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쿠니] 사랑은 가끔, 증거를 바라요

  엔피 님께서 커플링 맞추는 하나쿠니가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오래 잡고 있던 것 치고 퀄리티가 안 나와서 슬픕니다. 둘은 연애할 때 합이 잘 맞을 것 같아요. 쿠니미는 어른스러운 척 하는 어린애라서 맛키가 간간히 보듬어주고 길러(?) 줘야 할 타이밍이 있을 것두 같습니다! 

   아무래도 엔피님께 AS 해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커플링 하나 맞추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절레절레)










***

   "그래서 쿠니미 군, 종종 데리러 오는 선배 말야, 여자 친구 있어?"


   누구? 쿠니미는 웃으면서 되물었다. 종종 받는 질문이었다. 그는 눈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있다는 여자였다. 쿠니미는 그녀가 새로운 악세사리를 구하는 걸 알아차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모른 체 하자, 그녀는 분홍색 머리에 차 있고, 스타일 좋은 남자, 라고 대답했다.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그녀는 하나마키를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숨겨서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녀가 차 없는 남자는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타입을 매우 싫어했다. 쿠니미는 이런 여자가 자신과 같은 취향이라는 게 불쾌했다.


   "사귀는 사람 있을걸?"

   "그래? 커플링 없던데."


   쿠니미는 '사귀는 사람'에 강세를 주어 발음했다. '여자 친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매번 깨끗했다면서, 깊게 사귀는 관계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쿠니미는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웃팅은 안 된다는 생각이 쿠니미의 이성을 잡아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쿠니미의 옆에 앉아있던 킨타이치가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다. 쿠니미는 심술을 부려 야하바를 소개시켜 주려다가 그만 두었다. 킨타이치의 위장을 조각조각 낼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거니와, 그녀가 한 말이 그에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커플링이 없어도 사귈 수도 있지, 그는 나름 반격했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니까, 걔랑 맞추기 싫으니까 커플링이 없는 거야. 쿠니미 군은 연애를 진심으로 한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지. 그녀는 제법 예의 없게 쏘아 붙였다. 쿠니미는 이 말의 의미가 '내가 알아서 꼬실 거니까 닥치고 연락처나 알려줘'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 섹스도 하는 관곈데'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날 것이었지만, 그 '모든 것'에는 쿠니미와 하나마키의 평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게이가 자유롭게 아웃팅하지 못하는 상황을 마음 깊이 아쉬워했다. 그는 그 형이 전화번호 다른 사람한테 알려 주는 거 싫어한다는 변명을 댔다. 그녀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기 싫다고 말해."

   "너 같은 사람한텐 선배가 아깝긴 하네."


   쿠니미는 쏘아 붙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마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찾을 수도 없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저것 귀찮아 하는 쿠니미와 달리 하나마키는 인스타그램이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SNS를 성실하게 관리 하는 편이었다. 쿠니미는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분에 차 씩씩거렸다.

   킨타이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쿠니미는 시계를 확인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서 집에 가야만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하나마키에게 뭐라도 쏘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니까, 커플링도 맞추기 싫었던 거 아냐? 쿠니미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엿을 먹여야겠다고 결심 하면서도, 하나마키가 자신에게 커플링을 맞추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점점 확신이 없어졌다. 그는 가방을 챙기고 우산을 들었다. 오늘은 하나마키의 자취방에 가기로 한 날이었으나, 쿠니미는 그가 오기 전에 얼른 달려,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자신의 자취방에 틀어 박혔다.






***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게 거짓 한 톨 없는 진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흥미 없는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제 마음에 솔직한 남자였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훌쩍 떠나버릴 것도 쿠니미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얽매고 싶지 않았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 둔 것은 쿠니미였다.

   그는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가만히 두었다. 분명 약속 장소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찾고 있을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 쿠니미는 돈나물을 찬물에 씻었다. 손끝이 차갑게 단단해졌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론 서운했다.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부모님 네 분이 다 개방적인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다행이도 하나마키와 쿠니미는 그 확률에 당첨 된 행운아였다. 집에서 이해를 받는 관계라고 해도, 주위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 결국 모난 돌이었다. 평평한 땅에서 툭 튀어 나온 돌.

   흔적이 남는 모든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이 년 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쿠니미는 돈나물을 헹구어 채에 걸렀다. 물기가 천천히 빠져 나갔다. 그는 조리대 한 구석에 그것을 방치하고 두부를 꺼냈다. 튀긴 두부가 다 떨어지고 말랑말랑한 것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두부를 굽기로 결심했다. 한숨이 그의 손가락에 매달렸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자는 건 이미 합의를 본 일일 텐데도, 쿠니미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일렁였다. 저번에 동거를 조르던 하나마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한숨을 내 쉬면서 두부를 잘랐다. 두부가 삐뚤빼뚤하게 잘라지고, 그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 있어? 하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하나마키가 들어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면서, 두부에 계란 물을 묻혀 팬에 올렸다. 계란이 익는 소리가 자글자글하게 들려왔다.


   "오늘 우리 집 가기로 하지 않았었어 자기야?"

   "나 오늘 기분 좀 안 좋은 일 있어서, 이런 기분으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쿠니미는 능숙하게 변명했다. 그는 저녁 같이 먹을 거죠? 하고 물었다. 하나마키는 물론이라고 대답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는 그의 소유욕이 아직 건재함에 감사했다. 그는 여전히 하나마키의 일순위인 것이었다. 오늘 반찬 뭐냐는 질문에 쿠니미는 돈나물을 무치고, 튀긴 두부와 영양부추 샐러드를 만들 거라고 대답했다.

   나 스팸도 구워줘.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이요리가 두 개가 되지만 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반찬은 먹어야 한다가 그들의 지론이었다. 쿠니미는 코를 킁킁거렸다. 뒤를 돌지 않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코가 시큰거릴 것 같았다. 연애란 행복 아래의 불안함을 맛보는 행위였다. 그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대학에 들어와서까지 더 자란 하나마키와, 자라는 게 멈추는 쿠니미 사이에는 은근히 체격 차이가 났다. 전화도 안 받고,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오늘 아키라 별로 맘에 안 들어. 하나마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두부를 부쳤다. 튀김 두부가 없는 거 있죠, 라는 속이 뻔히 보이는 화제전환에 하나마키는 끌려오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깨금발을 들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좋아하고 있는데, 한 순간이라도 의심했다는 사실이 쿠니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커플링이라는 징표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데도 불안 해 했다. 그는 묵묵히 두부를 부쳤다. 그는 선반을 열어 스팸을 꺼냈다.

   그는 조리대에서 양파를 썰었다. 돈나물 무침과 영양부추 샐러드에 둘 다 들어갈 것임으로, 하나를 온전히 잘라냈다. 그는 그릇을 꺼내 저민 양파를 넣고 찬물을 담았다. 매운 기를 빼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그 과정 내내 쿠니미에게 끈덕지게 붙어 있었다.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네."

   "치사하게 이러기야? 침대에서도 안 알려줄 거지?"

   "네."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간간히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큰 문제는 아닌데, 내가 짜증나서 그래요. 쿠니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나한테도 못 말해? 하고 물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쿠니미의 검은 눈동자에 그의 갈색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새장 문을 연 것은 쿠니미 자신이었으나, 그는 그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언제든 가버릴 것 같은 그를 옭아매고 싶었다.

   쿨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어린 만큼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 ‘이 년’이라는 간격을 한 순간에 뛰어 넘을 만큼, 하나마키가 자신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크고 싶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숙여 하나마키의 매끈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목에 있는 팔찌와는 다르게, 손은 깨끗했다. ‘그녀’들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싶어, 쿠니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냈다.

   오늘의 아키라는 이상하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멋대로 화대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자책하며 제멋대로 울기까지 하는 연인은 마음에 들지 않죠? 쿠니미가 말하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마키는 가스불을 끄고 다시 그의 앞에 섰다.


   “나, 하나마키 선배가 좋아요.”

   “나도 좋아해.”

   “그래서 옭아매기 싫었는데.”


   나 진짜 오늘 반지 맞추고 싶어요. 쿠니미는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오늘 무슨 일 있었구나, 하고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깔렸다. 쿠니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싸구려 로맨스 소설ㄹ의 여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속삭이는 쿠니미가, 하나마키는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내가 싫으면 바로 떠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될 것 같다는 뜬금 없는 말들이 다가왔다.

   쿠니미는 가끔씩 멋대로 상상하고 스스로 지칠 때가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마다 얌전히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그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투정을 부릴 때. 그 때 받아주고 사랑을 퍼부어주는 게 하나마키는 퍽 즐거웠다. 어른인 척 하는 어린애가 어린애 티를 내는 이 순간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왼손을 잡아 들었다. 맞추자, 커플링. 우리 사랑도 이제 증거가 필요 할 때가 됐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쿠니미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고, 느릿하게 핥았다.


   “사랑해?”

   “사랑해.”


   즉각적인 언어가 다가왔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손을 깍지를 끼어 세게 잡았다. 무슨 이유로 커플링을 맞추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스스로 지쳐버린 쿠니미를 위로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그의 투정 가득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입술을 핥고, 혀를 감싸자 쿠니미는 익숙하게 응해왔다. 하나마키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감정’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증거를 바라기 마련이었다. 밥 먹고, 우리 반지나 보러 가자. 그는 그의 윗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하나마키는 그가 솔직해지는 이 타이밍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는 쿠니미를 이런 상태로 몰아 간 누군가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쿠니미는 다시 가스불을 켰다. 하나마키는 식탁 의자에 앉아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쿠니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유성 매직을 꺼내, 그의 왼손에 선을 그어 반지를 만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는 ‘평소의 쿠니미’에게, 하나마키는 빨리 맞추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하면서 제 손에도 매직으로 선을 그었다. 밥 먹고 나서 기깔나는 거 채워 줄게,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그러든가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내민 입술에 다시 쪽, 하는 소리를 남겼다. 아까의 ‘사랑해’ 라는 말에 미처 다 담지 못하고 남은 것이었다. 그는 그 남은 사랑을 담아 다시 그의 이를 혀로 톡 톡 노크했다.




[하나쿠니] 라 캄파넬라,


  피스틸버스 AU입니다. 하나花마키와, 아키라英의 이름에는 둘 다 꽃이 들어가죠. 관계를 가질 때 마다 가지에 꽃이 핀다는 피스틸버스는 어쩌면 하나쿠니를 위한 세계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맛키의 꽃은 꽃 전체를 포괄하는? 느낌이고, 쿠니미의 꽃은 꽃부리, 그러니까 꽃잎 전체로 이루어진 '꽃송이'라는 점이 또 매력적인 것 같아요. 하나쿠니 어서 사귀었으면..! 

  자기가 원하는 걸 얻고 싶어하고, 그걸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쿠니미를 이미지하면서 썼습니다. 뭔가 쿠니미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만큼, 좋아하는 걸 위해서라면 장난감을 위해 기꺼이 우는 애 마냥 노력할? 자신이 애껴둔 체력을 쓸?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나마키와 쿠니미가 가지는 아슬아슬한 섹슈얼 텐션이 좋습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부족 한 것 같습니다. 







***


   “등에 꽃나무가 있는 게 불편할 때가 있나요?”


   의사가 물었다. 쿠니미는 이 무례한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 등에 새겨진 큰 벚나무를 떠올렸다. 첫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서야 생긴 것이었다. 등에 파인, 척추 선을 따라 돋은 깊은 줄기와, 마치 날개마냥 뻗은 가지. 그것은 쿠니미가 피스틸인 것을 의심했다.

   피스틸의 등에는 꽃나무가 있다. 관계를 할 때 마다 마른 가지에 꽃이 피어난다. 쿠니미는 그의 나무가 꽃을 잉태하지 않는 나무였으면 싶었지만, 그의 성장통을 딛고 자란 것은 벚꽃나무였다. 그는 등허리가 화끈거린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손톱 끝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의사는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딱히 불편한 점은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간간히 신경 쓰일 때는 있어요.”

 

   부 활동 시간에 옷을 갈아입는다던지 할 때?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선배를 떠올렸다. 그의 꽃나무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아 본 사람이었다. 하얀 등에 새겨진 나무에서 좋은 향이 난다 말하던 목소리가 다가왔다. 진료실 한쪽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흐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음표 안에서, 쿠니미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직관적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느낌이 닮았다. 《라 캄파넬라의》초반부의 잰 듯한 섹시한 음률들은, 후반부의 격정을 위해 존재한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자신의 변화를 유일하게 눈치 챈 그 모습이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선배는 의외로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쿠니미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스테먼은 피스틸에게 격정적인 감정을 느끼나요?”


   쿠니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자신의 피스틸이 있다고, 운명적으로 느끼나요? 의사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벚꽃을 피우는 스테먼이라면 벚꽃 가지를 가진 피스틸에게 끌리겠지요. 그 대답을 듣자 쿠니미는, 그로써는 드물게 웃었다.


  그는 귀찮은 일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은 전혀 쓸모없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편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을 처음 봤을 때의 하나마키를 떠올렸다.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낱낱이 훑고 있었다. 어딘가 핀 꽃은 없는지, 무슨 나무인지. 쿠니미는 그 눈빛을 생각하며 짧게 떨었다.

   신기하죠? 벚꽃나무 가지래요. 라고 말했을 때, 하나마키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선배는 스테먼인가요? 쿠니미는 아무것도 없는 그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푹신푹신한 물건을 처음 굴리는 고양이 같은 순진함에, 하나마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순진한 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은 하나마키의 색으로 물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결정했음으로,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궁금했던 몇 가지를 더 물은 다음에서야 상담실을 나섰다. 그는 물감을 사기로 결심했다. 벚꽃과 닮았지만 모든 게 다른 매화를 그릴 물감. 지워지지 않을 그런 장식을.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숨이 나간, 빈자리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


   하나마키는 라커 문에 붙어 있는 거울로 후배의 등을 훔쳐보았다. 얼마 전 피스틸로 발현했다는 그의 후배의 나무에는 몇 송이 꽃이 붙어 있었다. 분홍색 벚꽃이 아니라 하얀색 매화였다. 그는 거울에 비친 쿠니미의 등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저기에 꽃을 새기는 것은 자신이 처음이어야 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백지 같던 나무에 새겨진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유니폼을 개켜 놓는 중이었다.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느긋했다. 하얀 유니폼이 그의 손에서 정사각형이 되었다. 그는 교복 셔츠를 걸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하나마키가 꽃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은유를 알아차렸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쿠니미는 느긋했다.


   “제 등, 뚫어지겠어요. 하나마키 선배.”


   쿠니미가 말을 걸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라커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유 없는 눈빛을 하고서, 그 만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쿠니미의 목에 새겨진 꽃을 바라보았다. 뚫은 자국이 하나도 없는 귓불까지 번져있는 가지에는 아직 하나의 꽃도 피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에 있는 자국의 주인이 궁금했다.

    성급하게 물을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중하게 물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피스틸의 등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알지도 못하는 놈의 꽃을 피운 그의 등을 파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날지 못하게 그의 날갯죽지를 도려내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다시 뒤를 돌았다. 쿠니미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하나마키는 라커에 붙은 거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쿠니미는 다시 닳겠다고 말했다. 보는 걸로 닳는다면 좋겠네,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했다. 쏘아 붙인 말의 의미를, 그의 후배는 모르는 듯 했다. 너무나도 순진해 보이는 그 모습에, 하나마키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처음은 자신이 거둬 가고 싶었다. 그의 목에 이를 박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어야만 했다.

   저 매화의 주인이 독초라면, 하나마키는 아찔한 가정을 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그는 뒤를 돌아서 쿠니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에게서는 매화 향이 나고 있었다. 그는 쿠니미의 귓가에서 향을 맡았다. 향수는 아닌 것도 같았다. 하나마키 선배, 하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었다. 그는 쿠니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 벚꽃을 피워.”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가지를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이 알 건 아니네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꽃, 있잖아. 하나마키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쿠니미의 날갯죽지에 핀 꽃을 꾹 눌렀다. 피가 나도록 긁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면서, 하나마키는 그의 날개에서 손을 놀렸다. 간지러워요, 하면서 쿠니미의 목울대에서 웃음 소리가 피어났다.

   묻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질문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매화 향을 모두 거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라커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신경한 것 같은 쿠니미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얇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나무는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알 수 없는 소유욕이 하나마키의 마음을 간질였다.





***


   쿠니미는 입을 올리며 웃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는 자신을 뒤에서 안은 하나마키에게 가볍게 기대었다. 단순한 꽃 두 송이, 그 하얀 매화 두 조각이 이런 상황을 불러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손을 들어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벚꽃 단 내가 났다. 가까이서 맡고 싶었던 향이었다. 쿠니미는 제가 친 거미줄에 그가 걸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연탄連彈은 이제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선배, 날 좋아해요?”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물었다. 목에 뜨거운 숨과, 혀가 닿았다. 말캉하게 닿은 혀는 그의 살을 부드럽게 쓸다가 세게 빨았다. 꽃에 있는 나뭇가지에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이거 말고, 다른 것도 줄 수 있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응, 하고 대답했다. 귓가에 걸린 그의 목소리가 꿀 보다 더 달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하나마키는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첫사랑으로 앓은 다음, 벚꽃나무가 피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는 미처 헤아릴 수도 없을 게 분명했다. 올바른 나무에 알맞은 꽃을. 쿠니미는 그의 마음이 생리적인 현상인지, 일시적인 불확실성인지, 아니면 진짜 사랑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틀린 마음을 꽃잎으로 감추며 쿠니미는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줘요, 나, 확신 없는 관계는 싫어.”


    쿠니미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귓불에 숨을 불어 넣으며 사랑해, 라고 속삭였다. 그 애처로운 무게감에 쿠니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아이마냥 쿠니미의 마른 배를 쓸었다. 하나마키의 손끝은 불안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는 분명,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나한테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건 하나마키 씨가 처음이에요. 쿠니미는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을 먹었다. 간지러워,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과 자신의 손을 포개 잡았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는 절대로 도망 갈 수 없다. 쿠니미는 뒤를 돌았다. 마주보고, 키스해달라는 후배의 요청에 하나마키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쿠니미는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달콤함이 몰려왔다. 

   분명, 사랑이었다. 사랑임에 틀림 없는 감정이었다.

[오이스가] 라일락 마파두부, 하얀 우산

  

   청춘 소설 같은 느낌을 쓰고 싶었습니다. 짝사랑 소재는 언제 써도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내리는 봄비처럼, 가벼워보이지만 촉촉한 사랑을 하는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었습니다.. 으으 짝사랑 하는 이케남은 언제나 옳아요!!!

  라일락 이파리를 씹으면 정말 첫사랑 같은 맛이 납니다. 5월은 라일락의 계절이니까 한 번쯤 입에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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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짓눌러 오는 햇살에 대한 이 그리움, 차라리 꽝꽝 어두웠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에게도 들키지 않는 시간 속을 부풀어만 가는 눈뜨지 못하는 세월.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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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시합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경기 중에 후보 선수들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었다. 오랜 버릇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 은밀한 습관에 대해서, ‘성격이 나쁘다’고 평가하곤 했다. 이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의 이 관찰은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남의 불행을 깎아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후보 선수를 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배구 시합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리베로를 포함해서 단 일곱 명 뿐이다.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하고, 그럼에도 목소리를 높여 응원하는 모습은 충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가 박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후보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중요한 시합을 치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히 긴장하고 코트 앞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심지어 이와이즈미에게도) 귀찮았음으로, 이 취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빼고서 오이카와의 습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도 비슷했다. 오이카와는 코트 밖에 있는 ‘2번 군’을 바라보았다. 이 시기에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받는 3학년은 대부분 경험이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내 코트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올라왔다면 공식전을 치룬 적이 적을 게 분명했고, 넘친다면 1학년, 혹은 2학년부터 3학년을 밀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애석하게도 ‘2번 군’은 전자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목청을 낮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유려하게 서브를 넣을 때도, 카라스노의 서툰 리시브와 블로킹이 뚫려 점수를 잃을 때도 선수들을 응원했다. 오이카와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 날 연습시합은 아오바죠사이의 승리였고, 허탈한 표정을 짓는 일학년 세 명을 추스른 것도 ‘2번 군’이었다. 그는 한 번도 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있는 이상 출전은 어려울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지만 동정하진 않았다. 경기 중에 그들은 몇 번 눈을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굳은 느낌의 눈동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단한 라일락 나무를 떠올렸다. 

   이대로 그들의 인연이 끝났더라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그 ‘2번 군’의 별명은 ‘안타까운 소년’ 정도였을 것이었다. 그 날에는 비가 내렸다. 포슬포슬한 봄비였다. 부슬부슬 내리지만 온 살이 끈적거렸다. 연습경기 내내 땀을 흘렸기에 불쾌함은 더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부원들에게 한 번 샤워를 한 다음에 쿨-다운과 마무리 연습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여름에 한 발짝 걸쳐 있는, 늦봄에 내리는 비에 모두들 지쳤는지 군말 없이 샤워실로 향했다.

   매사에 의욕 없어 보이는 쿠니미가 먼저 샤워실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짧게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아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경기가 끝난 다음 체육관은 비 내릴 때의 적막감을 닮았다. 오이카와는 코트 한 구석에 검은색 스포츠백이 있음을 발견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라고 적힌 물건은 지금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귀찮아 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은 봄비를 다시 말하면 초여름 비가 된다. 가랑비는 여름에 걸맞게 점점 장대비가 되어갔다.


   오이카와는 스포츠 백을 어깨에 걸치고 체육관을 나섰다. ‘처음’ 연습시합을 가졌을 때와 같은 곳에 차가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는 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추적추적한 빗줄기가 그의 흰색 우산을 적셨다. 그리고 그 때, 오이카와는 낯선 울음소리를 들었다. 봄비에는 가려지지 않을 목소리였다. 두리번거리면서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카라스노의 ‘2번 군’이었다.

   2번 군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먹구름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합에 진 게 분한 걸까, 아니면 못 나간 게 분한 걸까. 오이카와는 작은 고민을 하면서 다가갔다. 분실물을 전해줄 요량이었다. 그는 짙게 내리는 봄비를 막아주었다. 저기, 감기 걸려. 라는 목소리에 그는 뒤를 돌았다. 우는 걸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는 한참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얼굴에 비 잔뜩 묻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닦았다. 눈물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 말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승자가 패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 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오이카와는 만약 오늘 연습시합에서 아오바죠사이가 졌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2번 군의 손에 우산을 쥐어 주고, 어깨에 스포츠 백을 매 주었다.

    고마워, 하고 그가 입을 땠다. 아까 목이 터지라 응원하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오이카와 씨는 친절하니까, 하는 말에 2번 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감기 걸리니 어서 돌아가 보라고 말하면서 2번 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너 맑은 날에 만나자, 오이카와는 괜히 ‘너’ 라는 말에 힘주어 발음했다.

   너, 그리고 너였다.

   2번 군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이카와는 비를 맞으며 두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2번 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의상 짓는 표정이라고 치기에는 좀 더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 사이에 내리쬐는 햇볕을 떠올렸다. 봄의 끝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오이카와는 제 어깨를 쓰다듬으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


   오이카와 토오루는 봄의 끝에 감기에 걸렸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을 겨우 피해갔다는 마츠카와의 말에 그는 그저 웃었다. 한 번 빨아 말린 연습복에서는 그 날 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육관 한 구석, 의자에 앉아 팀원들의 연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을, 비 내리는 그 곳에서 파생되는 햇살에 대한 그리움을.

   봄과 여름 사이에 끼인 그 애매한 계절에 찾아오는 감기란, 보통 며칠 앓고 끝나는 것이라 오이카와는 그의 이 풋사랑-사실 사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이었지만-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살랑살랑 내리는, 포슬포슬한 봄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 감정이 묽게 희석되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봄비란 언제든 장대비로 몸을 바꾸어, 피기 시작한 꽃잎마저 낙하하게 하는 것이었다. 삼한사온이라는 봄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주말 연습을 하는 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하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 우산 잘 썼어. 라고 말하는 말간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2번 군은 그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동백 같기도 했고, 언젠가 받아본 꽃송이가 풍성한 꽃 같기도 했으며 5월 말에나 피는 이팝나무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모든 꽃송이의 이름을 그에게 붙이고 싶었다. 그럼, 하면서 그가 손을 들자 오이카와는 잠깐만,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2번 군’이 뒤를 돌았다. 그에게서 라일락 섬유 유연제 향이 나서, 오이카와는 그를 마음속으로 ‘라일락’이라 불렀다. 이름을 모르는 탓이었다.


   “나 그날 너 때문에 감기 걸렸어.”

   “저런, 좀 미안하네.”


   라일락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표정은 ‘왜 그걸 나에게 말하지?’ 라는 생각을 여실히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뭔가 더 말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술은 오물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뱉지는 않았다. 그의 라일락은 음, 하고 고민하더니 나중에 마파두부라도 먹으러 가자, 하고 제안했다. 라일락과 마파두부는 별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 이름은 알아?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카게야마한테 번호 물어봐. 그의 라일락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았다.


   2번 군에게 있어 오이카와는 별로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잘 있어 오이카와-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봄비처럼 그의 얼굴에 닿았다. 봄은 점점 여름이 되어가고, 온도는 서서히 높아지고, 하늘은 파랗고 더 파래질 것이었다. 포슬거리는 늦봄비가, 장대처럼 쏘아 붙이는 초여름비가 되는 것 같이 오이카와의 미미한 풋사랑은 그 날 하얀 우산에 맺힌 빗방울마냥 살랑거리며 몸집을 키워갈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뒷문에 주저앉았다. 작은 문을 통해 나가 한 숨 돌리려던 쿠니미가 오이카와가 있는 걸 보고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고, 쿠니미는 대담하게 그가 있는 문을 빠져 나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맑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어두운 비를 희망했다. 다시 한 번 우산을 건네주며 말을 붙이고 싶었다.

   그 날처럼 울면서 받아줄까, 상쾌한 웃음을 터트려줄까.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면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쿠니미야, 하고 그가 말을 걸었다. 쿠니미는 네, 하고 대답했다.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그는 라일락 잎사귀의 맛을 아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음, 하고 고민하다가 안다고 대답했다. 그게 뭔데?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핀 라일락 향을 맡으며 물었다.


   “첫사랑의 맛이요.”


   쿠니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오이카와는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쿠니미의 앞으로 걸어가 라일락 잎사귀 한 장을 땠다. 그 날, 같이 봄비를 맞던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에 잎을 넣었다. 첫사랑의 맛이 났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쿠니미야, 토비오 전화 번호 알아?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원하면 졸업 앨범을 뒤져보겠다고 말했다. 저 보다는 킨타이치가 가능성 있을 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이카와는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았다. 5월의 끝이 오기 전에 비가 한 번 더 내렸으면 했다. 그의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몽글몽글하게 부풀었다.


   봄비가, 봄비가, 봄비가, 그리고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