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시, 갈무리.

쓰면서 하나의 책 제목과 하나의 문장을 감추려고 했습니다만 잘 안 된 것 같아서 울적합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스가와라 씨가 짝사랑하는 걸 그리고 싶었는데 두서없고 맥락없네요..









***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온다 리쿠는 ‘도서관의 바다’라는 책을 썼다. 스가와라는 그 책이 ‘미닫이문으로 열리는 도서관 문. 그 문을 기준으로 도서관 안의 특유의 분위기가 넘실거리듯 흘러내리던 느낌’이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책을 읽은 뒤로 그는, 그 문장 하나하나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갈 때 마다 그 느낌을 기억하곤 했다. 그는 서점의 손잡이를 잡았다. 겨울이라 쇠로 만들어진 손잡이에 눅진함이 묻어났다. 그는 하얀 숨을 내뱉으며 문을 밀었다. 책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점은 넓었다. 그는 문제집 코너로 발을 옮기다가, 이내 ‘시집’ 코너로 발을 돌렸다. 시가 문학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 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말해줬던 게 아마 타게다 선생님이었던가. 스가와라는 저번 현대문학 시간을 떠올렸다. 타케다는 짧은 시들을 판서하면서 애닮고 넘쳐흐르고, 가끔씩 마음을 저리게 하면서도 숨이 막히게까지 하는 그 감정들을 문자 안에 정제하여 넣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 라는 말을 했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타케다의 그 말을 생각하자, 스가와라는 배구에서 ‘토스, 이리 줘’ 라고 말하는 스파이커를 떠올렸다. 그가 외치는 ‘토스를 달라’는 말 안에는 ‘내가 반드시 공격을 성공 시켜서 너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나, ‘내가 에이스이고, 지금 이 타이밍에서는 날 믿어달라’ 따위의 감정이 들어있을 것이다. 시가 여러 복합적인 마음들을 짧은 말 속에 넣어 정제하는 것이라면, 배구 경기에서 외치는 여러 말덩어리들 또한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코트 너머에 있는 풍경을 생각하다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에 대한 감정 또한 말로 표현한다면 ‘시’일까. 스가와라는 이런 식의 공상을 하며 시집 코너를 두리번거렸다. 서점은 조용했고, 쓸모없는 생각들이 부유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책을 뒤적였다. 그러나 마음을 잡아끄는 구절은 딱히 없었다. 시는 사람의 마음에 와서 꽂혀, 그 자리로부터 작가의 감정을 쏟아 붓는 것이라고 하던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우연히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은 맨발로 바닷가를 산책할 때 조개껍질이 발에 걸리는 것이 의외로 적은 확률인 것과 같았다. 서점에서 좋은 책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하는 것은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런 번잡스러움 때문에 좋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웃었다.


   서점에 가는 것은 가끔씩 바다를 찾아가고 싶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것도 없고, 간간히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만 먼발치서 자욱한 바닷가를 걸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배구 코트 위였지만, 그곳은 ‘열기’와 같이 날카로운 소리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매우 좋아하는 곳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여러모로 ‘꼬일 때’가 있었다. 그는 차분해지고 싶을 때 바다와 비슷한 서점으로 향하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손에 넣을 때 까지 무의미한 산책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의 서점 풍경과는 달랐다. 그는 멀리서 ‘아는 사람’을 보았다. 그의 무의미한 산책 속에서 갑자기 ‘유의미한’ 사람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른하늘에서 이는 풍랑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아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알렝 드 보통의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코끝에 책 냄새가 일었다. 멀리서 짠 파도 내가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는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난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사랑 이야기라는 원형적 서사의 제1막 제1장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거대한 정신이 우리 궤도를 미묘하게 조정하여 우리를 어느 날 파리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게 해준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문단 하나가 놓였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훑어 읽었다. 그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쾌 군은 책을 재미있는 자세로 읽는 구나? 여러 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책을 내렸다. 살짝 몸을 낮춰 스가와라와 시선을 맞춘 오이카와가 있었다. 안녕? 하고 그가 인사했다. 스가와라는 안녕, 하고 대답했다. 그를 이런 곳에서 마주할 줄은 몰랐기에, 스가와라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그는 책을 사러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도서관의 바다』라는 책인데, 상쾌군 읽어 봤어? 라고 묻는 그에게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서관도 서점도 바다와 같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장황한 연설이기도 했고, 달콤한 서사이기도 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퍽 좋은 편이었다. 그거, 나도 읽었어. 스가와라가 간신히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통하는 점을 찾았다면서 웃었다. 그 웃음에, 서점의 야트막한 조명 아래에서 그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로맨틱한 걸 읽네, 하고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법과도 같아 스가와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게 재미있느냐 물었고, 스가와라는 방금 제 눈 앞을 가렸던 문단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이, 좋아, 라고 다소 자신 없게 말하자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었다. 그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자신과 그 사이에 경계선 따윈 없는 것처럼 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당황스러우면서 좋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볼 때 마다 스가와라는 세상의 모든 좋은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칭찬’의 형태이기도 했고 ‘애정’을 ‘갈급’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코트 안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뭔가 말해주고 싶었다. 꺄아 꺄아, 거리며 높은 데시벨로 지져귀는 소녀 때들을 몰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뭐 들어갔어? 오이카와가 다정하게 물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도리질하자, 오이카와는 상쾌 군은 소심하구나, 라는 말로 받아쳤다.


   들어온 서브에 리시브를 실패한 기분이었다. 그에게로 날아온 공은 언제나 힘없이 코트 바닥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스가와라는 아니, 그게, 라고 대답했고, 오이카와는 그의 대답에 개의치 않고 13P의 그 문장이 매우 로맨틱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궤도를 조종했다는 말이 멋있고, 그래서 우연히 만나게 된 거라는 게 사랑스러워. 스가와라는 그 말에, 문득 ‘우리도 우연히 만났어.’라고 대답할 뻔 했다. 그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놀랐으며 그의 앞에 서 있는 오이카와는 그의 급작스러운 위상변화가 재미있는 듯 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하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멀어진 한 걸음을 단숨에 좁혔다. 스가와라는 그의 앞에선 괜히 소녀가 되는 제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애매한 느낌이었다. 사실 좋아하게 된 포인트 또한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자리했고, 지금 한 걸음을 좁힌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정말로? 하며 되물었다.


   마음 한 가운데에서 목소리가 넘실거렸다. 그것은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내뱉기에도 곤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민트 맛 음료수를 마셨을 때의 코끝이나,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의 입천장같이 그의 심장에 치받치며 넘실거렸다. 좋은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이 매우 운명적인 일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70억명이 되어가는 지구의 일본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 또한 그런 일이 아닐까. 스가와라의 머릿속에서 책먼지마냥 부유하는 생각들을 오이카와는 모르고 있어야 했고, 몰라야만 했다.


   상쾌 군은 재미있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애칭’으로 보이는 문자를 입에 담았다. 스가와라는 애닮고 넘쳐흐르고, 가끔씩 마음을 저리게 하면서도 숨이 막히게까지 하는 그 감정들을 문자 안에 정제하여 넣는다는 범주에 시와 애칭이 포함되는지, 그렇다면 자신은 오이카와를 무엇이라고 호칭하고 싶은지를 빠르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풋풋한 첫사랑은 투명한 바다와도 같아서, 그가 하는 모든 외부적인 행동들은 오이카와에게 뻔히 들여다보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던 오이카와와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친 걸 확인하고선 헛기침을 했다. 상쾌 군, 하고 오이카와는 다시 스가와라의 애칭을 불렀다. 그 부름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떨리고 얼마나 심장을 쥐어짜는 행위인지, 그는 이 감정들을 모두 다 더하면 어떤 말이 되며, 어떤 단어에 정제하여 넣을 수 있을 질 고민했다. 답은 하나였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 요즘 부정맥이 온 것 같다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는 그 얕은 수에 속아 넘어가 주었는지, 젊은 나이에 고생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우리 고모도 부정맥이 있었는데, 하면서 말을 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스가와라의 것보다 상쾌했고, 바닷바람처럼 몰려왔다.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있는 책을 바라보고, 자신이 내린 결론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에게 향하는 이 모든 치받침들을 더해 한 단어에 정제하여 시를 만든다면, 그 모든 편린들을 모아 한 곳에 녹여 문장을 만든다면 스가와라는 단 한 문장 밖에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은 도서관의 바다를 만드는 속삭임들이, 그 책 냄새들이 어느 책부터 기원했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맥락 없고 두서없는 문장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짝사랑하고 있다.’ 그의 시어는 다만 그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정맥이 있는 고모의 이야기에서, 요즘 자신이 연습하고 있는 서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꾼 지 오래였다. 풍랑처럼 갑작스러운 그가 스가와라 자신에게 서서히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살풋 웃었다. 그를 보며 오이카와 또한 웃었다. 벤치에서 네트를 건너 볼 수 있던 웃음이었다. 그는 그 웃음이 자신에게 온전히 밀려오는 감각을 상상했다.


   무슨 생각 해? 오이카와가 물었다. 글쎄, 스가와라는 말을 흐리면서 그의 손 안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걸 보고 제목이 ‘섹시하다’고 하는 걸까?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책의 제목을 잔잔히 훑다가 다시 글쎄, 하고 대답했다. 그의 얼버무림에 오이카와는 다시 웃었다. 그는 자신도 그 책을 사야겠다면서 손을 뻗었다. 같은 책이 손 안에 두 권. 하나의 배구공으로 랠리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 설렘이 스가와라의 손가락 끝부터 심장으로 착실히 맥을 뛰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스가와라는 얌전히 그 뒤에 끌려가면서, 예전에 타케다 선생이 판서했던 문장을 떠올렸다. 좋은 말이었다.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것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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