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5. 3. 5. 14:37
예전에 시린님과 풀었던 순수의 시대 느낌의 카게스가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글이 되었네요..
***
―이 천한 손이 그대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으로, 낯을 붉힌 두 순례자 같은 내 입술로, 그대에게 점잖게 키스하여 추한 자국을 씻고자 하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오페라글레스 안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줄리엣과, 머리를 잘 빗어 올린 로미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녀가 사뿐거리며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입맞춤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줄리엣이 걸음을 멈추자, 카게야마는 자신의 귓가에 다가온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쪽, 하면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은 순례자의 그것처럼 엄숙하면서도 악마의 입맞춤처럼 장난스러웠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물길 너머를 꿈결처럼 이야기 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그 끝에 땅이 있다던 이야기를 전 믿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실증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법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굳은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줄리엣 역 배우가 숨을 멈추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셋을 새는 그의 프랑스어는 키스처럼 유려했다.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 결심을 할 때, 그의 눈가는 어린 새의 날갯짓처럼 떨리곤 했다. 카게야마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착한 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너무 욕되는 일이랍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예견 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손가락에, 카게야마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귓가에서 줄리엣의 나머지 대사를 옮겼다. 성자의 손은, 순례자가 가져다 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었다. 카게야마는 오페라글라스를 두 눈에서 땠다.
그의 하얀 소악마는 카게야마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키스가 아닌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가 웃었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이, 그의 눈꼬리에 자리한 야살스러운 점과 대비되어 있었다. 그는 남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성자나 거룩한 순례자도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박스석은 이미 연극의 한 무대였다. 스가와라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목례했다. 하얀 문조의 깃털처럼 부스스한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카게야마 또한 얼떨결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그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짧은 연극이 끝남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확대되어 보이는 세상에, 좁은 무대가 다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차례 입맞춤을 교환한 상태였다. 그들의 죄는 입술 안에 있지, 스가와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커튼에 손을 뻗었다. 옳지, 하며 칭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박스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뿐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더니, 자신의 숨결을 내어 불을 꺼트렸다.
“스가와라 씨.”
“그대의 눈에서 빛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는 어린애 같이 말했다. 치기어린 그 목소리에는 분명 카게야마의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과도 관련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종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는 느리게 스가와라의 얼굴 선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튼 너머의 세계를 상상했고,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성녀님, 손으로 하는 키스를 입 안에 담게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그래요, 스가와라가 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 줄리엣은, 서툴게 흔들리는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카게야마는 엷게 꿀을 발라 반짝이던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의 세계에 다가갔고, 그의 신앙에게 입을 맞추었다. 숨과 숨이 닿은 순간은 환희였으나, 탐욕스러운 혀가 섞이며 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절망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가와라씨, 짧은 치욕 끝에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살포시 웃었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닿아 있었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가와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들어줄지라도 성자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의 천사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흘렸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불안함은 숨결에 담아, 서로의 위 속에 가만히 담기곤 한다. 그 침전의 순간을 카게야마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서툴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다리는 스가와라의 다리 사이로 서툴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폭력적인 애정에 스가와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계집아이의 소리 같은 그 음색에, 카게야마는 그제 만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좋은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내 입술의 기도를 받아주세요.”
스가와라는 그녀와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스가와라의 목덜미를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였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뛰는 그의 맥에 키스했고, 뱀파이어처럼, 그 곳을 혀로 핥아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가이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자신의 입술이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 제 목이, 당신의 죄를 짋어지겠군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제 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고, 이내 자신의 왼손이 그의 목울대를 자르듯 쓸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파국이겠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종교가 될 수 없지요, 스가와라는 예쁘게 말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를 담고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죄인이었어요.”
“그럼 내 죄를 돌려주오.”
카게야마는 로미오처럼 말했고, 스가와라는 ‘코우시’처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줄리엣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익숙한 곡의 변주, 그 날선 느낌.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들리다,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키스에게도 이유를 붙이시네요.”
스가와라가 말했다. 한 막이 끝난 듯 박스석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오페라글라스를 챙겼다. 스가와라가 연 문에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의 성자는 밖에서 성냥을 꺼냈다. 은제 성냥갑 안에는 인이 발린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약간의 부딪힘은 다시 일렁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한동안,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심해 같아요, 카게야마가 속삭인 말을 스가와라는 무시했다. 그의 종교는 불친절하였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 시간을 인내할 만큼 똑똑하지도,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스가와라는 턱을 괴었고, 커튼을 열었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목 카라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하얀 목 아래에 피어난 붉은 열락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돌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스가와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말하는 어조로 큰일을 말하였다. 그는 긴 검지를 제 목울대에 대고, 천천히 그었다. 교수형 당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카게야마가 말하는 목소리에 그는 엷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에 꽃을 실은 마차를 보내고, 나를 보러 오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내뱉어진 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 씨와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가 목을 쓸며 물었고, 스가와라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 나는 노란 장미가 좋아. 신사는 벗어둔 실크햇을 건드리며 말했다. 곧장, 가겠습니다. 카게야마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오늘 등이 꺼지지 않음을 예고했다. 너의 꾀꼬리 같은 줄리엣이 건너편 박스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자신의 오페라글라스를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죄를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당신은 꼭 고전처럼 말하시는군요.”
또 다시 한 걸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사랑은 치기어린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지 뭐예요, 라고 호들갑 떨며 말하던 유모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는 두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빨간 장미를 보내 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강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질투심 많은 노란 장미를, 아니면 주인공처럼 핀 안개꽃을.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깊은 바다, 그 끝을 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아직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다에는 끝이 없었고, 다만 침전만이 자리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꿈결을 걷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그의 손톱을 쓸어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련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탈함 속에 숨겨진 울음과 울분, 카게야마는 그것을 다만 엿볼 분이었다.
가라앉거나, 혹은 녹아들거나. 카게야마는 그들의 끝을 상상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장미같은 아가씨는 오페라글라스로 그 둘이 앉아있는 박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빛 너머에 있는 것은 명백한 질투였고, 카게야마는 그 시선에 목을 매달고 싶었다. 그의 종교가 사랑한다, 짧게 속삭이는 것이 그가 살아갈 이유였기에 그는 스가와라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함께 수장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사랑한다고 정면을 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상대의 눈은 곧 바다였기에, 그는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스가와라는 대답 없이 그에게 노란 장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노란 장미와 안개꽃을 담은 상자를 보낼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관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가라앉은 시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숨결을 기억하며, 익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음 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언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막을 올리는 종소리가 물 위에 떨어진 파문처럼 넓게 퍼졌다. 물 아래로 가라앉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목을 긋던 손길이 선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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