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쿠니] 호흡
얼마 전에 철가면 님에게 달성표로 하나쿠니를 받았었습니다.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서 감상문 같은 느낌으로 써드리고 싶었는데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너무 풀리지 않아서 하이큐 글연성 전력의 '비' 라는 소재도 섞어보았습니다만..(말을 아낀다)
철 님의 감성이 너무 좋아서 쓰려고 할 때 마다 로그가 눈에 아른거리더라구요. 그 애절하고 절절한 나름의 짝사랑을! 녹이고 싶었는데! 저는 철님의 로그를 두 사람의 쌍방 짝사랑(하지만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없는)으로 봤는데 잘 봤는지 민망하네요 혹시 아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저장]버튼을 누르는 걸 몇 분 째 고민하고 있습니다.
연성에서 '하나마키 선배' 라고 말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는데, 어째 그 부분을 강조하질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철님께 과연 이 글을 태그해서 드려도 괜찮은 걸까, 아직도 고민중입니다... 아... 철님...사랑해요....
***
비 오는 날이었다. 쿠니미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이런 날에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를 생각했다. 아가미가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뻐끔거리고, 꼬리는 천천히 흔들거림을 멈춘다. 그는 그게 꼭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투박한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손톱 줄로 깔끔하게 갈아 다듬은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상처 낼 수 없는 그 뭉툭한 손톱을 보며 그는 조금 춥다고 생각했다.
그는 긴 팔 져지를 입었다. 감기기운이 있다는 핑계로 -눅눅한 공기에 숨을 쉬기 어려우니, 아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무리 연습을 하지 않고 부실에 박혀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가려는 요량이었다. 집에 바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쿠니미는 집에 가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모름으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납득했다.
부실 창에서는 간간히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물 먹은 공기는 그의 호흡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답답함에 목 끝까지 올린 지퍼를 내렸다. 그는 습기 찬 책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포스트잇을 사용해 표시해 가며 읽던 것이었다. 랭보의 시집이었다. 『나의 방랑』이라는 제목은 어항 밖을 빠져나온 물고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번뇌하며 책장을 넘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익히 들어왔던 것이었다. 쿠니미는 그 발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직 집에 안 갔네?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부실 문을 닫아줄 것을 요청했다. 하나마키는 그래, 하고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 밖에 비가 너무 심한 거 있지? 그가 말을 걸어왔다. 쿠니미는 책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꽃을 오래 보면 홀리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피기 시작한 벚꽃에 대해서 말했고, 쿠니미는 지고 있는 매화에 대해 대답했다. 그 꽃들은 일식과 월식마냥 피는 시기가 달랐다. 하나마키는 멍하니 있었고, 쿠니미는 그게 퍽 편했다. 꽃향기에 나비가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쿠니미는 그 당연한 사실이 불쾌했다. 그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책장에 손을 댔다.
분해된 언어는 더 이상 시가 아니었다. 언어보다 목소리는 더 강렬하기 마련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받은 고백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여자아이들의 러브레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이 꼭 시와 같다고 말했고, 랭보의 시집을 읽고 있던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대화는 세상을 끊임없이 적시는 빗소리처럼 의미 없는 것이었으나,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쿠니미는 창 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는 일어나서 커튼을 쳤다. 밖에 보이던 회색 세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 나한테 집중 안 하잖아. 쿠니미는 하나마키의 말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꽤나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오이카와 선배 보다 러브레터 못 받는 게 억울하단 이야기요.”
“아니, 억울하지는 않아. 이 하나마키 씨는 한 번 홀리면 실속 있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쿠니미는 그가 굳이 나머지 연습을 빼먹고 부실에 온 것에 의미를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설픈 기대는 사람을 망치기 마련이었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거 재밌어? 하나마키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마음을 심란하게는 하지 않네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하나마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쿠니미는 빗소리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붙잡았다. 그것은 뱀과 같이 탐욕스럽고, 잘 빠져나가는 것이라, 쿠니미는 제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그는 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참 재미없다. 하나마키가 말했고, 쿠니미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책에서 시선을 돌려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을 흔들며 윙크했다. 내 소년 팬에게 서비스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봄날 꽃잎처럼 가벼웠다. 그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가지처럼 무게감 없는 사람이었다. 쿠니미는 숨이 막힘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혹시, 과호흡이라도 있어? 들썩이는 쿠니미의 어깨를 보며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비가 와서요. 그는 그것이 퍽 멋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제 분홍빛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설설 쓸면서, 미조구치한테는 비밀로 하겠다고 말했다. 비밀, 비밀, 비밀. 쿠니미는 그 단어의 어감이 매우 무겁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말 없이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넌 나한테만 쌀쌀맞더라.”
“딱히 선배를 차별한 적은 없는데요.”
“하나마키 씨가 멋있는 건 인정하지만”
“멋있는 거랑 쌀쌀맞은 게 관계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당돌하게 눈을 맞추었다. 하나마키는 시선을 맞추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 듯 볼을 긁었다. 그의 머리에 있던 분홍색이 어느새 볼까지 내려왔는지, 그의 얼굴이 붉었다. 쿠니미는 그가 처음, 자신에게 내리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그는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빗물은 아직, 대기 중에 나온 물고기가 움직일 만큼 쌓이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것이 퍽 아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느끼는 자신을 경멸했다. 천국에서 지옥까지, 또 다시 지옥에서 천국까지. 그의 생각은 끊임없는 경멸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몰아갔다.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순리였고, 마음이 피는 것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느리게 호흡했다. 공기가 아가미에 가득 찼다. 어색한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입을 때었다. ‘짝사랑’에 대한 말이었다. 쿠니미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동물도, 어렸을 적도 안 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쿠니미는 착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하나마키의 눈동자는 알기 쉬우면서도 어렵다. 쿠니미는 자신의 지금 이 감정이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기에, 흔들려서는 안 됐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쿠니미는 침을 삼켰다. 침으로는 마른 아가미를 적실 수 없다. 그는 뭉툭한 손톱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것보다 뭉툭하고 단단한 손가락. 그는 그 투박함을 바라보다가 하나마키와 눈을 마주쳤다. 짝사랑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음. 그것은 모두가 내린 정의였다. 쿠니미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차피, 무서워 할 거면서 왜 그렇게 떠 보는 걸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았다. 한, 다섯 번째 첫사랑부터 이야기 할까요?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주먹을 쥐는 것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싫어하면서 왜 굳이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쿠니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시집을 덮었다. 랭보의 『나의 방랑』이었다.
하나마키는 ‘필사적’인 사랑에 대해 말했다. 쿠니미는 필사적인 방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자석의 S극이라면, 그는 N극이고 싶었다. 쿠니미는 자신의 마음의 지침이 향하는 곳을 애써 외면했다. 그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모습에 그는 더 안달나는 듯 했다. 하나마키가 듣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고, 쿠니미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좋아해요.
절대로 입 안에 담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이었다. 쿠니미는 메마른 대기에서 호흡했다. 하나마키는 열일곱 살 이후의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 애초에 ‘처음’은 단 ‘한 순간’이었다. 누구에게 처음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반복되며 변주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을 가지고 싶은 걸까, 쿠니미는 잔잔하게 고민했다. 침묵의 순간동안 그의 머리는 여러 가정을 했고, 헤어지는 상상만을 붙잡았다.
쿠니미는 시집을 덮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는 역시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하나마키 선배, 하고 나직하게 부르니 그는 떨리는 입술로 응대했다. 이렇게 놀랄 거면서 왜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쿠니미는 비 내리려는 마음을 억지로 비틀었다. 비가 내리면서도 내리지 않는 척. 그는 자신에게 고인 물웅덩이를 감추고자 했다. 쿠니미는 가방에 시집을 넣었다. 이제 슬슬 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는 것도 지쳤다.
“이상한 기대 하시는 거 아니죠?”
그런 농담 오이카와 씨도 안 하니까 그 쯤 해요. 쿠니미는 한 자 한 자 똑똑히 씹어 발음했다.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쿠니미는 시선을 돌렸다. 하나마키의 손가락은 망설이는 듯 방황했다. 그는 손을 쥐락펴락 했고, 엄지와 중지를 애처롭게 비볐다. 그는 그 손장난에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왜 불안 해 하는 건지 쿠니미는 알 수 없었다.
이 관계에서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건 오로지 쿠니미였다. ‘장난’의 이름으로 밝혀진다면 피해를 입는 것도 쿠니미였고, 그를 애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도 쿠니미 뿐이었다. 그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무례한 감정을 잘라내고 싶었다. 그는 무표정 아래 자신을 감추었다. 일 더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그가 말했다. 꼭 그는 마침표를 찍고 싶어 했다. 쿠니미는 그들의 관계를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남기고 싶었다. 비가 내렸으나 물은 고이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물 밖에서 천천히 꼬리를 움직이는 물고기였다. 쿠니미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아득한 일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동시에 좋아해서 젖어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쿠니미는 그것이 일식과 월식이 겹치는 일만큼, 혹은 비와 햇살이 겹쳐 파란 하늘에 내리는 여우비만큼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짙게 내리는 장마처럼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듯 했다. 쿠니미는 그 말을 녹였다. 여즉 내린 비에 만들어진 웅덩이에는 그 말을 가릴만큼의 공간은 있었다.
시작 안 했으니까, 아직이에요.
쿠니미는 뒤를 돌았다. 그는 부실 문을 열었다. 그는 처음의 순간이 너무나도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첫 호흡의 순간은 아가미를 찢는 듯 했고, 그가 들어있던 안락한 세계를 사정없이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는 방황하며 문을 닫았다. 세계의 단절, 그 전 하나마키의 모습은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쿠니미는 그 숙여진 어깨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저에게 거는 말이나 애원은 아니란 것이었다. 쿠니미는 어느새 비가 그친 밖을 바라보았다. 땅에 있는 웅덩이에는 벚꽃 잎이 고여 있었으나, 아직 꽃이 다 지지는 않았다. 쿠니미는 물이 고인 땅을 디뎠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진하게 들려왔다. 그는 물웅덩이를 밟으며 호흡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눈, 가장 깊은 곳에서도 비가 내렸다. 그는 제 맘에서 뻗어나간 화살표를 찾고 싶었다. 맑게 갤 날이 없는 마음에 자꾸만 먹구름이 쌓였다. 쿠니미는 계단을 내려갔다. 뒤늦게 나온 하나마키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코를 킁킁거렸다. 소낙비가 빠져나간 하늘은 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