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순식간에,

   '식어가는 핫팩 / 대신 하는 것 / 떨어지지 않는 다리'란 키워드를 받았습니다. 오이카와씨의 전 여친 소재 주의











   가끔씩 스쳐지나가듯 옛 애인의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진 아몬드 색 손톱. 오이카와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몇 해를 가진 그녀는 자신의 손톱에 탑코트를 바르면서 말했다. 그는 그 때 풍기던 지독한 매니큐어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숨결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그 매캐한 냄새 속에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손톱의 매니큐어는 말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져 있을 때가 있어 토오루. 나는 그걸 사랑에도 가져다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러갔다. 그 다음에 올 말은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능력 있는 연하 남친’이었을 거고 장난감이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었다.


   그는 식어버린 핫팩으로 긴 손가락을 문질렀다. 나름대로 좋아했었고, 제 방식대로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그녀와의 나이 차이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바람에 제멋대로 날린 뒷머리를 정리했다. 손가락 끝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헤어졌을 때 장갑을 그녀의 핸드백 속에 넣었었다는 것을 기억 해 냈다. 그 장갑은 아마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게 분명했다. 그는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으로도 공허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빈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그 물은 넓게 퍼져서, 그의 마음을 담뿍 적셨다. 그의 눈앞에서 버스가 지나갔다. 벌써 몇 번 째 보내는 버스였다. 청승맞은 일이었지만 시간이 남는 월요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가끔씩 영화에서 묘사되곤 하는 ‘파티 퀸’의 무대 뒷면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겹친다고 생각했다. 부를 여자애도 딱히 없었고, 부를 남자 애도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웃음이 났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축이면 축일수록 메말라 가는 것은, 울면 울수록 눈가가 당겨오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자신의 손톱에서 붉은 색을 본다. 오이카와는 핫팩을 꼭 쥐었다. 차가운 손에 온기가 왔다가 식었다. 그는 멍하니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은 여전히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괜히 굳게 닫혀 있는 코트의 단추를 새로 여몄다.


   여기서 뭐 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본 얼굴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니네 후배의 지금 선배야.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2번 군? 오이카와가 묻자 그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정답, 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오이카와의 옆에 앉았다. 너도 이 노선 타?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서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는 그를 얌전히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와 그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서로 면식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상쾌군’의 얼굴에 눈물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알았다. 그는 너무 티 나지 않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어폰 한쪽을 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간간히 바람이 불어 그의 색 엷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어색해? 그가 질문했다. 어색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오이카와는 그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그것도 그러네, 스가와라는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 웃었다. 카라스노의 2번은 의외로 웃음이 헤픈 사람이었다.


    그는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해야겠다고 ‘통보’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내에 문제집을 사러 왔다는 말을 건넸다. 그의 그 말에서 오이카와는 배구를 더 안 할 거냐는 질문을 도출 해 낼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혹시 모르니까, 라며 말을 흐렸다. 그는 아마도 배구 추천 입학은 무리일 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는 머쓱한 듯 보도블록을 발로 찼다. 스가와라는 그의 발끝을 보다가 천재가 아니라서,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체념이었다.


   오이카와는 핫팩으로 손을 문질렀다. 온기가 거의 사라진 핫팩인지라, 손은 따스함을 찾지 못하고 계속 곱기만 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길게 뻗은 손가락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뻗었다. 2번 군? 하고 오이카와가 묻자, 그는 차가워 보여서,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자 마자 진짜 차갑다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그럼 놓던가’ 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손을 잡은 순간, 그의 머리 위에 켜켜히 쌓여 있던 회색 구름 층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을 잡는 것은 대용품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오이카와는 그의 온기에 잠시 기대기로 했다. 그의 손은 오이카와의 손보다 작았다. 그녀의 손보다는 길쭉길쭉 해 만지는 맛이 있었다. 손톱의 큐티클층은 관리가 잘 안 되어 있었고, 오이카와와 비슷한 곳에 굳은 살 자국이 있었다. 그는 그 자국에서 그가 ‘세터’임을 다시 인식했다. 스가와라는 손톱을 짧게 깎는 편이었다. 그는 그의 반듯한 손톱을 톡톡, 두드렸다. 오이카와 군은 호기심이 많구나, 하는 목소리가 작게 깔려왔다.


   그는 그녀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엉덩이를 조금 당겨, 그의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림자에서 나는 키 차이, 머리와 어깨가 겹쳐진 그림자는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그 속알맹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대체품’임을 안다. 시장에서 원하는 상품이 없을 때, 그 상품을 대신해서 사는 물건. 오이카와는 식어가는 핫팩과 이미 떠나버린 그녀의 자리를 완벽한 타인인 그에게 잠시 양도하고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버스가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스가와라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저거 타고 가? 그가 묻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군 이 노선 탄다며? 그는 이 정류장에 다니는 버스가 하나라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그의 마음에 서서히 스미는 이 감정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집요한 남자였고, 가끔은 직감에 의존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한 번 시작한 생각에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다면서 버스 정류장 의자에 편히 앉았다. 그와 그가 마주잡은 손가락 마디가, 단단히 붙어버린 듯, 강한 힘으로 잡고 있는 손 안쪽 물갈퀴 살의 온도가 점점 같아지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식어 갔고’ 오이카와는 ‘따듯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맹맹한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붉은 버건디 색 매니큐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어색하게 손을 땠다. 더 이상 손을 잡고 있을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그는 왼 손이 심장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면서, 오이카와가 자신의 맥을 잡고 있는 거란 제법 엉뚱하면서 맥락이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어서 뭐야 그게, 라고 타박하자 그는 다시 이를 내보이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겨울바람을 담은 오후의 햇살처럼 상쾌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입술에 그의 검지를 대었다. 입술이 트면, 아프니까 라는 이유였다. 그는 마주잡았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손목이 움직이며 주머니 안의 손가락들이 꼼질댔다. 오이카와는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왼손에 당당하게 립밤을 들고 있었다. 튜브 형식으로 짜내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 아이들이 슬퍼한다는 이유로 멋대로 오이카와의 입술에 그것을 댔다.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곤 했다. 붉은 색은 ‘어른의 색’이었다. 그는 그녀와 사귈 때 그 색에 압도되곤 했다. 그는 그것보다 수수했다. 가을 밀밭같은 머리색을 가졌으며 호밀 같은 눈동자를 가졌다. 그는 검은색이나 회색이 어울렸고 목소리 또한 조곤조곤했다. 우리 간접 키스 했어, 그는 오이카와의 볼을 검지로 노크하며 말했다. 오이카와가 입을 살짝 벌리자, 그는 단숨에 장난이었다고 말하면서 사과했다. 기분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라고 오이카와 말을 꺼낼 때 까지 그는 발을 까딱거리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그에게서 위안을 얻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시 정류장 안으로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 온다, 그는 떠남을 예고하듯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아까보다 차가워진 스가와라의 손이 만져졌다. 투박하고 굳은살이 있는 남자아이의 손가락이었다. 가지 마, 오이카와는 그의 발걸음이 보도블럭에 단단히 붙기를 빌었다. 스가와라는 왜, 라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이 멜랑콜리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서서히 스미는 그 마음에 충실 할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핸드폰을 톡톡 건드렸다. 나 살짝 늦어, 라고 보고하는 듯 했다. 누구? 하고 묻자 그는 다이치, 라고 대답했다. 카라스노의 1번이야, 라고 부연설명이 따라왔다. 오이카와는 그의 목소리에 애인? 이라고 물으려던 것을 삼켰다. 몸 안의 축이 이리저리 꼬인 느낌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마주잡는 것으로, 공허함이 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 고민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가와라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독한 탑코트 냄새와는 다른 호밀빵 향이 났다. 상쾌한 바람 향이 섞인 그 느낌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충동적인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지금 작업을 거는 거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면서도 그에게 핸드폰 번호를 말해주었다. 열 한 자리 숫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오이카와의 귓가에 잔잔히 스며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 이 순간이 ‘매니큐어가 저도 모르게 깨져 있던 걸 알았을 때’ 일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다만 스가와라에게 문자해도 괜찮아? 라고 수줍게 질문 할 뿐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버스가 다시 정류장에 도착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그는 버스에 올라 타 두 명이요, 를 외쳤다. 그의 카드가 삑 소리를 내고 요금을 지불했다.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그에게 끌려 온 자신이 어색했다. 그는 창가에 앉았고 오이카와는 그의 옆자리를 어색하게 차지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손바닥을 펼쳤다. 손 크네, 하고 칭찬하면서 그는 손바닥에 ‘그래’라고 적었다. 뜬금없는 장난기에 오이카와의 눈가가 예쁘게 휘어지며 웃음을 만들어 냈다.


   손금 위에 그어진 대답이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