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야하쿄] 초콜릿 에클레어와 그 위 아몬드의 사정 1.

1.

As we danced in the night, remember




***

   2학년은 3학년이 되고, 아무것도 모르던 1학년은 2학년이 되었다.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건너건너 들었다. 와타리와 같은 반이기 때문이었다. 봄고에서 또 시라토리자와에게 졌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와타리가 심하게 우울해 하는데서 알 수 있었다. 쿄타니는 몇 가지 형식적인 안부를 전했다. 와타리는 그에게 ‘너도 이제 이학년이구나’ 하는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남겼다.

   삼학년들 갔어? 라는 물음에 와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요즘 짠 식단과 근육 트레이닝 방식이 괜찮은 것 같은지 물어볼 뿐이었다. 쿄타니는 단백질로만 가득 찬 식단을 보면서 그가 좋은 리베로가 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와타리는 쿄타니가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바의 안부를 전했다.


   “점프서브는 아직 무리지만, 스파이커 다루는 법을 연구하고 있어.” 

   “그래?”

   “응. 걘 좋은 세터가 될 거야. 아직은 오이카와 선배의 시대지만.”


   와타리는 삼학년이 은퇴하고 난 다음의 소식을 짧게 전했다. 쿄타니도 길게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야하바와 배구부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할 때 마다 구월의 기억이 번져왔다. 눈에 띄는 열기도,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추위가 없는데도 가을은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와타리는 봄고까지 남아있던 삼학년들이 은퇴하면서 오이카와가 좀 더 스파이커를 잘 다루게 됐단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 그는 영리한 스파이커 하나와 키가 큰 미들블로커가 들어왔다고 전하면서, 아오바죠사이는 이번에야말로 시라토리자와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는 진지했다. 쿄타니는 와타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개인적인 라이벌이 팀 전체의 라이벌로 진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를 볼 수록 야하바의 모자람을 깨닫게 됐다. 이미 그는 완성형 세터였다. 어느정도 배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오이카와와 야하바의 실력차이를 인정할 것이었다.

   약한데도 왜 배구를 할까, 왜 정세터 자리를 노리면서 포기하지 않는걸까. 쿄타니는 이 두 개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단순하고 발화점이 낮은 성격이었지만, 물어볼 상대가 잘못 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와타리는 오이카와를 보고 리베로로 전향하길 희망했다. 쿄타니는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한 번 배구부에 얼굴 비춰. 미조구치랑 야하바가 걱정해.” 

   “내놓은 자식인데.”

   “성경에서도 탕아는 환영했어.”

   “나 교회 안다녀.” 

  “뭐 그렇다는 거야.”


   네가 온 다면 팀에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니까, 모두가 환영할 거고. 와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순박한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지는 모습에서, 쿄타니는 야하바를 떠올렸다. 그는 와타리보다는 화려하게 웃었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은 어째 오래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잊히지가 않았다. 그의 친절함이 녹지 않는 설탕처럼 남았기 때문이었다. 쉬는시간의 끝이 알리는 종이 울렸다. ‘소녀의 기도’였다.

   다음 교시는 문학이었지만 쿄타니는 집중 할 수 없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던 시간은 종종 목적을 두고 달려갈 때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펜이 돌아갔다. 쿄타니는 딛고 있는 바닥이 회전하는 상상을 했다. 무중력 상태처럼 책상과 의자가 모두 들려, 학교 전체가 회전하는 공상의 끝은 야하바의 얼굴이었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번져오고 있었다.

   쿄타니는 배구를 잘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재능을 믿고 코트 위에서 날뛰는 난폭한 자신을 보좌해줄 수 있는 사람. 그 다음에 좋아하는 것은 제 플레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세터 정도였다. 그의 원칙대로라면 그는 오이카와를 생각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시라토리자와전에서 보여줬던 세밀한 플레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배구부에 나갈 것인지를 재야만 했다.

   하지만 그 보단, 야하바가 생각났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쿄타니는 2학년이 되고 나서 한 번도 배구부에 나가지 않았다. 신입생들의 얼굴도 몰랐다. 배구부 져지를 입은 적도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교복을 억지로 입고 교실 안에 ‘놓여’ 있었다. 그는 선반에 맞지 않는 장식품처럼 행동했다. 그가 배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와타리가 말을 걸 때와, 그의 목소리에서 야하바의 소식을 듣고 난 다음 뿐이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한다. 초콜릿 에클레어 같은 성격은 여전할 것이다. 1학년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할 거고, 1학년 안에서 세터가 있다면 그가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 않도록 힘낼 것이었다. 신입생들과 선배 사이의 가교 역할도 나름대로 잘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와타리는 감독이 차기 주장감으로 야하바를 생각하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하바의 목소리가 빈 노트 위로 번져왔다. 같이 다닐 때의 이야기였다. 신입생 때는 곧잘 붙어 다녔다. 먹을 걸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쿄타니의 말에, 야하바는 그게 뭐냐고 타박하면서도 밀어내진 않았다. 그게 그 나름의 친절함이었다. 쿄타니는 제가 한 말이 억지스럽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야하바가 초콜릿 에클레어라면 쿄타니는 규동이나 팝핑캔디 같은 사람이었다. 요컨대, 그와 매우 다른 카테고리에 속해있다는 뜻이었다. 비슷한 점은 없었다. 쿄타니는 견과류를 좋아했고, 야하바는 견과류를 싫어했다. 단 걸 곧잘 먹는 야하바와는 달리 쿄타니는 그런 걸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나는 세터였고, 하나는 윙스파이커였다. 그들은 그 정도의 거리감 안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볼트와 너트는 그 모습이 다르기에 서로를 조일 수 있다. 쿄타니와 야하바는 다르기에 더 같이 다녔다. 모르는 세계를 체험한다는 건 고등학교 1학년에게 있어서 재미있는 일이었다. 고된 배구부 연습을 마치고 그들은 항상 편의점에 들렀다. 야하바는 달고 단 푸딩을 고르고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에클레어를 구경했다. 쿄타니는 옥수수로 만든 간식과 작은 봉지 과자를 고르는 편이었다.

   가끔은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있었다. 물론 야하바는 초콜릿이 가득 박힌 아이스크림이었고, 쿄타니는 팝핑캔디가 들어 있는 콘을 골랐다. 가을이지만 더웠다. 가로등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야하바가 말하고 쿄타니가 들어주는 식이었다. 야하바의 이야기는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는 청자가 싫어할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의 시작점은 언제나 달랐다. ‘가을이지만 좀 덥다’가 될 때가 있었고, ‘오늘은 좀 춥네’ 가 될 때가 있었다. 문학선생님이 내주는 과제의 악독함에 대해 말하거나, 삼학년 선배들이 스포츠추천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꼬를 틀 때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야하바는 그래도 시라토리를 이긴다면 갈 수 있다고 말했고, 쿄타니는 그래도 무리라고 대답했다.

   시작점은 이렇게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 앞 에클레어 전문 카페에 다다를 때쯤이면 이야기는 언제나 ‘미래의 아오바죠사이’로 향하곤 했다. 그는 와타리가 대단한 리베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쿄타니도 이 의견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와타리의 성장은 어마무시했다. 그는 보는 눈이 좋은 편이었다. 신체 또한 유연했다. 연습량도 아끼지 않았다.

   야하바는 와타리가 등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자신이 셋업을 넣는 2년 후의 아오바죠사이에 대해서 말했다. 야하바의 상상에서 점수를 넣어 경기를 결정짓는 건 언제나 쿄타니였다. 1학년에는 스파이커 자원이 딸린다면서 투덜거리는 야하바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쿄타니는 이게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폭신폭신하게 친절한 사람이 초콜릿 같은 속을 보여준다는 게. 그리고 그게 자신이라는 게. 그는 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야하바의 공상에는 괜히 토를 달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약간의 여름이 그의 볼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빼줘.”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 야하바는 왜? 하고 물어왔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큰 그림에는 쿄타니가 들어간다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는 뭐가 불안한건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선배들은 봄고가 끝나면 다 없어지고 2학년 선배들은 좀 괜찮은 편이니까 계속 연습에 나오라고 졸랐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쿄타니는 그럴 때 마다 못하는 세터가 올리는 공을 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야하바는 애매하게 웃어 넘겼다. 그는 2년 후의 아오바죠사이에서는 잘하는 세터가 1번을 달고 남아 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자신이 올리는 셋업을 쿄타니가 불만 없이 칠 수 있을 거라는 야하바의 말은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입 안에 진하게 남는 말이었다. 쿄타니는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야하바는 그런 말을 잘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배로는 잘하는 세터 말고 좋은 미들 블로커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쿄타니 정도의 스파이커가 있으니까 약점은 중앙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 때의 가을바람은 2학년 봄에 가득 달라붙어 있었다. 쿄타니는 와타리가 이야기하던 1학년 후배들을 떠올렸다. 선배들이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쿄타니는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것은, 일 년 동안 야하바 시게루가 태양빛에 가려진 별처럼 박혀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쿄타니가 그린 미래의 아오바죠사이의 풍경이 아니었다.

    신입생 중에 레귤러 번호를 받은 건 단 두 명이라고 했다. 겨울 연습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둘은 어떤 난폭한 토스라도 네트 너머로 넘길 수 있는 녀석들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쿄타니가 반문하자 와타리는, 그들이 예전에 호흡을 맞췄던 세터가 ‘코트 위의 제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쿄타니는 윙스파이커 포지션으로 코트 위에 서 있는 신입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차피 배구부에 돌아간다면 그의 자리는 마땅히 쿄타니가 가져올 것이었다. 연습을 오래 쉬긴 했지만 1학년 보다는 자신이 쓸 만한 전력일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의 판단은 몰라도 감독의 판단은 그럴 게 분명했다.

   신경 쓰이는 건 미들블로커였다. ‘킨타이치’라는 이름은 만화 같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쿄타니 나름의 농담에, 와타리는 꽤나 성실하고 키가 크다고 대답했다. 그는 야하바가 요즘 일학년을 챙겨주는 데 재미가 들렸다고 덧붙여 말했다. 쿄타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와타리에게서 문자가 쉴 틈 없이 왔다. 어지간히 문학 시간이 졸린 모양이었다. 넌 평소에는 안 그러는 데 문자 할 때는 시끄럽다. 쿄타니의 말에 와타리는 그저 웃는 이모티콘 여러 개를 보낼 뿐이었다.

   ‘킨타이치’라는 미지의 미들블로커에 대해 생각하면서 쿄타니는 야햐바의 미래상을 떠올렸다. 지금의 마츠카와처럼, 중앙 센터라인을 강하게 받쳐줄 미들블로커가 들어온다면 편해 질 거라는 말이었다. 야하바의 소원대로 인원이 충원되고 있었다. 지금 쿄타니의 자리에 있는 윙스파이커도, 지금 윙스파이커인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가 졸업한다면 레귤러 한 자리를 꿰찰 게 분명했다. 쿄타니는 슬슬 배구부로 돌아가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의무감이었다. 쿄타니는 배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야하바의 미래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건 싫지 않았다. 야하바가 간간히 와타리를 통해서 연락을 취해오는 것은 아직 미래의 아오바죠사이를 그리는 그림에 여전히 쿄타니가 있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슬 연습에 나가야 겠어. 쿄타니는 와타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지 의외로 답장이 금방 왔다. 오늘부터 갈 거냐는 물음에 쿄타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와타리는 오늘 연습시합이 있다고 말하면서, 참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면서 웃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창 밖 너머에서 늦게 지는 벚꽃이 일렁였다. 쿄타니의 손에서 미미한 진동이 잡혔다. 와타리였다.


   [ 오이카와 씨가 조금 아파서 오늘 주전 세터는 야하바야 ]

   [ 연습경기에서 주전 하는 게 처음이라서 좀 긴장하고 있을 걸? ]


   그 문자는 의외로 깊게 남았다. 쿄타니는 정말이냐 물었다. 와타리는 오늘이 ‘카라스노 고등학교’와 연습시합이 있는 날이지만, 불행하게도 오이카와가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는 가벼운 염좌라고 말하면서, 그의 다리가 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걱정을 했다. 그는 지금의 아오바죠사이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쿄타니는 그가 빨리 졸업했으면 싶다고 문자를 쓰다가, 괜히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와타리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카라스노의 세터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쿄타니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정보였다. 그의 미래에서 세터는 야하바면 충분했다. 그는 꿈결 같은 그림을 다시 상상하다가 책상 위에 엎어졌다. 봄이 창문을 불법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입 안에서 초콜릿의 달달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봄이었다. 배구부 건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바뀐 건 라커룸을 사용하는 사람뿐이었다. 와타리는 쿄타니의 사물함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3학년들이 졸업하고 나서 라커 위치를 대대적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와타리가 사용하던 걸 이름을 까먹어 버린 윙스파이커가 쓰고, 야하바가 쓰던 걸 ‘킨타이치’가 쓴다고 했다. 새로 개편한 배구부의 레귤러 20명 중 1학년은 두 명 뿐이었다. 그래서 쿄타니의 사물함은 옮기지 않아도 됐지만, 그래도 2학년이기 때문에 위치를 바꿨다는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이걸 주장한 건 야하바라고 했다.

   하지만 라커룸에서 야하바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쿄타니의 사물함은 라커 구석에 있었다. 와타리의 바로 옆이었고, 야하바와는 등지는 자리였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라커 안으로 들어왔다. 쿄타니는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넌 진짜 변한게 하나 없다는 목소리들이 울렸다. 그들에게는 존경심도, 애정도 없었기에 쿄타니는 그들에게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여러 명이 들어왔다가 환복을 하고 가 버렸다. 그 흐름에서 야하바는 여전히 없었다. 쿄타니는 밑으로 내려갔다. 미조구치와 마주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연습에 다시 나오는 거니? 하고 묻는,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에 쿄타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딜 가냐고 물어보는 코치의 말에 그는 유니폼을 가지러 간다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힘이 빠진 발걸음에서 턱턱 소리가 났다.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목소리들이 가까이 닿았다가 밀려와 사라졌다. 얼굴을 전혀 모르겠는 걸 보니 신입생들인 모양이었다. 개중에 ‘킨타이치’가 섞여 있을까 쿄탸니는 그들 무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뭉쳐있던 신입생들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도망갔다. 쿄타니는 이 상황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느릿하게 걸었다. 연습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체육관 밖으로 뻗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쿄타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야하바는, 심하게 긴장한 모양이었다. 쿄타니는 저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를 떠올렸다. 팀을 반으로 갈라 하는 연습게임에서 간혹, 그는 오이카와를 대신하거나 지금은 졸업한 3학년 세터를 대신해서 들어가곤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심하게 긴장했고 자신의 셋업을 올리지 못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마다 화장실에 박혀있을 때도 있었다.

    중학교 때도 주전이었을 텐데 왜 그러냐는 타박에 야하바는 언제나 애매하게 웃었다. 쿄타니의 놀림이 심해질 때면 진심으로 분한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하게 넘어가려고 했다. 쿄타니는 그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떠올렸다. 짜증을 내기 시작했던 건 언제 부터인지 그는 쉽게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다만 연습을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하던 9월 이후일 거라고 추측 할 수는 있었다.

    쿄타니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체육관에 붙어있는 화장실 보다는 거기가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기억 해 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렸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지나갔다. 쿄타니는 오늘 연습시합 상대가 ‘카라스노’ 였다는 걸 다시 기억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쿄타니가 오늘 연습에 나간다고 해도 그가 코트 안에 설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두 사람이 자갈을 저미면서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쿄타니는 천천히 다가갔다.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야하바는 웃어주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는 걸 선택했다. 기억 속과는 매우 다른 반응이었다. 옆에 있던 모르는 얼굴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야하바에게 ‘누구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순박한 눈매가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쿄타니는 괜히 침을 뱉어 바닥에 비볐다.


   “안녕.”


   먼저 입을 연 건 쿄타니였다. 안녕, 하고 야하바가 대답했다. ‘안녕’이라는 같은 글자에 들어있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같이 있지 않던 나날들이 둘 사이에 쌓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키 큰 멀대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해 킨타이치, 이쪽은 2학년의 쿄타니. 배구부 ‘빈 라커’의 주인공이야. 라고 소개하는 야하바의 목소리는 묘하게 냉랭했다.

   봄에서 겨울이 충분히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닿은 것만 같았다. 자정에 가까운 구월 밤 느낌도 나곤 했다. 노을 같은 기분이 퍼져나갔다. 킨타이치는 구십도로 몸을 굽히면서, 1학년 미들블로커 킨타이치 유타로입니다! 라는 문구를 외쳤다. 입학이 결정 된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수도 없이 말했을 자기소개였다.


   “어.”

   “좀 더 상냥하게 받아줘. 후배잖아.”


   야하바가 말했다. 쿄타니는 그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괜히 뒷목을 쓸었다. 킨타이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밟는 자갈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하바는 한숨을 깊게 쉬더니, 연습에 다시 나오는 거냐 물었다. 쿄타니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킨타이치를 바라보았다.

   키 큰 미들블로커였다. 순하게 생기기도 했다. 야하바의 미래에 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야하바는 쿄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단단한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담기는 모습을 보면서, 쿄타니는 괜히 삐뚤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들른건데.”

   “나와.”

   “명령이야? 고작 오늘 주전이라고... 너 뭐라도 됐냐?”

   “나오라고.”


   야하바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킨타이치는 싸움을 말리려는 듯 어중간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성질이 났다. 나와라, 봄고에는 너랑 나랑 같은 코트에 설 수도 있잖아. 같이 오렌지 코트에 설 수도 있을거고. 야하바는 쿄타니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을 꺼냈다.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야하바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잘 재는 남자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팔짱을 끼고 있는 야하바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일학년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대 쳐버리면 속이 풀릴 것도 같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대신 쿄타니는 제가 긁을 수 있는 걸 긁기로 결심했다. 무른 사람일 수록 상처받기 쉬운 법이었다.


   “니가? 봄고에?”


   잘나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쩌시고? 쿄타니의 물음에 야하바는 대답하지 못했다. 밀가루 같이 하얀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야하바의 미래에서 자신이 소거 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생각. 그의 셋업을 잘 살릴 수 있는 스파이커는 자신 뿐이었다. 일학년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쿄타니는 둘 사이의 단절된 기간을 기억하지 않았고, 야하바는 그를 기다린 기간을 셈하고 있었다. 이것이 둘의 세계에 커다란 격절을 불러왔지만,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몸을 파르르 떨던 야하바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라 쿄타니는 그걸 몇 번이고 되물어야 했다. 그러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오늘은, 내가 세터야!”

   “그래, 잘 해라.”


   그가 외친 말에 쿄타니는 뭐라고 대답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응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을 지나치고자 했다. 오늘 얼굴을 보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을 봤으니 퇴장하자는 심정이었다. 주인공이 무대에 너무 올라 있는 것도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요소였다. 야하바는 뭔가 더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쿄타니는 그와 자신의 '사이'가 크레바스처럼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많이 만나지 않았으니까. 오랫동안 보지 않았으니까. 격변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쿄타니는 그들을 지나쳤다. 등에 시선이 꽂히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분명 야하바일 것이다. 쿄타니는 자신이 잡아줬으면 좋겠으면서도, 잡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감정들을 밟고 걸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서투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해도 괜찮습니까?”


   킨타이치가 야하바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역 앞에 에클레어 가게에 대해서 말을 걸었다. 그는 거기에 혼자가기 쪽팔리다는 말을 꺼내왔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야하바는 오늘 연습이 끝난 다음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연습경기가 있는 날은 일찍 끝나니까, 라는 말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킨타이치’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쿄타니는 연습을 좀 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단단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그가 가를만한 것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곧 즐길 수 없으면 회피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들을 지나쳐갔다. 애매한 이질감이 있었지만 쿄타니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연습 나와.”


   멀어져가는 쿄타니의 뒷모습에 야하바가 말을 걸었다.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아 쿄타니는 뒤를 돌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에서 둘의 속삭임이 들렸다. 여전히 디저트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목소리들에 짜증이 났다. 그는 뒤를 돌았다. 둘은, 정말로 친해 보였다. 아직 봄이었고, 킨타이치는 신입생이었다. 친해질 이유도, 기간도 없었다.

   억울함이 몰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킨야하쿄] 초콜릿 에클레어와 그 위 아몬드의 사정 0.

   야하바 시게루는 좆도 없는 새끼였다.

   적어도 쿄타니 켄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하바 시게루는 친절했다. 특히 여성하게 상냥했지만, 실력 없는 선배들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초콜릿 같았다. 하지만 마냥 뭉개지지는 않았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오는 격절의 시간, 새로운 팀에 적응해야 하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그는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급류 속에서 뿌리를 박고, 물살을 둘로 갈라 지나가게 하는 돌 같기도 했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리는 파베 초콜릿보다는, 부드러우면서 고체 같은 ‘초콜릿 가공품’ 같은 느낌이었다. 선배들은 실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우대받으려고 한다. 고작 1년, 혹은 1개월 차이 밖에 나질 않으면서. 학교에 먼저 입학한 것이 유세라는 양. 쿄타니는 그런 배구부의 위계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진행되는 배구부의 겨울 연습에서, 예비 1학년들은 2학년으로 올라가는 선배들의 연습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명백하게 모자랐다.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몇 명을 제외하면 왜 레귤러 20명에 선발되어 있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많았다. 쿄타는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달랐다. 그는 긴장한 1학년들과 날이 선 2학년들 사이를 능숙하게 파고들어갔다. 때로는 허당처럼 굴고, 때로는 배구에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련했다. 그 나름의 ‘생존전략’이겠지 싶었다. 팀이 격변하는 시기의 2학년들은 늘 날카롭다. 학교가 강호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천재’에 대한 경계. 노력해서 얻은 레귤러 자리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1학년들의 실력은 그들에게 있어선 미지수다. 1학년에서 막 벗어난 2학년들에게 있어서, 신입생들은 후배가 아니라 ‘라이벌’로 생각된다. 자기가 움켜 쥔 성과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오바죠사이처럼 현 내 베스트 4를 차지하는 고등학교라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야하바 시게루는 달랐다. 그는 노련하게 선배들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선배들에게 셋업을 올리는 방법을 질문하고, 중학교 때 묻은 버릇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그는 2학년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이와이즈미에게 먼저 다가갔다.


   두 사람은 친절했다. 야하바는 꼬리를 치는 개처럼 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묻고 녹아들려고 했다. 남자들만 있는 무리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인정은 대단한 훈장이다. 오이카와는 야하바를 ‘마음에 든다’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못 미치는 실력이면서 싹싹하게 군다는 표시였다. 쿄타니는 오이카와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그 인정이 기쁘다는 듯,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선배들의 장벽을 서서히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급생을 서운하게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같은 포지션의 와타리 신지와 유달리 친했다. 신입생들이 해야 하는 코트 수리나 바닥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도왔다. 그는 달콤한 남자였다. 달다는 건 위험하다. 눈치 채고 나면 그 맛에 빠져 휘적거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단 한 살 차이가 나지만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연습량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변화한다. ‘격변’이라는 단어를 써야 마땅했다. 모두가 적응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야하바만이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빠른 유속에도 휩쓸리지 않는 바위처럼. 유연하고 또 유연하게. 그는 연습에 따라가지 못 하는 동료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였다.

   대놓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플러스 포인트였다. 말끔하게 생긴 주제에 연애를 몇 번 못 해봤다는 것도 선배들에게 있어서 ‘재미있는 점’으로 작용했다. 쿄타니는 그런 야하바가 좆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잘 보인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실력 없는 선배는 앞길에 방해가 될 뿐이다. 야하바가 팀에 녹아갈 수록 쿄타니는 팀에서 겉돌았다.

   그것은 야하바 시게루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제 자리에 있었고, 그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중력 때문에 멋없는 소행성이 제멋대로 궤도에서 이탈한 것뿐이었다. 야하바가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일수록, 쿄타니는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올라간 공을 뺏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부적응자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쿄타니는 반추反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모든 돌발 행동은 명백하게 야하바 때문이었다. 발버둥 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어렸다는 걸 깨닫는 건 언제나 크고 난 다음인 법이었다. 그는 저에게 뻗어오던 손을 추억했다. 길고, 여린 손이었다. 중학교 내내 배구공을 만졌을 게 분명한데도 고왔다.

   언젠가 쿄타니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둘 만 남았을 적이었다. 둘은 각자의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는 행성이었다. 서로의 영향권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햇병아리 같던 신입생 시절을 지나, 여름의 인터하이를 겪고 만난 고등학교 1학년의 가을이었다.

   야하바는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와 함께 미팅에 나간다고 했다.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선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야하바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지나갔고, 마츠카와가 자기는 미팅에 끼워주지도 않는다면서 투덜거렸다. 야하바는 어차피 자기는 ‘배경’ 역할이라면서 자신을 낮추면서 웃었다. 네가 배경? 그건 하나마키겠지! 마츠카와는 유쾌하게 말했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서 쿄타니는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괜히 운동화 앞코를 봤다. 아스팔트에 깔려 있는 자갈을 발로 찼다. 어디 딱히 갈 곳도 없었고,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그나마 쿄타니가 말을 붙여본 건 와타리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연습실에 남아있었다. 최근 포지션을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떠나가고 둘 만 남아 있었다. 여름이 애매하게 남아 있는 9월이었다. 두유 리멤버, 으흥흥흥흥 셉템버, 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야하바와 눈이 마주친 건 그 때였다. 아직은 강한 햇살과 더 높아지지 않은 하늘이 답답해져온 것도 그 때였다. 그와의 거리감이 가시지 않은 더위처럼 훅 끼쳐왔다. 그 때 야하바는 그렇게 물었다.


   -초콜릿 에클레어 좋아해?


   마법 같은 단어였다. 어색한 말이기도 했다. 입 속에서 굴러가는 발음들은 정제되지 않은 계절처럼 이상했다. 쿄타니는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초콜릿, 에클레어 하고 발음하자 야하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그걸 먹으러 가는 거라면서, 미팅은 뒷전이라고 말했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너 여자 좋아하잖아.

   -여자애랑 같이 있으면 디저트 먹는 데 눈치 덜 보이거든.


   야하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한 번도 안 먹어봐서 몰라, 하고 쿄타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나중에 먹으러 가자면서 눈을 반짝였다. 쿄타니는 그의 말에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을 입은 건장한 배구부 남자 두 사람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디저트를 사이에 두고 포크를 움직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야하바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상상했어? 하고 말하자 쿄타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고 있네,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능글맞았다. 쿄타니는 그에게 저런 면이 있는 지 정말 몰랐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야하바는 제 발 끝만을 보고 있는 쿄타니를 보다가 정말 맛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역 앞 카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거기가 가장 맛있다고 웃던 야하바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쿄타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야하바는 머리를 잔뜩 매만지고 온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쿄타니도 카페 까지만 같이 가겠다고 선언했다. 요상한 조합이네~ 하며 오이카와는 웃었다. 승낙이었다.

   쿄타니는 야하바에게서 일 미터 정도 떨어진 뒤에 걸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가을 바람에 잔잔히 흩어졌다. 햇빛을 받으면 캐슈넛 색으로도 보이는 은발이었다. 그의 사락사락한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났다. 쿄타니는 그렇게 그를 따라갔다. 카페 앞에서 야하바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소리를 했다. 쿄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쯤을 퉁명스럽게 서 있자, 야하바는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초콜릿 에클레어를 샀다면서 웃었다. 집에 가서 먹어보고 이야기 하자, 라는 말은 상냥했다. 가을처럼 시원하기도 했다. 그 날은 구월 이십일일이었고, 오후가 점점 가물가물해져 밤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 총체적으로 애매한 시간 뿐이었다.

   그 날 쿄타니는 역 앞 카페의 문짝을 회상하며 초콜릿 에클레어를 먹었다. 약간 열린 문 틈 안에서 야하바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문에 칠한 페인트는 물에 한 번 개어 사용했는지, 나뭇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홍색과 연두색을 겹쳐 바른 문은 봄 색이었다. 져가는 가을과는 관계가 없는 사랑스러운 색이었다.


   초콜렛 에클레어는 달았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빵으로 초콜릿을 감싸 혀 전체가 달아지진 않았다. 신기한 맛이었다. 여기가 가장 맛있다던 야하바의 목소리가 자꾸만 번져왔다. 꿈 같은 목소리였다. 포크로 에클레어를 찍을 때 마다 쿄타니의 기분은 투명수채화 속 정물 같았다. 그는 그 애매한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방아쇠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당겨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동에 나갈 수 없었다. 공을 셋업하는 서툰 모습을 볼 때 마다 그 날 먹은 초콜릿 에클레어 속의 버터 맛이 느껴졌다. 위에 올린 아몬드의 딱딱한 껍질처럼 배겨오는 ‘애매함’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인 가을과 같았다. 야하바와 하교를 할 때 마다 아몬드가 목에 번진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쿄타니는 이런 애매함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삼학년과 같이 들어 간 코트에서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일학년의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그 당연한 순리마저 넘으려고 했다. 규칙을 무시한 톱니바퀴는 아귀에 맞지 않는다. 아오바죠사이의 배구에 균열이 생긴다는 감독의 말도 듣기 싫었다.

   그 날 코트에 있던 선배는 야하바와 친한 선배였다. 야하바는 그 날 초콜릿 에클레어를 하나 더 건네며 그를 타일렀다. 지나치게 상냥했다. 달콤함에 빠져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맞을 것이다.


   9월 21일이 진하게 번져왔다. 그것도 지나치게 달고 폭신한 맛으로. 

[마츠스가] 어느 맑은 날에


 마츠스가로 스가와라 생일합작에 참여했습니다>ㅅ<)/ 

 스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합작페이지는 >> 이쪽 <<이에요!









01.

나는 매우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사람인데 말야


   북유럽신화에서 운명은 세 여신이 만든다고 한다. 과거가 실을 짜서 모양을 만들면, 현재를 다루는 여신이 실을 정리해서 아이들에게 분배한다. 어떤 인생을 거칠지, 어디서 기복이 있을지, 언제 죽을지 따위가 적혀 있는 실타래는 갓 태어나는 아이들의 손목에 묶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미래를 알 수 없는 건 이 실이 배달될 때 미래의 여신 스쿨드가 실타래를 흐트러트려, 잔뜩 엉켜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영어 책의 지문을 해석하며 연필을 굴렸다. 주말을 연습으로 보내고 나니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차라리 눈 뜨면 연습하던 게 훨씬 더 나았다. 마츠카와는 어딘가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앉아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6월은 6월인지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볕에는 여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마츠카와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나름 학교를 대표하는 배구팀의 3학년 레귤러인데, 조금 수업을 빼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었다. 그 생각은 앞에 앉은 하나마키도 동일한지, 그는 수업시간 내내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허리를 쭉 펴고 목을 늘려서 그가 쓰고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신인은 확인 할 수 없었지만 명백한 사랑의 메시지였다. 까졌네,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하나마키가 뒤를 돌았다.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당당하게 내밀어 보이고 엿 먹어, 하고 입으로 속삭였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까딱였다. 하나마키를 놀리는 게 재미없었다. 사랑에 빠진 놈을 들쑤셔봤자 얻는 것은 들어 봤자 재미없는 애인 자랑 뿐이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이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었다. 비를 머금고 있는 놈은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얬다. 그는 턱을 괴고 책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카모토의 이름이 불렸다.

   지문을 해석하는 목소리 너머에 있는 건 끊임없는 졸음뿐이었다. 마츠카와는 넥타이를 끌렀다. 목이 답답한 것도 같았다. 그는 다시 구름을 보다가 영어 교과서 귀퉁이에 샤프로 낙서를 했다. 구름의 모양을 하던 그것은 연한 회색으로 칠해졌다. 손에 맞지 않는 샤프가 자꾸만 미끄러져서, 그가 원하는 회색 보다는 한 톤 진한 음영을 만들었다. 마츠카와는 그 그림자 같은 무채색들을 보다가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어색한 발음의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돌다 혀를 빠져나왔다. 얼마 전 연습게임을 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다. 그가 아는 건 ‘스가’와 ‘스가와라 선배’라는 이름 조각뿐이었다. 성이 여섯 글자인 건 매우 드문 경우니까, 아마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뭐뭐뭐’거나, ‘스가뭐뭐 와라뭐뭐’일 것이었다. 마츠카와는 그의 이름을 공책에 적고 ‘뭐뭐’와 ‘뭐뭐뭐’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는 그가 아는 이름 중에서 어울릴만한 것들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의 소일거리는 방해받지 않았다. 마츠카와의 옆에 앉은 사카모토 군이 의외로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고, 하나마키가 결국 핸드폰을 건드리던 걸 들켰기 때문이었다. 고소한 일이었다. 짓궂은 성격의 영어 선생님은 그가 보내려고 하던 문자를 읽었다. 마츠카와는 그걸 가만히 듣다가, ‘스가뭐뭐 와라뭐뭐’나 ‘스가와라 뭐시기 (뭐시기의 범위는 1~4 이내로 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군의 이름에 들어갈 한자 몇 개를 잃어버렸다. 그는 혀를 쯧쯧 찼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그에게 사카모토는 아직도 인생이 무기력하냐고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츠카와는 만약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제 손목에는 늘어지고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감아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스가뭐뭐 (이하 마츠카와는 편의를 위해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을 ‘스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군의 이름은 알고 싶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히라가나로밖에 적을 수 없는 그의 이름이 담을 수 있는 의미들을 생각하다가 책상에 엎어졌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수업 종이 울렸다. 하나마키는 영어 선생님의 뒷꽁무늬를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새끼 새 마냥 종종종 따라갔고, 마츠카와는 그 모습을 힐끔 보다가 눈을 감았다. ‘스가 군’의 이름을 알법한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오늘 연습을 빼먹기로 결심했다.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사람은, 자신이 짜놓은 사이클에서 쉽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쉬는 것조차 일이었다. 비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마츠카와 잇세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땡땡이 치고 남은 시간에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벌어진 입에 파리가 들어가도 모르겠다면서 사카모토가 웃었다. 시끄러워,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여름 햇볕이 얼굴을 쪼듯 쏟아져 왔다.






02.

스가와라 뭐시기 군, 혹은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


   오이카와는 마츠카와가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다고 생각했다. 5월에서 6월로 오면서 기온이 올라가긴 했지만, 사람이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마츠카와의 기분파적인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했던 튀는 행동보다, 지금 이 순간 내뱉고 있는 말들이 더 이상했다. 갑자기 돌았니? 라고 물어보기도 뭐해 오이카와는 도시락을 깨작였다. 문어모양으로 가른 소시지가 맛있었다.

   마츠카와는 갑자기 점심시간에 갑자기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오이카와를 불러냈다. 여자아이들이 비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오순도순 모이는 것처럼,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와 옥상의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이카와가 교복 바지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손수건을 깔고 앉는 것까지 기다려 줬다. 그는 오늘의 마츠카와의 회전축이 약 3도 정도 기울었음을 확신했다.


   “그러니까 맛층, 단순히 그 애의 이름을 알고 싶다구?”

   “응. ‘스가와라’ 뭐시기인지 ‘스가뭐뭐 와라뭐뭐’인지 알고 싶어.”

   “보통은 스가와라가 성 아닐까?”

   “하지만 너 우시와카를 우시와카라고 부르잖아.”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그의 제멋대로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츠카와는 이름이 궁금하다고 말하면서 딸기우우를 마셨다. 야키소바에 딸기우유라는 조합은 제법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오이카와는 오늘 이와이즈미의 도시락 반찬이 고로케였던 걸 기억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왜 이런 이상한 상담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가 투덜거리자, 마츠카와는 입 안에 들어있던 야키소바빵을 다 먹고 입을 열었다.

   네가 그나마 제일 잘 알 법 하잖아. 라는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면서, 카라스노에서는 토비오와 치도리야마의 니시노야 밖에 모른다고 대답했다. 키타가와 제 1중 출신이나, 잘하는 애가 아니면 모른다는 발언에, 마츠카와는 이 땅에 내리 앉은 실력지상주의에 대해서 한탄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는 땀에 푹 젖은 여름날 불어오는 바람처럼 상쾌했기에, 오이카와는 괜히 찝찝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친구에게 물어 보는 건?”

   “나 여기로 배구유학.”

   “아 맞다. 너 도쿄 출신이었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실장아찌를 밥 위에 올렸다. 마츠카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별 생각 없이 찾아가면 되잖아? 하고 대답했다. 그는 마츠카와가 정말로 찾아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하이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고, 카라스노는 여기서 시내버스에서 마을버스로 한 번 환승해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시외권에 있었다.

   그는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입에 밥과 장아찌를 넣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오늘은 흰 우유가 아니라 딸기 우유야? 오이카와가 입 안에 있는 밥알을 반쯤 넘기고서 물었다. 마츠가와는 좀 ‘스가’라는 이름이 단 느낌이 아니냐 되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사고의 흐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츠카와는 A에서 B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단번에 E나 F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마츠카와는 설탕 생각도 나고, 좀 분홍색 같은 느낌도 들어서 딸기 우유를 사버렸다고 대답했다. 그의 부연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마츠카와가 ‘스가’라는 사람에게 단단히 빠져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온 세상이 달다고 하는 마츠카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마츠카와는 그런 그가 재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래서 맛층에게 ‘스가’는 어떤 느낌인 거야? 그냥 달아?”

   “뭔가 설탕같이 폭신폭신한 느낌 아니었나?”

   “나 그 때 늦게 와서 잘 모르겠어.”

   “그, 응원하는 게 의외로 귀여웠던 것 같고?”

   “남자애잖아.”

   “그래도 키도 작고, 좀 귀염상이고.”


   마츠카와는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좀 더 들어맞는 비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렀다. 그러나 그는 스가가 웃는 모습이나, 충고하고, 팀을 응원하기 위해서 소리 지르는 모습이 굉장히 상쾌했다는 것과, ‘달았다’는 것 밖에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얼굴마저도 드문드문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마츠카와는 ‘스가’의 눈동자 색이 지는 노을색인지, 아니면 머리카락과 닮은 겨울 색인지를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 그늘이 넓어졌다. 하얀색 구름이었다. 마츠카와는 그가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고, 좀 가까이 가고 싶기도 했다. 일단 이름을 물어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츠카와는 멋들어지게 자기소개를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잔뜩 불어버린 채로 빵 안에 가만히 잠자고 있는 야키소바빵의 누들처럼, 그의 생각이 이리저리 불어 엉켜가고 있었다.

   오늘의 맛층은 뭔가 소녀 같네. 오이카와는 도시락 통에 붙어있는 밥풀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때 마침 옥상에 앉을 자리를 찾으러 구석을 두리번거리던 여자애가 오이카와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그는 그 웃음에 손을 흔들어줬다. 마츠카와는 그를 바라보다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우유곽 안에 들어있던 딸기 우유는 이제 미적지근해지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입안에 가득 든 단 맛에 입을 다셨다. 혀를 움직일수록 단 맛이 더 퍼져왔다.

   ‘스가’도 그런 느낌일까, 하고 마츠카와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엉망인 카라스노 안에서, 매니저처럼 져지를 입고 있던 모습이 가만가만히 번져왔다. 맛층? 이제 곧 점심시간 끝나, 하고 부르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 일방적으로 본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소녀 팬 같은 느낌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일어나 손수건을 정리하는 오이카와에게 마츠카와가 물었다.

   굉장히 마법적인 일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닐 걸?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했다. 마츠카와는 빵 부스러기와 비운 우유곽을 한 손에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너머로, 오이카와가 ‘첫사랑 힘내’ 라고 말을 걸어왔다. 첫사랑까지는 아닐 걸? 마츠카와는 유월의 햇살을 잔뜩 맞으면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 하는 일이라면서 살랑살랑 웃었다. 입 안에 가득 남은 딸기 우유맛이 그저 달아, 마츠카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역시 너랑은 친구 하기 싫어. 마츠카와의 말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03.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그쪽에게 다가가고 있지 말입니다.


   “있지 스가와라 군, 혹시 사채라던가 쓴 적 있니?”


   스가와라는 가방을 챙기다가, 같은 반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있지, 굉장히 일수꾼 같은 사람이 스가와라 군을 찾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타나카나 아즈마네가 오늘 클러치 백 같은 걸 들고 학교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꼭 놀려줘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스가와라는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교문 쪽 계단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유월이었고, 스가와라의 생일 전전날이었다. 생일에 따로 모일 만큼 살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금요일인 오늘 대충 축하해 주겠지, 하고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스가와라는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서프라이즈 파티가 예정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간질거렸다. 꼴에 여름인지 아직도 해가 쨍쨍했고, 그는 오늘 제 머리를 덮을 고깔모자가 분홍색일지 주황색일지를 고민했다. 어제 다이치와 히나타가 고민하던 ‘색’은 고깔 아니면 케이크 둘 중 하나였다.

   스가와라는 오늘 아즈마네가 캡사이신 소스나 두반장 등을 선물로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집에 소스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따로 사다 놓기에는 큰 식료품점은 너무 멀었다. 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늘이 없어 머리 위가 뜨거웠다. 그는 교문께로 걸어가 ‘사채업자’ 같은 사람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좀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이었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 3번 군? 하고 말을 걸자, 그는 찾았다고 말을 걸어왔다. 나를? 하고 의아함에 다시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퉁하게 나온 입술에는 기다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왜 이름도 모르는, 아오바죠사이의 3번 미들블로커 군이 자신을 기다렸는지가 궁금했다.


   “왜?”

   “스가와라 군은 스가와라 군입니까? 아니면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 입니까?”

   “어?”

   “이름.”


   그는 뜬금없이 그렇게 질문했다. 그의 쳐진 눈은 스가와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고수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뒤에 머쓱하게 감춘 크라프트지 뭉치를 훔쳐보았다. 모든 게 뜬금없고 애매한 이름으로 맞춰져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영어 시간에 해석한 지문을 떠올렸다. 운명에 관한 지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해프닝이었지만.


   “스가와라 코우시야.”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마츠카와는 그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알려고 온 거야? 그가 물었고,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그게 신경이 쓰였다고 말하는 그는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꽤나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마츠카와의 눈은 꽤나 졸려 보였지만, 그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용건은 그것뿐이야?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는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츠카와가 손가락을 움직이는지 크라프트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츠카와는 빈손으로 제 뒷머리를 머쓱하게 쓸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는 말에 스가와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3번 미들블로커 군은 이름이 뭐야? 하고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는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가르쳐주기 싫어? 하고 묻자,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애매한 여름이 그의 볼 위에 내려 있었다. 햇볕에 내내 서 있던 모양이었다. 미들블로커 씨, 하고 운을 떼자, 그의 작은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스가와라의 얼굴을 보고서 제 이름을 말했다. 마츠카와, 잇세이. 소나무 송에 내천, 하고 이어져 오는 이름들은 애매한 설렘을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제 볼을 긁었다. 그리고 3번 아니고 2번이야. 그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상쾌했다. 마츠카와는 여전히 스가와라를 바라보다가, 이만 가보겠다면서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이 우연적인 만남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잔뜩 엉켜버리고 흐트러져버린 운명의 실타래에도 지금의 사건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너울너울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더위 먹었어? 스가와라가 큰 소리로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자리에서 멈췄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성큼성큼 다가왔다. 멀어지는 건 느렸지만, 다시 다가오는 건 빨랐다. 계속 그가 숨겨놓고 있었던 색이 든 안개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츠카와는 자기는 멀쩡하며, 더위가 안 먹었음을 설명했다. 그는 매우 횡설수설한 어조로 스가와라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했다. 그 아지랑이 같은 말에서 스가와라는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까지 온 건 이름이 궁금했기 때문이고, 단지 그거 때문에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다가 안개꽃을 봤으며, 그걸 사왔긴 했는데 어떤 핑계로 줘야할진 모르겠지만, 널 보면 딸기우유가 생각났고, 좀 몽글몽글하고 단 느낌인데 이름이 스가와라 코우시라서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 스가와라는 그가 쥐어주는 안개꽃을 얌전히 받았다.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주장하던 마츠카와는, 스가와라의 눈을 빤히 보다가 뒤를 돌아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몇 번을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걸음에 스가와라는 그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간의 등을 보는 기분과도 같았다. 마츠카와가 버스 정류장을 지나서까지 달려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돼서야 스가와라는 뒤를 돌았다. 다시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배구부실로 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스가와라는 이 안개꽃의 이름을 ‘생일선물’이라고 붙이기로 결심했다. 그게 이름을 알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마츠카와의 순정과 가장 가까운 이름일 것이었다. 그는 다음에 인터하이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그의 번호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부실로 올라갔다. 철제 계단을 올라갈 때 마다 소리가 났고, 그는 배구부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돌려 열었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폭죽 소리에, 스가와라는 활짝 웃었다. 가장 처음 축하해주겠다며 달려온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그의 손에 들린 분홍색 안개꽃 뭉치들을 보고서 눈을 깜빡였다. 여자친구, 있었슴까? 하고 물어보는 그들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먼저 온, 사채업자 닮은 친구가 하나 있었어. 그는 그 정도로 가볍게 대답하기로 했다. 유월, 생일에 가까워져오는 안개꽃 같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 날은 고민 하나 없이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