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5. 3. 29. 22:31
저희 집 앞 정류장, 횡단보도의 신호가 꼭 저렇게 바뀌던데, 왜 저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되게 시적이라고 생각합니다:3c 너무 좋아서 불안 해 하는 오이카와가 좋아요! 슈가도 슈가 나름대로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비슷한 소재로 다뤄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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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정류장 앞 횡단보도는 이상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앙선을 기준으로 왼쪽 신호등이 먼저 켜진다. 어물어물하게 십오 초쯤이 지나면 맞은편 신호등도 초록불이 된다. 이 때 먼저 켜진 왼쪽 신호는 여전히 초록불이다. 언뜻 보면 양 쪽 신호가 한꺼번에 켜지고, 한꺼번에 빨간불이 되며, 좌회전 신호가 켜지는 신호등 같기도 했다.
결국 먼저 깜빡이는 건 좌측 신호였다. 파란 불빛이 깜빡, 깜빡이며 빨간 불이 켜지기 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속삭였고, 우측 신호는 여전히 쨍한 초록색을 머금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 광경을 꽤나 좋아했다. 또 가물가물하게 십오 초가 지나면 두 신호는 동시에 깜빡인다. 늦게 흔들리는 것은 우측 신호등이었지만 언뜻 보면 둘 다 동시에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다 서고, 또 제각각의 목적지로 떠나는 광경만큼 이 풍경을 좋아했다. 그는 좁은 별에서, 조금씩 의자를 뒤로 물려가며 계속 석양을 바라봤다는 어린왕자를 떠올렸다. 어린왕자는 몹시 슬플 때 석양을 바라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어린왕자』의 ‘나’는 작은 소년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마흔 네 번이나 석양을 본 날, 너는 몹시 슬펐니?
이 질문에 어린왕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대편 정류장 너머로 넓게 퍼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건널목에서는 신호등이 깜빡였다. 반짝, 반짝 거리면서 점멸을 뜻하는 좌측 신호등과 대조되게, 우측 신호등은 가만히 서 있다. 곧 빨간불이 되려는 좌측을 모르는 탓이었다.
완벽한 평행에서 서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노을과 같은 색의, 빛바랜 중앙선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 신호가 깜빡이는 걸 바라보았다. 왼쪽이 빨간색이 됐는데도, 오른쪽은 미련을 남기고 반짝였다. 반짝, 반짝, 그리고 반짝, 반짝. 그는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는 그것이 퍽 사랑이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멋없는 은유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연인을 떠올렸다. 그는 가끔씩 그 사랑을 생각하면 노을처럼 아련해지곤 했다. 그의 웃음은 상쾌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닮았고, 성격은 온유한 밤하늘을 닮았다. 져가는 해와 퍼져가는 노을은 스가와라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오이카와는 간혹 그를 노을에 비유하며 우울해지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을 전화로 시작하고, 끝을 스마트폰 메신저 대화로 장식했다. 간간히 먹은 것이나,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즐거워했다.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는 의외로 먼 곳에 있었지만 마음이 멀다고는 한 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혼이 날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엇갈리며 켜지는 신호등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좌측 신호’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깜빡이는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면 어쩌지. 오이카와는 불안함에 손을 까딱였다. 미련이 남은 우측 신호도 결국엔 붉은 불을 담는다. 그는 스가와라가 끝을 말하는 광경을 생각하고 소름끼쳐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파랑’이여야만 했다.
종점이 ‘농수산 시장’인 버스 여러 대가 그를 지나쳤다. 스가와라가 했던 비유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말야, 사랑이 종점에는 없다고 생각해. 오이카와는 그 말에 짧게 몸을 떨었다. 나는 버스, 너를 태우고 지나가고, 너는 언젠간 내리게 되어 있는 거지. 정류장에서 환승할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 거기서 곧장 집으로 가던, 올라 탄 버스에 주구장창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그치?
오이카와는 ‘그치’를 발음하며 눈웃음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그는 핸드폰의 메신저를 켰다. 스가와라는 귀여운 스티커와 함께, 조금 남았다는 말을 남겨놓았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너무나도 좋아하게 되면 이런 점이 불편했다. 항상 끝을 가정하고 불안해 하다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다. 오이카와는 스쳐 지나갔던 버스들을 떠올렸다. 그네들은 언제나 오이카와의 끝이 더럽다고 말하곤 했다.
사랑에 찌질 한 건 당연 한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노을은 정류장 너머 하늘에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어느새 너무 좋아져 버려서 불안했고, 불안함 때문에 슬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봄의 한가운데였지만 아직 저녁은 추워서, 그는 아오바죠사이의 져지 재킷을 여몄다. 이번에는 헤어지기 싫었다. 둘 다 켜져 있는 초록불로 평행을 유지하고 싶었다. 언제나 버스에 타고 순환노선을 빙글빙글 돌고만 싶었다.
이런 불안감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더 좋아하면 지는 거라던 연애 격언을 떠올리면서 오이카와는 푸스스 웃었다. 그에게 할 말을 여럿 고민했다. 나 이제 다음 정류장이야, 하고 스가와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이카와는 어서 오라고 재촉했다. 그 재촉 끝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반대편 정류장에서 멈춘 버스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내리는지 초록 버스는 잠시 동안 머물렀다.
버스가 신호를 받아 사라지는 그 순간에 오이카와는 저 너머에 있는 스가와라를 발견했다. 잘 모르는 곳에 내려서 두리번거리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그는, 큰 소리로 코-우-시- 하고 소리를 냈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신호등 앞으로 다가갔다. 오이카와는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하고 싶은 수백 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었다. 그는 그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의 앞을 버스 몇 대가 스쳐지나갔기에 스가와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 짧은 순간이 영화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말에서 파생되는 여러 사랑을 떠올리다가 신호등 앞에 섰다. 아직 빨강인 신호, 동시에 바뀌는 하얀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신호등 사이에 서서 그들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해야 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색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건널목 너머에 연인이 있다는 게 괜히 부끄러웠다.
스가와라는 왜- 하고 소리쳤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스가와라 또한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다시 그 끝을 당겨 웃고, 다시 땅을 보다가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좌측 신호가 먼저 켜졌다. 오이카와는 제 심장소리를 세었다. 콩, 콩 거리는 맥이 열다섯 번쯤 뛰었을 때 우측 신호가 초록이 되었다.
―여기 신호 이상하게 바뀐다, 그치?
스가와라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꼭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수백 가지 밀어들과, 수천 가지 두근거림이 빠르게 휘발되기 시작되어 가장 전하기 부끄러운 한 마디만 남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가지런한 손이었다. 나 배고파,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먼저 걸었다. 스가와라는 그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머릿속이 이래저래 복잡했다. 하지만 꼭 말해야만 했다. 오이카와는 모든 불안감을 그 단어에 꾹꾹 눌러 담았다. 멀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그는 입술을 먹었다. 스가와라는 여즉 아까 그 신호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듣고 있어? 하고 그가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그게 사랑을 담은 은유 같지 않느냐 말할 뻔 했다. 지금 그가 품고 있는 불안감을 들키긴 싫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타이밍을 못 잡겠어. 오이카와의 말에 스가와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줄 게, 그는 상쾌하게 말했다. 밤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사랑해.”
오이카와는 모든 좋은 말이 휘발되고 나서 남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새삼스럽게,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 쉬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은 절대 제가 말할 리가 없다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기 니 사는 덴데 괜찮누? 스가와라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좋아하니까 잡는 거라면서 투덜거렸다. 그것도 몰라? 바부, 오이카와의 목소리 끝에 스가와라의 청량한 웃음이 걸렸다.
아직은 두 신호등 다 초록색을 먹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올라 탄 버스가 순환버스이길 바랐다. 그는 굳이 깜빡임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찾아 올 종점과 다가올 빨간 불은 길을 건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음으로. 오이카와는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새삼스럽게 부끄럽다는 스가와라의 말과, 그 끝에 걸린 웃음이 그의 손바닥을 괜히 간질였다.
―이번 벚꽃 4월 4일 경에 핀대.
오이카와는 괜히 말을 돌리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나 그 날 시간 괜찮아.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이번엔 자기가 가겠다면서 허둥댔다. 스가와라는 언젠가 동물원에서 벚꽃 야간개장이 하면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오이카와는 환하게 피는 꽃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들은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길가 정류장에 버스가 다가왔다. 아무도 내리지 않은 버스는 정류장을 지나쳐 속도를 내, 다음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가가 너무 좋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알고 있어. 대답은 오이카와가 품고 있는 무거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볍고 상쾌하며, 뿌듯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이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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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22. 22:18
첫사랑은 감기처럼 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가른 전력에 '감기'라는 주제로 참가한 글입니다:3c 카게야마는 은근히 눈치가 없다 보니까, 자기를 짝사랑하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지나갈 것 같기도 해요. 추억 속에서 '그 때 선배가 좀 이상했었지' 정도의 의식으로 받아들일 것 같기도 합니다.
***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약속장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가지에서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졸업하던 봄에도 같은 게 피었었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미야기의 벚꽃이, 도쿄의 그것과 별로 차이 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쉬운 일이었다. 뭔가 더 변해 있을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머쓱하게 목 뒤를 쓸었다.
고향에서 맞이하는 봄은 간만이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와, 포털사이트의 팝업창이 떠 있었다. 요즘 감기는 독하대요, 오늘은 일교차가 크니까 주의하세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손가락을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쉽게 사라지는 팝업창에 이끌려 예전의 기억이 불쑥 찾아왔다.
스가와라는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올 봄에 돈다는 것처럼 독한 감기였다. 그의 질병은 여름 인터하이가 끝나고 도쿄에 갔을 때부터 시작했고, 그가 졸업 할 때 까지 내내 걸려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땀에 젖은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가만히 있다가도 열을 내던 그 감기를 떠올렸다. 봄벚꽃 같은 홍조가 내내 볼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아팠기 때문에, 자신이 주전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 생각을 했다. 그는 졸업식의 선배를 떠올랐다.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드는 순간은 갑작스러웠다. 감기 바이러스는 여러 종류가 있었고, 스가와라를 반 년 가까이 괴롭히던 것은 변종 같았다. 잔뜩 붉은 얼굴의 그에게 카게야마는 물었었다.
―아직도 감기인가요?
그 말에 스가와라는 대답했다. 응, 감기가 아직도 안 나았나봐.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 그가 그렇게 내뱉자 둘 사이에는 바람이 일었다. 따듯한 봄바람이었다. 꽃샘추위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고, 다만 벚꽃 잎들만 하릴없이 흩어질 뿐이었다. 졸업의 순간, 그 ‘끄트머리’에서 카게야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있어서 항상 어른이었다. 그렇기에 조언을 하기에도 난감했고, 배구가 아닌 진로를 가는 사람에게 괜히 말을 꺼내 심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카게야마에게 스가와라는 좋은 선배였고, 멘토였지만 정작 그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의 모든 일상이 배구를 기준으로 해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고, 스가와라가 감기를 이유로 그에게서 한 걸음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의 품에는 카게야마가 건넨 꽃다발이 있었다. 급하게 산 물건인지라 장미 이파리의 가장자리에는 검게 탄 자국이 있었다. 장미 다섯 송이의 중심에는 사탕 하나가 들어 있었고, 안개꽃이 풍성하게 들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스가와라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좀 더 수수하고 청순한 게 어울렸다.
자신과 맞지 않는 꽃다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 워, 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 울림이 아쉬웠다. 그 순간 봄바람이 스가와라의 색 옅은 머리카락으로 꽃이파리를 몰고 돌아왔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 온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꽃잎을 떼 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때, 스가와라는 두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볼에는 홍조가 들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선배? 하고 작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서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흔들리는 벚꽃잎 같은 모습이었다. 카게야마가 그와 어설프게 눈을 맞추니, 스가와라는 환하게 웃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감기에 걸려서, 갑자기.”
카게야마에게 목소리가 꽃처럼 돋아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건드렸다. 색이 들어 있는 안개꽃은, 하얀 꽃망울과 함께 모르는 영어가 적힌 크라프트지로 쌓여 있었고, 투명 포장지와 종이를 한데 묶은 남색 리본이 심연처럼 흔들렸다. 그 때 스가와라가 안고 있던 끄트머리가 탄 장미가 신경 쓰인 까닭이었다. 카게야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가 어느 쪽에서 걸어올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꽃향기에 기침했다. 그는 괜히 메뉴판을 넘겼다. 스가와라는 아직 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제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열심히 가고 있다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에는 눈썹이 예쁘게 휠까. 카게야마는 그게 궁금했다.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 스가와라는 여전히 과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동안 만나보지 않은 탓이었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감기에 걸려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조를 때도, 혹은 갑자기 오는 봄처럼 연락을 받아 만날 수 있을까 물어볼 때도 그는 언제나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그것이 과연 핑계일지 변명일지, 혹은 진실일지 카게야마는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스가와라를 걱정 할 뿐이었다. 감기에 걸리면 평형감각이 없어진다. 그는 그가 땅에 발을 잘 붙이고 사는지 궁금했다.
맑은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저에게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그의 짙은 눈썹은 예쁘게 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부스럭거리는 꽃다발을 그에게로 밀었다.
카게야마? 하고 말하는 것으로 스가와라는 꽃다발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했다. 카게야마는 몇 해 전 있었던 졸업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는 잠시 커피를 주문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의 발걸음에 미미한 기침이 달라붙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피가 나오기 전, 그 짤막한 시간에 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떨어져 있던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들의 대화는 스무스하게 이어졌다. 카게야마는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 보다 환한 웃음이었다. 뭔가 밝아지신 느낌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스가와라는 마음을 정리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마음을 정리했는데요?”
“그건, 비밀이야.”
스가와라는 긴 검지를 입술에 댔다. 카게야마는 그 광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먹어도 그는 고등학생 남자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커피가 테이블에 서빙 될 때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도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부는 바람에 벚꽃잎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이내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가와라는 그의 핸드폰 속을 바라보다가, ‘D’라는 알파벳 옆에 붙은 숫자에 관심을 가졌다. 카게야마는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짤막하게 말했고, 스가와라는 조금 울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된 마음으로 감격스러운 걸?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자작하게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그가 그렇게 기뻐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뭔가 어린애에서 졸업 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주어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에, 카게야마는 그 말이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카게야마의 애인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소식이 있느냐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나 보다 네가 먼저 애인이 생길 줄 몰랐어,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볼을 붉혔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스가와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숨은 무거웠고,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
카게야마가 먼저 운을 땠다. 스가와라는 응? 하고 물었다.
“감기는 좀 괜찮으세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몇 년 동안이나 감기에 걸려서, 애인을 사귈 여유도 없었지 뭐야. 스가와라의 웃음은 매우 상쾌했다. 카게야마는 쾌차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감기’는 사실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잠시나마 스가와라의 질병을 의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스가와라는 그 후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음으로 오히려 더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카게야마는 침묵을 유지했다. 딱히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밀어준 안개꽃을 바라보았다. 안개꽃의 꽃말을 아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됐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카게야마는 예전부터 하곤 했던 생각을 내뱉었다. 스가와라가 하는 말을 100% 이해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했다는 그의 엉뚱한 말을 들으면서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카게야마는 언제나 어린 애 일 거야. 스가와라는 안개꽃을 보면서 말했다.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안개꽃의 피지 않은 것 같은 꽃망울들과, 창 밖에 흐드러지게 날리는 벚꽃을 보다가,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저가, 눈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한참이나 보다가 웃어 보였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다 안나았나봐.”
“선배?”
“감기 말이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엺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병원에 가보는 건 어떻느냐 물었다. 그는 병원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뒷목을 쓸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손목과, 그의 목소리가 유달리 얇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열병이 휩쓸고 난 자리에는 재밖에 남지 않는 법이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 스가와라는 잔잔하게 말했다. 테이블 위의 커피 잔, 그 안의 수면이 애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쾌차를 빈다고 말했다. 그 단단한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앓을 힘도 없다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음이 꽃가루처럼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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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15. 22:29
스가른 전력에 [사탕]이라는 주제로 참가했습니다.
오이카와를 짝사랑하는 슈가 군이 보고 싶었습니다 ^//^!!!! 남자답게! 서툴게! 고등학생!답게 짝사랑하는 슈가가 좋습니다. 사랑은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오이스가 연애 해~ 사랑 해~!!!
***
첫 홍삼사탕의 기억은 ‘리시브는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다’는 설교를 마친 후였다. 오이카와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말을 한 다음에 멋있게 뒤를 돌았고 몇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다 넣었을 때 쯤, 그는 후두부를 무언가가 자신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멋없게 다시 뒤를 돌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봉지를 들었다. 검은색 포장지에, 붉은 홍삼이 그려져 있었다. 난데 없는 ‘홍삼사탕’의 등장이었다. 그가 어리둥절 하면서 홍삼캔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자, 까마귀 무리에 있던 한 사람이 소리쳤다. 아까 벤치 쪽에 있던 멤버였다.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홍삼사탕의 달짝지근하고 늘그수레한 맛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오히려 상쾌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이카와는 사탕으로 맞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다시 뒤를 돌았다. 스가 선배 후두부 서브는 너무하잖아요, 하면서 스님 머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까마귀 쪽에서 들려오는 여러 목소리들은 팝콘 같은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뒤를 돌았다. 까마귀들은 무리지어 교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탕을 던진 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상큼하게 늙은 군. 상큼-늙은군. 애늙은이군. 오이카와는 그의 애칭을 고민하면서 뒤를 돌았다. 포지션이 어떻든 코트 위에서는 통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노을이 그의 머리카락에 진하게 들었다.
오이카와가 두 번째 홍삼사탕을 받은 것은 연습시합 때였다. 여름 인터하이가 시작되기 전에 ‘카게야마’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 싶다는 감독의 고집 때문이었다. 같은 지구에 있는 상대와, 인터하이 한 달 전에 연습시합을 하는 건 ‘불문율’을 어기는 행위였지만, 연습시합은 의외로 쉽게 성사되었다. 아오바죠사이는 3세트를 해서 두 번 연달아 이겼고, 그 ‘상큼 군은 연습시합의 스코어보드를 넘기는 역할이었다.
여전히 리시브가 약하다면서 카게야마를 보며 웃자, 얼굴을 찌푸리는 건 ‘상큼-늙은’군이었다. 그는 툴툴 거리면서 서브를 넣는 폼을 취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비닐봉지는 그의 이마를 정확히 강타했다. 허둥지둥하며 손을 밑으로 내려 받으니, 그 곳에는 ‘홍삼 사탕’이 있었다. 여전히 늙은 취향이었다. 오이카와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스가와라 선배! 카게야마는 그의 뒤를 곧장 따라 갔다. 오이카와는 그의 건방진 후배를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뒤를 쫓아갈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취향이 늙은 상큼한 소년’의 이름이 ‘스가와라’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손에 홍삼 사탕을 쥐어주었다. 이와는 쉬는 날에 방에서 배만 지지고 있는 늙은 취향이니까, 이런 거 잘 먹지? 라는 말과 함께.
이와이즈미는 그의 가슴팍에 홍삼 사탕을 던졌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웃음을 터트린 가운데, 오이카와는 자신의 가슴에서 떨어지는 사탕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저번에 ‘받은’ 홍삼 사탕을 먹지 않은 채였지만, 왠지 챙겨가야 할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짐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스가와라’를 회상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리시브가 약하다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싫나 짐작 할 뿐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세 번째 사탕의 기억을 떠올렸다. 역 앞 분수대에서 받은 물건이었다. 상쾌 군도 약속 있어? 라고 묻는 말에 응 있어, 하고 대답하면서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그것 또한 먹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사탕을 받을 때 마다 기분이 멜랑콜리 했다. 그저 스가와라가 그 사탕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짐작 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걸 주는 건 날 좋아한다는 뜻인가? 오이카와는 철없이 생각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홍삼 사탕’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고, 하나마키는 좋아했다면 좀 더 상큼한 걸 던졌을 거라고 대답했다. 마츠카와는 그래도 그 홍삼사탕 군이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고, 쿠니미는 어찌 되었든 그걸 먹지 않는다는 건 오이카와가 상쾌 군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다.
신경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섯 번째 홍삼 사탕을 만졌다. 역 앞 분수대에서 세 번째 사탕을 받은 그 날, 그는 네 번째 사탕도 받았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둘은 옆자리에 앉았다. 별 이야기를 할 사이가 아니었기에, 둘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Maroon 5의 ‘Sugar'를 듣고 있었고, 그의 이름에 들어가는 ‘스가’가 ‘슈가’와 비슷한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내린 건 ‘홍삼사탕 군’이었다. 그는 내리기 전에 주머니에서 손을 꼬불거렸다. 그는 후드 집업의 주머니에서 검은색 사탕을 꺼냈다. 예의 그것이었다. 너 이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오이카와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너 진짜 눈치 없구나,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을 때, 버스가 멈췄다. 스가와라의 대답은 ‘환승입니다’ 라는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오늘 받은 홍삼사탕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경기가 끝나고 받은 것이었다. 그는 버스에 타기 전 홍삼사탕을 건넸다. ‘서브’가 아니라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오이카와가 내민 두 손에 그는 사탕 여러 봉지를 쏟아두었다. 나 홍삼 사탕 싫어해, 오이카와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새로운 종류의 이지메인가요? 그가 눈치 없이 물었고, 상큼 군은 멋대로 생각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홍삼 사탕이라니 너무하잖아.”
“너무 해?”
스가와라는 그의 말꼬리를 잡고 샐쭉 웃었다. 그 동안은 낱개였는데, 지금은 왜 봉다리 채인데? 오이카와가 다시 물었다.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그들의 머리카락에 들어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정수리가 둥그렀고, 얼굴은 좀 붉은 것도 같았다. 지기 시작한 해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단박에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의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야 다른 사탕은 여자애들이 많이 주잖아? 스가와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나도 상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눅진거리는 홍삼젤리, 홍삼사탕의 느낌이 났다. 너 꼭 이거 같아. 오이카와가 말하자 스가와라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홍삼 사탕이야? 오이카와 씨는 우유 맛이 좋아.”
“그 편이 기억하기 쉬우니까?”
스가와라는 즉답했다. 오이카와는 어? 하고 물었다. 스가와라는 다시 똑똑히 말했다. 그 편이, 기억하기 쉽잖아. 그의 말은 노을처럼 느리게 오이카와에게 퍼지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보다 스가와라는 멀리 멀어져 있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 하면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그는 두 손에 가득 담겨 있는 홍삼사탕을 하얀 져지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그의 주머니가 잔뜩 울퉁불퉁해졌다. 스가와라는 여자애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는 입술을 쌜쭉하게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그가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스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다 갈게, 라고 그는 크게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 울림에서 마룬파이브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음들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그의 눈앞에 있는 ‘슈가’가 입을 땠기 때문이었다.
“홍삼 사탕은 스가와라 코우시이다.”
너 내 이름은 알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시인 건 지금 알았어. 그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진작 알려줄 걸 그랬다면서 웃었다. 여전히 상큼한 느낌이었다. 여름 한 가운데서 부는 바람 같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뭔가 자신이 대단한 말을 했다는 듯, 오이카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의 메타포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너무 어렵게 돌려 말했다.
“나 잘 모르겠어.”
“뭐, 별 할 말 없으면 간다.”
스가와라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그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기 스가 쨩, 하고 부르니 그는 지체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의 말은 입 안에서 머뭇거렸다. 맛없는 홍삼사탕을 혀 위에 올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갈 거야!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이 홀가분해 보였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핀치 서버로 나갔었던 첫 번째의 연습시합부터, 다섯 번의 홍삼사탕을 받을 때 까지 그는 나름의 은유를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스가와라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이 비유를 직관적으로 알아 챌 수 없었다. 멀어진 스가와라의 키가 더더 작아졌을 때 까지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그가 뒤를 돌았다.
야! 오이카와! 하고 악을 쓰는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어!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건강히, 잘 지내시나요!’를 외치던 절박함과 닮아 있었다. 그는 야구의 와인드 업 포즈를 취했다. 오이카와는 몸을 살짝 숙이고 두 손을 꽃처럼 펼쳤다. 포수의 미트 같은 손에 스가와라는 정확히 뭔가를 꽂아 넣었다. 먹어!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또 홍삼사탕이겠거니 싶었지만 잡히는 모양이 달랐다.
츄파츕스였다. 홍삼사탕과 딸기우유 맛 츄파츕스 간의 거리감에 오이카와가 당황 해 있는 사이, 스가와라는 멀리 달려가 버렸다. 검은색 유니폼 무리들이 파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오이카와의 뒷덜미를 이와이즈미가 잡았다. 오늘은 수거 물품이 적다?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져지 주머니 속의 홍삼 사탕을 보여주었다.
걔도 참 한결같다. 이와이즈미는 혀를 툴툴 찼다. 오이카와는 손에 쥔 딸기우유 맛 사탕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참 달았다. 매번 홍삼만 주더니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입에 넣은 사탕 꼭지를 잡아 뺐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섞인 달달함이 그의 입 안에 여즉 남아 있었다. 홍삼보다 꼭 세 배쯤 달달했다. 그 날 그는 내내 홍삼사탕과 딸기우유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쾌 군이 깨물어 먹은 사탕의 잔여물처럼 남아있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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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9. 00:18
권태롭고 지루한 오이스가가 보고 싶었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이에요. '꽃샘추위'라는 주제를 받았었습니다.
***
봄이 왔다. 바라던 봄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리벽 너머의 거리에서,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유연하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다가, 숨을 내쉬었다. 잔에 담긴 커피의 수면이 흔들렸다. 꼭, 저 같은 흔들림이었다.
이번 봄은 춥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너무 따듯하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역시 뜨겁지 않았다. 그의 수려한 외모는 요즘 들어 수척해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많이 말랐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의미를 가진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상 힘든 일이었으나, 그는 반드시 그러고 싶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늦게 오느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약속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안해, 오이카와.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말간 미소였다.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모습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지리함이 단순한 권태라 믿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청춘이 퇴색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미성숙한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에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 권태라는 단어에는 이 미련들을 다 넣을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찻잔을 보면서 오이카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이카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예전처럼 뜨겁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스가와라는 쉽게 대답 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권태'나 '익숙해짐' 이라는 익숙한 단어들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이 헤어짐의 전초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는 종말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매끈했던 입술이 꽃피는 봄 잠시 찾아 온 추위에 터 버리는 과정과 같았다. 언제나 상처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는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무게있는 걸 생각했다. 네 번째 약지에 끼워져 있는 커플링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변기에 넣고 내리는 상상을 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쏟아지는 물에서도 백금 반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지루한 사랑에서 퇴색되지 않는 것은 그 반지 뿐일지도 모른다. 미약한 반짝임과 부질없는 약속을 매일 성실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에는 잡초가 자란지 오래였지만, 이미 습관이 된, 그 행위는 멈추기 힘들었다. 사랑보다 습관적인 것은 일상이며, 그 일상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게 돕는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 함께했던 모든 비일상을 떠올렸다.
같은 성별, 같은 지역 출신. 이 두 가지 단어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비일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제법 열렬하게 사랑했다, 스가와라는 사랑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따듯하게 내리쬔 햇살에 드러누운 고양이가 보였다. 복슬복슬한 꼬리는 끊임 없이 아스팔트를 때렸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 같았다. 사랑 또한 저렇게 귀찮은 과정을 동반한다.
사랑을 하면서 잃어버린 일상을 복구하려면 얼마의 시간을 들여야 할까. 오이카와는 의외로 궤도에 쉽게 정착할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잔을 매만졌다. 잔 안에 들어있는 음료는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영원히 뜨거운 것은 없음으로 그들의 사랑 또한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 라는 말을 스가와라는 입에 머금었다.
놀랍게도, 어색했다. 이 말을 처음 쓰지 않았던 날이 언지였던가. 스가와라는 천천히 반추했다. 카페 안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다섯 번 쯤 끝을 고했을 때야 그는 그 시작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목이 뻐근했다. 숨이 찼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말이 그의 목에 천천히 매달렸다.
익숙한 권태일 거야. 가끔식 찾아오는 거고, 봄에 귀속된 꽃샘추위 같은 거지.....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어. 나는 여전히 코우시를 좋아하고, 너도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의 그도, 저번 주의 그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벚꽃 같은 소리였다.
한참 몽우리진 꽃망울을 시샘하기에 하늘은 바람을 보낸다. 피기 전에 흐트러지는 봉오리라기에 자신들은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별을 준비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먼저 집을 구할 것이다.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작은 원룸으로. 가스레인지 구가 두 개 정도 되는 부엌이 있고 햇볕이 간간히 들어오는. 그는 상상해오던 미래에서 천천히 오이카와를 뺄셈했다. 꽃망울이 한없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미성숙함이 털어졌다.
혼자 있는 집은 외로웠다. 그는 자신이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사실을 더했다가, 다시 뺐다. 그 조건을 충족하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별 한 후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시 공상을 시작했다. 알알이 나눠진 설탕가루가 솜사탕이라는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그의 상상은 천천히 몸을 불려갔다.
그는 창문에 묻은 물방울 자국을 바라보았다. 비가 온 후 남은 자국이었다. 신문지로 닦아내는 상상을 하다가, 스가와라는 아스팔트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듯했으나 고양이가 누운 자국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창 너머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 모습에서 스가와라는 난데없는 꽃샘추위가 왔음을 떠올렸다.
올 봄은 춥다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때의 꽃샘추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절이 지나면 언제나 따듯한 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여전히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모습이었다. 스가와라는 고양이가 떠나버린 아스팔트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눈에 담다가 그는 떨어지는 벚꽃망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같이 한 권태만큼이나 눌러 댄 전화번호를 누르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하고 받는 그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난데없이 고백했다. 마땅히 외쳐야 할 말이었다. 그는 이 지루한 말이 그들의 '내일'을 일시적으로 연장시켜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랑해."
그 꽃샘추위 같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 말 말고 사랑한다는 확신이 필요했으나 스가와라는 애써 조르지 않았다. 봄처럼 느리고 천천히 찾아왔던 불안이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하고 스가와라는 다시 속삭였다. 오이카와는 기쁜 듯, 나도, 하고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으나 스가와라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반찬이 될 꽁치조림과 시금치 된장무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저녁이 인스턴트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권태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불안은 확신처럼 그를 덮쳣다. 창 밖의 몽우리들이 사정없이 날리고 있었다. 따듯한 봄에 적응했던 꽃은 갑자기 추워졌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동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스가와라는 그가 버릴 수 있는 가장 가벼운 것을 생각했다.
그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벚꽃 피는 계절에, 스가와라는 카페 테이블에 제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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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1. 22:27
스가른 전력, [눈물] 이라는 키워드로 쓴 글입니다ㅠㅠㅠ...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를 보니까 요리하는 오이카와랑 받아 먹는 스가와라가 쓰고 싶어져서...:3c...
***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울했다. 그랬기 때문에 청어간장조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청어는 겨울 생선이었고, 이 날씨에 퍽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그 푸른 생선을 꺼냈다. 겨울 청어는 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었다. 동그란 눈에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나무도마 위에 그 생선을 얌전히 놓았다.
생선을 자를 때에는 언제나 눈을 가리고 싶어진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보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안타깝지만 오이카와 씨는 널 먹을 거란다, 그는 일부러 흥얼거렸다. 생선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머리를 빼고 간장에 조릴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청어의 맛은 머리에 몰려 있는 법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청어를 도마 위에 올리는 그 사이에 정이 든 건지, 오이카와는 청어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아까 방 안 한 구석에서 울던 자신과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도마 위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날 먹지 마, 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요리사였다. 그는 차조기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몸통을 사선으로 처리했다. 생선의 몸통을 사선으로 자르는 것은 의외로 현명한 일이었다. 어디가 ‘몸’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젓가락이 고루 가게 만든다. 분명한 부위는 눈뿐이다. 오이카와는 울고 있는 청어의 내장을 손질했다.
요리를 하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 되는 법이었다. 배구를 그만 두던 날, 그는 청어를 졸였었다. 정종과 미림, 설탕과 진간장, 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섞으며 울었고, 그 간장에는 오래 된 염좌가 오롯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청어처럼 졸여졌다. 오이카와는 찬장에서 간장을 꺼냈다. 조림은 가장 눈물과 닮은 맛이었다. 오늘 경기에서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가 활약했다. 둘은 같은 팀이었고, 오이카와는 그게 퍽 슬펐다.
파트너를 오랜 라이벌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가 코트를 떠난 건 오래 전 일이었고, 그는 이제 부엌의 식기구를 지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그의 마음은 청어처럼 팔딱이고, 쉽게 가라앉을 때가 있었다. 그는 조림간장을 만들면서 민어나 우럭을 졸일까 생각했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는 나름의 발악이었다.
그는 실파를 한 손에 잡고 도마에 눌렀다. 완전히 순서가 잘못 된 요리법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경기 하나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청어 냄새 가득 나는 도마에 칼질을 했다. 배구 코트와 배구화가 마찰하는 소리와는 퍽 다른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목에 갈치 뼈가 걸린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동거인의 직업을 떠올렸다. 배구 코트에 제법 가까이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보통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청양고추와 통생강을 꺼냈다. 그는 생강을 얇게 저몄다. 생강의 알싸함이 손끝에 묻을 때 마다, 그는 우울해졌다.
음식에 묻은 사연 때문에 우울한 건지, 아니면 원래 우울한 기분을 청어가 만드는 건지 오이카와는 영 알 수 없었다. 대파와 청양고추가 내는 향에 코가 찡해졌다. 눈물이 났다. 그는 오늘 조기조림에 내놓을 반찬들을 떠올렸다. 간장조림에는 야채와 매실 장아찌도 들어간다. 일품요리인듯, 일품요리 같지 않은 애매함이 묻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손을 얼굴 가까이 대니 매운 내가 돋아왔다. 그가 내는 도마 소리처럼,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를 치는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돋아왔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부엌이 아니라 그 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애매한 생각들이 그에게 떠올랐다, 다시 사라졌다. 마치 국물의 대류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볼로 눈물이 떨어졌기에, 그는 토마토 된장국을 하기로 결심했다.
토마토 된장국과 청어 간장조림. 맛이 센 반찬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 줄 음식이 필요했다. 그는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조금 있다가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냉장고를 열었다. 요리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내심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그는 손을 한 번 씻고 냄비를 불에 올렸다. 그는 간장 소스를 넣은 다음 청어와 재료들을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청어 간장 조림은 강한 불에 세게 졸여야 한다. 간장냄새와 고추 향이 그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알토란을 꺼냈다. 돼지고기를 렌지에 해동시키고, 오이카와는 쌀을 세 컵 퍼 씻었다. 쌀뜨물은 토란을 삶을 냄비에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그는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눈물이 더 번져왔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쌀을 마지막으로 씻어 밥통에 올려두었다. 약하게 기침이 났다. 눈물이 목에 걸린 탓이었다. 스가와라는 흰 쌀밥 같은 남자였다. 재미있는 구석은 없는데다가, 쾌청한 날 보다 우울해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그게 자신과 같은 이유일까, 오이카와는 토란을 끓는물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토란이 냄비의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는 오늘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혼자 밥 먹어, 라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였다. 그게 오이카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왔다. 혼자 먹는데도 둘이 먹는 것처럼 반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일이고, 그 습관에 비롯되는 감정들은 대부분 우울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두기로 결심 한 다음 날 그는 다섯 시에 일어났었고, 애인과 헤어지고 난 다음 날에는 이인 분의 식사를 만들곤 했다.
그 비틀어진 사건들을 그는 간장에 진하게 조렸다. 그는 냄비 뚜껑을 열고 끓고 있는 조림간장을 청어 위로 부었다. 눈물 같은 맛이 우러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혼자 식탁에 앉는 일을 싫어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외로움이었고,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홀로 밥을 먹는 일이었다. 빈 식탁은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버석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괜히 입을 움직였다. 그는 토란이 든 냄비 불을 서둘러 껐다.
그는 토란을 깠고, 쌀뜨물에 익혔다. 그는 돼지고기 안심을 볶았고, 된장국 육수를 우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이미 그의 서브에는 깊은 군살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 외로웠고, 그 과정은 여러 울음을 동반한 길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불이 꺼진 식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숨은 짙게 내렸고, 그는 청어 밑 가스레인지를 껐다.
그는 청어 간장 조림을 그릇에 담았다. 홍고추를 어슷썰기 해서 갈색으로 졸여진 청어 위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독한 우울함이 그 위에 있었다. 그는 토란을 안심과 함께 볶아냈고, 된장국에 토마토를 넣었다. 스가와라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오늘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인분의 식사를 만들었다.
밥통이 소리를 냈다. 뜸이 들려면 삼분 정도가 남았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스가와라가 들어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외로운 날 혼자 먹는 밥맛은 최악이었다.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고,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탄 간장만큼 암담했다. 우연이 겹쳐서 최악이 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기분이 울렁거렸다. 밥통이 뜸을 들였다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장하네, 하고 그는 밥통을 칭찬했다. 그는 플라스틱 주걱으로 밥을 잘 저었다. 밥 김이 손에 닿아 뜨거웠다. 그 따듯함에 괜히 더 울컥했다. 그는 식탁 앞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김나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채소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눈앞에 네가 있다면 당장 양배추를 자를 텐데.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조금 떴다. 둘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혼자 하는 식사가 어색했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잘 먹겠습니다, 뒤에 돌아오는 웃음은 없었다. 원래는 스가와라가 하는 말이었다. 그 다음에는 ‘맛있게 먹어주세요’ 라는 말이 따라와야만 마땅했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 셔벗을 먹을까. 그는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는 청어에 손을 댔다. 간장 맛이 진하게 스며서 맛있었다. 토란도 나쁘지 않았고, 토마토 된장국도 평소보다 더 잘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깊게 울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사춘기 소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세게 문질렀는지 눈가가 당겼다.
그는 일부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세게 냈다. 외로움을 쫓기 위한 방법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옆집에서 넘어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늦게 들어온다. 그는 어두침침한 무드등 아래에서 토란을 집었다. 얇게 썬 돼지고기와 함께 먹으니 식감이 제법 좋았다. 코끝이 다시 아려왔다. 따듯함을 위 속으로 집어넣을수록 속이 뒤틀렸다.
항상 멋있게 있으니까, 오늘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엉망인 얼굴로 뒤를 돌았다. 눈앞에 스가와라가 서 있었다. 그는 양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 버스, 아슬아슬하게 탔지롱, 하면서 그는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입 안에 들어 있던 토란을 어색하게 씹어 삼켰다.
“내 밥 있어?”
스가와라는 ‘울었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선택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 빨간 것 좀 봐, 스가와라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볼에 차가운 두 손을 댔다. 셔벗처럼 달콤한 손길이었다. 나 아까까지 되게 우울했어, 하고 오이카와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와, 청어네. 스가와라는 방어였으면 서운 할 뻔 했다면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그의 앞에 젓가락과 밥그릇을 놓았다. 스가와라는 제 쪽에 있는 밥통에서 밥을 꺼내 적당히 퍼서 담았다. 고요하던 부엌이 순식간에 지저귐으로 물들었다. 그는 오늘 버스를 놓칠 것 같아서 먼저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간표가 꼬이는 바람에 빨리 오는 버스를 탔다는 말까지의 여정을 내뱉었다.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울함이 점점 가시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에서 파란 하늘을 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가 내리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급격한 변화였다. 그는 스가와라의 홍조 띈 얼굴과, 그가 앉은 맞은 편 식탁을 바라보았다. 왜?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카게야마랑 이와이즈미 잘 하더라.”
“응.”
“그거 봤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청어에 슬픈 게 가득 묻어 있더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토란을 입에 넣었다. 있잖아, 식탁에 야채 부족하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그가 양배추를 써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 없어서 이 칙칙한 걸 채소도 없이 그냥 먹고 있던 거야? 그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말하기 미묘한 사실이 있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양배추와 양상추로 간단하게 만든 샐러드를 앞에 놓았다. 오늘 뭐가 널 우울하게 했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의 경기가 잘 풀렸고, 오늘 밥을 혼자 먹는 것도 싫었고, 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토마토 된장국을 마시면서 그의 말을 천천히 들었다.
“이해 안 가지?”
“아니 이해 가는데.”
살다보면 갑자기 울고 싶을 때가 생기거든. 나도 배구 코트 가까이에서 처음 봤을 때 그랬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표정 이면에 있는 ‘닮은 감정’을 생각했다. 짭쪼름 한 눈물 맛이었다. 스가와라는 청어 간장 조림 같은 맛이었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오이카와는 그럴 때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먹는 사람이 ‘둘’이라는 것만으로도, 오이카와는 행복했다. 쉽게 찾아온 우울함은 약간의 비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이래서 밥이 좋아, 그가 문득 말한 말에 스가와라는 나도 그래, 하고 대답했다. 밥도 잘 안 먹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슈가? 오이카와가 다시 질문했고, 스가와라는 글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오이카와는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상쾌하고 상큼한 맛이 혀끝에 돋았다. 그는 그 아삭아삭함을 입 안 가득 굴렸다. 이거 금방 했는데 맛있네? 스가와라가 물었다. 너랑 같이 있어서 그래,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이나 가만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익숙하기 때문에 말까지 식사와 함께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풍경을 퍽 좋아했다.
“아.”
스가와라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뭐 잊은 거 있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반쯤 남은 자신의 공기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대박 큰 거 잊어버렸어. 그는 토란을 괜히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밥 다 먹고 하면 되는 거지, 오이카와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까의 눈물은 이미 소화시킨 뒤였다. 아냐, 지금 할 거야. 스가와라는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는 남긴 밥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잘 먹겠습니다.”
스가와라는 그 말 이후 합장을 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오이카와는 괜히 토마토 된장국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너 말 안 해? 스가와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우울함은 이미 그의 뱃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밥이 덮은 것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까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은 미소장국보다 짙었고, 다시마와 멸치가 들어간 육수나, 국수장국보다 진했다. 그는 자신의 슈가에게 웃어보였다.
“맛있게 먹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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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25. 22:57
스가른 전력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원래 일인칭이라면 '그'라고 지칭하지 않고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너무 글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이번엔 '그'라는 호칭으로 타협 해 보았습니다. 위성과 행성의 관계는 참 로맨틱한 것 같아요.
01.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 싸고 있다. 표먼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02.
스가와라 코우시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볼 때면 울컥하고 치받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그의 관계에서 비롯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나는 이 감정을 오롯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어붙은 유리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꼭 울 것 같았다. 익히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경쾌하게 부르지 않았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다 녹은 아이스크림 국물의 끈적함을 닮았고, 길고 긴 여름의 더위를 닮았다. 평소 상쾌한 얼굴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가 얼어붙은 것처럼 날 대했다면, 나는 내 이 짝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하얀 손가락으로 라떼가 든 머그컵 입구를 쓸었다. 저기, 있잖아, 하고 그의 목소리는 망설임을 가득 담아냈다. 나는 괜히 빨대를 돌려 유리잔에서 소리를 냈다. 맑은 소리에 그가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 씨는 말야, 상쾌 군의 망설임을 들어 줄 정도로 한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일은 내게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의 앞에서 표정을 만들 때 마다 가슴 한 가운데서 열기가 치받쳤다. 스가와라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부르는 귀여운 후배의 이름만으로 그가 품고 있는 서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두 번째' 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
"뭐, 그 녀석 대놓고 무심하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장 된 표현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배우들은 일부러 몸짓을 크게 하여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는 들은 적이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해야만이 다른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입술을 오물거렸다. 전혀 상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어 붙은 스가와라에게서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라는 말은 가혹하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나는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는 오이카와는 이런 거 모르잖아, 라는 말로 응수 해 왔다. 고개를 들어 본 그의 얼굴은 '이런 마음도 모르면서 그런 말 하지 마'라는 문장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애석 한 일이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 있으니까 사랑하는 데 실패는 안 했을 거 아냐, 라면서 나름의 이유를 드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이처럼 타인을 이해 할 줄 모른다.
대부분 실패 한 적 없으니까 이렇게 네 연애 상담도 해 주는 거잖아? 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재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스가와라를 볼 때면 먼지 우주가 생각났다. 햇살 안에 들어 반짝반짝하고, 성운의 모습을 만드는 것은 결국 '먼지'일 뿐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지면 결국 바닥에 깔릴 뿐인 하찮은 우주인 것이다. 사랑을 하는 그는 먼지 우주 속의 유로파였다.
나는 다시 스가와라를 사랑하게 된 경위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신을 슬프게 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해서 듣기 좋았지만, 카게야마와 그 간의 서사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도 이 카페의 이 자리였다. 배경음악으로는 우타타 히카루의 'fly to the moon'이 흐르고, 눈을 들면 고흐의 '아몬드 나무' 그림이 보였다. '파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 스가와라와 같은 자리에 앉은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얼음이 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앞자리에 누가 앉는 지도 모르고 고갤 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민트초코맛 음료가 있었고, 나는 눈처럼 흰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라떼를 들고 있었다. 내가 휘핑크림을 반절 정도 퍼먹을 때야,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짓무른 그에게 나는 티슈를 건넸다.
나도 그 맘 잘 알아, 였나. 아니면 나도 알아. 였나. 나는 그 때 스가와라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 한 건 그는 배구 이야기 아니야, 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자신을 유로파에 빗대었다. 에우로페의 이름을 한 그 위성. 하늘과 별은 생긴 이래로 언제나 소년의 로망이었음으로, 나는 그 위성이 담고 있는 서사를 잘 아고 있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 67만 1050km라는 한 번에 헤아리기 어려운 거리 밖에서 목성을 바라보며 제 거리를 걷는 '별'이었다. 목성에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아주지 않으며, 단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성이었다. 지독한 짝사랑의 별이었다.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그 단어가 품고 있는 깊이는 다 녹은 민트초코프라페가 가지고 있는 텁텁함보다도 쓴 맛이었다.
목성에게 다가가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하고 그가 물었다. 시적인 말이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형편 없이 갈라져 있어서, 나는 그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 다음에야 대답 할 수 있었다. '우주의 질서'가 무너져서? 하고 대답하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끄덕이는 머리카락은 가볍게 나풀거렸고, 나는 얼떨결에 나도 짝사랑을 하고 있어서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거짓말이 시작이었다. 그 거짓말이 내 사랑의 '핵'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먼지와 가스들이 뭉쳐져서 별이 되는 것처럼,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두 번째 위성이 되었다. 나는 그의 유로파였고, 스가와라는 토비오의 유로파였다. 우리의 목성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나와 스가와라의 목성이 가지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내 우주의 시작은 스가와라였다.
별 거 아닌 울음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 있다. 스가와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지루하지? 내 짝사랑, 하는 목소리에는 얼음이 서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손을 뻗었다. 내가 뻗는 손길은 얼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는 그것이 위로라도 되는 양 가볍게 잡았다. 소행성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내 그림자, 내 뒷면, 혹은 내 내핵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는 얼음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하얬고, 예뻤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타입을 좋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날 좋아 해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보다 주는 걸 받는 게 좋았다. 좋아 할 여유도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주의 첫 대폭발처럼 다가왔다. 먼지와 가스만 차 있던 어둠뿐인 공간에 별이 뜨는 것처럼, 그는 나를 위성으로 만들었다.
나는 위성이었다. 오이카와 미안해, 하고 그가 다시 사과했다. 토비오의 이름을 부를 때 보다 짙은 목소리였다. '슬픔' 같은 약한 모습은 너 한테만 보여주고 싶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라는 말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오이카와 씨는 착한 사람이라서 네 지루한 사랑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 줄 거거든? 내 허풍 가득 한 말에 스가와라는 다시 웃었다.
유로파의 표면은 얼음으로 덮여 있다. 100km 두께의 얼음 아래에는 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물의 다른 이름은 분명 슬픔일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붙여도 하등 모순이 없을 것이었다. 나중에 토비오랑 잘 되면 맛있는 거나 사 줘.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 웃는 모습은 내가 봐도 홀릴 만큼 잘 생겼으나, 다른 쪽을 보고 공전하는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오이카와 토오루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일이었으나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우리 둘, 그리고 토비오를 낀 이 관계에서는 '우주의 법칙'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두 번째였고, 나는 두 번째의 두 번째였다. 우리는 서로를 사이에 두고 공전하고 있다. 우리는 유로파였음으로, 우리는 3.5512일을 지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갈 것이었다. 별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야말고 충실하고 충직한 사랑이었다.
오이카와, 너는 잘 되고 있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하고 대답하니, 스가와라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소설가가 된다. 헛점 하나 없는 거짓말, 알리바이를 지어내는 추리 소설가였고, 둘도 없는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로맨스 작가였다. 스가와라는 나와 달리,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 곧은 눈에 나는 다시 소행성과 충돌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왜 스가와라 코우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나는 다시 의문을 제시한다. 내가 왜 걔를 좋아하게 됐을까, 라는 형태로 그 말은 입 밖으로 나갔다. 대명사를 사용한 서툰 연막에 스가와라는 운명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주는 우연에 가까운 필연에 의해서 만들어 진 거라는 과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쾌 군은 똑똑하네, 라고 칭찬하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뭐, 두 번째들 끼리 힘내자구, 하면서 서툴게 하는 말에 스가와라는 그래, 하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그 하이파이브를 할 때 마다, 나는 얼음층을 쌓았다. 두껍고, 두터운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스가와라와 사랑하는 꿈 속에서 산다. 내민 손에 나는 손을 얹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손이, 아래로 추락해 떨어졌다. 창 밖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려, 아무 것도 아닌 먼지를 '우주'로 바꿔놓고 있었다. 예쁘다, 하고 스가와라는 먼지우주처럼 웃었다.
위성은 자신의 축과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궤도를 끝없이 돌 뿐이었다. 내 끝나지 않는 공전은 스가와라 코우시를 축으로 한 노래였고, 사랑이었고, 꿈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더 가까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으로.
03.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싸고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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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8. 22:00
이 그림을 봤습니다. 짝사랑이 좋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나 라벨의 '물의 유희'를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림을 한 장 본 적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여러 번 덧발린 회색이 꼭 그를 생각나게 했다. 담담하게 발린 눈들은 멀리 돌아 먼 숲을 비췄다. ‘유화’라는 단어에 으레 붙어 있곤 하는 거친 붓 느낌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복사본을 잘라내, 책 안에 담았다. 녹지 않은 길, 그 너머 쌓인 먹구름들은 꼭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의 겨울이었다.
목 끝까지 얼어붙은 계절을 겪다보면 그 뒤에 봄이 있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카게야마는 옷깃을 여몄다. 패딩 너머로 겨울이 스몄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겨울」과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는 먼 길에 있던 흰 나무숲을 상상하며 걸었다. 발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계절만 되면 그를 떠올리곤 했다. 카게야마의 겨울은 ‘그’와 마주닿아 있었다. 그에게 봄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끝에 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겨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그 일방적인 쌀쌀함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대용품이었다.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대신하는 편의점 초코파운드 빵이나, 눈이 내리는 모양을 흉내낸 스노우볼이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또 멀리 떠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조금 추웠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랭한 방이 그를 반겼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 정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카게야마는 화가의 이름 중에서 ‘알렉세이’라는 단어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다음을 쫓아오는 이름은 그에게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그 네 음절을 맘에 담아둔 것은,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 닮은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에게 의미 있는 계절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발 끝부터 톱밥이 차오름을 느꼈다. 겨울이 찾아올수록 속이 마모되는 것 같았다. 추위는 따듯함을 먹는 짐승이었음으로,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리 걸려있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겨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봄은 찾아오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겨울과 봄, 그 어드매의 ‘아무것도 아닌 계절’을 살고 있었다. 스페어 키, 스노우 볼, 싸구려 초코 파운드, 준초콜릿, 그는 자신과 비슷한 물건들을 나열하다 소파에 누웠다. 겨울 향기가 짙게 났다.
보자고 했으면서요, 카게야마는 뒤늦게 문자를 보냈다. 죄책감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었다. 그사람은 선배가 친구밖에 안 될걸요, 그는 괜한 말을 덧붙였고, 전송했다. 손가락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는 가끔씩 최소한의 온기마저 앗아간다. 뼈가 굳는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각이었으나, 이 계절에는 흔해 빠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먹구름이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회상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 다 읽은 편지, 낡아빠진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로 손을 쓸었다. 겨울이 쓸었던 자리였다. 그의 지문이 묻은 자리들은 미미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손끝은 따듯한 편이었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고장 난 메트로놈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나, 그 사람이랑 키 비슷해요. 완벽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선배보다 크니까요,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을게요. 당신 몸에 흔적 하나 내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와 당신이 봄을 찾을 때 까지만 날 이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카게야마가 서툴게 내민 손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잡았다. 그 또한 겨울날, 온기가 간절했을 것이었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기에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뒷모습, 그 발끝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카게야마 어느 날 스가와라가 흘리듯 했던 말을 반추했다. 이름에 그림자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 할 수 없었다. 웃었던가, 혹은 울었던가. 그는 그가 뒤돌길 그저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봄을 흉내 내는 계절이었다. 껍데기 같은 사랑, 박제품 같은 사랑, 카게야마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싸게 구한 복제품이지만 그 아득함은 깊게 담겨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나무 숲은 멀리 있고, 드문드문 자라있는 풀들은 색이 없었다. 그 끝없는 겨울, 그 짝사랑.
둘이 겪고 있음에도 이어지는 짝사랑. 둘이서 하고 있지만 혼자서 하는 연극, 모노드라마. 여러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연기, 그 향은 기억할 수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배구공이 손에 잡혔다. 그는 배구공을 위로 올렸다, 다시 받고 위로 올리길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니, 겨울이 겨울임을 알았기 때문에 봄을 자처했었나, 카게야마는 배구공을 아래로 내렸다. 공은 힘없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혔다. 꼭 저 같은 꼴이었다. 그는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방안에 외풍이 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찬 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속은 온통 톱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박제된 채, 틀린 방향으로 이어간 사랑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알렉세이가 그린 「겨울」에는 길이 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얇은 부분은 온전히 숲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고정된 길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겨울에게는 봄이 필요하다. 얼어붙은 제 몸을 녹이고, 따듯함을 찾기 위해선 봄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는 회전한다. 카게야마는 소파 등받이를 보고 돌아누웠다. 눈꺼풀에 먹구름이 올랐다.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얼어있는 채로 가만히,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다. 지독한 슬픔이었다. 유화에서 색을 만든 것처럼, 그의 사랑은 슬픔에 개어 캔버스에 여러 번 덧바른 채 겨울로 나타났다. 그는 입술을 쓸었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숨결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딪히지 않는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몸 위에 안개처럼 서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봄이 될 수 없었다. 혼자 누운 소파는 한 사람분의 슬픔을 담았다.
겨울이 돌아야 봄이 온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그 그림은, 스가와라의 짝사랑과 닮았던 그림은 어느새 카게야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걸음쯤을 앞으로 다가갔고, 액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깰 수 없었다. 던질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속삭였다. 사람의 바람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액자 뒤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액자 뒤편을 감싼 판, 그 판을 갈아 놓은 톱밥같은 것이 그의 목 끝을 답답하게 덮었다. 그의 그림자에 서리가 피어올랐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다시 속삭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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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1. 22:11
스가른 전력에 참여 한 글입니다. 주제가 '노래' 였어요. 요즘 미유미유의 언더 더 씨를 인상 깊게 듣고 있어서, 살짝 써먹어 보고 싶었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귀엽게 봐주세요 ㅇ.<)/
***
같이 살게 된 다음에서야 알게 되는 게 있다. 일상의 전부를 공유할 때야 언뜻언뜻 비치는 ‘사소함’의 형태를 하고 있다. 오이카와는 칫솔을 꺼냈다. 그는 중간부터 짜인 치약을 끝부터 밀어냈다. 그는 튜브를 손가락으로 쭉 짜냈다. 울퉁불퉁한 치약은 다 펴지지 않았다. 그는 예상보다 많이 짜인 치약을 입에 넣었다. 민트 맛이 입에 강하게 퍼졌다.
동거를 시작한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와 스가와라는 사소한 차이점들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밀어 쓰는 걸 좋아했다. 괜히 치약을 낭비하지 않는 기분이 드는데다가, 치약이 뭉쳐있음으로 쉽게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중간부터 짜냈다. 이는 매우 사소한 ‘차이’였다. 한 사람은 계속 치약을 평평하게 폈고, 다른 사람은 뭉쳐내는 아침 시간의 작은 일력다툼이었다.
휴지를 놓는 방향 또한 그랬다. 오이카와는 벽면에서 멀리, 스가와라는 벽면을 향해 꽂곤 했다. 딱히 지적해서 말할 건 아니었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닦았다. 입 안 가득 하얀 거품이 들이 찼다. 그는 세면대에 거품을 뱉고 물을 틀었다. 토오루, 또 물 틀고 쓰지?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또 차이점을 찾아냈다.
스가와라는 양치를 할 때 물을 받아서 쓰곤 했다. 오이카와는 물소리를 줄였다. 줄어든 물줄기에 거품이 조금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그는 세면대에 양치 거품이 가득 한 걸 보길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입 안 가득 들어있는 거품을 뱉어내고, 물컵에 물을 받았다. 토오루, 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고 오이카와는 컵에 물, 하는 짧은 소리를 외쳤다.
참 생각해보면 사소한 습관이 이렇게 다른데도 동거하는 건 재미있었다. 오이카와는 쉐이빙폼을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멀리서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늘 반찬이 고등어 구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수동 면도기를 꺼냈다. 그는 동거인의 자동 면도기를 잘 세워놓고, 결대로 조금 자란 수염을 밀었다. 자동보다 수동이 폼 나는 데, 그는 스가와라의 노랫소리를 따라 부르며 면도했다.
스가와라에게는 작은 버릇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얼굴을 씻고 나왔다. 그는 흰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정한 검은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누가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출신 아니랄까봐, 주황색 포인트가 들어간 물건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언더 더 씨’를 노래했다. 고등어의 머리를 치는 살벌한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왜 언더 더 씨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바다 속은 행복했겠지, 라는 의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두 마리 고등어의 머리가 싱크대 너머로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야후~ 하는 추임새를 넣는 그는 제법 신나 보였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가와라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고등어를 어슷썰기 하고 있었다.
어슷썰기 해?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배웠다면서 고등어의 내장을 살살 발랐다. 우리 집은 반절로 갈라서 토막 냈는데. 오이카와는 다시 ‘반복’되는 언더 더 씨를 들으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노래를 멈추고선 그럼 ‘가운데 토막’을 두고 싸우게 되잖아‘ 라고 대답했다. 의외의 생활의 지혜였다. 오,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챙겨 갔다. 그는 다시 일절을 입에 머금었다. 그는 매우 행복 해 보였다.
스가와라의 엉덩이가 좌우로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떠온 물을 마시면서 그의 ‘고등어 손질’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이가 좋지? 스가와라가 물어왔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좋아~ 하고 리듬을 타며 말했다. 이 또한 ‘언더 더 씨’의 추임새였다. 이렇게 생선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렸을 때부터 물든 버릇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버릇 귀여워.”
“너도 귀여운 버릇 있는데.”
스가와라는 고등어를 불 위에 올렸다. 자글자글한 기름에 고등어가 구워지는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 거기 달력, 스가와라는 뒤를 돌며 손을 뻗었다. 그는 반절로 잘린 달력을 내밀었다. 그는 인쇄가 안 된 부분을 아래로 해서 덮었다. 그렇게 하면 잘 돼? 오이카와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손으로 브이를 해 보였다. 그는 이렇게 하면 촉촉하게 구워진다고 말했다. 엄마한테 배워왔어,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아무튼 너 귀여운 버릇 있다니까, 스가와라는 구이용 젓가락을 손에 든 채 말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였다. 너 샤워할 때 ‘포뇨 노래’ 부르잖아. 뽀-뇨 뽀노 포뇨- 포뇨- 하면서. 스가와라는 그의 어조를 따라 노래 불렀다. 너 의외로 크게 불러. 하면서 스가와라는 웃었다. 들었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 같았다. 부를 때는 당당하게 부르면서 들키니까 부끄러워 하는 걸까, 스가와라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 지금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야.”
“포뇨카와 씨~”
“포노카와 씨는 지금 접시 물에 코 박고 싶어졌어. 바다로 돌아갈래”
"안 돼, 스가와라 씨가 물병에 담아왔는 걸."
"포뇨카와 씨 지금 매우 쪽팔려."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못 들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하고 소리치자, 스가와라는 그러려면 애초에 샤워 할 때 한 뼘 정도 문 열어놓는 버릇부터 고치라고 충고했다. 오이카와는 정말로 몰랐다는 듯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고등어구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프라이팬 뚜껑 역할을 하던 달력을 걷었다. 그는 고등어를 뒤집으면서 ‘언더 더 씨’가 아니라 ‘포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뭐 정리할 때는 ‘배니 랜드의 CM'을 콧노래로 부르잖아. 스가와라는 프라이팬에 다시 달력 뚜껑을 얹으면서 말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등어 내장같아, 스가와라는 아까 손질한 고등어 잔해에 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그런 살벌한 비유 하는 거 그만 둬 줄래? 오이카와는 여전히 당황한 것 같았다. 쪽팔린 부분을 건드린 걸까, 스가와라는 네- 안 말할게요!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동거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서로의 사소한 버릇들을 차차 알아가면서 물들어 가는 게 아닐까. 그는 잠시 감상적인 생각을 하다가 붉어진 얼굴을 쓸었다. 포뇨 노래를 하면서 바디워시를 바르는 걸 들킨 게 부끄러웠다. 고등어 손질을 하면서 ‘언더 더 씨’를 부르는 것 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가스불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가 뒤를 돌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스가와라는 포~뇨 포뇨 포뇨 포뇨~ 하면서 노래를 불러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얼굴을 가렸다. 베니 랜드의 CM송이 좋아? 라고 그의 연인은 능청스럽게 물어왔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 한 이래로 오늘이 가장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언더 더 씨’가 제일 좋아! 하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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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1. 25. 22:03
오늘 전력 주제가 의외로 어려워서 헤맸습니다^0T...스가른 전력에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이라는 주제였어요. 보통 두 사람이 하는 놀이를 생각하다가 실뜨기를 빌려왔습니다만 일본에서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얘내가 왜 한국인이 아닌지 1도 모르겠는 밤입니다.
***
실뜨기를 한 적이 있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육학년이 된 누나가 배워 온 것이었다. 그녀는 실의 양 끝을 야무지게 묶었다. 열세 살 소녀의 한 품이던 실은 네 살배기 소년에게는 너무 컸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린 동생의 팔을 야물딱지게 벌려가며 실을 떴다. 왼쪽으로 한 번 밀어 중지에 걸치고, 오른쪽으로 한 번 밀어 중지에 걸친 그 모양. 그 규칙적인 모양을 뚫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네 살의 오이카와의 손가락은 깨끼 단풍잎 같았다.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손가락은 실을 걸기엔 역부족이었다. 네 살과 열세 살의 실뜨기는 항상 ‘젓가락’에 가기 전에 끝나곤 했다. 오이카와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붉은 실이 어린 누나의 손끝에서 움직이던 광경과, 그걸 어떻게든 ‘모양’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던 자신을.
비록 기억은 냉장고와 같아서, 확실히 ‘저장되어’ 있지만 ‘찾을 수 없는’게 생기곤 했다. 오이카와는 그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 언제부터 하지 않았는지, ‘젓가락’이후에 ‘함정’은 어떻게 피해 가는지를 생각 해 낼 수 없었다. 카레를 만들 때 항상 냉장고 깊은 곳에 숨어있는 돼지고기를 몇 분에 걸쳐서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그 위에 세월이 쌓여 ‘실뜨기’의 구체적인 디테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계란 두 알을 들었다.
확실한건 그 놀이를 하려면 ‘두 사람’이 필요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오이카와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그는 집에 베이컨 뭉치가 있는 걸 생각 해 냈다. 그는 급히 아침 식사 메뉴를 수정했다. 오므라이스보다는 샌드위치가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이미 꺼낸 계란 두 알을 조리대 위에 올려두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가 뻗어 나왔고, 그는 여러 냉동식품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먹다 남은 탕수육을 담아놓은 통과, 아직 열지 않은 냉동만두 봉지 사이를 헤집자 미끈거리는 포장이 잡혔다. 오이카와는 락앤락 통을 한 손으로 누르고 베이컨을 꺼냈다. 저번에 한 번 먹고서 남은 것을 당근 모양 핀으로 찝어 보관하고 있었다. 냉장고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베이컨 두 덩이를 꺼냈다.
해동시켜야 하는데 귀찮았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곧 그가 깰 것도 같았다. 그는 언 베이컨을 먹을 만큼만 그릇에 덜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게 곧 녹을 것이었다. 그는 가스레인지를 켰다. 약불에 맞춰놓고 프라이팬을 달궜다. 그는 기름이 들어 있는 찬장을 열었다. 저번에 봤던 올리브유가 사라지고 카놀라유가 놓여 있었다. 오이카와는 하품을 했다.
아침 특유의 노곤노곤한 졸음이 몰려왔다. 햇살이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눈부시게 들어올 때 마다 그는 하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짜내졌다. 그는 늘어지는 기분을 기지개로 폈다. 근육이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전자레인지가 울었다. 오이카와는 급하게 전자레인지에서 베이컨을 꺼냈다. 그의 구식 전자레인지는 해동 된 물건을 뱉기 전까지는 계속 소릴 지를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단잠을 방해하기 싫었다.
그는 팬에 기름을 약하게 둘렀다. 베이컨을 구울 때 카놀라유를 넣는지 넣지 않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별 탈 없지 싶어서 오이카와는 프라이팬에 베이컨 네 장을 넣었다. 두 장은 곤히 자고 있는 친구의 몫이었고, 남은 두 장은 자신의 것이었다. 두 사람 분의 몪이었다. 그는 계란도 두 장을 넣을까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침부터 배불리 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기지개를 폈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비 내리는 풍경을 닮은 소리를 불러왔다.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베이컨을 뒤집었다. 네 장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꼭 ‘실뜨기’의 ‘젓가락’ 모양을 연상시켰다. 그는 그걸 마지막으로 했던 때를 생각했다. 의외로 ‘네 살’이 아니라, ‘열 여덟’살이었다.
쿠니미가 부실에 실 하나를 가져왔다. 그는 실의 양 끝을 묶어서 양 손에 걸쳤다. 그걸 왼쪽으로 한 번 훑으면서 중지에 걸고, 오른쪽으로 한 번 훑으면서 반대편 중지에 걸었다. 그는 짠, 하는 의욕 없는 목소리와 함께 그걸 킨타이치에게 내밀었다. 킨타이치가 실패하자 다음은 야하바였다. 오이카와는 지면 소금 캬라멜이야, 라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생기 있어 지는 걸 오이카와는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쿠니미의 독재를 막을 뻔 했던 것은 오이카와였다. 그는 엑스자로 교체 된 곳을 양 손으로 잡고 평행선 안으로 넣었다. 쿠니미는 작게 감탄하면서 다음 번 실을 떠갔다. 두세 번 반복하자 ‘젓가락’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걸 풀 수 없었다. 이다음엔 모르겠어, 라고 말하자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손에 얇은 실을 걸쳤다. 그는 새끼손가락에 줄을 걸고 양 손을 교차했다. 그 다음 ‘함정’과 ‘거미줄’도 그는 쉽게 풀어냈다.
그 이후에는 계속 실 패턴은 반복되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이게 퍽 연애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패턴을 모르게 계속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계속 했던 걸 반복하게 된다는 게. 그는 포실포실하게 익은 베이컨을 그릇에 뺐다. 그는 빵부터 구웠어야 했다며 자책했다. 그는 계란을 조리대 끝으로 밀어 놓고, 식빵을 꺼냈다. 어제 집에 들어올 때 사왔던 것이었다. 그는 베이컨 기름에 빵 두 장을 넣었다. 그의 누나가 알려준 비법이었다.
그게 연애라면 스가와라와 자신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는 걸까. 오이카와는 손끝으로 빵을 뒤집었다.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는 스가와라가 이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를 생각했다. ‘세터가!’ 라고 말하기 보다는 ‘토-오-루’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첫 음절의 어조는 수평으로, 그 다음 음은 반음 내려갔다가, 마지막에서는 살짝 올라간 느낌일 것이다. 오이카와는 빵 두 장을 그릇 하나에 빼냈다. 베이컨이 들어 있는 그릇이었다. 설거지 감을 줄이면 줄일수록 좋은 법이었다.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게 된다는 건 그들의 연애가 안정기에 들어갔다는 증거 같았다. 오이카와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나머지 식빵 두 장을 더 구웠다. 베이컨 기름이 들어가 식빵은 거의 ‘갈색’이었다. 모양은 이상해도 맛은 괜찮겠지, 그는 접시 두 개를 꺼내 빵 두 장을 올렸다. 그 위에는 베이컨을 겹쳐 올렸다. 윤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하얀 계란 두 알을 깼다. 두 알이 자꾸만 붙으려고 했다. 두 사람 분의 식사였지만 계란은 어째 한 사람 것 같았다. 노른자 두 개가 눈 안에 들어왔다. 멀리서 토오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젓가락으로 붙은 계란의 중앙을 가르려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약한 불이니 괜찮지 싶었다.
스가와라는 이불에 쌓인 채 지고 있었다. 암막커튼의 열린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의 하얀 피부를 해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갔어, 그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일인용 침대는 너무 작다는 불평을 내뱉었다. 둘이 집 합쳤을 때 바꾸자니까, 라는 말은 스가와라의 버릇같은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던졌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할 거 있잖아.”
뭘 맞겨 놓았다는 듯 스가와라는 그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의 손가락이 입술 끝에서 톡, 톡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입술와 입술을 맞대어 쪽, 하는 소리를 냈다. 스가와라는 앙 다물린 입술을 벌려 그의 ‘키스 소리’를 먹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오이카와는 얼른 주방으로 달라 들었다. 스가와라네 집은 부엌과 침실 사이의 거리가 은근 멀었다. 그는 집을 볼 때 주방과 침실의 거리를 반드시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 익은 계란을 반절로 갈랐다. 하나가 다시 둘이 되었다. 연애는 하나같은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었다. 실뜨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원으로 연결된 실 하나를 주고받으며 패턴을 반복해간다. 오이카와는 생활에서 이런 발견을 했다는 게 은근히 즐거웠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는 뒤집개로 계란을 들었다. 그는 베이컨 위에 프라이를 올렸다. 그는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베이컨을 반절로 접어 계란을 덮었다. 그 위에는 머스터드소스와 약간의 딸기잼이 들어간다. 우리 신랑한테만 해 주는 거니까 토오루 너도 소중한 사람한테만 해줘! 라고 외치던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빵 뚜껑을 닫으면서 피식 웃었다.
스가와라가 씻는 소리가 들렸다. 세면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두 개의 접시를 대리석 식탁 위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는 유리컵 두 개를 찬장에서 꺼냈다.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그는 어제 사놓은 오렌지주스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쓸데없이’ 써버린 그릇 하나를 얼른 설거지했다.
방문 너머,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가 서서히 잠잠해지고, 스가와라의 발소리가 들었다. 오이카와는 왼쪽, 스가와라는 오른쪽이다. 이미 예전에 정해 둔 자리배치였다. ‘일’이 왼쪽, ‘이’가 오른쪽에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였던 것도 같았다. 그는 익숙한 이 아침이 즐거웠다. 익숙하다는 것은 여러 번 반복했다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패턴이 없긴 했지만 그와 끊임없이 실을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우리 집에 베이컨 있었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냉동만두와 락앤락 더미 사이에서 발견했다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면서 전혀 몰랐네, 하면서 웃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유리컵에 오렌지주스를 따라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라고 속삭이자 스가와라는 그가 꼭 그 말을 할 것 같았다면서 웃었다.
실뜨기는 두 사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놀이였다. ‘거미줄’이나 ‘젓가락’같은 새로운 패턴들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익숙한 풍경들이 계속 반복되곤 했다. 오이카와는 그와 끊임없이 실을 주고받는 이 일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웃어? 그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네가 너무 예뻐서, 라고 대답했다. 이 또한 익숙한지 스가와라는 그의 입술과 입술을 맞물렸다 땠다. 쪽, 하는 소리가 나왔고 오이카와는 입을 벌려 냠, 하고 ‘쪽’을 먹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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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1. 11. 22:26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오늘은 '커피'라는 주제였습니다.
얼마 전 잡아 썼던 슈님의 소재가 '커피'와 관련되어 있기에 가볍게 후일담을 적은 느낌입니다.
이왕이면 '커피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를 봐주셨으면 좋겠지만, 보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원두를 덖으면서 생각했다. 불을 받은 원두가 향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원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그는 과거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스가와라의 첫사랑이었다. 그에게서는 지금처럼, 언제나 진한 원두 냄새가 났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스가와라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카페에서 시간 때우기’였다. 그가 신입생이던 시절에 카페란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어른의 향기가 나는 공간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가서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와 스무디 따위를 먹는 곳. 혹은, 편안한 비즈니스를 위해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 그것이 그가 가진 인식의 전부였었다.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원두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목소리가 좋았던 것도 같았다. 항상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의 그 신중한 손길, 그 손가락과 손등, 팔뚝으로 이어지는 굵은 핏줄 따위에 설렜던, 그런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확실하게 그 사람에게 반했었다. 그는 그 날부터 한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노부터 시작했다. 카페에 혼자 가고 싶다는 스가와라에게 동기 여자아이는 ‘에스프레소’는 라일락 이파리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커피였다. 고소한 커피 향과 다르게 그의 입맛에 아메리카노는 탕약처럼 다가왔다. 한 입을 마실 때 마다 소태를 먹듯, 얼굴을 찌푸리는 스가와라에게 그는 스틱 설탕 몇 개를 가져다 줬다.
이거, 우리 가게에만 있는 건데 저으면 달아져요-였던가, 아니면 이거 요즘 유행하는 건데 적으면 녹으니까-였던가. 스가와라는 그가 개인적으로 내뱉은 첫 마디를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타인’이 설탕이 커피에 녹아드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는 그게 매우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했던 말 중에서 스가와라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인생은 커피, 커피는 곧 사랑. 그가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면서 종종 중얼거리곤 하던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이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는 것은 곧 하나의 원두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느냐’라고 다시 말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보다 로맨틱한 말은 자신의 인생에선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가 좋아하던 사람은 몇 해 전 결혼했다. 나한테 커피 알려줄 때는 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못 먹는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같은 꼴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스팅한 커피 향을 맡았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렸다. 그는 로스팅실의 유리벽으로 출입구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 소년’이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까마귀 소년’ 그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유리문을 열었다.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서늘한 인상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언제나 이 시간 즈음에 카페를 찾아오곤 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져지를 입고 있었다. 자기가 OB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을까, 스가는 다른 생각을 하며 그의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는 언제나 충실히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는 그가 이 커피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 모를 ‘까마귀 소년’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언제나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스가와라의 앞에 섰을 때는 제법 당돌하게 눈을 마주쳐 온다. 그는 천장에 달려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음, 하고 고민하는 척 하지만 결국 언제나 ‘늘 마시던 거요’라고 회귀하는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주문을 들을 때 마다 느와르 영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소년’의 느낌은 바에서 마스터,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단단한 성인 남자의 섹시함과는 달랐다.
5월에 활짝 피는 라일락. 스가와라는 그 흰 꽃을 떠올렸다. 그는 풋풋했으며, 어수룩했다. 소년 특유의 다 자라지 않은 느낌이 몰아칠 때 마다, 스가와라는 ‘잔 안에 부는 폭풍’ 따위의 구절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진동벨과 카드와 영수증을 건넸다. 오늘 주문이 조금 많아서, 늦게 걸릴지도 몰라요. 그의 당부 같은 말에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지정석’으로 다가갔다. 그의 지정석은 해피트리와 키 큰 로즈마리가 있는 햇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스가와라는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둥그런 정수리가 귀여웠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가 카드에 하는 서명을 몇 번이고 유심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글씨를 해독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년의 사인은 매번 바뀌었다. 어느 날은 사랑 애(愛)가 들어가는 것도 같았고, 좋을 호(好)를 쓰기도 했다. 그림자 영(影)자 옆에 우산을 그려놓고, 그 옆에 근원 원(原)을 적기도 했다.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 유행일까. 스가와라는 오늘자 영수증의 ‘Suga r'라는 글자를 보면서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었다. 그의 마음속에 두근거림이 돋았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스가와라는 소년의 ‘싸인’이 의미 없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닌 척 시선을 돌리거나, 그 직후에 핸드폰의 액정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할 때, 그것이 그 나름의 소심한 표현이 아닐까 추측했다. 스가와라는 다른 손님에게 음료를 건네면서 자신이, 여전히 그의 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과 카운터 사이의 거리. 딱 그 정도가 그와 그의 마음의 거리였다.
소년은 과묵하다와 서투르다의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쫓는 것은 오로지 스가와라뿐이었다. 그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몇 해 전 접은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 느낌에 간질거리기도 했고, 그가 다가와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소년의 눈길만으로 스가와라는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커피는 사랑, 원두는 어느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처럼 진해질 수도, 달달 해 질 수도 있으며, 그 위에 휘핑을 얹어 화려하고도 포근하게 사랑할 수도, 아이스크림에 뿌려 짜릿하게 변할 수도 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시키는 아메리카노가 자신을 향한 ‘돌직구 같고 정석적인 마음’이 아닐까 넘겨짚었다. 아직 씁쓸한 맛이 짙은 소년의 사랑에는 설탕이란 이름의 사랑이 폭탄처럼 짜릿하게 퍼져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짧게 웃었다. 그는 신경을 써서 물을 부었다. 소년은 여전히 스가와라를 보고 있는 듯,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햇살이 내리 쬐는 느낌마냥 간지러웠다. 스가와라는 자신 또한 ‘그 사람’에게 그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매일 소년에게 줄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속 안에 잠들어 있던 원두가 드디어 커피로 탈바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짝사랑도, 사랑도 아닌 애매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씨앗의 발아는 과연 자의적인 과정일까. 원두가 커피가 되는 과정 또한 자의에 의한 일일까? 스가와라는 두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햇살이라는 명백한 타의적인 원인과, 뜨거운 물이라는 원인을 떠올렸고, 그것이 카라스노 배구부 져지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시선과 닮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가와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원두가 커피가 되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그가 원인이었다. 스가와라는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얼굴에 김이 올랐다.
스가와라는 진동벨을 눌렀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스가와라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그는 쟁반에 아메리카노를 올려 건넸다. 소년은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학생, 오늘도 물 탄 거요. 스가와라가 말을 걸자 그 떨림은 더욱 더 진해지고 있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웅얼거리기에 듣기가 힘들었다. 스가와라는 제가 더요, 하고 대답했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소년은 당황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에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그가 적어내던 ‘사인’의 의미와, 가끔씩 적던 우산 아래의 그림자 영(影)과 근원 원(原)이 어떤 몸짓이었는지를 알아챘다. 스가와라는 그러기에 더 그의 이름을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년이 자신에게 좀 더 다가오길 바랐다.
스, 스가, 스, 하고 소년은 스가와라의 이름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려는 순간일까, 스가는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이 처음 설탕 스틱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그 사람의 첫 마디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이 당돌한 소년 때문일 것이다. 스가와라는 소년을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의 미소에 그는 더 당황한 듯 했다. 고작 네 어절인 이름을 소년은 어렵게 입에서 내려 했다. 그가 저는 말 마저도 스가와라는 설탕 같이 달다 생각했다.
“슈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년의 어깨가 추욱 내려졌다. 스가와라는 그가 배구를 할 때도 이런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접고, 그에게 설탕 코너를 안내했다. 그 나름의 ‘밀당’이었지만 소년은 것두 못 알아차린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의 서투름이 귀여웠다. 그것은 스가와라가 처음 내리던 커피처럼 매우 볼품없는 도전이었지만, 결국 맛있어질 내용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그 느낌을 실컷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몇 번 만지다 다시 스가와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이름글자 하나 중 그림자 영(影)처럼 맹목적으로 다가오는 눈길이었다. 햇살만큼이나 집요한 그것은 명백한 사랑의 형태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커피가 조금 더 달달해지고, 휘핑이 올라가 폭신해질 순간을 기다렸다. 스가와라는 상쾌하게 웃으면서 카라스노 배구부의 소년에게 내어 놓을 서비스는 바나나가 좋을지, 오트밀 쿠키가 좋을지 고민했다.
소년은 한 움쿰 집어 간 설탕을 모두 다 아메리카노에 넣고 있었다. 인생은 커피, 사랑은 커피. 스가와라는 자신의 인생관과 같은 카피를 입 밖으로 냈다. 곧 소년의 사랑도 달아 질 순간이 올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조만간 카라스노 배구부 소년이 당뇨에 걸리지 않도록, ‘섞어 나눠줄’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커피는 곧 딱 먹기 좋은 달달한 두 잔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앉아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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