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5. 1. 23. 01:29
비조님이 키워드를 주셨습니다. 제목의 파이시트, 총, 너라는 세 개의 키워드였어요.
머뭇거리지만 결국 사랑인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쿠니미가 본 영화는 『아멜리에』입니다. 좋은 영화에요:)
***
예전에,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녹이 슨 색의 프랑스 영화였다. 전체적으로 필터를 한 겹 씌운 듯한 풍경이었다. 쿠니미는 그 영화의 여자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이 영화의 이름이었던가, 그는 파이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뒀던 반죽을 꺼냈다. 한 시간 정도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파이 틀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반죽을 톡톡 건드렸다.
자두파이였던가, 애플파이였던가. 쿠니미는 영화 속 그녀의 버릇을 생각했다. 슬프고 우울할 때면 파이를 만드는 습관이었다. 그는 그걸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반죽을 감싸고 있던 랩을 뜯었다. 랩 위에 남아있는 반죽은 하나도 없었다. 쿠니미는 그게 아쉽다는 듯 랩을 쓸었다. 아직 차가움은 남아 있었다. 그는 손끝을 혀로 핥았다.
왜 오늘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났을까. 쿠니미는 파이 틀을 꺼내며 생각했다. 갑자기 파이가 먹고 싶었기 때문에? 늦은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에펠탑을 소개해서?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냉랭한 파이 틀에 반죽을 깔았다. 그의 손자국이 반죽에 엉성하게 남았다. 서툰 흔적이었다.
“좋아해”
쿠니미는 얼마 전 들었던 목소리를 재생했다. 대충 흉내 낸 어조가 멀지 않은 과거를 불러왔다. 그는 씨앗을 발라낸 자두에 설탕을 넣었다. 그는 볼에 들어있는 자두를 집었다. 무르지 않아 과육의 끝부분에 들어 있는 단맛을 위해 그는 설탕을 두 큰 술 정도 더 넣었다. 그는 계피가루를 꺼냈다. 가루가 날려 기침이 났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뱉어냈다. 밤 새 몇 번이나 뱉었던 것이었다.
좋아해, 쿠니미는 그 울림을 다시 말했다. 그는 괜히 반죽을 찔렀다. 잘 보이지 않지만 반죽에는 지문이 묻어났을 것이다. 그가 쿠니미에게 남긴 지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생각한다. 그의 머리카락이 노을에 날렸고, 노을을 먹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꼭 자두 필링처럼 반짝였다. 그는 체리 통조림을 열었다.
영화 속 그녀는 파이를 만들면서 울었다. 지나간 사랑에 후회하면서, 쿠니미는 영화의 끝을 떠올렸다. 자신은 그 상황에서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까. 그는 필링을 잘 섞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복잡했다. 한 번 냉장고에 휴지시키기 전에 손에 가득 엉켜오던 반죽처럼. 그는 괜히 파이 틀을 눌렀다.
그는 냉정하게 생각하고자 했다. 그는 이게 질 나쁜 장난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나 쿠니미는 그와 동시에 자신이 형편없이 흔들려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저도 선배가 좋아요’라는 직설적인 말로 이게 ‘장난인 것’처럼 표현했어야 했다. 쿠니미는 생지에 자두를 올렸다. 설익어 단단한 자두 과육이 부드러운 파이 속살을 덮었다.
영화에서는, 자두파이-혹은 체리파이- 반죽을 만들고 있는 여자주인공의 집으로 남자가 찾아온다. 사랑하던 그 남자고, 여자가 계속 헤어지는 상상을 했던 남자였다. 쿠니미는 괜히 영화의 결말을 되감듯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결국 도착하는 지점은 노을이 가득 든 버스 창가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처음에 쿠니미, 하고 불렀다. 마치 롤리타를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아키라, 라고 불렀다. 아키라, 라는 이름에 꿀을 바르는 것처럼 달게. 쿠니미는 그 상상만으로도 입이 달았다. 그는 체리 통조림을 잘 저었다. 그가 작은 숟가락을 움직일 때 마다 체리들은 드럼통에 들어간 세탁물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의 위와 아래가 어디인지 모르는 것처럼. 꼭, 그렇게.
쿠니미는 자두 필링을 넣은 파이 반죽에 조심스럽게 체리 통조림을 넣었다. 그는 그게 구워지는 상상을 했다. 하나마키 선배, 그는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른다. 여전히 그의 집 초인종은 울리고 있지 않다. 그는 통조림 국물을 조금씩 따라냈다. 숟가락에 눌린 체리가 뭉개지는 느낌이 났다.
“좋아해.”
쿠니미는 다시 중얼거린다. 너가 너라서 좋아. 라는 투박한 말이 곧바로 따라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파이에 총을 담는 상상을 한다. 그대로 그걸 하나마키에게 가가고 싶었다. 겉면만 구운 파이에 들어가 있는 그 죽음의 무게는 매우 무거울 것이었고, 쿠니미는 그의 느긋한 얼굴을 쏘는 공상을 했다.
하나마키는 그를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다가와 다정한 말을 속삭였고, 때론 장르를 바꾸어 퉁명스럽게 다가왔다. 쿠니미는 그 갭에 녹아드는 게 힘들었다. 자두 필링과 체리 통조림이 섞이지 않은 파이처럼. 그는 자신을 냉정에서 점점 열정으로 밀어가는 하나마키가 싫었다. 좋아해, 라는 투박한 고백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어색하게 파이 반죽을 올렸다. 격자로 엮어 모양을 냈다. 어느 조각이 ‘위’인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모앙은 꼭 그의 마음을 닮았다. 좋은지 싫은지 알 수가 없었다. 쿠니미는 생지로 가려진 파이 안에 총을 꺼내드는 상상을 한다. 그는 공상의 총을 하나마키에게 겨누고, 겨누고, 또 겨눴다가,
쏘지 못하고 내려놓는다. 상상에서조차 하나마키는 그를 흔들고 있었다. 꽃이 피면 봄이 온다. 겨울은 꽃이 핌에 강제적으로 봄의 뒤편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쿠니미는 자신의 세계가 온통 봄꽃으로 물드는 환상을 본다. 그 광경을 선물 한 것은 좋아해, 라고 말하던 하나마키의 얼굴과, 그의 양 볼에 올라선 떨림이었다.
좋아해, 라고 발음 한 다음 하나마키는 그의 눈을 가렸다. 지금 나 굉장히 꼴사나우니까 보지 말아줄래, 라는 다정한 부탁과 함께. 쿠니미는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나마키의 것과 다르게 부드러운 구석이 있는 손이었다. 양 손목에서 뛰는 맥이 눈으로 이동했는지, 눈과, 눈에서 삼킨 눈물이 타고흘러내려가는 식도가 속이 타오르는 듯 했다.
쿠니미는 파이 생지를 정돈했다.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없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기에 이런 일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운함은 이성과 별개로 찾아오는 친구였다. 크쿠니미는 자신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안에 그 감정이 파이 속을 가득 채운 자두마냥 자리함을 알고 있었다.
좋아해요, 하고 쿠니미는 대답해본다. 간질간질한 느낌이지만 그에게 닿을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겨울은 강제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자신의 선 자리에서부터 넝쿨이 타고 올라와, 그 지난 자리마다 꽃을 피우는 것을 상상했다. 그에게 총을 배달하는 것 보다 훨씬 건실적인 상상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마키의 양 볼에 들었을 게 분명했던 사랑이 어느새 그의 볼 위에도 올라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파이의 겉껍질이 담고 있는 붉고, 아찔하게 달달한 필링 같은 맥이 그의 목에서 뛰었다. 하나마키, 하고 쿠니미는 속삭였다. 예상보다 더 단 울림이었다. 타카히로, 하고 그는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쿠니미의 혀가 네 번의 여행을 했다. 코 끝이 찡해졌다. 그는 체리 통조림을 입 안에 가득 담았다고 생각했다. 냉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파이처럼 갈무리했다. 아직 익지 않은 사랑을, 여물지 않는 사랑을.
쿠니미 밖에 없는 부엌, 그 세계에는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예열한 오븐을 열었다. 상온에서 천천히 온도를 올려, 타인까지 변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된 친구였다. 그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쿠니미는 조심스럽게 파이 틀을 밀어 넣었다. 파이가 익을 때 노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는지 오븐 안에도 주황색 물이 들었다.
“좋아해.”
그는 다시 속삭였다. 문 밖에는 아직 아무도 없고, 그를 부르는 노크소리는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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