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2015. 12. 23. 18:55
야하바 시게루는 좆도 없는 새끼였다.
적어도 쿄타니 켄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하바 시게루는 친절했다. 특히 여성하게 상냥했지만, 실력 없는 선배들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초콜릿 같았다. 하지만 마냥 뭉개지지는 않았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오는 격절의 시간, 새로운 팀에 적응해야 하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그는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급류 속에서 뿌리를 박고, 물살을 둘로 갈라 지나가게 하는 돌 같기도 했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리는 파베 초콜릿보다는, 부드러우면서 고체 같은 ‘초콜릿 가공품’ 같은 느낌이었다. 선배들은 실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우대받으려고 한다. 고작 1년, 혹은 1개월 차이 밖에 나질 않으면서. 학교에 먼저 입학한 것이 유세라는 양. 쿄타니는 그런 배구부의 위계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진행되는 배구부의 겨울 연습에서, 예비 1학년들은 2학년으로 올라가는 선배들의 연습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명백하게 모자랐다.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몇 명을 제외하면 왜 레귤러 20명에 선발되어 있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많았다. 쿄타는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달랐다. 그는 긴장한 1학년들과 날이 선 2학년들 사이를 능숙하게 파고들어갔다. 때로는 허당처럼 굴고, 때로는 배구에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련했다. 그 나름의 ‘생존전략’이겠지 싶었다. 팀이 격변하는 시기의 2학년들은 늘 날카롭다. 학교가 강호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천재’에 대한 경계. 노력해서 얻은 레귤러 자리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1학년들의 실력은 그들에게 있어선 미지수다. 1학년에서 막 벗어난 2학년들에게 있어서, 신입생들은 후배가 아니라 ‘라이벌’로 생각된다. 자기가 움켜 쥔 성과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오바죠사이처럼 현 내 베스트 4를 차지하는 고등학교라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야하바 시게루는 달랐다. 그는 노련하게 선배들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선배들에게 셋업을 올리는 방법을 질문하고, 중학교 때 묻은 버릇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그는 2학년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이와이즈미에게 먼저 다가갔다.
두 사람은 친절했다. 야하바는 꼬리를 치는 개처럼 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묻고 녹아들려고 했다. 남자들만 있는 무리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인정은 대단한 훈장이다. 오이카와는 야하바를 ‘마음에 든다’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못 미치는 실력이면서 싹싹하게 군다는 표시였다. 쿄타니는 오이카와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그 인정이 기쁘다는 듯,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선배들의 장벽을 서서히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급생을 서운하게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같은 포지션의 와타리 신지와 유달리 친했다. 신입생들이 해야 하는 코트 수리나 바닥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도왔다. 그는 달콤한 남자였다. 달다는 건 위험하다. 눈치 채고 나면 그 맛에 빠져 휘적거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단 한 살 차이가 나지만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연습량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변화한다. ‘격변’이라는 단어를 써야 마땅했다. 모두가 적응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야하바만이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빠른 유속에도 휩쓸리지 않는 바위처럼. 유연하고 또 유연하게. 그는 연습에 따라가지 못 하는 동료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였다.
대놓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플러스 포인트였다. 말끔하게 생긴 주제에 연애를 몇 번 못 해봤다는 것도 선배들에게 있어서 ‘재미있는 점’으로 작용했다. 쿄타니는 그런 야하바가 좆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잘 보인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실력 없는 선배는 앞길에 방해가 될 뿐이다. 야하바가 팀에 녹아갈 수록 쿄타니는 팀에서 겉돌았다.
그것은 야하바 시게루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제 자리에 있었고, 그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중력 때문에 멋없는 소행성이 제멋대로 궤도에서 이탈한 것뿐이었다. 야하바가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일수록, 쿄타니는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올라간 공을 뺏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부적응자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쿄타니는 반추反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모든 돌발 행동은 명백하게 야하바 때문이었다. 발버둥 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어렸다는 걸 깨닫는 건 언제나 크고 난 다음인 법이었다. 그는 저에게 뻗어오던 손을 추억했다. 길고, 여린 손이었다. 중학교 내내 배구공을 만졌을 게 분명한데도 고왔다.
언젠가 쿄타니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둘 만 남았을 적이었다. 둘은 각자의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는 행성이었다. 서로의 영향권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햇병아리 같던 신입생 시절을 지나, 여름의 인터하이를 겪고 만난 고등학교 1학년의 가을이었다.
야하바는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와 함께 미팅에 나간다고 했다.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선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야하바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지나갔고, 마츠카와가 자기는 미팅에 끼워주지도 않는다면서 투덜거렸다. 야하바는 어차피 자기는 ‘배경’ 역할이라면서 자신을 낮추면서 웃었다. 네가 배경? 그건 하나마키겠지! 마츠카와는 유쾌하게 말했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서 쿄타니는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괜히 운동화 앞코를 봤다. 아스팔트에 깔려 있는 자갈을 발로 찼다. 어디 딱히 갈 곳도 없었고,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그나마 쿄타니가 말을 붙여본 건 와타리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연습실에 남아있었다. 최근 포지션을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떠나가고 둘 만 남아 있었다. 여름이 애매하게 남아 있는 9월이었다. 두유 리멤버, 으흥흥흥흥 셉템버, 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야하바와 눈이 마주친 건 그 때였다. 아직은 강한 햇살과 더 높아지지 않은 하늘이 답답해져온 것도 그 때였다. 그와의 거리감이 가시지 않은 더위처럼 훅 끼쳐왔다. 그 때 야하바는 그렇게 물었다.
-초콜릿 에클레어 좋아해?
마법 같은 단어였다. 어색한 말이기도 했다. 입 속에서 굴러가는 발음들은 정제되지 않은 계절처럼 이상했다. 쿄타니는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초콜릿, 에클레어 하고 발음하자 야하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그걸 먹으러 가는 거라면서, 미팅은 뒷전이라고 말했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너 여자 좋아하잖아.
-여자애랑 같이 있으면 디저트 먹는 데 눈치 덜 보이거든.
야하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한 번도 안 먹어봐서 몰라, 하고 쿄타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나중에 먹으러 가자면서 눈을 반짝였다. 쿄타니는 그의 말에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을 입은 건장한 배구부 남자 두 사람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디저트를 사이에 두고 포크를 움직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야하바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상상했어? 하고 말하자 쿄타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고 있네,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능글맞았다. 쿄타니는 그에게 저런 면이 있는 지 정말 몰랐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야하바는 제 발 끝만을 보고 있는 쿄타니를 보다가 정말 맛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역 앞 카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거기가 가장 맛있다고 웃던 야하바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쿄타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야하바는 머리를 잔뜩 매만지고 온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쿄타니도 카페 까지만 같이 가겠다고 선언했다. 요상한 조합이네~ 하며 오이카와는 웃었다. 승낙이었다.
쿄타니는 야하바에게서 일 미터 정도 떨어진 뒤에 걸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가을 바람에 잔잔히 흩어졌다. 햇빛을 받으면 캐슈넛 색으로도 보이는 은발이었다. 그의 사락사락한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났다. 쿄타니는 그렇게 그를 따라갔다. 카페 앞에서 야하바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소리를 했다. 쿄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쯤을 퉁명스럽게 서 있자, 야하바는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초콜릿 에클레어를 샀다면서 웃었다. 집에 가서 먹어보고 이야기 하자, 라는 말은 상냥했다. 가을처럼 시원하기도 했다. 그 날은 구월 이십일일이었고, 오후가 점점 가물가물해져 밤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 총체적으로 애매한 시간 뿐이었다.
그 날 쿄타니는 역 앞 카페의 문짝을 회상하며 초콜릿 에클레어를 먹었다. 약간 열린 문 틈 안에서 야하바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문에 칠한 페인트는 물에 한 번 개어 사용했는지, 나뭇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홍색과 연두색을 겹쳐 바른 문은 봄 색이었다. 져가는 가을과는 관계가 없는 사랑스러운 색이었다.
초콜렛 에클레어는 달았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빵으로 초콜릿을 감싸 혀 전체가 달아지진 않았다. 신기한 맛이었다. 여기가 가장 맛있다던 야하바의 목소리가 자꾸만 번져왔다. 꿈 같은 목소리였다. 포크로 에클레어를 찍을 때 마다 쿄타니의 기분은 투명수채화 속 정물 같았다. 그는 그 애매한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방아쇠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당겨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동에 나갈 수 없었다. 공을 셋업하는 서툰 모습을 볼 때 마다 그 날 먹은 초콜릿 에클레어 속의 버터 맛이 느껴졌다. 위에 올린 아몬드의 딱딱한 껍질처럼 배겨오는 ‘애매함’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인 가을과 같았다. 야하바와 하교를 할 때 마다 아몬드가 목에 번진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쿄타니는 이런 애매함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삼학년과 같이 들어 간 코트에서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일학년의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그 당연한 순리마저 넘으려고 했다. 규칙을 무시한 톱니바퀴는 아귀에 맞지 않는다. 아오바죠사이의 배구에 균열이 생긴다는 감독의 말도 듣기 싫었다.
그 날 코트에 있던 선배는 야하바와 친한 선배였다. 야하바는 그 날 초콜릿 에클레어를 하나 더 건네며 그를 타일렀다. 지나치게 상냥했다. 달콤함에 빠져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맞을 것이다.
9월 21일이 진하게 번져왔다. 그것도 지나치게 달고 폭신한 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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