의 이름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서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저기, 하고 운을 땠다. 네, 하고 스가와라가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휘핑크림 위에 화이트초콜릿을 발라 생으로 입에 넣은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덜컥이는 것 같았다.
“스, 스가, 스., 그러니까 스,”
카게야마는 말을 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히나타와 함께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코트 위에서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혹은 친구들에게 이 멍청아! 하고 외치는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그’라는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처음 주문을 받을 때 처럼 성실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용기를 내려 했다. 스가와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묻고 싶었다.
“슈가 주세요.”
“네, 저기 앞에 셀프코너에 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용기는 허무하게 꺾이는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어깨를 축 내리고 접시를 들고 셀프코너 쪽으로 다가갔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의 무거운 한숨에 아메리카노가 흔들렸다. 그는 설탕을 한움쿰 집었다. 카게야마는 이걸 ‘물 탄 거’에 다 녹여서 당뇨로 죽고만 싶었다. 그는 몇 번 쯤 더 카페에 들락날락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떡벌어진 어깨가 쳐지는 게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뒤를 돌아 쿡쿡 웃었다. 커피 머신에 그의 웃는 얼굴이 스며들었다.
스가와라는 아직 저 고등학생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름을 알려고 포인트카드를 만들 걸 종용했지만, 그는 ‘슈가 주세요’, 라고 말할 때 처럼 버퍼링이 걸리고 계속 고민하며 눈을 굴렸다. 그의 단정한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볼 때 마다 스가와라는 로즈마리 이파리를 손바닥에 가득 쓸어 내렸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도 상큼하고 풋풋했다. 아마 그의 기분은 라일락 잎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씹는 느낌일 것이다.
아메리카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스가와라는 그래도 ‘설탕 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검정 머리카락의 카라스노 배구부 친구가 대견스러웠다. 언젠가 그의 단단한 목소리로 그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걸 상상하면서 스가와라는 설탕처럼 웃었다. 설탕은 매우 달았고, 혀에 들어오면 쉽게 녹아 달콤함을 퍼트리는 성질이 있었다. 마치 그가 불러줄 자신의 이름처럼. 스가와라는 그 때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따가 ‘카라스노 배구부의 검은 머리카락 소년’에게 내놓을 서비스는 바나나가 좋을지 오트밀 쿠키가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한숨이 다시 아메리카노의 표면을 적셨다. 녹지 않은 설탕은 여전히 그의 티스푼에 묻어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옛 명화극장의 영화를 생각했다. 항상 같은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의 갈구이며 시작인데 왜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는 설탕을 아메리카노에 녹이고 있었다. 금방 과포화용액이 된 그 달디 단 ‘물탄 것’은 오늘의 실패의 기억이었다. 카게야마 소년은 단 설탕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스가와라가 있는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소년의 첫사랑 맛은 라일락 이파리와 반대되는 진한 달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