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5. 3. 22. 22:18
첫사랑은 감기처럼 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가른 전력에 '감기'라는 주제로 참가한 글입니다:3c 카게야마는 은근히 눈치가 없다 보니까, 자기를 짝사랑하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지나갈 것 같기도 해요. 추억 속에서 '그 때 선배가 좀 이상했었지' 정도의 의식으로 받아들일 것 같기도 합니다.
***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약속장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가지에서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졸업하던 봄에도 같은 게 피었었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미야기의 벚꽃이, 도쿄의 그것과 별로 차이 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쉬운 일이었다. 뭔가 더 변해 있을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머쓱하게 목 뒤를 쓸었다.
고향에서 맞이하는 봄은 간만이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와, 포털사이트의 팝업창이 떠 있었다. 요즘 감기는 독하대요, 오늘은 일교차가 크니까 주의하세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손가락을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쉽게 사라지는 팝업창에 이끌려 예전의 기억이 불쑥 찾아왔다.
스가와라는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올 봄에 돈다는 것처럼 독한 감기였다. 그의 질병은 여름 인터하이가 끝나고 도쿄에 갔을 때부터 시작했고, 그가 졸업 할 때 까지 내내 걸려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땀에 젖은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가만히 있다가도 열을 내던 그 감기를 떠올렸다. 봄벚꽃 같은 홍조가 내내 볼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아팠기 때문에, 자신이 주전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 생각을 했다. 그는 졸업식의 선배를 떠올랐다.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드는 순간은 갑작스러웠다. 감기 바이러스는 여러 종류가 있었고, 스가와라를 반 년 가까이 괴롭히던 것은 변종 같았다. 잔뜩 붉은 얼굴의 그에게 카게야마는 물었었다.
―아직도 감기인가요?
그 말에 스가와라는 대답했다. 응, 감기가 아직도 안 나았나봐.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 그가 그렇게 내뱉자 둘 사이에는 바람이 일었다. 따듯한 봄바람이었다. 꽃샘추위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고, 다만 벚꽃 잎들만 하릴없이 흩어질 뿐이었다. 졸업의 순간, 그 ‘끄트머리’에서 카게야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있어서 항상 어른이었다. 그렇기에 조언을 하기에도 난감했고, 배구가 아닌 진로를 가는 사람에게 괜히 말을 꺼내 심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카게야마에게 스가와라는 좋은 선배였고, 멘토였지만 정작 그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의 모든 일상이 배구를 기준으로 해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고, 스가와라가 감기를 이유로 그에게서 한 걸음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의 품에는 카게야마가 건넨 꽃다발이 있었다. 급하게 산 물건인지라 장미 이파리의 가장자리에는 검게 탄 자국이 있었다. 장미 다섯 송이의 중심에는 사탕 하나가 들어 있었고, 안개꽃이 풍성하게 들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스가와라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좀 더 수수하고 청순한 게 어울렸다.
자신과 맞지 않는 꽃다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 워, 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 울림이 아쉬웠다. 그 순간 봄바람이 스가와라의 색 옅은 머리카락으로 꽃이파리를 몰고 돌아왔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 온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꽃잎을 떼 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때, 스가와라는 두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볼에는 홍조가 들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선배? 하고 작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서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흔들리는 벚꽃잎 같은 모습이었다. 카게야마가 그와 어설프게 눈을 맞추니, 스가와라는 환하게 웃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감기에 걸려서, 갑자기.”
카게야마에게 목소리가 꽃처럼 돋아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건드렸다. 색이 들어 있는 안개꽃은, 하얀 꽃망울과 함께 모르는 영어가 적힌 크라프트지로 쌓여 있었고, 투명 포장지와 종이를 한데 묶은 남색 리본이 심연처럼 흔들렸다. 그 때 스가와라가 안고 있던 끄트머리가 탄 장미가 신경 쓰인 까닭이었다. 카게야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가 어느 쪽에서 걸어올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꽃향기에 기침했다. 그는 괜히 메뉴판을 넘겼다. 스가와라는 아직 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제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열심히 가고 있다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에는 눈썹이 예쁘게 휠까. 카게야마는 그게 궁금했다.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 스가와라는 여전히 과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동안 만나보지 않은 탓이었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감기에 걸려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조를 때도, 혹은 갑자기 오는 봄처럼 연락을 받아 만날 수 있을까 물어볼 때도 그는 언제나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그것이 과연 핑계일지 변명일지, 혹은 진실일지 카게야마는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스가와라를 걱정 할 뿐이었다. 감기에 걸리면 평형감각이 없어진다. 그는 그가 땅에 발을 잘 붙이고 사는지 궁금했다.
맑은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저에게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그의 짙은 눈썹은 예쁘게 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부스럭거리는 꽃다발을 그에게로 밀었다.
카게야마? 하고 말하는 것으로 스가와라는 꽃다발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했다. 카게야마는 몇 해 전 있었던 졸업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는 잠시 커피를 주문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의 발걸음에 미미한 기침이 달라붙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피가 나오기 전, 그 짤막한 시간에 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떨어져 있던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들의 대화는 스무스하게 이어졌다. 카게야마는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 보다 환한 웃음이었다. 뭔가 밝아지신 느낌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스가와라는 마음을 정리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마음을 정리했는데요?”
“그건, 비밀이야.”
스가와라는 긴 검지를 입술에 댔다. 카게야마는 그 광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먹어도 그는 고등학생 남자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커피가 테이블에 서빙 될 때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도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부는 바람에 벚꽃잎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이내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가와라는 그의 핸드폰 속을 바라보다가, ‘D’라는 알파벳 옆에 붙은 숫자에 관심을 가졌다. 카게야마는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짤막하게 말했고, 스가와라는 조금 울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된 마음으로 감격스러운 걸?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자작하게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그가 그렇게 기뻐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뭔가 어린애에서 졸업 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주어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에, 카게야마는 그 말이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카게야마의 애인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소식이 있느냐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나 보다 네가 먼저 애인이 생길 줄 몰랐어,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볼을 붉혔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스가와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숨은 무거웠고,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
카게야마가 먼저 운을 땠다. 스가와라는 응? 하고 물었다.
“감기는 좀 괜찮으세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몇 년 동안이나 감기에 걸려서, 애인을 사귈 여유도 없었지 뭐야. 스가와라의 웃음은 매우 상쾌했다. 카게야마는 쾌차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감기’는 사실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잠시나마 스가와라의 질병을 의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스가와라는 그 후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음으로 오히려 더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카게야마는 침묵을 유지했다. 딱히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밀어준 안개꽃을 바라보았다. 안개꽃의 꽃말을 아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됐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카게야마는 예전부터 하곤 했던 생각을 내뱉었다. 스가와라가 하는 말을 100% 이해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했다는 그의 엉뚱한 말을 들으면서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카게야마는 언제나 어린 애 일 거야. 스가와라는 안개꽃을 보면서 말했다.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안개꽃의 피지 않은 것 같은 꽃망울들과, 창 밖에 흐드러지게 날리는 벚꽃을 보다가,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저가, 눈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한참이나 보다가 웃어 보였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다 안나았나봐.”
“선배?”
“감기 말이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엺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병원에 가보는 건 어떻느냐 물었다. 그는 병원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뒷목을 쓸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손목과, 그의 목소리가 유달리 얇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열병이 휩쓸고 난 자리에는 재밖에 남지 않는 법이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 스가와라는 잔잔하게 말했다. 테이블 위의 커피 잔, 그 안의 수면이 애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쾌차를 빈다고 말했다. 그 단단한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앓을 힘도 없다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음이 꽃가루처럼 스며 있었다.
[하나쿠니] 동거 (0) | 2015.03.26 |
---|---|
[하나쿠니] 봄, 봄. (0) | 2015.03.26 |
[하나쿠니] 호흡 (0) | 2015.03.21 |
[카게스가/킨야하/하나쿠니] '하고 싶어' 라고 말 해 보았다 (0) | 2015.03.18 |
[오이스가] 홍삼 맛과 딸기우유 맛 사이. (0) | 2015.03.15 |
:D | 2015. 3. 5. 14:37
예전에 시린님과 풀었던 순수의 시대 느낌의 카게스가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글이 되었네요..
***
―이 천한 손이 그대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으로, 낯을 붉힌 두 순례자 같은 내 입술로, 그대에게 점잖게 키스하여 추한 자국을 씻고자 하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오페라글레스 안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줄리엣과, 머리를 잘 빗어 올린 로미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녀가 사뿐거리며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입맞춤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줄리엣이 걸음을 멈추자, 카게야마는 자신의 귓가에 다가온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쪽, 하면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은 순례자의 그것처럼 엄숙하면서도 악마의 입맞춤처럼 장난스러웠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물길 너머를 꿈결처럼 이야기 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그 끝에 땅이 있다던 이야기를 전 믿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실증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법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굳은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줄리엣 역 배우가 숨을 멈추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셋을 새는 그의 프랑스어는 키스처럼 유려했다.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 결심을 할 때, 그의 눈가는 어린 새의 날갯짓처럼 떨리곤 했다. 카게야마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착한 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너무 욕되는 일이랍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예견 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손가락에, 카게야마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귓가에서 줄리엣의 나머지 대사를 옮겼다. 성자의 손은, 순례자가 가져다 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었다. 카게야마는 오페라글라스를 두 눈에서 땠다.
그의 하얀 소악마는 카게야마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키스가 아닌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가 웃었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이, 그의 눈꼬리에 자리한 야살스러운 점과 대비되어 있었다. 그는 남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성자나 거룩한 순례자도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박스석은 이미 연극의 한 무대였다. 스가와라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목례했다. 하얀 문조의 깃털처럼 부스스한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카게야마 또한 얼떨결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그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짧은 연극이 끝남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확대되어 보이는 세상에, 좁은 무대가 다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차례 입맞춤을 교환한 상태였다. 그들의 죄는 입술 안에 있지, 스가와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커튼에 손을 뻗었다. 옳지, 하며 칭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박스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뿐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더니, 자신의 숨결을 내어 불을 꺼트렸다.
“스가와라 씨.”
“그대의 눈에서 빛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는 어린애 같이 말했다. 치기어린 그 목소리에는 분명 카게야마의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과도 관련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종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는 느리게 스가와라의 얼굴 선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튼 너머의 세계를 상상했고,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성녀님, 손으로 하는 키스를 입 안에 담게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그래요, 스가와라가 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 줄리엣은, 서툴게 흔들리는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카게야마는 엷게 꿀을 발라 반짝이던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의 세계에 다가갔고, 그의 신앙에게 입을 맞추었다. 숨과 숨이 닿은 순간은 환희였으나, 탐욕스러운 혀가 섞이며 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절망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가와라씨, 짧은 치욕 끝에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살포시 웃었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닿아 있었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가와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들어줄지라도 성자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의 천사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흘렸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불안함은 숨결에 담아, 서로의 위 속에 가만히 담기곤 한다. 그 침전의 순간을 카게야마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서툴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다리는 스가와라의 다리 사이로 서툴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폭력적인 애정에 스가와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계집아이의 소리 같은 그 음색에, 카게야마는 그제 만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좋은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내 입술의 기도를 받아주세요.”
스가와라는 그녀와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스가와라의 목덜미를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였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뛰는 그의 맥에 키스했고, 뱀파이어처럼, 그 곳을 혀로 핥아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가이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자신의 입술이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 제 목이, 당신의 죄를 짋어지겠군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제 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고, 이내 자신의 왼손이 그의 목울대를 자르듯 쓸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파국이겠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종교가 될 수 없지요, 스가와라는 예쁘게 말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를 담고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죄인이었어요.”
“그럼 내 죄를 돌려주오.”
카게야마는 로미오처럼 말했고, 스가와라는 ‘코우시’처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줄리엣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익숙한 곡의 변주, 그 날선 느낌.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들리다,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키스에게도 이유를 붙이시네요.”
스가와라가 말했다. 한 막이 끝난 듯 박스석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오페라글라스를 챙겼다. 스가와라가 연 문에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의 성자는 밖에서 성냥을 꺼냈다. 은제 성냥갑 안에는 인이 발린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약간의 부딪힘은 다시 일렁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한동안,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심해 같아요, 카게야마가 속삭인 말을 스가와라는 무시했다. 그의 종교는 불친절하였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 시간을 인내할 만큼 똑똑하지도,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스가와라는 턱을 괴었고, 커튼을 열었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목 카라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하얀 목 아래에 피어난 붉은 열락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돌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스가와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말하는 어조로 큰일을 말하였다. 그는 긴 검지를 제 목울대에 대고, 천천히 그었다. 교수형 당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카게야마가 말하는 목소리에 그는 엷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에 꽃을 실은 마차를 보내고, 나를 보러 오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내뱉어진 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 씨와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가 목을 쓸며 물었고, 스가와라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 나는 노란 장미가 좋아. 신사는 벗어둔 실크햇을 건드리며 말했다. 곧장, 가겠습니다. 카게야마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오늘 등이 꺼지지 않음을 예고했다. 너의 꾀꼬리 같은 줄리엣이 건너편 박스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자신의 오페라글라스를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죄를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당신은 꼭 고전처럼 말하시는군요.”
또 다시 한 걸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사랑은 치기어린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지 뭐예요, 라고 호들갑 떨며 말하던 유모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는 두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빨간 장미를 보내 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강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질투심 많은 노란 장미를, 아니면 주인공처럼 핀 안개꽃을.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깊은 바다, 그 끝을 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아직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다에는 끝이 없었고, 다만 침전만이 자리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꿈결을 걷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그의 손톱을 쓸어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련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탈함 속에 숨겨진 울음과 울분, 카게야마는 그것을 다만 엿볼 분이었다.
가라앉거나, 혹은 녹아들거나. 카게야마는 그들의 끝을 상상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장미같은 아가씨는 오페라글라스로 그 둘이 앉아있는 박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빛 너머에 있는 것은 명백한 질투였고, 카게야마는 그 시선에 목을 매달고 싶었다. 그의 종교가 사랑한다, 짧게 속삭이는 것이 그가 살아갈 이유였기에 그는 스가와라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함께 수장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사랑한다고 정면을 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상대의 눈은 곧 바다였기에, 그는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스가와라는 대답 없이 그에게 노란 장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노란 장미와 안개꽃을 담은 상자를 보낼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관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가라앉은 시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숨결을 기억하며, 익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음 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언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막을 올리는 종소리가 물 위에 떨어진 파문처럼 넓게 퍼졌다. 물 아래로 가라앉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목을 긋던 손길이 선연하였다.
[하나쿠니] 홍차, 우유와 설탕을 가득 넣어서 (0) | 2015.03.07 |
---|---|
[오이스가] 마티니, 보드카가 아닌 진으로 (0) | 2015.03.07 |
[하나쿠니] 잠자는 자취방의 공주님 (0) | 2015.03.04 |
[오이스가] 청어 간장 조림과 토마토 된장국에 어울리는 반찬에 대하여 (0) | 2015.03.01 |
[오이스가] Europa (0) | 2015.02.25 |
:D | 2015. 2. 8. 22:00
이 그림을 봤습니다. 짝사랑이 좋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나 라벨의 '물의 유희'를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림을 한 장 본 적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여러 번 덧발린 회색이 꼭 그를 생각나게 했다. 담담하게 발린 눈들은 멀리 돌아 먼 숲을 비췄다. ‘유화’라는 단어에 으레 붙어 있곤 하는 거친 붓 느낌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복사본을 잘라내, 책 안에 담았다. 녹지 않은 길, 그 너머 쌓인 먹구름들은 꼭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의 겨울이었다.
목 끝까지 얼어붙은 계절을 겪다보면 그 뒤에 봄이 있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카게야마는 옷깃을 여몄다. 패딩 너머로 겨울이 스몄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겨울」과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는 먼 길에 있던 흰 나무숲을 상상하며 걸었다. 발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계절만 되면 그를 떠올리곤 했다. 카게야마의 겨울은 ‘그’와 마주닿아 있었다. 그에게 봄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끝에 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겨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그 일방적인 쌀쌀함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대용품이었다.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대신하는 편의점 초코파운드 빵이나, 눈이 내리는 모양을 흉내낸 스노우볼이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또 멀리 떠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조금 추웠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랭한 방이 그를 반겼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 정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카게야마는 화가의 이름 중에서 ‘알렉세이’라는 단어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다음을 쫓아오는 이름은 그에게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그 네 음절을 맘에 담아둔 것은,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 닮은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에게 의미 있는 계절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발 끝부터 톱밥이 차오름을 느꼈다. 겨울이 찾아올수록 속이 마모되는 것 같았다. 추위는 따듯함을 먹는 짐승이었음으로,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리 걸려있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겨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봄은 찾아오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겨울과 봄, 그 어드매의 ‘아무것도 아닌 계절’을 살고 있었다. 스페어 키, 스노우 볼, 싸구려 초코 파운드, 준초콜릿, 그는 자신과 비슷한 물건들을 나열하다 소파에 누웠다. 겨울 향기가 짙게 났다.
보자고 했으면서요, 카게야마는 뒤늦게 문자를 보냈다. 죄책감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었다. 그사람은 선배가 친구밖에 안 될걸요, 그는 괜한 말을 덧붙였고, 전송했다. 손가락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는 가끔씩 최소한의 온기마저 앗아간다. 뼈가 굳는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각이었으나, 이 계절에는 흔해 빠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먹구름이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회상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 다 읽은 편지, 낡아빠진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로 손을 쓸었다. 겨울이 쓸었던 자리였다. 그의 지문이 묻은 자리들은 미미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손끝은 따듯한 편이었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고장 난 메트로놈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나, 그 사람이랑 키 비슷해요. 완벽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선배보다 크니까요,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을게요. 당신 몸에 흔적 하나 내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와 당신이 봄을 찾을 때 까지만 날 이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카게야마가 서툴게 내민 손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잡았다. 그 또한 겨울날, 온기가 간절했을 것이었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기에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뒷모습, 그 발끝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카게야마 어느 날 스가와라가 흘리듯 했던 말을 반추했다. 이름에 그림자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 할 수 없었다. 웃었던가, 혹은 울었던가. 그는 그가 뒤돌길 그저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봄을 흉내 내는 계절이었다. 껍데기 같은 사랑, 박제품 같은 사랑, 카게야마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싸게 구한 복제품이지만 그 아득함은 깊게 담겨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나무 숲은 멀리 있고, 드문드문 자라있는 풀들은 색이 없었다. 그 끝없는 겨울, 그 짝사랑.
둘이 겪고 있음에도 이어지는 짝사랑. 둘이서 하고 있지만 혼자서 하는 연극, 모노드라마. 여러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연기, 그 향은 기억할 수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배구공이 손에 잡혔다. 그는 배구공을 위로 올렸다, 다시 받고 위로 올리길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니, 겨울이 겨울임을 알았기 때문에 봄을 자처했었나, 카게야마는 배구공을 아래로 내렸다. 공은 힘없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혔다. 꼭 저 같은 꼴이었다. 그는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방안에 외풍이 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찬 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속은 온통 톱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박제된 채, 틀린 방향으로 이어간 사랑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알렉세이가 그린 「겨울」에는 길이 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얇은 부분은 온전히 숲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고정된 길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겨울에게는 봄이 필요하다. 얼어붙은 제 몸을 녹이고, 따듯함을 찾기 위해선 봄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는 회전한다. 카게야마는 소파 등받이를 보고 돌아누웠다. 눈꺼풀에 먹구름이 올랐다.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얼어있는 채로 가만히,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다. 지독한 슬픔이었다. 유화에서 색을 만든 것처럼, 그의 사랑은 슬픔에 개어 캔버스에 여러 번 덧바른 채 겨울로 나타났다. 그는 입술을 쓸었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숨결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딪히지 않는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몸 위에 안개처럼 서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봄이 될 수 없었다. 혼자 누운 소파는 한 사람분의 슬픔을 담았다.
겨울이 돌아야 봄이 온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그 그림은, 스가와라의 짝사랑과 닮았던 그림은 어느새 카게야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걸음쯤을 앞으로 다가갔고, 액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깰 수 없었다. 던질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속삭였다. 사람의 바람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액자 뒤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액자 뒤편을 감싼 판, 그 판을 갈아 놓은 톱밥같은 것이 그의 목 끝을 답답하게 덮었다. 그의 그림자에 서리가 피어올랐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다시 속삭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
[오이스가] Europa (0) | 2015.02.25 |
---|---|
[오이스가] 오랑제뜨 (0) | 2015.02.14 |
[오이스가] '좋아'의 다른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0) | 2015.02.08 |
[카게스가] 아버지를 찾습니다, (0) | 2015.02.05 |
[카게스가] 부스 바깥, 너 (0) | 2015.02.04 |
:D | 2015. 2. 5. 14:43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서툴게 따라 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꾼 꿈을 바탕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어렵네요. 세터샌드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좋습니다. 단편으로 쓴 것 중에 가장 길게 나와서 당황스럽구 그렇습니다. 생각 한 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 못 해서 서러워요.. 역키잡 느낌을 내고 싶었ㅆ씁니다.....
***
야치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원할 것처럼 켜져 있던 불빛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수신음이 길었다. 시미즈는 아직 깨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기묘한 생활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낮동안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관처럼 꾸며진 방은 여러 겹의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야치는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단지 독특한 것 뿐이었다.
야치는 오늘 늦는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룸메이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퇴근하고, 잠에 들기까지의 단 몇 시간뿐이었다. 그는 오늘 잔업을 설명해야만 했다. 시미즈는 눈에 띄게 실망할 것이었다. 그녀는 안경다리를 매만지다가, 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겠지. 야치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상상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야치? 하고 묻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잔업이니?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광고를 내시는데, 그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시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피를 쓰기 위해서는 사연을 들을 필요가 있는 법이란다.
시미즈는 조곤조곤히 이야기했다. 야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오늘도 사장님이 짙은 남색 벨벳 코트와, 모노클을 끼고 오셨냐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야치는 사장님의 ‘옷차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질 좋은 실크 셔츠와 남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양복을 입고 왔다. 그는 항상 양산을 받치고 있었으며, 가죽 장갑과 외알 안경을 상비하고 다녔다.
별난 사람이었다. 야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빙글거리는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 시간 됐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병아리 같은 목소리구나, 그럼요, 그녀는 몇 가지 안부를 더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야치 씨, 하고 히나타가 그녀를 불렀다. 야치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사장실로 통하는 깊은 문을 열었다. 시미즈의 방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우리 사장 참 독특하지, 히나타가 야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야치에게 불빛이 나오는 건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녀가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작은 녹음기와 카세트테이프뿐이었다.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잘 다녀와, 그의 태양 같은 목소리에 그녀는 위안을 얻었다. 사장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장의 화내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기억했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힘 내. 히나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같은 문이 닫혔다. 그녀는 어둠속을 잔잔히 걸어갔다. 작은 등불이 그녀가 앉을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히나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의 취향이었다. 야치는 조금씩 그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카세트테이프를 장착했다. 그는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벨벳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항상 끼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놓은 채 였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잡아먹지 않으니 안심해도 괜찮아.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님, 야치 히토카입니다. 녹음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매뉴얼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 어스름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분위기는 죽음처럼 무거웠다. 장례식장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테이프가 가만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메모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뷰는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음악소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야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가 첫 마디를 때길 기도했다.
“오늘 아침, 자네가 입사할 때 냈던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었어.”
그는 한탄하듯 흘려 말했다. 야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학 시절에 썼던 레포트였다. 그녀는 사장이 그것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별다른 스펙이 없는 그녀가 바로 메이저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장의 젊은 외견과는 비교되는 취향이었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것을 좋아했다. 그는 아날로그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고전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야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괴짜 같은 말이었다. 그는 빛에서 멀어지듯,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어렴풋하게 촛불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얬다. 오늘은 화장을 하지 않았어,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소포클레스는 나보다 몇 세기나 나이가 많아.”
“그렇죠.”
“나는 거기서 위안을 느낄 때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야치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겠나? 카게야마가 말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벳으로 만든 자신의 양복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 끝에 닿는 감촉에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숨결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이 유리 안에서 반짝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쓸었다. 그는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네에게 손 끝 하나도 대지 않아. 나는 자네에게 이 거리 이상 다가갈 생각이 없다네. 위협이 들면 나에게 등불을 던져도 좋아.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이 선 육식동물 앞에 서 있는 감각이었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약속해. 그가 말했고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보호자에게 연락은 했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미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에게서는 그녀와 같은 느낌이 났다. 겨울철 나무수국처럼 비쩍 말라버린, 수분 따위 없는 그 건조함이 닮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룸메이트와 같은 느낌이라 생각 하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 할 때 질문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지시했다.
“네 기준에서 늙은이라서, 풀어 놓을 이야기가 많아. 늙은 사람은 보통 자신의 말이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세월을 기억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부터 힘들어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질문이나 의문점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을 ‘세월’이 얼마나 큰지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는 공고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허락받은 칸을 생각했다. 가로 10cm에 세로 5cm. 그 작은 공간 안에 담길 추억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앞자리에 있는 물을 가리켰다. 그녀는 물병을 쥐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물병 소리조차 나지 않게 해주게. 그의 요구에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한 밤하늘 색 벨벳 재킷에 오렌지빛 등이 들었다. 그는 그게 거슬리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등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게. 나는 불을 피울 수 없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준비 되었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고아였네. 나의 아버지는 이런 나를 거두어준 분이지.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코우시, 일본 출생이지만 우리는 영국에서 살았어. 나는 왜 내가 동양인임에도 그 곳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이런 몸을 가지기 한참 이전의, 일이니까. 나는 스가와라의 화동이었네. 화동을 알고 있나? 요즘 ‘화동’이라는 말은 결혼식장에서 주로 쓰이곤 하지. 버진로드의 앞자리를 채우면서 꽃을 뿌리는 아이들을 의미하곤 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의 화동은 아니었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어. 나의 아버지, 앞으로 스가와라라고 지칭하겠네. 내 아버지는 두 사람이니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메모지가 있다면 메모해도 좋아. 자네의 앞자리에 놓아두라고 히나타에게 부탁했으니까. 그래, 내가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적어두게. 아무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부들이 모이는 장소로 갔네. 마차를 꽃으로 장식하는 게 예의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곳은 꽃을 파는 집시들이 모이곤 했지.”
야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라고 하셨나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서나 쓰였던 이동수단의 이름이 생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옛날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야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니, 실로 괴물이지. 마차가 자동차가 되고, 그 자동차마저 비행기가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세월에 갇혀 지내는 짐승이니까. 자네의 시간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해하네.”
“이해하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나?”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체처럼 말라가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미즈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하고 묻고 혼자 그 답을 찾아냈다.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겁이 나면 등불을 쥐게, 그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등불은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숨결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얇은 유리막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등불 뒤에 달린 숨구멍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노련하게 그를 배려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쓸었다. 인간적인 행동이었기에 야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꽃을 좋아했어.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것은 짧게 호흡하고 짧게 져버리는 생물이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생물이지 않나, 나는 그것들을 매일 아침 화병에 꽂아 놓는 일을 했네. 어린아이가 한 아름 품에 안아봤자 얼마나 안을 수 있겠나? 나는 맨 손으로 갔다가 바구니 두 개에 꽃을 실어 움직였어. 실로 비효율적인 인사人事였지만 나는, 스가와라가, 내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이제는 알고 있어. 어린아이가 뛰어다닐 때 그 작은 심장이 뛰는 것이 퍽 신기했던 것이지. 낮에는 그가 자느라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밤이 가까워 오고 어스름이 질 때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는 마치 시계처럼 그를 잠에서 깨웠겠지.
그는 시체처럼 잠을 잤어. 아니 시체, 그래 시체야. 우리의 심장은 네 것처럼 뛰지 않으니까. 꽃을 살 때는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 백작님 앞으로 라는 인사를 했단다. 나는 집시들의 유명 인사였어. 매일 아침마다 꽃을 사러 왔으니까. 마차에 처음 꽃을 장식할 생각을 한 것도 나의 아버지였어.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했으니까. 실로 감상적인 뱀파이어, 가 아닐 수 없었지. 오래 살다 보면 으레 하게 되는 일이지. 그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영원히 그 시절에 고정당해 있었어. 지금의 나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치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그녀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국, 스가와라 백작, 화동. 그녀는 몇 가지 키워드를 메모했다. 그는 그것을 다 적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제 먹은 반찬을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야치는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이 어떤가? 그가 농담을 건넸다. 야치는 심장이 떨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무슨 느낌인지 잊어버렸어. 그는 연극 배우처럼 웃었다.
“내 아버지는 꽃이 많이 필요했어. 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과 친구였지. 그들의 아버지와도 친구였어. 그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경조사에 꽃과 돈을 보냈네. 「미스터 메이플에게, 자네의 결혼식에 꽃을 보냈던 것이 어제인 것 같고, 당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낸 지가 바로 정오 같은데, 이제는 자네의 장례식에 꽃을 보내네.」 라는 메시지와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지. 이걸 전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네. 어린아이가 반바지와 스타킹을 신었을 때부터, 벨벳으로 된 정장을 맞출 때 까지 내 일이었어. 아직도 그의 필체와, 그가 하던 서명이 기억나네. 아직도 죽지 않은, 스가와라 코우시로부터. 블랙 유머였지.
스가와라는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지. 햇빛을 보기 싫어했어. 관처럼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다가, 내가 사온 꽃들을 보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 그는 항상 나한테 이렇게 말하곤 했어. ‘어린아이는 볼레로처럼 자라는구나.’ 하고. 그 때 라벨의 곡을 좋아했는데…, 그 때 마다 나는 물었지. 멍청했으니까. 그럴 때면 스가와라는 태양과 가장 먼 존재인 주제에 햇살처럼 웃었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어. ‘볼레로는 처음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점점 그 몸집을 키우잖니. 눈치 채지 못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처럼. 너는 꼭 그렇게 자란단다.’ 하고.
어린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나는 매번 그의 무릎에 앉아서 스가와라 씨, 나는 얼마나 자랐나요? 오늘도 자랐나요? 볼레로처럼? 하고 물어보곤 했어. 날 향해 웃어주는 그 얼굴이 좋았네. 사랑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사랑이었네. 지독한, 짝사랑이지.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단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시체처럼 차가웠지. 냉한 겨울밤 같았어. 마른 자작나무 같기도 했지. 그러나 나는 그게 이상한다고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나는 그가 스라와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야치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잠시 멈추겠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슬퍼 보였다. 그는 잠시 일렁이는 불꽃을 쳐다보다가, 제 손목을 매만졌다. 항상 실크 셔츠로 가리고 있던 부분에 두 개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아닌가?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 살았어, 그리고 오래 살 거야. 카게야마는 별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야치, 너와 히나타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고, 너희의 아들들에게 화환을 보내겠지. 나는 너희의 장례식에도 꽃을 보낼 거야. 아마 결혼식에 보냈던 것과 닮은 꽃이겠지. 내 나름의 유머니까, 그리고 이렇게 서명하지 않을까. 아직도 죽지 않은, 카게야마 토비오로부터. 그는 농담을 하는 듯 웃었다. 그의 목 끝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야치는 공감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 할 거야. 그가 통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쌓였음에도 그의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야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무섭지 않나? 카게야마가 질문했고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 끝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그는 잠시 멈추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가끔 외출을 했네. 밤이었고, 우리는 사냥을 나갔어. 그는 라이플을 가지고 있었네. 은으로 장식된 건 아니었어. 금으로 세공 된 것이었지. 그는 거기에 납으로 만든 총알을 채워 넣고 다녔지만 한 발만은 은이었지.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모든 탄환이 은이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어.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을 속삭일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스가와라에 대한 것들은 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지.
그는 명사수였단다. 프록코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사냥을 했지. 탕, 하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총에 맞은 짐승들을 찾으러 갔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단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개들이 피를 먹게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찾은 사냥감들은 피가 하나도 없었어. 그가 마신 것이었지. 아니, 마신 것이겠지. 내 가정이지만. 그 때 마다 나는 그에게 물었어. 왜 이렇게 되었나요? 그는 능숙하게 말했지. 은으로 된 탄환을 써서 그렇단다. 은은 피를 마시지.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빛났단다. 달빛은, 환한, 은색이지.
나는 은색이 그의 색이라고 믿었어. 그의 성에는 은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또한 겨울의 눈 색이 그라고 믿었어.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닮은 색이지. 그는 나의 세계였고,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순애의 대상이었어.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지. 더러운 영국의 뒷골목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였고, 나에게 그의 이름에 쓰인 언어, 그러니까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것이었지.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어. 나는 내 이름에 쓰인 글자를 퍽 좋아한단다. 그가 나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지. 이름이란, 대단한 물건이야.
그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의무였다. 나는 볼레로처럼 그에게 젖어들었어.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소리로 들리지도 않던 소리로 노래하던 마음은 그렇게 점점 처졌단다. 내 음악이 온전히, 오롯이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안 건 어느 양복점이었어. 구름이 겹겹이 낀 어느 날 그는 검은색 양산을 들고 외출을 나섰단다. 그는 검은 모자를 썼어. 여성용이었지. 장례식에 나가는 것처럼, 그의 흰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검은 레이스가 가리고 있었어. 그는 검은 코트를 입었지. 벨벳이었다.
늙은이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해.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청년기를 관통했던 물건이라고 생각하곤 하지. 그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인지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뒷골목에 있는 낡은 양복점으로 들어왔단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면서 노부부는 호들갑을 떨었어. 그들은 ‘메이플’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단다. 그들은 스가와라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 양장점의 불이 꺼졌고,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노파가 물었어.
오늘도, 스가와라님의 양복을 맞추십니까?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어. 달빛이 흔들렸고, 내 세계가 흔들렸지. 이 친구의 양복을 맞출 거야, 벨벳으로, 가장 좋은 벨벳으로. 그는 노래하듯 말했어. 그는 오랜만에 외출에 기분이 좋아 보였지. 집에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꽃을 끌어 모아 화병에 급히 꽃은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서 사이즈를 쟀지. 나는 그 때, 백 팔십 센티미터였어. 지금과 똑같은 키고, 똑같은 몸무게였지. 아드님이 건장하시군요, 노인은 내 뛰는 심장을 신기해 하며 물었어. 스가와라는 예쁘게 웃으면서 장성하였지, 하고 키득거렸단다.
기묘한 광경이었어.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분은 거의 없어진 시기였지.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여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어.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존대를 쓰며 몸을 굽실거리는 모습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스가와라 코우시는, 스가와라는, 코우시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세계였고 절대적인 존엄자였다. 그는 양복이 완성 되면 직접 받으러 올 거라고 대답했어. 메이플 부부는 부디 날이 계속 흐렸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지. 그는 그 농담에 머리를 숙여 인사했단다. 실로 우아한 광경이었지,
아직도 나는 그 때의 꿈을 꾼단다. 영원을 사는 자들은 추억에 기댈 수밖에 없어. 모두가 변하는 그 상황에서 혼자 변하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야치는 그가 느낄 고독을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 오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야기는 더 길거야, 역사책 같은 이야기지. 그의 배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치는 녹음하던 테이프를 멈추고서 등불을 들었다. 히나타에게 말해 두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야치는 그가 핸드폰에서 펜을 꺼내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왜 카게야마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그녀는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난데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파자마파티를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그녀가 문에 도착할 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히나타도 알고 있었어? 야치가 물었다, 히나타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셋만 끌어안고 있는 비밀이야. 그 ‘비밀’이라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 속의 ‘메이플 부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에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야치는 다시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도망칠 줄 알았다. 카게야마의 말에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니까요, 하는 이야기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그의 웃음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손을 매만졌다. 물이 닿아 일시적으로 온기를 빼앗긴 탓이었다. 야치는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는 다시 비밀을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한 것이 또 하나가 있네. 왜, 그가 인간에게 접근했고, 나를 길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어. 나는 이 사색을 백 년 가까이 지속했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답을 할 수 있었어. 영원을 사는 존재는 변화에 무뎌진단다.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혹시 나날의 자그마한 변화에 관심을 둔 적이 있는가? 어제 봉오리 져 있던 목련이 오늘은 소담스럽게 꽃을 틔우고, 그 꽃잎이 내일 혹은 일주일 후에 떨어져서 갈색으로 변하는 광경에 시선을 둔 적이 있는가? 그런 사소한 변화도 몇백 년이 쌓이다 보면 특별할 수 없는 일이 된단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야. 인간은 백 년 가까이 삶을 지속하지. 사유하는 동물이야. 어제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며, 어제의 호흡과 내일의 호흡이 다르지.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변화해. 달이 줄어들고 차오르는 것 같은 기계적인 변화가 아니야. 또한 심장소리, 그 심장소리를 가지고 있단다. 나와 가장 닮았지만 다른 존재가 인간이지. 그 성장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사치이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표현하는 시계와 같은 일이지.
그래서 먹지 않고, 기다렸던 거야. 참아가면서, 또 참아가면서. 스가와라 또한 그랬을 거야. 내게 이 대답을 알려준 것은 히나타였어.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단다. 그에게 꽃 심부름을 시킬 수 없었지. 대신 나는 그에게 신문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어. 그가 커가는 과정을 눈 안에 담고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이자 내 사랑, 내 영원인 스가와라를 이해할 수 있던 거지. 영원이란 존재는 이렇게 미련하단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까? 다행이 양복을 받은 날도 짙은 안개와 구름이 함께 하는 날이었단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내가 날씨를 이야기 하자 그는 소년처럼 기뻐했었다. 그 웃는 얼굴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그래 뛰게 만들었었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듣는 것 같았어. 첼로 같은 선율로 사랑했었고, 그 반주를 하는 피아노의 음색처럼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
그와 나는 같은 마차를 탔어. 그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자신의 아들로 설명했지. 마차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어. 네가 점점 더 커간다면, 너는 나의 아버지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 그는 영특했고,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그 양복점에서 메이플 부부에게,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단다. 물론 부정적인 사실이었지. 베토벤의 「운명」처럼 난폭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였단다.
미스터 오이카와께서 서신을 남기셨어요. 노파는 그렇게 말했어. 스가와라는 동요하지 않았지. 그는 천천히 시간을 들였어. 내가 벨벳 양복을 입은 걸 바라보았지. 그는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었단다. 그의 눈 색과 닮은 호박이었어. 그 보석은 송진이 박제된 거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위에 달린 브로치는 제법 멋있었어. 나는 화동에서 이렇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게 들떠 있었지.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처음 말한 그 ‘사랑한다’로 받아들였지. 나도, 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단다.
아픈 말이지. 아픈 말일 수밖에 없어. 내가 들었던 유일한 대답이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소리였으니까. 내가 기억할 때 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착각’이라는 말이 따라온단다. 나는 그 말이 싫어. 네가 쓴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착각’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었어. 물론 다른 말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소포클레스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어쩜 그렇게, 욕망을 담고 있는지. 인간들이 고전에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다고 말했지. 미스터 오이카와 때문인가요?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어. 그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단다. 나의 아버지야,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려 있었다. 그는 그의 라이플에 은제 탄환을 가득 채웠어. 그 탄환을 채운 것은 나였다. 그가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지. 그는 나의 그 행동에 감사했어.
나는 그에게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사랑이었지. 그는 고개를 저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란다. 나는 짐을 쌌어. 그가 만들어준 양복은 가방 가장 안쪽에 넣었지. 그는 마부를 고용했다. 메이플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달라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바라지 않았어. 그는 보석들을 챙겨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 그 때, 증기선이 막 만들어졌던 때였어. 그는 증기선 두 표를 끊었단다. 급하게 끊었기 때문에 후미진 삼등석 방이었어.
우리는 열흘 후에 출발하는 그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다시 기반을 찾기로 한 거지. 그러나 언제나 운명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오이카와’의 짓이었어. 무언가 질문이 있나?”
야치가 손을 든 것을 발견하고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까, 처음에,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장님께서 찾고 있는, 그녀의 지적이 반갑다는 듯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거야. 너는 꽤나 좋은 청자로구나.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궁금한 게 끝났냐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벅찼다.
“중간에 마부가 도망쳤다. 말들이 죽었어. 그는 그걸 허탈하게 보면서 오이카와의 짓일 거라고 말했지. 숲 속에는 동물들이 없었고 햇빛이 들어왔단다. 나와 그는 밤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간이었고, 그는 나 때문에 느리게 걸었지. 그는 심하게 배고파했어. 허기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의무와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힘들어서 멈춰 서 있을 때 그는 숲을 돌았어. 아무것도 마실 게 없다는 걸 알고 그는 나무수국처럼 웃었지.
우리는 버려진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 성모상이 나와 그의 위에 있었단다. 자애롭게도 팔을 벌리고 있었지. 나는 그에게 팔을 내밀었어. 나를 마시고, 도망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게 마셔져 죽는 것을 희망했다. 지금 나이로 갓 고등학생이었어. 그 때는 성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피를 마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로, 내 손목을 세게 그었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그는 매우 갈망했어. 지독한 갈증이 피어올랐고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그 광경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천사, 나의 영혼, 나의 불꽃, 나의 모든 일렁이던 세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를. 그는 작게 난 내 상처를 서툴게 핥았다. 나는 그와 섹스하는 기분이었어. 지독한 오르가즘이 내 몸을 가득 채웠지. 나를 비워 주세요, 내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울면서 나를 마셨어. 그의 하얀 피부를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더럽혔고,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살갗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흡혈의 순간은 황홀했단다. 나는 어지러웠고 그는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어. 그는 자신의 송곳니가 나에게 상처를 낼 까봐 무서워했어. 이상한 일이었지. 뱀파이어인데,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인데! 자식에게 못된 짓을 한 아버지 같았지. 그가 핥은 상처는 멎지 않았어. 나를 죽여줘요, 나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했어. 왜냐하면, 내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게 가장 베스트였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부성애든, 미물을 사랑하던 자비던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은 매우 달콤한 일이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끝이 결국 자살인 것도 그와 같아. 사람의 기억은 끊임없이 마모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잊히는 것을 슬퍼한단다. 모순된 일이야. 기억되려고 하고 끊임없이 이름을 만들지.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고 그는 착한 아이야,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오이카와’의 손길에서 벗어나길 바랐을 뿐이었지.
스가와라는 나를 성당 바닥에 눕혔어. 나는 그의 얼굴과, 성모상을 바라보았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도피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어. 그는 나의 손목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지. 나는 그가 도망친 줄 알았어.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끊기려던 시점에 나의 또 다른 아버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완벽했겠지.
그는 나를 보면서 웃었어. 나의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것은 분명이 악마였지. 그는 나를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면서 웃었어. 오이카와는 입에 스가와라의 이름을 담았지. 안녕, 난 네 아버지가 될 오이카와 토오루란다, 너의 스가와라가 나에게 울면서 부탁했어. 뱀파이어가 우는 걸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너는,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강제로 의식을 붙들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는 나의 손목을 보았다. 나는 내 손목을 감추었어. 대단한 사랑이구나,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나의 멱살을 잡았지. 그는 내 피를 밟고, 내 목에 입을 맞추었어. 그의 송곳니로부터 피가 빨리는 게 아니라 독이 들어왔다. 뱀파이어의 피였어. 그는 자신이 나의 아버지가 될 거라 속삭였지. 라벨의 「현악 사중주, F장조 2악장」처럼 내 심장에서 독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날 이후 라벨을 듣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는 내가 변화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봤어. 성당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잠들지 않았지.
나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견뎌냈어. 그는 내가 모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사랑했고, 나 때문에 스가와라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하지만 내 볼모는 스가와라였지. 그가 담보가 되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어. 그가 없어진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는 빈 껍데기였다.
오이카와는 여자를 잡아왔다. 손목을 무는 것도 베스트야, 그는 나에게 뱀파이어로서의 기본 자질을 알려 주었어. 나는 그렇지만 목을 물었다. 상처를 크게 내어 피를 빨았어. 손목은, 나의 순수한 사랑의 장소였다. 그는 그 때 마다 나를 비웃었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를 떠나갔어.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스가와라가 남긴 보석을 바꾸어 증기선의 일등석 칸을 예약했다. 나는 파티에 나갔고, 매너 있는 신사인 척 행동했다. 여자를 잡아 그들의 피를 빨아 버렸어.
돈이란 건 대단하더구나, 왜 뱀파이어들이 재물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지. 나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여자들이 사라졌지만 내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더군. 여자들은 끊임없이 다가왔고 나의 식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목을 물었어. 섹스의 전초전 같은 느낌으로, 애무하듯이. 그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다 죽어갔다. 나는 프랑스에 갔고, 거기에서 노인들을 꼬셔냈어. 노인이란 어린아이에게 친절하지. 나는 그것마저 이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스가와라를 만나야했어. 그것이 나의 삶의 이유였다.”
무섭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의 순애에 눈물지을 뿐이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사람의 부분이 남아있다는 거야. 카게야마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야치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비효율적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거란다. 카게야마는 담담히 쏟아냈다.
야치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쯤,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계속 해도 괜찮겠니, 그는 아이에게 묻는 것처럼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 같구나,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작고 여린 동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시미즈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이름을 꺼냈다. 그렇구나,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롤리타」의 앞부분을 기억 하니?”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 리- 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카게야마는 연극배우처럼 책의 첫 문장을 읊었다. 야치는 짧게 떨었다. 똑똑한 아이구나, 카게야마는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둘 사이에 쌓인 서사들이 그녀가 그 문장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야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자작나무 같을 것이라고 짐작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안타깝게 읽었고, 재미있게 읽었어. 나는 그걸 쓴 게 사랑을 하다 영원에 박제당한 뱀파이어인줄 알았다. 스가와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 정도, 그 느낌이었어.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를 잠식할 듯 태워가면서 나를 살아있게 만든 욕망. 언론사를 차린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모든 정보들을 매일 아침 히나타에게 가져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오이카와 토오루, 늙지 않는 사람! 어둠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길 가장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신문사였으니까.
그래서 광고를 내고자 했다. 스가와라, 라는 이름, 그리고 코우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자 했지. 이 결심을 한 것은 얼마 전 깨달았던, 그가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부성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삶의 이유였던 적이 있어. 이렇게 변한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한테 남아 있는 영원만큼 그를 갈구할 거란다. 그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지.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고집이 늘어가는 거란다. 내 입 속에서 스가와라, 라는 이름이 발음될 때 마다 나는 그를 욕망한다. 욕망 할 수밖에 없어. 너의 그 칸에는 이 이야기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 십 센티미터와 오 센티미터, 그 작은 공간 안에 내 이야기를 담는다면 쌀알에 글씨를 새길 정도의 글자로 이야길 해야 할 테니까. 너는 다만 세 문장을 적어두면 된단다.“
“무슨, 문장인가요?”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
야치는 그 문장을 포스트잇에 받아 적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정의 된 이름 속에는 여러 사연이 스며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잔떨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치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떨림이 어떤 느낌으로 비춰질 지를 고민했다. 그 세 문장은 욕망이자, 욕정이자,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야치는 그들이 겪을 영원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녀는 그 지독한 콤플렉스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것을 눈여겨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아버지를 살해 할 건가요? 그녀가 주제넘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네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앞에는 파멸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도 살아있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너희의 결혼식에 축하 화환을 보낼 것이니. 그는 옛날 사람처럼 말하였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그의 마지막 마침표에 야치는 녹음 되어있는 테이프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그는 자애롭게 말했다. 그의 웃는 모습은 그림자처럼 서늘했다.
“너는 평소처럼 너의 룸메이트에게 가서 오늘 있었던 ‘비밀’을 이야기하면 된단다. 너의 룸메이트 또한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게야. 너를 채용한 건 그녀 때문이었어. 그녀의 소문과 작은 논문, 네 친절함에 기댔던 거다. 세월을 먹을수록 결과만을 중요시하게 된단다. 오이카와가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결국 그의 손아귀에 스가와라가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나도 내 최선의 결말만을 남기고 싶을 뿐이란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불렀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야치의 태양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 안을 나섰다. 카게야마는 관처럼 만들어진 제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의 숨은 깊었고, 또 깊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 틈 새로 들어오는 인공적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 한 후였다. 카게야마는 빛 사이로 나아갔다. 조명은 그에게 티끌 같은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빛에 카게야마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돋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기원을 생각하며 웃었다. 스가와라처럼 웃고 싶어 세월을 들여가며 연습한 결과였다. 그는 벨벳 코트를 입었다. 그의 목을 장식한 레이스에는 호박 브로치를 달았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빛을 원한다. 그렇지만그 빛은 또 다른 그림자를 낳을 뿐이었다. 빛에서 파생된 작은 어둠.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다만 추측하고, 또 추측했다.
어디선가 볼레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는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었다. 끊임없이 반복하며 몸집을 키워가는 영원의 사랑처럼. 카게야마는 살포시 웃었다. 그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박제 된 나비와도 같았다. 그는 제 맘속에 품고 변주해간 마음을 생각하다가 뒤를 돌았다. 피 냄새가 요란하게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변하지 않는 밤하늘만큼이나 지독한 어둠이었다. 달빛이 내는 은색만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카게스가] 나는 이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0) | 2015.02.08 |
---|---|
[오이스가] '좋아'의 다른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0) | 2015.02.08 |
[카게스가] 부스 바깥, 너 (0) | 2015.02.04 |
[오이스가] 포뇨는 바다 밑에 산다. (0) | 2015.02.01 |
[오이스가] 스가와라 선배 너 때문에 술쳐먹어요. 오후 9 : 10 (0) | 2015.02.01 |
:D | 2015. 2. 4. 22:52
얼마 전 달성표 보상으로 슈님이 청바지에어 롤팀 유니폼을 입은 카게스가를 그려주셨었어요! 근데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롤팀인 카게스가를 써보고 싶었는데 장렬하게 망했습니다... 엉엉 후로게이 카게스가가 보고 싶어요.....안선생님.......
지금 롤 리그는 단일팀 풀리그제지만... 토너먼트 2팀제를 생각하며 썼습니다... 프로스트와 블레이즈가 보고 싶은 밤이네요.
***
세상에 지고 싶은 선수는 없다. 스가와라는 대기실로 나왔다. 메이크업을 마친 얼굴은 언제나 어색했다. 그는 거울을 보다가 츠키시마의 옆에 앉았다. 그의 원딜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마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다이치와 타나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우카이 코치의 얼굴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타케다 감독은 그에게 니코틴 패치를 권했다. 앞 경기는 분명 형제팀 카라스노 B의 경기였다.
어떻게 되고 있어?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츠키시마가 대답했다. 제왕님께서 크게 실수했어요, 덕분에 전멸해서 많이 불리해졌구요. 그의 그 빈정거리는 어투에 다이치가 주의를 주었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카라스노 블랙의 글로벌골드가 뒤쳐져 있었다. 아까 용 한타에서 완전히 말아먹었어. 코치가 방금 나온 그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스가와라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끝이 굳는 느낌이었다.
츠키시마가 말없이 그에게 핫팩을 건넸다. 역시 원딜이 챙기는 건 서포터 밖에 없네, 타나카가 웃으며 말했다. 츠키시마는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 나름의 ‘부끄러움’운 표시라는 걸 스가와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원거리딜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카게야마 선수 또 잘립니다! 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으면 안 되는 순간이었다. 대기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스가와라는 코치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다행이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핫팩으로 손을 데우면서 어젯밤 식당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열기가 손에 옮아와야 했으나 손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긴장돼요? 츠키시마가 물어왔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기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제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그의 귓속에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핫팩을 꼭 쥐었다. 다시 한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잡은 챔피언은 ‘애니’였다. 그는 그가 부디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애니는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네코마를 깨기 위해서 카게야마가 연습한 히든카드였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
어젯밤 카게야마는 새벽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새벽이 다 가도록 큐를 돌렸다. 보다 못한 코치가 컨디션 관리를 이유로 컴퓨터 전원을 뽑아버리자, 카게야마는 숙소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그는 이층침대의 윗칸에서 자고 있는 스가와라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연습을 좀 더 하고 싶은데 B 연습실이 잠겨서요, 혹시 선배의 컴퓨터를 쓸 수 있을까요? 그의 제안에 스가와라는 눈을 비비며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너 오늘 경기 있잖아, 하면서 스가와라는 식탁 의자에 고집을 부리며 앉았다. 식탁 위에 달린 무드등으로 본 카게야마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승률 때문에 그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포터 포지션 선수 중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소속된 세죠 프로스트와의 경기 이후 카게야마는 ‘폼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무언가에 잠식 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유니폼을 입을 때 마다 그 때의 경기가 오버랩 된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자 게임을 할 때는 괜찮지만, 팀 경기로 들어갈 때 마다 손이 떨린다고 말해왔다. 데뷔한지 한 시즌 된 게이머 후배의 고민을 스가와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는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어요.”
“선수라면 누구나 다 그렇잖아?”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 피어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에 내리 앉은 다크서클이 신경 쓰였다. 카게야마는 누구보다도 열의가 가득한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LOL은 팀 게임이었다. 한 사람만 잘해선 이길 수 없었다. 카라스노 블랙을 이루고 있는 엔노시타, 니시노야, 히나타, 카게야마가 모두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승리라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LOL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명확하다. 팀 게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두 가지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좀 더 팀을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솔로랭크 1위를 차지했던 이 서포터는 경기가 어려워지면 팀 전체를 자신이 이끌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문득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손에 깬지 얼마 안 된 스가와라의 체온이 닿았다.
“선배?”
“네 긴장감은 내가 다 가져갈게.”
뭔가 부끄러운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부스 안에 들어갔을 때 긴장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야. 그는 나름대로 카게야마를 위로하려 했다. 그의 큰 손을 스가와라의 손이 감쌌다. 카게야마의 손이 미지근해졌다. 솔랭 좀 더 돌리다 잘 거야?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자러 가요 하고 말하는 그의 뒷목이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카게야마가 따라갔다. 카게야마가 먼저 침대에 들어갔고, 스가와라는 침대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카게야마의 서포팅이 굉장하다고 생각해. 신인인데도 오이카와한테 전혀 밀리지 않았고, 그는 조곤조곤히 이야기 했다. 카게야마가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층침대 아래의 그가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
스가와라는 핫팩을 꼭 쥐었다. 다행이도 팀은 잃었던 이득을 챙겨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은 한타를 앞두고서 시야장악을 했다. 카게야마의 긴장된 얼굴이 화면 가득 비춰졌다. 그는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더니, 입고 있던 유니폼의 팔을 걷었다. 카게야마의 긴장감이 옮아왔는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츠키시마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온전히 마지막 경기에 향해 있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승점 1점은 가져갈 수 있으니 동반 16강 진출도 바라볼 수 있었다. 16강에서 같은 조였던 팀과는 만나지 않으니, 넓게 바라본다면 결승에서 맞붙을지도 모른다. 그는 카게야마와 같이 호흡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했다.
용쪽 부쉬로 네코마의 챔피언들이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용 쪽 섬부쉬에 숨어있었다. 들어가도 좋다는 콜이 난 듯, 그는 앞으로 점멸을 타서 이니시를 걸었다. 티버가 환상적으로 들어갔습니다, 네코마 3인 스턴! 여기에서 엔노시타가 들어갑니다, 리산드라 궁극기가 상대를 묶습니다, 그리고 히나타의 트리스타나가 프리딜을 하고 있죠, 잘 큰 트리스타나입니다! 해설진의 목소리가 가빠졌다. 곧 화면에 모든 적을 처치했다는 글자가 나타났다.
나이스! 대기실이 함성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들은 미드를 뚫고 상대 억제기를 뚫었다. 다섯 명 전원이 생존 해 있었기 때문에 타워의 공격을 받아가면서 넥서스까지 파괴했다. 카라스노 B팀의 승전보를 외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스가와라는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방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가장 끝자리로 서둘러 다가갔다.
“카게야마!”
카게야마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는 팔을 내밀었다. 카게야마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팔을 뻗었다. 마주잡았던 손만큼 뜨거운 포옹이었다. 스가와라의 환한 웃음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겼어! 하고 말하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걸릴 듯 말 듯 한 것 같았다.
스가는 서포터만 챙기고 치사하구나, 부스 안에서 아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꼭 끌어안으면서 대견한 후배를 칭찬하는 건 선배의 몫이라고 크게 말했다. 카메라가 그들의 포옹 장면을 클로즈업 하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스가와라는 다시 카게야마의 품에 포옥 안겼다. 카게야마 또한 그의 등에 어색하게 팔을 둘렀다.
스가와라 선배, 하고 카게야마가 그를 불렀다. 끌어안은 통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로 으,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말할 게 있으면 해, 나 키보드 세팅해야 해. 스가와라는 그를 재촉했다. 카게야마는 오늘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그는 눈을 마주치면서 당연하지! 하고 내뱉었다.
“그럼 이번엔 니가 내 긴장 가져 가!”
“네?”
“어젯밤에 내가 가져갔잖아.”
스가와라는 상쾌하게 말하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멍해 있다가 가져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청춘은 좋네, 하고 뒤에서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 세팅해야지, 카게야마 어서 방 빼라, 그의 충고에 카게야마는 얼른 컴퓨터에서 제 키보드와 마우스를 빼서 넣었다. 그는 황급히 퇴장했다. 츠키시마는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긴장하던 건 어때요?”
츠키시마가 하얀 키보드를 꺼내며 물었다. 그는 히나타가 앉았던 자리에 자신의 키보드와 마우스, 헤드셋을 늘어놓고 세팅했다. 스가와라는 츠키시마와 맞춘 키보드를 가방에서 꺼내 내려놓으며, 이젠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왕님이 ‘긴장’을 가져가서요? 그가 빈정대면서 묻자 스가와라는 그의 옆구리를 손날로 때렸다. ‘짓궂은 말투 금지!’ 라는 이유였다.
그는 키보드를 연결했다. 키보드에 무지개 색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는 하얀색 마우스를 연결하고 선을 정리했다. 스가와라는 손끝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오늘 좀 컨디션 좋은 게 나 하드 캐리 할 것 같아. 스가와라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원딜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게야마가 긴장을 가져간 게 효과가 있었나, 스가와라는 핫팩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츠키시마는 마우스의 감도를 조절하면서 핫팩 때문이겠죠,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모니터 밝기에 손을 댔다. 정말 긴장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그들에게 밴픽을 설명하기 위해 부스 안으로 들어온 우카이 코치가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면서 카게야마 덕분에요, 하고 말하며 웃었다.
[오이스가] '좋아'의 다른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0) | 2015.02.08 |
---|---|
[카게스가] 아버지를 찾습니다, (0) | 2015.02.05 |
[오이스가] 포뇨는 바다 밑에 산다. (0) | 2015.02.01 |
[오이스가] 스가와라 선배 너 때문에 술쳐먹어요. 오후 9 : 10 (0) | 2015.02.01 |
[하나쿠니] DO S (0) | 2015.01.31 |
:D | 2015. 1. 17. 22:04
하이큐 글전력 60분에 참가한 글입니다. [목도리]라는 소재에요. 배구파님께서 제게 풀어주셨던 카게스가썰을 조금 빌려왔습니다. 사랑에 면역이 없는 카게야마가 너무 귀엽다구 생각합니다... 카게스가 연애해!
***
카게야마는 목도리를 둘렀다. 목이 조여 답답했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는 목도리의 양쪽 끝을 뒤로 넘겼다. 그는 괜히 그 두 쪽 끝을 들어 묶었다. 그는 뒤로 돌았다. 엉망으로 엉켜버린 목도리가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목도리를 흐트러트렸다. 단정하게 모양을 잡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그런 모양을 배우지 않고 묶는 것은 무리였다. 카게야마는 괜히 목도리를 풀었다. 목에 느슨하게 감긴 목도리의 색은 꼭 하얀색이었다.
거울 앞에서 일인극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관객은 거울 안의 자신, 배우는 그 사람의 말을 신 경 쓰게 되는 카게야먀 군. 각본을 짠 총감독은 토비오 군의 심장 따위였다. 그는 그게 삼류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족끼리 우연히 봤던 일인극을 떠올렸다.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배우만을 밝히고 있었다. 무대 위 배우는 혼자만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방을 나섰다. 그는 목도리 끄트머리를 당겼다. 목이 다시 답답해졌다. 그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집 밖은 추웠다. 텔레비전에서 항상 ‘최저기온을 경신’했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후, 하고 숨을 불어내니 입김이 되어 날아갔다. 그는 목도리의 입에 닿는 부분을 때냈다. 침이 묻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긁었다. 코트에 넣은 손가락 끝이 어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겨울이 싫었다. 손이 얼어붙는 계절이었고, 뼈가 쉽게 부러지는 계절이었다. 미끄러지기도 쉽고, 부상 위험이 올라가기 때문에 배구를 하기에는 별로 좋은 날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목도리 끝과 머리카락 사이를 삐져나온 귀가 얼얼했다.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데워야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었다. 그는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코트에 들어가서 바로 배구공을 만지려면 이런 워밍업이 필요한 법이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은 하얗게 바랬다. 하얀 숨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보면서 그는 하품을 했다. 등굣길은 지루하기만 했지만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잘못해서, 미끄러져서, 부상이 생긴다면, 카게야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먼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일인극’에서도 사랑 때문에 부상당한 남자가 나왔다.
일인극 주인공은 운동을 하다 부상을 받은 남자였다. 모든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다가 한 순간에 추락한 남자였다. 카게야마는 그 극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극에서 내내 말하던 대사 하나는 ‘완벽하게’ 외울 수 있었다. ‘사랑을 주세요.’ 그는 그 대사가 묘하게 입에 감돈다고 생각했다. 이는 아까 목도리를 묶어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심장 근처가 간질간질 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영어 지문으로 읽었던 ‘심상사상충’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그게 인간에게도 걸리는지 고민했다. 만약 그 병이면, 배구는 계속 할 수 있는가. 카게야마는 진지했다.
바람은 자꾸 볼을 스쳤다. 카게야마는 ‘긴 목도리를 하면 춥지 않아!’ 라고 외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오늘 그에게 할 첫마디로 ‘거짓말이었어요.’와 ‘선배는 거짓말쟁이네요.’를 두고 고민했다. 묘한 어감의 단어였지만 별 상관없을 것도 같았다. 그는 귀가 아팠다. 그는 조금 미적지근한 온도의 손으로 귀를 잡았다. 차가운 귀가 손끝의 온도를 뺏어갔다. 그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입술이 목도리의 까끌한 표면에 스쳤다. 카게야마는 정류장 근처를 걸었다.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
“스가 선배,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딱딱하네.”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는 카게야마에게 스가와라가 말을 걸었다. 그는 카게야마 쪽으로 경쾌하게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종종 그의 발끝에 스프링이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었다. 그는 마치 폴카 리듬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카게야마, 목도리 하니까 덜 춥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했던 ‘거짓말이었어요.’라는 말과 ‘선배는 거짓말쟁이네요.’라는 말 두 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목도리를 내렸다.
난 오늘 목도리 두고 와버렸어, 스가와라가 말을 걸었다. 그의 목을 항상 감싸던 물색 목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볼 때 항상 총총거리던 목도리가 없는 부근이 허전했다. 카게야마는 춥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스가와라는 조금, 이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는 웃을 때 이를 보이며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 상쾌한 미소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카게야마는 이 ‘볼이 붉어지는 느낌’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영어 지문 속 ‘심장사상충’과 관련이 있는지 고민했다.
“무슨 생각 해?”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카게야마는 그의 둥그런 정수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스가와라의 앞에 서면 생각이 많아졌다. ‘상념’들은 대기 중에 부유하면서 카게야마의 발끝을 잡아채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어제 저녁에 닭튀김이 반찬으로 나왔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오밀조밀하게 움직였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스가와라는 인상을 썼다. 카게야마는 우물쭈물 했다. 그는 일단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다시 바람이 크게 불었다. 스가와라의 귀는 이미 빨갰고, 그의 볼 또한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반찬 투정 하느라 급하게 나왔더니 이러네, 그는 체념하듯 말했다. 카게야마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몇 걸음 앞에 멈추어서 뒤를 돌았다. 카게야마? 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체할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얼른 제 목도리를 풀었다. 저, 저는 추위 별로 타지 않습니다. 라고 단언하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후배의 목도리를 뺏는 나쁜 선배는 되기 싫네요.”
“목도리, 하세요.”
카게야마는 강경하게 나갔다. 그는 스가와라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서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긴 목도리가 그의 목에 과하게 감겼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하고 묻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학교까지 얼마 안 남았고, 라는 변명에 스가와라는 십 분이나 남았어! 라고 대답했다. 그는 목도리를 다시 풀었다. 긴 끈 하나를 둔 실랑이가 이어졌다. 목도리가 늘어나겠다는 카게야마의 말에 스가와라는 목도리를 주려던 걸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둘의 귀는 똑같은 빨강이었다. 스가와라는 목도리 한 끝을 카게야마의 목에 두르고, 한 번 감았다. 선배가 하세요, 라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 끝에, 목도리의 반대편을 제 목에 두르고 있는 스가와라가 비쳤다. 그는 카게야마 쪽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그가 360도를 회전하자, 목도리는 얼추 모양을 갖춰 두 사람 목에 감겨있었다. 웃기는 모양이지만, 하면서 스가와라는 웃었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좁혀진 거리가 어색했다.
다시 심장사상충이 기능을 하기 시작했는지, 그의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카게야마는 주머니에 손을 꼭 넣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아, 넓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겨울이 스가와라의 소매에 묻어 있었는지, 미적지근하던 주머니 안은 빠르게 겨울로 물들었다. 갑자기 심박수가 뛰는 게 수상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연극 주인공의 독백이 스쳐지나갔다. 나에게는 언제나 ‘두근거리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건 언제나 갑자기 찾아왔죠, 이미 사랑에 빠져 있는데, ‘한 번 더’ 빠지는 그런 느낌.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역시 한 사람 목도리를 두 사람이 쓰니까 얼굴에 오는 바람은 못 막는구나. 카게야마 얼굴 되게 빨개.”
“아닙니다! 이건 바람 때문이 아니에요.”
"역시 내가 키가 오 센치정도 컸어야 안정적으로 둘이 매는 건데.”
스가와라는 둘의 키 차이만큼 늘어진 목도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그는 그게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바닥을 간질이며, 선배에게 거짓말 하는 건 못 쓴다고 대답했다. 카게야마보다 작은 그의 손가락들은, 어느새 손깍지를 시도 해왔다. 손 틈 사이사이에서 땀이 새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그의 가슴께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고, ‘그건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던 배우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스가와라의 발걸음은 느긋했고, 카게야마의 발걸음은 초초했다. 그는 어서 부실로 가고 싶었다. 목울대에서 자꾸 침이 넘어가는 움직임조차, 이어진 목도리를 타고 스가와라에게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 목도리에 입술이 닿았던 부분도 신경 쓰였다. 카게야마는 부디 그 부분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기를 바랐다. 스가와라는 그런 카게야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손이 따듯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심장사상충이 도진 것 마냥 가슴이 간질거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였다.
카게야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몇 걸음 가다 목이 걸렸는지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다시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손가락 사이 마디의 물갈퀴 같은 부분에 엮여있던 손가락이 풀려, 중지와 검지 정도만 얽혀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박수가 사정없이 올라갔다. 카게야마? 스가와라가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카게야마는 목도리에 손을 댔다. 그의 손가락이 하얀 목도리를 풀었고, 그는 그걸 스가와라의 목에 빠르게 엮었다.
저, 심장사상충에 걸린 것 같습니다! 카게야마는 크게 소리쳤다. 스가와라는 벙찐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 달려갔다. 어쩐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목도리를 벗었는데도 불구하고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기나긴 목줄이 스가와라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와 걸었던 등굣길을 역주행했다. 정류장을 지나고, 집 앞에 다시 도착해서야, 카게야마는 지금 자신이 터무니없는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목도리가 풀린 목이 따끔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얼굴이 붉어졌다. 카게야마는 목도리가 가리지 않는 얼굴이기 때문에 달아올랐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는 스가와라와 마주잡았던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일인극의 배우가 ‘사랑을 주세요,’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는 스가와라에게 목도리 빌려준 값을 청구하고 싶었다. 사랑을 주세요, 그는 작게 속삭였다. 목에 목줄이 채여있는 것처럼,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명백한 착각이었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게 ‘심장사상충’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오이스가] 그대의 본진에 광자포를 01 (0) | 2015.01.20 |
---|---|
[오이스가] 마법 같은. (0) | 2015.01.19 |
[오이스가] 샤프소리, 비 내리는 창가, 옆에 있는 너 (0) | 2015.01.16 |
[카게스가] 사랑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 (0) | 2015.01.11 |
[카게스가] 그림자는 발끝에 달라붙어, (0) | 2015.01.11 |
:D | 2015. 1. 11. 22:26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오늘은 '커피'라는 주제였습니다.
얼마 전 잡아 썼던 슈님의 소재가 '커피'와 관련되어 있기에 가볍게 후일담을 적은 느낌입니다.
이왕이면 '커피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를 봐주셨으면 좋겠지만, 보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원두를 덖으면서 생각했다. 불을 받은 원두가 향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원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그는 과거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스가와라의 첫사랑이었다. 그에게서는 지금처럼, 언제나 진한 원두 냄새가 났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스가와라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카페에서 시간 때우기’였다. 그가 신입생이던 시절에 카페란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어른의 향기가 나는 공간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가서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와 스무디 따위를 먹는 곳. 혹은, 편안한 비즈니스를 위해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 그것이 그가 가진 인식의 전부였었다.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원두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목소리가 좋았던 것도 같았다. 항상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의 그 신중한 손길, 그 손가락과 손등, 팔뚝으로 이어지는 굵은 핏줄 따위에 설렜던, 그런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확실하게 그 사람에게 반했었다. 그는 그 날부터 한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노부터 시작했다. 카페에 혼자 가고 싶다는 스가와라에게 동기 여자아이는 ‘에스프레소’는 라일락 이파리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커피였다. 고소한 커피 향과 다르게 그의 입맛에 아메리카노는 탕약처럼 다가왔다. 한 입을 마실 때 마다 소태를 먹듯, 얼굴을 찌푸리는 스가와라에게 그는 스틱 설탕 몇 개를 가져다 줬다.
이거, 우리 가게에만 있는 건데 저으면 달아져요-였던가, 아니면 이거 요즘 유행하는 건데 적으면 녹으니까-였던가. 스가와라는 그가 개인적으로 내뱉은 첫 마디를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타인’이 설탕이 커피에 녹아드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는 그게 매우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했던 말 중에서 스가와라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인생은 커피, 커피는 곧 사랑. 그가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면서 종종 중얼거리곤 하던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이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는 것은 곧 하나의 원두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느냐’라고 다시 말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보다 로맨틱한 말은 자신의 인생에선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가 좋아하던 사람은 몇 해 전 결혼했다. 나한테 커피 알려줄 때는 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못 먹는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같은 꼴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스팅한 커피 향을 맡았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렸다. 그는 로스팅실의 유리벽으로 출입구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 소년’이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까마귀 소년’ 그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유리문을 열었다.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서늘한 인상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언제나 이 시간 즈음에 카페를 찾아오곤 했다. 그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져지를 입고 있었다. 자기가 OB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을까, 스가는 다른 생각을 하며 그의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는 언제나 충실히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는 그가 이 커피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 모를 ‘까마귀 소년’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언제나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스가와라의 앞에 섰을 때는 제법 당돌하게 눈을 마주쳐 온다. 그는 천장에 달려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음, 하고 고민하는 척 하지만 결국 언제나 ‘늘 마시던 거요’라고 회귀하는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주문을 들을 때 마다 느와르 영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소년’의 느낌은 바에서 마스터,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단단한 성인 남자의 섹시함과는 달랐다.
5월에 활짝 피는 라일락. 스가와라는 그 흰 꽃을 떠올렸다. 그는 풋풋했으며, 어수룩했다. 소년 특유의 다 자라지 않은 느낌이 몰아칠 때 마다, 스가와라는 ‘잔 안에 부는 폭풍’ 따위의 구절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진동벨과 카드와 영수증을 건넸다. 오늘 주문이 조금 많아서, 늦게 걸릴지도 몰라요. 그의 당부 같은 말에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지정석’으로 다가갔다. 그의 지정석은 해피트리와 키 큰 로즈마리가 있는 햇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스가와라는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둥그런 정수리가 귀여웠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가 카드에 하는 서명을 몇 번이고 유심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글씨를 해독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소년의 사인은 매번 바뀌었다. 어느 날은 사랑 애(愛)가 들어가는 것도 같았고, 좋을 호(好)를 쓰기도 했다. 그림자 영(影)자 옆에 우산을 그려놓고, 그 옆에 근원 원(原)을 적기도 했다.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 유행일까. 스가와라는 오늘자 영수증의 ‘Suga r'라는 글자를 보면서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었다. 그의 마음속에 두근거림이 돋았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스가와라는 소년의 ‘싸인’이 의미 없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닌 척 시선을 돌리거나, 그 직후에 핸드폰의 액정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할 때, 그것이 그 나름의 소심한 표현이 아닐까 추측했다. 스가와라는 다른 손님에게 음료를 건네면서 자신이, 여전히 그의 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과 카운터 사이의 거리. 딱 그 정도가 그와 그의 마음의 거리였다.
소년은 과묵하다와 서투르다의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쫓는 것은 오로지 스가와라뿐이었다. 그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몇 해 전 접은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 느낌에 간질거리기도 했고, 그가 다가와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소년의 눈길만으로 스가와라는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커피는 사랑, 원두는 어느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처럼 진해질 수도, 달달 해 질 수도 있으며, 그 위에 휘핑을 얹어 화려하고도 포근하게 사랑할 수도, 아이스크림에 뿌려 짜릿하게 변할 수도 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시키는 아메리카노가 자신을 향한 ‘돌직구 같고 정석적인 마음’이 아닐까 넘겨짚었다. 아직 씁쓸한 맛이 짙은 소년의 사랑에는 설탕이란 이름의 사랑이 폭탄처럼 짜릿하게 퍼져 들어가야 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짧게 웃었다. 그는 신경을 써서 물을 부었다. 소년은 여전히 스가와라를 보고 있는 듯,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햇살이 내리 쬐는 느낌마냥 간지러웠다. 스가와라는 자신 또한 ‘그 사람’에게 그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매일 소년에게 줄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속 안에 잠들어 있던 원두가 드디어 커피로 탈바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짝사랑도, 사랑도 아닌 애매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씨앗의 발아는 과연 자의적인 과정일까. 원두가 커피가 되는 과정 또한 자의에 의한 일일까? 스가와라는 두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햇살이라는 명백한 타의적인 원인과, 뜨거운 물이라는 원인을 떠올렸고, 그것이 카라스노 배구부 져지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시선과 닮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가와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원두가 커피가 되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그가 원인이었다. 스가와라는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얼굴에 김이 올랐다.
스가와라는 진동벨을 눌렀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스가와라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그는 쟁반에 아메리카노를 올려 건넸다. 소년은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학생, 오늘도 물 탄 거요. 스가와라가 말을 걸자 그 떨림은 더욱 더 진해지고 있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웅얼거리기에 듣기가 힘들었다. 스가와라는 제가 더요, 하고 대답했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소년은 당황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에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그가 적어내던 ‘사인’의 의미와, 가끔씩 적던 우산 아래의 그림자 영(影)과 근원 원(原)이 어떤 몸짓이었는지를 알아챘다. 스가와라는 그러기에 더 그의 이름을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년이 자신에게 좀 더 다가오길 바랐다.
스, 스가, 스, 하고 소년은 스가와라의 이름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려는 순간일까, 스가는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이 처음 설탕 스틱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그 사람의 첫 마디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이 당돌한 소년 때문일 것이다. 스가와라는 소년을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의 미소에 그는 더 당황한 듯 했다. 고작 네 어절인 이름을 소년은 어렵게 입에서 내려 했다. 그가 저는 말 마저도 스가와라는 설탕 같이 달다 생각했다.
“슈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년의 어깨가 추욱 내려졌다. 스가와라는 그가 배구를 할 때도 이런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접고, 그에게 설탕 코너를 안내했다. 그 나름의 ‘밀당’이었지만 소년은 것두 못 알아차린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의 서투름이 귀여웠다. 그것은 스가와라가 처음 내리던 커피처럼 매우 볼품없는 도전이었지만, 결국 맛있어질 내용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그 느낌을 실컷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몇 번 만지다 다시 스가와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이름글자 하나 중 그림자 영(影)처럼 맹목적으로 다가오는 눈길이었다. 햇살만큼이나 집요한 그것은 명백한 사랑의 형태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커피가 조금 더 달달해지고, 휘핑이 올라가 폭신해질 순간을 기다렸다. 스가와라는 상쾌하게 웃으면서 카라스노 배구부의 소년에게 내어 놓을 서비스는 바나나가 좋을지, 오트밀 쿠키가 좋을지 고민했다.
소년은 한 움쿰 집어 간 설탕을 모두 다 아메리카노에 넣고 있었다. 인생은 커피, 사랑은 커피. 스가와라는 자신의 인생관과 같은 카피를 입 밖으로 냈다. 곧 소년의 사랑도 달아 질 순간이 올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조만간 카라스노 배구부 소년이 당뇨에 걸리지 않도록, ‘섞어 나눠줄’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커피는 곧 딱 먹기 좋은 달달한 두 잔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소년이 앉아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카게스가] 목도리 목줄 목도리 (0) | 2015.01.17 |
---|---|
[오이스가] 샤프소리, 비 내리는 창가, 옆에 있는 너 (0) | 2015.01.16 |
[카게스가] 그림자는 발끝에 달라붙어, (0) | 2015.01.11 |
[카게스가] 커피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 (0) | 2015.01.09 |
[오이스가] 12월 31일의 흔한 풍경 (0) | 2015.01.04 |
:D | 2015. 1. 9. 00:02
카게야마는 늦은 일요일 낮에 하던 영화극장을 떠올렸다. 개봉한지 좀 된 외국영화를 더빙해서 틀어주는 코너였던 게 기억났다. 그는 느린 아침이 햇살에,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위로 내리던 먼지 우주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느린 템포의 느와르영화를 반주했다. 분명 상처 입은 남주인공은 바에 앉아있고, 공허함에 술을 마셨다. 그러다 그의 담배에 불이 붙고 성냥을 두어 번 털어 불꽃을 버릴 때, 한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남자의 옆에 당당히 앉고 이렇게 말했다.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카게야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색이 엷은 머리카락에 햇살이 비칠 때면, 그 때 보이던 먼지우주와 같은 반짝임이 보였다. 그는 스가와라 코우시, 라고 적힌 명찰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진동벨과 카드를 카게야마의 손에 돌려주며 주문이 밀려서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그의 웃음은 햇살 아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같이 상쾌했다. 카게야마는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 테이블 옆에는 해피트리와 쟈스민, 로즈마리 따위가 놓여 있었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해피트리 나뭇잎 사이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는 좀 섹시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남자의 옆에 삼각 글라스에 담긴 칵테일을 받아 앉는다. 그녀는 넓은 잔 입구를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쓸고, 그에게 애정과 사랑을 갈구하곤 했다. 카게야마는진동벨을 노려보다, 스가와라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살펴 보았다.스가와라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그게 조금 슬펐다.
카페에서는 얼마 전 유행했던 독립영화의 OST가 흐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 앨범을 좋아하는 듯 했다. 그가 있는 시간에는 꼭 이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다. 홀드 온, 홀드 온, 홀드 온, 하는 어린 목소리들이 반복되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이 음악을 좋아하느냐 묻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 하고 목소리를 냈다. 주문을 할 때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조금 더 ‘떨림’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소리였다. 카게야마는 아, 아, 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저기, 스가와라 씨는 이 음악을 좋아하나요? 그는 허공에 물었다. 작은 소리가 바람처럼 빠르게 흘렀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녹기 전의 설탕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 음악을 좋아하나요? 그가 다시 물었다. 열린 문에서 나온 바람에 로즈마리 이파리가 흔들렸다. 네, 좋아해요, 라고 대답하는 모습 같아서 카게야마는 괜히 뒷목을 쓸었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그는 멀리 보이는 메뉴판을 봤다. 스가와라의 붕 뜬 머리카락은, 그가 선반을 오갈 때 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메뉴판을 천천히 읽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바닐라라떼, 카페모카, 카게야마는 메뉴판에 적힌 커피이름들이 마치 ‘간장공장공장장’으로 시작하는 발음연습을 적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몇 주 째 마시고 있는 쓴 물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것’이라는 것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뒷맛은 깔끔했고 첫맛은 고소했다. 달달한 게 에스프레소보다는 훨씬 마실 만 했었다. 카게야마는 에스프레소를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간혹 명화극장에서 나오는 옛날 영화에서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있었다. 이러한 영화들에서는 신과 요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음향장치를 사용하곤 했다. ‘상투스’나 ‘울게 하소서’, 혹은 ‘리베라’ 같은 찬송가를 넣어 천사를 신성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몇 주 전 카게야마는 시간을 때우러 들어 간 카페에서, 아주 우연히 그러한 영화 연출을 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스무디처럼 보이는 하얀색 음료와, 휘핑크림을 쓰러질 것 처럼 올린 커피를 키 작은 여자에게 건네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카게야마가 스가와라를 처음 보았을 때 울리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투 테이크 어 스텝, 유 캔 테잌 백, 하면서 여자가 내뱉듯 소리쳤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와 눈을 처음 마주쳤을 때를 반추했다. 그것은 입 안에서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환상적인 일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그의 머리카락에 내리는 윤슬 같은 햇살과, 천사 같은 미소에 심장이 쥐여 짜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카페에서 그는 말 못하는 사람처럼 한참을 버벅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꺼낸 말은 ‘에스프레소’ 주세요,였다. 암호문 같은 메뉴 중에서 그나마 들어 본 이름이었으며, 뭔가 있어 보이고, 뭔가 가격이 싼 커피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앞에서 꽤나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커피가 쓴 데 괜찮으시겠어요?
―저 쓴 거, 잘 먹어요.
저 쓴 거, 잘 마셔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 때 말했던 부끄러운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작은 잔에 나온 커피 원액과 각설탕들을 떠올렸다. 각설탕을 무시하고 원액을 혀에 닿았을 때는 라일락 잎사귀만큼 쓴 맛이었다. 각설탕 두 개를 넣고 입에 에스프레소를 넣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콤함은 눈 깜빡할 사이에 녹았고 커피는 그의 입에 진득하게 남았다.
카게야마는 괴로웠다. 그는 해피트리 밑둥에 커피를 다 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그래선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그 때 강림한 것은 스가와라였다. 아메리카노로 바꿔 드릴까요? 그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청량했으며, 어색하지 않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입가에 댄 주먹 쥔 손까지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 느꼈다. 자신은 계속, 이곳을 들락날락하게 될 것이란 걸.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커피’의 이름을 몰랐고, 스가와라의 이름만 일방적으로 아는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언젠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상상을 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자신이 우물쭈물하는 게 아닐까 싶어 카게야마는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렇지만 딱히 급하게 잡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도 같았다. 그는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에 위치한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의 진동벨이 울렸다. 상대편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점프서브를 넣는 기분이었다. 그는 부자연스럽게 일어나 삐걱거리며 걸어갔다. 스가와라가 있는 카운터는 너무 멀었다.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학생, 오늘도 ‘물 탄 거’요. 스가와라가 먼저 그에게 말했다. 카게야마가 시뮬레이션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카게야마는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스가와라는 그의 웅얼거림에 되물었다.
카게야마는 당혹스러웠다. 그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지칭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라고 말하면서 끝이었을 거고, 카게야마는 달달한 ‘에스프레소에 물 탄’ 커피를 마시다가 스가와라를 관찰하기만 했을 거다. 평소와는 다른 템포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점프서브로 공을 홈-런 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 때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그,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힘들게 내뱉었다. 그의 말을 이제야 알아 들었는지 스가와라는 그의 쪽으로 접시를 내밀며 제가 더요, 하고 웃었다.
뭐가 더 감사하다는 걸까. 카게야마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는 좀 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을 사용할 때가 있다. 그는 지금이 스가와라의 목소리로 스가와라 코우시의 이름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서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저기, 하고 운을 땠다. 네, 하고 스가와라가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휘핑크림 위에 화이트초콜릿을 발라 생으로 입에 넣은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덜컥이는 것 같았다.
“스, 스가, 스., 그러니까 스,”
카게야마는 말을 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히나타와 함께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코트 위에서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혹은 친구들에게 이 멍청아! 하고 외치는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그’라는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처음 주문을 받을 때 처럼 성실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용기를 내려 했다. 스가와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묻고 싶었다.
“슈가 주세요.”
“네, 저기 앞에 셀프코너에 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용기는 허무하게 꺾이는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어깨를 축 내리고 접시를 들고 셀프코너 쪽으로 다가갔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의 무거운 한숨에 아메리카노가 흔들렸다. 그는 설탕을 한움쿰 집었다. 카게야마는 이걸 ‘물 탄 거’에 다 녹여서 당뇨로 죽고만 싶었다. 그는 몇 번 쯤 더 카페에 들락날락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떡벌어진 어깨가 쳐지는 게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뒤를 돌아 쿡쿡 웃었다. 커피 머신에 그의 웃는 얼굴이 스며들었다.
스가와라는 아직 저 고등학생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름을 알려고 포인트카드를 만들 걸 종용했지만, 그는 ‘슈가 주세요’, 라고 말할 때 처럼 버퍼링이 걸리고 계속 고민하며 눈을 굴렸다. 그의 단정한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볼 때 마다 스가와라는 로즈마리 이파리를 손바닥에 가득 쓸어 내렸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도 상큼하고 풋풋했다. 아마 그의 기분은 라일락 잎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씹는 느낌일 것이다.
아메리카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스가와라는 그래도 ‘설탕 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검정 머리카락의 카라스노 배구부 친구가 대견스러웠다. 언젠가 그의 단단한 목소리로 그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걸 상상하면서 스가와라는 설탕처럼 웃었다. 설탕은 매우 달았고, 혀에 들어오면 쉽게 녹아 달콤함을 퍼트리는 성질이 있었다. 마치 그가 불러줄 자신의 이름처럼. 스가와라는 그 때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따가 ‘카라스노 배구부의 검은 머리카락 소년’에게 내놓을 서비스는 바나나가 좋을지 오트밀 쿠키가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한숨이 다시 아메리카노의 표면을 적셨다. 녹지 않은 설탕은 여전히 그의 티스푼에 묻어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옛 명화극장의 영화를 생각했다. 항상 같은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의 갈구이며 시작인데 왜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는 설탕을 아메리카노에 녹이고 있었다. 금방 과포화용액이 된 그 달디 단 ‘물탄 것’은 오늘의 실패의 기억이었다. 카게야마 소년은 단 설탕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스가와라가 있는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소년의 첫사랑 맛은 라일락 이파리와 반대되는 진한 달달함이었다.
[카게스가] 사랑의 이름이 커피였으면 정말 좋겠다. (0) | 2015.01.11 |
---|---|
[카게스가] 그림자는 발끝에 달라붙어, (0) | 2015.01.11 |
[오이스가] 12월 31일의 흔한 풍경 (0) | 2015.01.04 |
[하나쿠니] 後嬉 (0) | 2015.01.04 |
[오이스가] "오르가즘" (0) | 2015.01.03 |
:D | 2014. 12. 27. 01:04
카게스가 역키잡입니다... 카게스가 역키잡이 맞습니다. 이것은 카게스가 역키잡입니다......
추천 브금은 디즈니 라푼젤 OST인 'I see the light'와 'When will my life begin'입니다.....
***
스가와라는 볼펜을 들었다. 몇 년째 그어오던 것과는 다른 색이었다. 색이 다른데, 하고 애매하게 중얼거리자 카게야마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볼펜 끝자락을 힘을 주어 쥐었다. 붉은 선이 그어졌다. 스가와라는 그의 정수리에 볼펜을 꾹 대고 여러 번 선을 그었다. 붉은 선이 겹쳐 그어졌다.
너 키 많이 컸구나, 스가와라가 말했다. ‘신선한’ 어조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동그런 정수리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 카게야마는 벽에서 비켜섰다. 그는 스가와라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의 어깨 위치는 수평이 되지 못했다. 벽지 누래, 스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웃음을 붙잡고 미소 지었다.
벽지는 세월로 얼룩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벽지는 약 10년 정도를 담고 있는 친구였다. 또한 그것은 몇 년 전, 스가와라와 카게야마가 그들의 첫 보금자리에서 미야기 현으로 이사 올 때 유일하게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들의 시간이 처음 같이 흐르게 됐을 때부터 그어 온 세월이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굽혀서 ‘아홉 살 카게야마 토비오군’의 키를 표시한 눈금에 손을 댔다.
“너, 진짜 많이 컸네.”
“그렇죠.”
“귀염성도 없어졌어.”
“그래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이렇게 단단해진 걸까. 그는 그의 성장이 언제나 낯설었다. 그는 ‘어린 애들은 훌쩍 큰다’는 말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는 ‘소년’이라는 집합에서 ‘청년’이라는 집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발자국들이 이 벽지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먼 길’이었지만 지금의 카게야마에게는 가까운 길일 것이었다. 그는 그를 이제 ‘소년’이 아니라 ‘청년’으로 지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카게야마의 성장은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뀔 때 쉬이 눈치를 못 채는 것처럼, 혹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의 바람이 바뀌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카게야마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손을 올려야 닿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어린 토비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걸 회상했다. 한참은 내려가야 작달마한 머리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스가 파파’를 추월한지도 오래 됐어요. 카게야마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 하고 되물었다. 확실히 카게야마 쪽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스가와라는 아니야, 하고 부정했다. 그의 어색한 발음에 카게야마의 입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가와라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그가 등을 댔던 벽에 등을 대었다.
어때, 내가 더 크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아직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카게야마는 눈치 있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센스 있는 대답을 할 때마다 묘하게 기뻤다. 그에게 ‘여유’라는 단어가 내비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에게 유우를 많이 마시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충고를 하며 웃었다. 오늘 점심이 오므라이스면 생각 해 볼게요, 하며 대답하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안도했다.
***
카게야마 토비오의 어머니와 스가와라 코우시는 아는 사이였다. 둘은 마트의 문화센터에서 만났다. 가정요리 강좌였다. 스가와라는 막 자취를 시작한 대학생이었고, 카게야마의 어머니는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주부였다. 그와 그녀는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고, 그 우연이 돌고 돌아 필연을 만들어 스가와라의 지금이 되었다.
이야기에 발단-전개-위기-절정-하강-대단원-결말이 있다면, 카게야마의 어머니는 급격한 하강 구간에 위치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를 ‘토비오’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가정 안에서 케어가 잘 되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는 항상 굶주렸으며, 또래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서툴렀다. 그녀의 인생은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여자가 아들을 돌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가와라는 가끔씩 카게야마를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지만 그는 지금도 그것을 인생에서 잘 한 일이라고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일곱 살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한 말을 십이 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뱉어낼 수 있었다.
여기는, 술병 없어요? 안 깨져요? 안 숨어도 괜찮아요?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땠고, 스가와라는 그에게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그 가정에서 토비오를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토비오를 무릎에 앉혔다. 또래보다 작고, 또래보다 가벼운 몸이었다. 그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면서 우리 만화영화 볼래? 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받은 최초의 ‘권유’였다.
일요일 아침에는 TV에서 명작동화를 방영했다. 스가와라는 그를 텔레비전 앞에 앉혀놓았다. 카게야마는 무릎을 꿇고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하게 앉아도 괜찮아, 스가와라는 그에게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카게야마의 작은 엉덩이가 바닥에 편히 붙고, 그가 다리를 쭉 뻗은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계란을 예쁘게 입힌 오므라이스를 그의 앞에 내려 놓았다. 나름대로 케챱으로 꽃도 그려놓은 회심의 역작이었다.
그릇이 두 개, 컵이 둘. 작은 숟가락 하나와 큰 숟가락 하나. 텔레비전에서는 ‘라푼젤’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텔레비전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그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때때로 급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식사습관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산처럼 쌓인 오므라이스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시선에서 그 이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사라지지 않아’ 라고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막만한 검은 머리통이 예쁘게 움직였다.
《라푼젤》이 끝나고, 카게야마는 한 번 더 틀어달라는 말을 했다. 어렵게, 또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금은 없는데 같이 빌리러 갈까? 라는 제안에 카게야마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작은 목에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왼손을 잡았다. 그의 주먹은 스가와라의 손에 꼭 들어맞는 크기였다.
비디오가게에 들러서도 카게야마는《라푼젤》을 빌려야 한다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것은 카게야마 토비오 어린이의 ‘부탁’이 첫 번째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비디오를 소중히 쥐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놓칠 것만 같아 그를 안아 들고 집까지 걸어왔다. 그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고 걸어갈 때, 그 걸음걸이마다 카게야마의 심장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이게 좋아? ‘머리카락을 내려주오’, 하고 마녀가 말하는 장면에서 스가와라가 질문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고 재차 대답을 재촉하자 카게야마는 ‘반짝거리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째 우리 엄마는 계모 같네, 카게야마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린아이 치고는 시니컬한 말이었다. 그의 표정은 의외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에 스가와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코우시, 나 키 재줘.”
잠시동안의 살얼음 같은 분위기를 잠재운 것은 카게야마의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푼젤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황금색 크레파스를 꺼내왔다. 그는 카게야마를 벽에 딱 붙게 했다. 스가와라는 크레용 끝부분에 힘을 주어 잡았다. 황금색 길이 그어졌다. 다음에 왔을 때도 이거 있을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그럼, 하고 스가와라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그 때 마다 라푼젤을 보고 키를 쟀다. 스가와라는 이 과정이 그의 성장판일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동시에 ‘위로할만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스가와라 코우시 자체가 안식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라푼젤을 좋아하는 꼬맹이가 1cm씩 커 가고, 그 눈금을 눈에 담을 때 마다 스가와라는 서서히 자신이 집에 그의 자리를 만들었다.
***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하강에 이르렀을 때,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집에 처음 들어오면서 ‘뻐꾸기 같아’ 라고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입술에 검지를 댔다. 뻐꾸기 같은 게 아니라 ‘라푼젤’이지. 이제 내가 열쇠를 놓고 갔을 때 토비오, 토비오, 토비오 하고 세 번 부르면 문을 열어줘야 하는 거야. 그는 카게야마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천히 말했다. 카게야마는 큰 눈으로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는 꼬맹이 보다 한 걸음 앞서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면서 카게야마에게 이제 ‘스가 파파야’ 라고 말했다. 꼬맹이는 다 헤진 신발을 벗고, 그에게 다가왔다. 꼭 끌어안았을 때, 라푼젤을 처음 빌리러 가던 날의 심장소리가 들렸던 것을 스가와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몇 번을 생각해도 마모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오므라이스가 든 접시를 카게야마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광고를 보고 있었다. 뭐 해? 스가와라가 계란 위에 꽃을 그리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대답 대신 화면 오른쪽 상단으로 시선을 두었다. 하긴 이제 ‘라푼젤’이란 단어를 발음하기에는 부끄러운 나이지, 스가와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케챱을 옆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가 접시를 둘의 가운데로 끌어갔다. 점심 즈음의 햇살이 접시가 있던 자리에 그림자를 남겼다.
“저건 볼 때 마다 감회가 새로워”
“왜요?”
“내가 계모잖아.”
스가와라는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볼 때 마다 생각하는 건데, 난 그래도 마녀 쪽을 선택할 것 같아요.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스가와라에게는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희곡의 ‘(사이)’라는 지문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화면 안에서 아름다운 등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노를 저어가는 두 사람의 하늘을 마치 성운과 같은 불빛이 감쌌다. 이거 3D로 보러 갔을 때 기억 해요? 카게야마가 물었다. 너 울었잖아, 스가와라가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푼젤의 목소리가 끝나고 플린이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고조되는지 카게야마는 숟가락을 꼭 쥐었다. 스가와라는 그게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을 들어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빛이 드디어 보여, 마치 안개가 걷힌 듯. 빛이 드디어 보여, 마치 새 하늘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져 노래했다. 카게야마는 이 장면이 제일 좋다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는 스가와라 쪽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어깨에 손을 둘러 턱 밑을 쓰다듬었다. 이제 제가 더 키크니까 내가 쓰다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이건 아빠의 권한이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불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이거 본 적 있는데. 카게야마가 문득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디서? 누구랑? 하고 물었다. 그는 그의 ‘아들’이 연애담이라도 이야기 해줄까 하는 생각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하고 카게야마가 말을 고르기 시작했을 때 스가와라의 심장은 크게 뛰었다. 이 느긋한 분위기가 깨질 것 같다는 불안감과, 여자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스가파파랑.”
“아 뭐야. 난 또 여자 친구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코우시가 내 여자 친구 하면 되잖아요.”
“싫네요.”
“왜?”
카게야마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는 거절 할 이유도 없잖아, 라고 은근슬쩍 반말을 섞어왔다. 그 능청스러움이 어디서 왔을까. 스가와라는 그가 저번 보다 이 센치 정도 자란 것은 능글거림의 높이라고 생각했다. 나 너 되게 어릴 때부터 봤는데,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란에 숟가락을 박았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카게야마는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대답했다.
이제는 내가 더 큰데. 이제 내가 코우시, 코우시, 코우시, 부르고, 스가파파가 문을 열어줘야 할걸. 카게야마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하품을 했다. 스가와라는 그 얄미운 입이 다물어질 때 검지와 엄지로 꾹 잡아 눌렀다. 뻐꾸기 부리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이미 몇 번쯤 본 내용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얇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그는 그의 뒷목을 느리게 쓸었다. 그만, 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그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목 끝부분에 닿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코우시,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느낌이었지만, 같은 울림은 아니었다. 방 안이 온통 심장소리로 가득 차는 것만 같아 스가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머리카락 길러보는 건 어때요?”
카게야마가 물었다. 그의 속삭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발걸음을 옮길 즈음의 낮은 목소리가 스가와라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제 나 먹여 살리려고? 위험하다는 생각에 스가와라가 얼른 말했다. 말을 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상황의 주도권은 카게야마에게 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는 그 뒤에 따라올 뒷말이 너무나도 아찔하다고 생각했다.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카게야마를 안고 집에 돌아오던 십 몇 년 전의 기억보다 크고 웅장했다. 그러니까요,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수없이 그려온 선들, 스가와라의 키보다 더 높아진 낯선 눈높이. 그는 스가와라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를 추월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끝의 끝에서 카게야마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애써 웃었다. 그러나 한 번 커진 심장소리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요, 카게야마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댔다. 불에 댄 것 마냥 화끈거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변화하고, 적응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게 커가는 카게야마에 스가와라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른이 모르는 새 어른이 된다. 눈금과 눈금 사이의 간격이 갑자기 넓어지는 것처럼.
[오이스가] 삼키다. (0) | 2014.12.28 |
---|---|
[오이스가] Suga my Sugar (0) | 2014.12.28 |
[오이스가] 『고도를 기다리며』 (0) | 2014.12.24 |
[츠키스가] 가득한 밤, 사라지는 별들의 꼬리가 (0) | 2014.12.23 |
[다이스가] 작은 메타포적 고백에 대하여 (0) | 2014.12.21 |
Recent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