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4. 12. 18. 22:12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는 지루할 수록 더욱 더 잘 들려, 스가와라는 아사히가 농담식으로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는 한 볼을 책상에 붙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옆자리 사람의 책 페이지가 흔들렸다.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초침 소리를 따라 입으로 째, 깍, 째, 깍, 하고 속삭이다가 눈을 들어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 군, 공부하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는 괜히 앉아있는 그의 배를 간질였다.
아까 내가 놀자고 했을 때는 눈 하나도 깜짝 안 했으면서, 오이카와는 제법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은 스가와라가 아니라 문제집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안 사실이었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꽤나 공부를 잘 했다. 그것도 문과계열-역사나 윤리 따위의- 과목을 잘 한다고 했다. 스가와라는 제 눈 앞에 있는 문제집을 보았다. 나 방정식 싫어, 그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오이카와가 웃으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몇 분 전 상황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스가와라는 자리를 잡고 일어났다. 그는 문제에 줄을 그으며 읽은 다음, 연습장에 식을 받아적었다. 그렇지만 그의 샤프 끝에는 지루함만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샤프 꽁무늬를 두어 번 눌렀다. 딸칵거리는 소리는 근무 태만인 초침과 꽤나 어울렸다. 그는 흑연을 단단히 붙잡는 지루함을 떨쳐내려 연습장에 선을 여러 번 그었다. 그는 지금, 자신과 토오루의 상황은 교차하는 삼각함수 그래프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교차하는 그레프, 그는 그것을 예쁘게 그렸다가, 아랫변에 비내리는 모양을 그어냈다. 오이카와가 문제집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는 다시 책상에 뺨을 붙이고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은 검은 티셔츠와, 그 위를 덮은 청남방은 꽤나 산뜻한 느낌이었다.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의 배에 손을 댔다. 얇은 남방과 티셔츠 아래로 간질거림이 전달됐는지, 오이카와가 살짝 몸을 뒤틀었다.
"상쾌 군, 집중 해야지."
"공부 하기 싫은걸."
"그럼 아까 놀아줬어야지."
"그 때는 공부가 재밌었는걸."
청개구리 같아. 오이카와는 그의 코를 검지와 엄지로 살짝 집어 가볍게 흔들고 놓았다. 스가와라는 일부러 킁, 소리가 나개 숨을 들이켰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뱉어냈다. 밖이 추웠기 때문에 따듯하게 틀어놓은 히터에 잠이 몰려왔다. 오이카와, 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토오루, 하고 호칭을 정정했다. 토오루, 하고 부르자 그제야 왜-에 하고 대답해 오는 그는 꽤나 귀여웠다. 스가와라는 몸을 일으켜 오이카와의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역사 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혁명시기 어려워,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정작 연도를 외우는 게 싫어, 스가와라의 불평에 편승하여 오이카와는 기지개를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혁명에서 중요한 건 흐름이지 년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연습장을 꺼내 긴 선을 그었다. 그는 차례대로 프랑스 혁명의 흐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통 남자애 보다 깔끔한 글씨들을 보다가 스가와라는 오이카와 씨는 글씨도 잘 생겼네요, 하면서 칭찬을 내뱉었고, 그는 스가와라 씨도 x자가 스가와라 씨를 꼭 닮아 귀엽네요, 하며 화답했다.
시험기간의 공부란 밀린 설거지를 한 번에 처리하는 것 만큼 귀찮은 법이었다. 스가와라는 간혹 자신에게 돌아오곤 했던 설거지 당번을 할 때의 감각이, 범위 내의 모든 문제를 다시 한 번 풀어보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들어 초침을 확인했고, 오이카와가 내는 허밍음이 초침과 섞여 나름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아까 오이카와가 집중하지 못했을 때, 그 때 놀았어야 했던 거라고 투덜거리면서 몸을 뒤로 뉘였다. 그의 몸은 깔끔하게 개어진 이불 위로 넘어갔다. 오이카와의 향이 났다.
오이카와 씨는 애인이 집에 왔는데, 라고 말했을 뿐인데, 오이카와는 매우 참고 있으니 조용히 해 주세요~ 라고 화답 해 왔다. 뭘 참느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을 물어보자, 그는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폈다. 보통은 한 손가락이잖아, 하고 스가와라가 그의 오른손가락 갯수에 테클을 걸자, 그는 오이카와 씨의 토오루 군은 매우 대단하다면서 웃었다. 스가와라가 조금 기대하면서 예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독하네."
"아까의 상쾌 군도 그랬다구요~"
오이카와 씨는 정말 상쾌군이 쌀쌀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여자아이들 말투를 흉내내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어투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진짜 공부 할 거야, 라는 말을 하고 스가와라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다시 샤프를 들었다. 심심함을 가득 담은 낙서들이 흰 연습장 위에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종이를 넘겨 다시 수식을 적었다. 초침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들렸다. 그는 시계가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 물었다. 오이카와는 네가 집중을 못 하는 거지, 라고 얄미운 소리를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오늘 오이카와 토오루가 입은 스타일은 같이 '데이트 가요'라는 은근한 권유였다. 적어도, 스가와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오이카와는 문제집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샤프를 손 안에서 돌리다가 어쩔 수 없이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폭하게 식을 적어내려갔다. 몇 번쯤 풀었던 문제라 다시 풀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의욕의 문제였다.
가만 보면 오이카와는 슬로우 스타터였다. 그는 처음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완벽한 집중력을 자랑했다. 반면 스가와라는 그 반대였다. 그는 처음부터 집중할 수 있었지만, 간간히 맥이 끊기면서 놀고 싶어했다. 스가와라는 두 사람의 공부 주기가 비슷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젤 풀었다. 작은 좌식 책상에 둘이 앉은 꼴이라, 둘의 팔꿈치가 간간히 스치기를 반복했다. 시계 침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몇 문제를 더 풀어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로 조금씩 다가오는 오이카와의 손을 때렸다. 너 손 힘 너무 세, 하면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뱉는 연인에게, 스가와라는 작게 혀를 내밀었다. 나한테 뽀뽀해달라고 하는 거지? 하면서 묻는 그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이제 '놀고 싶어 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쾌 군, 시계 초침 소리 너무 거슬리지 않아? 오이카와는 그의 허벅지에 다시 손을 올리며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쓰고 있는 도수 없는 안경에 손가락을 댔다.
"글쎄,"
그는 완벽하게 되갚아줬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상쾌 군, 하면서 자신의 애칭을 말하는 목소리에는 '무심함'보다는 '애원' 혹은 '기원'이 담겨 있었기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라고 거절의 의사를 가득 담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네에, 라고 말하면서 다시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배구에서 랠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습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놀고 싶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으며 글쎄, 하고 대답했다.
작은 반상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스가와라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에 실리는 중력을 느끼면서, 작게 웃었다. 마른 입술에 숨이 붙어왔다. 스가와라 선생님, 저는 이번 시간에 생물을 공부하려고 해요, 오이카와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오늘은 남성의 생식기에 대해서 공부하나요? 라고 잔망스럽게 되물었다. 시계 초침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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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4. 12. 14. 22:19
쓰면서 하나의 책 제목과 하나의 문장을 감추려고 했습니다만 잘 안 된 것 같아서 울적합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스가와라 씨가 짝사랑하는 걸 그리고 싶었는데 두서없고 맥락없네요..
***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온다 리쿠는 ‘도서관의 바다’라는 책을 썼다. 스가와라는 그 책이 ‘미닫이문으로 열리는 도서관 문. 그 문을 기준으로 도서관 안의 특유의 분위기가 넘실거리듯 흘러내리던 느낌’이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책을 읽은 뒤로 그는, 그 문장 하나하나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갈 때 마다 그 느낌을 기억하곤 했다. 그는 서점의 손잡이를 잡았다. 겨울이라 쇠로 만들어진 손잡이에 눅진함이 묻어났다. 그는 하얀 숨을 내뱉으며 문을 밀었다. 책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점은 넓었다. 그는 문제집 코너로 발을 옮기다가, 이내 ‘시집’ 코너로 발을 돌렸다. 시가 문학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 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말해줬던 게 아마 타게다 선생님이었던가. 스가와라는 저번 현대문학 시간을 떠올렸다. 타케다는 짧은 시들을 판서하면서 애닮고 넘쳐흐르고, 가끔씩 마음을 저리게 하면서도 숨이 막히게까지 하는 그 감정들을 문자 안에 정제하여 넣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 라는 말을 했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타케다의 그 말을 생각하자, 스가와라는 배구에서 ‘토스, 이리 줘’ 라고 말하는 스파이커를 떠올렸다. 그가 외치는 ‘토스를 달라’는 말 안에는 ‘내가 반드시 공격을 성공 시켜서 너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나, ‘내가 에이스이고, 지금 이 타이밍에서는 날 믿어달라’ 따위의 감정이 들어있을 것이다. 시가 여러 복합적인 마음들을 짧은 말 속에 넣어 정제하는 것이라면, 배구 경기에서 외치는 여러 말덩어리들 또한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코트 너머에 있는 풍경을 생각하다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에 대한 감정 또한 말로 표현한다면 ‘시’일까. 스가와라는 이런 식의 공상을 하며 시집 코너를 두리번거렸다. 서점은 조용했고, 쓸모없는 생각들이 부유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책을 뒤적였다. 그러나 마음을 잡아끄는 구절은 딱히 없었다. 시는 사람의 마음에 와서 꽂혀, 그 자리로부터 작가의 감정을 쏟아 붓는 것이라고 하던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우연히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은 맨발로 바닷가를 산책할 때 조개껍질이 발에 걸리는 것이 의외로 적은 확률인 것과 같았다. 서점에서 좋은 책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하는 것은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런 번잡스러움 때문에 좋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웃었다.
서점에 가는 것은 가끔씩 바다를 찾아가고 싶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것도 없고, 간간히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만 먼발치서 자욱한 바닷가를 걸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배구 코트 위였지만, 그곳은 ‘열기’와 같이 날카로운 소리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매우 좋아하는 곳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여러모로 ‘꼬일 때’가 있었다. 그는 차분해지고 싶을 때 바다와 비슷한 서점으로 향하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손에 넣을 때 까지 무의미한 산책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의 서점 풍경과는 달랐다. 그는 멀리서 ‘아는 사람’을 보았다. 그의 무의미한 산책 속에서 갑자기 ‘유의미한’ 사람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른하늘에서 이는 풍랑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아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알렝 드 보통의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코끝에 책 냄새가 일었다. 멀리서 짠 파도 내가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는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난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사랑 이야기라는 원형적 서사의 제1막 제1장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거대한 정신이 우리 궤도를 미묘하게 조정하여 우리를 어느 날 파리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게 해준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문단 하나가 놓였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훑어 읽었다. 그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쾌 군은 책을 재미있는 자세로 읽는 구나? 여러 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책을 내렸다. 살짝 몸을 낮춰 스가와라와 시선을 맞춘 오이카와가 있었다. 안녕? 하고 그가 인사했다. 스가와라는 안녕, 하고 대답했다. 그를 이런 곳에서 마주할 줄은 몰랐기에, 스가와라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그는 책을 사러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도서관의 바다』라는 책인데, 상쾌군 읽어 봤어? 라고 묻는 그에게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서관도 서점도 바다와 같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장황한 연설이기도 했고, 달콤한 서사이기도 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퍽 좋은 편이었다. 그거, 나도 읽었어. 스가와라가 간신히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통하는 점을 찾았다면서 웃었다. 그 웃음에, 서점의 야트막한 조명 아래에서 그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로맨틱한 걸 읽네, 하고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법과도 같아 스가와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게 재미있느냐 물었고, 스가와라는 방금 제 눈 앞을 가렸던 문단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이, 좋아, 라고 다소 자신 없게 말하자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었다. 그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자신과 그 사이에 경계선 따윈 없는 것처럼 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당황스러우면서 좋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볼 때 마다 스가와라는 세상의 모든 좋은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칭찬’의 형태이기도 했고 ‘애정’을 ‘갈급’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코트 안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뭔가 말해주고 싶었다. 꺄아 꺄아, 거리며 높은 데시벨로 지져귀는 소녀 때들을 몰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뭐 들어갔어? 오이카와가 다정하게 물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도리질하자, 오이카와는 상쾌 군은 소심하구나, 라는 말로 받아쳤다.
들어온 서브에 리시브를 실패한 기분이었다. 그에게로 날아온 공은 언제나 힘없이 코트 바닥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스가와라는 아니, 그게, 라고 대답했고, 오이카와는 그의 대답에 개의치 않고 13P의 그 문장이 매우 로맨틱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궤도를 조종했다는 말이 멋있고, 그래서 우연히 만나게 된 거라는 게 사랑스러워. 스가와라는 그 말에, 문득 ‘우리도 우연히 만났어.’라고 대답할 뻔 했다. 그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놀랐으며 그의 앞에 서 있는 오이카와는 그의 급작스러운 위상변화가 재미있는 듯 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하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멀어진 한 걸음을 단숨에 좁혔다. 스가와라는 그의 앞에선 괜히 소녀가 되는 제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애매한 느낌이었다. 사실 좋아하게 된 포인트 또한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자리했고, 지금 한 걸음을 좁힌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정말로? 하며 되물었다.
마음 한 가운데에서 목소리가 넘실거렸다. 그것은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내뱉기에도 곤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민트 맛 음료수를 마셨을 때의 코끝이나,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의 입천장같이 그의 심장에 치받치며 넘실거렸다. 좋은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이 매우 운명적인 일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70억명이 되어가는 지구의 일본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 또한 그런 일이 아닐까. 스가와라의 머릿속에서 책먼지마냥 부유하는 생각들을 오이카와는 모르고 있어야 했고, 몰라야만 했다.
상쾌 군은 재미있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애칭’으로 보이는 문자를 입에 담았다. 스가와라는 애닮고 넘쳐흐르고, 가끔씩 마음을 저리게 하면서도 숨이 막히게까지 하는 그 감정들을 문자 안에 정제하여 넣는다는 범주에 시와 애칭이 포함되는지, 그렇다면 자신은 오이카와를 무엇이라고 호칭하고 싶은지를 빠르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풋풋한 첫사랑은 투명한 바다와도 같아서, 그가 하는 모든 외부적인 행동들은 오이카와에게 뻔히 들여다보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던 오이카와와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친 걸 확인하고선 헛기침을 했다. 상쾌 군, 하고 오이카와는 다시 스가와라의 애칭을 불렀다. 그 부름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떨리고 얼마나 심장을 쥐어짜는 행위인지, 그는 이 감정들을 모두 다 더하면 어떤 말이 되며, 어떤 단어에 정제하여 넣을 수 있을 질 고민했다. 답은 하나였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 요즘 부정맥이 온 것 같다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는 그 얕은 수에 속아 넘어가 주었는지, 젊은 나이에 고생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우리 고모도 부정맥이 있었는데, 하면서 말을 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스가와라의 것보다 상쾌했고, 바닷바람처럼 몰려왔다.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있는 책을 바라보고, 자신이 내린 결론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에게 향하는 이 모든 치받침들을 더해 한 단어에 정제하여 시를 만든다면, 그 모든 편린들을 모아 한 곳에 녹여 문장을 만든다면 스가와라는 단 한 문장 밖에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은 도서관의 바다를 만드는 속삭임들이, 그 책 냄새들이 어느 책부터 기원했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맥락 없고 두서없는 문장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짝사랑하고 있다.’ 그의 시어는 다만 그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정맥이 있는 고모의 이야기에서, 요즘 자신이 연습하고 있는 서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꾼 지 오래였다. 풍랑처럼 갑작스러운 그가 스가와라 자신에게 서서히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살풋 웃었다. 그를 보며 오이카와 또한 웃었다. 벤치에서 네트를 건너 볼 수 있던 웃음이었다. 그는 그 웃음이 자신에게 온전히 밀려오는 감각을 상상했다.
무슨 생각 해? 오이카와가 물었다. 글쎄, 스가와라는 말을 흐리면서 그의 손 안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걸 보고 제목이 ‘섹시하다’고 하는 걸까?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책의 제목을 잔잔히 훑다가 다시 글쎄, 하고 대답했다. 그의 얼버무림에 오이카와는 다시 웃었다. 그는 자신도 그 책을 사야겠다면서 손을 뻗었다. 같은 책이 손 안에 두 권. 하나의 배구공으로 랠리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 설렘이 스가와라의 손가락 끝부터 심장으로 착실히 맥을 뛰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스가와라는 얌전히 그 뒤에 끌려가면서, 예전에 타케다 선생이 판서했던 문장을 떠올렸다. 좋은 말이었다.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것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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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4. 12. 14. 00:01
트위터에서 리퀘를 받아서 셀프 전력 60분을 해봤습니다.
카게스가는 왠지 모솔인 카게야마가 귀여운 것 같아요. 한 걸음씩, 작지만 착실하게 스가선배한테 다가가주길!
***
카게야마는 제 손에 들려있는 멍댕한 얼굴의 하마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멍해 보이는 볼을 쿡쿡 찔렀다. 그의 손끝에서 비닐 소리가 났다. 그는 뚱한 얼굴로 도넛 상자를 응시했다. 모두 달고, 크림이 들어있으며, 하얀 분말이 뿌려져 있는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매운 걸 좋아한다. 도넛은 달갑지 않은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옆구리에 ‘무민’을 끼웠다. 배구공과 비슷한 부피였지만, 그와 같은 무게는 아니었다. 그는 어색한 듯 인형의 꼬리부분을 살펴보다가, 왼손에 들린 도넛박스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질러 버린 것을 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카게야마는 도넛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요즘 어느 도넛 브랜드에서 론칭한 ‘무민’이라는 인형이 귀엽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구부 점심 연습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히나타가 자신의 여동생도 좋아한다면서 무민이 얼마나 평화적이고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그 눈썹 있는 하마를 끌어안고 있으면 잠이 잘 온다고 말했고 저절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라 좋다고 말했다, 츠키시마는 아직도 인형을 끌어안고 자다니, 하면서 히나타를 놀렸다.
야마구치가 풋, 하고 웃자, 히나타는 입술을 새 부리처럼 내밀었다. 그는 직접 끌어 안아보지 못해서 모르는 거라면서 툴툴댔다.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반에서 여자아아들이 떠들던 소리를 기억 해 냈다. 솔직히 도넛을 사면 무민을 주는 거야, 하지만 귀여워, 머리 위에 안경을 올리면 두 배로 귀여워 진대! 맞아 옆 반의 야치가 그걸 샀는데, 매일 무릎에 올려두게 된다더라, 정-말? 새소리 같이 높이 들려오는 그 목소리들은 인형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들은 남자친구가 이 인형을 선물 해 준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잘거림은 항상 ‘-군이 이걸 사오면 좋을텐데’로 끝을 맺었고, 그 결론 끝에는 발끝에 붙은 그림자처럼 ‘하지만 -군은 눈치가 없어서 무리지요’라는 말이 다가오곤 했다. 카게야마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 속에서 한 가지 훌륭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여하간 ‘연인에게 그 인형을 받으면 좋은데, 그 인형이 수면안정제 역할을 한다더라. 그는 그 명제에 포함된 ’연인‘이라는 글자에서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요즘 배구부 연습이 끝나고 잠들기 전, 그 짧은 시간을 쪼개어 연애 지침서를 읽고 있었다. 그가 스가와라에 비해서 뒤쳐져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솔로였던 카게야마와 달리 스가는 여러 번의 실전 연애를 거친 남자였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좀 더 어른스럽게 보이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고 싶었다. 또 스가와라에게 잊힐 수 없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애지침서의 초입에는 연인에게 센스 있는 선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나와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평소에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의외로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였다. 그의 가방 안에서 타올은 떨어지는 날이 없었고, 에어파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릎보호대도 떨어지기 전에 바로바로 교체했으며, 배구화는 너무 부담스러운 선물일 것 같았다. 배구 외의 것을 선물하려고 해도 카게야마는 그에게 필요한 다른 것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선물에 대한 것을 히나타나 츠키시마, 야마구치에게 상담하고 싶진 않았다. 애인이 배구부 안에 있는 것을 들키기 싫었거니와, ‘비밀연애’를 하자고 했던 스가와라의 입장이 곤란해 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민’을 만지작댔다. 눈썹 있는 하마가 더 멍청해 보이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고른 선물이었지만 그게 ‘괜찮은 선물’인지는 잘 모르는 것이었다. 애초에 인형을 남자가 좋아할지, 스가와라가 좋아할지, 그가 밤에 잠은 잘 드는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 대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도넛을 같이 줄지, ‘무민’만 줄지를 고민했다. 매운 걸 좋아한다는 것의 역은 단 걸 싫어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고민하게 됐다. 카게야마는 배구 경기 중, 어떤 스파이커에게 토스를 올릴 지 고민하는 것 보다 스가와라의 앞에 서는 게 더 긴장되곤 했다. 그의 앞에 서면 그림자가 땅에 단단히 붙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발 하나도 못 움직인 채로 도망도 못가고 안절부절 한 채 말을 잇곤 했다. 좋지 않은 버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담을 수 있는 ‘애정’의 크기가 100이라면, 스가와라의 곁에 있을 때 카게야마는 100을 한없이 넘어선 크기를 담아 흘리곤 했다. 심장이 5판 3선승제 배구경기에서 패패승승승으로 이겼을 때 보다 더 심하게 뛰었고, 리드를 하고 있는 듀스 상태에서 서브권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배구에서는 그나마 담대할 수 있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앞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카게야마가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다. 언제나 상황은 책에서 배운 데로 흘러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실수 또한 많이 했었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그의 실수에 ‘괜찮다’라는 답을 하곤 했다. 그가 먼저 연락을 안 하고 받기만 했을 때, 데이트 장소로 언제나 배구 코트나 배구장을 말했을 때도 ‘괜찮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히나타처럼 사소한 일에 입술을 내미는 일이 없었으며, 정말로 서운했을 때도 ‘카게야마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들어주곤 했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뭔가 더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무민과 도넛박스를 들고 일어났다. 그는 곧장 스가와라의 집 앞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루비콘 강을 건너던 알렉산더 대왕은,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말을 내뱉었다고 했다. 이미 사귀게 된 이상 자신은 더 배워가는 수밖에 없고, 그 서툰 과정을 보는 스가와라는 좀 괴로울지도 모르겠지만 이걸 기대는 것도 나름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카게야마는 나름대로 결론을 냈다. 이미 그들이 연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인 건 던져진 주사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 하고 들리는 목소리가 도넛에 뿌려진 흰 설탕만큼 달았다.
***
―스가 선배, 잠시만 집 앞으로 나와 주세요.
스가와라는 자신의 연인의 호칭이 여전히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둘 만 있는 전화에서 아직도 ‘선배’라는 애칭을 사용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걸 그에게 어떻게 깨닫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후드 집업을 걸쳤다. 그는 천천히 자크를 올렸다. 엄마, 나 잠시 친구가 불러서 내려갔다 올게요, 하고 말하니 부엌에서 그러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주섬주섬 챙기고, 슬리퍼를 챙겨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오늘 카게야마가 내뱉은 말을 몇 달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과 비슷한 시간이었다는 걸 카게야마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무심한 감이 있었다. 배구 이외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스가와라는 그 사실을 인식할 때 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결국 그가 배구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건 스가와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우주 안에서는 스가와라의 지분은 사람 중에선 제일 클지도 모른다.
그는 카게야마가 자신을 위해 한 서툰 일들을 떠올렸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공통분모가 ‘배구’이기 때문에 데이트 장소는 언제나 배구장이었고, 스가와라가 곤란한 상황에 있을까봐 먼저 연락을 하질 못했다. 밤늦게 깨어있지 않을 것이며, 이 시간에 자신이 연락을 하는 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언제나 10시 이후에는 라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하는 이 모든 ‘처음’들이 사무치게 소중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불 켜진 가로등 밑에 서 있는 카게야마가 보였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토비오, 하고 불렀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려 놀랐는지, 그는 한 동안 스가와라만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다가가는 것은 아직 스가와라였다. 그는 카게야마의 두 손이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뭐야, 하고 물으니 그는 서툴게 스가와라의 품에 상자와 인형을 안겨 주었다.
“무민이요.”
“무민?”
“잠이, 잘 온대요.”
그는 뭔가 더 설명하려고 하는지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마 무민을 사게 된 ‘깊은 사연’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서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평소 히나타나 다른 1학년에게 말할 때의 카게야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직설적이고 독단적인 모습이었다. 스가와라는 인형을 품에 안고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웃음소리에 놀란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이 연하 남자 친구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카게야마가 귀여웠어. 왜 귀여웠냐면 히나타나 츠키시마한테 말할 때는, 으로 시작한 말을 듣는 카게야마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귀여운데 토비오, 라고 다시 이름을 부르니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여왔다. 그의 얼굴에 주황색 가로등 불이 들었는지 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도넛은 취향이 뭔지 몰라서, 라며 말을 흐렸다. 스가와라는 나 도넛 좋아해, 라면서 웃었다. 그제야 카게야마의 눈이 커지면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기 쉬운 남자였다.
언젠가 시미즈가 스가와라에게 질문 한 적이 있었다. 카게야마 군이랑 사귀면 답답하지 않아? 라고. 그 때 스가와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한 발 한 발 나한테 걸어오는 게 사랑스러워, 라고. 스가와라는 그 때 했던 대답이 맞는 말이라고 느꼈다. 그는 무민을 옆구리에 끼고, 반대편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날 생각했구나, 요즘 잠이 안 오더라, 라는 두 마디의 칭찬을 함으로써, 카게야마는 몇 걸음 더 스가와라에게 다가올 것이었다. 그 서툰 움직임을 볼 때 마다 스가와라는 작은 까마귀가 날갯짓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고마워, 하고 스가와라가 말하자 카게야마는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배구부에서 자신 말고는 모르는 모습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내일 등교하면, 시미즈에게 ‘연하를 사귀는 것도 의외로 괜찮은 일이고, 카게야마랑 사귀어서 너무 행복하다’정도로 자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쿡쿡 웃었다. 카게야마가 다시 웃음의 의미를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으면서 비-밀- 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뚱해졌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는 그 주름을 검지로 콕, 찌른 다음 그 감촉이 사라지기 전에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가 떨어지자 카게야마는 눈을 뜬 채로 멍하게 서 있었다. 싫어? 하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면서, 촉감을 잘 모르겠으니 한 번 더 해달라는 재촉이 돌아왔다. 카게야마는 역시 응용력과 습득이 빠르구나, 스가와라는 나름대로 그를 칭찬하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입술을 대지 않으니, 카게야마는 시무룩해 보였다. 마치 ‘무민’ 같은 표정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부르는 듯, 오른손을 까닥였다. 카게야마가 그에게 한 걸음 쯤 더 가까이 다가와,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시 입술이 살과 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캉한 감촉은 분명 도넛보다 달고, 츄이스티보다 폭신했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가와라는 아직 그가 입술에 하는 입맞춤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웃었다. 어린애 취급 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따라오는 목소리가 제법 절박하게 들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힘을 주어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늘도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한 걸음 쯤, 더 다가오고 있었다. 서툴게, 또 서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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