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Falling slowly



   옛날 영화를 봤다. 예전에 개봉한 독립영화였다. 스가와라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추위에 손가락 끝이 붉어졌다. 그는 주먹을 쥐고 손끝에 힘을 줬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색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우산이 없다. 스가와라는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영화 속에서 나오던 하늘도 꼭 그런 색이었다. 스가와라는 아까 본 화면에서 ‘파란 하늘’이 나온 적이 없다는 걸 상기했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좋아진 그는 영화 끝머리에 흐르던 음악을 흥얼거렸다. 가로등이 설설 켜지기 시작했다. 겨울 하늘은 금방 해를 먹어버리곤 했다. 그는 입김을 불었다. 하얀 숨이 불었다 흩어졌다. 그는 운동화 코를 보았다. 붉은 운동화 색에서 스가와라는, 억지로 그를 생각해낸다.


   붉은색은 보랏빛과 갈색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 색을 떠올렸다. 노을을 먹는 밤하늘의 가장자리께에 위치한 색이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액정을 톡, 톡 가볍게 터치했다. 여러 부재중전화와 쌓여있는 문자들 속에서 스가와라는 ‘그’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도, 연습, 열심히, 했어? 라는 질문이었다. 글쎄, 스가와라는 그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 하고.


   연습을 빠진 건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다이치에게는 먼저 부실로 가라고 했고, 아사히가 3학년 복도를 지나가는 걸 본 다음에, 그는 인파에 섞여 조심스럽게 퇴근했다. 발을 땔 떼 마다 그림자에 심장소리가 붙어 뛰었다. 교문을 나설 때는 달렸던 것 같았다. 딱히 나와서 할 일도 없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에서 저지른 일도 아니었고, 공허하거나 허무하다는 것도 이유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나오고’ 싶을 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영단어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다만 그 입술을 비집은 것은 허밍이었다. 그는 아까 들었던 음을 불렀다. 영화는 적당히 감동적이었다. 배구부 연습을 빼먹고 본 것 치곤 좋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휴식’이라는 단어가 가당치 않음을 안다. 그는 주전이 아니었고, 그의 후배는 천재였다. 이 두 문장은 그의 쉴 권리를 당연하게 박탈해갔다.


   그렇지만 불만은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연습이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자신이 왜 이 거리를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중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건널목에 섰다.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신세가 좀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던 남자주인공을 반추했다. 그는 그가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꺼냈다. 왜, 라는 답장이 와 있었다. 스가와라는 불퉁한 메시지를 적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글자를 입력하는 자판이 영어였다가, 특수기호였다가, 다시 영문으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볼에 또 다시 눈이 닿았다.


   긴 건널목은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빨간 불로 막혀 있는 신호를 하염없이 보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노래를 부를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허밍으로 음을 씹어냈다. 좋은 노래였고, 가사가 깊게 남는 노래였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오이카와는, 어때, 하는 메시지를 담아 전송했다. 그가 핸드폰을 보고 있는지, 메시지 옆의 숫자가 바로 사라졌다.


    토오루.

    스가와라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간혹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문자를 보내곤 했다. 스가와라는 숨을 내뱉었다. 눈은 이미 그의 어깨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건널목 사이를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하늘을 보았고,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청승맞은 일이었다. 그는 오늘 도망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면서도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않았다. 목에 뭔가 걸친 듯 답답했고 코끝이 탄산을 마신 것처럼 막힌 것 같았다. 그는 차라리 독서실에 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후회가 그의 그림자에서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코우시,

   가벼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스가와라는 놀란 어깨를 가라앉히며 뒤를 돌았다. 안녕,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의 옆 자리에 섰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스가와라의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을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었다.


   됐다, 라는 소리가 들린 것은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 온 이후였다. 눈 오는 건널목은 굉장히 혼잡했다. 오이카와가 그의 손목을 잡아왔다. 손끝에 닿는 장갑의 느낌이 까시러웠다. 스가와라는 건널목 중간에서 연습은? 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비밀, 하고 말하는 듯 검지손가락을 펴서 그의 입술에 가볍게 댔다. 인도에 올라와서 그는 스가와라에게 자신을 보러 온 것이냐고 물었다. 스가와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눈 올 줄 알고, 온 거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다. 코우시 가끔 상쾌함이 지나쳐서 쌀쌀맞을 때가 있어. 오이카와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아 그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가져갔다. 핸드폰과, 얼마의 동전과, 그의 손마디마디가 느껴져 스가와라는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눈은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몇 가지를 더 질문했고, 그 질문 속에서 그의 일탈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스가와라 씨는 남자친구가 눈치가 빨라서 좋지요? 오이카와는 여자아이 말투를 흉내 내며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춥다’는 말이 반복됐다. 스가와라의 바짝 언 코를 오이카와는 엄지와 검지로 잡아 살짝 꼬집었다.


   영화를 봤어, 하고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영화? 하고 되물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연습을 가지 않았다는 말을 풀어 놓으면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 디비디를 봤다고 주절거렸다. 그의 말 사이사이에 오이카와의 감탄사가 들어갔다. 멋있는데, 하는 말을 할 때 그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올려보면서, 정말, 하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거기서 어떤 노래가 나왔는데- 까지 스가와라가 말했을 때, 오이카와는 음에 가사를 더해 말했다. 아까부터 부르고 있길래 알았는데, 오이카와 씨는 이 노래 정말 좋아해. 그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부연 설명을 했다. 그는 다음엔 같이 보자고 제안하면서 ‘비긴 어게인’도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전 여자 친구랑 봤던 거야?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늘 상쾌 군은 좀 싫은 걸 물어보네, 하고 웃었다.


   마주잡은 손에 열기가 찰 때 쯤, 스가와라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손을 뺐다. 눈은 여전히 포실포실하게 내리고 있었다. 켜진 가로등 불이 들어 색이 든 눈송이들이 그들의 머리카락과 어깨에 쌓였다. 오이카와는 어딘가 들어갈래, 하고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 볼 거라는 말을 꺼냈다. 오이카와는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오늘의 코우시는 조금 별로야, 너 때문에 학교로 곧장 안 갔는데. 오이카와는 때 쓰는 아이처럼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옆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볼을 부풀리던 숨을 하, 하고 내뱉었다. 하얀 김이 서릴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곧장 스가와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오이카와 씨 노래 잘하는데, 하면서 자랑을 하는 목소리는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 보다 듣기 좋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그가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토닥였다. 그것은 빗방울처럼 간질거리는 감촉 같았고 내리는 눈처럼 따사로운 느낌이 들었다.


    코우시는 그 노래 가사 알아?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충, 기억 한다고 대답했다. 오이카와 씨는 가끔 코우시에게 그걸 불러주고 싶었어.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고서 그는 스가에게 눈을 맞춰왔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 스가와라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느낌은 첫 눈처럼 황홀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좋아 하고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어깨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보다가,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눈을 가렸다.


   그는 살포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포개었다. 오이카와의 속눈썹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입술 사이에서 뜨건 숨이 삐져나와, 섞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혀에 얹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들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그들이 미처 서로에게 건네지 못한 단어들이 서로의 들숨으로 바뀌었을 때 오이카와는 그의 메마른 입술에 잘게 입을 맞추고 입술을 땠다. 스가와라는 그제야 그의 눈가에서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오이카와 씨의 잘 생긴 얼굴을 가리면 코우시 손해 아니야? 그는 제법 얄미운 말을 건넸다. 그 말 사이에는 스가와라가 가지고 있는 우울함의 잔향을 녹이려는 맘이 블랜딩 되어 있었기에 스가와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큰 손이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왔다. 코우시, 오늘 나랑 데이트 더 하다 가자, 하고 오이카와가 그의 귀에 달콤한 언어를 속삭였다. 첫눈은 계속 정류장을 덮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다만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는 눈을 떴을 때,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첫눈 같은 숨이 닿아왔다. 






you had a choice

당신은 선택을 했고

You`ve made it now

이젠 결정해야만 해요

Falling slowly sing your melody

천천히 당신의 노래를 불러봐요

I`ll sing along

내가 함께 부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