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쿠니] 동거

    하나쿠니의 날을 맞아 받은 돌발 리퀘입니다. 동거하면서 나오는 달달한 에피소드를 리퀘 해 주셨었는데.. (동공지진) 쓰다 보니까 이렇게..되어버렸읍니다.. 요리하는 쿠니미가 쓰고 싶었을 뿐인데... ㅠㅠAS를 원하신다면 다시 에슥흐폼으로 연락주셨음 좋 겠 습니다... 익명님 사랑합니다 ^0^!!! 




***


   어쩐 일인지 눈이 빨리 떠졌다.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열린 커튼 틈 새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냈다.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목을 쓰다듬었다. 입으로 작은 기침이 새어 나왔다. ‘아침’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따끔거림에 쿠니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연인은 무사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쿠니미는 어떻게 할까,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장난을 앞둔 고양이처럼 굴었으나, 무언가 할 여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는 조심스럽게 팔을 뺐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팔 안쪽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가슴에 닿는 숨결이 낯간지러웠다. 밤에는 친절했을지 모르지만 낮의 쿠니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 그는 입술을 쭈뼛거렸다. 다행이 하나마키는 깨지 않았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몸을 작게 꼬물거릴 때 마다 허리와 엉덩이가 지끈거렸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허리께를 꾹꾹 눌렀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끌어 당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닿는 감촉은 미묘했다. 쿠니미는 어젯밤을 회상했다. ‘생일기념 특별 서비스’였다. 그는 다음부터 고양이 꼬리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침대를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어째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커튼을 두꺼운 걸 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는 슬금슬금 움직였다. 어제 뒤처리를 하고 잔 까닭에 속앓이를 하진 않았다. 쿠니미는 일단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익숙하게 움직였다. 거의 반 동거에 가까운 관계였다. 뺀질나게 들락날락했기 때문인지 하나마키의 속옷함에는 쿠니미의 속옷도 여러 벌 들어 있었다.


   아예 집을 합치자고 할까. 쿠니미는 하품을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하나마키의 자취방은 대학에서 너무 멀었다. 매일 차로 실어다주는 것도 일이었고, 쿠니미는 5분 거리의 제 방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내향적인 인간이었음으로 언제나 자신만의 공간이 하나쯤은 필요했다. 하나마키의 방은 넓었지만 독립된 방이 없었다. 고양이었다면 4호짜리 상자에 만족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쿠니미는 180cm가 넘는 성인 남자였다.


   어제 말다툼을 한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방을 합치길 원했다. 지금도 서로의 자취방을 오가며 동거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룸메이트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논리였다. 쿠니미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게 하나마키에게 종속되는 게 싫었다. 도망칠 구석이 필요했고, 쿠니미의 연인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화해는 했지만 뒷맛이 썼다. 쿠니미는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랑은 언제나 빛날 수 없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쿠니미는 아직도 자신의 판단이 이성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호피무늬 드로즈를 걸쳤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하나마키 다운 속옷이었다. 쿠니미는 옷장을 뒤져 맨몸에, 그의 후드집업도 마저 걸쳤다. 쿠니미 자신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일종의 심술이었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다시 침실로 향했다.


   하나마키는 이불도 다 덮지 않고 자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전날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자르는 걸 까먹어 손톱이 꽤나 길어 있었다.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중에 약이라도 발라줘야지 싶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볼에 입술을 맞춰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꽤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화를 가득 담은 키스와 폭력적인 섹스는 뒤로 가면서 점점 미안하다는 말로 점철되어갔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것은 쿠니미였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하나마키였다. 그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신 사과했다. 상처를 준 쪽은 쿠니미였다. 가해자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그는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어주었다. 섬유에 닿는 상처가 따끔한지, 하나마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피처를 만드는 것은 나쁜 버릇이었다. 쿠니미는 이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어제 했던 ‘기분 좋은 섹스’만을 떠올리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키스에 가득 담아 휘핑크림처럼 부드럽게, 가벼운 슈크림처럼 장난을 치고 기분 좋은 느낌만을 회상하면서 쿠니미는 기지개를 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시계는 ‘아침’과 ‘점심’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는 폭신한 이불을 보면서 좀 더 잘까를 고민하다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확실하게 사과 할 요량이었다. 쿠니미는 냉장고와 선반을 뒤졌다. 언제나 밥을 하는 건 하나마키였음으로, 그의 부엌은 쿠니미가 유일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는 허리를 두드리면서 밀가루와 계란, 베이킹파우더와 단호박 등을 찾아냈다. 쿠니미는 단호박을 찌기로 결심했다. 그는 단호박을 네 등분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속 씨를 설설 긁어냈다.


   갉작이는 소리는 의외로 듣기 좋았다. 그는 꿀을 바르고 찜기를 꺼내 냄비에 물을 붓고 단호박을 올렸다. 핫케이크를 만들 것이었음으로 좀 무른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주인 몰래 말썽을 부리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쿠니미는 다시 살금살금 걸어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매트리스가 움직이는 느낌에 하나마키가 슬쩍 눈을 떴다.


   깼어?

   네

   더 자자,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입술에 작게 입 맞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피곤한 듯 했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설설 쓸자, 하나마키는 기분이 좋은 듯 아이 같이 웃었다. 쿠니미는 그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오늘 기분 좋아? 그가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쿠니미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직도 같이 살기 싫어? 하나마키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물어보는 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난 네가 내 옷 입고 있는 게 좋은데.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손을 뻗어왔다. 그는 쿠니미의 매끈한 허리와, 엉덩이 위 팬티를 노골적으로 쓸어내렸다. 나 잠옷 야해서 동거 못 해요. 그는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고, 하나마키는 뭘 입는데? 하고 물었다. 하나마키는 제대로 베개에 머리를 올리고 손을 뻗었다. 쿠니미는 얌전히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단호박이 익기 까지는 최소 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샤넬 넘버 파이브요.”

   “같이 못 살만 하네.”


   하나마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랑 잘 때도 입어 줘라, 그의 말에 쿠니미는 복숭아 향 향수를 뿌리기 때문에 무리라고 대답했다.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농담 속에는 불안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쿠니미는 그가 자신을 옭아매고 싶은 거라고 확신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의 맨 가슴에 이마를 댔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나 좋아하지? 하나마키의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마키는 그럼 됐다고 말하며 그의 뒷머리를 쓸었다. 나랑 동거하면 좋은 점 정말 많을 텐데, 라고 마침표 뒤의 P.S가 따라 붙었다. 쿠니미는 그의 가슴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요, 라고 속삭이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짙은 커튼의 벌려진 틈으로 햇볕이 들어왔다. 매일매일 너랑 눈 뜨고 싶어.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대답 할 수 없었다. 내가 널 불안하게 만들어? 하나마키가 물었다. 어제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럼 됐어. 그는 이 선에서 만족한다는 듯 물러났다. 여전히 그는 미안해하고 있었다. 생일에 싸웠단 것이 뭇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나 아침 만들 거예요. 쿠니미가 중얼거렸다. 하나마키는 그를 더 제 품 안에 가두면서, 놓기 싫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나랑 동거하면 매일 아침 만들어 줄 텐데, 매일 차로 실어다 주고. 그는 미련 남은 말들을 반복했다. 좀 생각 해 본다고 어제 말했는데, 쿠니미의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랬었지, 하면서 팔을 풀어 주었다.


   “불안해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불안할 때가 없지, 라고 푸스스 떨어지는 말에는 그 나름의 사랑이 가득 담긴 듯 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불안해하는 게 뭐 때문인지 알아요? 그가 물었다. 협탁 옆 시계는 그가 일어나야 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좀 울 것 같은 모습이었고, 쿠니미는 서둘러 그의 눈두덩이에 입술을 맞췄다.


   만약 괜찮다는 결론을 내리면 내 집에 바로 들어 올 거야? 하나마키가 질문했다. 네. 쿠니미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는 제법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떴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들어 차 있다는 게 나름 감동적이라, 쿠니미는 그의 입술에 먼저 키스를 졸랐다. 부벼온 부드러운 입술을 하나마키는 마다하지 않았다. 혀와 혀가 얽히고 숨이 서로를 진하게 적셨다.


   쿠니미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얼른 내렸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마키는 조금 있다가 약을 발라 달라 말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쿠니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넓은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와 그가 사귀고 있다는 증거는 어쩌면 왼손의 반지와 적막한 침대뿐일지도 모른다. 다 되면 부를 테니까 좀 더 자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야해.”


   쿠니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하나마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로 섹시한 게 아니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옷을 넣어두는 함으로 다가갔다. 나는 가끔 니가 와서 속옷을 놓고 갈 때마다, 그래서 그걸 빨래해서 개놓을 때 마다 설레. 하나마키의 독백에 가까운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호박을 확인했다. 색이 짙게 들어 있었고, 알맞게 쪄진 느낌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동거하자고 말만 하잖아?”


   나 안 좋아했으면 가둬 놨을지도 몰라.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속옷을 입었고, 티셔츠를 걸쳤다. 쿠니미는 콧노래를 경쾌하게 부르면서 단호박을 으깨기 시작했다. 하나마키는 식탁 의자에 앉아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년 네 생일 까지는 대답해 줄 거지? 스스로 생각해도 구질구질한 느낌이었다. 쿠니미는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냉장고에서 파프리카를 꺼냈다.


   연애는 점점 서로의 반경을 넓혀가는 것이라 했다. 하나마키는 약간의 유예에 감사하며, 쿠니미의 불안감이 종식되길 바랐다. 오늘 따라 침묵이 썼다. 사랑해, 그가 매달리듯 말했고, 쿠니미는 저도요, 라고 긍정했다. 그 목소리가 꼭 손과 손을 묶는 수갑 같았다. 그는 지금은 이 ‘동거 놀이’에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려주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쿠니미가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하나마키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약간의 여백 후, 하나마키는 우리 집에 메이플 시럽 있던가? 하고 질문했다. 가니쉬를 만들 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쿠니미는 지금부터 찾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동거 하면 이것도 바로바로 알 수 있을 텐데, 라는 말을 애써 목 끝으로 삼켜냈다. 아직 아니라면 아직 아닌 거였다. 그는 참을성 없는 마음을, 꾹꾹, 꾹꾹 또 눌러냈다. 그것은 마치 쿠니미가 으깨고 있는 단호박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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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봄, 봄.


   아직 벤쿠버 기준으로는 쿠니미의 생일입니다. 하나마키의 생일을 벤쿠버 기준으로 챙겼으니 쿠니미의 생일 또한 그래야 하는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늦장 부리다가 이제야 생일을 챙기네요. 가장 마지막으로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첫번째가 될 수 없다면 마지막이라도 가져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쿠니미야 생일 축하해 ^-^!!!!! 앞으로도 하나마키랑 예쁜 사랑 해줬으면 좋겠다아아아~~








***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


   페이스북 알람이 울렸다. 얼마 전 카페에 갔을 때 올린 사진 때문이었다. 야 우리 이제 매점 못 가는데 지금 끝내면 어떡해. 텍스트임에도, 마츠카와는 매우 억울해 보였다. 그 밑에 이와이즈미가 담을 넘으면 된다는 가벼운 해결책을 매달아 놓았다. 하나마키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열린 창 안으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스며왔다.

   몇 분의 시간을 더 들이고 나서야, 하나마키는 일 년 전쯤에 했었던 기묘한 내기를 떠올렸다. 이번에 일학년에 내 후배가 들어오는데 말이야, 맛키랑 같은 윙스파이커인데, 굉장히 차가운 느낌이야. 라는 오이카와의 속삭임으로부터 시작 된 게임이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에게 후배랑 친하냐 물었다.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간극을 파고든 것은 하나마키였다. 

    너 걔랑 안 친하지? 라는 하나마키의 말에 오이카와는 그럼 안 친하니까 누가 먼저 친해지는지 내기 할래? 라는 작은 제안을 했다. . 하나마키는 커피포트에 정수기 물을 담았다. 학기 초는 언제나 지루함이 가득했고, 봄 햇살은 느리게 다가왔다. 이 시기의 남자 고등학생이란, 춘곤증 가득한 봄날을 탈피할 수 있다면 무슨 놀이든 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거하게 하품을 하던 이와이즈미가 ‘미션 성공’ 기준을 정했던 게 기억났다. 쿠니미와 함께 역 앞의 카페에서 와플 한 판 위에 아이스크림 세 스쿱과, 딸기를 잔뜩 얹어주는 디저트를 먹는 것. 일 등부터 사 등까지 정하는 거야? 라고 말하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나마키는 느리게 하품했다. 이 계절만 되면 입학식을 마친 쿠니미와, 이 내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매 봄마다 몰아내는 졸음 같은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하품을 했다. 창 밖에는 매화가 진하게 피어 있었다. 열린 창틈으로 들어오는 향기가 짙었다. 매화 너머에는 노란 산수유가 드문드문 보였다. 실로 봄이었다. 그는 밤 벚꽃만큼 야한 밤매화를 하염없이 보다 물을 끓였다.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지루했다. 전기 포트가 작동되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그는 컵 하나를 꺼내서 핫초콜릿 가루를 네 스푼 넣었다. 머그잔 가득 타 마실 작정이었다.

 

  시작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끝나는 기한 없음. 일 등에게는 매점 자유이용권 삼 회, 꼴등에게는 매점 셔틀 삼십 번. 후한 기준인 것 같으면서도 가혹한 내기였다. 하나마키는 소파에 앉았다. 붙어온 봄에 퍼져온 하품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봄이 온 탓이었고, 햇살이 느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볼을 긁적였다. 아직 물이 끓기 가지는 꽤나 남았는지, 플라스틱 주전자 끄트머리에 든 파란 불은 꺼지지 않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내기에서 이긴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쿠니미에게 다가가더니, 번호를 따고 라인을 교환했다. 익숙한 솜씨였다. 같은 중학교 선배라는 어드밴티지가 적용 된 것 같다며 마츠카와가 투덜거리던 것을 하나마키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 투덜거림에는 하나마키 자신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봄을 가르는 꽃샘추위 같은 이의제기에도 오이카와는 이긴 건 이긴 거라면서 혀를 삐쭉 내밀었었다.

   오이카와는 사진을 내밀었다. 확실히 쿠니미와 같이 찍은 사진에, 딸기가 잔뜩 올려진 와플이었다. 아이스크림 세 스쿱이 모자람 없이 있었으며, 하얀 휘핑크림은 덤이었다.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는 사진을 뚫고 넘실거리는 단맛에 질색했다. 둘은 메뉴를 바꾸길 주장했지만 그 안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니미가 단 걸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순위를 회상했다. 꼴등이었다. 쿠니미는 전형적인 내향성 인간이었고, 편하지 않은 사람과는 따로 만나기 싫어했다. 하나마키가 몇 번 약속을 잡으려고 해도 그는 바쁘다는 말로 피하기 일쑤였다. 연습에 나갈 때 마다 데이트를 조르는 한량 같은 꼴이 되었다. 이와이즈미 또한 여러 번 차였다. 오이카와는 그를 놀리면서, ‘선배’라는 이점도 살리지 못한다면서 웃었었다.

   그는 자신에게 깊게 다가오는 과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다음에 성공 한 건 마츠카와였다. 그는 브이를 내밀어 보면서, 다음에 손목 아대를 같이 사러 가기로 했다는 말을 내뱉었다. 데이트 약속인가요? 하고 얄밉게 중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 너머로 하나마키는 불안했었다. 촉박한 쉬는 시간에 매점으로 달려야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게 봄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봄, 봄 때문이었다.

   그 계절에 오이카와와 마츠카와는 꽤나 쿠니미와 같이 다녔다. 이와이즈미는 초조해 했고, 하나마키는 셋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기분이 나빴다. 봄 날씨는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았지만, 그는 꽃샘추위 같이 살았다. 매화 향기마냥 짙은 질투였고, 꽃망울을 하얗게 틔우는 이팝나무 밑에 떨어진 꽃잎들처럼 진득한 감정이었다. 그는 이 느낌의 근원을 알지 못했다.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오이카와는 삼월의 둘째 날에, 마츠카와는 삼월의 열두 번째 날쯤 성공했다. 점점 이십이 일로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 마다,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는 초조했다. 하나마키는 적어도 그보다는 먼저 쿠니미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튀긴 두부나 좋아하는 정갈한 입맛의 이와이즈미보다는 자신이 좀 더 재미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퐁퐁 솟아났다. 봄이 어디서부터 찾아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근원 모를 말이었다.

   어느새 내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나마키는 연습 때 마다 쿠니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그의 발끝에 붙어있는 그림자까지 질투할 정도로 눈에 담았다. 살짝 삼백안 끼가 있는 하나마키의 눈동자에 쿠니미가 담길 때 마다, 쿠니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봄 햇살 아래의 고양이처럼 입꼬리는 살랑살랑 올라가 있는데, 눈은 꽃샘추위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므로 그는 봄이었고, 꽃은 봄에 피기 마련이었다.


   결국 쿠니미와 세 번째 데이트를 한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삼월 이십 이일. 평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답지 않게 ‘브이’를 그리면서 데이트를 나갔다. 이와이즈미가 옷을 갈아입는 것은 꽤나 빨랐기에, 하나마키는 라커룸에 쿠니미와 둘 만 남았었다. 너 우리 내기 하는 거 알고 있지?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씨에게 들었어요. 하는 목소리는 무심했다.

   내가 왜 꼴등인데! 하나마키가 물었고 쿠니미는 그래야만 하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미는 넥타이를 서툴게 맸다. 천천히 매듭을 짓는 손길은 느리기 짝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쿠니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목이 시큰거리다면서 다가가던 자신은 꽤나 껄렁껄렁 했을 것이다. 하나마키는 과거의 과오를 후회했다.

   그리고 그와 그가 마주 본 순간, 쿠니미는 서툴게 숨을 들이켰다. 호흡하는 법을 잊은 듯 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였던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좋아, 였던가. 하나마키는 일 년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정확히 기억 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일 년 전, 고등학교 3학년의 하나마키 타카히로는 쿠니미 아키라에게 있어서 ‘가장 늦게 만나 봐야 할 선배’였고, 쿠니미의 어깨가 단단히 굳었다는 사실만 기억 할 뿐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단정한 입술을 기억했다. 틴트나 립스틱으로 한껏 치장한 여자아이의 입술과는 다르게 담백한 느낌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숨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담고 있을 말은 궁금했다. 봄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마음을 알고 있니, 바람보다 쉽게 흐른 마음을 알고 있니, 하나마키는 말을 골랐고, 그 말을 내뱉는 일은 없었다. 쿠니미의 얇은 입술이 먼저 열렸기 때문이었다.

   삼일 후에, 만나주실 수 있으신가요? 쿠니미는 담담하게 말했고, 하나마키는 설렘을 담아 좋다고 대답했다. 그 날은 주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여백이 존재했다. 침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띄어쓰기였다. 하나마키는 이제 삼십 번 정도 매점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엄살을 내뱉었다. 쿠니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선배들이랑 갔던 역 앞 카페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제안했다. 그는 내기를 끝내 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쿠니미와 와플을 먹고 온 다음의 이와이즈미는 단 것에 흥미가 생겼다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 집 와플이 그렇게 맛있냐고 말하면서, 그에게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슈크림 가게를 알려주었다. 튀김 두부라든지, 파드득 나물 된장무침 같은 정갈한 취향인 녀석이 크림을 좋아하게 된 게 꽤나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번호였다. 쿠니미는 그에게 슈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나마키가 추천한 가게의 상호를 말하는 그는 꽃의 개화보다도 마법 같았다. 벚꽃나무 가지에 가득 핀 벚꽃마냥 소담스러웠다. 하나마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기묘한 우연에 신기함을 가득 담아내는 것처럼, 그는 핫초코에 물을 가득 부었다.

   결국 삼월 이십이 일에서 세 걸음쯤 후에, 하나마키는 그와 슈크림을 먹으러 갔다. 쿠니미는 그를 가장 늦게 부른 게 미안하다면서 손목 아대를 건넸다. 윙스파이커에게는 손목이 중요하잖아요, 하면서 서툴게 내리던 시선 끝, 그 눈길이 걸려 있는 눈동자가 귀여웠다. 쿠니미는 포크로 슈크림을 꾹꾹 눌렀다. 번호는 누가 알려 줬어? 하나마키는 시큰거리는 손목에 찬 팔찌를 벗으면서 물었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 씨요,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짜여진 각본 같았다. 그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딱딱한 반지 케이스가 멋없게 들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잘 녹은 핫초코를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커플링을 멋있게 주는 방법은 학교에서 알려 주지 않는다.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생일선물은 원래 충동적인 맛을 섞어 주는 거라지만 묘하게 부끄러웠다. 그는 봄 같이 뛰는 심장 박동을 달달한 차로 달랬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3월 25일이었다. 쿠니미의 생일. 하나마키는 눈을 깜빡였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벌 키를 사용하는 게 제법 익숙한 모습이 그가 지금 가장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은 매우 천천히 열렸고, 쿠니미는 양 손에 선물이 든 쇼핑백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저기 있잖아, 하고 하나마키가 운을 땠다. 그의 졸린듯한 두 눈이 하나마키를 가득 담았다.

   해명을 요구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에서야 알아챈 대답을 어떻게든 말로 엮어 말해야 했지만 하나마키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조어가 불가능 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쿠니미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50cm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선배? 하고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저


   “사랑해”


   라고 말할 뿐이었다. 더할 것도 없고, 덜어 낼 것도 없는 말이었다. 그는 쇼핑백 끈에 시달리느라 붉어진 쿠니미의 손을 잡았다. 좀 더 로맨틱 하게 말해주세요. 쿠니미의 요청에 하나마키는 말없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반지를 꺼내,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충분히 로맨틱 하니?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잘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반짝거리는 사랑이 걸려 있는 네 번째 손가락으로부터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 손가락의 완만한 곡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하나마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고등학생이면서 까졌어, 라는 투정에 쿠니미는 목 끝으로 웃어보였다. 고양이의 고릉고릉 거리는 소리와 닮은 웃음에 하나마키는 웃으면서, 그의 입술에 숨을 겹쳤다. 그 때 라커룸에서 뺏지 못한 것을, 그는 몇 년에 걸쳐서 받아 낼 예정이었다.


   생일의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매화가 피는 계절이었다.

[하나쿠니] 호흡

  얼마 전에 철가면 님에게 달성표로 하나쿠니를 받았었습니다.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서 감상문 같은 느낌으로 써드리고 싶었는데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너무 풀리지 않아서 하이큐 글연성 전력의 '비' 라는 소재도 섞어보았습니다만..(말을 아낀다)

   철 님의 감성이 너무 좋아서 쓰려고 할 때 마다 로그가 눈에 아른거리더라구요. 그 애절하고 절절한 나름의 짝사랑을! 녹이고 싶었는데! 저는 철님의 로그를 두 사람의 쌍방 짝사랑(하지만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없는)으로 봤는데 잘 봤는지 민망하네요 혹시 아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저장]버튼을 누르는 걸 몇 분 째 고민하고 있습니다. 

   연성에서 '하나마키 선배' 라고 말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는데, 어째 그 부분을 강조하질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철님께 과연 이 글을 태그해서 드려도 괜찮은 걸까, 아직도 고민중입니다... 아... 철님...사랑해요.... 







***

 

   비 오는 날이었다. 쿠니미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이런 날에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를 생각했다. 아가미가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뻐끔거리고, 꼬리는 천천히 흔들거림을 멈춘다. 그는 그게 꼭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투박한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손톱 줄로 깔끔하게 갈아 다듬은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상처 낼 수 없는 그 뭉툭한 손톱을 보며 그는 조금 춥다고 생각했다.

   그는 긴 팔 져지를 입었다. 감기기운이 있다는 핑계로 -눅눅한 공기에 숨을 쉬기 어려우니, 아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무리 연습을 하지 않고 부실에 박혀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가려는 요량이었다. 집에 바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쿠니미는 집에 가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모름으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납득했다.

   부실 창에서는 간간히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물 먹은 공기는 그의 호흡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답답함에 목 끝까지 올린 지퍼를 내렸다. 그는 습기 찬 책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포스트잇을 사용해 표시해 가며 읽던 것이었다. 랭보의 시집이었다. 『나의 방랑』이라는 제목은 어항 밖을 빠져나온 물고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번뇌하며 책장을 넘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익히 들어왔던 것이었다. 쿠니미는 그 발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직 집에 안 갔네?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부실 문을 닫아줄 것을 요청했다. 하나마키는 그래, 하고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 밖에 비가 너무 심한 거 있지? 그가 말을 걸어왔다. 쿠니미는 책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꽃을 오래 보면 홀리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피기 시작한 벚꽃에 대해서 말했고, 쿠니미는 지고 있는 매화에 대해 대답했다. 그 꽃들은 일식과 월식마냥 피는 시기가 달랐다. 하나마키는 멍하니 있었고, 쿠니미는 그게 퍽 편했다. 꽃향기에 나비가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쿠니미는 그 당연한 사실이 불쾌했다. 그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책장에 손을 댔다.

   분해된 언어는 더 이상 시가 아니었다. 언어보다 목소리는 더 강렬하기 마련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받은 고백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여자아이들의 러브레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이 꼭 시와 같다고 말했고, 랭보의 시집을 읽고 있던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대화는 세상을 끊임없이 적시는 빗소리처럼 의미 없는 것이었으나,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쿠니미는 창 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는 일어나서 커튼을 쳤다. 밖에 보이던 회색 세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 나한테 집중 안 하잖아. 쿠니미는 하나마키의 말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꽤나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오이카와 선배 보다 러브레터 못 받는 게 억울하단 이야기요.”

   “아니, 억울하지는 않아. 이 하나마키 씨는 한 번 홀리면 실속 있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쿠니미는 그가 굳이 나머지 연습을 빼먹고 부실에 온 것에 의미를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설픈 기대는 사람을 망치기 마련이었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거 재밌어? 하나마키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마음을 심란하게는 하지 않네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하나마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쿠니미는 빗소리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붙잡았다. 그것은 뱀과 같이 탐욕스럽고, 잘 빠져나가는 것이라, 쿠니미는 제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그는 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참 재미없다. 하나마키가 말했고, 쿠니미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책에서 시선을 돌려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을 흔들며 윙크했다. 내 소년 팬에게 서비스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봄날 꽃잎처럼 가벼웠다. 그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가지처럼 무게감 없는 사람이었다. 쿠니미는 숨이 막힘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혹시, 과호흡이라도 있어? 들썩이는 쿠니미의 어깨를 보며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비가 와서요. 그는 그것이 퍽 멋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제 분홍빛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설설 쓸면서, 미조구치한테는 비밀로 하겠다고 말했다. 비밀, 비밀, 비밀. 쿠니미는 그 단어의 어감이 매우 무겁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말 없이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넌 나한테만 쌀쌀맞더라.”

   “딱히 선배를 차별한 적은 없는데요.”

   “하나마키 씨가 멋있는 건 인정하지만”

   “멋있는 거랑 쌀쌀맞은 게 관계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당돌하게 눈을 맞추었다. 하나마키는 시선을 맞추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 듯 볼을 긁었다. 그의 머리에 있던 분홍색이 어느새 볼까지 내려왔는지, 그의 얼굴이 붉었다. 쿠니미는 그가 처음, 자신에게 내리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그는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빗물은 아직, 대기 중에 나온 물고기가 움직일 만큼 쌓이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것이 퍽 아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느끼는 자신을 경멸했다. 천국에서 지옥까지, 또 다시 지옥에서 천국까지. 그의 생각은 끊임없는 경멸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몰아갔다.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순리였고, 마음이 피는 것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느리게 호흡했다. 공기가 아가미에 가득 찼다. 어색한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입을 때었다. ‘짝사랑’에 대한 말이었다. 쿠니미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동물도, 어렸을 적도 안 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쿠니미는 착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하나마키의 눈동자는 알기 쉬우면서도 어렵다. 쿠니미는 자신의 지금 이 감정이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그렇기에, 흔들려서는 안 됐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쿠니미는 침을 삼켰다. 침으로는 마른 아가미를 적실 수 없다. 그는 뭉툭한 손톱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것보다 뭉툭하고 단단한 손가락. 그는 그 투박함을 바라보다가 하나마키와 눈을 마주쳤다. 짝사랑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음. 그것은 모두가 내린 정의였다. 쿠니미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차피, 무서워 할 거면서 왜 그렇게 떠 보는 걸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았다. 한, 다섯 번째 첫사랑부터 이야기 할까요?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주먹을 쥐는 것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싫어하면서 왜 굳이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쿠니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시집을 덮었다. 랭보의 『나의 방랑』이었다. 

   하나마키는 ‘필사적’인 사랑에 대해 말했다. 쿠니미는 필사적인 방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자석의 S극이라면, 그는 N극이고 싶었다. 쿠니미는 자신의 마음의 지침이 향하는 곳을 애써 외면했다. 그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모습에 그는 더 안달나는 듯 했다. 하나마키가 듣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고, 쿠니미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좋아해요.


   절대로 입 안에 담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이었다. 쿠니미는 메마른 대기에서 호흡했다. 하나마키는 열일곱 살 이후의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 애초에 ‘처음’은 단 ‘한 순간’이었다. 누구에게 처음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반복되며 변주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을 가지고 싶은 걸까, 쿠니미는 잔잔하게 고민했다. 침묵의 순간동안 그의 머리는 여러 가정을 했고, 헤어지는 상상만을 붙잡았다.

   쿠니미는 시집을 덮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는 역시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하나마키 선배, 하고 나직하게 부르니 그는 떨리는 입술로 응대했다. 이렇게 놀랄 거면서 왜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쿠니미는 비 내리려는 마음을 억지로 비틀었다. 비가 내리면서도 내리지 않는 척. 그는 자신에게 고인 물웅덩이를 감추고자 했다. 쿠니미는 가방에 시집을 넣었다. 이제 슬슬 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는 것도 지쳤다.


   “이상한 기대 하시는 거 아니죠?”


   그런 농담 오이카와 씨도 안 하니까 그 쯤 해요. 쿠니미는 한 자 한 자 똑똑히 씹어 발음했다.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쿠니미는 시선을 돌렸다. 하나마키의 손가락은 망설이는 듯 방황했다. 그는 손을 쥐락펴락 했고, 엄지와 중지를 애처롭게 비볐다. 그는 그 손장난에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왜 불안 해 하는 건지 쿠니미는 알 수 없었다.

   이 관계에서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건 오로지 쿠니미였다. ‘장난’의 이름으로 밝혀진다면 피해를 입는 것도 쿠니미였고, 그를 애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도 쿠니미 뿐이었다. 그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무례한 감정을 잘라내고 싶었다. 그는 무표정 아래 자신을 감추었다. 일 더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그가 말했다. 꼭 그는 마침표를 찍고 싶어 했다. 쿠니미는 그들의 관계를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남기고 싶었다. 비가 내렸으나 물은 고이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물 밖에서 천천히 꼬리를 움직이는 물고기였다. 쿠니미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아득한 일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동시에 좋아해서 젖어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쿠니미는 그것이 일식과 월식이 겹치는 일만큼, 혹은 비와 햇살이 겹쳐 파란 하늘에 내리는 여우비만큼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짙게 내리는 장마처럼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듯 했다. 쿠니미는 그 말을 녹였다. 여즉 내린 비에 만들어진 웅덩이에는 그 말을 가릴만큼의 공간은 있었다.


   시작 안 했으니까, 아직이에요.

   쿠니미는 뒤를 돌았다. 그는 부실 문을 열었다. 그는 처음의 순간이 너무나도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첫 호흡의 순간은 아가미를 찢는 듯 했고, 그가 들어있던 안락한 세계를 사정없이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는 방황하며 문을 닫았다. 세계의 단절, 그 전 하나마키의 모습은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쿠니미는 그 숙여진 어깨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저에게 거는 말이나 애원은 아니란 것이었다. 쿠니미는 어느새 비가 그친 밖을 바라보았다. 땅에 있는 웅덩이에는 벚꽃 잎이 고여 있었으나, 아직 꽃이 다 지지는 않았다. 쿠니미는 물이 고인 땅을 디뎠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진하게 들려왔다. 그는 물웅덩이를 밟으며 호흡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눈, 가장 깊은 곳에서도 비가 내렸다. 그는 제 맘에서 뻗어나간 화살표를 찾고 싶었다. 맑게 갤 날이 없는 마음에 자꾸만 먹구름이 쌓였다. 쿠니미는 계단을 내려갔다. 뒤늦게 나온 하나마키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코를 킁킁거렸다. 소낙비가 빠져나간 하늘은 맑기만 했다. 

[카게스가/킨야하/하나쿠니] '하고 싶어' 라고 말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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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밤, 그리고 아침

    언제나처럼 섹피AU입니다. 벌써 네번 째 글이네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매번 적는 것도 번잡스러워, 카테고리를 구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섹피 AU는 :3 카테고리에 올라옵니다^//^!!!! 뭔가 일을 크게 벌리는 것도 같지만 상관 없지 않을까요!

   오이카와랑 쿠니미는 합이 좋다고 생각해요. 오이카와의 딸 같은 쿠니미가 좋습니다. 섹피AU에서 둘은 냉혈동물 사촌지간입니다. 예전부터 앗쨩과 토오루라고 불러온 탓에 호칭을 교정하느라 나름 애 먹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

   "그래서 그 날 맛키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쿠니미의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끓는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닿았다. 잼을 만드는 것은 쿠니미의 오랜 취미였지만, 오이카와는 그가 부엌에 있는 광경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귀한 집 도련님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란 나이는 부엌에 있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부엌방문을 명백히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는, 부엌에서 쿠니미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잼을 졸인다'는 쿠니미의 취미는 불을 사용하는 놀이였다. 그의 여린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맨 검은색 앞치마 리본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코끝 까지 밀려오는 단 향기에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쿠니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바닥이 보이는 레몬청을 꺼냈다. 다시 만들어 병을 채워야 했다. 이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레몬청 국물과 레몬 몇 가닥을 딸기가 졸여지는 냄비 안에 아낌없이 넣었다. 그렇게 하면 맛있어? 오이카와가 물었고 쿠니미는 응, 하고 대답했다.


   "너무 달면 먹기 불편하니까."

   "그 말은 앗쨩이 맛키를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 할 수 있나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레몬청을 딸기 과육과 잘 섞었다. 그는 과육이 부서지지 않게 신경 써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저번 사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끈질긴 말이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좌우명인, '치려면 꺾일 때 까지 때려라'를 떠올렸다. 그는 지나치게 끈질겼고, 쿠니미의 인내심은 의외로 얄팍했다.


   하지만 그 날, 쿠니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오이카와가 흥미로워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급하게 밖으로 나간 다음, 가로등 아래서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하나마키에게는 숫기가 없었고, 쿠니미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이야기를 진행 할 의지가 없었다. 쿠니미는 이 맥 빠지는 사건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질 고민했다. 그의 고민처럼 잼에서 보글보글, 작은 거품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소녀처럼 기대했고, 쿠니미는 그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는 기분을 양껏 느꼈다. 오이카와는 둘이 손 하나 잡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너희 합숙 때는 끌어안고 있었잖아!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일은 명백한 사고였어요.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기대감을 꺾어버리며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플라스틱 볼에 담았다.


   쿠니미는 그 때를 떠올렸다. 하나마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따듯한 체온이 번져왔고, 그의 옆모습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오이카와 씨는 둘이 키스라도 할 줄 알았어. 그는 마법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한숨 쉬었다. 쿠니미는 얼음 볼에 차가운 물을 담았다. 잼이 다 졸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닌걸요."

   "하지만 쿠니미야, 너 맛키 좋아하잖아."

   "글쎄요? 배구부 안에 도는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면 토오루도 알고 있다시피 그냥, 농담이잖아요."


   쿠니미는 별 일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뜨거운 냄비를 얼음물 위에서 식혔다. 쿠니미는 예쁘게 씻어놓은 유리병 세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네 거.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거야? 오이카와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킨타이치라도 주려고?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잼이 식어 병 안에 들어갈 때 까지 오이카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쿠니미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진지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보면서 쿠니미는 '제 편 만들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정략결혼 하기 싫어요? 쿠니미가 뜬금없는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오이카와는 절대 하기 싫다면서 식탁 위에 엎어졌다.


   결혼은 온혈동물이랑 하고 싶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야기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정략결혼 상대나, 지금 애인이나 둘 다 포유류라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는 냄비를 들어 수건 위에 놓았다. 물기를 잘 따르고 쿠니미는 딸기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숟가락으로 잼을 떠서 병 안에 넣었다. 허공만이 차 있던 유리병에 붉은 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쿠니미야."

   "네, 토오루."

   "그 '농담'에 기분 나쁜 적은 없었지?"


   오이카와는 제법 날카로운 곳을 찔러왔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대답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마키 씨는 제법 멋있는 선배잖아요. 쿠니미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골라 썼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쌜쭉 내밀었다. 하나마키 씨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쿠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쿠니미는 냄비를 물에 담갔다. 다음 잼을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냄비를 꺼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냄비였다. 우유와 생크림이 냄비 안에 가득 담겼다. 쿠니미는 그게 느리게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처럼, 혼합물의 온도는 천천히 오르기 마련이었다. 오이카와는 딸기잼이 들어있는 병 세 개를 바라보다가 하나마키가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완전히, 실수 한 것 같은데 어쩌지. 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주어도 실수의 대상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오이카와는 그게 쿠니미 아키라를 의미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잡은 손, 어둠의 장막이 내린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싶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느낌이었니?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말한다면 로마의 휴일 같은 느낌이었겠죠, 하고 대답했다.


   "지루한 느낌인가?"

   "토오루, '로마의 휴일' 본 적 없죠?"

   "그렇지."


    나 흑백영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니미는 끓기 시작한 우유와 생크림에 티백을 넣어 우려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았다. 언제 한 번 봐 봐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어째 짐작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짙은 장막 너머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마키 씨가 시켰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게 수상하다고 말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홍차가 우러나는 색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눈치도 빠르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 보았다. 그 날에 있던 이야기는 무덤 까지 가져갈 거에요, 쿠니미는 놀리는 듯 말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뱀처럼, 그는 모든 질문을 유연하게 피해갔다. 이런 '밀당'으로 사교회에 꾸준히 나갔으면 벌써 결혼 하고도 남았다면서 오이카와는 혀를 끌끌 찼다.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오이카와가 내뱉는 질문들 보다, 그에게 선물할 잼이 더 중요했다.


   쿠니미는 티백을 꺼내고, 새 티백을 넣어 우렸다. 그는 설탕을 부었다. 하얀 설탕이 갈색에 진하게 녹았다. 쿠니미는 숟가락으로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설설 저었다. 잼 만드는 거 재밌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녹아들어 고체로 굳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숟가락에 잼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그는 설탕을 더 넣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것도 맛키와의 사랑에 적용 할 수 있는 말인가요?"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녹아드는 설탕을 바라 볼 뿐이었다. 얼그레이 잼을 만들 때의 포인트는, 설탕과 홍차와, 우유와 생크림이 캬라멜 화 되지 않도록 천천히 저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칭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모두 무시했다. 약한 불에서 액체는 천천히,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그레이 잼을 담을 그릇을 고민했다. 전해줄지 말지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왕 줄 거라면 예쁜 그릇이 좋았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을 찾아 쿠니미는 찬장을 열었다. 병 위쪽에 레이스 모양을 한 종이를 둘러야 할지, 혹은 만든 날짜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를 붙일지, 쿠니미는 깊게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위한 포도 잼을 만들어 달라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쿠니미는 포도는 없다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까 맛키가 얼그레이 스프레드를 좋아한다던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예요?"


   쿠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만들어 주라는 뜻이잖아! 라며 되려 화를 냈다. 쿠니미는 그의 모든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급한 불은 잼을 태우기 마련이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제 앞에 붙은 불이나 끄라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잼이 느리고, 또 느리게 끌어 올랐다. 잼이 다 되면 오이카와는 식빵을 굽자고 말했고, 쿠니미는 이미 바게트를 사 놓았다고 잘라 말했다.


   흰 바게트 위에 올린 딸기잼은 최고야, 오이카와는 반드시 무염 버터에 구워달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금새 달아오른 손을 찬 물에 툭툭 털면서 그러겟다고 대답했다. 계속 불 앞에서 냄비를 저었던 지라, 손이 화끈거리게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하품을 했다. 왜, 만들었을까. 약간의 후회가 그의 잼 안에 풍덩, 빠져 유영했다.




***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하나마키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라커룸 안에 있던 세 개의 유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병에 붙어 있던 단정한 글씨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마키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어줍잖게 넘겨 짚었다가 실수하기 싫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다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기도 싫었다. 그는 잼 병을 쓰다듬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것은 쿠니미었다. 하나마키는 머릿속에 든 망상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쓸모 없는 일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얼굴을 쓸었다. 그 날 밤도 그런 실수를 했다. 이름 모를 정원수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에서, 그는 쿠니미를 흰 벤치에 앉혔다. 달은 동그랬고, 둘이 나눈 이야기들은 의미없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사소한 말 속에서, 하나마키는 바게트가 좋다는 말과, 그 위에 잼을 바르고 계란을 반숙 프라이해서 올리는 걸 사랑한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매우 소박한 식단을 보며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뿐이었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도 모자랄 타이밍에서 거나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 문제였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야 한다던 그 때의 강박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남자아이 앞에 처음 선 것처럼 행동하던 자신을,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뛰는 심장을 넥타이로 누르고, 잘 맞는 정장으로 옭아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나마키는 딸기 잼과 얼그레이 잼, 레몬청을 끌어안았다. 쿠니미야, 나 어떡하니.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부끄러운 말이 들려왔다. 사교회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그의 번민이 문가에 서 있었다. 쿠니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마키가 안고 있는 세 개의 잼병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가득 차 있는 잼과 청은 레이스 모양의 종이와, 제조일자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로 장식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그 것을 흥미롭게 보는 듯 했고, 하나마키는 죽어버리고 싶었다.


   여자한테 받았어요? 인기 많네요. 쿠니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는 변명하려는 자신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 쉬었다.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하는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누가 물어 봤대요? 쿠니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봄 날씨는 따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잡아줄 수도 없는 포근함이 번져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지 않았다. 쿠니미는 락커룸을 열었다. 하나마키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락커룸에 유리병 세 개를 넣었다. 한숨 밖에 쉴 수 없는 아침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얼굴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하나마키는 자신이 내린 답을 쿠니미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건 그의 전공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괜히 옷을 갈아입고 먼저 라커룸을 나섰다. 뒤에서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도 같았지만, 그는 눈부시게 부서지는 아침이 보여주는 환청이라 생각하며 얼른 코트로 나섰다.


   하나마키가 나간 자리에 오이카와가 인사하며 들어왔다. 쿠니미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제 만들었던 거 다 맛키 거였지? 오이카와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감추는 것도 재미 없을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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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내 주머니에 소금캬라멜이 들어 있는 경위에 대하여

  하나마키 선배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쿠니미가 좋습니다^0^ 맛키의 연애 레벨이 100이라면, 쿠니미의 레벨은 한 10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맘을 감추고 쿠니미에게 덥썩덥썩 다가가는 맛키가 좋습니다. 이 뒤의 하나쿠니는 아마 곧 사귀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q^!!!







***


   시작은 킨타이치가 가라오케에 가면 항상 부르던 노래였다.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이었다. 쿠니미는 문득 그 노래를 떠올렸다. 뜬금없는 일이었다. ‘부서질 만큼 사랑해도, 3분의 1도 전해지지 않아.’ 로 시작하는 느린 구간이 그의 혀 위에 사탕처럼 올라, 달달함처럼 굴려졌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르는 가사들이 눅눅하게 어물거렸다.


   화장실에 간다던 킨타이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쿠니미는 아무도 없는 락커룸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박하사탕을 씹어 먹었을 때, 이에 남는 잔여물처럼 한 번 떠오른 음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 노래가 좋았다. 킨타이치가 불러도 ‘나쁘지 않은’데다가, 가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품을 했다.


   6어서 집에 가서 자야 하는데 락커룸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요함은 상념을 불러오기 마련이었고, 쿠니미는 이 락커룸에서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생각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명백하게 졸음을 담고 있던 행동은, 그가 ‘그 일’들을 회상할 때 마다 ‘망설임’으로 모습을 바꿔갔다. 그는 뒷머리를 쓸었다.


   “「얼마만큼 너를 사랑해야 이 마음이 전해지는 걸까」.”


   쿠니미는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입 밖으로 냈다. 음이 없는 가사는 제법 시적으로 들리고, 하나의, 온전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바꾸었다.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제 락커 바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이름표가 들어 있었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쿠니미는 자신의 이에 찝찝하게 남은 선배를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마키가 건네줬던 레몬사탕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이지. 쿠니미는 그 관용 어구를 혀끝에서 굴려봤다. 인터넷에 따르면 어느 어린이 드라마의 유행어라고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먼 나라의.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 쿠니미는 그 말의 기원이 퍽 하나마키처럼 엉뚱하고, 그처럼 다정하며, 하나마키처럼 먼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 때도 지금처럼 고요했다.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조구치 코치는 쿠니미가 설렁설렁 뛴다고 말하며 나머지 훈련을 시켰고, 그 순간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하나마키에게 나머지 연습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카라스노에게 진날이었고, 코트 위의 카게야마가 웃고 있던 걸 본 날이었다. 마음이 뒤죽박죽했고 싱숭생숭하다는 것을 미조구치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입술울 쭉 내밀고 미간을 좁히고 있던 쿠니미에게 하나마키는 금세 다가왔다. 그는 긴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올렸다. 여자 친구예요? 쿠니미는 그렇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썸 타고 싶은 사람. 그는 쿠니미의 말을 정정하며 대답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마키는 제법 시원시원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두근거렸던 것도 같았다. 쿠니미는 핸드폰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인터넷검색창을 천천히 훑었다. ‘레몬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정보만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었다. 아무리 답을 찾아도 인터넷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쿠니미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림자처럼 다시 하나마키가 밀려왔다.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이었다.


   쿠니미와 같은 포지션의 선배는 토스를 전혀 올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잔뜩 스파이크를 치게 해 주고, 점프하게 하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다면서 하나마키는 네트 반대편에서 서브를 넣었다. 공이 하나 둘, 늘어 갈 때마다 쿠니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킨타이치는 이미 돌아간 후였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끊길 것 같았다.


    체력이 이래 약해서야 어쩌누. 하나마키는 공을 주우며 말했다. 쿠니미는 코트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하나마키는 바지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소리’모드로 해놓은 핸드폰의 버튼음이 요란했다. 궁금해?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 나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하나마키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쿠니미에게 뭔가를 던졌다.


   쿠니미는 뒤로 넘어지며 그가 던진 물건을 받아냈다. 사탕이었다. 노란 사탕.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이라는 말이 따라왔다. 입에 넣으니 싸한 민트와 함께 상큼한 맛이 번져왔다. 맛있지? 그가 눈웃음치며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저 사탕 별로 안 좋아해요, 라는 퉁명스러운 말에 하나마키는 나도, 라고 대답 해 왔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여자가 이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멋있게 주려고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건데. 하나마키는 발랄하게 사탕의 기원에 대해 말했고, 쿠니미는 그 말이 모두 듣기 싫었다. 그의 뚱한 얼굴에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생각 많은 표정이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하나마키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쿠니미의 얼굴에 짙게 내렸고, 하나마키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쁘네.”


   그리고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쿠니미는 몸을 떨었다. 그 때의 목소리가 번져 온 탓이었다. 그 말을 생각할 때면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사탕 한 개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레몬 사탕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 사탕. 쿠니미는 그것을 까 입에 넣었다. 그녀에게 줄 사탕을 하나마키는 꼭 쿠니미에게 건네곤 했다. 자신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쿠니미는 사탕을 혀 위에서 굴렸다. 그것은 키스와 닮은 행위였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눈 위에 그림자가 번져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키스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의 혀에서는 레몬 사탕 맛이 날 것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슈크림 같은 스위츠보다는 민트가 섞인 싸인 향이 ‘쿠니미 아키라와 하나마키 타카히로와의 키스’에 어울렸다.


    숨이 찬 느낌에 쿠니미는 눈을 서서히 떴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 그 백열등 빛이 쿠니미의 눈 속으로 깊게 쏟아져 내려왔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서 사탕 맛이 났다. 기분이 나빠졌다. 쿠니미는 그의 주머니에 여전히 레몬사탕이 들어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한다던 레몬사탕.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레몬사탕.


   쿠니미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레몬사탕이 없어지길 바랐다. 그 대신 그 주머니 안을 소금 캬라멜이 가득 채우는 상상을 했다. 더 이상 그가 스파이크를 위해 점프할 때, 껍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의 소원은 단순한 ‘바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차올랐다가, 금세 메말라갔다.


   사랑은 레몬사탕 맛으로 왔다. 쿠니미는 입 안에 든 둥그런 사탕을 세게 깨물었다. 이 사이에 사탕이 껴서, 그 자리에 상큼함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혀로 그 부분을 설설 문질렀다. 정말로 키스하는 느낌이 들어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고, 당황스러움에 멈추어 섰다. 그 곳엔, 하나마키가 있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백열등 빛이 들어 반짝였다. 나 보려고 남아있었어? 하나마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쿠니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서 있을 때면 요령을 부릴 수 없어졌다. 쿠니미는 제 그림자 위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런 쿠니미를 보면서 짧게 웃었다.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는 입술위에, 쿠니미는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그의 까칠까칠한 입술과 립밤을 잔뜩 바른 자신의 입술이 부벼지는 공상은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분홍색 이름표가 붙은 락커를 열었다. 쿠니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 이 시간대면 버스 끊기는 거 아냐?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킨타이치가 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부실 안은 하나마키가 락커룸 안의 물건을 정리하는 소리가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락커룸을 천천히 정리하다가,


   “걔 내가 보냈어.”


   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네? 하고 되물었다. 하나마키는 너랑 같이 돌아가는 게 질투 나서 보냈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정말요? 하고 묻는 쿠니미의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럼, 하고 대답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문득 뒤를 돌아 쿠니미에게 사탕을 던졌다.


   아직도 이에 남아있는 것과 같은 맛이었다. 생각이 많을 땐 레몬사탕, 이라고 말하면서 키득거리는 하나마키의 뒷모습을, 쿠니미는 진득하게 눈에 담아냈다. 왠지 네 앞에 있으면 장난을 치고 싶더라. 그는 능글맞게 말했다. 쿠니미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여자 친구랑은 잘 돼가요? 그가 다시 물었고, 하나마키는 썸 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의 마지막 부분은 “부서질 정도로 사랑해도, 3분의 1도 전해지지 않아. 순수한 감정은 헛돌기만 할뿐, 사랑하는 말조차 할 수 없는 내 마음.” 이란 가사로 자리한다. 쿠니미는 그 노래를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고, 쿠니미는 그의 농담에 멋대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짝사랑이란 깊은 수렁에서 쿠니미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생각이 많아?”

   “네.”

   “레몬사탕 하나 더 줄까?”


   하나마키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탄 가슴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내가 락교 보낸 게 그렇게 서러워 쿠니미야? 하나마키가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쿠니미는 아까 먹은 레몬 사탕이 이에 남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 숨기는 거 어색하구나?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완고한 표현에 하나마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제 후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운 입술에 짙게 바른 색 없는 립밤이 반짝였다. 하나마키는 그의 볼과 입술을 설설 쓸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같이 갈래?”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레몬 사탕 하나를 더 던졌다. 착한 아이에게는 레몬사탕이지, 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여자 친구에게나 잔뜩 주라는 말을 내뱉었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은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키득키득 웃었다. 쿠니미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정말, 울고 싶었다.


   같이 갈 거지? 하나마키가 다시 물었다. 네, 하고 쿠니미가 다시 대답하자 그는 주머니에서 캬라멜 하나를 까서 쿠니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너 이거 좋아한다며? 하고 묻는 목소리에 쿠니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는 여우의 심정을 백분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탕과 다른 진득한 맛이 혀 안에 감겨왔다.


   밤이 어두우니까 손잡아 줄게. 하나마키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쿠니미는 그의 빈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너 손 부드럽구나? 하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게 가깝게 들렸다. 쿠니미는 손과 손이 얽힌 자리가 녹아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였다.


   “누가 그러는데 단거에 소금을 치면 더 달콤한 느낌이 든데.”


   하나마키가 문득 말했다. 맥락 없이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서 소금 캬라멜을 만드는 건가요? 쿠니미의 어색한 말에 하나마키는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웃었다. 하나마키는 날이 춥다면서 그의 재킷 주머니에 쿠니미의 손을 끌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사탕 봉지가 손끝에 닿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로등 길게 늘어진 밤길을 걸으면서 쿠니미는 매우 불쾌했고, 하나마키는 실실 웃고 있었다.


   헤어지는 골목에서 하나마키는 먼저 멈추었다. 생각이 많은 표정을 하고 있네, 하면서 웃는 모습은 여전히 멋있었기에,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고, 쿠니미는 바짝 얼어 입술을 깨물었다. 고운 입술이 다 망가진다고 말하면서 하나마키는 그의 주머니 속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넣었다. 쿠니미는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정말이지 엉망인 하교였고, 생각만 많아지는 밤이었다.

   “내일 봐.”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왜 먼저 갔냐는 킨타이치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뒤를 돌았다.

   하나마키 타카히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쿠니] 어느 밤

  아침 과, 점심시간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간보는...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여시 같은 쿠니미와 은근히 눈치 있으면서도 둔한 하나마키 씨가 좋습니다...☆★









***

   “그래서 오늘 같이 갈 거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상 위에 놓여있는 두 장의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 너머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수면 위에 비가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축 젖은 연잎과 나무수국을 바라보다, 쿠니미는 나가기 싫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똑부러지는 의사표현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라, 오늘 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주면 안 돼? 오이카와가 물었다. 나 냉혈동물이라서 이런 날 밖에 못 나가요 토오루, 하고 쿠니미는 능숙하게 넘어갔다. 누가 뱀 아니랄까봐, 하면서 오이카와는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사촌 형의 부탁 정도는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혈연을 이용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귀찮은 남자였다.


   쿠니미는 다 식어가는 핫팩을 꼭 쥐었다. 하늘이 꾸물거리고 비가 몇 방울 떨어질 때 받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오늘은 꼭 가면 안 되냐면서 쿠니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설설 쓰다듬었다. 나 체온조절하기 힘들어서 밖으로 못 나가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자신도 악어라고 대답했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키라야,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도 안 가요.”

   “너 지금 내가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오이카와 씨는 모르는 게 없어.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쿠니미는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의 오이카와와 달리, 그는 사교회가 귀찮았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배구보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잘생긴 이마가 드러났고, 쿠니미는 엄지와 중지를 튕겨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왜 가기 싫어하는 건데? 오이카와가 물었다. 귀찮잖아요, 쿠니미는 다시 대답했다. 그는 예쁘게 차려입고 웃는 자리가 취향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 우리 엄마 같은 소리를 한다, 라는 그의 말에 쿠니미는 오이카와 또한 제 엄마 같은 소리를 말한다면서 받아쳤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자리를 불편해 하는 걸 잘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사교회에 나올 것을 권하곤 했다. 쿠니미는 그게 오이카와 나름의 친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류 사회에서 결혼과 연애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다분히 품은 도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쯤이면 선자리가 설설 들어올 테니, 그 전에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다는 것은 쿠니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답지 않게 연애결혼 하고 싶은 거야?”

   “답지 않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말 그대로라고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그는 그의 불퉁한 입술을 두어 번 더 잡아당기고는 조금만 있다 가겠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골라주겠다고 신이 나서 말하는 사촌형을 바라보다가, 쿠니미는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꽤나 추울 것 같았다. 그는 핫팩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핫팩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다 식은걸 뭐 하러 쥐고 있어? 중종 악어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고, 흰뱀 중종은 그의 표정을 따라하면서 손이 심심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핫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다 식은 핫팩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요.”

   “정말?”


   쿠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놀라 되물었다. 쿠니미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는 게 너무 귀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오이카와 씨의 친사촌동생이며 뱀목이라는 것을 대신 말해 달라 했다. 오이카와는 별로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 말하면서 웃었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일어났다. 정장을 골라주겠다는 말에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곤해? 그의 말에 쿠니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피곤함을 감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사촌동생의 모순 된 말과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한 옷방으로 발걸음 했다. 쿠니미는 의욕 없이 그의 발자국을 쫓아 갈 뿐이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하는 건 싫다. 쿠니미는 반짝거리는 조명을 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몇 사람이 그에게 말을 붙여왔고 그의 옆에 있던 오이카와는 그 대신 자기소개를 했다. 모임에 꾸준히 참석 해 왔는지, 오이카와는 사람무리 속의 중심처럼 이동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베란다 안에 기대어, 환한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많은 인파를 천천히 관찰했다. 다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이미 여며진 재킷을 쓸었다. 코트를 하나 더 입으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들었어야 했다. 쿠니미는 회장 한 가운데서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빛에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파티장 구석에서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명처럼 반짝이는 오이카와를 놓치기 싫다는 듯 굴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하품을 했다.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눈길을 끌만한 반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일 연습을 좀 더 성의 있게 설렁거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해야 했으나, 그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인기인은 괴롭다고 생각하며, 쿠니미는 제 목을 옥죄고 있는 보타이를 풀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는 파티장 안을 돌아보았다. 멀리, 튀는 머리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하나마키였다. 쿠니미는 그의 혼현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 넣었던 보타이를 꺼내 천천히 맸다. 일찍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회장에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뱀은 원래 눈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서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자 오이카와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쿠니미에게 몰렸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소개할게요, 라고 운을 띄우는 경쾌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이제부터 소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엮어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 뒤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마키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까이 하지 말자, 라는 말은 쿠니미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그는 식어버린 핫팩을 생각했다. 파티장 구석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우습기만 했다. 쿠니미는 가볍게 눈웃음 쳤다. 하나마키의 앞에 있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면서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를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쿠니미에게 대상이 누군지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웃기는 질투심이었고, 반항심의 발현이었다. 쿠니미는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귀찮은 일도 감수해야만 하는 때가 오는 법이었다. 쿠니미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온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촌동생인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


   어느 밤, 하나마키 타카히로의 기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에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섞인 명백한 불쾌함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키, 하고 부르니 하나마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년 동안 그를 겪어왔음에, 오이카와는 그의 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란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그의 눈길의 끄트머리에는 짙은 붉은색 보타이를 맨 쿠니미가 있었다. 신경 쓰여?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


   “애인이 신경 쓰여?”

   “맛키 씨는 솔로인데요?”


   하나마키는 즉각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니미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오이카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가 내 애인이에요?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배구부 안에선 아예 공인이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맛키는 쿠니미가 싫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었으면 저렇게 안 놔뒀다는 고지식한 말이 뒤따라왔다. 싫지는 않은가 보다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가득 즐기면서 키득거렸다. 쿠니미가 공중에 옅게 친 거미줄에, 하나마키가 덥석 걸린 꼴이었다.


   “예쁘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 잘 맞는, 투 버튼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이었다. 교보을 입었을 때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마키는 활발하게 웃고 있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나마키는 곤란하게 웃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 마다 철벽을 치면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저런 모습의 그 보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미미하게 멈춰있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마키가 모르는 중종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웃고 있었다. 백합처럼 우아하고, 프리지아처럼 수줍은 모습이었다. 그는 태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오는 게 아니었어, 하고 넋두리처럼 말하자 오이카와는 오지 않았어도 불안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분명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체크 할 거잖아?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하면 말이라도 걸러 가 보는 건?”

   “그럴까.”


    하나마키는 계속 쿠니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렇게 밝게 웃는 쿠니미에, 하나마키는 적응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살짝 몸을 틀었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손을 흔들자, 쿠니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쿠니미는 자신이 이야기 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서, 천천히 하나마키의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마키는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유연하게 걷는 고양잇과 동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혼현이 눈처럼 하얀 뱀이라는 것을 하나마키는 가끔 잊곤 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눈을 맞추고 눈웃음 쳤다.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지는 눈에, 하나마키는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애매한 소유욕이 천천히 번져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웃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그는 쿠니미의 손목을 잡았다. 선배? 하고 묻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쿠니미는 잠시 놀란 것처럼 얼어 있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그의 이름을 똑바로 말했다.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추울 것 같은데요.” 

   “괜찮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에, 하나마키는 그의 혼현이 여우였던가를 잠시 고민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둘에게 잘 다녀오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이카와 씨도 변온동물이라서 밖에 따라가고 싶진 않거든, 이와랑 놀러 갈 거야. 그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이끌었다. 오이카와가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품안에 가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향수 뿌렸어? 그의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좋은 향이 난다는 칭찬에는 선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마키는 자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하나마키는 그를 천천히 에스코트했다. 쿠니미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 구두라도 신은 것 마냥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신은 구두 굽에서 꽤나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나마키는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타카히로 씨는 핫팩 같네요. 쿠니미가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만 그래. 하나마키는 그 말을 애써 씹어, 삼켰다. 말이 들어간 위가 더부룩했다. 하나마키의 표정을 보던 쿠니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웃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후배의 당돌한 선언에, 하나마키는 애써 웃어 보였다. 쿠니미는 느릿하게 웃었다. 비온 후의 꽃이파리처럼 예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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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홍차, 우유와 설탕을 가득 넣어서

   킹스맨 AU입니다. 이 글과 시간대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킹스맨의 추천인 제도는 키잡을 위한 최고의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가 반바지에 니삭스 신을 때 부터 길러온 하나마키가 보고 싶네요 ^0^!!! 






***

   쿠니미는, 그를 봤을 때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후보는 단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추천인이 랜슬롯이라고 확신했다. 그 카게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할 상대는 그의 추천인 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오래 된 이불을 털었을 때,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개의 목줄을 꽉 쥐었다. 이미 지워진 이름을 가진 도베르만은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와 달리 충직한 견공은 쿠니미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그가 신은 밑창이 두꺼운 구두가 소리를 냈다. 쿠니미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 나른한 햇살에, 그의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의 세상의 축은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미 결심한 이상 망설이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서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니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의 상냥한 모습에 쿠니미는 짧게 목례했다. 그는 그와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선 욕망을 그는 혀 아래에 숨겼다. 먹기 싫은 알약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썼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쿠니미의 목소리에 랜슬롯은 문에서 비켜주었다.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갤러해드의 집무실에서는 언제나 단 향이 났다. 어린애 같은 입맛 탓이었다. 쿠니미는 개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 지워진 이름의 개는 러그에 편하게 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갤러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햇빛이 들어 반짝였다.


   안녕,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쿠니미가 물었다. 나는 네 추천인이 아니란다. 갤러해드는 따듯한 물을 주전자에 담으며 말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웨지우드의 파란색이 쿠니미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언젠가의 밤하늘 같은 색이었다.


   합격 축하라면 가웨인에게서 듣도록 해. 갤러해드는 쿠니미의 추천인 이름을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단호한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에 건 아침나절 하늘을 담은 넥타이에 든 수국모양의 스치치가 반짝였다. 가웨인이 이런 말은 안 해주던? 갤러해드는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하얀 모래알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쿠니미가 대답하자 갤러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쿠니미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말꼬리를 돌리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갤러해드는 잔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찻잎은 내 멋대로 고를 거라는 목소리에 그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밤하늘 여러 겹을 겹쳐놓은 듯 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갤러해드는 그저 하얀 모래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련한 남자 앞에서 쿠니미는 경험 없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다. 갤러해드는 웨지우드 티팟을 손에 들었다. 그는 거름망을 잔에 얹었다.


   쿠니미의 마음에 들어 있는 찻잎은 ‘어수선함’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질투’를 블랜딩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물을 붓지 않아도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그는 갤러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에 그의 도베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앉아, 하고 쿠니미가 개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게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갤러해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찻잔 두 개를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그는 흔들림 없이 찻잔 두 개를 탁자로 옮겨두었고, 찬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버터과자와 스콘을 꺼내두었다. 쿠니미는 제 앞으로 놓인 찻잔에 설탕을 두 개 넣었다. 갤러해드 또한 그리하였다. 단 건 좋아, 라고 속편하게 말하는 그에게,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림으로 화답했다.


   “언제 산 거예요?”

   “오늘 아침.”

   “왜.”

   “네가 올 줄 알았거든.”


   갤러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반짝임이 스며 있었다. 쿠니미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그가 어른 같아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갤러해드 앞에서는 어린애의 유치한 놀잇거리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문득 외로워졌다.


   나는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것이 쿠니미가 쌓아올린 모든 행적에 대한 그의 최종 평가였다. 쿠니미는 찻잔에 손을 댔다. 도자기 너머로 희석된 따듯함이 전해져 왔다. 찻잔의 다른 이름은 분명 ‘갤러해드’의 이명일 것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불완전한 킹스맨은 고개를 숙였다.


   “왜 날 추천하지 않았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 어른 같은 척 하는 얼굴을 싫어했다. 그는 코끝이 찡해온다고 생각했다. 따듯함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갤러해드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도베르만과 제법 닮은 눈길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임을 확인받는 게 싫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날 추천해주길 바랐어요.”

   “그래?”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스콘을 뜯어 쿠니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쿠니미는 입을 벌려 빵조각을 받아먹었다. 그는 그의 손끝을 핥았다. 대담하네, 갤러해드는 그이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 웃었다. 쿠니미가 언제나 따라가고 싶어 했던 미소였다. 그는 개에게 손짓했다. 도베르만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섰다. 앉아, 하고 그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바랐어요.”


   그는 절박하게 말했다. 갤러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웨인이, 오이카와 씨가 나를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걱정했나요? 아니면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쿠니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큰 알약을 물 없이 입안에서 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내 프로방스 별장에 가서 청소나 하고 수틀에 수나 놓아.”

   “갤러해드.”

   “안전하게 지내. 총, 칼, 독, 킹스맨. 어느 것도 너한테 안 어울려. 쿠니미 너 귀찮은 거 싫어하잖아. 효율적이고 안전하고, 내 새장에 든 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쿠니미는 황량하게 빈 프로방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사용인 몇 외에는 오지 않는 그 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처럼 부유하던 빈 날을 떠올렸다. 갤러해드가 ‘원래 이름’을 가지고 오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쌍무지개가 뜨는 것만큼 가끔씩 찾아왔고, 그 마저도 하루를 머물지 않고 떠났다.


    쿠니미는 그 빈 침실을 기억한다.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는 프로방스의 따듯한 햇살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쿠니미는 잔을 놓았다. 그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부터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잔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들이 찬 자신은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태양처럼 멀었다. 쿠니미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나는,”

   “미안한데, 난 어린애 투정 듣기 싫어.”


   비수가 꽂히는 기분에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생명줄마냥 잡고 있는 찻잔의 수면이 흔들렸다. 차라리 독약이라, 마시고 죽었으면 싶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그의 세계는 첫사랑 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고독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쿠니미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마음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마음이 우러나고 있었다. 넓게 퍼지는 그 향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는 듯, 갤러해드는 그저 스콘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뻑뻑한 빵이 그의 목을 막으려 할 때 마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쿠니미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잔인한 사람, 그가 말하자 갤러해드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웃었다.


   “넌 곧장 내 방문을 나서야 해. 그리고 쭉 직진해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서, 네 추천인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렴, 오이카와 씨 저를 추천해주신 건 감사할 일이나 저는 이제부터 프로방스의, 미스터 갤러해드 씨 소유의 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석인 퍼시빌 자리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채울 것입니다. 갤러해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쿠니미는 그의 독단적인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함께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작은 꿈마저 갤러해드는 담뱃불을 구두로 밟아 끄듯, 소화하고 있었다.


   “하나마키 씨.”

   “이게 내 사랑이야.”


   쿠니미는 갤러해드가 프로방스의 침실에 놓고 온 이름을 말했다. 그의 본명을 기억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쿠니미는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노력의 반절도 알지 못했다. 빈 침대 시트에 누워 지새웠던 밤을, 그 밤이 여러 겹 겹쳐져 만든 검은 색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은 한없이 이기적이였다.


    그는 멋대로 쿠니미가 사랑하게 만들고, 따라온 모든 다리를 끊고자 했다. 쿠니미 아키라의 모든 세계는 하나마키 타카히로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슬펐고, 그게 아쉬웠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도, 킹스맨이 될 거예요, 하나마키는 그 말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말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나마키가 기억하는 것 보다 5cm는 더 자란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쉼표와 같은 한숨이 자리했다. 당신과 같은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를 신고, 프로방스의 날씨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 런던 거리를 걸어다닐 거예요, 그는 확정된 것 같은 미래를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것을 불확실한 망상으로 만들었다.


   계속 반복되는 문답에, 쿠니미는 울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베르만에게 손을 뻗었다. 갤러해드가 지워버린 이름을 가진 개였다. 그는 그의 귀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는 귀 뒤와 목을 솜씨 좋게 쓰다듬었다. 날 불안하게 하지 말아줘요, 쿠니미는 애원하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은 주어진 온기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이 어미 새라도 되는 양 따라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자라온 그의 사랑은 이미 맹목적인 움직임이었다. 난, 불안해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쿠니미가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 안에는 혼자 있던 밤이 고여 있었다. 쿠니미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하나마키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가 짧게 떨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눈 아래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이 닿은 자리, 반대편에 눈물길이 생겼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나마키는 마법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변명이라면 듣기 싫어요.”


   쿠니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눈가에 담긴 눈물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에 대한 동정은 받지 않겠다는 그 당돌함에, 하나마키는 침을 삼켰다. 지금 그에게 서툰 감언이설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에게 손을 뻗은 것은 하나마키의 자의였다. 그 손길에 의해 세계가 돌아갔고, 재구축 된 이상 책임져야 마땅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을 말해 줄 타이밍이었다. 


   “난, 널 이명으로 부르기 싫어.”

   “네?”

   “퍼시빌이니, 가웨인이니, 랜슬롯이니 하는 역할놀이에 네 이름을 가리기 싫다는 뜻이야.”


   쓴 물이 우러난 쿠니미의 세계에, 하나마키는 설탕을 한 스푼 더했다. 그는 멈춰버린 모래시계를 반대로 뒤집었다. 설탕 같은 하얀 모래알이 다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침이 째깍거리며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간은 허비한 뒤에야 아까워지는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반쯤 식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혀가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나마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날 갤러해드라고 부르는 게 싫어. 나는 너에게 영원한 ‘아저씨’고, ‘하나마키 씨’야. 그의 서툰 고백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해드란 이름 속에 담긴 그 이름을, 나만 기억하면 되잖아요? 그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햇번처럼 사랑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려진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하면서 제 머리를 쓸었다. 목이 답답해 옴에, 그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예법에 어긋나고 매너 없는 행동이지만 용서 해 다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매너보다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말해 주세요. 쿠니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하나마에게 곧장 닿았다.


    “셋째, 난 널 전장에 내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네가 들 날붙이는 수를 놓을 바늘이면 충분 해.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제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초조해질 때만 피우시죠, 쿠니미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연극이 아니라서 그래. 갤러해드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미는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 사포와, 성냥을 꺼냈다. 그는 불을 피워, 손으로 주변을 감쌌다.


   그의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하나마키는 한동안 담배를 피웠고, 쿠니미는 달지 않은 스콘을 먹었다. 그는 라즈베리가 든 스콘을 좋아했고, 버터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유, 더 말해주세요. 쿠니미가 말했다. 그와 웨지우드는 퍽 어울리는 그림이었기에 하나마키는 혀를 차냈다.


   집 안에서만 가두고 싶어서 그렇다, 는 이유에 쿠니미는 기각, 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하나마키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쿠니미는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마키의 기억 속 어린아이는 이렇게 집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많이 컸다고 대답했다. 그 엉뚱한 문답에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네 이름을 좋아한다.”

   “그래서요.”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 아키라.”


   아키라, 하고 하나마키는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그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닿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마지막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나마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재들이 불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내가 혼자 지새웠던 밤을 알고 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없이 그의 셔츠 아래의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우리 쿠니미는, 스물네 시간 동안 예법과 예의, 매너를 중시하는 가웨인에게 가게 될 텐데. 하나마키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었다. 그는쿠니미의 흰 셔츠에 자신과 비슷한 색의 타이를 매어, 매듭을 지었다. 그는 그 매듭과, 그의 목울대에 입을 맞추었다.


   숨이 닿아 간질거리는 목에, 쿠니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색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떨어지면 프로방스로 가서 자수나 배워.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의 흰 손가락은 넥타이 매듭이 영원을 약속한 징표라도 된다는 듯, 서툴고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만약 붙으면, 내 정장은 하나마키 씨가 맞춰주세요.”


   한참의 침묵 끝에,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꺼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의 변주였기에, 하나마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웨인이 화낼 거야, 갤러해드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앞에서는 갤러해드가 아니라 하나마키 씨. 그의 긴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다.


    하나마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킹스맨 안에서 심리전의 대가라고 불리고 있던 그는, 한참 어린 후보생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갤러해드는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의 눈 안에 있던 짙은 밤하늘은, 어느새 새벽을 가득 겹쳐 놓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홍차 더 마실래? 하나마키가 물었고, 쿠니미는 우유와 설탕을 넣어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햇살이 느리게 움직여, 시계초침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하나쿠니] 잠자는 자취방의 공주님

 쌍방 짝사랑을 하는 고등학생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는 잠이 많은 이미지? 느낌? 이 좋습니다ㅠㅠㅠ쿠니미의 요즘 고민이 너무 귀여워서 살기가 힘들어요..

 동인설정이지만 맛키랑 맛층은 제 안에서 배구유학을 세죠로 온 이미지가 있습니다...(당당)







***


   하나마키는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데워 온 도시락에서 작게 김이 났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방이 차가운 탓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점심시간, 약 60분 정도가 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난방을 돌리는 건 가난한 자취생에겐 사치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은 적자였다. 그는 얄팍한 지갑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항상 먹는 불고기정식이 아니라, 계란정식 도시락이었다. 그는 반찬이 한 가지 정도 줄었음에 안타까워마혀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배구부 후배의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선배, 자취하시죠?’라고 묻던 그의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줍고, 당돌한 말투였다.


   그는 그 날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도시락을 놓고 온 날이었다. 그는 학교와 5분 거리의 원룸에 자취하고 있었다. 주방. 그리고 거실 겸용 침실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쿠니미는 그 날 하품을 했다. 내리기 시작한 벚꽃잎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머리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몇 개의 꽃잎은 마치 여자아이의 귀걸이 같기도 했다.


   쿠니미는 항상 달고 다니던 친구를 놓고 왔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름은 기억했지만, 락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미들 블로커’였고, 쿠니미는 ‘윙 스파이커’였다. 같은 포지션의 레귤러 후배에게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 있어? 하나마키는 곧잘 넘어가는 벽 앞에서 쿠니미의 말을 들었다. 쿠니미는 좌우를 돌려보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하나마키는 그 울림이 퍽 재미있었다. 쿠니미는 제법 간절해 보였다. 그의 눈은 많이 졸려 보였고, 그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 ‘락교’와 떨어졌을 때 의외로 커 보이는 키라던지, 단정한 머리카락이라던지는 하나마키의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취향은 없다-는 하나마키의 지론을 쿠니미 아키라는 2년 후배는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 블로킹, 쭉 뻗은 팔에 네트가 걸린 기분이었다. 강한 힘으로 쳐낸 그물망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하나마키의 마음은 봄철 숫처녀만큼 설레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란말이를 잘랐다. 가까운 곳에서 쿠니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 혹은 도시락의 포장을 제거하는 것 따위의 생활소음이 가득한 하나마키의 공간에서, 그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게 신기했다. 온전한 타인의 공간에서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운동부의 2년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거리감이 전혀 없다는 듯 행동했다. 제 멋대로 하는 꼴이 꼭 고양이 같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짧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뻗어오는 모양새는, 그가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들어온 그 첫날, 같이 담을 넘으면서 쿠니미는 수업시간에 깨어 있는 게 힘들어서 잘 곳을 찾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의 그 나른해 보이는 입술에서 하품이 나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하품을 받아 제 입에서 굴렸다. 봄의 나른한 햇살이 둘의 머리카락을 데우고 있었다.


   나 자취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하고 하나마키가 묻자, 쿠니미는 오이카와에게 들었다고 대답했다. 키타이치 시절 선배? 라고 물으니 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던 꽃잎이 바람에 실려 공중에 나풀거렸다. 하나마키는 그것을 잡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진 않았다. 입 속에, 비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숨겼다. 졸지에 그의 혀는 씨앗을 숨기게 되었다.


   하나마키의 침대는 싱글이었다. 집이 좁은 탓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침대가 좁다고 불평하면서도, 얌전히 그 안에 들어가서 몸을 뉘었다. 선배 향이 나요, 하는 무심한 목소리에 하나마키의 위에서는 벚꽃이 자랐다. 바람에 삼킨 말이 자란 탓이었다. 하나마키가 별 말을 하지 않자, 그는 곧장 돌아누웠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교복 니트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그의 다른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었다.


   잠옷을 가져다 놓을까 봐요, 쿠니미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고

   내 꺼 입을래? 하고 하나마키가 대답했다. 쿠니미는 핑크가 좋다고 대답했다. 핑크, 그리고 핑크였다. 하나마키는 그의 말에서 저의 머리카락을 생각하다가, 그래, 하고 말했다. 그 뒤에는 곧바로 숨소리가 이어졌다. 쿠니미는 빨리 잠드는 타입이었다. 예민하게 생긴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진 않았다. 하나마키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쿠니미는 등을 돌리고 자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천장을 보기 시작한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 잠버릇을 귀여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놀릴 시간이 마땅찮았다. 막 깨어났을 때 쿠니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을 함부로 걸 수 없었다. 막 잠들려고 할 때의 그에게 묻기에는 자는 애를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배구부에서 흘리듯 놀릴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에 자러 온다는 것을 킨타이치가 알게 된다면, 분명 실례가 되느니 하면서 방해 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계란말이를 씹었다. 은근한 단맛이 혀끝에 들었다. 지금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소음은 쿠니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많이 줄어든 거리감에 눈을 깜빡였다. 아마도, 일방적인 마음이겠거니 싶어 그는 귓불을 매만졌다. 고민은 개화하는 꽃송이처럼 제 부피를 늘려갔다.


   하나마키는 의욕 없이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어째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 안에서 단맛이 빠지지 않은 터였다. 그는 자리를 옮겼다. 쿠니미의 옆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하나마키의 손끝에 닿았다.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쿠니미는 정말로 고왔다.


   피부가 하앴고, 머리카락은 가지런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결이 좋았다. 윤기가 흐르면서도 찰랑거렸다. 특별히 린스나 헤어컨디셔너를 가지고 와서 씻는 것도 아닌데 좋은 향이 났다. 눈매는 졸려 보이는 모양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 졸린 눈과 다물린 입을 볼 때면 하나마키는 중국의 포사를 떠올렸다. 웃지 않은 후궁을 위해서 거짓 봉화를 올리다 죽은 왕을 절절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고, 매일 같이 집에 오는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었다. 담을 넘고 나서, 집으로 걸어올 때의 그 5분, 쿠니미는 벚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화사한 프리지아처럼 걸었다. 그는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매우 기뻐 보였다. 연왕이 포사의 미소를 위해 봉화를 올리고 군수와 제후들을 놀라게 했듯, 하나마키는 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며 그의 입가에 편안함을 얹는 것이었다.



   쿠니미가 뒤척였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귓불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귀가 드러났다. 하얀 귀에서부터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고왔다. 하나마키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위속에 들어간 벚꽃 탓이었다. 그 날, 쿠니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그 꽃자락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나마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란 이름을 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의 눈감은 모습은 제법 어린아이 같은 태가 났다. 어른스러운 척 하려는 그 모습이 벗겨진 채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몇 백 년을 잤어도, 왕자에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하나마키는 익숙한 동화를 생각하다가 자리에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쿠니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에게서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났다. 그는 킁킁 향을 맡다가, 그의 말간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서툴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쿠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제 입술을 쓰다듬었다.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마법이 풀리지 않은 공주를 보며 하나마키는 그의 입술에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째깍이는 시계가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험했다. 하나마키는 바닥에 풀썩 앉아서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여전히 숨만 색색 내뱉고 있었지만, 하나마키는 오늘 아침 받은 진로조사서의 장래희망 칸에 ‘왕자님’ 이라고 적을까, 하는 공상을 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했을 때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먹은 벚꽃잎이 그의 위 속에서 여실히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음박 쳤다. 차가운 물을 틀었고, 그 물이 그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가려주고 있었다. 공주님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였지만, 왕자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며 급하게 세수를 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은 탓이었다. 하나마키는 화장실 벽에 기대었다. 다리가 풀려왔다. 그는 봄 때문에 미쳐간다고 애꿎은 계절에 화를 내뱉었다. 얇은 화장실 벽이 웅웅 울렸다. 하나마키는 이 점심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이 걸리고 가시덤불이 생겨, 멍청한 초침이 더 이상 달리는 상상을 하다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없는 핸드폰 알람은 지나가는 시간을 나타냈다. 5교시가 시작되기 10분이 남았다는 ‘모닝콜’이었다. 왕자가 아닌 선배가 로맨틱하다기보다는 기계적으로, 후배를 깨울 시간이 왔다. 하나마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다. 그는 쿠니미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학교 가야지, 일어 나.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나 조금만 더 잘래, 하고 웅얼거렸다. 아직 ‘후배 쿠니미 아키라’가 되기 전의 잠자는 자취방의 공주님을, 하나마키는 눈 속에 가득 담았다. 그는 진로조사서에 장래희망을 ‘왕자님’이라고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쿠니미를 세게 흔들었다. 방 밖에 벚꽃이 피어있었다. 쿠니미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 깊은 잠을 잔 탓이었다.




[하나쿠니] 점심시간,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아침' 이라는 글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쿠니가 얼른 연애했음 좋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약일까요.... (오열)










***


   삼학년 층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항상 원 플러스 원 세트상품처럼 묶여 다니던 배구부 일학년 레귤러 중 하나인 킨타이치였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킨타이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고, 킨타이치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더니 쿠니미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왜?”

   “어디서 자고 있을 것 같아서요.”


   킨타이치는 체온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그는 합숙 다음 날 꽤나 늦게 일어났었다. 하나마키는 다 알고 있다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뱀은 이래저래 불편하네, 하나마키가 흘리듯 말하자 킨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는 아이스팩을 잊지 않고 챙겨줘야 하고, 겨울에는 핫팩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하자, 하나마키는 그런 몸으로 배구를 할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그는, 어쨌든 하고 있긴 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킨타이치의 어깨가 으쓱이는 걸 보면서 하나마키는 자신도 찾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역시 쿠니미 ‘애인’ 답네요, 킨타이치가 요즘 배구부 안에서 도는 농담소재를 섞어 말했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브이를 그려 보이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겨울과 가을 사이에 있는 바람이 제법 쌀쌀맞은 날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느긋하게 들어 낮잠을 자기 좋은 날이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킨타이치가 삼학년 층에 올라오면서까지 쿠니미를 급하게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느긋하게 걸었다. 종이 어떻게 되었든 결국 하나마키는 ‘큰 고양잇과’ 동물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넓은 교정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결국 ‘강아지’인 (물론 킨타이치는 중종 늑대개였다.) 킨타이치가 쉽게 찾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하품을 하며 교사 뒤편에 있는 ‘신데렐라 계단’으로 다가갔다. 마법이 풀리기 전, 그녀가유리구두를 벗어가며 내려오던 그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공터가 나왔다. 높은 나무가 별로 없는 그 반원의 작은 정원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하나마키는 사교회에서 만난 ‘동문’에게 들어 알고 있던 곳이었다. 그는 쿠니미가 그 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비밀의 정원’의 분위기와 쿠니미는 퍽 닮아 있었다.


   그는 신데렐라 계단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너 온 곳에는 익숙한 공주님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182cm라는 키가 무색하게, 그는 얌전히 의자에 수납되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는 것은 고양잇과 동물에게는 하품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는 풀 밟는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벤치 뒤편에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여름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그만큼 햇볕이 강하게 든다는 소리였다. 하나마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쿠니미의 옆에 앉았다. 그의 고개는 앞, 뒤로 까딱거렸다. 차라리 벤치를 전부 사용해서 누웠으면 편했을 것을, 그는 일부러 불편하게 자고 있는 듯 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 쯤 깨기 위해서일까, 하나마키는 하품을 하며 쿠니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고왔다.


   하나마키는 언젠가의 하교길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요즘 수업 시간에 깨 있는 게 힘들어요, 하는 목소리는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체력이 남들보다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다가 체온까지 불규칙하니 운동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체질이 아니었다. 귀한 집에서 귀한 손으로 자라서 온실에서 길러져야 할 도련님 같았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햇살 향이 났다.


   그는 쿠니미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틈만이 그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로 옮겼다. 진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그는 꽤나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래서는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 또한 놓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엮었다. 팔짱을 낀 다음, 그의 손을 잡았다. 혼자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뱀은 두 손으로 잡아도, 능청스럽게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 흰 뱀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먼저 깨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그는 쿠니미의 손을 꽉 잡았다.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잠이 그렇게도 좋은지 쿠니미는 반응 하나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숨소리를 간간히 들으면서 목 안으로 웃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아, 그는 입 속에서 내내 머물던 말을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은 햇살 향을 가득 머금고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목에 이를 박고 사냥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뭔가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고, 소유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이 들쭉날쭉한 마음을 참아보기로 결심했다. 뱀은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하나마키는 하품을 했다. 점점 햇살이 그에게도 녹아오는 것 같았다. 고양잇과 동물과 변온동물의 유일한 공통점은, 따듯한 햇살 아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둘의 목적은 제법 다르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타나는 행동은 같았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은 느낌이었던지라,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합숙에서 끌어안았을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예민한 코끝을 간질였다.


   찾으면 바로 알려달라던 킨타이치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평소의 쿠니미라면 절대 30cm 이하의 거리감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 변덕 심한 동물이 얌전한 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대부분이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하나마키는 흑표범이었다. 그는 목 끝으로 다시 웃었다. 햇살은 진하게 내리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애매한 추위에도 볕은 따듯했다. 어깨에 기댄 쿠니미가 새삼스럽게 예뻐, 하나마키는 눈을 감기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든 그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주잡은 손을 괜히 바라보았다. 깨기 전 까지는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잠에서 깨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말할까. 나 손 안 잡고 잤는데 네가 자면서 잡더라, 너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네가 안 놔줘서 수업에 늦었잖아, 따위의 말을 생각하면서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햇살처럼 졸음이 느릿하게 몰려왔다. 잡은 손으로부터 온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이 마음을 자신의 후배가 얼른 알아줬으면 했다. 실실,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목 끝에서 고롱고롱 퍼져나왔다.






***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에 쿠니미는 눈을 떴다. 잠시 점심시간에 눈을 붙이려던 게,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것 같았다. 목이 뻐근해서 그는 목을 양 옆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누가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옆을 돌았다. 익숙한 선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합숙 첫날밤이 자연스럽게 번져와 쿠니미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들었다. 지금 하늘에 걸쳐져 있는 것과 퍽 닮은 것이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주황이 들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쿠니미의 것보다 뻣뻣한 머리카락이었지만 만지고 있는 느낌은 좋았다. 그는 언제나 소리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고양이의 특징이라 하지만, 쿠니미는 그가 이렇게 다가 올 때 마다 불안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치는 모든 방어기제를 차근차근 녹여가고 있었다.


   합숙 때도 그랬다. 엉겨오는 180 넘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는 성실하게 꼬리까지 엮어 오며 그를 안심시키고 체온을 나눠 주었다. 사람에게 나눠 받는 체온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고, 날이 쌀쌀해질 때면 그가 생각났다. 쿠니미는 이 사실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선배에게 의지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체온 조절 같은 사적인 문제 까지 도움 받고 싶진 않았다.


   뱀은 불편하다. 변온동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체온을 조절하려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했다. 쿠니미는 차라리 여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사람보다는 아이스팩에 의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가을과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그리웠다. 핫팩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사무치곤 했다. 쿠니미는 괜히 그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개성있게 잘 생긴 얼굴이 무너지는 게 제법 웃겨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계속 이러고 있었다면 어깨는 안 아팠을까, 쿠니미는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윙스파이커 선배의 안위를 걱정했다. 자주 쓰는 손인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는 게 아쉬웠다.


   쿠니미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예쁘다고 어깨를 빌려주고 체온을 나눠주는지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하나마키는 간간히 쿠니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후배와 선배 사이의 ‘좋아함’이라는 단어로 이런 헌신을 설명 할 수 있는 걸까,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에게만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자고 있는 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목에서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긁었다. 중종이라고 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라,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제법 귀여운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일어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마키를 설설 밀었다. 그는 잠귀가 의외로 밝은 지, 얼른 눈을 떴다.


    “잘 잤어 허니?”


    하나마키가 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쿠니미는 잡은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가리켰다.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쿠니미를 깨우러 왔는데 말야, 날 너무 좋아했는지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거 있지-로 시작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쿠니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나마키 또한 그의 손마디에 힘을 주었다. 연인들 끼리 하는 손장난과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놓아 준 하나마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배구부 연습에도 늦었다는 말을 꺼냈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쿠니미의 팔을 하나마키가 잡아 당겼다. 그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으슬으슬해 지는 기온에 그는 짧게 떨었다.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추워? 하고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강한 팔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의 체온은 적당히 따듯했다. 겨울에는 내가 필요할 것 같지? 그는 능청스럽게 물어왔다. 손난로보다는 좋은 것 같네요, 쿠니미가 건성으로 대답 한 말에 하나마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쿠니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 지고 있었다. 너 아까 나 잘 때 목 쓰다듬었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어깨 안 아파요? 쿠니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반대편 손을 어깨에 얹고 몇 번 돌리더니 유연해서 괜찮다는 말을 꺼내왔다.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마요, 쿠니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왜?”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하나마키는 또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떤 의미의 좋아함인지 물어보려다가, 쿠니미는 말을 말았다. 그의 말이 멈춘 걸 알았는지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하나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교복 재킷을 벗어 쿠니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하나마키의 향이 강하게 났다. 꽃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고, 따듯한 햇살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나마키는 그에게 팔짱을 꼈다. 선배? 하고 행동의 경위를 묻자 하나마키는 그저 ‘춥잖아’ 하고 대답 할 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금은 의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르는 척 하나마키의 손을 잡았다. 하나마키가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 느끼면서 쿠니미는 애매하게 웃었다. 참으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마키의 손은 가을과 겨울의 과도기마저 잊을 정도로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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