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2015. 3. 15. 22:59
언제나처럼 섹피AU입니다. 벌써 네번 째 글이네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매번 적는 것도 번잡스러워, 카테고리를 구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섹피 AU는 :3 카테고리에 올라옵니다^//^!!!! 뭔가 일을 크게 벌리는 것도 같지만 상관 없지 않을까요!
오이카와랑 쿠니미는 합이 좋다고 생각해요. 오이카와의 딸 같은 쿠니미가 좋습니다. 섹피AU에서 둘은 냉혈동물 사촌지간입니다. 예전부터 앗쨩과 토오루라고 불러온 탓에 호칭을 교정하느라 나름 애 먹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
"그래서 그 날 맛키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쿠니미의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끓는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닿았다. 잼을 만드는 것은 쿠니미의 오랜 취미였지만, 오이카와는 그가 부엌에 있는 광경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귀한 집 도련님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란 나이는 부엌에 있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부엌방문을 명백히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는, 부엌에서 쿠니미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잼을 졸인다'는 쿠니미의 취미는 불을 사용하는 놀이였다. 그의 여린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맨 검은색 앞치마 리본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코끝 까지 밀려오는 단 향기에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쿠니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바닥이 보이는 레몬청을 꺼냈다. 다시 만들어 병을 채워야 했다. 이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레몬청 국물과 레몬 몇 가닥을 딸기가 졸여지는 냄비 안에 아낌없이 넣었다. 그렇게 하면 맛있어? 오이카와가 물었고 쿠니미는 응, 하고 대답했다.
"너무 달면 먹기 불편하니까."
"그 말은 앗쨩이 맛키를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 할 수 있나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레몬청을 딸기 과육과 잘 섞었다. 그는 과육이 부서지지 않게 신경 써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저번 사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끈질긴 말이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좌우명인, '치려면 꺾일 때 까지 때려라'를 떠올렸다. 그는 지나치게 끈질겼고, 쿠니미의 인내심은 의외로 얄팍했다.
하지만 그 날, 쿠니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오이카와가 흥미로워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급하게 밖으로 나간 다음, 가로등 아래서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하나마키에게는 숫기가 없었고, 쿠니미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이야기를 진행 할 의지가 없었다. 쿠니미는 이 맥 빠지는 사건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질 고민했다. 그의 고민처럼 잼에서 보글보글, 작은 거품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소녀처럼 기대했고, 쿠니미는 그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는 기분을 양껏 느꼈다. 오이카와는 둘이 손 하나 잡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너희 합숙 때는 끌어안고 있었잖아!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일은 명백한 사고였어요.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기대감을 꺾어버리며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플라스틱 볼에 담았다.
쿠니미는 그 때를 떠올렸다. 하나마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따듯한 체온이 번져왔고, 그의 옆모습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오이카와 씨는 둘이 키스라도 할 줄 알았어. 그는 마법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한숨 쉬었다. 쿠니미는 얼음 볼에 차가운 물을 담았다. 잼이 다 졸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닌걸요."
"하지만 쿠니미야, 너 맛키 좋아하잖아."
"글쎄요? 배구부 안에 도는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면 토오루도 알고 있다시피 그냥, 농담이잖아요."
쿠니미는 별 일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뜨거운 냄비를 얼음물 위에서 식혔다. 쿠니미는 예쁘게 씻어놓은 유리병 세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네 거.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거야? 오이카와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킨타이치라도 주려고?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잼이 식어 병 안에 들어갈 때 까지 오이카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쿠니미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진지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보면서 쿠니미는 '제 편 만들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정략결혼 하기 싫어요? 쿠니미가 뜬금없는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오이카와는 절대 하기 싫다면서 식탁 위에 엎어졌다.
결혼은 온혈동물이랑 하고 싶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야기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정략결혼 상대나, 지금 애인이나 둘 다 포유류라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는 냄비를 들어 수건 위에 놓았다. 물기를 잘 따르고 쿠니미는 딸기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숟가락으로 잼을 떠서 병 안에 넣었다. 허공만이 차 있던 유리병에 붉은 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쿠니미야."
"네, 토오루."
"그 '농담'에 기분 나쁜 적은 없었지?"
오이카와는 제법 날카로운 곳을 찔러왔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대답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마키 씨는 제법 멋있는 선배잖아요. 쿠니미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골라 썼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쌜쭉 내밀었다. 하나마키 씨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쿠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쿠니미는 냄비를 물에 담갔다. 다음 잼을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냄비를 꺼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냄비였다. 우유와 생크림이 냄비 안에 가득 담겼다. 쿠니미는 그게 느리게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처럼, 혼합물의 온도는 천천히 오르기 마련이었다. 오이카와는 딸기잼이 들어있는 병 세 개를 바라보다가 하나마키가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완전히, 실수 한 것 같은데 어쩌지. 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주어도 실수의 대상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오이카와는 그게 쿠니미 아키라를 의미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잡은 손, 어둠의 장막이 내린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싶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느낌이었니?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말한다면 로마의 휴일 같은 느낌이었겠죠, 하고 대답했다.
"지루한 느낌인가?"
"토오루, '로마의 휴일' 본 적 없죠?"
"그렇지."
나 흑백영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니미는 끓기 시작한 우유와 생크림에 티백을 넣어 우려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았다. 언제 한 번 봐 봐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어째 짐작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짙은 장막 너머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마키 씨가 시켰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게 수상하다고 말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홍차가 우러나는 색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눈치도 빠르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 보았다. 그 날에 있던 이야기는 무덤 까지 가져갈 거에요, 쿠니미는 놀리는 듯 말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뱀처럼, 그는 모든 질문을 유연하게 피해갔다. 이런 '밀당'으로 사교회에 꾸준히 나갔으면 벌써 결혼 하고도 남았다면서 오이카와는 혀를 끌끌 찼다.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오이카와가 내뱉는 질문들 보다, 그에게 선물할 잼이 더 중요했다.
쿠니미는 티백을 꺼내고, 새 티백을 넣어 우렸다. 그는 설탕을 부었다. 하얀 설탕이 갈색에 진하게 녹았다. 쿠니미는 숟가락으로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설설 저었다. 잼 만드는 거 재밌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녹아들어 고체로 굳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숟가락에 잼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그는 설탕을 더 넣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것도 맛키와의 사랑에 적용 할 수 있는 말인가요?"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녹아드는 설탕을 바라 볼 뿐이었다. 얼그레이 잼을 만들 때의 포인트는, 설탕과 홍차와, 우유와 생크림이 캬라멜 화 되지 않도록 천천히 저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칭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모두 무시했다. 약한 불에서 액체는 천천히,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그레이 잼을 담을 그릇을 고민했다. 전해줄지 말지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왕 줄 거라면 예쁜 그릇이 좋았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을 찾아 쿠니미는 찬장을 열었다. 병 위쪽에 레이스 모양을 한 종이를 둘러야 할지, 혹은 만든 날짜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를 붙일지, 쿠니미는 깊게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위한 포도 잼을 만들어 달라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쿠니미는 포도는 없다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까 맛키가 얼그레이 스프레드를 좋아한다던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예요?"
쿠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만들어 주라는 뜻이잖아! 라며 되려 화를 냈다. 쿠니미는 그의 모든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급한 불은 잼을 태우기 마련이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제 앞에 붙은 불이나 끄라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잼이 느리고, 또 느리게 끌어 올랐다. 잼이 다 되면 오이카와는 식빵을 굽자고 말했고, 쿠니미는 이미 바게트를 사 놓았다고 잘라 말했다.
흰 바게트 위에 올린 딸기잼은 최고야, 오이카와는 반드시 무염 버터에 구워달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금새 달아오른 손을 찬 물에 툭툭 털면서 그러겟다고 대답했다. 계속 불 앞에서 냄비를 저었던 지라, 손이 화끈거리게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하품을 했다. 왜, 만들었을까. 약간의 후회가 그의 잼 안에 풍덩, 빠져 유영했다.
***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하나마키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라커룸 안에 있던 세 개의 유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병에 붙어 있던 단정한 글씨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마키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어줍잖게 넘겨 짚었다가 실수하기 싫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다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기도 싫었다. 그는 잼 병을 쓰다듬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것은 쿠니미었다. 하나마키는 머릿속에 든 망상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쓸모 없는 일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얼굴을 쓸었다. 그 날 밤도 그런 실수를 했다. 이름 모를 정원수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에서, 그는 쿠니미를 흰 벤치에 앉혔다. 달은 동그랬고, 둘이 나눈 이야기들은 의미없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사소한 말 속에서, 하나마키는 바게트가 좋다는 말과, 그 위에 잼을 바르고 계란을 반숙 프라이해서 올리는 걸 사랑한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매우 소박한 식단을 보며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뿐이었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도 모자랄 타이밍에서 거나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 문제였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야 한다던 그 때의 강박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남자아이 앞에 처음 선 것처럼 행동하던 자신을,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뛰는 심장을 넥타이로 누르고, 잘 맞는 정장으로 옭아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나마키는 딸기 잼과 얼그레이 잼, 레몬청을 끌어안았다. 쿠니미야, 나 어떡하니.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부끄러운 말이 들려왔다. 사교회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그의 번민이 문가에 서 있었다. 쿠니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마키가 안고 있는 세 개의 잼병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가득 차 있는 잼과 청은 레이스 모양의 종이와, 제조일자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로 장식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그 것을 흥미롭게 보는 듯 했고, 하나마키는 죽어버리고 싶었다.
여자한테 받았어요? 인기 많네요. 쿠니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는 변명하려는 자신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 쉬었다.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하는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누가 물어 봤대요? 쿠니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봄 날씨는 따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잡아줄 수도 없는 포근함이 번져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지 않았다. 쿠니미는 락커룸을 열었다. 하나마키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락커룸에 유리병 세 개를 넣었다. 한숨 밖에 쉴 수 없는 아침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얼굴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하나마키는 자신이 내린 답을 쿠니미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건 그의 전공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괜히 옷을 갈아입고 먼저 라커룸을 나섰다. 뒤에서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도 같았지만, 그는 눈부시게 부서지는 아침이 보여주는 환청이라 생각하며 얼른 코트로 나섰다.
하나마키가 나간 자리에 오이카와가 인사하며 들어왔다. 쿠니미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제 만들었던 거 다 맛키 거였지? 오이카와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감추는 것도 재미 없을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하나쿠니] 어느 밤 (0) | 2015.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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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점심시간, (0) | 2015.02.26 |
[하나쿠니] 아침 (0) | 2015.02.25 |
:3 | 2015. 3. 12. 01:03
아침 과, 점심시간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간보는...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여시 같은 쿠니미와 은근히 눈치 있으면서도 둔한 하나마키 씨가 좋습니다...☆★
***
“그래서 오늘 같이 갈 거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상 위에 놓여있는 두 장의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 너머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수면 위에 비가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축 젖은 연잎과 나무수국을 바라보다, 쿠니미는 나가기 싫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똑부러지는 의사표현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라, 오늘 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주면 안 돼? 오이카와가 물었다. 나 냉혈동물이라서 이런 날 밖에 못 나가요 토오루, 하고 쿠니미는 능숙하게 넘어갔다. 누가 뱀 아니랄까봐, 하면서 오이카와는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사촌 형의 부탁 정도는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혈연을 이용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귀찮은 남자였다.
쿠니미는 다 식어가는 핫팩을 꼭 쥐었다. 하늘이 꾸물거리고 비가 몇 방울 떨어질 때 받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오늘은 꼭 가면 안 되냐면서 쿠니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설설 쓰다듬었다. 나 체온조절하기 힘들어서 밖으로 못 나가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자신도 악어라고 대답했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키라야,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도 안 가요.”
“너 지금 내가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오이카와 씨는 모르는 게 없어.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쿠니미는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의 오이카와와 달리, 그는 사교회가 귀찮았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배구보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잘생긴 이마가 드러났고, 쿠니미는 엄지와 중지를 튕겨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왜 가기 싫어하는 건데? 오이카와가 물었다. 귀찮잖아요, 쿠니미는 다시 대답했다. 그는 예쁘게 차려입고 웃는 자리가 취향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 우리 엄마 같은 소리를 한다, 라는 그의 말에 쿠니미는 오이카와 또한 제 엄마 같은 소리를 말한다면서 받아쳤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자리를 불편해 하는 걸 잘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사교회에 나올 것을 권하곤 했다. 쿠니미는 그게 오이카와 나름의 친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류 사회에서 결혼과 연애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다분히 품은 도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쯤이면 선자리가 설설 들어올 테니, 그 전에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다는 것은 쿠니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답지 않게 연애결혼 하고 싶은 거야?”
“답지 않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말 그대로라고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그는 그의 불퉁한 입술을 두어 번 더 잡아당기고는 조금만 있다 가겠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골라주겠다고 신이 나서 말하는 사촌형을 바라보다가, 쿠니미는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꽤나 추울 것 같았다. 그는 핫팩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핫팩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다 식은걸 뭐 하러 쥐고 있어? 중종 악어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고, 흰뱀 중종은 그의 표정을 따라하면서 손이 심심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핫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다 식은 핫팩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요.”
“정말?”
쿠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놀라 되물었다. 쿠니미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는 게 너무 귀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오이카와 씨의 친사촌동생이며 뱀목이라는 것을 대신 말해 달라 했다. 오이카와는 별로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 말하면서 웃었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일어났다. 정장을 골라주겠다는 말에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곤해? 그의 말에 쿠니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피곤함을 감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사촌동생의 모순 된 말과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한 옷방으로 발걸음 했다. 쿠니미는 의욕 없이 그의 발자국을 쫓아 갈 뿐이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하는 건 싫다. 쿠니미는 반짝거리는 조명을 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몇 사람이 그에게 말을 붙여왔고 그의 옆에 있던 오이카와는 그 대신 자기소개를 했다. 모임에 꾸준히 참석 해 왔는지, 오이카와는 사람무리 속의 중심처럼 이동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베란다 안에 기대어, 환한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많은 인파를 천천히 관찰했다. 다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이미 여며진 재킷을 쓸었다. 코트를 하나 더 입으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들었어야 했다. 쿠니미는 회장 한 가운데서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빛에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파티장 구석에서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명처럼 반짝이는 오이카와를 놓치기 싫다는 듯 굴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하품을 했다.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눈길을 끌만한 반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일 연습을 좀 더 성의 있게 설렁거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해야 했으나, 그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인기인은 괴롭다고 생각하며, 쿠니미는 제 목을 옥죄고 있는 보타이를 풀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는 파티장 안을 돌아보았다. 멀리, 튀는 머리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하나마키였다. 쿠니미는 그의 혼현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 넣었던 보타이를 꺼내 천천히 맸다. 일찍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회장에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뱀은 원래 눈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서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자 오이카와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쿠니미에게 몰렸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소개할게요, 라고 운을 띄우는 경쾌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이제부터 소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엮어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 뒤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마키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까이 하지 말자, 라는 말은 쿠니미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그는 식어버린 핫팩을 생각했다. 파티장 구석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우습기만 했다. 쿠니미는 가볍게 눈웃음 쳤다. 하나마키의 앞에 있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면서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를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쿠니미에게 대상이 누군지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웃기는 질투심이었고, 반항심의 발현이었다. 쿠니미는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귀찮은 일도 감수해야만 하는 때가 오는 법이었다. 쿠니미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온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촌동생인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
어느 밤, 하나마키 타카히로의 기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에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섞인 명백한 불쾌함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키, 하고 부르니 하나마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년 동안 그를 겪어왔음에, 오이카와는 그의 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란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그의 눈길의 끄트머리에는 짙은 붉은색 보타이를 맨 쿠니미가 있었다. 신경 쓰여?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
“애인이 신경 쓰여?”
“맛키 씨는 솔로인데요?”
하나마키는 즉각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니미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오이카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가 내 애인이에요?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배구부 안에선 아예 공인이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맛키는 쿠니미가 싫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었으면 저렇게 안 놔뒀다는 고지식한 말이 뒤따라왔다. 싫지는 않은가 보다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가득 즐기면서 키득거렸다. 쿠니미가 공중에 옅게 친 거미줄에, 하나마키가 덥석 걸린 꼴이었다.
“예쁘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 잘 맞는, 투 버튼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이었다. 교보을 입었을 때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마키는 활발하게 웃고 있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나마키는 곤란하게 웃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 마다 철벽을 치면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저런 모습의 그 보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미미하게 멈춰있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마키가 모르는 중종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웃고 있었다. 백합처럼 우아하고, 프리지아처럼 수줍은 모습이었다. 그는 태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오는 게 아니었어, 하고 넋두리처럼 말하자 오이카와는 오지 않았어도 불안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분명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체크 할 거잖아?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하면 말이라도 걸러 가 보는 건?”
“그럴까.”
하나마키는 계속 쿠니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렇게 밝게 웃는 쿠니미에, 하나마키는 적응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살짝 몸을 틀었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손을 흔들자, 쿠니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쿠니미는 자신이 이야기 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서, 천천히 하나마키의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마키는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유연하게 걷는 고양잇과 동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혼현이 눈처럼 하얀 뱀이라는 것을 하나마키는 가끔 잊곤 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눈을 맞추고 눈웃음 쳤다.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지는 눈에, 하나마키는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애매한 소유욕이 천천히 번져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웃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그는 쿠니미의 손목을 잡았다. 선배? 하고 묻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쿠니미는 잠시 놀란 것처럼 얼어 있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그의 이름을 똑바로 말했다.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추울 것 같은데요.”
“괜찮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에, 하나마키는 그의 혼현이 여우였던가를 잠시 고민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둘에게 잘 다녀오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이카와 씨도 변온동물이라서 밖에 따라가고 싶진 않거든, 이와랑 놀러 갈 거야. 그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이끌었다. 오이카와가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품안에 가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향수 뿌렸어? 그의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좋은 향이 난다는 칭찬에는 선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마키는 자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하나마키는 그를 천천히 에스코트했다. 쿠니미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 구두라도 신은 것 마냥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신은 구두 굽에서 꽤나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나마키는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타카히로 씨는 핫팩 같네요. 쿠니미가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만 그래. 하나마키는 그 말을 애써 씹어, 삼켰다. 말이 들어간 위가 더부룩했다. 하나마키의 표정을 보던 쿠니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웃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후배의 당돌한 선언에, 하나마키는 애써 웃어 보였다. 쿠니미는 느릿하게 웃었다. 비온 후의 꽃이파리처럼 예쁜, 모습이었다.
[하나쿠니] 밤, 그리고 아침 (0) | 2015.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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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점심시간, (0) | 2015.02.26 |
[하나쿠니] 아침 (0) | 2015.02.25 |
:3 | 2015. 2. 26. 00:40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아침' 이라는 글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쿠니가 얼른 연애했음 좋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약일까요.... (오열)
***
삼학년 층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항상 원 플러스 원 세트상품처럼 묶여 다니던 배구부 일학년 레귤러 중 하나인 킨타이치였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킨타이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고, 킨타이치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더니 쿠니미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왜?”
“어디서 자고 있을 것 같아서요.”
킨타이치는 체온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그는 합숙 다음 날 꽤나 늦게 일어났었다. 하나마키는 다 알고 있다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뱀은 이래저래 불편하네, 하나마키가 흘리듯 말하자 킨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는 아이스팩을 잊지 않고 챙겨줘야 하고, 겨울에는 핫팩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하자, 하나마키는 그런 몸으로 배구를 할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그는, 어쨌든 하고 있긴 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킨타이치의 어깨가 으쓱이는 걸 보면서 하나마키는 자신도 찾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역시 쿠니미 ‘애인’ 답네요, 킨타이치가 요즘 배구부 안에서 도는 농담소재를 섞어 말했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브이를 그려 보이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겨울과 가을 사이에 있는 바람이 제법 쌀쌀맞은 날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느긋하게 들어 낮잠을 자기 좋은 날이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킨타이치가 삼학년 층에 올라오면서까지 쿠니미를 급하게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느긋하게 걸었다. 종이 어떻게 되었든 결국 하나마키는 ‘큰 고양잇과’ 동물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넓은 교정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결국 ‘강아지’인 (물론 킨타이치는 중종 늑대개였다.) 킨타이치가 쉽게 찾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하품을 하며 교사 뒤편에 있는 ‘신데렐라 계단’으로 다가갔다. 마법이 풀리기 전, 그녀가유리구두를 벗어가며 내려오던 그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공터가 나왔다. 높은 나무가 별로 없는 그 반원의 작은 정원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하나마키는 사교회에서 만난 ‘동문’에게 들어 알고 있던 곳이었다. 그는 쿠니미가 그 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비밀의 정원’의 분위기와 쿠니미는 퍽 닮아 있었다.
그는 신데렐라 계단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너 온 곳에는 익숙한 공주님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182cm라는 키가 무색하게, 그는 얌전히 의자에 수납되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는 것은 고양잇과 동물에게는 하품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는 풀 밟는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벤치 뒤편에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여름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그만큼 햇볕이 강하게 든다는 소리였다. 하나마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쿠니미의 옆에 앉았다. 그의 고개는 앞, 뒤로 까딱거렸다. 차라리 벤치를 전부 사용해서 누웠으면 편했을 것을, 그는 일부러 불편하게 자고 있는 듯 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 쯤 깨기 위해서일까, 하나마키는 하품을 하며 쿠니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고왔다.
하나마키는 언젠가의 하교길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요즘 수업 시간에 깨 있는 게 힘들어요, 하는 목소리는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체력이 남들보다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다가 체온까지 불규칙하니 운동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체질이 아니었다. 귀한 집에서 귀한 손으로 자라서 온실에서 길러져야 할 도련님 같았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햇살 향이 났다.
그는 쿠니미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틈만이 그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로 옮겼다. 진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그는 꽤나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래서는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 또한 놓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엮었다. 팔짱을 낀 다음, 그의 손을 잡았다. 혼자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뱀은 두 손으로 잡아도, 능청스럽게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 흰 뱀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먼저 깨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그는 쿠니미의 손을 꽉 잡았다.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잠이 그렇게도 좋은지 쿠니미는 반응 하나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숨소리를 간간히 들으면서 목 안으로 웃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아, 그는 입 속에서 내내 머물던 말을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은 햇살 향을 가득 머금고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목에 이를 박고 사냥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뭔가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고, 소유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이 들쭉날쭉한 마음을 참아보기로 결심했다. 뱀은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하나마키는 하품을 했다. 점점 햇살이 그에게도 녹아오는 것 같았다. 고양잇과 동물과 변온동물의 유일한 공통점은, 따듯한 햇살 아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둘의 목적은 제법 다르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타나는 행동은 같았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은 느낌이었던지라,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합숙에서 끌어안았을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예민한 코끝을 간질였다.
찾으면 바로 알려달라던 킨타이치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평소의 쿠니미라면 절대 30cm 이하의 거리감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 변덕 심한 동물이 얌전한 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대부분이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하나마키는 흑표범이었다. 그는 목 끝으로 다시 웃었다. 햇살은 진하게 내리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애매한 추위에도 볕은 따듯했다. 어깨에 기댄 쿠니미가 새삼스럽게 예뻐, 하나마키는 눈을 감기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든 그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주잡은 손을 괜히 바라보았다. 깨기 전 까지는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잠에서 깨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말할까. 나 손 안 잡고 잤는데 네가 자면서 잡더라, 너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네가 안 놔줘서 수업에 늦었잖아, 따위의 말을 생각하면서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햇살처럼 졸음이 느릿하게 몰려왔다. 잡은 손으로부터 온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이 마음을 자신의 후배가 얼른 알아줬으면 했다. 실실,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목 끝에서 고롱고롱 퍼져나왔다.
***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에 쿠니미는 눈을 떴다. 잠시 점심시간에 눈을 붙이려던 게,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것 같았다. 목이 뻐근해서 그는 목을 양 옆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누가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옆을 돌았다. 익숙한 선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합숙 첫날밤이 자연스럽게 번져와 쿠니미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들었다. 지금 하늘에 걸쳐져 있는 것과 퍽 닮은 것이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주황이 들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쿠니미의 것보다 뻣뻣한 머리카락이었지만 만지고 있는 느낌은 좋았다. 그는 언제나 소리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고양이의 특징이라 하지만, 쿠니미는 그가 이렇게 다가 올 때 마다 불안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치는 모든 방어기제를 차근차근 녹여가고 있었다.
합숙 때도 그랬다. 엉겨오는 180 넘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는 성실하게 꼬리까지 엮어 오며 그를 안심시키고 체온을 나눠 주었다. 사람에게 나눠 받는 체온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고, 날이 쌀쌀해질 때면 그가 생각났다. 쿠니미는 이 사실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선배에게 의지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체온 조절 같은 사적인 문제 까지 도움 받고 싶진 않았다.
뱀은 불편하다. 변온동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체온을 조절하려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했다. 쿠니미는 차라리 여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사람보다는 아이스팩에 의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가을과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그리웠다. 핫팩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사무치곤 했다. 쿠니미는 괜히 그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개성있게 잘 생긴 얼굴이 무너지는 게 제법 웃겨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계속 이러고 있었다면 어깨는 안 아팠을까, 쿠니미는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윙스파이커 선배의 안위를 걱정했다. 자주 쓰는 손인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는 게 아쉬웠다.
쿠니미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예쁘다고 어깨를 빌려주고 체온을 나눠주는지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하나마키는 간간히 쿠니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후배와 선배 사이의 ‘좋아함’이라는 단어로 이런 헌신을 설명 할 수 있는 걸까,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에게만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자고 있는 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목에서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긁었다. 중종이라고 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라,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제법 귀여운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일어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마키를 설설 밀었다. 그는 잠귀가 의외로 밝은 지, 얼른 눈을 떴다.
“잘 잤어 허니?”
하나마키가 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쿠니미는 잡은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가리켰다.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쿠니미를 깨우러 왔는데 말야, 날 너무 좋아했는지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거 있지-로 시작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쿠니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나마키 또한 그의 손마디에 힘을 주었다. 연인들 끼리 하는 손장난과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놓아 준 하나마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배구부 연습에도 늦었다는 말을 꺼냈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쿠니미의 팔을 하나마키가 잡아 당겼다. 그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으슬으슬해 지는 기온에 그는 짧게 떨었다.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추워? 하고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강한 팔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의 체온은 적당히 따듯했다. 겨울에는 내가 필요할 것 같지? 그는 능청스럽게 물어왔다. 손난로보다는 좋은 것 같네요, 쿠니미가 건성으로 대답 한 말에 하나마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쿠니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 지고 있었다. 너 아까 나 잘 때 목 쓰다듬었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어깨 안 아파요? 쿠니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반대편 손을 어깨에 얹고 몇 번 돌리더니 유연해서 괜찮다는 말을 꺼내왔다.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마요, 쿠니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왜?”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하나마키는 또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떤 의미의 좋아함인지 물어보려다가, 쿠니미는 말을 말았다. 그의 말이 멈춘 걸 알았는지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하나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교복 재킷을 벗어 쿠니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하나마키의 향이 강하게 났다. 꽃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고, 따듯한 햇살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나마키는 그에게 팔짱을 꼈다. 선배? 하고 행동의 경위를 묻자 하나마키는 그저 ‘춥잖아’ 하고 대답 할 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금은 의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르는 척 하나마키의 손을 잡았다. 하나마키가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 느끼면서 쿠니미는 애매하게 웃었다. 참으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마키의 손은 가을과 겨울의 과도기마저 잊을 정도로 따듯했다.
[하나쿠니] 밤, 그리고 아침 (0) | 2015.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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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어느 밤 (0) | 2015.03.12 |
[하나쿠니] 아침 (0) | 2015.02.25 |
:3 | 2015. 2. 25. 22:52
트위터에서 풀었던 하나쿠니 섹피au의 한 장면을 옮겨왔습니다. 리얼 한 장면이라서 그른가 레알 짧네요...
아 하나쿠니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늘’했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오이카와나 마츠카와가 질 나쁜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옷 아래로 파고드는 손을 느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가장 베스트일까, 하나마키는 쫄보로 보이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 대담한 손길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자는 척을 해야 할까, 그는 망설이며 몸을 뒤척였다.
손은 그의 배에서 멈추었다. 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하나마키는 어제 누구의 사이에서 잠들었는지를 기억하려 했다. 그의 왼쪽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는 핫팩과 침낭으로 중무장한 오이카와의 옆에 있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변온동물의 보모는 이래저래 귀찮은 역할이었다. 하나마키는 구석자리에 누운 친구를 생각하려 노력했다.
배앓이를 할 것 같았다. 손은 좀처럼 뜨거워지려 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벽처럼 자리했음으로 오이카와는 아니었다. 하나마키는 슬쩍 눈을 떴다. 의외의 사람이 그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두텁게 친 (마츠카와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햇빛을 직접 받는 걸 싫어했다.)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살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떨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손을 쥐었다.
쿠니미였다. 언제나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연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투명한 그의 피부 아래로 뱀 비늘이 언뜻언뜻 비쳤다. 하나마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는 후배의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쿠니미의 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누가 새벽에 보일러를 끈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혀를 찼다. 전혀 반류인 것처럼 보이지 않던 그의 예쁜 후배는 변온동물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불을 들추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의 두꺼운 잠옷 아래에서 뱀 꼬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그 매끈한 하얀색을 보다가, 얼른 자신의 이불을 겹쳐 그에게 덮어 주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 아래로 춥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쩐지 애처로워 하나마키는 그를 얼른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몸이 얼음장 같았다. 그의 하얀 피부에 비늘이 간간히 번져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쿠니미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이 좁아져 있었다. 뱀과 비슷한 눈이 커졌다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춥지?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팔 안쪽에 그의 머리를 대게 했다. 쿠니미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아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얇은 허리를 제 다리로 감았다.
경계심 많은 후배는 떨어질 법 한데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꼭 기계의 ‘절전모드’ 같아서, 하나마키는 일부러 그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그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지 말라는 말 또한 나오지 않았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반응들이 돌아오지 않는 기분은 신선했다. 그가 내뱉는 숨이 가슴에 가쁘게 닿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바로 아래의 목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애인이 반류면 이런 재미가 있겠구나. 하나마키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고양잇과 동물의 체온은 다른 동물보다 더 따듯하다. 하나마키는 흑표범 중종이었다. 따듯하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울자울 한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장난치는 맛이 있었다. 정작 눈 앞의 하얀 뱀은 정신이 없는 듯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졸음과 함께, 따듯한 벤치에서 간간히 낮잠을 자던 쿠니미의 모습이 밀려왔다. 가까운 기억이었다. 그는 항상 햇살을 받고자 했다. 교복 위에 겉옷을 몇 겹씩 껴입던 모습 또한 이해가 됐다. 따듯해서 기분 좋아? 하나마키의 말에 쿠니미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예상외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선배, 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하나마키가 물었다. 고개를 젓는지, 눌린 팔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게, 저요, 비늘이요, 그러니까, 하면서 쿠니미는 머뭇거렸다. 반류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같은 변온동물인 오이카와가 핫팩이니 침낭이니 뭐니 하면서 부산을 떨 때, 얌전히 열선이 있는 보일러 자리를 차지한 걸까 싶어서 하나마키는 짧게 웃었다.
품속의 쿠니미는 잔뜩 굳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더듬다가, 제 혼현을 내었다. 그는 짙은 검은 꼬리를 하얀 뱀 꼬리와 엮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자, 하나마키가 느긋하게 말했다. 쿠니미의 머리가 품 안에서 움직였다. 꼬물거리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품 안에서 똬리를 튼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토닥였다.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 같아서 하나마키는 코를 묻어 킁킁거렸다. 선배, 하고 나지막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싫을 법 한데도 얌전히 안겨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무심하고 애어른 같은 구석이 있는 후배의 의외의 면이었다. 얼음장 같던 몸이 서서히 온기를 머금어갔다. 그 느낌이 너무나도 포근해, 하나마키는 문득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오는, 그런 아침이었다.이대로 다시 잠이 든다면 아침 내내 놀림감이 될 게 확실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제 가슴에 쏟아져 내리는 숨결을 가만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번 일 때문에 엮여서 커플 취급을 받게 된다면 나름 ‘이득’이었다. 쿠니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하나마키가 기억하기로, 그는 이런 놀림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하나마키는 오늘 저녁에는 같은 이불에서, 이불 두 개를 덮고, 같이 자자는 제안을 할까 고민했다. 추운 걸 싫어하는 이 변온동물이 어떻게 대답할 지 상상하는 것은 나른한 아침의 즐거움이었다. 하나마키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는 것 마냥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선배, 하고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문득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에 두른 손을 때었다. 꼬리를 풀고, 그의 허벅지에 올려둔 다리를 내리려 하자, 쿠니미는 다급하게 하나마키 선배, 하고 불러왔다. 그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쿡쿡 웃었다. 그는 다시 그를 제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이런 모습 처음이야, 하면서 달콤하게 중얼거린 말에, 쿠니미는 이런 모습 보여주는 게 처음이라고 툴툴댔다. 참,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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