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입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끈거릴 때가 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닿는 것 같아서, 괜히 입술을 뜯고 싶을 때가 있다. 스가와라는 그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옆에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겨울에 질린 입술이 보였다. 하얗게 일어난 입술이었다. 그의 입 사이에서 한숨에 섞여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스가와라는 얼른 정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하얀 눈길에는 이미 몇 사람이 다녀갔는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에 눈이 나렸다. 스가와라는 코트를 입고 왔어야 했나, 하고 운을 땠다. 그가 네? 하고 되물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A에서 Z'로 건너뛰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코트를 입고 왔으면 교복은 안 젖을 거 아니야, 라고 스가와라가 덧붙여 말하자, 그는 비로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산 위에 쌓인 눈이 밑으로 떨어져 바람을 탔다.
“카게야마는 눈 오는 날 좋아해?”
“좋지도 싫지도 않습니다.”
“그래?”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곧 사라졌고, 스가와라는 이 순간이 매우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언덕 밑 상점’ 또한 닫혀 있는 늦은 오후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땅을 디뎠다. 두 사람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스가는 다시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입술은 다물렸다가, 숨을 내뱉느라 열렸다, 다시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그 일련의 움직임을 보다가 스가는 차갑게 언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부드러웠다.
길은 미끄러웠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쌓인 눈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손을 뻗었다. 갑자기 잡은 팔에 놀랐는지 선배, 하고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너 미끄러져서 다치면 큰일이니까. 스가와라는 변명했다. 그의 말 뒤로 따라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스가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목도리에 닿은 숨이 그의 얼굴을 척척하게 적시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가로등 오렌지 빛보다 더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다시 입 안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카게야마의 팔을 잡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배구공을 세게 강타했을 때 같은 열기가 몰려왔다. 찬바람이 불고 있는 데도 그는 이 상황이 매우 덥다고 생각했다. 스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다, 바닥을 보다,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은 하늘을 보다, 다시 그의 입술을 보는 것을 반복했다.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지 않았다. 퍽 부산 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 못한 말이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입 안이 썼다. 스가와라는 혀끝으로 윗니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 하고 카게야마가 입을 얼었다. 스가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미안, 너무 세게 잡았지? 하고 물었다.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목소리에 맥이 세게 뛰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와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을 때, 간혹 느껴지던 압박감과 비슷한 느낌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카게야마가 말을 꺼내고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의 ‘쉼표’는 우주와 같은 길이였다.
스가는 그가 무슨 말을 뱉을지가 궁금했다. 봄 고교 배구 선수권 대회를 마친 후 그와 이야기 해 본 적이 없었다. 간혹 메일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단 둘이서 하교하게 된 것도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카게야마가 약속이 있어서 연습에서 이르게 나왔기 때문이었고, 스가와라가 학교 근처에서 오랫동안 배회했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교문 근처에서 그를 봤을 때를 잠시 반추했다. 반가웠었고, 같이 돌아가기 난감했었으며, 입술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뭐, 그냥.”
입시도 다 끝났고, 할 것도 없어서 영화나 보고, 스가는 말을 늘였다. 카게야마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스가는 그와 조금 떨어져 걸었다. 살얼음에 가로등 빛이 들어 길이 온통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말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잡혀 있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다. 후배와 있을 때 이런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친화력이 좋았고, 다른 사람과 무리 없이 대화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이 어색함은 얼마 전 자각한 감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감정은 가끔씩 가슴의 치받침으로 올 때가 있었고, 입술의 화끈거림으로 올 때가 있었다. 그가 그를 생각 할 때 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와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웠다. 눈처럼 하늘하늘하게 내릴 때가 있었고, 바다처럼 무겁게 발에 감길 때가 있었다. 스가와라는 걸음을 멈춰 섰다. 카게야마는 한 걸음 정도 앞에 서서 뒤를 돌았다. 선배, 하는 울림에, 스가와라는 코끝이 찡해진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한 걸음을 좁힐 때 까지 기다렸다. 스가와라는 땅을 보고 카게야마의 오른발자국에 자신의 왼발을 맞추었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싸한 겨울 바람이 그의 볼과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의 옆에 오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좁은 길을 걸었다. 맞댄 어깨가 눈처럼 싸했다.
“어떤 영화 보세요?”
“뭐 그냥, 개봉한지 좀 된 영화?”
“배구 영화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스릴러.”
카게야마는 여전히 배구 바보구나, 스가와라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언 볼을 긁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짧게 웃었다. 나무에 있던 눈덩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 와중에 바람이 불어 두 사람에게 눈가루를 날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둘이서 눈가루를 맞는 이 상황에, 스가와라는 얼마 전에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영화에서,”
“네?”
“아니 그”
아무 것도 아니야. 스가와라는 말을 잘랐다. 그는 자신이 생각 해 냈던 장면을 반추했다.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 한창 연애를 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 스가와라가 기억하기론 그 장면은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반하게 된 첫 번째 장면이었고, 처음 둘의 숨을 교환했던 장면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닌 건 없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가끔씩 이렇게 묵직한 스파이크를 꽂아 넣을 때가 있었다. 스가와라는 사람에게도 말하기 싫은 게 있다고 하려다가, 그것을 혀 안에 꼭꼭 숨겼다. 생각 해 보면 별거 아닌 말이었다.
알고 싶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묻어 그의 머리카락에 반짝임이 들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에 묻은 눈덩이를 슬슬 정리했다. 그의 손가락 온도 때문에 눈은 쉽게 녹아 내렸다. 스가와라는 그의 굳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순간 나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일을 저지르고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얼은 길을 카게야마보다 먼저 달려 내려올 수 있을까, 라는 가정아래에서 그는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 로맨틱한 장면이 나와서 그게 생각났어.”
“로맨틱한 장면이요?”
“응, 정말 좋아서 그 장면만 여러 번 돌려 봤어."
정작 영화는 스릴러였지만. 스가와라는 하품을 했다. 다시 눈덩이가 바람에 날려 짧은 순간동안 눈이 내렸다. 스가와라는 그 눈가루들이 마치 별이 내리는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카게야마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배구 이외의 분야에서 ‘비유’ 같은 걸 잘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그 딱딱한 모습마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스가와라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 영화에서도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와.”
스가와라는 언 길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나무가 많은 길에서 바람이 불자, 하얀 눈가루가 쉴 틈 없이 내렸다. 스가와라는 그 영화에서는 이런 별이 내리는 곳이 설탕창고였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지금 눈길과 별과 영화와 상관관계를 알아챈 것 같았다. 아, 하고 내뱉는 말에 하얀 입김이 따라 붙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눈가루가 그들 쪽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오렌지 빛 가로등빛을 눈이 먹어 반짝였다.
“거기서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하냐면.”
“네.”
“궁금해?”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스가와라의 입술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는 여유로운 척을 하며 침을 삼켰다. 그는 설탕창고 앞에서, 설탕 우주가 내리는데, 하면서 다시 한 번 상황 설명을 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지금 매치포인트에서 서브를 넣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눈가루는 여전히 설탕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차가운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지그시 가져다 댔다. 카게야마의 눈이 붉어졌다. 설탕가루가 우주 같지 않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이 눌린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숨이 스가와라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스가와라는 발 뒤꿈치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그 사이 키가 좀 더 큰 것 같았다. 못 본 사이에 더 커버린 스가와라의 마음처럼, 훅 끼쳐오는 치받침처럼. 그는 발꿈치를 들고 카게야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후, 하고 달뜬 숨을 내뱉었다.
“이런 느낌으로, 키스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입술과 입술은 닿지 않았지만, 숨결과 숨결이 닿았다. 심장이 목 끝 까지 올라온 게 분명했다. 스가와라의 목울대가 심장처럼 요동쳤다. 그는 슬쩍 카게야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하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스가와라가 그를 지나치며 물었다. 자박이는 발걸음 뒤에는 아무런 소리도 따라오지 않았다. 눈가가 화끈거리기 시작해 스가와라는 코를 킁킁거렸다.
저기, 스가와라 선배 하고 카게야마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뒤를 돌지 않고 크게 왜, 라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질 즈음에, 카게야마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끄러지기 쉬운 언덕길을 그는 급하게 따라 내려와 스가와라와 어깨를 맞대었다. 스가는 눈을 깜빡이며 카게야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붉어 보였다.
“저기, 스가와라 선배.”
“이상했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하고 그는 다시 물었다. 카게야마는 말을 고르는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스가는 그의 그런 모습에서 그가 조금이나마 크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림자가 길 위에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부끄러운 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내뱉는 헛기침이 몇 번 쯤 반복되었고, 그 헛기침의 끝에는 망설임과 설레임이 달려 있었다.
“저 영화 장면을 이해를 못한 것 같아요.”
“그래?”
“네 그러니까.”
다시금 눈이 내렸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었다. 스가의 입술에 카게야마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겹쳐졌다. 굳은 살 박힌 그 손가락이 제 입술을 누르는 감촉에, 입술에서 심장이 뛰었다. 눈을 맞으면서 그는 그의 엄지손가락 위에 입술을 겹쳤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숨결이 제 것 마냥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 위에 길게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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