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4. 12. 21. 22:46
스가와라는 손에 든 테이크아웃 컵을 세게 쥐었다. 플라스틱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손 마디마디에 흐른 물방울이 묻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다리를 꼬았다. 다이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가와라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다, 한숨을 내쉬며 엷게 웃었다. 다이치는 그의 모습이 꽤나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공원에서 지는 노을, 주황색 가득한 가을의 벤치 아래에서 스가와라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는 파란색 빨대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다. 사와무라는 괜히 그를 따라 입술을 입 안에 넣었다. 그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사와무라는 고민을 할 때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스가와라의 습관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이 있는 법이었다. 사와무라는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제법 가까이 들린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 고민 할 일이 있어? 사와무라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사와무라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스가와라는 못 이기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요즘 이상한 꿈을 꾼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악몽? 사와무라가 다시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것은 아니다야, 하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스가와라는 꽤나 몸 관리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사와무라는 그의 피로에 그 꿈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가, 하고 사와무라가 무게를 주어 발음하자, 스가와라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하면서 내뱉은 꿈의 내용은 묘하게 불길한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는 꿈을 꾸고 있다고 서두를 땠다. 가끔씩 다이치와 로드워크를 하러 가는 강둑에서 끊임없이 달리고 있어, 내 발에 닿은 길들은 사라지고, 앞에 길만 남아서 달릴 수 밖에 없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만은 느끼고 싶지 않아서 계속 둑을 달리는데, 내 앞에는 누군가가 있어. 가끔씩 날 기다리기도 하고 먼저 달려가기도 하는데 그 등은 매우 익숙해. 스가와라는 괴담을 말하듯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의 손에서 다시 플라스틱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사와무라는 이 꿈이 반복적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사실에서 괴담 하나를 생각 해 냈다. 그가 여태까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무서웠던 괴담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예전에 이것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서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매일 귀신에게 쫓기는 사람 이야기- 맞지? 하면서 웃는 그의 입꼬리는 예전부터 보아와 익숙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와무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불안감을 줬나, 그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다이치는 꼭 부끄러울 때 헛기침을 하더라, 스가와라가 문득 내뱉은 말은 가을과 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꿈에서는 '귀신' 쪽인 걸까,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제법 재치 있는 생각이었다. 네가 쫓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사와무라가 서툴게 긍정하자, 스가와라는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별 일 없을 거야, 라고 위로하며 다이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이 닿은 어깨가 엷게 떨렸다. 그는 그것이 첫 가을을 맞은 호랑나비의 날개짓보다 더 여린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천천히 손을 땠다. 스가와라는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스가, 하고 물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왔다. 아슬아슬한 랠리를 주고받는 것 같은 기분은 매우 어색한 것이었기에 사와무라는 어색하게 귀 밑을 간질였다.
"마치미야가 이런 거 좋아하던데."
"마치미야가?"
"괴담 같은 거 좋아하더라고."
"그런 이야기도 해?"
스가와라가 물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끔씩 끝나는 시간이 겹쳐서 하교를 할 때, 간혹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스가와라의 어조는 묘하게 취조하는 느낌이 났다.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가, 하고 말하자 스가와라는 곧바로 사과해왔다. 그는 자신이 꿈 속에서도 달리는 바람에 조금 지치고 피곤하고, 예민해져 있다고 해명했다. 그의 어깨가 축 쳐졌다. 사와무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투정하듯, 다이치 답지 않아- 하고 말해왔다. 미치미야와 엮인 이야기라 그래?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는 뭐라 대답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다이치는 평소의 스가와라와 지금의 스가와라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의 '산뜻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속 안에서 뭔가 변한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달려가는 그 꿈 속의 상황이 현실에도 엮여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그는 미치미야가 했던 여러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스가와라가 꿈속에서 그 남자를 잡게 된다면, 혹은 그 밑으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했다. 이는 매우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와무라는 예민한 스가와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 스가와라가 다시 그에게 사과해왔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봐.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넓은 포용력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스가와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이 그의 엷은 머리카락을 크게 쓸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든 노을빛은 꼭 주황색이었다. 스가와라의 얼굴에 오늘 본 것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가 걸렸다가, 해가 지는 것처럼 금새 사라졌다. 사와무라는 그 손바닥 전체에 닿는 그의 여린 머리카락의 감촉이 새삼스럽다고 느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무슨 생각?"
"내가 꿈 속에서 그 사람을 잡아야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꿈 속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는 그 등이 매우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단단하고, 든든하며, 뒤에서 끌어안고 싶은 등. 오랜 기간동안 일방적으로 봐 왔던 것처럼 편한 등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게 기다려 줄 때에는 땅이 꺼져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게 달려가고 있을 때는 절망적이라고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사와무라는 그의 꿈이 매우 디테일한 것을 걱정했다. 아마 말하는 사람이 스가와라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것을 잘 만든 거짓말이나 픽션으로 취급했을 것이었다.
봄고가 머지 않았다. 그는 그 곳에서 스가와라랑 같이 뛰어야만 했다. 꿈은 정신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하는 곳이었다. 그는 현대국어 읽기 지문으로 나오곤 하는 프로이트의 저서를 생각했다. 그는 스가와라가 무언가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는 입술을 혀로 쓸었다. 어째 오늘은 한 마디도 떼기 어려운 것처럼 어려웠다. 그와 오히려 친하기 때문에 조언을 망설이게 되는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는 언젠가 미치미야가 '너희는 사귀는 것처럼 붙어 다니네'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아사히에게 조언을 구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불어온 바람에 낙엽이 졌다. 낙엽은 나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서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나무가 싫어서 버리는 걸까. 스가와라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말했다. 사와무라는 그가 타게쨩 같은 말을 한다면서 웃었다. 호쾌하게 웃으려고 했는데, 웃음은 점점 데크레센도처럼 옅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우주와 같은 띄어쓰기가 존재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웃음을 받아 미소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플라스틱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나이스 토스 스가! 사와무라는 평소처럼 크게 외쳤다. 그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스가와라가 '브이' 손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다이치는 시계를 봤다. 그는 마치미야가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수업 필기를 복사 해 주기로 했었는데 완전 잊고 있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어서 집에 가 봐야 겠다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왜? 라고 물었다. 그 천진한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마치미야에게 수업 필기를 전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스가와라는 두어 걸음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마냥 하늘거렸다. 다이치는 집 쪽을 향해 발걸음을 빠르게 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달리는 모습이 스가와라에게는 꼭 '꿈'처럼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잊어버렸다.
"또 마치미야네."
남겨진 자리에서 스가와라는 혼자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의 입속에서 나오곤 하는 그 이름이 별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울림을 입 속으로 곱씹다가, 사와무라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달려간 길은 꼭 꿈속과 닮아 있었다. 스가와라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쌀쌀한 가을바람에 금새 메마르는 입술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는 서서히 한숨을 내뱉었다. 마음을 깊게 감싼 질척이는 감정들이 그의 숨을 타고 바닥에 낙엽처럼 깔렸다.
스가와라는 뒤를 돌았다. 그는 사와무라가 걸어간 반대편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독한 가을이 그의 그림자 속에 맴돌며 길게 몸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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