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 2015. 3. 10. 23:37
***
궁 안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그는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침소로 향했다. 거친 발걸음 소리에 시종들이 놀라 길을 비켰다. 시종장이 그를 황급히 막아섰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 하옵니다. 고하는 그에게 죄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자루를 잡았다. 나는, 왕을 뵈어야 한다. 강직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잘 갈린 금속마냥 날카로웠다.
“이와, 죄 없는 시종을 괴롭히면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살지 않잖니.”
창호지를 바른 문 너머에서 오랜 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이즈미는 수도 성벽에 닿은 어제 밤에서야 전해들은 그 지독한 장난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말해 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상이 혼례복을 입었으며, 그걸 본 죄 없는 시동들이 궐 안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 자체를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강직하며 사리분별이 정확한 남자였다. 들라 하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라기에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여러 겹의 문 너머, 오이카와는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길게 늘어진 흰 옷을 보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화 내지 말아줘,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길고 긴 애원을 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가. 이와이즈미는 친우로서 말했다. 그는 이 허술한 서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싸구려 연극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왕의 주도 하에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쿠니미가 아프다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린은 나라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앓지 않는다. 이와이즈미의 진한 침묵을 헤아리던 오이카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니 어쩔 수 없단다, 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식탁에는 조그마한 다과와 다구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창 너머에서 들어왔다. 그의 방 안에 있던 새장 안에 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왕의 침소에서 발견되는 모든 정황들은 불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 예전, 이와이즈미가 올바르게 맞춰놓은 조각을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스로 흩트리고 있었다.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이와이즈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의 웃음과 시선은, 한 구석에 있는 새장 안에 쏠려 있었다. 그 안에는 유리로 세공한 까마귀 장식이 들어 있었다. 악취미, 하고 질려하는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는 무응답으로 화답했다.
“스가는, 이제 한 나라의 재상이야.”
“그럼, 이와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오이카와,”
이와, 난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내가 과거에 매여 있을 뿐이지. 오이카와는 먼 새장을 보며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이 독대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데, 이와이즈미는 따져 물었다. 그의 언사는 왕에게 하는 것이라기엔 건방진 것이었다. 허나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목을 덮어 내려온 비단 소매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야, 왕에게 직언하는 신하 정도는 있어야 성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질 나쁜 장난에 대한 대답과 해명을 듣고 싶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각 ‘계절’과 야하바 정도였다. 한 나라의 대신을 욕되게 한 것이 새어나간다면, 이와이즈미는 최악의 가정을 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는 걱정이 너무 많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식은 찻잔을 집었다. 식어버린 녹차에서 쓴 맛이 강하게 우러났는지 그의 미려한 얼굴이 구겨졌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자신의 눈에 담아냈다. 그 시선이 불편한 듯, 오이카와는 찻잔에 고인 달을 바라보았다. 대답, 해. 그가 요구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눈을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의 눈이 그랬고, 자신을 보는 쿠니미 또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령을 부려 카라스노로 떠난 자신의 기린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실도하실 겝니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뇌리에 선했다.
잘못 된 집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 많은 기간 동안 그의 전에 들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내 궁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몸뚱이를 불렸을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오이카와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릇 된 일이야. 이상한 방식이었고, 너는 흔들려선 안 된다. 이와이즈미의 충언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까마귀 같은 짓이었다. 그의 손끝은 식은 찻잔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들어 놓은 보험에 대하여 셈하였다. 결론을 낸 그는 스가와라는 절대 내가 한 일을 말하지 않을 거야, 라고 느릿하게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그를 노려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떠나보냈던 그 밤을 회상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던 날이었다. 국경께의 서원. 쿠니미와 스가와라의 마차가 향한 곳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날의 일들은 언제나 그에게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사무쳤다. 다신 그러지 않을게, 그는 형식적인 사과를 내뱉었다.
“왕이시여.”
“이와.”
이제 스가와라는 곧 카라스노에 돌아갈 거야. 꿈결 같은 시간은 지났고, 나는 이제 카라스노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전쟁을 하기엔 우리는 모두 지쳐있고, 아오바죠사이를 상대하기에 그 나라는 너무나도 약해. 오이카와 씨는 앞으로 그 쪽에 머리를 두고 자지 않을 거란다. 오이카와는 느릿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감언이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남자였다.
정에 약한 그는 언제나 사랑하고 싶어 했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오히려 오이카와답다면 오이카와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으로써 그는 최악의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를 왕으로 옹립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 해 본적이 없었다. 아오바죠사이에는 그가 반드시 필요했다. 기린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네게 쿠니미의 사령이 달려갔던 이레 전 출발했으니 이게 서서히 오겠구나. 오이카와는 셈하여 대답했다.
“사랑해서 그랬어."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것도 같았고 지나치게 추억을 마신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침대로 몸을 옮겼다. 그는 비단 이불 위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미련이란 이름의 씨앗이 눈 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자리에 오른 이상 버려야만 할 것이었다.
이제 나가 보렴. 오이카와는 권유하며 말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이와이즈미의 검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에 달빛이 들어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검자루를 보다가, 문득 그에게 자신을 믿느냐 물었다. 이와이즈미의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인간적인 감정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부유하는 상념들은 허무맹랑한 망령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왕으로써 오이카와가 내린 명령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의 왕은 언제나 옳으며, 언제나 존엄하신 분이었다. 그에게 틀린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을 반추했다. 언제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이와이즈미의 왕은 흔들리더라도 다시 축을 잡아 일어 설 것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대나무 숲을 잠시 스쳐가는 바람의 짓이라 믿기로 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든 진심을 끌어 모은 말이 공중에 울렸다.
“나는 당신의 결정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습니다.”
***
“이 곳에 계시면 카라스노 쪽에서 데리러 오실겝니다.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해와 같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스가와라는 말갛게 웃었다. 쿠니미는 달빛을 받은 그를 보다가 살짝 머리를 까딱였다. 그의 대랍시 기두에 달린 푸른 술이 흔들렸다. 어린 기린은 스가와라가 작은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본 뒤에야 뒤를 돌았다. 그는 목이 답답하다 느꼈다. 그는 옥색 의복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갈 길이 멀었다. 사령을 이용한다면 빠르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괜히 국경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곳은 난민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지 않았다. 국경에 있던 하나마키를 수도로 불러들인 탓이었고, 재상이 난데없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왕의 잘못 된 결정 때문에 몇 가지의 일이 틀어졌는지. 쿠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숨결에 그의 대랍시 기두가 흔들렸다. 왕실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비단 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상상하다가 턱을 괴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 마다 그의 대랍시가 흔들렸다. 쿠니미의 정수리 위쪽에는 비단 꽃이 풍성하게 자리했고, 은색으로 만들어진 이파리가 봉황의 모양을 한 채로왼쪽에 달려 있었다. 오른쪽은 수국과 자잘한 쪽색 비단 꽃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어깨에 두른 망토를 좀 더 끌어 올렸다. 오늘따라 밤이 추웠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쏘아야 합니까.”
쿠니미는 며칠 전 꿈을 반추했다. 아직도 뒷맛이 썼다. 그는 개의 모양을 한, 작은 사역마를 불러냈다. 쿠니미의 손길에 어둠이 뭉쳐져, 온기를 가진 짐승이 되었다. 쿠니미는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이 가진 온기라도 끌어다가 덮고 싶었다. 수도에 있을 정인이 간절하였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굴복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문득 웃었다. 여러모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라꼴이 미쳐가는 게지, 쿠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머리를 쓸었다.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쪽 지어 준 것은 그의 정인이었다. 사랑의 형태는 언제나 은유적이었다. 사랑이라는 그 두 글자가 무엇이기에. 쿠니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라지 않는 이유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쿠니미 아키라는 공범이었다. 이미 같은 배에 올라탔음에, 뒤를 돌 수 없었다.
“꼴에 잘 웃는구나.”
낯선 목소리에 쿠니미의 무릎에 있던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전방을 경계하였다. 쿠니미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 셋 있다는 흑기린 중 하나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비릿하게 웃었다. 넌 참 예의 없게 오는구나,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안광이 빛났다. 무례한 것은 너희겠지.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단호하였다.
“참지 못하고 화풀이라도 하러 온 게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쿠니미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불안했다. 그의 마차에 들어온 것도 충동적인 일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두 눈을 제 안에 담았다. 떨리는 것이 꼴사나워,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가린 손가락에는 금으로 만든 호갑투가 씌워져 있었다.
주인을 풀어주었더니 그 개가 나를 물려하는구나. 쿠니미는 손가락을 살랑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호갑투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옛날,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작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면서 미소 짓는 어린 기린의 모습을 본 카게야마는 성급하게 소리 질렀다.
“쿠니미!”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하거라.”
쿠니미는 그를 나른하게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 속에는 순도 높은 불안함이 서러 있었다. 스가와라가 아오바죠사이에 연금되었던 것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미 잃은 새끼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 하얀 새를 연모하기라도 하느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그 표정에 담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애매한 질투,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경멸. 불안함과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울렁임. 쿠니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웃겼다. 애초에 하늘이 기린을 내릴 때,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용건이 없으면 내리거라, 쿠니미는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말하였다.
“겁이 나느냐? 네 감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조용히 해라.”
“마음에, 그 하얀 새를 품기라도 했던 것이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모라도 하였느냐? 불안하였느 사랑하였느냐? 그 사람이 너의 정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왜, 마음에라도 품었더냐? 진심이었느냐? 그래서 이렇게 불안하여 타국의 마차에 몸을 실었느냐? 나에게 무엇이라도 화풀이 하고 싶었느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두 기린의 몸을 잔혹하게 짓이겼다. 쿠니미, 하고 카게야마가 낮게 그의 이름을 말하였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같은 말이었다. 쿠니미는 호갑투를 살랑거렸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손이 어린 기린의 목을 두 손으로 세게 잡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그의 두 손가락이 쿠니미의 목을 세게 눌렀다. 숨이 막혀왔다. 그의 머리에 가지런히 올려 있던 대랍시가 흐트러졌다. 의자에 등을 세게 부딪친 충격에 머리가 아팠다. 쿠니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악력 차이가 나는지라, 그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찔한 어둠이 그를 가득 덮었다. 카게야마는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쿠니미는 몸을 떨며 기침했다. 내 스가와라님을 모욕하지 마, 그는 소리쳤고, 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비단 창 안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 흑기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가리던 호갑투가 마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게야마의 표정을 보며 쿠니미는 확신했다.
“미친 놈.”
쿠니미의 조소에 카게야마는 그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손을 떨었고, 쿠니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았다. 대랍시에 달려 있던 커다란 비단 꽃망울이 떨어졌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마차 벽면에 부딪힐 때, 쿠니미의 화려한 머리장식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술이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럼에도 웃었다. 기침과 섞인 웃음이 기묘하게 들렸다.
연정.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역병이 모두에게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미쳐가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 외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정도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왜 왕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라고 했는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깨달음을 지금 당장 입 밖으로 내보낸다면- 가장 공감할 흑기린은 제가 한 짓에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속셈이냐.”
카게야마가 다시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너머에 있는 모든 의미를 카게야마 토비오는 알지 못하였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기침했다. 그는 비단 발을 걷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이, 그에게 괜찮으냐 물었다. 어린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친우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는 별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빈껍데기 같은 시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는 서원에 스가와라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꼴에 자존심이 있는지, 카게야마는 말없이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처음 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차에서 그림자의 형태로 녹아내리려던 카게야마가, 멈추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왕의. 뜻을 지켜볼 뿐이다.”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소리 없이 카게야마는 서원으로 떠났고, 마차 안에 홀로 남은 쿠니미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인지, 목 끝이 따끔거렸다. 그는 숨을 천천히 뱉었다. 쿠니미는 분홍색 작은 꽃잎이 연달아 수놓아진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너무 지나친 비일상들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쿠니미는 처음부터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목을 잘라 효시하는 상상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아오바죠사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카라스노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득한 어둠이 몰려왔다.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기에, 그는
하나마키가 보고 싶었다.
***
스가와라는 먼지 쌓인 서원의 안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날과 변한 점은 거의 없었다. 그는 카게야마와 같이 쓰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비밀 방이 나타났다. 카라스노의 전대 왕. 그 인정받지 못한 폭군이 사와무라를 찾으려고 군대를 보낼 때 마다 그를 숨기던 공간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그 곳에 들어갔다.
그동안 있던 일이 꿈결 같았다. 그에게 이 서원을 마련 해 준 것은 오이카와였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거둔 것은 아오바죠사이의 현대 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얄팍한 약조를 아직까지도 품고 있는 오이카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왕이 되면 모든 감정을 거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좁은 공간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어린 카게야마는 군대가 올 때만 항상 제가 숨고 싶어 했다.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기 때문이었고, 피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모습이 자라고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도. 심지어 인간 아이가 아니라 기린이라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스가와라에게 아이 같았다.
이제 드디어, 돌아 갈 수 있다. 그는 궁 안에 마련 된 자신의 공간에 발을 디디고 싶었다. 사와무라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던 그 시절이 사무쳤다. 그는 그 비밀 방 안에서 멀리 보이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자리였던 곳이었다. 그는 그 전각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지체 높은 귀족 자제가 이 서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와무라는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념의 끝은 언제나 번뇌일 뿐이다. 스가와라는 그 방에서 천천히 나가, 전각으로 향하였다. 오이카와가 좋아하던 자리는 인공 호수 위의 복숭아꽃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사랑가를 부르던 한량은 어느새 왕이 되어 아오바죠사이 전체를 호령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스가와라는 실감하고 있었다.
현재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과거로는 돌아 갈 수 없다. 오이카와도 이번 볼모행을 통하여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던 그의 모습과, 애잔하게 울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애써 지워냈다. 연모한다는 말을 담을 수 있는 것은 허락받은 자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멀리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림자 진 자리에서 형체가 올라왔다. 카게야마, 하고 부르자 상기 된 얼굴을 한 기린이 그에게 다가왔다. 스가와라와 이 서원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큰 키와, 몸이 흘러간 세월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슨 일, 없으셨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문제였다. 혼자만 간직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돌아갈까?”
카게야마의 선생이던 시절처럼, 스가와라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 듯, 카게야마는 전각을 이리저리 둘러 보다, 복숭아꽃이 가장 보이지 않는 장소로 스가와라를 끌었다. 옷자락이 끌리자 넘어지듯 스가와라는 그 곳에 자리했다. 그 곳에 계신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발치에 있던 그림자들이 사령이 되어 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모두가 기다리는 그 곳으로 스며들며,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카라스노의 땅을 디딜 것이었다. 피로하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카게야마의 요청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피로 대신 그의 어깨에 올라 탄 미련이, 그의 머리를 자꾸만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가와라는 스스로, 새장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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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2. 20. 01:08
紫簫聲裏彤雲散 자줏빛 퉁소 소리에 붉은 구름 흩어지고
簾外霜寒鸚鵡喚 발 밖엔 찬 서리 내리고 앵무새 지저귀네
夜闌孤燭照羅帷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時見踈星度河漢 때때로 성근 별 은하수 건너가네
***
홍등 위에 쌍희(囍)자가 적혀 있었다. 스가와라는 눈물 흘리는 여식의 팔을 잡고 움직였다. 왜 울고 있습니까, 그가 물었고 여종은 아무것도 아니라 연신 대답 할 뿐이었다. 잠시 멈추라 고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스가와라는 그녀가 비단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을 기다렸다. 조금 더 가십시다, 여종은 다시 그가 자신의 팔을 잡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은은히 퍼지던 수국 향이 지루하게 퍼졌다. 왕께로 가시나이다. 지금 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혼례복을 입으셨나이다.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 했다. 스가와라는 혀를 찼다. 그는 슬며시 눈을 뜨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눈꺼풀이 단단히 달라붙어 떠지질 않았다.
카라스노 국의 재상, 스가와라 코우시 님이 드십니다. 문간에서 여종이 크게 말하였다. 사람을 미리 물려 놓은 것인지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치에 닿아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여종이 정리하였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만질 수 있는 마지막 비단이었다. 스가와라는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의 하얀 손을 남색 비단이 가리었고, 그의 뒤로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긴 비단이 늘어져 있었다.
수고하였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와, 스가와라는 귀를 쫑긋거렸다. 곧장 돌아가거라, 하나마키 공이 기다리고 계실 게다. 왕은 자애롭게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그 잔혹한 목소리에 그녀가 신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미 걸어오면서 예견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등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나갔다. 발걸음 소리마저 이미 죽어있는지라, 카라스노의 하얀 새는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창호지 너머에서 우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스가와라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그의 마지막 날, 자신만을 담게 요구해도 모자란 날에 한 여자아이의 개인적인 비극이 끼어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 눈앞의 하얀 새를 바라보았다. 매번 상상했던 그 풍경으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침소에 앉아 있었다.
“스가와라.”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가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푸른 용이 새겨진 자수 천을 쓰다듬었다. 스가와라의 단정한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이었다. 그는 그 가리개에 농염하게 입을 맞추었다. 가까이 다가온 숨결을 느낀 것인지, 하얀 새는 자신의 날개를 가벼이 떨었다. 긴장하였느냐, 하는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스가와라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무슨 짓입니까,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황제의 차가운 손이 스가와라의 목선을 쓸었다. 그 꼴이 매우 우스웠다. 자신을 능멸하고 욕보이는 것만 같아, 스가와라는 주먹을 꼭 쥐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싫으냐, 하고 왕이 물었다. 타국의 재상은 자신이 담고 있는 치욕을 입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였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려 했다.”
“당신의 진심은 ‘조롱’입니까?”
스가와라가 쏘아 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그의 눈에 두른 천을 풀었다. 스가와라의 색이 옅은 속눈썹에 꿀이 붙어 반짝였다. 그것은 보석 결정과도 같았다. 옥보다 맑고 진주보다 투명한 아름다움이 그 곳에 위치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손목을 감싼 세 겹 소매와, 목에 딱 달라붙는 옷고름을 바라보았다. 옥 단추로 고정 된 망토와, 긴 옷자락이 그의 발목까지 아름답게 감싸 내렸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비록 양피두나 점취(点翠)로 고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총새의 꼬리깃으로 만든 나비장식들이 그의 머리카락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싶었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파란 수국만큼 맑은 옥구슬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에서부터 흘러내려, 여인의 머리인 것 마냥 모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구슬과 구슬이 닿아 소리를 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달빛마냥 은은하였다. 스가와라가 걸친 모든 왕의 장신구는 빛을 머금었다. 해를 담아 빛을 낸다는 달과 같은 모습에 오이카와는 그의 눈두덩이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손대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스가와라는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그 서슬퍼런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짧게 웃었다. 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어도 그는 그였다. 그 깃털을 잘라 유폐시키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었다.
“사랑해서 그리하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벌려지는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물렸다. 왕의 것을 물어볼 참이냐고 묻는 그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질릴 것만 같았다. 그가 반응하지 않아 마음이 식었는지, 그는 그의 입 속을 간질이다 손길을 거두었다. 나는 한 나라의 재상입니다. 스가와라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는 듯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나의 왕이 자리를 온전히 보존할 때까지, 그 때까지만 기다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스가와라가 한탄하듯 말하였다.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남자의 옆에 있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어깨를 쓸었다. 그가 걸친 청룡무늬 망토의 결이 흐트러졌다. 나를 믿어주십시오, 스가와라는 약효가 다 한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그 절실함이 싫지 않았다. 허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타국의 왕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다.
마음을 나눈 적이 있었다. 하나의 곡옥을 반으로 갈라, 정표로 삼았었다. 그가 기린의 부름을 받기 전 까지, 타당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런 돌발행동을 마음 전체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이었다. 왕이시여, 하고 그가 부르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코우시, 오이카와가 자신을 갈구하는 마음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어 화답했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지 않느냐.”
“돌아온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널 신뢰할 수 없다.”
애석한 일이군요, 스가와라는 엷게 웃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옷섶에 손을 대다, 그만 내려 놓았다. 그는 대신 그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굳어버린 속눈썹을 천천히 핥았다. 그의 숨결과, 농밀한 입맞춤이 닿아 결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과, 그의 영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애달픈 행위조차 스가와라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타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어미 젖을 찾는 아이처럼 스가와라를 끌어안았다. 스가와라는 떨리는 그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거나, 포옹을 받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토록 바라던 움직임, 바라던 장소와 의복이었다. 허나 왕의 첩이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닌 왕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당신이 왕인 이상,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합니다. 스가와라는 눈 내린 듯한 어조로 종언을 고하였다.
이미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구나. 오이카와는 반대편 눈에 입을 맞추었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했다. 제 마음을 찢어 기어코 피를 보는 그 날선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충실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런 사람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돌려보내기 전에 여인의 옷을 입히고, 자신을 찾아오게 하며, 황후의 것으로 준비된 서관을 준 것은 자신을 봐 달라는 구애였다.
명석한 그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오이카와는 알을 깨고 나온 아기새처럼 천천히 눈을 뜨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색 옅은 머리카락에 달려있는 아오바죠사이의 파란 색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자신의 색을 입고 있으나 스가와라의 마음은 이미 검은색으로 물든 이후였다. 그들은 보색관계에 위치 해 있었다. 평행선은 영원히 닿지 않는 선이었다. 나를, 봐 주지 않겠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달린 구슬장식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결별이자, 영원한 상실을 의미했다. 이런 행동을 한 것을 고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신하들을 물리고, 이미 죽을 아이들에게 날 이 곳으로 안내한 것 또한 그런 연유겠지요, 스가와라는 천천히 이별을 고하였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주련? 코우시,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이별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우리는, 왕께서 어떻게 하든지간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코우시,”
“그걸 가장 잘 아시는 것은 왕이시지 않습니까.”
“이름, 불러줘.”
그 때처럼. 오이카와는 말갛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오이카와의 의복은 왕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 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고이는 것을 스가와라는 하늘을 보며 무마했다. 나에게 다정하지 마십시오, 다가오지 마십시오. 당신은 왕이고, 나는 타국의 신하입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동안 너를 가둬 두었던 이유를 알고 있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도, 모르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남자는 깊게 상심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마치 신부에게 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하얀 새의 입술에 발려 있던진한 연지가, 신랑의 입술에 조금의 색을 옮겼다. 이름 불러줘, 오이카와는 다시금 속삭였다. 토오루, 하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처음 그 사람의 옆에서 너를 봤을 때 나는,”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스가와라는 말을 잘랐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견고하게 쌓아올리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국경 근처에 있던 서원, 카라스노에 왕이 세워지기 이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쿠니미가 미운 건 오늘이 처음이구나. 오이카와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약 왕이 아니었다면, 네 마음은 여전히 내게 닿아 있었을 것이냐?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재차 말하는 것은 카라스노의 예절이 아니었다. 그 깊은 한숨에 오이카와는 체념한 듯 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숙인 그의 등을 보았다. 왕은 한참이나 일어선 채로, 자신의 발끝을 보다가 방울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났다. 조금 있다가, 쿠니미가 안으로 들어올 게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난 것 같았습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실도할까봐 무서운 게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이 달려 있었다. 어떻게 하든 그는 왕이었다. 스가와라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절하였다. 오이카와는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 그곳이 몰리는 자리에서 스가와라는 그에게 오롯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드러난 흰 목이 흰 사슴 같았고, 그가 여러 겹 걸쳐 입어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흰 까마귀의 깃털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슬펐다. 소꿉장난도, 잠깐의 유희도 이제 끝이구나. 그가 애매하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울 소리가 들리며 쿠니미가 부리는 사령이 당도하였다. 그가 눈을 깜빡이는 그 작은 순간, 사령과 함께 스가와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느리게 얼굴을 쓸었다. 체념만이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평소에 입던 하늘거리는 옷이 아닌, 딱 달라붙는 정식 혼례복이었다. 소꿉놀이는 다 하셨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예복을 갖춰 입는 그에게 다가왔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기린은 화가나 보였다. 마지막 날이기에 장난을 좀 쳐봤단다. 오이카와는 농을 거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쿠니미야, 당분간은 하나마키의 방에서 기거하거라, 피 냄새가 진동하여 살 수가 없겠어. 왕의 명령에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널 이해할 수 없단다.”
쿠니미는 제 분에 차 식식거렸다.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술이,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그가 걸친 소매 없는 망토에서 혼례복 차림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원래 의복을 갖추어 입고 침대에 앉았다. 이리 오거라 쿠니미야, 그는 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기린을 불렀다. 어린 기린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리와 앉거라, 오이카와의 다정한 말에 쿠니미는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는 제게 가까이 다가온 쿠니미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게다. 그 말을 어린 기린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쪽 나라에는 네가 데려다 주련? 오이카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는 귀찮은 일은 질색입니다. 기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라면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다녀오고 와선 이제 ‘아무런 일’도 없을 게다.”
쿠니미는 왕의 확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제 품안에 가득 들어오는 기린을 끌어안았다. 나라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혼례복을 입고 있던 제 옛 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토록 좋아했었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기연이 닿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오이카와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쿠니미가 능청스럽게 묻는 말 뒤에,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암시를 덧붙였다.
***
“마지막 변덕은 즐거우셨습니까?”
스가와라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가와라의 주변에 휘장을 쳤다. 머리장식과 의복을 탈의하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미미한 피 냄새를 맡으면서 괜찮다는 답변을 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덮은 화려한 머리장식을 풀었다.
더 이상의 희생을 치루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요. 스가와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휘장 너머의 하나마키는 잘 알고 계셔서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와이즈미 공이 저 대신 다테와의 국경에 가 계신 것도 천운이지요. 하나마키는 농을 섞어 진심을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다행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이즈미 님께서 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저는 한 품에 담기는 상자에 타고, 목 위로만 카라스노에 돌아갔을 게지요.”
“제법 살벌한 농담을 하십니다.”
하나마키는 휘장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는 수건으로 피 묻은 칼날을 닦았다. 피 냄새가 하루 빨리 사라지게 해야만 했다. 스가와라가 내뱉는 한숨 소리가 속이 비치지 않는 천을 타고 흘러 나왔다. 수심이 깊으십니까, 아니면 미련이 있으십니까? 하나마키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답을 신중히 선택하여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우리의 위치가, 위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친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키는 그의 농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구슬 장식을 하나하나 머리에서 때어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점점 더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보석함에 구슬 장식을 갈무리 해 넣었다.
그는 미리 받아놓은 물로 얼굴을 씻었다. 오이카와의 지문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덩이를 쓸던 그의 혀 끝, 그 감촉을 생각하다가 얼굴을 세게 씻었다. 휘장 너머에서 콧노래가 들려왔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유행가였다. 스가와라는 그 가락과,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때때로 성긴 별이 은하수 건너가네, 스가와라가 노래를 화답하자 하나마키는 밖에서 경박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노래를 아십니까?”
하나마키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경 지대에서도 익히 유행했던 노래가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목 끝으로 웃었다. 언제나 유행하던 노래였습니다. 사랑이 이뤄지는 만큼 이별도 많으니까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긍정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걸쳐진 망토와, 길게 늘어지는 겉옷을 벗으면서 애처롭게 노래의 전문을 떠올렸다.
내일 날이 밝으시면, 우리 기린과 함께 카라스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마키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적지 않게 놀라며 말했다. 직접 ‘아프지 않은 것’을 보여주라 하셨습니다. 하나마키는 제 손등에 묻은 피를 씻어내며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아 온 여자는 저항이 거셌다. 오늘 몸과 옷에 든 피 때문에,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자 하나마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왕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는 무뎌진 마음에 새 봄이 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스가와라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물 젖은 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얼굴에 피가 몰려 금세 붉어졌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사와무라의 얼굴과 카라스노의 상황을 보면 오늘의 두근거림도 묽게 희석 될 것이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런 전례를 남겨서는 아니 되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원래 의복을 걸쳤다. 그의 마음이 다시 재단(裁斷)되고 있었다. 그는 사와무라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약속했었다. 자신의 모든 정情을 버릴 만큼, 그는 나라가 소중했다.
그는 휘장 너머로 나아갔다. 공께서는 목간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가와라는 온통 피를 뒤집어 쓴 하나마키에게 권하였다. 하나마키는 집안에서 의복이 도착하는 대로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웃음은 비린 느낌을 주고 있었다. 피 냄새 짙은 방 안을 스가와라는 서둘러 빠져 나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바람이 불어 오이카와 토오루의 향이 짙게 든, 하얀 새의 깃털을 흐트러트렸다.
***
松暗水涓涓 소나무 숲 어둑하고 물은 맑게 흐르는데
夜凉人未眠 밤이 차가워 아직 잠 못 이룬다
西峰月猶在 서쪽 봉우리엔 아직도 달 떠 있고
遙憶草堂前 아득히 초당 앞에 있을 그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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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2. 17. 23:37
***
쿠니미는 눈을 떴다. 방에는 꽃향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덮은 남성의 겉옷을 바라보았다. 그는 엷은 홍색이 들어있는 의복을 쓸었다. 그는 손을 더듬었다. 그의 작은 손끝에 남성의 심장 소리가 걸렸다. 그는 그 위로 쓰러졌다. 쿠니미, 하고 잠이 든 목소리가 그를 간질였다. 그는 쿠니미의 비단옷을 슬슬 쓸어내렸다.
"왜 더 자질 않구."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저런, 이리 와 안기거라."
하나마키는 혀끝을 짧게 찼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는 몸을 옮기었다. 그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남자의 몸에는 온통 꽃냄새가 스며 있었다. 무슨 꿈을 꾸었느냐, 하고 그가 그의 귓가를 쓸며 물었다. 하나마키의 손가락은 쿠니미의 동지冬至밤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쿠니미는 말을 삼켰다. 하나마키가 그의 귀를 물었다.
귀에 혀가 닿았다. 그는 귓바퀴를 느리게 쓸었다. 눅눅한 숨이 닿아왔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웃었다. 말하기 싫으냐?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입니다, 하는 목소리에 그는 흥이 식었는지 바싹 붙여오던 몸을 땠다. 쿠니미는 하얀 속적삼에 하나마키의 큰 옷을 걸쳤다. 어깨와 품이 맞지 않는 옷이었다. 가야겠습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귀찮은 걸 싫어하면서 어찌 밤을 걸으려구, 하나마키는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쿠니미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것을 느리게 쓸었다. 나쁜 꿈에 대해서 묻지 않으신다면, 하고 조건을 거는 목소리가 꽤나 앙큼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는 흘러내리는 하나마키의 겉옷을 움켜쥐었다. 내 꼴이 어떻습니까? 그가 물었고, 하나마키는 요염하다 말하며 그의 허리를 간질였다.
"왕실 모독입니다."
"내 옷을 걸친 건 너였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웃었다. 밤이 짙게 내린 방 안이었다. 쿠니미는 그가 벌린 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의 팔에 머리를 뉘였다. 코끝이 가득 꽃향기로 물들었다. 향낭을 차십니까? 쿠니미가 작은 소리로 물었고, 하나마키는 널 위해서라는 말을 내뱉었다. 네 앞에서 완벽하고 싶다는, 내 바람일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쿠니미의 눈을 가려주었다. 쿠니미의 긴 속눈썹은 하나마키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제 잘 것입니다. 작은 기린이 속삭였다. 하나마키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그것을 허락했다. 쿠니미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가지런하고 일정한 움직임으로 속삭일 때쯤에, 쿠니미는 눈을 슬며시 떴다. 그는 기분 나쁜 꿈에 대해 생각했다. 짙은 피바람이 부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하나마키와 함께 있었다. 그의 겨울은 전방으로 활을 쏘고 있었다. 바람이 멈출 때 마다 그의 화살촉은 큰 짐승들을 쓰러트렸다.
꿈속의 기린은 시든 동백꽃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폭포수가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그는 제 몸에 맞는 연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은실과 금실로 새겨진 옷은 바람에 흔들렸고, 그는 하나마키에게 어리석게 질문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쏴야 합니까,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꿈이었다. 쿠니미는 꿈은 항상 반대를 보여준다는 격언을 생각하려 했다. 밖에서 바람이 불어 나무의 어린잎들이 흔들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짙은 어둠이 그의 눈꺼풀 밑을 간질였다. 그는 새벽을 틈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마키의 품속이 너무나도 따스했기에 그는 쉬이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는 왕의 기린이었고, 왕의 봄이었다. 모든 계절의 시작이자 왕의 방패여야만 했다. 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가려진 창과, 짙은 발, 그 너머 여러 겹으로 쳐진 비단 휘장을 바라보았다.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쿠니미야, 하고 하나마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거라, 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가 눈을 감자 하나마키는 옳지, 하고 그를 칭찬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쏘아야 합니까. 쿠니미는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하나마키는 네가 많이 졸린가 보구나, 하며 대답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쏘다, 라는 말과 다치다는 말은 같은 선상 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쿠니미는 제가, 졸린가 봅니다.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하나마키의 입가에 가 살랑거렸다. 실로 봄이구나.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약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꼭, 쏘아야 한다면 자주 사용하는 손의 반대쪽 손등이겠지. 기린은 한숨섞인 정인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다시 꿈이 어린 기린을 등나무마냥 옭아매기 시작했다. 쿠니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하나마키의 품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옷을 추슬렀다. 밤길이 차가웠고, 그는 큰 옷울 여몄다. 풀린 머리카락이 그의 발걸음마다 어지럽게 흔들렸다. 날이 밝자마자 왕을 뵈어야 했다. 그의 집착 때문에 나라가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돌려보내야만 한다. 쿠니미는 떨리는 가슴을 느리게 쓸었다.
정사(政事)는 어린애들 손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왕은 성군이어야만 했다. 그는 한 번 무릎을 꿇었던 자를 제 손으로 베려 했다던 아카아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쿠니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왕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벤다면 그가 품고 싶어 하는 하얀 새 쪽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멈춰야 했다. 그것이 아오바죠사이의 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눌러야 한다. 쿠니미는 자신이 스스로 한 생각에 떨었다.
온기가 그리웠다. 그는 냉한 방 안에서 홀로 헤매었다.
***
카게야마는 한숨지었다. 밤이 길었다. 스가와라가 기거하던 방 앞에서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달빛이 가장 환하게 들어오는 방이었다. 국경에 있던 서원과 비슷하게 꾸며진 방이기도 했다. 호수 한 가운데 섬처럼 선 스가와라의 방 앞에서 카게야마는 한참을 서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는 먼 곳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물에 들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퍽 불안정하다 느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카라스노로 향한 서신은 하나도 없었다. 국경을 넘으려던 난민을 사살했다는, 국경지대 수비대장의 보고만이 연일 들어오고 있었다. 전서구를 날리려 해도 쉽지 않았다. 단 하나의 생명도 통과하지 말라는 왕의 엄명이 내려 있었다. 그들은 푸른 하늘에도 금을 그었다. 카게야마는 이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인한 처사였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쿠니미의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카게야마는 앓아누웠다는 것이 단순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언가 속에 품은 것이 음험해 보이기도 했다. 쿠니미가 왜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는지, 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가 걷는 발걸음마다 그림자가 짙게 내렸다.
그는 오이카와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국경지대에서 기거할 때도 그랬다. 카라스노의 황실이 옹립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의 속은 열 길 물속보다도 깊었다. 카게야마가 보기에 그의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집착이었다. 그는 절대로 성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성급하게 걸었다. 인간의 겉모습을 벗어 던지고 아오바죠사이로 길을 달릴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람에 그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깃털 장식이 흔들렸다. 그는 그 미미한 무게에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떠나기 전에 그가 걸어 준 것이었다. 기린 님은 언제나 급한 성격이 문제십니다. 무언가 결정할 일이 있을 때에는 절 생각하시어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는 가슴을 쓸었다. 그는 한 나라를 짊어지고 있었다. 성급한 행동은 전란을 부를 뿐이었다.
그는 오이카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호수 한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삼 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틀을 잡겠습니다. 스가와라는 성난 그 앞에서 당당히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오이카와 공의 은혜는 잊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조금의 말미를 주십시오. 카게야마는 그의 당당함이 부러웠으나, 그 당당함으로 인하여 아오바죠사이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되었다.
토비오, 강직한 자는 언제나 꺾이기 마련이다. 유연한 자가 되거라. 그는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미워했다. 기억을 잃은 기린임을 미리 알고 있던 탓이었을까, 혹은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카게야마는 바람 부는 정자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행동을 돌아봤자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는 스가와라가 아직은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걸었다. 경비 인원을 빼고서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게 누구냐, 카게야마는 짐짓 위엄 있게 소리쳤다. 날세. 익숙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는 자신의 왕에게 무릎을 꿇어 사죄했다. 그럴 필요 없어, 사와무라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왜 잠에 들지 않았느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걱정 되느냐?”
“그렇습니다.”
사와무라는 호수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신의 새장에서 날아간 하얀 새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했다. 그는 손을 뻗어 흑기린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오바죠사이의 왕은 스가와라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해. 그는 확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사와무라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손을 땠다. 그는 등 뒤로 두 손을 가리었다.
약조했기 때문이다. 카라스노의 왕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증인이었고, 둘은 피로 지장을 찍었어. 사와무라는 카게야마가 모르는 이야기를 말하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자. 그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카게야마의 마음은 그 정도의 말로 진정될 파랑이 아니었으나, 그는 자신의 왕께 무릎을 숙여 인사하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기린의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왕이 아니라 그 수족이겠지. 사와무라는 자신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을 잘 부려. 몇 수 앞까지 미리 예측하고 장기를 두는 느낌이야. 그의 왕은 혀를 차냈다. 그 안타까운 소리에 카게야마의 마음에 다시 소란이 일었다.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듯 하였다.
“그 쪽과 제가, 이야기를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가와라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카라스노의 기린은 그의 말뜻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쿠니미라도 보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청하였다. 왕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네가 스가를 아끼는 건 잘 알고 있단다. 사와무라는 자애롭게 말했다. 찬바람이 둘의 사이를 가르며 불었다. 멀리서 까마귀가 우는 듯 했다.
그쪽 기린은 총명한 아이지? 사와무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기린 중 가장 먼저 개화한 아이였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아오바죠사이를 지탱할 정도면 대단하다는 증거겠지. 사와무라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하였다. 그렇다면 스가는 조만간 카라스노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말은 카게야마에게 선언처럼 들렸다. 카라스노의 기린에게 이 인과관계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알기 힘듭니다.”
“둘 사이가 갈등처럼 엮여서 그렇단다.”
사와무라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 선을 지킬 줄 알 것이라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알았다 말하였다. 이제 들어가 편히 쉬거라, 그의 왕은 자애롭게 명령했다. 기린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였으나, 그는 왕에게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사와무라는 아이를 어르듯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기린으로서의 자아가 성립한 지 얼마 안 된지라, 그는 아직도 기린의 예절에 어색했다.
나를 믿느냐? 사와무라가 물었다. 왕께 무릎을 꿇은 이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였다. 그럼 네 마음속에 자리한 파랑(波浪)도 잠재우거라.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왕이 나아가는 자리를 가만히 따라 걸어갔다. 사와무라에게 무릎을 꿇기 전 스가와라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왕이 하시는 말에는 한 점 의심이 없어야 하며,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백 번 천 번, 만 번까지 생각 해 보거라. 카게야마는 숨을 골랐다.
스가와라가 그리하라 했으니 카게야마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미로 같은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그가 매어준 깃털장식을 소중하게 쥐었다. 갈림길에서 그는 그의 왕과 반대편에 섰다. 강녕하시옵소서. 기린은 자신의 왕께 다시 무릎을 굽히었다. 그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스가와라가 세우길 원한, 스가와라 코우시의 왕이었다. 카게야마는 밝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동이 트기엔 아직 먼 새벽이었다.
***
동이 튼 것이 확실한데도 스가와라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시동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그의 귀를 간질일 뿐이었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어두운 시야에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저 가만히 고여 있으시면 됩니다. 산들바람 같은 야하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하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스가와라를 안심시키려 했다.
왕의 명령이십니까? 하얀 새가 물었다. 야하바는 그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단장을 하여 진상하라는 말이 내려왔습니다.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스가와라의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밤 같은 시야였다. 나는, 한 나라의 재상입니다. 그는 강직하게 말하였다. 야하바는 다시 왕의 명령이라는 말만 반복 할 뿐이었다.
당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가와라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그는 날이 선 채로 대답했다. 아오바죠사이의 동장군, 하나마키 타카히로입니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혔다. 왕의 용안을 함부로 보셔서는 아니 되는지라,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그의 눈에 천을 두르겠다는 설명을 했다. 그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 전하였다.
여러 겹의 천이 스가와라의 몸에 둘러졌다. 파란색으로 장식 된 전자를 보며 하나마키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색을 둘러 침소로 데려오지 않으련, 하나마키는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자신의 왕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왕의 색을 다른 나라의 재상에게 입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스가와라가 머무르는 곳은 서관이었다.
그 오랜 은유를 하나마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눈 색과 닮은 자수정으로 세공한 귀걸이를 스가와라의 귀에 거는 시동을 쳐다보았다. 이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 아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걸려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베는 것은 언제나 괴로웠지만 할 수 없었다. 왕의 평판에 흠이 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하나마키는 왕께 하사받은, 낭아초가 새겨진 검을 쥐었다.
이와이즈미가 자신 대신 국경으로 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사였다. 이와이즈미가 이 모습을 본다면 격노할 게 분명했다. 그의 검 끝은 오이카와가 아니라 스가와라를 향할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볼모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제 모습이 어떠하기에 그리 숨을 쉬시나이까.”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워 말을 잃었습니다.”
“곧 질 날만 남겠습니다.”
스가와라가 농을 걸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백일홍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린 아이가 그의 손가락에 옥으로 만든 호갑투를 씌웠다. 그는 여인처럼 단장했다. 연홍빛 물감이 그의 눈가에 찍혔다. 하나마키는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는 꿀을 발라 반짝이는 스가와라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색이 없는, 하얀 재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화려한 모습이었다. 혼례를 올릴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왕께서 들라 하십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물총새 깃으로 만든 점취장식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진주알이 촘촘히 박힌 비녀로 긴 머리카락을 고정한 쿠니미가 있었다. 그는 소매가 없는 긴 털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표정이 거의 없던 그의 얼굴에 강한 혐오가 일어 있었다. 얘야, 재상님을 데리고 갔다 이리로 와 주련? 하나마키는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녀에게 부탁하였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 해괴한 짓의 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하나마키는 그녀의 가족을 따로 거둬야 겠다 생각하였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이니 걷는 데 신경 쓰셔야 하실 겝니다. 쿠니미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하나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거칠게 자른 뒷머리가 흰 천에 가리어, 선이 엷은 그의 뒷모습은 정인에게 시집가는 여인의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서궁을 벗어나 동궁으로 향했고, 쿠니미는 한참을 들여 제 속에서 말을 정리하였다.
우리 왕께서는 드디어 실도 하려는 겝니까? 그가 분노에 차 일갈한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믿어보지 않으련, 하나마키는 정복을 갖춘 제 기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동궁으로 향하는 길에 모든 사람을 물렸습니다. 쿠니미는 한 자 한 자 똑바로 곱씹어 발음하였다. 하나마키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한동안 서궁에서 멀리 떠나 있거라. 피냄새가 가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멀쩡한 시종들을 반란죄로 싸잡아 처형하는 것을 보면 분명 까무라칠 것이다. 그는 한 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보며 말하였다. 이 파괴적인 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를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이토록 오이카와 혼란스러운 오이카와를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왕은 언제나 강직하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성군이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먼저 왕을 만났어야 했습니다. 쿠니미는 야하바를 노려보았다. 기린의 손끝에 걸려있는 호갑투의 흑요석이 눈물처럼 반짝였다. 왕의 직접적인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야하바는 그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기린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정리했다. 그는 이 웃긴 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야하바와 하나마키는 대답할 수 없었다.
피냄새가 서궁을 물들이기 전에 먼저 떠나 보겠습니다. 아오바죠사이의 흑기린은 길고 긴, 불안한 밤이 지난 다음 날이 이런 혼란스러움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는 듯 조소했다. 그는 자신의 왕이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만 했다. 정正하지 못한 왕은 끌어 내려야만 했다. 쿠니미가 걸친 일구종의 끝자락이 냉기를 먹어 무겁게 흔들렸다. 야하바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의 생각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한 식경 정도가 지난 후에 묻혀야 할 피의 무게가 상당하였다. 왕의 개를 자처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가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 할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이번 일은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오이카와의 말을 믿기로 했다. 마지막,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의 검에 새겨진 낭아초(狼牙草) 장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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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2. 4. 14:12
***
스가와라는 제 방문 앞을 막고 서 있는 시동을 보았다. 아이는 옻칠이 된 자개장을 들고 있었다. 큰 나뭇가지에 한 마리의 새가 앉아있는 모습이 장식된 함이었다. 나에게 주려고 온 것이냐, 그가 물었고 시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시동은 그에게 받아주시옵소서, 하고 작은 목소리로 고하였다. 왕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받지 않으신다면 큰일이 납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여실히 떨리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물건을 받아들였다. 벌써 며칠 째 반복되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볼모로 온 것 치고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프다는 기린은 두문분출 하고 계시어서 안부를 전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안부를 전하려 가까이 가는 것도 무리였다. 그는 간간히 그의 침소에 놀러오는 야하바와, 선물을 전하기 위해 오는 시동을 빼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창 너머로 보이는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오바죠사이의 하늘 또한 카라스노와 같은 빛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가와라는 방 안으로 들어가 함을 열었다. 산호로 장식된 아름다운 비녀가 안에 있었다. 여염집 아씨들이 쓸 만한 물건이었다. 긴 머리를 자르신 게 못내 아쉬워 보냅니다. 그는 그 깔끔한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서西궁은 하나의 감옥이자 새장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를 가두고 싶은 것이었다. 이 흔한 욕망에 스가와라는 어찌 대응할지 알 수 없었다. 점점 어두운 물길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긴 머리를 가지던 시절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이 유폐된 곳에서 서책하나 허락되지 않는 지금이 괴로웠다. 그는 책상에 어지러이 놓여 있는 자수틀과 오색실들을 바라보았다. 아오바죠사이, 왕의 색인 푸른색조차 실에 감겨 있었다.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난동을 부린 주제에 볼모 취급은 여인을 다루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럴 것이라고 짐작하곤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과거를 생각했다.
계십니까,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야하바의 목소리였다. 들어오십시오, 스가와라가 정중히 권하자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와, 비단으로 만든 가리개와 진주를 엮어 만든 발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는 언젠가 야하바가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아오바죠사이에서는 신부를 맞이할 때, 그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이중 발을 만들어 가둡니다. 귀신조차 들어오지 못하게요. 별 의도 없이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왕의 심복이었고, 손과 발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내일부터 전에 나오라는 왕의 명이십니다.”
“제가 아오바죠사이의 관료들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겁이라도 줄 생각이신지요, 스가와라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는 부채를 강하게 쥐었다. 야하바는 별 일 아닐 거라며 웃었다. 그는 스가와라가 갖춘 단정한 의복을 보더니 시종을 불렀다. 일단 목욕부터 하시지요, 그의 간질거리는 웃음이 스가와라는 불편했다. 그는 얼굴을 가린 시종들에게 떠밀려 방 안에 딸린 목욕통으로 향했다. 장미 향유를 물에 타거라, 야하바는 그의 왕이 말씀하신 대로 지시하였다.
스가와라는 제 몸에 화려한 꽃향이 들이차는 모습이 싫었다. 그는 볼모였고, 그의 어깨에는 한 나라가 짊어져 있었다. 한 나라의 재상을 계집아이 취급하여 자존심을 꺾으려는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시종들의 손을 거절하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러시면 저희가 죽습니다. 어린 목소리들이 그에게 간청하였고, 본디 모질지 못한 성정인 그는 그 손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갖은 장신구, 보석이 들어있는 자개함, 얼마 전에 보낸, 열리지 않는 새장에 든 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호의好意가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가 아는 그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그를 병들게 만들었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욕탕에서 일어났다. 하얀 옷이 물에 젖어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발을 옮겼고, 시동들이 그의 몸을 닦았다. 스가와라는 평소에 입던 하얀 옷을 걸치게 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으로 나서자 야하바는 웃으며 그를 맞이하였다. 그는 긴 노리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허리춤에 그것을 장식하여 주었다. 재상께서 왕의 허락을 받으셨다는 증표입니다, 앞으로는 서재든 서관이든, 허락되지 않았던 곳들도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야하바의 말에 스가와라는 단단하게 매듭지어진 노리개를 쓰다듬었다. 꽃향이 달달합니다, 야하바가 농담을 하듯 건넨 말에 스가와라는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정원이라도 가보시겠습니까? 스가와라 님께서 들어가지 못했던 동관에 있는 곳입니다.”
야하바가 물었다. 야하바 님을 대동하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이십니까? 스가와라가 묻자 야하바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실 테니 먼저 들어가시지요, 그의 다정한 말에 야하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궁인들에게 징표를 보여주신다면 어디든 길을 안내 해 주실 겁니다, 하더니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스가와라는 철벽같던 발을 걷어 방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 볼모로 잡혀온 지 삼 주가 지났다. 그는 서재에 가고 싶었다.
그는 어두운 색으로 퍼져가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홀로 다니는 것은 불안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꽃의 관’이라고 불리는 서궁의 작은 정원 이외의 다른 곳을 탐방한다는 것이 좋았다. 그는 전과 전 사이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아오바죠사이의 창병들은 왕의 노리개를 찬 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히 공손한 인사를 보내었다. 그동안의 행동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밤이 차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로처럼 엮인 동궁의 정원이었다. 스가와라는 흐드러지게 핀 나무수국 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왕의 의복을 갖춘 오이카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왕을 뵙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수국 새로 바람이 불었다. 늑대가 제 무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라.”
그의 명령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자색 눈동자는 여전하였다. 당당하고 귀품 있으며, 아름다웠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몸에 새겨진 우아함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이제야 만나는구나, 하고 속삭였다. 번민하는 밤에 너를 풀어주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흘려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왕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재회였지만 그들의 신분과 상황은 그 때와 전혀 같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보낸 서신을 읽지 못하셨습니까, 하고 대꾸했다. 오이카와는 읽었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네 덕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내 기린이 앓아누운 것 같구나. 그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꽃을 스치는 바람 같은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소생이 왕의 시간을 뺏을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제 갈길을 가겠습니다. 그의 당돌한 말에 오이카와가 웃었다.
“이 곳으로 가면 내 침소가 있다. 노리개를 해주었더니 내 곁에 제 발로 오는구나.”
“지리를 몰랐을 뿐입니다.”
“네가 찾는 서고라면 남궁에 있음직하구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이곳으로 온 게 너의 진심은 아니었느냐? 오이카와가 농을 치듯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 약조한 일의 기한이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람에 그가 맨 왕의 장신구가 흔들렸다. 네 언약을 정말로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은 새에게 속삭였다. 폐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믿어주십시오, 그는 허황된 약조를 내뱉었다.
하늘에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날이 추우니 부디 옥체 보존 하소서. 스가와라는 몸을 굽혀 인사했다. 그 모습이 오이카와의 심장을 세게 누르는 듯 했다. 왕은 그의 단정한 모습을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그의 움직임에 옷자락이 흔들렸다. 동궁의 중앙 전, 우측 방에 널 보고 싶어 하는 자가 있더구나, 말동무나 해주며 잠이나 재워 주거라. 왕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기루와도 같은 광경이었다.
너무나도 멀어졌다. 스가와라는 국경지대에 있던 작은 서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과 한 나라의 재상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장신구들을 보낸 저의는 ‘기억 해 달라’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기에 스가와라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는 정원을 빠져 나갔다. 낯이 익은 남자가 보였다. 아오바죠사이의 ‘가을’이자 호위대장인 이와이즈미와, 야하바를 호위해 왔었던 킨타이치였다. 그는 그 둘에게 예를 갖추었다.
왕께서 제게 동궁 중앙 전, 우측 방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스가와라가 담담히 말하자 그들은 머뭇거리다 그를 안내해주었다. 스가와라는 머뭇거리면서도 아오바죠사이의 가장 깊은 곳에 데려다주는 그를 보며 두터운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왕에게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수족이 필요하다. 그는 오이카와가 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스가와라는 자신의 약속이 그저 한낮 아지랑이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감사했습니다."
헤어지기 전, 스가와라는 몸을 숙이며 이와이즈미에게 인사했다. 이와이즈미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 서슬퍼런 날붙이 같은 말이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호수 같기도 하였다. 그의 단단한 눈이 스가와라와 마주해왔다. 스가와라는 그의 미간을 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하고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킨타이치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내 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겁니다."
이와이즈미는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았다. 킨타이치는 그에게 목례하고 이와이즈미를 따라 걸었다. 스가와라는 그 둘의 모습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담은 말이었다. 그는 이와이즈미와 말을 섞은 것이 '그 날' 이후로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이즈미의 모든 행동은 왕을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아오바죠사이 왕의 검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왕을 떠올렸다. 돌아가고 싶었다. 갈 길이 멀었다.
***
동궁의 우측 방에는 기린이 있었다. 그의 얼굴빛은 창백했으며, 긴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넘기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왜 오이카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있자 쿠니미는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목소리가 작게 나오는 바람에 공을 무례하게 부른 걸 사과드립니다, 어린 기린은 소곤대며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쿠니미는 등을 켰다. 스가와라는 반대편 등에 불을 붙였다. 쿠니미는 옆에서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붓으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목소리가 불편한 것이 티가 나는 듯하여 스가와라는 마음이 미어지는 듯 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 ‘모두 제 탓입니다. 카게야마가 먹는 걸 보고 작은 교자를 입에 넣었다가 탈이 났습니다. 제가 부덕한 일이라 말하였는데 왕께서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눈으로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님은 기린인 줄 모르고 인간과 섞여서 자랐지요. 그 탓인지 다른 기린님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미리 설명을 해 드렸어야 하는 부분인데, 저희의 불찰입니다.”
쿠니미는 그의 말을 듣고서 종이에 다시 글을 적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엉망인 글체를 떠올렸다. 아오바죠사이의 국풍은 ‘우아함’인지, 그의 행동에서 기품이 서려 있는 듯 했다. 쿠니미가 다시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 ‘제가 쾌유한다면 돌아가실 수 있으실 겝니다. 불안해 하실까봐 이곳까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작은 기린의 배려에 스가와라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였다.
기린은 다시 붓을 들었다. 왕께 도서관이라도 이용하실 수 있게 졸랐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친절에 스가와라는 짧게 웃었다. 그는 쿠니미의 손을 잡았다. 하해와 같은 은혜십니다,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달라 말하였다. 그 어리광 묻은 모습에 스가와라는 나무로 조각한 빗을 들었다.
쿠니미는 어딘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는 뒤를 돈 채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붓이 다시 움직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종과 함께 돌아가십시오, 동궁은 미로같은 구조라 쉽게 나가실 수 없으실 겝니다. 스가와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녕하시길.”
쿠니미가 소리 내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정갈하게 들린 것 같아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내 들려오는 잔기침소리에 그는 의심을 거두고 방 안에서 나갔다. 쿠니미는 혼자만 남은 공간에서 그가 땋아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자개함에서 작은 리본을 꺼내 머리카락을 묶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상에 있는 것 치고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미리 말해둔 시동은 스가와라를 데리고 가장 먼 길로 나갈 것이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걸었다. 그는 동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별채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 소리를 멀리서 들었는지, 혹은 올 것이라 예견한 것인지 정인情人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문을 가벼이 열었다. 미리 시종을 물려 놓았는지 방 안에는 하나마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픈 척은 잘 하셨습니까.”
하나마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쿠니미는 그의 무릎에 다가가 앉았다. 그는 하나마키의 너른 몸에 자신의 등을 기대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하나마키는 기린의 머리에 묶인 끈을 풀었다. 그는 다시 빗을 들어 그의 흑단과 같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카라스노의 여인처럼 수수하게 묶어 내린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마키가 속삭였다. 쿠니미는 괜히 발을 구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다시 말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느냐.”
하나마키가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쿠니미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연극도 지긋지긋합니다. 다음 생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광대가 되어도 좋겠어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가와라가 서西궁에서 벗어난 이상, 기린은 동東궁에 유폐 된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동冬장군인 내가 그 쪽으로 많이 놀러가마, 하나마키는 달짝지근하게 말하였다.
이 보다 더 지겨운 일이 더 있습니다. 쿠니미는 머리카락을 쓸어오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말하였다. 하나마키는 무엇이, 하고 물었다. 그는 어린 기린이 말을 고르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쿠니미는 입을 열었다. 나의 왕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는 게 화가 나고, 그가 명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지겹습니다. 쿠니미의 불경한 말에 하나마키는 그의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왕께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마키 공이야 말로 내가 나라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쿠니미는 입술을 내밀었다. 그는 진심으로 불만인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새를 새장에 잠시 가뒀다가 풀어주면 만족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마키는 그의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며 말을 걸었다. 쿠니미는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다가, 숨을 불어 촛불을 꺼냈다. 순식간에 방 안에 어둠이 몰려왔다. 하나마키는 그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나는 내가 왕을 이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기린이 왕을 이용하다니 세상 참 말셉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오히려 왕이 날 이용하고 있던 겝니다.”
이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관계에 기반을 두어서요.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하나마키는 그가 알아 챈 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왕은 나라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의 그 맹목적인 신뢰의 말에 쿠니미는 그렇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멀리서 동궁을 돌아 황후전으로 가는 스가와라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발소리가 울리는 것마저 우리 왕은 좋으시겠지요, 가시가 돋힌 기린의 말에 하나마키는 그저 짧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었다. 밤은 마치 장막처럼 모든 진실을 가리고 있었다. 밤의 끝은 언제나 새벽이며, 새벽은 곧 해를 불러 올 것이었다. 쿠니미는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둠이 언제나 혼돈을 가려왔다지만, 이것은 어떻게 풀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쿠니미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 과거에 어떻게든 닿고 싶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사사로운 감정은 나라에 독이 되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님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마키는 신하 된 자로써 이야기했다. 쿠니미는 괜히 그의 등에 기대었다. 머리카락을 만져 오는 손이 오늘따라 애달팠다. 그에게 겨울자리를 준 것도 이 탓인가, 쿠니미는 내일 어둠이 내리는 데로 오이카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왕에게서 들을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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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2. 2. 11:32
***
삼일 밤낮을 마차를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왕은 어전에 자리하지 아니하였다. 쿠니미는 그의 아래로 내려묶은 머리카락에 달린 잎사귀 장식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왕을 찾으러 발걸음 하였다. 그는 붉은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던 정원으로 향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키만큼이나 좁은 보폭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가벼이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정원에 있었다. 그는 청색 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왕이시여, 하고 쿠니미가 부르자 그는 뒤를 돌았다. 그의 팔에는 매를 부릴 때 쓰는 가죽 보호대가 있었다. 쿠니미는 나무수국들이 가득 심어진 정원 한 가운데를 걸어갔다. 때마침 상공에서 배회하던 매가 그의 왕에게로 다가갔다. 잘 관리된 깃을 가진 매였다.
“새로운 취미가 생기셨습니까?”
“새를 길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하얀 새 대신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오이카와는 쿠니미를 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겨울철의 나무수국 만큼이나 바래 있었다. 어딘가 아련한 듯한 그 미소에 기린은 그저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 걸음을 하였구나, 오이카와는 매의 깃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지금 여기 계십니까? 쿠니미는 괜한 투정을 부렸다. 오이카와는 매를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그 장식을 한 건 오랜만이구나. 왕이 말하였다. 쿠니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뭐라고 탓하려는 게 아니었다. 너는 ‘어린애’이지 않느냐. 어린 아이는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게 세상의 순리지. 아무도 네 꽃장식을 보고 오만방자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전으로 들라 말했다. 그의 왕은 앞장서 걸었다. 기린은 그의 너른 등을 보면서 그의 발길을 따라 갔다.
새는 아름답더냐? 어전으로 들기 전, 시종들 앞에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매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탐하실 만 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대답에 그의 왕은 호쾌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는 궐 안에 새장을 만들어야겠다 말하였다. 그 소유욕 가득한 말씨에 쿠니미는 다만 얼굴을 굳힐 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쿠니미는 어전으로 들었다. 그의 자리는 왕의 옆이었다. 왕실 호위대장 이와이즈미가 쿠니미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쿠니미는 이와이즈미가 전 아래로 내려가서는 것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왕좌에 앉자, 왕좌에서 전으로 내려가는 그 계단 중간에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자리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둘 보다 윗부분에서 단단히 서 있었다. 전 안을 가득 채운 신하들의 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흡족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꾸며내는 것도 왕의 일이었다. 마음이 어쩐들, 그것을 가린 가면만 완벽하면 쿠니미는 불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왕이 이런 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얀 새에게 집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모두를 내려다보며 자리했다. 궐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햇살이 그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 쥘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쿠니미는 그에게 무릎을 꿇기 전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곳의 정점에 설 수 있도록 하겠으며, 세상의 온 구석에 당신의 이름이 퍼지도록 지지하겠습니다. 그는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는 자신의 왕이 부디 한낱 바람에 흔들리지 않길 바랐다.
오이카와는 아오바죠사이의 왕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쿠니미와 눈을 마주쳐왔다. 이 아침 조례에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온 것이었다. 최고 존엄하신 나의 왕이시여, 말씀 올리겠나이다. 쿠니미는 간절하게 말하였다. 오이카와는 고갯짓으로 그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쿠니미는 입술을 열었다. 그는 카라스노와 있었던 간이 회담의 일을 간략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마치 자식을 보는 것처럼 자애롭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오바죠사이의 왕, 오이카와 토오루는 사람을 부리는 데 망설임이 없는 남자였다. 그는 적제적소에 자신의 사람을 보낼 줄 알았다. 동冬장군 하나마키는 그의 군대와 함께 국경지대에, 하夏장군 마츠카와 또한 그 가까이에 진을 친다. 쿠니미는 그의 결정이 제법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아오바죠사이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카라스노의 난민들에게는 이만한 처사가 없을 것이다.
카라스노는 자신의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였다. 아오바죠사이가 무력으로 국경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쿠니미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의 침소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긴장하였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의 왕이었다. 그는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나마키 공에게만 허락한 공간에 내가 들어와 싫으냐?”
“궐 안에서 당신께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 있었습니까?”
최고 존엄하신 나의 왕이시여.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너의 침소니 편히 있거라, 오이카와는 웃으며 말했다. 쿠니미는 관을 쓰지 않은 그는 오랜만에 본다 생각했다. 그는 괜히 비단 너머의 구슬장식들을 건드렸다. 대나무 밭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 손장난 같구나, 그의 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기린 또한 속삭이듯 대답하였다.
“쿠니미야, 오늘은 내가 재워주려고 왔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도 왕의 일이 아니겠느냐. 오이카와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와이즈미 공이 혼내시지 않으십니까? 쿠니미는 가만히 대답하였다. 그의 왕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린은 괜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자紫색 눈동자가 깊었다. 국경문제 때문에 심란하십니까, 어린 기린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나는 새 하나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내 아이가 앓아눕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그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상사병이 깊으십니까?”
“어린아이의 눈은 거짓을 보지 못한다더니. 들켰느냐?”
오이카와는 한쪽 눈을 감으며 물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안이 곪아 있다는 것을 쿠니미는 알 수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왔던 분이었다. 그는 쿠니미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기린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카라스노의 하얀 새. 오이카와는 그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제 왕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아오바죠사이의 기린이 되기 그 몇 년의 공백. 그 사이에 일어났던 일임을 추측 할 뿐이었다. 아련해 보이십니다, 그는 담담히 말하였다. 오이카와는 티가 났느냐며 웃었다. 그의 가벼운 어조 너머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이 강해지는 법. 쿠니미는 자신의 왕이 털어놓을 진심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쿠니미야,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많은 것이 담긴 말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피곤하지 않았느냐, 혹 인간으로 살던 카라스노의 기린과 같은 식사를 하여 어디 탈이 난 것은 아니냐. 아니면 카라스노에서 있던 시간 동안 네가 불편했던 일은 없었느냐, 오이카와가 덧붙인 지독한 말 속에서 쿠니미는 자신의 왕의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카라스노 라는 나라 자체를, 혹은 그곳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그 하얀 재상을 옭아매고 싶은 것이다.
볼모를 원하십니까, 작은 목소리로 쿠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말을 흐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 속, 눈동자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가 이미 결심했다면 이루어 주는 것은 신하 된 자의 몫이었다. 쿠니미는 아오바죠사이의 관제官制를 떠올렸다. 봄에 위치한 기린과 여름, 가을, 겨울에 위치한 신하들. 그것은 온 계절 위에 있는 왕을 떠받들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다.
“기린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오이카와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워졌다. 그 짙은 그림자를 바라보다 쿠니미는 살포시 웃었다. 그는 그의 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 번 볼모로 잡아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린의 직언에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새장에 들어있는 그를 보고 싶다. 그는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쿠니미는 평소 욕심 부리지 않던 자신의 왕을 떠올렸다. 그가 유일하게 탐하는 것은 그 새 한 마리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왕이 원하신다면.”
“그래도 괜찮겠느냐.”
“저는 왕의 신하입니다.”
왕께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갚아야 할 것이지요. 그는 천천히 내뱉었다. 왕께서 동장군을 국경으로 보내신 것도 이 때문이 아닙니까? 쿠니미가 당돌하게 물은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하구나, 왕의 칭찬을 기린은 웃음으로 받아냈다. 카라스노에 파발이 가면 동장군께서는 국경을 넘어가겠지요? 당신의 명령이니까요.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웃었다. 자신의 기린은 매우 영특한 자였다.
밀지의 내용까지 알줄은 몰랐구나.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볼을 쓰다듬었다. 쿠니미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었다. 왕의 심란한 마음이 이 일로 다스려진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실도하신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기린은 당돌하게 말하였다. 오이카와는 그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 손을 때었다. 내일부터 전에 큰 동백이 한아름 달린 관을 쓰고 와도 윤허하겠다. 오이카와는 나름대로 농이 섞인 호사를 내렸다.
앞으로 아플 예정이라 당장 못 쓴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군요. 쿠니미는 제법 얄밉게 조잘거렸다. 오이카와는 그 목소리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널 재워주려 왔는데 내가 복을 받았구나, 왕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저와 왕은 공생共生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기린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는 왕의 넓은 소맷부리에 새겨진 아오바죠사이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다만 왕께서 왕이심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고 있다.”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시기를.”
쿠니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마키 공은 너를 재울 때 무슨 말을 해 주느냐? 왕은 동장군의 이름을 부르자 얼굴을 붉히는 이 기린이 제법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잠시 말을 고르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을 말해 주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너희의 사랑은 일상에 기원 해 있구나. 오이카와는 제법 얄미운 어조로 말하더니 뒤를 돌았다.
오늘 밤도 강녕하시기를, 쿠니미가 말하였고 오이카와는 그 말을 받은 채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을 가만히 닫았다. 왕께서 군과 시종을 다시 배치시키는 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듣다가 기린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기린에게 오랫동안 깨어 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만들어 낸 얕은 수 밑에 들어있는 깊은 감정을, 카라스노가 몰라주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
전쟁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스가와라는 아오바죠사이 동장군의 군대가 자신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보고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장군 아즈마네가 국경으로 향했고, 그의 수족인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그 뒤를 따랐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사신이 도착하였습니다, 시종장 야치의 목소리가 울렸고, 궐내의 시선이 모두 그녀와 그녀가 데려온 사신으로 향했다.
야하바입니다, 푸른 옷을 입은 사신은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아오바죠사이의 푸른 문양을 한 교지를 건넸다. 그것은 바로 스가와라의 손을 통하여 카라스노의 왕에게 전달되었다. 다이치의 목소리가 그 내용을 읽었다. 당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오바죠사이의 기린이 앓아누웠으니, 이는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다. 그 딱딱한 문구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카게야마가 주먹으로 수수하게 세공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야하바의 뒤에 있던 무장이 야하바의 앞을 가리며 섰다. 괜찮다 킨타이치, 그의 목소리에 무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가와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카게야마가 날이 선 채로 소리쳤다.
“재상 하나를 보내십시오.”
야하바는 웃는 낯으로 말하였다. 카라스노의 진심을 알 때 까지 저희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스가와라는 그가 말한 재상이 자신을 뜻함을 알 수 있었다. 기린은 한 나라의 상징, 볼모로 잡을 수 없다.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야하바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꽤나 분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회의를 거쳐도 괜찮겠습니까, 스가와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붙잡고 물었다.
잠시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야하바는 노련하게 대처했다. 야치가 그와 그의 무장들을 안내했다. 그녀는 아마 가장 먼 별궁 안 정자로 그들을 데려 갈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흘리는 피가 많습니다. 스가와라의 말에 다이치가 한숨을 내 쉬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들의 함정일 거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의 동장군을 아십니까,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군의 피해가 막강할 것입니다. 아오바죠사이는 왕의 창을 보냈습니다. 우카이가 말을 꺼냈다. 다이치는 대답이 없었다. 전쟁을 지속하면 승산이 있습니까? 왕이 물었다. 아무도 ‘알고 있는 답’을 꺼내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타케다의 머뭇거리는 입술을 응시했다. 신하 된 자로서 왕께 무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리입니다.”
“스가와라 공.”
“지금의 우리로써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손목을 잡았다. 재상께서는 지금 그 곳으로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기린이라기보다는 인간 같을 때가 있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였다. 피해가 클 일을 작은 희생으로 막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궐 안이 한숨으로 물들었다.
스가와라는 직접 가겠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피력했다. 잠시, 생각 할 시간을 주게. 그의 왕은 한탄하며 말했다. 지금 가장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와무라일 것이다. 왕으로 추대된 지 삼 년. 그 전에 있었던 전란을 회복하기에도 카라스노는 급급한 일이었다. 아오바죠사이로 넘어가는 난민들을 사살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그 탓이었다. 나라가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장기말을 움직이는 데에는 별다른 고민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법이었다. 스가와라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왕의 결정을 기다렸다. 굶주린 까마귀. 몰락한 왕조. 그것을 재건하기 시작한 카라스노의 상황에서 그가 내려야 하는 말은 단 하나였다. 왕이시여, 카게야마가 다시 왕의 대답을 청하였다. ‘안 된다’라는 말을 내뱉으라는 애절한 간언이었다.
사와무라의 입새에서 한숨이 나왔다. 무거운 숨이었고, 결정이었다. 더 의논해 봤자 결국 답은 하나입니다. 스가와라가 그를 재촉했다. 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카이와 타케다 또한 이 일이 가장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되풀어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개인 사와무라 다이치가 아니라, 카라스노의 왕으로써 말씀 해 주십시오. 스가와라의 단호한 말에 그가 세운 왕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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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2. 1. 01:09
***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의 국경 길은 험난했다. 길이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쉴 틈 없이 말을 달려온 탓인지, 그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께에 달린 꽃장식을 바라보았다. 쿠니미는 그 장식이 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작은 기린은 손을 뻗어 산호로 세공한 장식품을 쓸었다. 그 가벼운 진동에 하나마키가 눈을 떴다.
역시 무인이시네요, 어린 기린의 말에 하나마키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검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풀린 머리카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그는 이파리 장식을 달 것이냐? 하고 물었다. 그의 노골적인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신하들 앞에서 왕을 뵈어야 합니다. 그의 사무적인 답에 하나마키는 마차 안에 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국경을 넘으려다 처형당하는 자들이 보였다. 그는 창문에 달린 비단을 내렸다.
무슨 광경입니까, 어린 기린이 물었다. 하나마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카라스노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말 해 보라며 재촉했다. 쿠니미는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회담에 관한 이야기였다. 왕께 가장 먼저 말해야 하지만, 이라는 사족이 붙은 이야기를 하나마키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작은 기린이 발품 팔아 얻어 낸 결과였다. 그는 제법 강경하게 결정 된 사항을 듣다가 괴로웠겠네, 하고 속삭였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장 싫었던 건 카게야마가 눈 깜짝 안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전포고로 오해할 뻔 했지 말입니다. 쿠니미는 분함을 담아 속삭였다. 하나마키는 카라스노의 흑기린의 능력이 뛰어 나기 때문이라고 말하다가, 쿠니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너도 성장을 마치고 나면 그 만큼 뛰어나지 않겠느냐, 그가 가볍게 말하는 목소리에 쿠니미는 입술을 내밀었다.
“조금 있으면 너에게 편히 말하는 것도 힘들겠구나.”
“어전이 가까워 오니까요.”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좁혀지는 미간에 손을 얹어 툭툭 건드렸다. 그 손길은 애틋하고도 다정했기에, 작은 기린은 얼굴을 펼 수밖에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얼굴에 표정이 들어오는 순간을 좋아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무기력한 얼굴에 들이차는 ‘감정’들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살을 간질이다가, 다시 비단 발을 걷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처형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다지만 엄한 처사인 것 같았다.
이 일을 카라스노의 재상들이 결정 한 게 맞느냐? 하나마키가 다시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새’도, ‘검은 기린’도 둘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왕의 입장 또한 비슷했지만 저는 그 둘이 반대할 줄 알았습니다. 쿠니미는 끔찍한 일이라는 듯 혀를 찼다. 국경을 넘는 자는 지위나 출신성분을 막론하고 처형하라는 그 교지는 이미 국경에 전달된 듯 했다.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쿠니미가 속삭였다. 하나마키는 들었던 발을 놓았다. 그는 손짓했다. 쿠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작은 체구가 포개졌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귀를 막았다. 쿠니미의 옷에 달린 푸른 술들이 흔들렸다. 마차를 좀 더 완만하게 몰아라. 높으신 도련님의 말에 마부가 곧바로 대답하였다. 기린이 타시는 곳인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냐, 하나마키가 더한 말을 듣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어째 어전보다 이곳이 편한 것 같습니다. 그는 밀려올 일에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귓가에 나도 그렇다, 라고 대답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을 사랑은 한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마차에서 가장 온전하게 자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마키의 가슴에 단 꽃모양 장식의 끄트머리에 달린 술이 흔들렸다. 오이카와에게서 받은 어사화를 본따 만든 것이었다. 그는 그의 왕이 자신을 옆에 두는 이유가 되는 작은 기린을 쓰다듬었다.
멀리서 처형되는 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함을 알고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기린에게는 별로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는 시체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까마귀 소리를 들었다. 한동안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의 국경에 질리도록 울려퍼질 소리였다. 적어도 그게 의미하는 건 ‘평화’가 아니었다. 그는 마차에 더 짙은 색의 비단 발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피냄새도 나지 않게, 어떤 풍경도 통과하지 못하도록. 그는 제 무릎에 앉은 기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
“저는 아오바죠사이가 영 껄끄럽습니다.”
카게야마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기린의 성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본디 기린이란 인간세계에 초탈하거나, 온건한 성향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흑기린은 다른 기린과 달랐다. 그는 감정표현이 분명했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하얀 공작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살랑거렸다. 그의 부챗살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왜 껄끄럽다는 건지 이유를 물어도 될런지요, 스가와라는 그에게 존대했다. 카게야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하대를 하길 권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산백합 같이 하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기린님께서 카라스노의 기린인 이상 저는 말을 낮출 수 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강직한 눈빛을 보다 이내 마음을 꺾었다.
다기에서 훈김이 올라왔다. 스가와라는 옥으로 만든 주전자를 들었다. 그는 그리 넓지 않은 그릇에 담겨 있는 연꽃 봉우리 주변에 물을 따랐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가만가만히 들리더니, 이내 머지않은 시간에 연꽃이 피었다. 카게야마는 얌전히 그것을 보다가, ‘껄끄럽지 않으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자질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로군요.”
“그렇습니다.”
보통 성장하지 않은 채로 국무를 수행하는 기린은 없으니까요. 카게야마가 나름대로 명확한 이유를 댔다. 스가와라는 소담스럽게 만들어진 다기에 차를 담았다. 그는 희노애락 중에서 ‘노’의 감정을 잔뜩 드러내고 있는 기린에게 잔을 건넸다. 카게야마는 잔을 가만히 쥐었다. 스가와라는 말을 골랐다.
“그만큼 아오바죠사이의 왕께서 대단하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말이 그렇게 됍니까?”
스가와라는 살풋 웃었다. 그는 찬찬히 생각해보라는 말을 내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기린님은 아오바죠사이의 기린님처럼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의 다정스런 어조에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 쉬었다. 저는 공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카게야마는 예전 일을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도 익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오늘 쿠니미와 함께 전에 나오실 때 쥐고 있던 주머니도 그 일과 관련 된 일이지요? 그는 스가와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기린님은 모르는 게 없으십니다. 스가와라는 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더 이상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는 카게야마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을 잘라냈다. 그 사람에게 가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기린은 불안해하며 물었다.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저는 카라스노의 사람입니다.”
스가와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제 마음을 잘라내는 것 같다 생각했다. 눈앞의 기린은 다행이도 마음을 읽을 줄은 모르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앞에 놓인 흰 부채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이 준 것이었다. 유일(唯一)한 흔적이었으나 이제는 유이(唯二)한 흔적이기도 했다. 그는 푸른 잎사귀가 새겨져 있던 주머니 속 내용물을 떠올렸다.
푸른색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부채 장식이었다. 청금석을 원형으로 세공하여 아오바죠사이의 색으로 매듭지어 내린 물건이었다. 말총처럼 길게 들어지는 그 끈들은 섬세하게 엮여 있었다. 절대로 풀리지 않겠다는 듯 집착을 가득 담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스가와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는 연꽃차를 입에 머금었다. 진흙탕에서 핀다는 그 꽃의 향이 은은하게 스몄다.
같이 들어있던 서신을 태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결심할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약해지곤 했다. 그는 잔의 입구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스가와라님, 하고 카게야마가 그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미묘한 떨림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나의 왕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그의 불안감을 종식시키듯 강하게 말했다. 그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나의 왕을 배신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예전에 들었던 이 말을 떠올렸다. 그가 무릎 꿇기 전 스가와라가 했던 말이었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좋은 왕이 될 재목이었고, 실제로도 그리했다. 그는 그늘 속에서 살아 갈 재상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로 들어가기 전에 쿠니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얀 새가 도망가기 전에 새장 문을 단단히 걸어 놓아라. 놓친 뒤에 후회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겠느냐? 감정 하나 묻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당부의 형태를 띈 협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나라에서 ‘흰 새’를 키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라스노의 국조(國鳥)는 까마귀였다.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검정색의 반대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하얀색이었다. 반대되는 것을 굳이 기를 필요가 없었다.
“딴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기린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가와라 공.”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 말고도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아오바죠사이와 다테,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나라가 하루 빨리 안정되어야만 합니다. 스가와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혼란을 종식시켜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저의 사와무라에게 더 부담 주기 싫습니다. 그는 웃었다. 불경한 행동을 하였으나 눈 감아 주십시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안정되지 않은 나라는 카라스노 정도였다. 그는 왕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허무하게 흘렸던 국민들의 피를 생각했다. 사사로운 감정보다 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카게야마는 힘을 주어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머리에 이고 있는 재상의 관이 흔들렸다. 단단하게 고정시켜놓은 그 관은 나라 이상의 무게로 그의 머리를 눌렀다. 모든 게 무거웠다. 스가와라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저는 그럼 제 침소에 가보겠습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는 밤길이 어두우니 같이 가자는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기린님이 저와 함께 가셨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참수입니다. 나랏님 앞에 효시되긴 싫으니 마음을 거둬주시옵소서. 그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카게야마는 그 광경이 매우 어색한 듯 한참을 보고 있다가 마음 가는 데로 하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초롱을 꺼냈다. 그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주황색 천 너머로 들어온 불은 색을 더 짙게 만들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입은 의복이 그의 걸음걸이마다 그림자처럼 천 쓸리는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들어가십시오, 하고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불안했다. 그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쿠니미가 내뱉은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예전부터 ‘쓸모없는 말은 하지 않는 주의’였다. 카게야마는 기린이 고집스러운 종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날 때부터 길렀던 성정이 하루아침에 ‘장난스럽게’ 바뀌는 것이 불가능함 또한 매우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말은 절대로 허튼소리가 아닐 것이었다. 그는 그가 남문으로 온 것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의심에서 피어나 의심으로 사라졌다.
폭풍이 불기 전은 언제나 고요하다. 카게야마는 겨우 수습한 혼란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생각하였다. 그는 기린이었다. 인간세상의 혼란스러움에서 한 걸음 물러 서 있어야 할 존재였다. 그렇지만 계속 바라보고 간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가와라가 바람 앞 등불 같다 생각했다. 그는 그가 걸어간 걸음걸이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선택할 뻔 했던 ‘왕이었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의 가슴에 자리한 애매한 감정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묘하게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다. 쉬운 길이 아닐 것 같았다.
***
스가와라는 짧게 쓴 서신을 들었다. 그는 방 안의 불을 껐다. 그는 미미한 달빛을 의지하여 밖으로 나섰다. 한 겹만 입은 의복에 쌀쌀함이 몰려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에는 그의 그림자밖에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전서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새들의 눈동자가 도깨비불마냥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날개 힘이 좋은 매 한 마리를 들었다.
궐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가 길렀던 것이었다. 대궐로 들어올 때 유일하게 태우지 않았던 흔적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연정이었다. 그는 매의 발에 서신을 묶었다. 질 좋은 비단으로 묶은 서신이 풀리지 않게, 그는 매의 발에 노끈을 묶어 날렸다. 매는 익숙한 방향으로 날갯짓을 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금방 길을 찾을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부디 상공에서 사살되지 않기를 바랐다.
스가와라는 짙은 어둠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으나, 그는 그 하늘에서 익숙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다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도둑처럼 발걸음을 가벼이 하여 움직였다. 혹여 누가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방 안으로 얌전히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가지런히 갈무리한 의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왕이 하사한 물건이었다. 그는 사와무라의 검이자, 방패여야만 했다. 그는 침대에 누웠다. 이불이 그의 몸을 덮었으나 그는 차디 찬 바닥에 누워있는 듯 했다. 스가와라는 아오바죠사이의 어린 기린이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그와 자신 밖에 듣지 못한 말이었다. 밀어였으니 달콤해야 할 터인데, 어찌 뒷맛이 매우 썼다.
새는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여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더욱이 새장에 들어갔다면 더 말할 게 없겠지요. 그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그 이면에 있을 의미를 생각하다 눈을 감았다. 지독한 어둠이 그의 눈꺼풀에 내리 앉았다. 그는 잠을 청했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곳에 그가 있을리 없으니 이는 분명 악몽 같은,
환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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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1. 29. 22:57
***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비단결 같다’는 말 이상의 찬사를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수국 모양으로 세공된 머리장식을 들었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얌전히 고정했다. 파란색은 왕의 색이었다. 그는 일부러 콧노래를 불렀다. 하나마키는 내려온 머리카락을 땋아내기 시작했다.
카라스노로 혼자 가는 거 무섭지 않아?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별로 무섭지 않다고 대답했다. 마차에 있는 동안 피를 볼 일은 없으니까요, 하고 느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나마키는 삼일 후 국경 지역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왕의 창께서 그렇게 나다녀도 괜찮습니까? 쿠니미는 진심으로 불평했다. 왕의 방패가 타국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나가야 하는 게 마땅하지. 하나마키는 느긋하게 응수했다.
쿠니미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는 땅에 겨우 끌리는 의복을 갈무리했다. 더 클 생각 없어?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직 지금이 좋다면서 방을 나섰다. 한 칸을 지나고 나서야 물려놓았던 시종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쿠니미는 심호흡을 했다. 단신으로 카라스노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기린의 카라스노 행의 대외적인 이유는 국경지역 수비 문제였다. 그는 그것을 담판지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면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작은 서신과 부채 장식을 전달해야만 했다. 멀리서 종달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어전으로 걸음했다. 그의 머리 끄트머리에 달린 수국 장식이 흔들렸다. 하나마키 가(家)의 물건이었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쿠니미에게 다가왔다. 그 작은 발로 걸어오기 힘들었겠구나, 그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쿠니미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는 공들여 올린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매일 모양을 만드는 것도 일이겠어, 그의 한숨에 섞여 나온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비단 노리개가 움직였다. 정말로 전합니까? 기린이 물었다. 왕은 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니, 사람을 다 물리길 잘 했구나.”
“아직도 꺼림직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장식을 전해서 무얼 하시게요, 쿠니미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아무런 일도 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같이 걷지 않겠나? 그가 제안했다. 쿠니미는 별 수 없이 그와 발걸음을 맞췄다. 어린 기린의 머리카락에서 흔들리는 꽃망울을 보던 오이카와가 엷게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보석으로 만든 잎들이 정갈하게 달려있었다.
난 요즘 하늘에 기원 하는 게 있단다 쿠니미야, 호젓한 정원을 걸으며 왕이 말했다. 기린은 잠자코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직 카라스노의 군기반이 잡히지 않은 이 때에 시라토리가 거기를 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는 원군을 빌려주는 대신 그 하얀 새를 취하는 거지. 그는 담담하게 속삭였다. 실도하실겝니다. 쿠니미는 진심을 담아 충언했다. 오이카와는 단지 생각하는 것뿐이라며 웃었다.
생각은 언젠가 싹을 틔우기 마련입니다. 그의 기린이 말했다. 오이카와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라며 웃었다. 그들은 정원을 천천히 지났다. 막 움트기 시작한 봄꽃들이 향을 내고 있었다. 쿠니미는 정원을 소박하게 갈아엎으시렵니까, 물었다. 오이카와는 기린님이 이곳에 없으실 때 해치워 버릴 거라면서 웃었다. 네가 그 광경을 보면 또 시름시름 앓아누울 게 아니냐,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쿠니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원의 끄트머리에서 오이카와는 멈춰 섰다. 쿠니미는 두 걸음 더 앞에 서서 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 밖으로 나가면 내가 직접 말을 달려 카라스노로 갈 것 같구나. 그의 목소리는 농을 치는 듯한 어조였지만 쿠니미는 그것을 거짓으로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왕은 모든 것을 가져야 마땅한 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린이 아니었다면 그 하얀 새를 잡아 진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강녕하시길, 쿠니미가 다시 한 번 인사했다. 네 없는 동안 하나마키 공을 놀리고 있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애써 묶은 게 풀릴지도 모르니 서둘러 가거라, 오이카와는 그에게 손짓했다. 쿠니미는 뒤를 돌았다. 그의 뒤에 시종들이 따라 붙었다. 그는 며칠이나 말을 달려야 하는지 셈했다. 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
스가와라는 어린 기린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방금 전 있던 불경한 일이 도를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오전 남문에서 기이한 보고를 받았다. 온 몸을 파랑색으로 치장한 소년과 히나타가 한 시진동안 말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에게 올릴 문건을 사무적으로 보고하고, 남문 수비대장인 타나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색은 아오바죠사이의 색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문 앞에서 본 것은, 아오바죠사이의 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어린 기린이었다. 기린님은 땅에 친히 발을 디디신 채, 불만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히나타와 야마구치는 기린이 몸에 두른 색을 보고도 ‘미리 방문을 허가받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말과 ‘너 같은 꼬마에게 카게야마는 불러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보고서 당장 가마를 불러오라 명하였다. 카라스노의 전통 문양과 색으로 치장된 가마가 도착하고, 스가와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니 야마구치와 히나타는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귀하신 분이 정문으로 청하지 않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아오바죠사이의 흑기린 쿠니미는 당황하지 않고, 미리 방문을 일렀기에 말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한 식경 전의 일이었다.
“결례를 범하여 죄송합니다.”
히나타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백 번 째 반복하고 있는 말이었다. 쿠니미는 화려한 주황색의 잔을 들으면서 별 거 아니라 대답했다. 급히 불려온 카게야마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기린인데도 체구 차이가 상당했다. 히나타가 바보 같아서 벌어진 일, 미안하게 생각한다. 카게야마는 건방진 어조로 말했다. 평범한 사람인 스가와라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쿠니미는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카라스노의 문양이 예쁘다는 말을 건넸다.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감사하다 대답했다. 그는 모두를 물릴 수 있느냐 물었다.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의 목적대로라면 자신이 참관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어린 기린은 그게 매우 불만인 것처럼 보였기에, 스가와라는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라다.”
“나도 나라다.”
“너랑 감정싸움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카게야마.”
잘못 한 것은 너희 쪽이 아니겠느냐, 쿠니미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왕에게서 배운 것은 이런 사소한 행동거지였다. 카게야마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히나타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그는 카라스노의 흑기린이 ‘등신’이니 ‘바보’니 하는 욕지꺼리를 입에 담는 걸 보고 눈을 깜빡였다. 넌 정말 정상이 아니구나, 쿠니미는 최대한 놀람을 담아 말했다.
가끔씩 보면 저희 기린님은 사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스가와라가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그의 머리 꼭대기에 달린 꽃 장식들이 햇빛을 담아 반짝였다. 맞은편에 앉아 주시지요, 쿠니미가 청하였고, 스가와라는 기꺼이 그리 행동했다. 둘이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기린의 말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쿠니미는 엷게 웃었다. 일부러 남문을 통해 온 보람이 있었다. 경계가 가장 삼엄하면서도 한산한 곳이었다. 그는 둘 만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쿠니미는 뜸을 들였다. 스가와라는 여유로운 척 능청을 떨고 있었다. 이걸 전해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쿠니미는 품에서 푸른 색 비단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는 그것을 스가와라 쪽으로 밀어 넣었다. 부채를 살랑거리던 하얀 재상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눈동자에 들어있는 감정은 명백한 당혹감이었다. 쿠니미는 저의 왕께서 꼭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쿠니미는 왕의 존함을 입에 머금었다. 스가와라는 받아도 되는 지 물었다. 쿠니미는 받지 않으면 혼난다는 말을 내뱉었다.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가와라는 주머니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이 상아처럼 고왔다. 쿠니미는 햇빛을 받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성이었지만 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신장은 오이카와보다 작은 편이었고, 눈매가 단정했다. 왜 오이카와가 ‘난이’ 따위라 부르면서 앓아대는 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그 햇살 속에서 화사하게 자리하는 스가와라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을 보는 듯도 하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카라스노의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확실히 심정이 맑은 사람이었다. 카게야마가 왜 그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깨끗했다. 그의 호박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쿠니미는 스가와라의 소매에 새겨져 있는 주황 색 무늬를 보았다. 왕이 하사하신 겁니까? 그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받기에는 과분한 무늬이지요. 스가와라는 겸손히 대답했다.
그가 왕의 배필이 된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이미 남의 새장에 갇힌 새였다. 주인이 있는 새를 탐하는 것은 ‘정도’(正道)에 어긋난 일이었다. 쿠니미는 애석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찻잔을 매만졌다. 기린님을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그가 찬찬히 말하였다. 기린은 괜찮다고 화답하였다. 애초에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제 탓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스가와라는 히나타에게 다시 한 번 사과시키겠다고 말하였다.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공은, 결혼 한 적이 있습니까?”
쿠니미는 문득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연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쿠니미는 다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혼사에 대해서 생각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린은 재차 질문했다. 스가와라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오바죠사이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다가, 그는 자신의 왕과 자신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소름끼쳐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를 느리게 매만지고 있었다. 혹여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되돌려 보내신다면 큰일이 납니다. 쿠니미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마음을 들킨 것이 송구스러운지 눈을 깜빡였다. 받지 않으신다면 전쟁이라 하였습니다. 기린은 강경하게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왕이 말한 대로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왕의 과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미 약조한 일을 기린은 어길 수 없었다.
“저의 '나라'와 약조하고 왔습니다.”
“그럼 마음에 들지 아니하여도 마음에 든다 하겠습니다.”
스가와라는 부채로 입을 가렸다. 수수한 남자가 들기에는 의외로 화려한 부채였다. 부챗살마다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얇은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비단 또한 좋은 것을 썼으며 공작새의 꼬리깃털로 장식한 것 같았다. 쿠니미는 그에게 부채가 잘 어울린다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왕께 하사받은 것이라 대답했다.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찻잔을 매만졌다. 연잎을 우려낸 향이 좋았다.
왕께서 들라 하십니다. 멀리서 시종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쿠니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얼른 일어나 그의 걸음걸이를 따랐다. 그의 손에는 아오바죠사이의 푸른색을 가득 담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전으로 나아갔다. 스가와라는 앞으로 의논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차이가 없길 바랐다. 그의 손에 들린 주머니의 무게가 상당하였다.
쿠니미가 전으로 들자 다이치는 예를 갖추었다. 기린은 곧 나라였다. 쿠니미는 무릎을 굽혀 화답하였다. 그가 입은 옷자락이 치맛자락처럼 팔락였다. 그러나 경박스럽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신장을 훑어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쿠니미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시종들이 그가 앉을 의자를 빼내어 주었다. 남문과 달리 황송하군요, 아오바죠사이의 어린 흑기린이 당돌하게 내뱉은 말에 어전이 빠르게 냉각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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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 1. 29. 11:29
저는 제가 오늘도 동양풍을 못 쓴다는 걸 ... 깨닫고.. 갑자기 보고싶어서 썼습니다^0T.. 12국기AU라고 썼지만 사실 기린이 왕을 선택한다는 것 밖에 데려오지 않은 것 같기두 하네요.. 동양풍 오이스가가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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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의 기린(麒麟)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머리끝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화려한 청색 장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 있으십니까, 그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탐이 나는 물건이 있어서 말이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대답했다.
검은 기린, 쿠니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제 왕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던 이와이즈미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의 옷에는 엷은 청색이 들어 있었다. 쿠니미야, 하고 오이카와가 그를 불렀다. 쿠니미는 왕의 존안을 보지 않은 채 무릎을 꿇어 화답했다. 그가 머리카락을 고정하기 위해 매단 꽃장식이 움직임에 흔들렸다.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어찌 하는 게 성군의 도리라 생각하느냐.”
“탐욕하지 않는 게 제일이지요.”
“너의 정인께서도 그렇게 말하시더냐?”
오이카와는 웃으며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 관계를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는 왕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는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왕’의 ‘결정’이 아닌 단순한 ‘생각’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왕실의 색으로 지어진 비단 옷 자락이 땅바닥에 쓸렸다.
최근, 작은 아기 새를 보았다. 오이카와는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는 새였어. 그는 천천히 자신의 욕망을 풀어 두었다. 성군이 무언가에 욕심을 부리는 것을 처음 보는지라 쿠니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린이 이례적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조차 흘려보내던 남자였다. 그의 황제는 물 같은 사람이었다. 고요하게 흐르고, 아득하게 고이는 그런 사람.
이와이즈미는 어디서 보았느냐 물었다. 오이카와는 뒤로 시선을 주었다. 너와 나랑, 우리 쿠니미랑 같이 다녀 온 길에서 보았지, 그는 ‘왕’으로써 위엄 없는 말투로 말하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기린은 가장 최근 맞이한 행사를 떠올렸다. 카라스노 국(國)의 국왕 재위 삼 주년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그는 그 약소국에서 오이카와의 눈을 끌만한 새를 떠올렸다.
쿠니미는 머리를 조아린 채 떨었다. 오이카와는 왜 그러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어린 기린이 겁을 먹었나 보구나, 그는 손짓하여 쿠니미를 불렀다. 그는 가볍게 일어나 천천히 자신의 주군께로 다가갔다. 그는 쿠니미를 무릎에 앉혔다. 그는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처럼 느리게, 쿠니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실도를 할지도 모른다.”
“절 죽이시렵니까?”
“널 죽일 리가 있겠느냐.”
난 자애로운 왕이란다,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카라스노의 즉위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삼 년 된 나라 치고 괜찮은 나라였다고 말하면서, 최근 재상으로 올라온 카게야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구나, 오이카와는 그의 아픈 구석을 찔러댔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에 단 보석 장식이 흔들렸다.
거기서 부채를 들고 있던 흰 새를 기억하느냐? 오이카와가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잡고 있는 황제의 검이 떨렸다. 취하려는 건 아니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쿠니미는 지금 이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계속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회장에서 처음 봤는데, 작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긴장을 풀려 하는 게 제법 귀여워서 말이다. 그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을 하시려는 겁니까, 이와이즈미가 직접적인 단어를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실도를 할 수야 없지, 그는 예쁘게 웃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웃음은 달그늘 같이 서늘했다. 쿠니미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옆에 섰다. 그는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쿠니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어린 기린한테 상처를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웃었다.
아오바죠사이 또한 나무의 어린잎이다. 오이카와는 왕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전쟁이란 단어를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없다 말했다. 그는 카게야마가 머리를 조아린 왕, 하얗고 작은 새가 머리를 숙인 왕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그 두 사람을 얻은 카라스노는 순풍을 부리는 배처럼 순항할 것이다. 오이카와의 판단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눈길에 남아.”
오이카와는 아쉽다는 듯 속삭였다. 내 지갑, 재산으로라도 데려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의 눈을 보니 어려워 보이더구나. 그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 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용포를 정리했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장식물과, 자랑스럽게 착용한 황제의 의복을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선택에 그는 한 점 후회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오바죠사이의 왕으로 적합한 남자였다.
그는 허투른 판단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겨진 그 ‘하얀 새’가 문제였다. 이와이즈미 또한 쿠니미의 판단에 동의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비단옷의 끄트머리가 그의 발치를 가렸다. 그는 왕이라는 자리가 오늘 처음 무거웠다고 말하였다. 쿠니미는 머리를 조아리고 왕께서는 언제나 합당하십니다, 하고 내뱉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기린에 손을 뻗었다. 그는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국가에 위협이 되는 짓은 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앞서 걸어갔다. 쿠니미와 이와이즈미는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침소로 향하였다. 그는 작은 새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에 달린 푸른 잎 장식들이 반짝였다. 쿠니미는 침을 삼켰다. 그는 카라스노의 하얀 새를 떠올렸다. 달빛 같은 남자였다.
기린 중 가장 강한 기린이라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태양이라면, 카라스노의 하얀 새는 은은한 달이었다. 황가의 피지만 버려진 아이었던 사와무라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것도 그였다. 그는 자신의 생을 모두 카라스노 황실에 바칠 예정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타고난 왕이었기에, 반하는 것도 가장 어려운 상대를 골랐다. 쿠니미는 그게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였던가. 쿠니미는 흰 부채를 들고 있던 하얀 까마귀의 이름을 떠올렸다. 사와무라 다이치가 가장 아끼는 재상이었다. 그는 흰 공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수수한 면이 있었고, 그 와중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강직하게 하던 기억이 났다. 그 또한 카게야마가 선택했다면 좋은 왕이 되었을 것이다. 쿠니미는 오이카와를 따라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자신의 왕이 반한 새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난초 같은 사람,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취할 방법이 없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자신의 어린 기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송구합니다, 쿠니미는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은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에게는 비밀이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황제의 명령이야, 그의 목소리에 둘은 고개를 숙였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황제의 꽃을 받은 남자들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무슨 방법을 통해서라던 그에게 ‘하얀 새’를 진상할 게 분명했다. 쿠니미는 기린으로써 사고할 수 밖에 없었다. 아오바죠사이는 신흥 강국이었다. 이 시기에 카라스노와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쿠니미는 잠시 걱정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걸음걸이를 따라 갈 뿐이었다.
“달이 밝구나.”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기 새 또한 이 달을 보고 있을까?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지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그 행동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다,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 나는 너의 왕이다. 그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쿠니미는 그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만 가거라,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그의 말에 쿠니미는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비단에 아로새겨진 푸른 잎사귀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로써는 자신의 곁에 머무를 작은 새를 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위치가 그를 너무나도 얽매고 있었다. 칡뿌리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쿠니미는 그의 침소의 문을 닫았다. 달이 너무나도 밝은 날이었다. 달은 이뤄질 수 없는 욕망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부디 나의 왕께서 실도(失道)하지 않으시기를, 쿠니미는 짧은 바람을 속삭였다. 이와이즈미 공과 나눌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열린 창 틈 새로 바람이 불어와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머리장식을 날렸다. 오늘따라 달빛이 찬 느낌에 그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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