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라일락 마파두부, 하얀 우산

  

   청춘 소설 같은 느낌을 쓰고 싶었습니다. 짝사랑 소재는 언제 써도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내리는 봄비처럼, 가벼워보이지만 촉촉한 사랑을 하는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었습니다.. 으으 짝사랑 하는 이케남은 언제나 옳아요!!!

  라일락 이파리를 씹으면 정말 첫사랑 같은 맛이 납니다. 5월은 라일락의 계절이니까 한 번쯤 입에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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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짓눌러 오는 햇살에 대한 이 그리움, 차라리 꽝꽝 어두웠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에게도 들키지 않는 시간 속을 부풀어만 가는 눈뜨지 못하는 세월.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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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시합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경기 중에 후보 선수들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었다. 오랜 버릇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 은밀한 습관에 대해서, ‘성격이 나쁘다’고 평가하곤 했다. 이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의 이 관찰은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남의 불행을 깎아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후보 선수를 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배구 시합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리베로를 포함해서 단 일곱 명 뿐이다.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하고, 그럼에도 목소리를 높여 응원하는 모습은 충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가 박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후보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중요한 시합을 치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히 긴장하고 코트 앞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심지어 이와이즈미에게도) 귀찮았음으로, 이 취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빼고서 오이카와의 습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도 비슷했다. 오이카와는 코트 밖에 있는 ‘2번 군’을 바라보았다. 이 시기에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받는 3학년은 대부분 경험이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내 코트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올라왔다면 공식전을 치룬 적이 적을 게 분명했고, 넘친다면 1학년, 혹은 2학년부터 3학년을 밀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애석하게도 ‘2번 군’은 전자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목청을 낮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유려하게 서브를 넣을 때도, 카라스노의 서툰 리시브와 블로킹이 뚫려 점수를 잃을 때도 선수들을 응원했다. 오이카와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 날 연습시합은 아오바죠사이의 승리였고, 허탈한 표정을 짓는 일학년 세 명을 추스른 것도 ‘2번 군’이었다. 그는 한 번도 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있는 이상 출전은 어려울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지만 동정하진 않았다. 경기 중에 그들은 몇 번 눈을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굳은 느낌의 눈동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단한 라일락 나무를 떠올렸다. 

   이대로 그들의 인연이 끝났더라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그 ‘2번 군’의 별명은 ‘안타까운 소년’ 정도였을 것이었다. 그 날에는 비가 내렸다. 포슬포슬한 봄비였다. 부슬부슬 내리지만 온 살이 끈적거렸다. 연습경기 내내 땀을 흘렸기에 불쾌함은 더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부원들에게 한 번 샤워를 한 다음에 쿨-다운과 마무리 연습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여름에 한 발짝 걸쳐 있는, 늦봄에 내리는 비에 모두들 지쳤는지 군말 없이 샤워실로 향했다.

   매사에 의욕 없어 보이는 쿠니미가 먼저 샤워실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짧게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아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경기가 끝난 다음 체육관은 비 내릴 때의 적막감을 닮았다. 오이카와는 코트 한 구석에 검은색 스포츠백이 있음을 발견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라고 적힌 물건은 지금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귀찮아 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은 봄비를 다시 말하면 초여름 비가 된다. 가랑비는 여름에 걸맞게 점점 장대비가 되어갔다.


   오이카와는 스포츠 백을 어깨에 걸치고 체육관을 나섰다. ‘처음’ 연습시합을 가졌을 때와 같은 곳에 차가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는 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추적추적한 빗줄기가 그의 흰색 우산을 적셨다. 그리고 그 때, 오이카와는 낯선 울음소리를 들었다. 봄비에는 가려지지 않을 목소리였다. 두리번거리면서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카라스노의 ‘2번 군’이었다.

   2번 군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먹구름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합에 진 게 분한 걸까, 아니면 못 나간 게 분한 걸까. 오이카와는 작은 고민을 하면서 다가갔다. 분실물을 전해줄 요량이었다. 그는 짙게 내리는 봄비를 막아주었다. 저기, 감기 걸려. 라는 목소리에 그는 뒤를 돌았다. 우는 걸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는 한참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얼굴에 비 잔뜩 묻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닦았다. 눈물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 말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승자가 패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 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오이카와는 만약 오늘 연습시합에서 아오바죠사이가 졌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2번 군의 손에 우산을 쥐어 주고, 어깨에 스포츠 백을 매 주었다.

    고마워, 하고 그가 입을 땠다. 아까 목이 터지라 응원하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오이카와 씨는 친절하니까, 하는 말에 2번 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감기 걸리니 어서 돌아가 보라고 말하면서 2번 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너 맑은 날에 만나자, 오이카와는 괜히 ‘너’ 라는 말에 힘주어 발음했다.

   너, 그리고 너였다.

   2번 군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이카와는 비를 맞으며 두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2번 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의상 짓는 표정이라고 치기에는 좀 더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 사이에 내리쬐는 햇볕을 떠올렸다. 봄의 끝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오이카와는 제 어깨를 쓰다듬으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


   오이카와 토오루는 봄의 끝에 감기에 걸렸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을 겨우 피해갔다는 마츠카와의 말에 그는 그저 웃었다. 한 번 빨아 말린 연습복에서는 그 날 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육관 한 구석, 의자에 앉아 팀원들의 연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을, 비 내리는 그 곳에서 파생되는 햇살에 대한 그리움을.

   봄과 여름 사이에 끼인 그 애매한 계절에 찾아오는 감기란, 보통 며칠 앓고 끝나는 것이라 오이카와는 그의 이 풋사랑-사실 사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이었지만-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살랑살랑 내리는, 포슬포슬한 봄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 감정이 묽게 희석되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봄비란 언제든 장대비로 몸을 바꾸어, 피기 시작한 꽃잎마저 낙하하게 하는 것이었다. 삼한사온이라는 봄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주말 연습을 하는 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하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 우산 잘 썼어. 라고 말하는 말간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2번 군은 그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동백 같기도 했고, 언젠가 받아본 꽃송이가 풍성한 꽃 같기도 했으며 5월 말에나 피는 이팝나무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모든 꽃송이의 이름을 그에게 붙이고 싶었다. 그럼, 하면서 그가 손을 들자 오이카와는 잠깐만,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2번 군’이 뒤를 돌았다. 그에게서 라일락 섬유 유연제 향이 나서, 오이카와는 그를 마음속으로 ‘라일락’이라 불렀다. 이름을 모르는 탓이었다.


   “나 그날 너 때문에 감기 걸렸어.”

   “저런, 좀 미안하네.”


   라일락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표정은 ‘왜 그걸 나에게 말하지?’ 라는 생각을 여실히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뭔가 더 말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술은 오물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뱉지는 않았다. 그의 라일락은 음, 하고 고민하더니 나중에 마파두부라도 먹으러 가자, 하고 제안했다. 라일락과 마파두부는 별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 이름은 알아?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카게야마한테 번호 물어봐. 그의 라일락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았다.


   2번 군에게 있어 오이카와는 별로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잘 있어 오이카와-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봄비처럼 그의 얼굴에 닿았다. 봄은 점점 여름이 되어가고, 온도는 서서히 높아지고, 하늘은 파랗고 더 파래질 것이었다. 포슬거리는 늦봄비가, 장대처럼 쏘아 붙이는 초여름비가 되는 것 같이 오이카와의 미미한 풋사랑은 그 날 하얀 우산에 맺힌 빗방울마냥 살랑거리며 몸집을 키워갈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뒷문에 주저앉았다. 작은 문을 통해 나가 한 숨 돌리려던 쿠니미가 오이카와가 있는 걸 보고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고, 쿠니미는 대담하게 그가 있는 문을 빠져 나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맑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어두운 비를 희망했다. 다시 한 번 우산을 건네주며 말을 붙이고 싶었다.

   그 날처럼 울면서 받아줄까, 상쾌한 웃음을 터트려줄까.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면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쿠니미야, 하고 그가 말을 걸었다. 쿠니미는 네, 하고 대답했다.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그는 라일락 잎사귀의 맛을 아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음, 하고 고민하다가 안다고 대답했다. 그게 뭔데?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핀 라일락 향을 맡으며 물었다.


   “첫사랑의 맛이요.”


   쿠니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오이카와는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쿠니미의 앞으로 걸어가 라일락 잎사귀 한 장을 땠다. 그 날, 같이 봄비를 맞던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에 잎을 넣었다. 첫사랑의 맛이 났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쿠니미야, 토비오 전화 번호 알아?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원하면 졸업 앨범을 뒤져보겠다고 말했다. 저 보다는 킨타이치가 가능성 있을 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이카와는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았다. 5월의 끝이 오기 전에 비가 한 번 더 내렸으면 했다. 그의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몽글몽글하게 부풀었다.


   봄비가, 봄비가, 봄비가, 그리고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