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벚꽃 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

 권태롭고 지루한 오이스가가 보고 싶었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이에요. '꽃샘추위'라는 주제를 받았었습니다.





***


   봄이 왔다. 바라던 봄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리벽 너머의 거리에서,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유연하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다가, 숨을 내쉬었다. 잔에 담긴 커피의 수면이 흔들렸다. 꼭, 저 같은 흔들림이었다.


   이번 봄은 춥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너무 따듯하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역시 뜨겁지 않았다. 그의 수려한 외모는 요즘 들어 수척해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많이 말랐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의미를 가진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상 힘든 일이었으나, 그는 반드시 그러고 싶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늦게 오느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약속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안해, 오이카와.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말간 미소였다.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모습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지리함이 단순한 권태라 믿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청춘이 퇴색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미성숙한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에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 권태라는 단어에는 이 미련들을 다 넣을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찻잔을 보면서 오이카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이카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예전처럼 뜨겁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스가와라는 쉽게 대답 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권태'나 '익숙해짐' 이라는 익숙한 단어들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이 헤어짐의 전초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는 종말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매끈했던 입술이 꽃피는 봄 잠시 찾아 온 추위에 터 버리는 과정과 같았다. 언제나 상처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는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무게있는 걸 생각했다. 네 번째 약지에 끼워져 있는 커플링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변기에 넣고 내리는 상상을 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쏟아지는 물에서도 백금 반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지루한 사랑에서 퇴색되지 않는 것은 그 반지 뿐일지도 모른다. 미약한 반짝임과 부질없는 약속을 매일 성실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에는 잡초가 자란지 오래였지만, 이미 습관이 된, 그 행위는 멈추기 힘들었다. 사랑보다 습관적인 것은 일상이며, 그 일상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게 돕는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 함께했던 모든 비일상을 떠올렸다.


   같은 성별, 같은 지역 출신. 이 두 가지 단어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비일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제법 열렬하게 사랑했다, 스가와라는 사랑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따듯하게 내리쬔 햇살에 드러누운 고양이가 보였다. 복슬복슬한 꼬리는 끊임 없이 아스팔트를 때렸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 같았다. 사랑 또한 저렇게 귀찮은 과정을 동반한다.


    사랑을 하면서 잃어버린 일상을 복구하려면 얼마의 시간을 들여야 할까. 오이카와는 의외로 궤도에 쉽게 정착할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잔을 매만졌다. 잔 안에 들어있는 음료는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영원히 뜨거운 것은 없음으로 그들의 사랑 또한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 라는 말을 스가와라는 입에 머금었다.


   놀랍게도, 어색했다. 이 말을 처음 쓰지 않았던 날이 언지였던가. 스가와라는 천천히 반추했다. 카페 안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다섯 번 쯤 끝을 고했을 때야 그는 그 시작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목이 뻐근했다. 숨이 찼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말이 그의 목에 천천히 매달렸다.


   익숙한 권태일 거야. 가끔식 찾아오는 거고, 봄에 귀속된 꽃샘추위 같은 거지.....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어. 나는 여전히 코우시를 좋아하고, 너도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의 그도, 저번 주의 그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벚꽃 같은 소리였다.


    한참 몽우리진 꽃망울을 시샘하기에 하늘은 바람을 보낸다. 피기 전에 흐트러지는 봉오리라기에 자신들은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별을 준비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먼저 집을 구할 것이다.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작은 원룸으로. 가스레인지 구가 두 개 정도 되는 부엌이 있고 햇볕이 간간히 들어오는. 그는 상상해오던 미래에서 천천히 오이카와를 뺄셈했다. 꽃망울이 한없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미성숙함이 털어졌다.


    혼자 있는 집은 외로웠다. 그는 자신이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사실을 더했다가, 다시 뺐다. 그 조건을 충족하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별 한 후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시 공상을 시작했다. 알알이 나눠진 설탕가루가 솜사탕이라는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그의 상상은 천천히 몸을 불려갔다.


   그는 창문에 묻은 물방울 자국을 바라보았다. 비가 온 후 남은 자국이었다. 신문지로 닦아내는 상상을 하다가, 스가와라는 아스팔트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듯했으나 고양이가 누운 자국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창 너머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 모습에서 스가와라는 난데없는 꽃샘추위가 왔음을 떠올렸다.


   올 봄은 춥다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때의 꽃샘추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절이 지나면 언제나 따듯한 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여전히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모습이었다. 스가와라는 고양이가 떠나버린 아스팔트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눈에 담다가 그는 떨어지는 벚꽃망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같이 한 권태만큼이나 눌러 댄 전화번호를 누르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하고 받는 그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난데없이 고백했다. 마땅히 외쳐야 할 말이었다. 그는 이 지루한 말이 그들의 '내일'을 일시적으로 연장시켜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랑해."


    그 꽃샘추위 같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 말 말고 사랑한다는 확신이 필요했으나 스가와라는 애써 조르지 않았다. 봄처럼 느리고 천천히 찾아왔던 불안이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하고 스가와라는 다시 속삭였다. 오이카와는 기쁜 듯, 나도, 하고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으나 스가와라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반찬이 될 꽁치조림과 시금치 된장무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저녁이 인스턴트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권태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불안은 확신처럼 그를 덮쳣다. 창 밖의 몽우리들이 사정없이 날리고 있었다. 따듯한 봄에 적응했던 꽃은 갑자기 추워졌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동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스가와라는 그가 버릴 수 있는 가장 가벼운 것을 생각했다.


    그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벚꽃 피는 계절에, 스가와라는 카페 테이블에 제 몸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