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쿠니] 밤, 그리고 아침

    언제나처럼 섹피AU입니다. 벌써 네번 째 글이네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매번 적는 것도 번잡스러워, 카테고리를 구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섹피 AU는 :3 카테고리에 올라옵니다^//^!!!! 뭔가 일을 크게 벌리는 것도 같지만 상관 없지 않을까요!

   오이카와랑 쿠니미는 합이 좋다고 생각해요. 오이카와의 딸 같은 쿠니미가 좋습니다. 섹피AU에서 둘은 냉혈동물 사촌지간입니다. 예전부터 앗쨩과 토오루라고 불러온 탓에 호칭을 교정하느라 나름 애 먹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

   "그래서 그 날 맛키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쿠니미의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끓는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닿았다. 잼을 만드는 것은 쿠니미의 오랜 취미였지만, 오이카와는 그가 부엌에 있는 광경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귀한 집 도련님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란 나이는 부엌에 있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부엌방문을 명백히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는, 부엌에서 쿠니미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잼을 졸인다'는 쿠니미의 취미는 불을 사용하는 놀이였다. 그의 여린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맨 검은색 앞치마 리본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코끝 까지 밀려오는 단 향기에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쿠니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바닥이 보이는 레몬청을 꺼냈다. 다시 만들어 병을 채워야 했다. 이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레몬청 국물과 레몬 몇 가닥을 딸기가 졸여지는 냄비 안에 아낌없이 넣었다. 그렇게 하면 맛있어? 오이카와가 물었고 쿠니미는 응, 하고 대답했다.


   "너무 달면 먹기 불편하니까."

   "그 말은 앗쨩이 맛키를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 할 수 있나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레몬청을 딸기 과육과 잘 섞었다. 그는 과육이 부서지지 않게 신경 써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저번 사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끈질긴 말이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좌우명인, '치려면 꺾일 때 까지 때려라'를 떠올렸다. 그는 지나치게 끈질겼고, 쿠니미의 인내심은 의외로 얄팍했다.


   하지만 그 날, 쿠니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오이카와가 흥미로워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급하게 밖으로 나간 다음, 가로등 아래서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하나마키에게는 숫기가 없었고, 쿠니미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이야기를 진행 할 의지가 없었다. 쿠니미는 이 맥 빠지는 사건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질 고민했다. 그의 고민처럼 잼에서 보글보글, 작은 거품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소녀처럼 기대했고, 쿠니미는 그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는 기분을 양껏 느꼈다. 오이카와는 둘이 손 하나 잡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너희 합숙 때는 끌어안고 있었잖아!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일은 명백한 사고였어요.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기대감을 꺾어버리며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플라스틱 볼에 담았다.


   쿠니미는 그 때를 떠올렸다. 하나마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따듯한 체온이 번져왔고, 그의 옆모습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오이카와 씨는 둘이 키스라도 할 줄 알았어. 그는 마법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한숨 쉬었다. 쿠니미는 얼음 볼에 차가운 물을 담았다. 잼이 다 졸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닌걸요."

   "하지만 쿠니미야, 너 맛키 좋아하잖아."

   "글쎄요? 배구부 안에 도는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면 토오루도 알고 있다시피 그냥, 농담이잖아요."


   쿠니미는 별 일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뜨거운 냄비를 얼음물 위에서 식혔다. 쿠니미는 예쁘게 씻어놓은 유리병 세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네 거.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거야? 오이카와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킨타이치라도 주려고?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잼이 식어 병 안에 들어갈 때 까지 오이카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쿠니미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진지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보면서 쿠니미는 '제 편 만들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정략결혼 하기 싫어요? 쿠니미가 뜬금없는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오이카와는 절대 하기 싫다면서 식탁 위에 엎어졌다.


   결혼은 온혈동물이랑 하고 싶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야기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정략결혼 상대나, 지금 애인이나 둘 다 포유류라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는 냄비를 들어 수건 위에 놓았다. 물기를 잘 따르고 쿠니미는 딸기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숟가락으로 잼을 떠서 병 안에 넣었다. 허공만이 차 있던 유리병에 붉은 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쿠니미야."

   "네, 토오루."

   "그 '농담'에 기분 나쁜 적은 없었지?"


   오이카와는 제법 날카로운 곳을 찔러왔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대답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마키 씨는 제법 멋있는 선배잖아요. 쿠니미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골라 썼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쌜쭉 내밀었다. 하나마키 씨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쿠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쿠니미는 냄비를 물에 담갔다. 다음 잼을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냄비를 꺼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냄비였다. 우유와 생크림이 냄비 안에 가득 담겼다. 쿠니미는 그게 느리게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처럼, 혼합물의 온도는 천천히 오르기 마련이었다. 오이카와는 딸기잼이 들어있는 병 세 개를 바라보다가 하나마키가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완전히, 실수 한 것 같은데 어쩌지. 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주어도 실수의 대상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오이카와는 그게 쿠니미 아키라를 의미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잡은 손, 어둠의 장막이 내린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싶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느낌이었니?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말한다면 로마의 휴일 같은 느낌이었겠죠, 하고 대답했다.


   "지루한 느낌인가?"

   "토오루, '로마의 휴일' 본 적 없죠?"

   "그렇지."


    나 흑백영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니미는 끓기 시작한 우유와 생크림에 티백을 넣어 우려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았다. 언제 한 번 봐 봐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어째 짐작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짙은 장막 너머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마키 씨가 시켰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게 수상하다고 말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홍차가 우러나는 색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눈치도 빠르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 보았다. 그 날에 있던 이야기는 무덤 까지 가져갈 거에요, 쿠니미는 놀리는 듯 말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뱀처럼, 그는 모든 질문을 유연하게 피해갔다. 이런 '밀당'으로 사교회에 꾸준히 나갔으면 벌써 결혼 하고도 남았다면서 오이카와는 혀를 끌끌 찼다.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오이카와가 내뱉는 질문들 보다, 그에게 선물할 잼이 더 중요했다.


   쿠니미는 티백을 꺼내고, 새 티백을 넣어 우렸다. 그는 설탕을 부었다. 하얀 설탕이 갈색에 진하게 녹았다. 쿠니미는 숟가락으로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설설 저었다. 잼 만드는 거 재밌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녹아들어 고체로 굳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숟가락에 잼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그는 설탕을 더 넣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것도 맛키와의 사랑에 적용 할 수 있는 말인가요?"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녹아드는 설탕을 바라 볼 뿐이었다. 얼그레이 잼을 만들 때의 포인트는, 설탕과 홍차와, 우유와 생크림이 캬라멜 화 되지 않도록 천천히 저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칭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모두 무시했다. 약한 불에서 액체는 천천히,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그레이 잼을 담을 그릇을 고민했다. 전해줄지 말지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왕 줄 거라면 예쁜 그릇이 좋았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을 찾아 쿠니미는 찬장을 열었다. 병 위쪽에 레이스 모양을 한 종이를 둘러야 할지, 혹은 만든 날짜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를 붙일지, 쿠니미는 깊게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위한 포도 잼을 만들어 달라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쿠니미는 포도는 없다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까 맛키가 얼그레이 스프레드를 좋아한다던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예요?"


   쿠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만들어 주라는 뜻이잖아! 라며 되려 화를 냈다. 쿠니미는 그의 모든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급한 불은 잼을 태우기 마련이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제 앞에 붙은 불이나 끄라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잼이 느리고, 또 느리게 끌어 올랐다. 잼이 다 되면 오이카와는 식빵을 굽자고 말했고, 쿠니미는 이미 바게트를 사 놓았다고 잘라 말했다.


   흰 바게트 위에 올린 딸기잼은 최고야, 오이카와는 반드시 무염 버터에 구워달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금새 달아오른 손을 찬 물에 툭툭 털면서 그러겟다고 대답했다. 계속 불 앞에서 냄비를 저었던 지라, 손이 화끈거리게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하품을 했다. 왜, 만들었을까. 약간의 후회가 그의 잼 안에 풍덩, 빠져 유영했다.




***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하나마키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라커룸 안에 있던 세 개의 유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병에 붙어 있던 단정한 글씨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마키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어줍잖게 넘겨 짚었다가 실수하기 싫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다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기도 싫었다. 그는 잼 병을 쓰다듬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것은 쿠니미었다. 하나마키는 머릿속에 든 망상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쓸모 없는 일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얼굴을 쓸었다. 그 날 밤도 그런 실수를 했다. 이름 모를 정원수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에서, 그는 쿠니미를 흰 벤치에 앉혔다. 달은 동그랬고, 둘이 나눈 이야기들은 의미없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사소한 말 속에서, 하나마키는 바게트가 좋다는 말과, 그 위에 잼을 바르고 계란을 반숙 프라이해서 올리는 걸 사랑한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매우 소박한 식단을 보며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뿐이었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도 모자랄 타이밍에서 거나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 문제였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야 한다던 그 때의 강박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남자아이 앞에 처음 선 것처럼 행동하던 자신을,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뛰는 심장을 넥타이로 누르고, 잘 맞는 정장으로 옭아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나마키는 딸기 잼과 얼그레이 잼, 레몬청을 끌어안았다. 쿠니미야, 나 어떡하니.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부끄러운 말이 들려왔다. 사교회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그의 번민이 문가에 서 있었다. 쿠니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마키가 안고 있는 세 개의 잼병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가득 차 있는 잼과 청은 레이스 모양의 종이와, 제조일자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로 장식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그 것을 흥미롭게 보는 듯 했고, 하나마키는 죽어버리고 싶었다.


   여자한테 받았어요? 인기 많네요. 쿠니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는 변명하려는 자신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 쉬었다.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하는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누가 물어 봤대요? 쿠니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봄 날씨는 따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잡아줄 수도 없는 포근함이 번져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지 않았다. 쿠니미는 락커룸을 열었다. 하나마키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락커룸에 유리병 세 개를 넣었다. 한숨 밖에 쉴 수 없는 아침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얼굴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하나마키는 자신이 내린 답을 쿠니미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건 그의 전공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괜히 옷을 갈아입고 먼저 라커룸을 나섰다. 뒤에서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도 같았지만, 그는 눈부시게 부서지는 아침이 보여주는 환청이라 생각하며 얼른 코트로 나섰다.


   하나마키가 나간 자리에 오이카와가 인사하며 들어왔다. 쿠니미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제 만들었던 거 다 맛키 거였지? 오이카와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감추는 것도 재미 없을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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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어느 밤

  아침 과, 점심시간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간보는...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여시 같은 쿠니미와 은근히 눈치 있으면서도 둔한 하나마키 씨가 좋습니다...☆★









***

   “그래서 오늘 같이 갈 거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상 위에 놓여있는 두 장의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 너머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수면 위에 비가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축 젖은 연잎과 나무수국을 바라보다, 쿠니미는 나가기 싫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똑부러지는 의사표현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라, 오늘 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주면 안 돼? 오이카와가 물었다. 나 냉혈동물이라서 이런 날 밖에 못 나가요 토오루, 하고 쿠니미는 능숙하게 넘어갔다. 누가 뱀 아니랄까봐, 하면서 오이카와는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사촌 형의 부탁 정도는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혈연을 이용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귀찮은 남자였다.


   쿠니미는 다 식어가는 핫팩을 꼭 쥐었다. 하늘이 꾸물거리고 비가 몇 방울 떨어질 때 받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오늘은 꼭 가면 안 되냐면서 쿠니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설설 쓰다듬었다. 나 체온조절하기 힘들어서 밖으로 못 나가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자신도 악어라고 대답했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키라야,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도 안 가요.”

   “너 지금 내가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오이카와 씨는 모르는 게 없어.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쿠니미는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의 오이카와와 달리, 그는 사교회가 귀찮았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배구보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잘생긴 이마가 드러났고, 쿠니미는 엄지와 중지를 튕겨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왜 가기 싫어하는 건데? 오이카와가 물었다. 귀찮잖아요, 쿠니미는 다시 대답했다. 그는 예쁘게 차려입고 웃는 자리가 취향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 우리 엄마 같은 소리를 한다, 라는 그의 말에 쿠니미는 오이카와 또한 제 엄마 같은 소리를 말한다면서 받아쳤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자리를 불편해 하는 걸 잘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사교회에 나올 것을 권하곤 했다. 쿠니미는 그게 오이카와 나름의 친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류 사회에서 결혼과 연애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다분히 품은 도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쯤이면 선자리가 설설 들어올 테니, 그 전에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다는 것은 쿠니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답지 않게 연애결혼 하고 싶은 거야?”

   “답지 않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말 그대로라고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그는 그의 불퉁한 입술을 두어 번 더 잡아당기고는 조금만 있다 가겠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골라주겠다고 신이 나서 말하는 사촌형을 바라보다가, 쿠니미는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꽤나 추울 것 같았다. 그는 핫팩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핫팩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다 식은걸 뭐 하러 쥐고 있어? 중종 악어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고, 흰뱀 중종은 그의 표정을 따라하면서 손이 심심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핫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다 식은 핫팩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요.”

   “정말?”


   쿠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놀라 되물었다. 쿠니미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는 게 너무 귀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오이카와 씨의 친사촌동생이며 뱀목이라는 것을 대신 말해 달라 했다. 오이카와는 별로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 말하면서 웃었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일어났다. 정장을 골라주겠다는 말에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곤해? 그의 말에 쿠니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피곤함을 감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사촌동생의 모순 된 말과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한 옷방으로 발걸음 했다. 쿠니미는 의욕 없이 그의 발자국을 쫓아 갈 뿐이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하는 건 싫다. 쿠니미는 반짝거리는 조명을 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몇 사람이 그에게 말을 붙여왔고 그의 옆에 있던 오이카와는 그 대신 자기소개를 했다. 모임에 꾸준히 참석 해 왔는지, 오이카와는 사람무리 속의 중심처럼 이동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베란다 안에 기대어, 환한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많은 인파를 천천히 관찰했다. 다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이미 여며진 재킷을 쓸었다. 코트를 하나 더 입으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들었어야 했다. 쿠니미는 회장 한 가운데서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빛에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파티장 구석에서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명처럼 반짝이는 오이카와를 놓치기 싫다는 듯 굴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하품을 했다.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눈길을 끌만한 반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일 연습을 좀 더 성의 있게 설렁거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해야 했으나, 그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인기인은 괴롭다고 생각하며, 쿠니미는 제 목을 옥죄고 있는 보타이를 풀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는 파티장 안을 돌아보았다. 멀리, 튀는 머리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하나마키였다. 쿠니미는 그의 혼현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 넣었던 보타이를 꺼내 천천히 맸다. 일찍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회장에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뱀은 원래 눈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서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자 오이카와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쿠니미에게 몰렸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소개할게요, 라고 운을 띄우는 경쾌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이제부터 소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엮어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 뒤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마키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까이 하지 말자, 라는 말은 쿠니미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그는 식어버린 핫팩을 생각했다. 파티장 구석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우습기만 했다. 쿠니미는 가볍게 눈웃음 쳤다. 하나마키의 앞에 있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면서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를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쿠니미에게 대상이 누군지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웃기는 질투심이었고, 반항심의 발현이었다. 쿠니미는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귀찮은 일도 감수해야만 하는 때가 오는 법이었다. 쿠니미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온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촌동생인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


   어느 밤, 하나마키 타카히로의 기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에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섞인 명백한 불쾌함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키, 하고 부르니 하나마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년 동안 그를 겪어왔음에, 오이카와는 그의 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란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그의 눈길의 끄트머리에는 짙은 붉은색 보타이를 맨 쿠니미가 있었다. 신경 쓰여?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


   “애인이 신경 쓰여?”

   “맛키 씨는 솔로인데요?”


   하나마키는 즉각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니미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오이카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가 내 애인이에요?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배구부 안에선 아예 공인이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맛키는 쿠니미가 싫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었으면 저렇게 안 놔뒀다는 고지식한 말이 뒤따라왔다. 싫지는 않은가 보다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가득 즐기면서 키득거렸다. 쿠니미가 공중에 옅게 친 거미줄에, 하나마키가 덥석 걸린 꼴이었다.


   “예쁘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 잘 맞는, 투 버튼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이었다. 교보을 입었을 때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마키는 활발하게 웃고 있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나마키는 곤란하게 웃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 마다 철벽을 치면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저런 모습의 그 보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미미하게 멈춰있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마키가 모르는 중종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웃고 있었다. 백합처럼 우아하고, 프리지아처럼 수줍은 모습이었다. 그는 태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오는 게 아니었어, 하고 넋두리처럼 말하자 오이카와는 오지 않았어도 불안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분명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체크 할 거잖아?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하면 말이라도 걸러 가 보는 건?”

   “그럴까.”


    하나마키는 계속 쿠니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렇게 밝게 웃는 쿠니미에, 하나마키는 적응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살짝 몸을 틀었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손을 흔들자, 쿠니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쿠니미는 자신이 이야기 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서, 천천히 하나마키의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마키는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유연하게 걷는 고양잇과 동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혼현이 눈처럼 하얀 뱀이라는 것을 하나마키는 가끔 잊곤 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눈을 맞추고 눈웃음 쳤다.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지는 눈에, 하나마키는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애매한 소유욕이 천천히 번져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웃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그는 쿠니미의 손목을 잡았다. 선배? 하고 묻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쿠니미는 잠시 놀란 것처럼 얼어 있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그의 이름을 똑바로 말했다.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추울 것 같은데요.” 

   “괜찮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에, 하나마키는 그의 혼현이 여우였던가를 잠시 고민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둘에게 잘 다녀오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이카와 씨도 변온동물이라서 밖에 따라가고 싶진 않거든, 이와랑 놀러 갈 거야. 그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이끌었다. 오이카와가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품안에 가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향수 뿌렸어? 그의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좋은 향이 난다는 칭찬에는 선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마키는 자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하나마키는 그를 천천히 에스코트했다. 쿠니미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 구두라도 신은 것 마냥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신은 구두 굽에서 꽤나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나마키는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타카히로 씨는 핫팩 같네요. 쿠니미가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만 그래. 하나마키는 그 말을 애써 씹어, 삼켰다. 말이 들어간 위가 더부룩했다. 하나마키의 표정을 보던 쿠니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웃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후배의 당돌한 선언에, 하나마키는 애써 웃어 보였다. 쿠니미는 느릿하게 웃었다. 비온 후의 꽃이파리처럼 예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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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홍차, 우유와 설탕을 가득 넣어서

   킹스맨 AU입니다. 이 글과 시간대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킹스맨의 추천인 제도는 키잡을 위한 최고의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가 반바지에 니삭스 신을 때 부터 길러온 하나마키가 보고 싶네요 ^0^!!! 






***

   쿠니미는, 그를 봤을 때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후보는 단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추천인이 랜슬롯이라고 확신했다. 그 카게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할 상대는 그의 추천인 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오래 된 이불을 털었을 때,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개의 목줄을 꽉 쥐었다. 이미 지워진 이름을 가진 도베르만은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와 달리 충직한 견공은 쿠니미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그가 신은 밑창이 두꺼운 구두가 소리를 냈다. 쿠니미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 나른한 햇살에, 그의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의 세상의 축은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미 결심한 이상 망설이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서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니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의 상냥한 모습에 쿠니미는 짧게 목례했다. 그는 그와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선 욕망을 그는 혀 아래에 숨겼다. 먹기 싫은 알약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썼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쿠니미의 목소리에 랜슬롯은 문에서 비켜주었다.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갤러해드의 집무실에서는 언제나 단 향이 났다. 어린애 같은 입맛 탓이었다. 쿠니미는 개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 지워진 이름의 개는 러그에 편하게 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갤러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햇빛이 들어 반짝였다.


   안녕,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쿠니미가 물었다. 나는 네 추천인이 아니란다. 갤러해드는 따듯한 물을 주전자에 담으며 말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웨지우드의 파란색이 쿠니미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언젠가의 밤하늘 같은 색이었다.


   합격 축하라면 가웨인에게서 듣도록 해. 갤러해드는 쿠니미의 추천인 이름을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단호한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에 건 아침나절 하늘을 담은 넥타이에 든 수국모양의 스치치가 반짝였다. 가웨인이 이런 말은 안 해주던? 갤러해드는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하얀 모래알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쿠니미가 대답하자 갤러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쿠니미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말꼬리를 돌리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갤러해드는 잔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찻잎은 내 멋대로 고를 거라는 목소리에 그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밤하늘 여러 겹을 겹쳐놓은 듯 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갤러해드는 그저 하얀 모래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련한 남자 앞에서 쿠니미는 경험 없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다. 갤러해드는 웨지우드 티팟을 손에 들었다. 그는 거름망을 잔에 얹었다.


   쿠니미의 마음에 들어 있는 찻잎은 ‘어수선함’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질투’를 블랜딩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물을 붓지 않아도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그는 갤러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에 그의 도베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앉아, 하고 쿠니미가 개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게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갤러해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찻잔 두 개를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그는 흔들림 없이 찻잔 두 개를 탁자로 옮겨두었고, 찬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버터과자와 스콘을 꺼내두었다. 쿠니미는 제 앞으로 놓인 찻잔에 설탕을 두 개 넣었다. 갤러해드 또한 그리하였다. 단 건 좋아, 라고 속편하게 말하는 그에게,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림으로 화답했다.


   “언제 산 거예요?”

   “오늘 아침.”

   “왜.”

   “네가 올 줄 알았거든.”


   갤러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반짝임이 스며 있었다. 쿠니미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그가 어른 같아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갤러해드 앞에서는 어린애의 유치한 놀잇거리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문득 외로워졌다.


   나는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것이 쿠니미가 쌓아올린 모든 행적에 대한 그의 최종 평가였다. 쿠니미는 찻잔에 손을 댔다. 도자기 너머로 희석된 따듯함이 전해져 왔다. 찻잔의 다른 이름은 분명 ‘갤러해드’의 이명일 것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불완전한 킹스맨은 고개를 숙였다.


   “왜 날 추천하지 않았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 어른 같은 척 하는 얼굴을 싫어했다. 그는 코끝이 찡해온다고 생각했다. 따듯함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갤러해드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도베르만과 제법 닮은 눈길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임을 확인받는 게 싫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날 추천해주길 바랐어요.”

   “그래?”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스콘을 뜯어 쿠니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쿠니미는 입을 벌려 빵조각을 받아먹었다. 그는 그의 손끝을 핥았다. 대담하네, 갤러해드는 그이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 웃었다. 쿠니미가 언제나 따라가고 싶어 했던 미소였다. 그는 개에게 손짓했다. 도베르만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섰다. 앉아, 하고 그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바랐어요.”


   그는 절박하게 말했다. 갤러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웨인이, 오이카와 씨가 나를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걱정했나요? 아니면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쿠니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큰 알약을 물 없이 입안에서 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내 프로방스 별장에 가서 청소나 하고 수틀에 수나 놓아.”

   “갤러해드.”

   “안전하게 지내. 총, 칼, 독, 킹스맨. 어느 것도 너한테 안 어울려. 쿠니미 너 귀찮은 거 싫어하잖아. 효율적이고 안전하고, 내 새장에 든 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쿠니미는 황량하게 빈 프로방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사용인 몇 외에는 오지 않는 그 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처럼 부유하던 빈 날을 떠올렸다. 갤러해드가 ‘원래 이름’을 가지고 오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쌍무지개가 뜨는 것만큼 가끔씩 찾아왔고, 그 마저도 하루를 머물지 않고 떠났다.


    쿠니미는 그 빈 침실을 기억한다.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는 프로방스의 따듯한 햇살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쿠니미는 잔을 놓았다. 그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부터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잔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들이 찬 자신은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태양처럼 멀었다. 쿠니미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나는,”

   “미안한데, 난 어린애 투정 듣기 싫어.”


   비수가 꽂히는 기분에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생명줄마냥 잡고 있는 찻잔의 수면이 흔들렸다. 차라리 독약이라, 마시고 죽었으면 싶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그의 세계는 첫사랑 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고독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쿠니미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마음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마음이 우러나고 있었다. 넓게 퍼지는 그 향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는 듯, 갤러해드는 그저 스콘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뻑뻑한 빵이 그의 목을 막으려 할 때 마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쿠니미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잔인한 사람, 그가 말하자 갤러해드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웃었다.


   “넌 곧장 내 방문을 나서야 해. 그리고 쭉 직진해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서, 네 추천인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렴, 오이카와 씨 저를 추천해주신 건 감사할 일이나 저는 이제부터 프로방스의, 미스터 갤러해드 씨 소유의 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석인 퍼시빌 자리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채울 것입니다. 갤러해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쿠니미는 그의 독단적인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함께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작은 꿈마저 갤러해드는 담뱃불을 구두로 밟아 끄듯, 소화하고 있었다.


   “하나마키 씨.”

   “이게 내 사랑이야.”


   쿠니미는 갤러해드가 프로방스의 침실에 놓고 온 이름을 말했다. 그의 본명을 기억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쿠니미는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노력의 반절도 알지 못했다. 빈 침대 시트에 누워 지새웠던 밤을, 그 밤이 여러 겹 겹쳐져 만든 검은 색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은 한없이 이기적이였다.


    그는 멋대로 쿠니미가 사랑하게 만들고, 따라온 모든 다리를 끊고자 했다. 쿠니미 아키라의 모든 세계는 하나마키 타카히로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슬펐고, 그게 아쉬웠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도, 킹스맨이 될 거예요, 하나마키는 그 말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말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나마키가 기억하는 것 보다 5cm는 더 자란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쉼표와 같은 한숨이 자리했다. 당신과 같은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를 신고, 프로방스의 날씨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 런던 거리를 걸어다닐 거예요, 그는 확정된 것 같은 미래를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것을 불확실한 망상으로 만들었다.


   계속 반복되는 문답에, 쿠니미는 울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베르만에게 손을 뻗었다. 갤러해드가 지워버린 이름을 가진 개였다. 그는 그의 귀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는 귀 뒤와 목을 솜씨 좋게 쓰다듬었다. 날 불안하게 하지 말아줘요, 쿠니미는 애원하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은 주어진 온기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이 어미 새라도 되는 양 따라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자라온 그의 사랑은 이미 맹목적인 움직임이었다. 난, 불안해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쿠니미가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 안에는 혼자 있던 밤이 고여 있었다. 쿠니미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하나마키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가 짧게 떨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눈 아래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이 닿은 자리, 반대편에 눈물길이 생겼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나마키는 마법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변명이라면 듣기 싫어요.”


   쿠니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눈가에 담긴 눈물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에 대한 동정은 받지 않겠다는 그 당돌함에, 하나마키는 침을 삼켰다. 지금 그에게 서툰 감언이설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에게 손을 뻗은 것은 하나마키의 자의였다. 그 손길에 의해 세계가 돌아갔고, 재구축 된 이상 책임져야 마땅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을 말해 줄 타이밍이었다. 


   “난, 널 이명으로 부르기 싫어.”

   “네?”

   “퍼시빌이니, 가웨인이니, 랜슬롯이니 하는 역할놀이에 네 이름을 가리기 싫다는 뜻이야.”


   쓴 물이 우러난 쿠니미의 세계에, 하나마키는 설탕을 한 스푼 더했다. 그는 멈춰버린 모래시계를 반대로 뒤집었다. 설탕 같은 하얀 모래알이 다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침이 째깍거리며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간은 허비한 뒤에야 아까워지는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반쯤 식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혀가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나마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날 갤러해드라고 부르는 게 싫어. 나는 너에게 영원한 ‘아저씨’고, ‘하나마키 씨’야. 그의 서툰 고백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해드란 이름 속에 담긴 그 이름을, 나만 기억하면 되잖아요? 그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햇번처럼 사랑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려진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하면서 제 머리를 쓸었다. 목이 답답해 옴에, 그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예법에 어긋나고 매너 없는 행동이지만 용서 해 다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매너보다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말해 주세요. 쿠니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하나마에게 곧장 닿았다.


    “셋째, 난 널 전장에 내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네가 들 날붙이는 수를 놓을 바늘이면 충분 해.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제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초조해질 때만 피우시죠, 쿠니미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연극이 아니라서 그래. 갤러해드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미는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 사포와, 성냥을 꺼냈다. 그는 불을 피워, 손으로 주변을 감쌌다.


   그의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하나마키는 한동안 담배를 피웠고, 쿠니미는 달지 않은 스콘을 먹었다. 그는 라즈베리가 든 스콘을 좋아했고, 버터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유, 더 말해주세요. 쿠니미가 말했다. 그와 웨지우드는 퍽 어울리는 그림이었기에 하나마키는 혀를 차냈다.


   집 안에서만 가두고 싶어서 그렇다, 는 이유에 쿠니미는 기각, 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하나마키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쿠니미는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마키의 기억 속 어린아이는 이렇게 집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많이 컸다고 대답했다. 그 엉뚱한 문답에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네 이름을 좋아한다.”

   “그래서요.”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 아키라.”


   아키라, 하고 하나마키는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그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닿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마지막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나마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재들이 불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내가 혼자 지새웠던 밤을 알고 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없이 그의 셔츠 아래의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우리 쿠니미는, 스물네 시간 동안 예법과 예의, 매너를 중시하는 가웨인에게 가게 될 텐데. 하나마키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었다. 그는쿠니미의 흰 셔츠에 자신과 비슷한 색의 타이를 매어, 매듭을 지었다. 그는 그 매듭과, 그의 목울대에 입을 맞추었다.


   숨이 닿아 간질거리는 목에, 쿠니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색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떨어지면 프로방스로 가서 자수나 배워.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의 흰 손가락은 넥타이 매듭이 영원을 약속한 징표라도 된다는 듯, 서툴고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만약 붙으면, 내 정장은 하나마키 씨가 맞춰주세요.”


   한참의 침묵 끝에,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꺼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의 변주였기에, 하나마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웨인이 화낼 거야, 갤러해드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앞에서는 갤러해드가 아니라 하나마키 씨. 그의 긴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다.


    하나마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킹스맨 안에서 심리전의 대가라고 불리고 있던 그는, 한참 어린 후보생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갤러해드는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의 눈 안에 있던 짙은 밤하늘은, 어느새 새벽을 가득 겹쳐 놓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홍차 더 마실래? 하나마키가 물었고, 쿠니미는 우유와 설탕을 넣어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햇살이 느리게 움직여, 시계초침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오이스가] 마티니, 보드카가 아닌 진으로

킹스맨 AU입니다^0^ 영화를 볼 때는 참 좋았는데 글로 옮기려니까 제가 너무 부족해서 혼났네요8ㅅT.,.

수트와 남자와 칵테일의 조합은 세계 최강이라구 생각합니다^0^!!!!!






***

   랜슬롯은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는 청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가 청하였다. 평소와 같이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문에서 살짝 몸을 비켜 주었다. 비밀임을 당부하는 그는 꽤나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시 멈추어 그를 감상한 것뿐이었으나, 언제나 효율적이고 냉정함을 추구하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소년이 들어갔다. ‘가웨인의 추천인’ 쿠니미 아키라는 온전히 갤러해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그는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갤러해드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었고, 스가와라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의 몸을 감은 짙은 회색 양복에 복도를 밝히고 있는 백열등 빛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시계를 확인했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추천인과 함께하는 스물 네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을 이 세계에 발들이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언제나 킹스맨은 그들의 추천인과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이벤트를 열곤 했다.


   그 때, 그는 마티니를 타는 법을 배웠다. 베르무트를 기본으로 한 마티니, 젓지 말고 섞어서. 007 스리즈의 제임스 본드 같은 느낌이 난다고 지적하자, 그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다. ‘킹스맨’은 예법과 품위, 약간의 위트를 가진 젠틀맨이지.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지론을 떠올렸다. 그는 작약과 같은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작약의 꽃말을 떠올렸다.


   여러 겹의 꽃잎이 겹쳐 만들어낸 풍성한 꽃망울과 달리, 그 꽃이 품고 있는 말은 ‘수줍음’ 이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과, 작약과의 공통점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웨인이란 남자는 그 단어와 닮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부분을 찾아보자면 작약의 꽃심처럼, 그의 속내 또한 알기 어렵다는 것 정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잠시 멈추어 섰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의 뒷굽에 망설임이 가득 고여, 미련을 담아 흘러내렸다.


   신사에게 고민은 사치와도 같은 것이다. 스가와라는 곧장 걸었다. 이미 방문하기로 연락 한 이상, 그는 가웨인을 만나야만 했다. 그는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리드미컬한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당당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의 추천인이 알려 준 ‘예의’였다. 가웨인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를수록 토양이 퇴적되는 것처럼 몸 안에 스며 있었다.


   똑, 똑. 그리고 시간을 담아 똑. 스가와라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 까지 대기했다. 이 역시, 가웨인의 예법이었다. 들어와, 그의 옛 추천인이 말했고, 그는 문고리를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돌렸다. 그는 뒤를 돌고 있었다. 그의 방 안은 어두웠고, 달달한 꽃향기가 들어 있었다. 가웨인, 하고 부르니 그는 랜슬롯, 하고 화답해왔다. 몇 년째 이어져 오는 호칭이었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에 쉽게 익숙해 질 수 없었다.


   “랜슬롯, 네 추천인은 어디다 남겨두고?”

   “가웨인도 마찬가지인걸요.”


   스가와라는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추천인을 둬서 기쁘겠어, 눈앞의 그는 빈정대며 말했다. 수려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문을 닫고 두어 걸음 다가섰다. 그의 책상 위에는 진과 베르무트가 있었다. 익숙한 블랙 올리브에 스가와라는 마티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추천인과의 마지막 날에 마티니를 마셨다는 가웨인의 소문을 떠올렸다.


   쿠니미 군은 좋겠네요, 스가와라가 웃으며 말했다. 가웨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쿠니미가 의외로 술이 약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구닥다리를 싫어하니, 이 올드한 마티니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서 웃었다. 토비오와는 뭘 할 생각이야? 가웨인이 물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추천한 아이가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라고 운을 땠다. 그리고 예법을 가르치겠죠, 라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토비오는 우수한 학생이니까 예법도 순식간에 배울 걸.”

   “그런가요?”

   “스물 네 시간을 소비하려면 뭔가 더, 가르쳐야 할 거야.”

   “예를 들면?”


   스가와라가 물었다. 가웨인은 음, 하고 고민했다. 그는 얼음에 들어 있던 진을 꺼냈다. 우리 원래 목적에 들어맞는 이야기를 할까? 그의 제안에 랜슬롯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마티니를 마시러 오라는 원래의 전보를 그제야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가웨인의 집무실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쇼파의 광택에 감탄하며 시선을 앞으로 두었다.


   난, 토비오가 협동심 항목에서 떨어질 줄 알았어. 가웨인이 말했다. 스가와라는 자신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도 그쯤에서 떨어질 줄 알았지. 가웨인은 노래하듯 말했다. 그는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면서 조소했다. 스가와라는 화병 안의 작약을 만지작거렸다. 여린 꽃잎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미적지근한 향이 났다. 피려면 이틀에서 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는 봉우리를 보며 말했다.


   “가웨인 씨는 말야, 쿠니미의 이름은, 스물 네 시간이 지나도 아키라일 거라고 확신해.”

   “카게야마 때문인가요?”

   “퍼시빌은 토비오의 자리가 되겠지. 떨어질 이유가 없어.”


    내가 가웨인인 이유는 토비오가 불완전했기 때문이지. 그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진 병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광택이 반짝거리는 잔 두 개를 쥐었다. 스가와라는 불과 오년 전, 갓 중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킹스맨’이 될 뻔 했다는 카게야마의 말을 떠올렸다. 청소년기에 하곤 하는 허풍으로 취급 한 말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그가 취조하듯 물자, 가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안 좋아. 가웨인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추천인이 매우 우수하다면서투덜거렸다. 스가와라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는 무기사용, 대인응대, 협동심 등, 모든 자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남자였다. 무기력한 아이였는데, 사랑의 힘은 역시 대단해. 가웨인은 스가와라가 쉽게 알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는 마티니 잔에 진을 담았다.


   “어떻게 해 줄까?”

   “이미 진을 따른 것 같지만, 보드카 마티니. 섞지 말고 저어서.”

   “오, 이런.”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닌 슬픔만큼이나 깊은 수심이 그의 한숨에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진은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스맨이라면 싫은 것도 마셔야지.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베르무트를 부었다. 눈대중으로 섞는 것 같지만 의외로 정확하게 계량했을 게 분명했다. 오늘의 그는 매우 심기 불편한 고양이 같았다.


   온 몸의 털이 바짝 선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다리를 꼬았다. 젠틀맨, 하고 가웨인이 그를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그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스승’이곤 했다. 엷게 켠 조명이 가웨인의 ‘작업’에 별빛처럼 흘러내렸다. 반짝이는 마티니 잔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자신과 그의 스물 네 시간을 떠올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잔 안에서 섞이는 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비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주진 말아줘.”

   “그렇지만, 우리는 킹스맨이고, 토비오가 ‘퍼시빌’이 된다면,”

   “동료이기 때문에 모든 걸 알려주어야 한다? 로맨틱 한 말이야.”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의무적인 소리죠.”

   “정답. 랜슬롯도 많이 컸는걸. 어엿한 킹스맨이 되었어.”


   가웨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잔 안에 올리브를 띄웠다. 그는 소리 없이 걸을 줄 아는 남자였다. 그가 건넨 잔을 스가와라는 기꺼이 받았다. 유리잔과 유리잔이 키스하며,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윙크했다. 랜슬롯이 이렇게 성장하다니! 가웨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랜슬롯은 마티니로 입술을 축이며 당신에게 배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웃음을 담은 눈은 호선을 그리며 감겼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서로를 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웨인은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받은 것은 되돌려 준다.’ 또한 가웨인의 오랜 신조였다. 어떤 느낌이 들어? 그가 물었고, 랜슬롯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같은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아찔했겠군, 가웨인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방에는 큰 회중시계가 있었다. 1과 2사이에서 유달리 큰 소리를 내는, 어설프게 고장난 시계는 전(前)‘가웨인’이 남긴 유품이었다. 가웨인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를 셈했다. 멀린과 아서가 우리에게 얼마를 줄지 감도 못 잡겠어, 그는 의외로 솔직하게 말했고, 스가와라는 삼십 분 정도는 남았을 거라 장담했다.


   가웨인은 랜슬롯의 손에 들린 잔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했다. 머릿속에 담긴 모든 생각마저 훑어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 네 시간 동안 체념을 가르쳐야하는 건 슬픈 일이야.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형식적’인 위로를 내뱉었다.


   “랜슬롯, 이미 결과는 정해진 일이겠지.”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과 같은 일이지요 가웨인.”

   “나는 그게 매우 불쾌해.”


   재능덩어리들을 일반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몇 년을 고민했지만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가웨인은 잔을 흔들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우수한 인재가 원탁에 들어오는 것보다 좋은 일이 없다는 회유로는 그의 불쾌함을 씻어 낼 수 없을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천재였고, 쿠니미 아키라는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했다.


   “쿠니미는 개를 못 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야 그 개 이름이 짝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웨인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스가와라는 허락 없이 키스를 구하는 행동이 ‘예의’에 얼마나 어긋날지를 고민했다. 가끔 ‘랜슬롯’과 ‘가웨인’이라는 이름은 난데없는 곳에서 무게를 가지곤 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본래 이름을 입속에 머금었다. 그는 하염없이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섞인 체념은 어려운 법이라는 말을 꺼냈다. 스가와라는 쿠니미와 갤러해드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유추 할 수 있었다.


   가웨인은 마티니를 마셨다. 반절 빈 잔을 그는 체리목으로 단단하게 짠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마티니 잔의 둥근 바닥은 그가 전까지 보고 있던 편지 한 통을 덮었고, 줄어든 수면(水面)을 옐로우 라이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이 채웠다. 그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몸에 딱 맞춘 감색 양복에 스가와라는 잠시 넋을 놓을 뻔 했다. 여러 장 꽃잎이 겹쳐 만들어내는 작약처럼 화려한 모습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가웨인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웃음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등 뒤를 바라보고 걷기로 결심 했을 때부터 익혔던 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 가웨인은 마티니 잔을 다시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칵테일의 표면이 한숨에 간간히 흔들렸다. 스가와라는 그 모든 장면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포장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포장지였다. 허나 가웨인의 날카로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포장임에는 틀림없었다.


   “캉가루, 혹은 진 앤 잇.”

   “진 앳 인?”

   “랜슬롯, 질문을 하나 할게. 이 두 칵테일에 대해서 알고 있나?”


   가웨인은 엄숙하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윗한 발음이라는 것만 알겠어요. 그가 당당하게 말한 대답에 가웨인은 살포시 웃었다. 모른다는 건 넌센스야.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교양이 부족한가요? 그가 이어 말한 말에 가웨인은 전혀, 하고 대답했다.


   “랜슬롯이 들고 있는 칵테일의 옛 이름이지.”

   “아?”

   “가령, 가웨인 경의 ‘오이카와 씨’ 같은.”


   스가와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은 이제 캉가루나 진앤잇 같은 이름이 될 거고, 쿠니미 아키라의 이름은 ‘마티니’ 같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 가웨인은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잔을 비웠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 마다, 그는 멜랑콜리한 감정을 위 너머로 삼켜내고 있었다.


   이 기묘하고 불쾌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웨인이 한탄하듯 말했다. 스가와라는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먼 사람 같은 감각을 느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티니 안에 들어있는 올리브를 입에서 굴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하고 가웨인이 운을 뗐다. 스가와라는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말 대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체리목 책상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작약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브로드 없는 옥스퍼드에서 제법 진중한 소리가 났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은 없다. 그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스가와라가 묻자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오늘은 짐승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토비오 앞에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더 가르칠 걸 생각 해 보라면서.”

   “오, 랜슬롯. 내가 네 집 창문을 깨지 않도록 언행에 신경 써 주지 않겠니?”

   “내게 좀 더 시선을 준다면 고려는 해 볼게요.”


   보시다시피 손을 잡을 때 허락을 구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같은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눈높이는 여전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쓰다듬었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터키옥색 타이에는, 회색 스티치가 들어 가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넥타이죠? 스가와라가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에게는 기쁜 날로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는 서툴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타이 매듭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단단하게 묶인 매듭에 마른 입술이 닿았다. 그 당돌한 짓을 가웨인은 멀뚱하게 보고 있다가, 랜슬롯의 회색 머리카락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던데, 스가와라가 흘리듯 말한 말에 오이카와는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연인들은 흔히 짐승이 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의 불안감 중의 한 매듭 정도는 풀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내심 뿌듯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스가와라는 이미 잊혀진, 그래서 이제는 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토오루, 라는 이름은 마티니의 옛 이름인 ‘진 앤 잇’, 같은 멋스럽거나, ‘캉가루’와 같이 동글동글하게 뭉쳐 사랑스러운 느낌을 내기도 했다.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코우시, 라는 이름으로 화답 해 왔다. 그는 그의 목소리에서 ‘수줍음’이란 단어를 담은 소담스러운 작약 꽃봉오리를 떠올렸다. 개화의 순간은 이처럼 따듯할 게 분명했다.


   “당신은 솔직하지 못한 게 흠이에요.”

   “그래서 너랑 있으면 기분이 나빠.”

   “날 추천하고, 선택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널 싫어해.”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싫어한다면 벌써 이 방에서 내쫓겼을 게 분명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와, 그 위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가웨인은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연인의 이름으로, 스가와라의 손길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쾌활하게 웃었다.


    날 너무 좋아하는구나, 그는 안심한 듯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좋아한다는 단서조항을 내걸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어깨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피로한 사람이었고, 스가와라는 그를 백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그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다시금 정리했다. 완벽한 모양을 갖춘 매듭에, 그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왈츠의 박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마티니 한 잔 더 마실래?”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이 아닌 보드카로. 오픈되지 않은 버무스 보틀을 바라보며 10초정도 흔들어서. 그의 주문에 오이카와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내 추천인에게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진 베이스에 ‘흔들지 않는’ 마티니를 마시는 것도 고려 해 볼게요. 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입안에서 충실히 발음했다.


   너무 어려운 조건이야. 할 수 없어. 가웨인 씨는 못 해. ‘가웨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매너, 라고 내뱉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그는 검지를 올렸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마티니 한 잔 주실래요? 스가와라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그의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댔다. 마티니처럼 묵직하게 감겨오는 애정표현이었다.


   가웨인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뒤를 돌아 다시 술잔을 잡았다. 스가와라는 테이블 위에서 빈 잔을 가져다가, 그의 체리목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가웨인은 다시 솜씨 좋게 진과 베르무트를 다뤘다. 스가와라는 그가 허락하지 않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기대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스틱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문득,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랜슬롯이 아니라 스가와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담고 있었다. 마티니 때문일 거예요. 스가와라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마티니는 약으로도 썼다는 말 못 들어 봤어요? 그가 능글맞게 말한 내용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느새 양 손에 마티니 두 잔을 들고 스가와라의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터키옥색 넥타이에 들어있는 회색 스티치가 멋스러웠다.


   “스물 네 시간 뒤에 집무실로 오면 되나요?”

   “뒤로 하게 해 줄 거야? 코우시?”


   오이카와는 ‘지워진 이름’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가에 가 있는 마티니 잔의 입구를 바라보다가, 스가와라는 어둑어둑한 조명이 그의 입술에 묻었다는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못 이긴 척 잔을 내려두고, 탁자 위에 한 무릎을 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놔요 토오루, 스가와라는 마티니 가득 묻은 입술로 그의 숨을 서툴게 탐했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마티니에 들어간 블랙 올리브 같은 키스였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아,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을 움켜쥐려는 움직임 같아,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의 귓불과, 등을 쓸었다.


   정말 싫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진 다음, 가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랜슬롯은 스물 네 시간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화가 다시 경쾌한 울림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쾌한 바람이 열리지 않은 창 안으로 작약꽃 향기마냥 퍼져왔다.

[카게스가] 파문을 부른 돌은 수면 아래에 있으니,

 예전에 시린님과 풀었던 순수의 시대 느낌의 카게스가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글이 되었네요..

 

 

 

***

이 천한 손이 그대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으로, 낯을 붉힌 두 순례자 같은 내 입술로, 그대에게 점잖게 키스하여 추한 자국을 씻고자 하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오페라글레스 안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줄리엣과, 머리를 잘 빗어 올린 로미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녀가 사뿐거리며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입맞춤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줄리엣이 걸음을 멈추자, 카게야마는 자신의 귓가에 다가온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 하면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은 순례자의 그것처럼 엄숙하면서도 악마의 입맞춤처럼 장난스러웠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물길 너머를 꿈결처럼 이야기 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그 끝에 땅이 있다던 이야기를 전 믿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실증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법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굳은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줄리엣 역 배우가 숨을 멈추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 셋을 새는 그의 프랑스어는 키스처럼 유려했다.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 결심을 할 때, 그의 눈가는 어린 새의 날갯짓처럼 떨리곤 했다. 카게야마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착한 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너무 욕되는 일이랍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예견 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손가락에, 카게야마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귓가에서 줄리엣의 나머지 대사를 옮겼다. 성자의 손은, 순례자가 가져다 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었다. 카게야마는 오페라글라스를 두 눈에서 땠다.

 

그의 하얀 소악마는 카게야마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키스가 아닌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가 웃었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이, 그의 눈꼬리에 자리한 야살스러운 점과 대비되어 있었다. 그는 남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성자나 거룩한 순례자도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박스석은 이미 연극의 한 무대였다. 스가와라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목례했다. 하얀 문조의 깃털처럼 부스스한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카게야마 또한 얼떨결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그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짧은 연극이 끝남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확대되어 보이는 세상에, 좁은 무대가 다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차례 입맞춤을 교환한 상태였다. 그들의 죄는 입술 안에 있지, 스가와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커튼에 손을 뻗었다. 옳지, 하며 칭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박스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뿐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더니, 자신의 숨결을 내어 불을 꺼트렸다.

스가와라 씨.”

그대의 눈에서 빛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는 어린애 같이 말했다. 치기어린 그 목소리에는 분명 카게야마의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과도 관련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종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는 느리게 스가와라의 얼굴 선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튼 너머의 세계를 상상했고,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성녀님, 손으로 하는 키스를 입 안에 담게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그래요, 스가와라가 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 줄리엣은, 서툴게 흔들리는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카게야마는 엷게 꿀을 발라 반짝이던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의 세계에 다가갔고, 그의 신앙에게 입을 맞추었다. 숨과 숨이 닿은 순간은 환희였으나, 탐욕스러운 혀가 섞이며 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절망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가와라씨, 짧은 치욕 끝에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살포시 웃었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닿아 있었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가와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들어줄지라도 성자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의 천사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흘렸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불안함은 숨결에 담아, 서로의 위 속에 가만히 담기곤 한다. 그 침전의 순간을 카게야마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서툴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다리는 스가와라의 다리 사이로 서툴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폭력적인 애정에 스가와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계집아이의 소리 같은 그 음색에, 카게야마는 그제 만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좋은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내 입술의 기도를 받아주세요.”

 

스가와라는 그녀와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스가와라의 목덜미를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였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뛰는 그의 맥에 키스했고, 뱀파이어처럼, 그 곳을 혀로 핥아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가이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자신의 입술이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 제 목이, 당신의 죄를 짋어지겠군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제 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고, 이내 자신의 왼손이 그의 목울대를 자르듯 쓸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파국이겠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종교가 될 수 없지요, 스가와라는 예쁘게 말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를 담고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죄인이었어요.”

그럼 내 죄를 돌려주오.”

 

카게야마는 로미오처럼 말했고, 스가와라는 코우시처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줄리엣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익숙한 곡의 변주, 그 날선 느낌.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들리다,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키스에게도 이유를 붙이시네요.”

 

스가와라가 말했다. 한 막이 끝난 듯 박스석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오페라글라스를 챙겼다. 스가와라가 연 문에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의 성자는 밖에서 성냥을 꺼냈다. 은제 성냥갑 안에는 인이 발린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약간의 부딪힘은 다시 일렁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한동안,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심해 같아요, 카게야마가 속삭인 말을 스가와라는 무시했다. 그의 종교는 불친절하였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 시간을 인내할 만큼 똑똑하지도,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스가와라는 턱을 괴었고, 커튼을 열었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목 카라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하얀 목 아래에 피어난 붉은 열락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돌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스가와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말하는 어조로 큰일을 말하였다. 그는 긴 검지를 제 목울대에 대고, 천천히 그었다. 교수형 당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카게야마가 말하는 목소리에 그는 엷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에 꽃을 실은 마차를 보내고, 나를 보러 오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내뱉어진 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 씨와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가 목을 쓸며 물었고, 스가와라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 나는 노란 장미가 좋아. 신사는 벗어둔 실크햇을 건드리며 말했다. 곧장, 가겠습니다. 카게야마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오늘 등이 꺼지지 않음을 예고했다. 너의 꾀꼬리 같은 줄리엣이 건너편 박스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자신의 오페라글라스를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죄를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당신은 꼭 고전처럼 말하시는군요.”

 

또 다시 한 걸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사랑은 치기어린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지 뭐예요, 라고 호들갑 떨며 말하던 유모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는 두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빨간 장미를 보내 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강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질투심 많은 노란 장미를, 아니면 주인공처럼 핀 안개꽃을.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깊은 바다, 그 끝을 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아직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다에는 끝이 없었고, 다만 침전만이 자리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꿈결을 걷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그의 손톱을 쓸어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련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탈함 속에 숨겨진 울음과 울분, 카게야마는 그것을 다만 엿볼 분이었다.

 

가라앉거나, 혹은 녹아들거나. 카게야마는 그들의 끝을 상상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장미같은 아가씨는 오페라글라스로 그 둘이 앉아있는 박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빛 너머에 있는 것은 명백한 질투였고, 카게야마는 그 시선에 목을 매달고 싶었다. 그의 종교가 사랑한다, 짧게 속삭이는 것이 그가 살아갈 이유였기에 그는 스가와라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함께 수장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사랑한다고 정면을 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상대의 눈은 곧 바다였기에, 그는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스가와라는 대답 없이 그에게 노란 장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노란 장미와 안개꽃을 담은 상자를 보낼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관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가라앉은 시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숨결을 기억하며, 익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음 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언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막을 올리는 종소리가 물 위에 떨어진 파문처럼 넓게 퍼졌다. 물 아래로 가라앉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목을 긋던 손길이 선연하였다.

 

[하나쿠니] 점심시간,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아침' 이라는 글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쿠니가 얼른 연애했음 좋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약일까요.... (오열)










***


   삼학년 층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항상 원 플러스 원 세트상품처럼 묶여 다니던 배구부 일학년 레귤러 중 하나인 킨타이치였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킨타이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고, 킨타이치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더니 쿠니미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왜?”

   “어디서 자고 있을 것 같아서요.”


   킨타이치는 체온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그는 합숙 다음 날 꽤나 늦게 일어났었다. 하나마키는 다 알고 있다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뱀은 이래저래 불편하네, 하나마키가 흘리듯 말하자 킨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는 아이스팩을 잊지 않고 챙겨줘야 하고, 겨울에는 핫팩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하자, 하나마키는 그런 몸으로 배구를 할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그는, 어쨌든 하고 있긴 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킨타이치의 어깨가 으쓱이는 걸 보면서 하나마키는 자신도 찾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역시 쿠니미 ‘애인’ 답네요, 킨타이치가 요즘 배구부 안에서 도는 농담소재를 섞어 말했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브이를 그려 보이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겨울과 가을 사이에 있는 바람이 제법 쌀쌀맞은 날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느긋하게 들어 낮잠을 자기 좋은 날이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킨타이치가 삼학년 층에 올라오면서까지 쿠니미를 급하게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느긋하게 걸었다. 종이 어떻게 되었든 결국 하나마키는 ‘큰 고양잇과’ 동물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넓은 교정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결국 ‘강아지’인 (물론 킨타이치는 중종 늑대개였다.) 킨타이치가 쉽게 찾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하품을 하며 교사 뒤편에 있는 ‘신데렐라 계단’으로 다가갔다. 마법이 풀리기 전, 그녀가유리구두를 벗어가며 내려오던 그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공터가 나왔다. 높은 나무가 별로 없는 그 반원의 작은 정원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하나마키는 사교회에서 만난 ‘동문’에게 들어 알고 있던 곳이었다. 그는 쿠니미가 그 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비밀의 정원’의 분위기와 쿠니미는 퍽 닮아 있었다.


   그는 신데렐라 계단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너 온 곳에는 익숙한 공주님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182cm라는 키가 무색하게, 그는 얌전히 의자에 수납되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는 것은 고양잇과 동물에게는 하품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는 풀 밟는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벤치 뒤편에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여름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그만큼 햇볕이 강하게 든다는 소리였다. 하나마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쿠니미의 옆에 앉았다. 그의 고개는 앞, 뒤로 까딱거렸다. 차라리 벤치를 전부 사용해서 누웠으면 편했을 것을, 그는 일부러 불편하게 자고 있는 듯 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 쯤 깨기 위해서일까, 하나마키는 하품을 하며 쿠니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고왔다.


   하나마키는 언젠가의 하교길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요즘 수업 시간에 깨 있는 게 힘들어요, 하는 목소리는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체력이 남들보다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다가 체온까지 불규칙하니 운동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체질이 아니었다. 귀한 집에서 귀한 손으로 자라서 온실에서 길러져야 할 도련님 같았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햇살 향이 났다.


   그는 쿠니미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틈만이 그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로 옮겼다. 진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그는 꽤나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래서는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 또한 놓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엮었다. 팔짱을 낀 다음, 그의 손을 잡았다. 혼자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뱀은 두 손으로 잡아도, 능청스럽게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 흰 뱀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먼저 깨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그는 쿠니미의 손을 꽉 잡았다.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잠이 그렇게도 좋은지 쿠니미는 반응 하나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숨소리를 간간히 들으면서 목 안으로 웃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아, 그는 입 속에서 내내 머물던 말을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은 햇살 향을 가득 머금고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목에 이를 박고 사냥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뭔가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고, 소유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이 들쭉날쭉한 마음을 참아보기로 결심했다. 뱀은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하나마키는 하품을 했다. 점점 햇살이 그에게도 녹아오는 것 같았다. 고양잇과 동물과 변온동물의 유일한 공통점은, 따듯한 햇살 아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둘의 목적은 제법 다르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타나는 행동은 같았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은 느낌이었던지라,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합숙에서 끌어안았을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예민한 코끝을 간질였다.


   찾으면 바로 알려달라던 킨타이치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평소의 쿠니미라면 절대 30cm 이하의 거리감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 변덕 심한 동물이 얌전한 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대부분이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하나마키는 흑표범이었다. 그는 목 끝으로 다시 웃었다. 햇살은 진하게 내리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애매한 추위에도 볕은 따듯했다. 어깨에 기댄 쿠니미가 새삼스럽게 예뻐, 하나마키는 눈을 감기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든 그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주잡은 손을 괜히 바라보았다. 깨기 전 까지는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잠에서 깨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말할까. 나 손 안 잡고 잤는데 네가 자면서 잡더라, 너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네가 안 놔줘서 수업에 늦었잖아, 따위의 말을 생각하면서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햇살처럼 졸음이 느릿하게 몰려왔다. 잡은 손으로부터 온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이 마음을 자신의 후배가 얼른 알아줬으면 했다. 실실,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목 끝에서 고롱고롱 퍼져나왔다.






***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에 쿠니미는 눈을 떴다. 잠시 점심시간에 눈을 붙이려던 게,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것 같았다. 목이 뻐근해서 그는 목을 양 옆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누가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옆을 돌았다. 익숙한 선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합숙 첫날밤이 자연스럽게 번져와 쿠니미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들었다. 지금 하늘에 걸쳐져 있는 것과 퍽 닮은 것이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주황이 들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쿠니미의 것보다 뻣뻣한 머리카락이었지만 만지고 있는 느낌은 좋았다. 그는 언제나 소리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고양이의 특징이라 하지만, 쿠니미는 그가 이렇게 다가 올 때 마다 불안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치는 모든 방어기제를 차근차근 녹여가고 있었다.


   합숙 때도 그랬다. 엉겨오는 180 넘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는 성실하게 꼬리까지 엮어 오며 그를 안심시키고 체온을 나눠 주었다. 사람에게 나눠 받는 체온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고, 날이 쌀쌀해질 때면 그가 생각났다. 쿠니미는 이 사실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선배에게 의지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체온 조절 같은 사적인 문제 까지 도움 받고 싶진 않았다.


   뱀은 불편하다. 변온동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체온을 조절하려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했다. 쿠니미는 차라리 여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사람보다는 아이스팩에 의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가을과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그리웠다. 핫팩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사무치곤 했다. 쿠니미는 괜히 그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개성있게 잘 생긴 얼굴이 무너지는 게 제법 웃겨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계속 이러고 있었다면 어깨는 안 아팠을까, 쿠니미는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윙스파이커 선배의 안위를 걱정했다. 자주 쓰는 손인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는 게 아쉬웠다.


   쿠니미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예쁘다고 어깨를 빌려주고 체온을 나눠주는지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하나마키는 간간히 쿠니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후배와 선배 사이의 ‘좋아함’이라는 단어로 이런 헌신을 설명 할 수 있는 걸까,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에게만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자고 있는 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목에서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긁었다. 중종이라고 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라,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제법 귀여운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일어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마키를 설설 밀었다. 그는 잠귀가 의외로 밝은 지, 얼른 눈을 떴다.


    “잘 잤어 허니?”


    하나마키가 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쿠니미는 잡은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가리켰다.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쿠니미를 깨우러 왔는데 말야, 날 너무 좋아했는지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거 있지-로 시작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쿠니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나마키 또한 그의 손마디에 힘을 주었다. 연인들 끼리 하는 손장난과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놓아 준 하나마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배구부 연습에도 늦었다는 말을 꺼냈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쿠니미의 팔을 하나마키가 잡아 당겼다. 그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으슬으슬해 지는 기온에 그는 짧게 떨었다.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추워? 하고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강한 팔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의 체온은 적당히 따듯했다. 겨울에는 내가 필요할 것 같지? 그는 능청스럽게 물어왔다. 손난로보다는 좋은 것 같네요, 쿠니미가 건성으로 대답 한 말에 하나마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쿠니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 지고 있었다. 너 아까 나 잘 때 목 쓰다듬었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어깨 안 아파요? 쿠니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반대편 손을 어깨에 얹고 몇 번 돌리더니 유연해서 괜찮다는 말을 꺼내왔다.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마요, 쿠니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왜?”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하나마키는 또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떤 의미의 좋아함인지 물어보려다가, 쿠니미는 말을 말았다. 그의 말이 멈춘 걸 알았는지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하나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교복 재킷을 벗어 쿠니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하나마키의 향이 강하게 났다. 꽃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고, 따듯한 햇살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나마키는 그에게 팔짱을 꼈다. 선배? 하고 행동의 경위를 묻자 하나마키는 그저 ‘춥잖아’ 하고 대답 할 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금은 의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르는 척 하나마키의 손을 잡았다. 하나마키가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 느끼면서 쿠니미는 애매하게 웃었다. 참으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마키의 손은 가을과 겨울의 과도기마저 잊을 정도로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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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아침

트위터에서 풀었던 하나쿠니 섹피au의 한 장면을 옮겨왔습니다. 리얼 한 장면이라서 그른가 레알 짧네요... 

아 하나쿠니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늘’했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오이카와나 마츠카와가 질 나쁜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옷 아래로 파고드는 손을 느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가장 베스트일까, 하나마키는 쫄보로 보이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 대담한 손길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자는 척을 해야 할까, 그는 망설이며 몸을 뒤척였다.


   손은 그의 배에서 멈추었다. 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하나마키는 어제 누구의 사이에서 잠들었는지를 기억하려 했다. 그의 왼쪽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는 핫팩과 침낭으로 중무장한 오이카와의 옆에 있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변온동물의 보모는 이래저래 귀찮은 역할이었다. 하나마키는 구석자리에 누운 친구를 생각하려 노력했다.


   배앓이를 할 것 같았다. 손은 좀처럼 뜨거워지려 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벽처럼 자리했음으로 오이카와는 아니었다. 하나마키는 슬쩍 눈을 떴다. 의외의 사람이 그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두텁게 친 (마츠카와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햇빛을 직접 받는 걸 싫어했다.)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살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떨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손을 쥐었다.



   쿠니미였다. 언제나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연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투명한 그의 피부 아래로 뱀 비늘이 언뜻언뜻 비쳤다. 하나마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는 후배의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쿠니미의 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누가 새벽에 보일러를 끈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혀를 찼다. 전혀 반류인 것처럼 보이지 않던 그의 예쁜 후배는 변온동물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불을 들추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의 두꺼운 잠옷 아래에서 뱀 꼬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그 매끈한 하얀색을 보다가, 얼른 자신의 이불을 겹쳐 그에게 덮어 주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 아래로 춥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쩐지 애처로워 하나마키는 그를 얼른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몸이 얼음장 같았다. 그의 하얀 피부에 비늘이 간간히 번져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쿠니미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이 좁아져 있었다. 뱀과 비슷한 눈이 커졌다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춥지?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팔 안쪽에 그의 머리를 대게 했다. 쿠니미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아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얇은 허리를 제 다리로 감았다.


   경계심 많은 후배는 떨어질 법 한데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꼭 기계의 ‘절전모드’ 같아서, 하나마키는 일부러 그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그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지 말라는 말 또한 나오지 않았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반응들이 돌아오지 않는 기분은 신선했다. 그가 내뱉는 숨이 가슴에 가쁘게 닿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바로 아래의 목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애인이 반류면 이런 재미가 있겠구나. 하나마키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고양잇과 동물의 체온은 다른 동물보다 더 따듯하다. 하나마키는 흑표범 중종이었다. 따듯하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울자울 한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장난치는 맛이 있었다. 정작 눈 앞의 하얀 뱀은 정신이 없는 듯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졸음과 함께, 따듯한 벤치에서 간간히 낮잠을 자던 쿠니미의 모습이 밀려왔다. 가까운 기억이었다. 그는 항상 햇살을 받고자 했다. 교복 위에 겉옷을 몇 겹씩 껴입던 모습 또한 이해가 됐다. 따듯해서 기분 좋아? 하나마키의 말에 쿠니미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예상외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선배, 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하나마키가 물었다. 고개를 젓는지, 눌린 팔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게, 저요, 비늘이요, 그러니까, 하면서 쿠니미는 머뭇거렸다. 반류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같은 변온동물인 오이카와가 핫팩이니 침낭이니 뭐니 하면서 부산을 떨 때, 얌전히 열선이 있는 보일러 자리를 차지한 걸까 싶어서 하나마키는 짧게 웃었다.


   품속의 쿠니미는 잔뜩 굳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더듬다가, 제 혼현을 내었다. 그는 짙은 검은 꼬리를 하얀 뱀 꼬리와 엮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자, 하나마키가 느긋하게 말했다. 쿠니미의 머리가 품 안에서 움직였다. 꼬물거리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품 안에서 똬리를 튼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토닥였다.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 같아서 하나마키는 코를 묻어 킁킁거렸다. 선배, 하고 나지막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싫을 법 한데도 얌전히 안겨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무심하고 애어른 같은 구석이 있는 후배의 의외의 면이었다. 얼음장 같던 몸이 서서히 온기를 머금어갔다. 그 느낌이 너무나도 포근해, 하나마키는 문득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오는, 그런 아침이었다.이대로 다시 잠이 든다면 아침 내내 놀림감이 될 게 확실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제 가슴에 쏟아져 내리는 숨결을 가만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번 일 때문에 엮여서 커플 취급을 받게 된다면 나름 ‘이득’이었다. 쿠니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하나마키가 기억하기로, 그는 이런 놀림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하나마키는 오늘 저녁에는 같은 이불에서, 이불 두 개를 덮고, 같이 자자는 제안을 할까 고민했다. 추운 걸 싫어하는 이 변온동물이 어떻게 대답할 지 상상하는 것은 나른한 아침의 즐거움이었다. 하나마키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는 것 마냥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선배, 하고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문득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에 두른 손을 때었다. 꼬리를 풀고, 그의 허벅지에 올려둔 다리를 내리려 하자, 쿠니미는 다급하게 하나마키 선배, 하고 불러왔다. 그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쿡쿡 웃었다. 그는 다시 그를 제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이런 모습 처음이야, 하면서 달콤하게 중얼거린 말에, 쿠니미는 이런 모습 보여주는 게 처음이라고 툴툴댔다. 참,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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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좋아'의 다른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예전에 썼던 템페스트와 피아노 맨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스가와라 씨는 분명 귀엽고 직설적일 거라구 생각합니다. 교류회 뽕을 맞아서 그른가 금방금방 써지네요... 아 교류회 또 가구 싶다.....






***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유려한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를 배회하다가 음을 만들어 냈다. 그는 쇼팽의 혁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 콩쿠르의 연습곡이었던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저번 주의 오이카와가 말하던 콩쿠르 내용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곡에 이름-혹은 별칭-이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호들은 클래식을 더 어렵게 만들곤 했다. 음악실 창 너머로 햇빛이 들어왔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같던 스가와라의 점심시간을 오이카와는 매우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이 퍽 좋았다.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날과 같은 설렘이 돋아왔다. 잔잔한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돋은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쉬웠다. 그의 귀는 오이카와의 음악소리만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에 내리 앉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멋있는 사람이었다. 봄철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상냥하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그가 예술 반의 하얀색 교복을 입고 있을 때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이카와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피아노 앞에 있을 때였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양 손을 마주잡았다. 그가 음을 만들어 낼 때 마다 손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혁명에 별칭을 붙인다면 아마 '지독한 불만을 담아'라는 이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랜드피아노 너머로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집중해, 라고 말하는 연주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귀 너머로 흘리며 그가 나간다던 대회를 검색했다. 이미 보도자료가 돌았는지 ‘두 사람’의 이름이 메인에 떴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오이카와 토오루, 콩쿠르의 왕좌는 누구에게? 스가와라는 소리 내어 기사를 읽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의 혁명은 짜증을 더해갔다. 오이카와, 그렇게 하면 혁명이라기보다는 ‘때 쓰기’ 같잖아. 그의 신경질적인 타건을 보면서 스가와라가 첨언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 오이카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그는 흰색 교복 상의가 불편했는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웬일인지 항상 갖춰 입고 있던 크림색 니트가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팔을 걷어붙이는 게 퍽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연미복 차림의 오이카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여기 여자애들도 없는데, 스가와라가 농을 걸자, 오이카와는 네가 있으니 괜찮다는 의미 불명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금 그의 혁명이 시작됐다. 스가와라는 그 일괄적인 음의 흐름을 들었다. 여전히 난폭하고 정제되지 않은 맛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들었던 우시와카의 ‘쇼팽 연습곡 op. 10-12 in c minor’을 떠올렸다. 난폭한 오이카와의 혁명과 다르게 고요한 맛이 있었다. 그 극도로 정제된 고요함 속에 흘러나오는 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그 곡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의자를 피아노 옆에 끌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앞에 두었다. 스가와라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5교시가 무슨 과목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고민을 깨트린 것은 오이카와였다. 아 진짜 짜증나, 오이카와의 다물린 입 너머로 말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 난폭함을 좀 더 다스리다가 손바닥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세게 쳤다.


   미처 음이 되지 못한 소리들이 한데 뭉쳐 올라갔다. 스가와라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이카와는 피아노 건반 위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눌린 건반은 아무런 음을 내뱉지 않았다. 머리 쓰다듬어 줘, 오이카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술 하는 애들은 다 이렇게 제멋대로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이와이즈미 군은 안 그러던 것 같은데, 스가와라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걔도 목 안 풀리면 성질 장난 아니라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자기 보온병에 누가 손대는 것도 싫어해, 하나마키는 누가 자기 바이올린 건드리는 거 싫어하고, 마츠카와는 첼로 때문에 면허 따는 걸 벼르고 있고, 그리고 쿠니미는 손에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고, 그리고, 킨타이치는 … 하며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친구들의 나쁜 버릇을 이야기 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꼬집었다.


   “누가 친구 험담하랬어?”

   “물어본 건 너잖아!”


   오이카와는 신경질을 내며 다시 피아노를 마주앉았다. 우시와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등을 세게 친 다음에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처음 그를 신경 쓰게 된 날 보다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부쩍 스가와라에게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콩쿠르를 주기로 일주일 전후가 가장 심하니까 피해 다녀, 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을 떠올렸다.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는 일등이 왜 하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혁명의 초입을 연주했다. 음이 끊임없이 질주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면 매력이 없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니 스타일대로 하는 게 어때?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듯, 오이카와는 음을 단정하게 쓰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 신경 쓰는 거구나. 스가와라는 머쓱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오이카와는 반복되는 주제부에서 다시 음을 세고 화려하게 가져갔다. 그 강한 음 위에서 놀아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트로피를 차지 할 수 있다는 말을 그의 손가락이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음이 뽑아지는 것부터가 신기 한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진짜 싫다- 하고 내뱉으면서도 음을 예쁘게 만들어 내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스가와라는 왜 그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하면 그게 끝인가, 그는 인문계인 자신이 알 수 없는 범위에 오이카와가 있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스가와라는 괜히 검은 가쿠란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더 좋게 위로 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혁명’의 마지막 음을 연주하고, 그의 가느다란 두 손이 건반 위에서 나가자 스가와라는 박수를 쳤다. 못한 연주에는 박수 안 쳐도 괜찮아 상쾌 군, 오이카와는 의기소침해서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듣기 좋았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둘만 있는 음악실에서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한 번 정도 더 연주하고 갈 수 있겠지? 그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동수업이지만.”

   “상쾌 군 이동수업이야? 근데 왜 안 가? 맞다, 오늘 수요일이지.”


   오이카와가 놀랐다는 식으로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서 치기나 하라면서 그의 팔목을 잡아 건반 위에 올려주었다. 오이카와의 음이 다시금 시작됐고, 그는 가만히 그걸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가? 그가 다시 물었다. 스가와라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는 시계를 확인 했다. 수업에 조금 지각할 것도 같았다. 그는 우카이 선생님이 오늘 기분이 좋길 바라면서입을 열었다.


   “너 피아노 치는 거 좋아서.”

   “방금 좀 느끼했어.”


   오이카와는 바로 대답하면서 음을 만들어갔다. 스가와라는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라면서 다리를 쭉 폈다. 오이카와는 그게 뭐냐면서 타박했다. 혁명의 강한 음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소녀의 기도’ 소리를 따온 수업 종이 울렸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끝낼 법도 하지만 그는 건반을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점이 오이카와 토오루 같아서, 스가와라는 좋았다.


   너 늦겠다,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스가와라를 일으켰다. 스가와라는 그의 하얀 교복 마이를 건네면서 별로?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잘 들었다면서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느긋한 걸음에 초조해졌는지, 오이카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니 오늘 수요일이니께 수학이자너, 그의 말투에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걸었다. 오이카와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일종의 ‘일탈’이었다.


   “오늘 어땠어?”


   헤어지기 전 복도에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5교시가 이미 시작 되었는지, 복도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연주회장 3층에서 듣는 ‘볼레로’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박자도, 음도 들리지 않지만 곧 몸을 키워내는 음악소리처럼, 두근거림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는 글쎄, 라고 머뭇거리면서 고백을 입에서 굴렸다.


   “정말 좋아.”

   “니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좋았어.”


   스가와라는 활짝 웃었다. 니 해바라기 닮았다. 오이카와는 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어떻게 하냐? 니 내 클래식 잘 모르는 거 알잖아. 스가와라는 투덜거리면서 그의 옆구리에 툭툭 잽을 날렸다. 오이카와는 옆으로 움찔대면서 그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니 연주 정말 좋아. 스가와라는 장난기 가득한 풍경에 진심을 던져 넣었다. 오이카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고만 하지 말아줄래?”

   “좋은 걸 어떡해.”

   “아 몰라!”


    오이카와는 복도를 달렸다. 예술동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 발소리가 세게 울렸다. 스가와라는 언뜻 본 오이카와 토오루의 붉어진 귓바퀴를 생각하다가 볼을 긁었다. 다시 스가와라 코우시의 세계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그는 햇살을 통과하는 먼지우주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귀여운 것도 같았다. 볼레로 같은 마음이 점점 제 몸집을 키워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보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붉어진 얼굴만큼, 뛰어가던 뒷모습만큼, 서툰 혁명만큼 오이카와가 좋았다. 스가와라는 괜히 볼을 긁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사히가 보낸 문자가 들어 있었다. 니 책 옮겨 놨어, 스가와라는 땡큐,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만 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달려간 반대쪽으로 달렸다. 햇살은 느리고 따듯한 박자로 움직였다.  

[카게스가] 아버지를 찾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서툴게 따라 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꾼 꿈을 바탕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어렵네요. 세터샌드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좋습니다. 단편으로 쓴 것 중에 가장 길게 나와서 당황스럽구 그렇습니다. 생각 한 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 못 해서 서러워요.. 역키잡 느낌을 내고 싶었ㅆ씁니다.....










***


    야치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원할 것처럼 켜져 있던 불빛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수신음이 길었다. 시미즈는 아직 깨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기묘한 생활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낮동안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관처럼 꾸며진 방은 여러 겹의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야치는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단지 독특한 것 뿐이었다.


   야치는 오늘 늦는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룸메이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퇴근하고, 잠에 들기까지의 단 몇 시간뿐이었다. 그는 오늘 잔업을 설명해야만 했다. 시미즈는 눈에 띄게 실망할 것이었다. 그녀는 안경다리를 매만지다가, 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겠지. 야치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상상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야치? 하고 묻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잔업이니?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광고를 내시는데, 그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시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피를 쓰기 위해서는 사연을 들을 필요가 있는 법이란다.


   시미즈는 조곤조곤히 이야기했다. 야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오늘도 사장님이 짙은 남색 벨벳 코트와, 모노클을 끼고 오셨냐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야치는 사장님의 ‘옷차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질 좋은 실크 셔츠와 남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양복을 입고 왔다. 그는 항상 양산을 받치고 있었으며, 가죽 장갑과 외알 안경을 상비하고 다녔다.


   별난 사람이었다. 야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빙글거리는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 시간 됐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병아리 같은 목소리구나, 그럼요, 그녀는 몇 가지 안부를 더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야치 씨, 하고 히나타가 그녀를 불렀다. 야치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사장실로 통하는 깊은 문을 열었다. 시미즈의 방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우리 사장 참 독특하지, 히나타가 야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야치에게 불빛이 나오는 건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녀가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작은 녹음기와 카세트테이프뿐이었다.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잘 다녀와, 그의 태양 같은 목소리에 그녀는 위안을 얻었다. 사장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장의 화내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기억했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힘 내. 히나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같은 문이 닫혔다. 그녀는 어둠속을 잔잔히 걸어갔다. 작은 등불이 그녀가 앉을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히나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의 취향이었다. 야치는 조금씩 그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카세트테이프를 장착했다. 그는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벨벳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항상 끼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놓은 채 였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잡아먹지 않으니 안심해도 괜찮아.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님, 야치 히토카입니다. 녹음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매뉴얼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 어스름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분위기는 죽음처럼 무거웠다. 장례식장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테이프가 가만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메모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뷰는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음악소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야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가 첫 마디를 때길 기도했다.


   “오늘 아침, 자네가 입사할 때 냈던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었어.”


   그는 한탄하듯 흘려 말했다. 야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학 시절에 썼던 레포트였다. 그녀는 사장이 그것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별다른 스펙이 없는 그녀가 바로 메이저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장의 젊은 외견과는 비교되는 취향이었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것을 좋아했다. 그는 아날로그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고전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야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괴짜 같은 말이었다. 그는 빛에서 멀어지듯,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어렴풋하게 촛불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얬다. 오늘은 화장을 하지 않았어,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소포클레스는 나보다 몇 세기나 나이가 많아.”

   “그렇죠.”

   “나는 거기서 위안을 느낄 때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야치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겠나? 카게야마가 말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벳으로 만든 자신의 양복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 끝에 닿는 감촉에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숨결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이 유리 안에서 반짝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쓸었다. 그는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네에게 손 끝 하나도 대지 않아. 나는 자네에게 이 거리 이상 다가갈 생각이 없다네. 위협이 들면 나에게 등불을 던져도 좋아.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이 선 육식동물 앞에 서 있는 감각이었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약속해. 그가 말했고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보호자에게 연락은 했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미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에게서는 그녀와 같은 느낌이 났다. 겨울철 나무수국처럼 비쩍 말라버린, 수분 따위 없는 그 건조함이 닮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룸메이트와 같은 느낌이라 생각 하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 할 때 질문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지시했다.


   “네 기준에서 늙은이라서, 풀어 놓을 이야기가 많아. 늙은 사람은 보통 자신의 말이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세월을 기억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부터 힘들어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질문이나 의문점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을 ‘세월’이 얼마나 큰지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는 공고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허락받은 칸을 생각했다. 가로 10cm에 세로 5cm. 그 작은 공간 안에 담길 추억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앞자리에 있는 물을 가리켰다. 그녀는 물병을 쥐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물병 소리조차 나지 않게 해주게. 그의 요구에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한 밤하늘 색 벨벳 재킷에 오렌지빛 등이 들었다. 그는 그게 거슬리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등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게. 나는 불을 피울 수 없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준비 되었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고아였네. 나의 아버지는 이런 나를 거두어준 분이지.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코우시, 일본 출생이지만 우리는 영국에서 살았어. 나는 왜 내가 동양인임에도 그 곳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이런 몸을 가지기 한참 이전의, 일이니까. 나는 스가와라의 화동이었네. 화동을 알고 있나? 요즘 ‘화동’이라는 말은 결혼식장에서 주로 쓰이곤 하지. 버진로드의 앞자리를 채우면서 꽃을 뿌리는 아이들을 의미하곤 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의 화동은 아니었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어. 나의 아버지, 앞으로 스가와라라고 지칭하겠네. 내 아버지는 두 사람이니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메모지가 있다면 메모해도 좋아. 자네의 앞자리에 놓아두라고 히나타에게 부탁했으니까. 그래, 내가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적어두게. 아무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부들이 모이는 장소로 갔네. 마차를 꽃으로 장식하는 게 예의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곳은 꽃을 파는 집시들이 모이곤 했지.”


   야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라고 하셨나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서나 쓰였던 이동수단의 이름이 생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옛날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야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니, 실로 괴물이지. 마차가 자동차가 되고, 그 자동차마저 비행기가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세월에 갇혀 지내는 짐승이니까. 자네의 시간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해하네.”

   “이해하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나?”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체처럼 말라가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미즈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하고 묻고 혼자 그 답을 찾아냈다.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겁이 나면 등불을 쥐게, 그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등불은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숨결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얇은 유리막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등불 뒤에 달린 숨구멍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노련하게 그를 배려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쓸었다. 인간적인 행동이었기에 야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꽃을 좋아했어.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것은 짧게 호흡하고 짧게 져버리는 생물이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생물이지 않나, 나는 그것들을 매일 아침 화병에 꽂아 놓는 일을 했네. 어린아이가 한 아름 품에 안아봤자 얼마나 안을 수 있겠나? 나는 맨 손으로 갔다가 바구니 두 개에 꽃을 실어 움직였어. 실로 비효율적인 인사人事였지만 나는, 스가와라가, 내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이제는 알고 있어. 어린아이가 뛰어다닐 때 그 작은 심장이 뛰는 것이 퍽 신기했던 것이지. 낮에는 그가 자느라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밤이 가까워 오고 어스름이 질 때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는 마치 시계처럼 그를 잠에서 깨웠겠지.

   그는 시체처럼 잠을 잤어. 아니 시체, 그래 시체야. 우리의 심장은 네 것처럼 뛰지 않으니까. 꽃을 살 때는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 백작님 앞으로 라는 인사를 했단다. 나는 집시들의 유명 인사였어. 매일 아침마다 꽃을 사러 왔으니까. 마차에 처음 꽃을 장식할 생각을 한 것도 나의 아버지였어.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했으니까. 실로 감상적인 뱀파이어, 가 아닐 수 없었지. 오래 살다 보면 으레 하게 되는 일이지. 그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영원히 그 시절에 고정당해 있었어. 지금의 나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치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그녀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국, 스가와라 백작, 화동. 그녀는 몇 가지 키워드를 메모했다. 그는 그것을 다 적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제 먹은 반찬을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야치는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이 어떤가? 그가 농담을 건넸다. 야치는 심장이 떨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무슨 느낌인지 잊어버렸어. 그는 연극 배우처럼 웃었다.


   “내 아버지는 꽃이 많이 필요했어. 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과 친구였지. 그들의 아버지와도 친구였어. 그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경조사에 꽃과 돈을 보냈네. 「미스터 메이플에게, 자네의 결혼식에 꽃을 보냈던 것이 어제인 것 같고, 당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낸 지가 바로 정오 같은데, 이제는 자네의 장례식에 꽃을 보내네.」 라는 메시지와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지. 이걸 전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네. 어린아이가 반바지와 스타킹을 신었을 때부터, 벨벳으로 된 정장을 맞출 때 까지 내 일이었어. 아직도 그의 필체와, 그가 하던 서명이 기억나네. 아직도 죽지 않은, 스가와라 코우시로부터. 블랙 유머였지.

   스가와라는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지. 햇빛을 보기 싫어했어. 관처럼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다가, 내가 사온 꽃들을 보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 그는 항상 나한테 이렇게 말하곤 했어. ‘어린아이는 볼레로처럼 자라는구나.’ 하고. 그 때 라벨의 곡을 좋아했는데…, 그 때 마다 나는 물었지. 멍청했으니까. 그럴 때면 스가와라는 태양과 가장 먼 존재인 주제에 햇살처럼 웃었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어. ‘볼레로는 처음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점점 그 몸집을 키우잖니. 눈치 채지 못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처럼. 너는 꼭 그렇게 자란단다.’ 하고.

   어린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나는 매번 그의 무릎에 앉아서 스가와라 씨, 나는 얼마나 자랐나요? 오늘도 자랐나요? 볼레로처럼? 하고 물어보곤 했어. 날 향해 웃어주는 그 얼굴이 좋았네. 사랑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사랑이었네. 지독한, 짝사랑이지.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단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시체처럼 차가웠지. 냉한 겨울밤 같았어. 마른 자작나무 같기도 했지. 그러나 나는 그게 이상한다고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나는 그가 스라와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야치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잠시 멈추겠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슬퍼 보였다. 그는 잠시 일렁이는 불꽃을 쳐다보다가, 제 손목을 매만졌다. 항상 실크 셔츠로 가리고 있던 부분에 두 개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아닌가?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 살았어, 그리고 오래 살 거야. 카게야마는 별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야치, 너와 히나타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고, 너희의 아들들에게 화환을 보내겠지. 나는 너희의 장례식에도 꽃을 보낼 거야. 아마 결혼식에 보냈던 것과 닮은 꽃이겠지. 내 나름의 유머니까, 그리고 이렇게 서명하지 않을까. 아직도 죽지 않은, 카게야마 토비오로부터. 그는 농담을 하는 듯 웃었다. 그의 목 끝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야치는 공감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 할 거야. 그가 통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쌓였음에도 그의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야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무섭지 않나? 카게야마가 질문했고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 끝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그는 잠시 멈추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가끔 외출을 했네. 밤이었고, 우리는 사냥을 나갔어. 그는 라이플을 가지고 있었네. 은으로 장식된 건 아니었어. 금으로 세공 된 것이었지. 그는 거기에 납으로 만든 총알을 채워 넣고 다녔지만 한 발만은 은이었지.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모든 탄환이 은이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어.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을 속삭일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스가와라에 대한 것들은 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지.

   그는 명사수였단다. 프록코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사냥을 했지. 탕, 하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총에 맞은 짐승들을 찾으러 갔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단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개들이 피를 먹게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찾은 사냥감들은 피가 하나도 없었어. 그가 마신 것이었지. 아니, 마신 것이겠지. 내 가정이지만. 그 때 마다 나는 그에게 물었어. 왜 이렇게 되었나요? 그는 능숙하게 말했지. 은으로 된 탄환을 써서 그렇단다. 은은 피를 마시지.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빛났단다. 달빛은, 환한, 은색이지.

   나는 은색이 그의 색이라고 믿었어. 그의 성에는 은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또한 겨울의 눈 색이 그라고 믿었어.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닮은 색이지. 그는 나의 세계였고,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순애의 대상이었어.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지. 더러운 영국의 뒷골목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였고, 나에게 그의 이름에 쓰인 언어, 그러니까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것이었지.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어. 나는 내 이름에 쓰인 글자를 퍽 좋아한단다. 그가 나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지. 이름이란, 대단한 물건이야.

   그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의무였다. 나는 볼레로처럼 그에게 젖어들었어.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소리로 들리지도 않던 소리로 노래하던 마음은 그렇게 점점 처졌단다. 내 음악이 온전히, 오롯이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안 건 어느 양복점이었어. 구름이 겹겹이 낀 어느 날 그는 검은색 양산을 들고 외출을 나섰단다. 그는 검은 모자를 썼어. 여성용이었지. 장례식에 나가는 것처럼, 그의 흰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검은 레이스가 가리고 있었어. 그는 검은 코트를 입었지. 벨벳이었다.

   늙은이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해.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청년기를 관통했던 물건이라고 생각하곤 하지. 그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인지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뒷골목에 있는 낡은 양복점으로 들어왔단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면서 노부부는 호들갑을 떨었어. 그들은 ‘메이플’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단다. 그들은 스가와라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 양장점의 불이 꺼졌고,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노파가 물었어.


   오늘도, 스가와라님의 양복을 맞추십니까?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어. 달빛이 흔들렸고, 내 세계가 흔들렸지. 이 친구의 양복을 맞출 거야, 벨벳으로, 가장 좋은 벨벳으로. 그는 노래하듯 말했어. 그는 오랜만에 외출에 기분이 좋아 보였지. 집에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꽃을 끌어 모아 화병에 급히 꽃은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서 사이즈를 쟀지. 나는 그 때, 백 팔십 센티미터였어. 지금과 똑같은 키고, 똑같은 몸무게였지. 아드님이 건장하시군요, 노인은 내 뛰는 심장을 신기해 하며 물었어. 스가와라는 예쁘게 웃으면서 장성하였지, 하고 키득거렸단다.

   기묘한 광경이었어.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분은 거의 없어진 시기였지.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여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어.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존대를 쓰며 몸을 굽실거리는 모습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스가와라 코우시는, 스가와라는, 코우시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세계였고 절대적인 존엄자였다. 그는 양복이 완성 되면 직접 받으러 올 거라고 대답했어. 메이플 부부는 부디 날이 계속 흐렸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지. 그는 그 농담에 머리를 숙여 인사했단다. 실로 우아한 광경이었지,

아직도 나는 그 때의 꿈을 꾼단다. 영원을 사는 자들은 추억에 기댈 수밖에 없어. 모두가 변하는 그 상황에서 혼자 변하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야치는 그가 느낄 고독을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 오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야기는 더 길거야, 역사책 같은 이야기지. 그의 배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치는 녹음하던 테이프를 멈추고서 등불을 들었다. 히나타에게 말해 두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야치는 그가 핸드폰에서 펜을 꺼내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왜 카게야마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그녀는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난데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파자마파티를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그녀가 문에 도착할 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히나타도 알고 있었어? 야치가 물었다, 히나타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셋만 끌어안고 있는 비밀이야. 그 ‘비밀’이라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 속의 ‘메이플 부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에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야치는 다시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도망칠 줄 알았다. 카게야마의 말에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니까요, 하는 이야기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그의 웃음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손을 매만졌다. 물이 닿아 일시적으로 온기를 빼앗긴 탓이었다. 야치는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는 다시 비밀을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한 것이 또 하나가 있네. 왜, 그가 인간에게 접근했고, 나를 길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어. 나는 이 사색을 백 년 가까이 지속했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답을 할 수 있었어. 영원을 사는 존재는 변화에 무뎌진단다.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혹시 나날의 자그마한 변화에 관심을 둔 적이 있는가? 어제 봉오리 져 있던 목련이 오늘은 소담스럽게 꽃을 틔우고, 그 꽃잎이 내일 혹은 일주일 후에 떨어져서 갈색으로 변하는 광경에 시선을 둔 적이 있는가? 그런 사소한 변화도 몇백 년이 쌓이다 보면 특별할 수 없는 일이 된단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야. 인간은 백 년 가까이 삶을 지속하지. 사유하는 동물이야. 어제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며, 어제의 호흡과 내일의 호흡이 다르지.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변화해. 달이 줄어들고 차오르는 것 같은 기계적인 변화가 아니야. 또한 심장소리, 그 심장소리를 가지고 있단다. 나와 가장 닮았지만 다른 존재가 인간이지. 그 성장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사치이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표현하는 시계와 같은 일이지.

   그래서 먹지 않고, 기다렸던 거야. 참아가면서, 또 참아가면서. 스가와라 또한 그랬을 거야. 내게 이 대답을 알려준 것은 히나타였어.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단다. 그에게 꽃 심부름을 시킬 수 없었지. 대신 나는 그에게 신문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어. 그가 커가는 과정을 눈 안에 담고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이자 내 사랑, 내 영원인 스가와라를 이해할 수 있던 거지. 영원이란 존재는 이렇게 미련하단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까? 다행이 양복을 받은 날도 짙은 안개와 구름이 함께 하는 날이었단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내가 날씨를 이야기 하자 그는 소년처럼 기뻐했었다. 그 웃는 얼굴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그래 뛰게 만들었었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듣는 것 같았어. 첼로 같은 선율로 사랑했었고, 그 반주를 하는 피아노의 음색처럼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

   그와 나는 같은 마차를 탔어. 그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자신의 아들로 설명했지. 마차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어. 네가 점점 더 커간다면, 너는 나의 아버지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 그는 영특했고,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그 양복점에서 메이플 부부에게,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단다. 물론 부정적인 사실이었지. 베토벤의 「운명」처럼 난폭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였단다.

   미스터 오이카와께서 서신을 남기셨어요. 노파는 그렇게 말했어. 스가와라는 동요하지 않았지. 그는 천천히 시간을 들였어. 내가 벨벳 양복을 입은 걸 바라보았지. 그는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었단다. 그의 눈 색과 닮은 호박이었어. 그 보석은 송진이 박제된 거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위에 달린 브로치는 제법 멋있었어. 나는 화동에서 이렇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게 들떠 있었지.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처음 말한 그 ‘사랑한다’로 받아들였지. 나도, 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단다.

   아픈 말이지. 아픈 말일 수밖에 없어. 내가 들었던 유일한 대답이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소리였으니까. 내가 기억할 때 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착각’이라는 말이 따라온단다. 나는 그 말이 싫어. 네가 쓴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착각’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었어. 물론 다른 말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소포클레스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어쩜 그렇게, 욕망을 담고 있는지. 인간들이 고전에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다고 말했지. 미스터 오이카와 때문인가요?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어. 그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단다. 나의 아버지야,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려 있었다. 그는 그의 라이플에 은제 탄환을 가득 채웠어. 그 탄환을 채운 것은 나였다. 그가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지. 그는 나의 그 행동에 감사했어.

   나는 그에게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사랑이었지. 그는 고개를 저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란다. 나는 짐을 쌌어. 그가 만들어준 양복은 가방 가장 안쪽에 넣었지. 그는 마부를 고용했다. 메이플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달라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바라지 않았어. 그는 보석들을 챙겨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 그 때, 증기선이 막 만들어졌던 때였어. 그는 증기선 두 표를 끊었단다. 급하게 끊었기 때문에 후미진 삼등석 방이었어.

   우리는 열흘 후에 출발하는 그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다시 기반을 찾기로 한 거지. 그러나 언제나 운명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오이카와’의 짓이었어. 무언가 질문이 있나?”


   야치가 손을 든 것을 발견하고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까, 처음에,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장님께서 찾고 있는, 그녀의 지적이 반갑다는 듯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거야. 너는 꽤나 좋은 청자로구나.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궁금한 게 끝났냐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벅찼다.


   “중간에 마부가 도망쳤다. 말들이 죽었어. 그는 그걸 허탈하게 보면서 오이카와의 짓일 거라고 말했지. 숲 속에는 동물들이 없었고 햇빛이 들어왔단다. 나와 그는 밤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간이었고, 그는 나 때문에 느리게 걸었지. 그는 심하게 배고파했어. 허기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의무와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힘들어서 멈춰 서 있을 때 그는 숲을 돌았어. 아무것도 마실 게 없다는 걸 알고 그는 나무수국처럼 웃었지.

   우리는 버려진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 성모상이 나와 그의 위에 있었단다. 자애롭게도 팔을 벌리고 있었지. 나는 그에게 팔을 내밀었어. 나를 마시고, 도망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게 마셔져 죽는 것을 희망했다. 지금 나이로 갓 고등학생이었어. 그 때는 성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피를 마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로, 내 손목을 세게 그었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그는 매우 갈망했어. 지독한 갈증이 피어올랐고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그 광경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천사, 나의 영혼, 나의 불꽃, 나의 모든 일렁이던 세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를. 그는 작게 난 내 상처를 서툴게 핥았다. 나는 그와 섹스하는 기분이었어. 지독한 오르가즘이 내 몸을 가득 채웠지. 나를 비워 주세요, 내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울면서 나를 마셨어. 그의 하얀 피부를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더럽혔고,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살갗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흡혈의 순간은 황홀했단다. 나는 어지러웠고 그는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어. 그는 자신의 송곳니가 나에게 상처를 낼 까봐 무서워했어. 이상한 일이었지. 뱀파이어인데,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인데! 자식에게 못된 짓을 한 아버지 같았지. 그가 핥은 상처는 멎지 않았어. 나를 죽여줘요, 나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했어. 왜냐하면, 내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게 가장 베스트였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부성애든, 미물을 사랑하던 자비던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은 매우 달콤한 일이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끝이 결국 자살인 것도 그와 같아. 사람의 기억은 끊임없이 마모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잊히는 것을 슬퍼한단다. 모순된 일이야. 기억되려고 하고 끊임없이 이름을 만들지.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고 그는 착한 아이야,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오이카와’의 손길에서 벗어나길 바랐을 뿐이었지.

   스가와라는 나를 성당 바닥에 눕혔어. 나는 그의 얼굴과, 성모상을 바라보았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도피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어. 그는 나의 손목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지. 나는 그가 도망친 줄 알았어.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끊기려던 시점에 나의 또 다른 아버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완벽했겠지.


   그는 나를 보면서 웃었어. 나의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것은 분명이 악마였지. 그는 나를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면서 웃었어. 오이카와는 입에 스가와라의 이름을 담았지. 안녕, 난 네 아버지가 될 오이카와 토오루란다, 너의 스가와라가 나에게 울면서 부탁했어. 뱀파이어가 우는 걸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너는,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강제로 의식을 붙들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는 나의 손목을 보았다. 나는 내 손목을 감추었어. 대단한 사랑이구나,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나의 멱살을 잡았지. 그는 내 피를 밟고, 내 목에 입을 맞추었어. 그의 송곳니로부터 피가 빨리는 게 아니라 독이 들어왔다. 뱀파이어의 피였어. 그는 자신이 나의 아버지가 될 거라 속삭였지. 라벨의 「현악 사중주, F장조 2악장」처럼 내 심장에서 독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날 이후 라벨을 듣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는 내가 변화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봤어. 성당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잠들지 않았지.

   나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견뎌냈어. 그는 내가 모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사랑했고, 나 때문에 스가와라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하지만 내 볼모는 스가와라였지. 그가 담보가 되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어. 그가 없어진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는 빈 껍데기였다.

   오이카와는 여자를 잡아왔다. 손목을 무는 것도 베스트야, 그는 나에게 뱀파이어로서의 기본 자질을 알려 주었어. 나는 그렇지만 목을 물었다. 상처를 크게 내어 피를 빨았어. 손목은, 나의 순수한 사랑의 장소였다. 그는 그 때 마다 나를 비웃었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를 떠나갔어.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스가와라가 남긴 보석을 바꾸어 증기선의 일등석 칸을 예약했다. 나는 파티에 나갔고, 매너 있는 신사인 척 행동했다. 여자를 잡아 그들의 피를 빨아 버렸어.

   돈이란 건 대단하더구나, 왜 뱀파이어들이 재물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지. 나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여자들이 사라졌지만 내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더군. 여자들은 끊임없이 다가왔고 나의 식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목을 물었어. 섹스의 전초전 같은 느낌으로, 애무하듯이. 그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다 죽어갔다. 나는 프랑스에 갔고, 거기에서 노인들을 꼬셔냈어. 노인이란 어린아이에게 친절하지. 나는 그것마저 이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스가와라를 만나야했어. 그것이 나의 삶의 이유였다.”


   무섭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의 순애에 눈물지을 뿐이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사람의 부분이 남아있다는 거야. 카게야마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야치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비효율적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거란다. 카게야마는 담담히 쏟아냈다.


   야치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쯤,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계속 해도 괜찮겠니, 그는 아이에게 묻는 것처럼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 같구나,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작고 여린 동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시미즈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이름을 꺼냈다. 그렇구나,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롤리타」의 앞부분을 기억 하니?”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 리- 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카게야마는 연극배우처럼 책의 첫 문장을 읊었다. 야치는 짧게 떨었다. 똑똑한 아이구나, 카게야마는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둘 사이에 쌓인 서사들이 그녀가 그 문장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야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자작나무 같을 것이라고 짐작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안타깝게 읽었고, 재미있게 읽었어. 나는 그걸 쓴 게 사랑을 하다 영원에 박제당한 뱀파이어인줄 알았다. 스가와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 정도, 그 느낌이었어.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를 잠식할 듯 태워가면서 나를 살아있게 만든 욕망. 언론사를 차린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모든 정보들을 매일 아침 히나타에게 가져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오이카와 토오루, 늙지 않는 사람! 어둠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길 가장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신문사였으니까.

   그래서 광고를 내고자 했다. 스가와라, 라는 이름, 그리고 코우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자 했지. 이 결심을 한 것은 얼마 전 깨달았던, 그가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부성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삶의 이유였던 적이 있어. 이렇게 변한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한테 남아 있는 영원만큼 그를 갈구할 거란다. 그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지.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고집이 늘어가는 거란다. 내 입 속에서 스가와라, 라는 이름이 발음될 때 마다 나는 그를 욕망한다. 욕망 할 수밖에 없어. 너의 그 칸에는 이 이야기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 십 센티미터와 오 센티미터, 그 작은 공간 안에 내 이야기를 담는다면 쌀알에 글씨를 새길 정도의 글자로 이야길 해야 할 테니까. 너는 다만 세 문장을 적어두면 된단다.“

   “무슨, 문장인가요?”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


    야치는 그 문장을 포스트잇에 받아 적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정의 된 이름 속에는 여러 사연이 스며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잔떨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치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떨림이 어떤 느낌으로 비춰질 지를 고민했다. 그 세 문장은 욕망이자, 욕정이자,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야치는 그들이 겪을 영원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녀는 그 지독한 콤플렉스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것을 눈여겨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아버지를 살해 할 건가요? 그녀가 주제넘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네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앞에는 파멸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도 살아있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너희의 결혼식에 축하 화환을 보낼 것이니. 그는 옛날 사람처럼 말하였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그의 마지막 마침표에 야치는 녹음 되어있는 테이프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그는 자애롭게 말했다. 그의 웃는 모습은 그림자처럼 서늘했다.


   “너는 평소처럼 너의 룸메이트에게 가서 오늘 있었던 ‘비밀’을 이야기하면 된단다. 너의 룸메이트 또한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게야. 너를 채용한 건 그녀 때문이었어. 그녀의 소문과 작은 논문, 네 친절함에 기댔던 거다. 세월을 먹을수록 결과만을 중요시하게 된단다. 오이카와가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결국 그의 손아귀에 스가와라가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나도 내 최선의 결말만을 남기고 싶을 뿐이란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불렀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야치의 태양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 안을 나섰다. 카게야마는 관처럼 만들어진 제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의 숨은 깊었고, 또 깊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 틈 새로 들어오는 인공적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 한 후였다. 카게야마는 빛 사이로 나아갔다. 조명은 그에게 티끌 같은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빛에 카게야마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돋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기원을 생각하며 웃었다. 스가와라처럼 웃고 싶어 세월을 들여가며 연습한 결과였다. 그는 벨벳 코트를 입었다. 그의 목을 장식한 레이스에는 호박 브로치를 달았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빛을 원한다. 그렇지만그 빛은 또 다른 그림자를 낳을 뿐이었다. 빛에서 파생된 작은 어둠.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다만 추측하고, 또 추측했다.


   어디선가 볼레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는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었다. 끊임없이 반복하며 몸집을 키워가는 영원의 사랑처럼. 카게야마는 살포시 웃었다. 그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박제 된 나비와도 같았다. 그는 제 맘속에 품고 변주해간 마음을 생각하다가 뒤를 돌았다. 피 냄새가 요란하게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변하지 않는 밤하늘만큼이나 지독한 어둠이었다. 달빛이 내는 은색만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카게스가] 부스 바깥, 너

  얼마 전 달성표 보상으로 슈님이 청바지에어 롤팀 유니폼을 입은 카게스가를 그려주셨었어요! 근데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롤팀인 카게스가를 써보고 싶었는데 장렬하게 망했습니다... 엉엉 후로게이 카게스가가 보고 싶어요.....안선생님....... 

   지금 롤 리그는 단일팀 풀리그제지만... 토너먼트 2팀제를 생각하며 썼습니다... 프로스트와 블레이즈가 보고 싶은 밤이네요.








***


   세상에 지고 싶은 선수는 없다. 스가와라는 대기실로 나왔다. 메이크업을 마친 얼굴은 언제나 어색했다. 그는 거울을 보다가 츠키시마의 옆에 앉았다. 그의 원딜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마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다이치와 타나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우카이 코치의 얼굴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타케다 감독은 그에게 니코틴 패치를 권했다. 앞 경기는 분명 형제팀 카라스노 B의 경기였다.


   어떻게 되고 있어?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츠키시마가 대답했다. 제왕님께서 크게 실수했어요, 덕분에 전멸해서 많이 불리해졌구요. 그의 그 빈정거리는 어투에 다이치가 주의를 주었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카라스노 블랙의 글로벌골드가 뒤쳐져 있었다. 아까 용 한타에서 완전히 말아먹었어. 코치가 방금 나온 그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스가와라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끝이 굳는 느낌이었다.


   츠키시마가 말없이 그에게 핫팩을 건넸다. 역시 원딜이 챙기는 건 서포터 밖에 없네, 타나카가 웃으며 말했다. 츠키시마는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 나름의 ‘부끄러움’운 표시라는 걸 스가와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원거리딜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카게야마 선수 또 잘립니다! 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으면 안 되는 순간이었다. 대기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스가와라는 코치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다행이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핫팩으로 손을 데우면서 어젯밤 식당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열기가 손에 옮아와야 했으나 손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긴장돼요? 츠키시마가 물어왔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기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제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그의 귓속에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핫팩을 꼭 쥐었다. 다시 한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잡은 챔피언은 ‘애니’였다. 그는 그가 부디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애니는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네코마를 깨기 위해서 카게야마가 연습한 히든카드였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


   어젯밤 카게야마는 새벽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새벽이 다 가도록 큐를 돌렸다. 보다 못한 코치가 컨디션 관리를 이유로 컴퓨터 전원을 뽑아버리자, 카게야마는 숙소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그는 이층침대의 윗칸에서 자고 있는 스가와라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연습을 좀 더 하고 싶은데 B 연습실이 잠겨서요, 혹시 선배의 컴퓨터를 쓸 수 있을까요? 그의 제안에 스가와라는 눈을 비비며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너 오늘 경기 있잖아, 하면서 스가와라는 식탁 의자에 고집을 부리며 앉았다. 식탁 위에 달린 무드등으로 본 카게야마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승률 때문에 그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포터 포지션 선수 중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소속된 세죠 프로스트와의 경기 이후 카게야마는 ‘폼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무언가에 잠식 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유니폼을 입을 때 마다 그 때의 경기가 오버랩 된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자 게임을 할 때는 괜찮지만, 팀 경기로 들어갈 때 마다 손이 떨린다고 말해왔다. 데뷔한지 한 시즌 된 게이머 후배의 고민을 스가와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는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어요.”

   “선수라면 누구나 다 그렇잖아?”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 피어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에 내리 앉은 다크서클이 신경 쓰였다. 카게야마는 누구보다도 열의가 가득한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LOL은 팀 게임이었다. 한 사람만 잘해선 이길 수 없었다. 카라스노 블랙을 이루고 있는 엔노시타, 니시노야, 히나타, 카게야마가 모두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승리라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LOL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명확하다. 팀 게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두 가지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좀 더 팀을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솔로랭크 1위를 차지했던 이 서포터는 경기가 어려워지면 팀 전체를 자신이 이끌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문득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손에 깬지 얼마 안 된 스가와라의 체온이 닿았다.


   “선배?”

   “네 긴장감은 내가 다 가져갈게.”


   뭔가 부끄러운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부스 안에 들어갔을 때 긴장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야. 그는 나름대로 카게야마를 위로하려 했다. 그의 큰 손을 스가와라의 손이 감쌌다. 카게야마의 손이 미지근해졌다. 솔랭 좀 더 돌리다 잘 거야?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자러 가요 하고 말하는 그의 뒷목이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카게야마가 따라갔다. 카게야마가 먼저 침대에 들어갔고, 스가와라는 침대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카게야마의 서포팅이 굉장하다고 생각해. 신인인데도 오이카와한테 전혀 밀리지 않았고, 그는 조곤조곤히 이야기 했다. 카게야마가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층침대 아래의 그가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


   스가와라는 핫팩을 꼭 쥐었다. 다행이도 팀은 잃었던 이득을 챙겨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은 한타를 앞두고서 시야장악을 했다. 카게야마의 긴장된 얼굴이 화면 가득 비춰졌다. 그는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더니, 입고 있던 유니폼의 팔을 걷었다. 카게야마의 긴장감이 옮아왔는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츠키시마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온전히 마지막 경기에 향해 있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승점 1점은 가져갈 수 있으니 동반 16강 진출도 바라볼 수 있었다. 16강에서 같은 조였던 팀과는 만나지 않으니, 넓게 바라본다면 결승에서 맞붙을지도 모른다. 그는 카게야마와 같이 호흡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했다.


    용쪽 부쉬로 네코마의 챔피언들이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용 쪽 섬부쉬에 숨어있었다. 들어가도 좋다는 콜이 난 듯, 그는 앞으로 점멸을 타서 이니시를 걸었다. 티버가 환상적으로 들어갔습니다, 네코마 3인 스턴! 여기에서 엔노시타가 들어갑니다, 리산드라 궁극기가 상대를 묶습니다, 그리고 히나타의 트리스타나가 프리딜을 하고 있죠, 잘 큰 트리스타나입니다! 해설진의 목소리가 가빠졌다. 곧 화면에 모든 적을 처치했다는 글자가 나타났다.


   나이스! 대기실이 함성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들은 미드를 뚫고 상대 억제기를 뚫었다. 다섯 명 전원이 생존 해 있었기 때문에 타워의 공격을 받아가면서 넥서스까지 파괴했다. 카라스노 B팀의 승전보를 외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스가와라는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방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가장 끝자리로 서둘러 다가갔다.


   “카게야마!”


   카게야마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는 팔을 내밀었다. 카게야마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팔을 뻗었다. 마주잡았던 손만큼 뜨거운 포옹이었다. 스가와라의 환한 웃음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겼어! 하고 말하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걸릴 듯 말 듯 한 것 같았다.


   스가는 서포터만 챙기고 치사하구나, 부스 안에서 아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꼭 끌어안으면서 대견한 후배를 칭찬하는 건 선배의 몫이라고 크게 말했다. 카메라가 그들의 포옹 장면을 클로즈업 하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스가와라는 다시 카게야마의 품에 포옥 안겼다. 카게야마 또한 그의 등에 어색하게 팔을 둘렀다.


   스가와라 선배, 하고 카게야마가 그를 불렀다. 끌어안은 통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로 으,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말할 게 있으면 해, 나 키보드 세팅해야 해. 스가와라는 그를 재촉했다. 카게야마는 오늘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그는 눈을 마주치면서 당연하지! 하고 내뱉었다.


   “그럼 이번엔 니가 내 긴장 가져 가!”

   “네?”

   “어젯밤에 내가 가져갔잖아.”


   스가와라는 상쾌하게 말하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멍해 있다가 가져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청춘은 좋네, 하고 뒤에서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 세팅해야지, 카게야마 어서 방 빼라, 그의 충고에 카게야마는 얼른 컴퓨터에서 제 키보드와 마우스를 빼서 넣었다. 그는 황급히 퇴장했다. 츠키시마는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긴장하던 건 어때요?”


   츠키시마가 하얀 키보드를 꺼내며 물었다. 그는 히나타가 앉았던 자리에 자신의 키보드와 마우스, 헤드셋을 늘어놓고 세팅했다. 스가와라는 츠키시마와 맞춘 키보드를 가방에서 꺼내 내려놓으며, 이젠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왕님이 ‘긴장’을 가져가서요? 그가 빈정대면서 묻자 스가와라는 그의 옆구리를 손날로 때렸다. ‘짓궂은 말투 금지!’ 라는 이유였다.


   그는 키보드를 연결했다. 키보드에 무지개 색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는 하얀색 마우스를 연결하고 선을 정리했다. 스가와라는 손끝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오늘 좀 컨디션 좋은 게 나 하드 캐리 할 것 같아. 스가와라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원딜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게야마가 긴장을 가져간 게 효과가 있었나, 스가와라는 핫팩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츠키시마는 마우스의 감도를 조절하면서 핫팩 때문이겠죠,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모니터 밝기에 손을 댔다. 정말 긴장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그들에게 밴픽을 설명하기 위해 부스 안으로 들어온 우카이 코치가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면서 카게야마 덕분에요, 하고 말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