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야하쿄] 초콜릿 에클레어와 그 위 아몬드의 사정 1.

1.

As we danced in the night, remember




***

   2학년은 3학년이 되고, 아무것도 모르던 1학년은 2학년이 되었다.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건너건너 들었다. 와타리와 같은 반이기 때문이었다. 봄고에서 또 시라토리자와에게 졌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와타리가 심하게 우울해 하는데서 알 수 있었다. 쿄타니는 몇 가지 형식적인 안부를 전했다. 와타리는 그에게 ‘너도 이제 이학년이구나’ 하는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남겼다.

   삼학년들 갔어? 라는 물음에 와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요즘 짠 식단과 근육 트레이닝 방식이 괜찮은 것 같은지 물어볼 뿐이었다. 쿄타니는 단백질로만 가득 찬 식단을 보면서 그가 좋은 리베로가 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와타리는 쿄타니가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바의 안부를 전했다.


   “점프서브는 아직 무리지만, 스파이커 다루는 법을 연구하고 있어.” 

   “그래?”

   “응. 걘 좋은 세터가 될 거야. 아직은 오이카와 선배의 시대지만.”


   와타리는 삼학년이 은퇴하고 난 다음의 소식을 짧게 전했다. 쿄타니도 길게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야하바와 배구부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할 때 마다 구월의 기억이 번져왔다. 눈에 띄는 열기도,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추위가 없는데도 가을은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와타리는 봄고까지 남아있던 삼학년들이 은퇴하면서 오이카와가 좀 더 스파이커를 잘 다루게 됐단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 그는 영리한 스파이커 하나와 키가 큰 미들블로커가 들어왔다고 전하면서, 아오바죠사이는 이번에야말로 시라토리자와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는 진지했다. 쿄타니는 와타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개인적인 라이벌이 팀 전체의 라이벌로 진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를 볼 수록 야하바의 모자람을 깨닫게 됐다. 이미 그는 완성형 세터였다. 어느정도 배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오이카와와 야하바의 실력차이를 인정할 것이었다.

   약한데도 왜 배구를 할까, 왜 정세터 자리를 노리면서 포기하지 않는걸까. 쿄타니는 이 두 개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단순하고 발화점이 낮은 성격이었지만, 물어볼 상대가 잘못 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와타리는 오이카와를 보고 리베로로 전향하길 희망했다. 쿄타니는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한 번 배구부에 얼굴 비춰. 미조구치랑 야하바가 걱정해.” 

   “내놓은 자식인데.”

   “성경에서도 탕아는 환영했어.”

   “나 교회 안다녀.” 

  “뭐 그렇다는 거야.”


   네가 온 다면 팀에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니까, 모두가 환영할 거고. 와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순박한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지는 모습에서, 쿄타니는 야하바를 떠올렸다. 그는 와타리보다는 화려하게 웃었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은 어째 오래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잊히지가 않았다. 그의 친절함이 녹지 않는 설탕처럼 남았기 때문이었다. 쉬는시간의 끝이 알리는 종이 울렸다. ‘소녀의 기도’였다.

   다음 교시는 문학이었지만 쿄타니는 집중 할 수 없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던 시간은 종종 목적을 두고 달려갈 때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펜이 돌아갔다. 쿄타니는 딛고 있는 바닥이 회전하는 상상을 했다. 무중력 상태처럼 책상과 의자가 모두 들려, 학교 전체가 회전하는 공상의 끝은 야하바의 얼굴이었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번져오고 있었다.

   쿄타니는 배구를 잘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재능을 믿고 코트 위에서 날뛰는 난폭한 자신을 보좌해줄 수 있는 사람. 그 다음에 좋아하는 것은 제 플레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세터 정도였다. 그의 원칙대로라면 그는 오이카와를 생각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시라토리자와전에서 보여줬던 세밀한 플레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배구부에 나갈 것인지를 재야만 했다.

   하지만 그 보단, 야하바가 생각났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쿄타니는 2학년이 되고 나서 한 번도 배구부에 나가지 않았다. 신입생들의 얼굴도 몰랐다. 배구부 져지를 입은 적도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교복을 억지로 입고 교실 안에 ‘놓여’ 있었다. 그는 선반에 맞지 않는 장식품처럼 행동했다. 그가 배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와타리가 말을 걸 때와, 그의 목소리에서 야하바의 소식을 듣고 난 다음 뿐이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한다. 초콜릿 에클레어 같은 성격은 여전할 것이다. 1학년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할 거고, 1학년 안에서 세터가 있다면 그가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 않도록 힘낼 것이었다. 신입생들과 선배 사이의 가교 역할도 나름대로 잘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와타리는 감독이 차기 주장감으로 야하바를 생각하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하바의 목소리가 빈 노트 위로 번져왔다. 같이 다닐 때의 이야기였다. 신입생 때는 곧잘 붙어 다녔다. 먹을 걸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쿄타니의 말에, 야하바는 그게 뭐냐고 타박하면서도 밀어내진 않았다. 그게 그 나름의 친절함이었다. 쿄타니는 제가 한 말이 억지스럽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야하바가 초콜릿 에클레어라면 쿄타니는 규동이나 팝핑캔디 같은 사람이었다. 요컨대, 그와 매우 다른 카테고리에 속해있다는 뜻이었다. 비슷한 점은 없었다. 쿄타니는 견과류를 좋아했고, 야하바는 견과류를 싫어했다. 단 걸 곧잘 먹는 야하바와는 달리 쿄타니는 그런 걸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나는 세터였고, 하나는 윙스파이커였다. 그들은 그 정도의 거리감 안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볼트와 너트는 그 모습이 다르기에 서로를 조일 수 있다. 쿄타니와 야하바는 다르기에 더 같이 다녔다. 모르는 세계를 체험한다는 건 고등학교 1학년에게 있어서 재미있는 일이었다. 고된 배구부 연습을 마치고 그들은 항상 편의점에 들렀다. 야하바는 달고 단 푸딩을 고르고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에클레어를 구경했다. 쿄타니는 옥수수로 만든 간식과 작은 봉지 과자를 고르는 편이었다.

   가끔은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있었다. 물론 야하바는 초콜릿이 가득 박힌 아이스크림이었고, 쿄타니는 팝핑캔디가 들어 있는 콘을 골랐다. 가을이지만 더웠다. 가로등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야하바가 말하고 쿄타니가 들어주는 식이었다. 야하바의 이야기는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는 청자가 싫어할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의 시작점은 언제나 달랐다. ‘가을이지만 좀 덥다’가 될 때가 있었고, ‘오늘은 좀 춥네’ 가 될 때가 있었다. 문학선생님이 내주는 과제의 악독함에 대해 말하거나, 삼학년 선배들이 스포츠추천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꼬를 틀 때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야하바는 그래도 시라토리를 이긴다면 갈 수 있다고 말했고, 쿄타니는 그래도 무리라고 대답했다.

   시작점은 이렇게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 앞 에클레어 전문 카페에 다다를 때쯤이면 이야기는 언제나 ‘미래의 아오바죠사이’로 향하곤 했다. 그는 와타리가 대단한 리베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쿄타니도 이 의견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와타리의 성장은 어마무시했다. 그는 보는 눈이 좋은 편이었다. 신체 또한 유연했다. 연습량도 아끼지 않았다.

   야하바는 와타리가 등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자신이 셋업을 넣는 2년 후의 아오바죠사이에 대해서 말했다. 야하바의 상상에서 점수를 넣어 경기를 결정짓는 건 언제나 쿄타니였다. 1학년에는 스파이커 자원이 딸린다면서 투덜거리는 야하바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쿄타니는 이게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폭신폭신하게 친절한 사람이 초콜릿 같은 속을 보여준다는 게. 그리고 그게 자신이라는 게. 그는 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야하바의 공상에는 괜히 토를 달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약간의 여름이 그의 볼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빼줘.”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 야하바는 왜? 하고 물어왔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큰 그림에는 쿄타니가 들어간다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는 뭐가 불안한건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선배들은 봄고가 끝나면 다 없어지고 2학년 선배들은 좀 괜찮은 편이니까 계속 연습에 나오라고 졸랐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쿄타니는 그럴 때 마다 못하는 세터가 올리는 공을 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야하바는 애매하게 웃어 넘겼다. 그는 2년 후의 아오바죠사이에서는 잘하는 세터가 1번을 달고 남아 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자신이 올리는 셋업을 쿄타니가 불만 없이 칠 수 있을 거라는 야하바의 말은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입 안에 진하게 남는 말이었다. 쿄타니는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야하바는 그런 말을 잘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배로는 잘하는 세터 말고 좋은 미들 블로커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쿄타니 정도의 스파이커가 있으니까 약점은 중앙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 때의 가을바람은 2학년 봄에 가득 달라붙어 있었다. 쿄타니는 와타리가 이야기하던 1학년 후배들을 떠올렸다. 선배들이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쿄타니는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것은, 일 년 동안 야하바 시게루가 태양빛에 가려진 별처럼 박혀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쿄타니가 그린 미래의 아오바죠사이의 풍경이 아니었다.

    신입생 중에 레귤러 번호를 받은 건 단 두 명이라고 했다. 겨울 연습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둘은 어떤 난폭한 토스라도 네트 너머로 넘길 수 있는 녀석들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쿄타니가 반문하자 와타리는, 그들이 예전에 호흡을 맞췄던 세터가 ‘코트 위의 제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쿄타니는 윙스파이커 포지션으로 코트 위에 서 있는 신입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차피 배구부에 돌아간다면 그의 자리는 마땅히 쿄타니가 가져올 것이었다. 연습을 오래 쉬긴 했지만 1학년 보다는 자신이 쓸 만한 전력일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의 판단은 몰라도 감독의 판단은 그럴 게 분명했다.

   신경 쓰이는 건 미들블로커였다. ‘킨타이치’라는 이름은 만화 같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쿄타니 나름의 농담에, 와타리는 꽤나 성실하고 키가 크다고 대답했다. 그는 야하바가 요즘 일학년을 챙겨주는 데 재미가 들렸다고 덧붙여 말했다. 쿄타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와타리에게서 문자가 쉴 틈 없이 왔다. 어지간히 문학 시간이 졸린 모양이었다. 넌 평소에는 안 그러는 데 문자 할 때는 시끄럽다. 쿄타니의 말에 와타리는 그저 웃는 이모티콘 여러 개를 보낼 뿐이었다.

   ‘킨타이치’라는 미지의 미들블로커에 대해 생각하면서 쿄타니는 야햐바의 미래상을 떠올렸다. 지금의 마츠카와처럼, 중앙 센터라인을 강하게 받쳐줄 미들블로커가 들어온다면 편해 질 거라는 말이었다. 야하바의 소원대로 인원이 충원되고 있었다. 지금 쿄타니의 자리에 있는 윙스파이커도, 지금 윙스파이커인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가 졸업한다면 레귤러 한 자리를 꿰찰 게 분명했다. 쿄타니는 슬슬 배구부로 돌아가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의무감이었다. 쿄타니는 배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야하바의 미래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건 싫지 않았다. 야하바가 간간히 와타리를 통해서 연락을 취해오는 것은 아직 미래의 아오바죠사이를 그리는 그림에 여전히 쿄타니가 있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슬 연습에 나가야 겠어. 쿄타니는 와타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지 의외로 답장이 금방 왔다. 오늘부터 갈 거냐는 물음에 쿄타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와타리는 오늘 연습시합이 있다고 말하면서, 참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면서 웃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창 밖 너머에서 늦게 지는 벚꽃이 일렁였다. 쿄타니의 손에서 미미한 진동이 잡혔다. 와타리였다.


   [ 오이카와 씨가 조금 아파서 오늘 주전 세터는 야하바야 ]

   [ 연습경기에서 주전 하는 게 처음이라서 좀 긴장하고 있을 걸? ]


   그 문자는 의외로 깊게 남았다. 쿄타니는 정말이냐 물었다. 와타리는 오늘이 ‘카라스노 고등학교’와 연습시합이 있는 날이지만, 불행하게도 오이카와가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는 가벼운 염좌라고 말하면서, 그의 다리가 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걱정을 했다. 그는 지금의 아오바죠사이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쿄타니는 그가 빨리 졸업했으면 싶다고 문자를 쓰다가, 괜히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와타리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카라스노의 세터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쿄타니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정보였다. 그의 미래에서 세터는 야하바면 충분했다. 그는 꿈결 같은 그림을 다시 상상하다가 책상 위에 엎어졌다. 봄이 창문을 불법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입 안에서 초콜릿의 달달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봄이었다. 배구부 건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바뀐 건 라커룸을 사용하는 사람뿐이었다. 와타리는 쿄타니의 사물함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3학년들이 졸업하고 나서 라커 위치를 대대적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와타리가 사용하던 걸 이름을 까먹어 버린 윙스파이커가 쓰고, 야하바가 쓰던 걸 ‘킨타이치’가 쓴다고 했다. 새로 개편한 배구부의 레귤러 20명 중 1학년은 두 명 뿐이었다. 그래서 쿄타니의 사물함은 옮기지 않아도 됐지만, 그래도 2학년이기 때문에 위치를 바꿨다는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이걸 주장한 건 야하바라고 했다.

   하지만 라커룸에서 야하바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쿄타니의 사물함은 라커 구석에 있었다. 와타리의 바로 옆이었고, 야하바와는 등지는 자리였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라커 안으로 들어왔다. 쿄타니는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넌 진짜 변한게 하나 없다는 목소리들이 울렸다. 그들에게는 존경심도, 애정도 없었기에 쿄타니는 그들에게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여러 명이 들어왔다가 환복을 하고 가 버렸다. 그 흐름에서 야하바는 여전히 없었다. 쿄타니는 밑으로 내려갔다. 미조구치와 마주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연습에 다시 나오는 거니? 하고 묻는,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에 쿄타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딜 가냐고 물어보는 코치의 말에 그는 유니폼을 가지러 간다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힘이 빠진 발걸음에서 턱턱 소리가 났다.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목소리들이 가까이 닿았다가 밀려와 사라졌다. 얼굴을 전혀 모르겠는 걸 보니 신입생들인 모양이었다. 개중에 ‘킨타이치’가 섞여 있을까 쿄탸니는 그들 무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뭉쳐있던 신입생들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도망갔다. 쿄타니는 이 상황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느릿하게 걸었다. 연습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체육관 밖으로 뻗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쿄타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야하바는, 심하게 긴장한 모양이었다. 쿄타니는 저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를 떠올렸다. 팀을 반으로 갈라 하는 연습게임에서 간혹, 그는 오이카와를 대신하거나 지금은 졸업한 3학년 세터를 대신해서 들어가곤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심하게 긴장했고 자신의 셋업을 올리지 못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마다 화장실에 박혀있을 때도 있었다.

    중학교 때도 주전이었을 텐데 왜 그러냐는 타박에 야하바는 언제나 애매하게 웃었다. 쿄타니의 놀림이 심해질 때면 진심으로 분한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하게 넘어가려고 했다. 쿄타니는 그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떠올렸다. 짜증을 내기 시작했던 건 언제 부터인지 그는 쉽게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다만 연습을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하던 9월 이후일 거라고 추측 할 수는 있었다.

    쿄타니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체육관에 붙어있는 화장실 보다는 거기가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기억 해 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렸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지나갔다. 쿄타니는 오늘 연습시합 상대가 ‘카라스노’ 였다는 걸 다시 기억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쿄타니가 오늘 연습에 나간다고 해도 그가 코트 안에 설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두 사람이 자갈을 저미면서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쿄타니는 천천히 다가갔다.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야하바는 웃어주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는 걸 선택했다. 기억 속과는 매우 다른 반응이었다. 옆에 있던 모르는 얼굴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야하바에게 ‘누구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순박한 눈매가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쿄타니는 괜히 침을 뱉어 바닥에 비볐다.


   “안녕.”


   먼저 입을 연 건 쿄타니였다. 안녕, 하고 야하바가 대답했다. ‘안녕’이라는 같은 글자에 들어있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같이 있지 않던 나날들이 둘 사이에 쌓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키 큰 멀대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해 킨타이치, 이쪽은 2학년의 쿄타니. 배구부 ‘빈 라커’의 주인공이야. 라고 소개하는 야하바의 목소리는 묘하게 냉랭했다.

   봄에서 겨울이 충분히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닿은 것만 같았다. 자정에 가까운 구월 밤 느낌도 나곤 했다. 노을 같은 기분이 퍼져나갔다. 킨타이치는 구십도로 몸을 굽히면서, 1학년 미들블로커 킨타이치 유타로입니다! 라는 문구를 외쳤다. 입학이 결정 된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수도 없이 말했을 자기소개였다.


   “어.”

   “좀 더 상냥하게 받아줘. 후배잖아.”


   야하바가 말했다. 쿄타니는 그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괜히 뒷목을 쓸었다. 킨타이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밟는 자갈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하바는 한숨을 깊게 쉬더니, 연습에 다시 나오는 거냐 물었다. 쿄타니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킨타이치를 바라보았다.

   키 큰 미들블로커였다. 순하게 생기기도 했다. 야하바의 미래에 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야하바는 쿄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단단한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담기는 모습을 보면서, 쿄타니는 괜히 삐뚤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들른건데.”

   “나와.”

   “명령이야? 고작 오늘 주전이라고... 너 뭐라도 됐냐?”

   “나오라고.”


   야하바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킨타이치는 싸움을 말리려는 듯 어중간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성질이 났다. 나와라, 봄고에는 너랑 나랑 같은 코트에 설 수도 있잖아. 같이 오렌지 코트에 설 수도 있을거고. 야하바는 쿄타니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을 꺼냈다.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야하바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잘 재는 남자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팔짱을 끼고 있는 야하바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일학년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대 쳐버리면 속이 풀릴 것도 같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대신 쿄타니는 제가 긁을 수 있는 걸 긁기로 결심했다. 무른 사람일 수록 상처받기 쉬운 법이었다.


   “니가? 봄고에?”


   잘나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쩌시고? 쿄타니의 물음에 야하바는 대답하지 못했다. 밀가루 같이 하얀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야하바의 미래에서 자신이 소거 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생각. 그의 셋업을 잘 살릴 수 있는 스파이커는 자신 뿐이었다. 일학년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쿄타니는 둘 사이의 단절된 기간을 기억하지 않았고, 야하바는 그를 기다린 기간을 셈하고 있었다. 이것이 둘의 세계에 커다란 격절을 불러왔지만,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몸을 파르르 떨던 야하바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라 쿄타니는 그걸 몇 번이고 되물어야 했다. 그러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오늘은, 내가 세터야!”

   “그래, 잘 해라.”


   그가 외친 말에 쿄타니는 뭐라고 대답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응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을 지나치고자 했다. 오늘 얼굴을 보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을 봤으니 퇴장하자는 심정이었다. 주인공이 무대에 너무 올라 있는 것도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요소였다. 야하바는 뭔가 더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쿄타니는 그와 자신의 '사이'가 크레바스처럼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많이 만나지 않았으니까. 오랫동안 보지 않았으니까. 격변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쿄타니는 그들을 지나쳤다. 등에 시선이 꽂히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분명 야하바일 것이다. 쿄타니는 자신이 잡아줬으면 좋겠으면서도, 잡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감정들을 밟고 걸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서투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해도 괜찮습니까?”


   킨타이치가 야하바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역 앞에 에클레어 가게에 대해서 말을 걸었다. 그는 거기에 혼자가기 쪽팔리다는 말을 꺼내왔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야하바는 오늘 연습이 끝난 다음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연습경기가 있는 날은 일찍 끝나니까, 라는 말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킨타이치’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쿄타니는 연습을 좀 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단단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그가 가를만한 것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곧 즐길 수 없으면 회피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들을 지나쳐갔다. 애매한 이질감이 있었지만 쿄타니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연습 나와.”


   멀어져가는 쿄타니의 뒷모습에 야하바가 말을 걸었다.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아 쿄타니는 뒤를 돌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에서 둘의 속삭임이 들렸다. 여전히 디저트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목소리들에 짜증이 났다. 그는 뒤를 돌았다. 둘은, 정말로 친해 보였다. 아직 봄이었고, 킨타이치는 신입생이었다. 친해질 이유도, 기간도 없었다.

   억울함이 몰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킨야하쿄] 초콜릿 에클레어와 그 위 아몬드의 사정 0.

   야하바 시게루는 좆도 없는 새끼였다.

   적어도 쿄타니 켄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하바 시게루는 친절했다. 특히 여성하게 상냥했지만, 실력 없는 선배들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초콜릿 같았다. 하지만 마냥 뭉개지지는 않았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오는 격절의 시간, 새로운 팀에 적응해야 하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그는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급류 속에서 뿌리를 박고, 물살을 둘로 갈라 지나가게 하는 돌 같기도 했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리는 파베 초콜릿보다는, 부드러우면서 고체 같은 ‘초콜릿 가공품’ 같은 느낌이었다. 선배들은 실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우대받으려고 한다. 고작 1년, 혹은 1개월 차이 밖에 나질 않으면서. 학교에 먼저 입학한 것이 유세라는 양. 쿄타니는 그런 배구부의 위계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진행되는 배구부의 겨울 연습에서, 예비 1학년들은 2학년으로 올라가는 선배들의 연습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명백하게 모자랐다.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몇 명을 제외하면 왜 레귤러 20명에 선발되어 있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많았다. 쿄타는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달랐다. 그는 긴장한 1학년들과 날이 선 2학년들 사이를 능숙하게 파고들어갔다. 때로는 허당처럼 굴고, 때로는 배구에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련했다. 그 나름의 ‘생존전략’이겠지 싶었다. 팀이 격변하는 시기의 2학년들은 늘 날카롭다. 학교가 강호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천재’에 대한 경계. 노력해서 얻은 레귤러 자리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1학년들의 실력은 그들에게 있어선 미지수다. 1학년에서 막 벗어난 2학년들에게 있어서, 신입생들은 후배가 아니라 ‘라이벌’로 생각된다. 자기가 움켜 쥔 성과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오바죠사이처럼 현 내 베스트 4를 차지하는 고등학교라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야하바 시게루는 달랐다. 그는 노련하게 선배들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선배들에게 셋업을 올리는 방법을 질문하고, 중학교 때 묻은 버릇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그는 2학년 세터 오이카와와, 윙스파이커 이와이즈미에게 먼저 다가갔다.


   두 사람은 친절했다. 야하바는 꼬리를 치는 개처럼 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묻고 녹아들려고 했다. 남자들만 있는 무리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인정은 대단한 훈장이다. 오이카와는 야하바를 ‘마음에 든다’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못 미치는 실력이면서 싹싹하게 군다는 표시였다. 쿄타니는 오이카와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하바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그 인정이 기쁘다는 듯,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선배들의 장벽을 서서히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급생을 서운하게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같은 포지션의 와타리 신지와 유달리 친했다. 신입생들이 해야 하는 코트 수리나 바닥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도왔다. 그는 달콤한 남자였다. 달다는 건 위험하다. 눈치 채고 나면 그 맛에 빠져 휘적거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단 한 살 차이가 나지만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연습량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변화한다. ‘격변’이라는 단어를 써야 마땅했다. 모두가 적응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야하바만이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빠른 유속에도 휩쓸리지 않는 바위처럼. 유연하고 또 유연하게. 그는 연습에 따라가지 못 하는 동료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였다.

   대놓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플러스 포인트였다. 말끔하게 생긴 주제에 연애를 몇 번 못 해봤다는 것도 선배들에게 있어서 ‘재미있는 점’으로 작용했다. 쿄타니는 그런 야하바가 좆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잘 보인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실력 없는 선배는 앞길에 방해가 될 뿐이다. 야하바가 팀에 녹아갈 수록 쿄타니는 팀에서 겉돌았다.

   그것은 야하바 시게루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제 자리에 있었고, 그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중력 때문에 멋없는 소행성이 제멋대로 궤도에서 이탈한 것뿐이었다. 야하바가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일수록, 쿄타니는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올라간 공을 뺏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부적응자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쿄타니는 반추反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모든 돌발 행동은 명백하게 야하바 때문이었다. 발버둥 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어렸다는 걸 깨닫는 건 언제나 크고 난 다음인 법이었다. 그는 저에게 뻗어오던 손을 추억했다. 길고, 여린 손이었다. 중학교 내내 배구공을 만졌을 게 분명한데도 고왔다.

   언젠가 쿄타니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둘 만 남았을 적이었다. 둘은 각자의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는 행성이었다. 서로의 영향권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햇병아리 같던 신입생 시절을 지나, 여름의 인터하이를 겪고 만난 고등학교 1학년의 가을이었다.

   야하바는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와 함께 미팅에 나간다고 했다.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선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야하바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지나갔고, 마츠카와가 자기는 미팅에 끼워주지도 않는다면서 투덜거렸다. 야하바는 어차피 자기는 ‘배경’ 역할이라면서 자신을 낮추면서 웃었다. 네가 배경? 그건 하나마키겠지! 마츠카와는 유쾌하게 말했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서 쿄타니는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괜히 운동화 앞코를 봤다. 아스팔트에 깔려 있는 자갈을 발로 찼다. 어디 딱히 갈 곳도 없었고,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그나마 쿄타니가 말을 붙여본 건 와타리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연습실에 남아있었다. 최근 포지션을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떠나가고 둘 만 남아 있었다. 여름이 애매하게 남아 있는 9월이었다. 두유 리멤버, 으흥흥흥흥 셉템버, 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야하바와 눈이 마주친 건 그 때였다. 아직은 강한 햇살과 더 높아지지 않은 하늘이 답답해져온 것도 그 때였다. 그와의 거리감이 가시지 않은 더위처럼 훅 끼쳐왔다. 그 때 야하바는 그렇게 물었다.


   -초콜릿 에클레어 좋아해?


   마법 같은 단어였다. 어색한 말이기도 했다. 입 속에서 굴러가는 발음들은 정제되지 않은 계절처럼 이상했다. 쿄타니는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초콜릿, 에클레어 하고 발음하자 야하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그걸 먹으러 가는 거라면서, 미팅은 뒷전이라고 말했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너 여자 좋아하잖아.

   -여자애랑 같이 있으면 디저트 먹는 데 눈치 덜 보이거든.


   야하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한 번도 안 먹어봐서 몰라, 하고 쿄타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나중에 먹으러 가자면서 눈을 반짝였다. 쿄타니는 그의 말에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을 입은 건장한 배구부 남자 두 사람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디저트를 사이에 두고 포크를 움직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야하바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상상했어? 하고 말하자 쿄타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고 있네,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능글맞았다. 쿄타니는 그에게 저런 면이 있는 지 정말 몰랐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야하바는 제 발 끝만을 보고 있는 쿄타니를 보다가 정말 맛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역 앞 카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거기가 가장 맛있다고 웃던 야하바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쿄타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야하바는 머리를 잔뜩 매만지고 온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쿄타니도 카페 까지만 같이 가겠다고 선언했다. 요상한 조합이네~ 하며 오이카와는 웃었다. 승낙이었다.

   쿄타니는 야하바에게서 일 미터 정도 떨어진 뒤에 걸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가을 바람에 잔잔히 흩어졌다. 햇빛을 받으면 캐슈넛 색으로도 보이는 은발이었다. 그의 사락사락한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났다. 쿄타니는 그렇게 그를 따라갔다. 카페 앞에서 야하바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소리를 했다. 쿄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쯤을 퉁명스럽게 서 있자, 야하바는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초콜릿 에클레어를 샀다면서 웃었다. 집에 가서 먹어보고 이야기 하자, 라는 말은 상냥했다. 가을처럼 시원하기도 했다. 그 날은 구월 이십일일이었고, 오후가 점점 가물가물해져 밤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 총체적으로 애매한 시간 뿐이었다.

   그 날 쿄타니는 역 앞 카페의 문짝을 회상하며 초콜릿 에클레어를 먹었다. 약간 열린 문 틈 안에서 야하바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문에 칠한 페인트는 물에 한 번 개어 사용했는지, 나뭇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홍색과 연두색을 겹쳐 바른 문은 봄 색이었다. 져가는 가을과는 관계가 없는 사랑스러운 색이었다.


   초콜렛 에클레어는 달았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빵으로 초콜릿을 감싸 혀 전체가 달아지진 않았다. 신기한 맛이었다. 여기가 가장 맛있다던 야하바의 목소리가 자꾸만 번져왔다. 꿈 같은 목소리였다. 포크로 에클레어를 찍을 때 마다 쿄타니의 기분은 투명수채화 속 정물 같았다. 그는 그 애매한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방아쇠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당겨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동에 나갈 수 없었다. 공을 셋업하는 서툰 모습을 볼 때 마다 그 날 먹은 초콜릿 에클레어 속의 버터 맛이 느껴졌다. 위에 올린 아몬드의 딱딱한 껍질처럼 배겨오는 ‘애매함’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인 가을과 같았다. 야하바와 하교를 할 때 마다 아몬드가 목에 번진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쿄타니는 이런 애매함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삼학년과 같이 들어 간 코트에서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일학년의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그 당연한 순리마저 넘으려고 했다. 규칙을 무시한 톱니바퀴는 아귀에 맞지 않는다. 아오바죠사이의 배구에 균열이 생긴다는 감독의 말도 듣기 싫었다.

   그 날 코트에 있던 선배는 야하바와 친한 선배였다. 야하바는 그 날 초콜릿 에클레어를 하나 더 건네며 그를 타일렀다. 지나치게 상냥했다. 달콤함에 빠져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쿄타니는 부활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맞을 것이다.


   9월 21일이 진하게 번져왔다. 그것도 지나치게 달고 폭신한 맛으로. 

[마츠스가] 어느 맑은 날에


 마츠스가로 스가와라 생일합작에 참여했습니다>ㅅ<)/ 

 스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합작페이지는 >> 이쪽 <<이에요!









01.

나는 매우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사람인데 말야


   북유럽신화에서 운명은 세 여신이 만든다고 한다. 과거가 실을 짜서 모양을 만들면, 현재를 다루는 여신이 실을 정리해서 아이들에게 분배한다. 어떤 인생을 거칠지, 어디서 기복이 있을지, 언제 죽을지 따위가 적혀 있는 실타래는 갓 태어나는 아이들의 손목에 묶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미래를 알 수 없는 건 이 실이 배달될 때 미래의 여신 스쿨드가 실타래를 흐트러트려, 잔뜩 엉켜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영어 책의 지문을 해석하며 연필을 굴렸다. 주말을 연습으로 보내고 나니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차라리 눈 뜨면 연습하던 게 훨씬 더 나았다. 마츠카와는 어딘가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앉아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6월은 6월인지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볕에는 여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마츠카와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나름 학교를 대표하는 배구팀의 3학년 레귤러인데, 조금 수업을 빼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었다. 그 생각은 앞에 앉은 하나마키도 동일한지, 그는 수업시간 내내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허리를 쭉 펴고 목을 늘려서 그가 쓰고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신인은 확인 할 수 없었지만 명백한 사랑의 메시지였다. 까졌네,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하나마키가 뒤를 돌았다.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당당하게 내밀어 보이고 엿 먹어, 하고 입으로 속삭였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까딱였다. 하나마키를 놀리는 게 재미없었다. 사랑에 빠진 놈을 들쑤셔봤자 얻는 것은 들어 봤자 재미없는 애인 자랑 뿐이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이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었다. 비를 머금고 있는 놈은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얬다. 그는 턱을 괴고 책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카모토의 이름이 불렸다.

   지문을 해석하는 목소리 너머에 있는 건 끊임없는 졸음뿐이었다. 마츠카와는 넥타이를 끌렀다. 목이 답답한 것도 같았다. 그는 다시 구름을 보다가 영어 교과서 귀퉁이에 샤프로 낙서를 했다. 구름의 모양을 하던 그것은 연한 회색으로 칠해졌다. 손에 맞지 않는 샤프가 자꾸만 미끄러져서, 그가 원하는 회색 보다는 한 톤 진한 음영을 만들었다. 마츠카와는 그 그림자 같은 무채색들을 보다가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어색한 발음의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돌다 혀를 빠져나왔다. 얼마 전 연습게임을 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다. 그가 아는 건 ‘스가’와 ‘스가와라 선배’라는 이름 조각뿐이었다. 성이 여섯 글자인 건 매우 드문 경우니까, 아마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뭐뭐뭐’거나, ‘스가뭐뭐 와라뭐뭐’일 것이었다. 마츠카와는 그의 이름을 공책에 적고 ‘뭐뭐’와 ‘뭐뭐뭐’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는 그가 아는 이름 중에서 어울릴만한 것들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의 소일거리는 방해받지 않았다. 마츠카와의 옆에 앉은 사카모토 군이 의외로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고, 하나마키가 결국 핸드폰을 건드리던 걸 들켰기 때문이었다. 고소한 일이었다. 짓궂은 성격의 영어 선생님은 그가 보내려고 하던 문자를 읽었다. 마츠카와는 그걸 가만히 듣다가, ‘스가뭐뭐 와라뭐뭐’나 ‘스가와라 뭐시기 (뭐시기의 범위는 1~4 이내로 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군의 이름에 들어갈 한자 몇 개를 잃어버렸다. 그는 혀를 쯧쯧 찼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그에게 사카모토는 아직도 인생이 무기력하냐고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츠카와는 만약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제 손목에는 늘어지고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감아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스가뭐뭐 (이하 마츠카와는 편의를 위해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을 ‘스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군의 이름은 알고 싶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히라가나로밖에 적을 수 없는 그의 이름이 담을 수 있는 의미들을 생각하다가 책상에 엎어졌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수업 종이 울렸다. 하나마키는 영어 선생님의 뒷꽁무늬를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새끼 새 마냥 종종종 따라갔고, 마츠카와는 그 모습을 힐끔 보다가 눈을 감았다. ‘스가 군’의 이름을 알법한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오늘 연습을 빼먹기로 결심했다.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사람은, 자신이 짜놓은 사이클에서 쉽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쉬는 것조차 일이었다. 비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마츠카와 잇세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땡땡이 치고 남은 시간에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벌어진 입에 파리가 들어가도 모르겠다면서 사카모토가 웃었다. 시끄러워,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여름 햇볕이 얼굴을 쪼듯 쏟아져 왔다.






02.

스가와라 뭐시기 군, 혹은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


   오이카와는 마츠카와가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다고 생각했다. 5월에서 6월로 오면서 기온이 올라가긴 했지만, 사람이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마츠카와의 기분파적인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했던 튀는 행동보다, 지금 이 순간 내뱉고 있는 말들이 더 이상했다. 갑자기 돌았니? 라고 물어보기도 뭐해 오이카와는 도시락을 깨작였다. 문어모양으로 가른 소시지가 맛있었다.

   마츠카와는 갑자기 점심시간에 갑자기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오이카와를 불러냈다. 여자아이들이 비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오순도순 모이는 것처럼,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와 옥상의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이카와가 교복 바지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손수건을 깔고 앉는 것까지 기다려 줬다. 그는 오늘의 마츠카와의 회전축이 약 3도 정도 기울었음을 확신했다.


   “그러니까 맛층, 단순히 그 애의 이름을 알고 싶다구?”

   “응. ‘스가와라’ 뭐시기인지 ‘스가뭐뭐 와라뭐뭐’인지 알고 싶어.”

   “보통은 스가와라가 성 아닐까?”

   “하지만 너 우시와카를 우시와카라고 부르잖아.”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그의 제멋대로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츠카와는 이름이 궁금하다고 말하면서 딸기우우를 마셨다. 야키소바에 딸기우유라는 조합은 제법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오이카와는 오늘 이와이즈미의 도시락 반찬이 고로케였던 걸 기억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왜 이런 이상한 상담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가 투덜거리자, 마츠카와는 입 안에 들어있던 야키소바빵을 다 먹고 입을 열었다.

   네가 그나마 제일 잘 알 법 하잖아. 라는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면서, 카라스노에서는 토비오와 치도리야마의 니시노야 밖에 모른다고 대답했다. 키타가와 제 1중 출신이나, 잘하는 애가 아니면 모른다는 발언에, 마츠카와는 이 땅에 내리 앉은 실력지상주의에 대해서 한탄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는 땀에 푹 젖은 여름날 불어오는 바람처럼 상쾌했기에, 오이카와는 괜히 찝찝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친구에게 물어 보는 건?”

   “나 여기로 배구유학.”

   “아 맞다. 너 도쿄 출신이었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실장아찌를 밥 위에 올렸다. 마츠카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별 생각 없이 찾아가면 되잖아? 하고 대답했다. 그는 마츠카와가 정말로 찾아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하이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고, 카라스노는 여기서 시내버스에서 마을버스로 한 번 환승해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시외권에 있었다.

   그는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입에 밥과 장아찌를 넣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오늘은 흰 우유가 아니라 딸기 우유야? 오이카와가 입 안에 있는 밥알을 반쯤 넘기고서 물었다. 마츠가와는 좀 ‘스가’라는 이름이 단 느낌이 아니냐 되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사고의 흐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츠카와는 A에서 B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단번에 E나 F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마츠카와는 설탕 생각도 나고, 좀 분홍색 같은 느낌도 들어서 딸기 우유를 사버렸다고 대답했다. 그의 부연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마츠카와가 ‘스가’라는 사람에게 단단히 빠져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온 세상이 달다고 하는 마츠카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마츠카와는 그런 그가 재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래서 맛층에게 ‘스가’는 어떤 느낌인 거야? 그냥 달아?”

   “뭔가 설탕같이 폭신폭신한 느낌 아니었나?”

   “나 그 때 늦게 와서 잘 모르겠어.”

   “그, 응원하는 게 의외로 귀여웠던 것 같고?”

   “남자애잖아.”

   “그래도 키도 작고, 좀 귀염상이고.”


   마츠카와는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좀 더 들어맞는 비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렀다. 그러나 그는 스가가 웃는 모습이나, 충고하고, 팀을 응원하기 위해서 소리 지르는 모습이 굉장히 상쾌했다는 것과, ‘달았다’는 것 밖에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얼굴마저도 드문드문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마츠카와는 ‘스가’의 눈동자 색이 지는 노을색인지, 아니면 머리카락과 닮은 겨울 색인지를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 그늘이 넓어졌다. 하얀색 구름이었다. 마츠카와는 그가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고, 좀 가까이 가고 싶기도 했다. 일단 이름을 물어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츠카와는 멋들어지게 자기소개를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잔뜩 불어버린 채로 빵 안에 가만히 잠자고 있는 야키소바빵의 누들처럼, 그의 생각이 이리저리 불어 엉켜가고 있었다.

   오늘의 맛층은 뭔가 소녀 같네. 오이카와는 도시락 통에 붙어있는 밥풀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때 마침 옥상에 앉을 자리를 찾으러 구석을 두리번거리던 여자애가 오이카와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그는 그 웃음에 손을 흔들어줬다. 마츠카와는 그를 바라보다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우유곽 안에 들어있던 딸기 우유는 이제 미적지근해지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입안에 가득 든 단 맛에 입을 다셨다. 혀를 움직일수록 단 맛이 더 퍼져왔다.

   ‘스가’도 그런 느낌일까, 하고 마츠카와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엉망인 카라스노 안에서, 매니저처럼 져지를 입고 있던 모습이 가만가만히 번져왔다. 맛층? 이제 곧 점심시간 끝나, 하고 부르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 일방적으로 본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소녀 팬 같은 느낌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일어나 손수건을 정리하는 오이카와에게 마츠카와가 물었다.

   굉장히 마법적인 일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닐 걸?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했다. 마츠카와는 빵 부스러기와 비운 우유곽을 한 손에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너머로, 오이카와가 ‘첫사랑 힘내’ 라고 말을 걸어왔다. 첫사랑까지는 아닐 걸? 마츠카와는 유월의 햇살을 잔뜩 맞으면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 하는 일이라면서 살랑살랑 웃었다. 입 안에 가득 남은 딸기 우유맛이 그저 달아, 마츠카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역시 너랑은 친구 하기 싫어. 마츠카와의 말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03.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그쪽에게 다가가고 있지 말입니다.


   “있지 스가와라 군, 혹시 사채라던가 쓴 적 있니?”


   스가와라는 가방을 챙기다가, 같은 반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있지, 굉장히 일수꾼 같은 사람이 스가와라 군을 찾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타나카나 아즈마네가 오늘 클러치 백 같은 걸 들고 학교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꼭 놀려줘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스가와라는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교문 쪽 계단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유월이었고, 스가와라의 생일 전전날이었다. 생일에 따로 모일 만큼 살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금요일인 오늘 대충 축하해 주겠지, 하고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스가와라는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서프라이즈 파티가 예정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간질거렸다. 꼴에 여름인지 아직도 해가 쨍쨍했고, 그는 오늘 제 머리를 덮을 고깔모자가 분홍색일지 주황색일지를 고민했다. 어제 다이치와 히나타가 고민하던 ‘색’은 고깔 아니면 케이크 둘 중 하나였다.

   스가와라는 오늘 아즈마네가 캡사이신 소스나 두반장 등을 선물로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집에 소스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따로 사다 놓기에는 큰 식료품점은 너무 멀었다. 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늘이 없어 머리 위가 뜨거웠다. 그는 교문께로 걸어가 ‘사채업자’ 같은 사람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좀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이었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 3번 군? 하고 말을 걸자, 그는 찾았다고 말을 걸어왔다. 나를? 하고 의아함에 다시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퉁하게 나온 입술에는 기다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왜 이름도 모르는, 아오바죠사이의 3번 미들블로커 군이 자신을 기다렸는지가 궁금했다.


   “왜?”

   “스가와라 군은 스가와라 군입니까? 아니면 스가뭐뭐 와라뭐뭐 군 입니까?”

   “어?”

   “이름.”


   그는 뜬금없이 그렇게 질문했다. 그의 쳐진 눈은 스가와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고수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뒤에 머쓱하게 감춘 크라프트지 뭉치를 훔쳐보았다. 모든 게 뜬금없고 애매한 이름으로 맞춰져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영어 시간에 해석한 지문을 떠올렸다. 운명에 관한 지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해프닝이었지만.


   “스가와라 코우시야.”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마츠카와는 그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알려고 온 거야? 그가 물었고,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그게 신경이 쓰였다고 말하는 그는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꽤나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마츠카와의 눈은 꽤나 졸려 보였지만, 그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용건은 그것뿐이야?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는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츠카와가 손가락을 움직이는지 크라프트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츠카와는 빈손으로 제 뒷머리를 머쓱하게 쓸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는 말에 스가와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3번 미들블로커 군은 이름이 뭐야? 하고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는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가르쳐주기 싫어? 하고 묻자,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애매한 여름이 그의 볼 위에 내려 있었다. 햇볕에 내내 서 있던 모양이었다. 미들블로커 씨, 하고 운을 떼자, 그의 작은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스가와라의 얼굴을 보고서 제 이름을 말했다. 마츠카와, 잇세이. 소나무 송에 내천, 하고 이어져 오는 이름들은 애매한 설렘을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제 볼을 긁었다. 그리고 3번 아니고 2번이야. 그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상쾌했다. 마츠카와는 여전히 스가와라를 바라보다가, 이만 가보겠다면서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이 우연적인 만남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잔뜩 엉켜버리고 흐트러져버린 운명의 실타래에도 지금의 사건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너울너울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더위 먹었어? 스가와라가 큰 소리로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자리에서 멈췄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성큼성큼 다가왔다. 멀어지는 건 느렸지만, 다시 다가오는 건 빨랐다. 계속 그가 숨겨놓고 있었던 색이 든 안개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츠카와는 자기는 멀쩡하며, 더위가 안 먹었음을 설명했다. 그는 매우 횡설수설한 어조로 스가와라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했다. 그 아지랑이 같은 말에서 스가와라는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무기력하고 인생이 귀찮은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까지 온 건 이름이 궁금했기 때문이고, 단지 그거 때문에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다가 안개꽃을 봤으며, 그걸 사왔긴 했는데 어떤 핑계로 줘야할진 모르겠지만, 널 보면 딸기우유가 생각났고, 좀 몽글몽글하고 단 느낌인데 이름이 스가와라 코우시라서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 스가와라는 그가 쥐어주는 안개꽃을 얌전히 받았다.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주장하던 마츠카와는, 스가와라의 눈을 빤히 보다가 뒤를 돌아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몇 번을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걸음에 스가와라는 그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간의 등을 보는 기분과도 같았다. 마츠카와가 버스 정류장을 지나서까지 달려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돼서야 스가와라는 뒤를 돌았다. 다시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배구부실로 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스가와라는 이 안개꽃의 이름을 ‘생일선물’이라고 붙이기로 결심했다. 그게 이름을 알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마츠카와의 순정과 가장 가까운 이름일 것이었다. 그는 다음에 인터하이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그의 번호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부실로 올라갔다. 철제 계단을 올라갈 때 마다 소리가 났고, 그는 배구부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돌려 열었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폭죽 소리에, 스가와라는 활짝 웃었다. 가장 처음 축하해주겠다며 달려온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그의 손에 들린 분홍색 안개꽃 뭉치들을 보고서 눈을 깜빡였다. 여자친구, 있었슴까? 하고 물어보는 그들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먼저 온, 사채업자 닮은 친구가 하나 있었어. 그는 그 정도로 가볍게 대답하기로 했다. 유월, 생일에 가까워져오는 안개꽃 같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 날은 고민 하나 없이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오이스가] 나의, 어제에게.



  오이스가 트친오락관에 참여한 글입니다. FHQ로는 처음 써 보는 거라 재미있었어요~












0.

세상의 절반을 준비 해 뒀어,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적막을 먹었다. 히나타는 마왕의 오른팔이 두고 간 딸기향 회복약을 마셨다. 끝 맛이 지나치게 달았다. 카게야마도, 이와이즈미도, 코즈메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의 하수에게 당하고, 다시 치료하는 과정이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패배의 순환 고리를 언젠간 끊어야만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침묵은 유달리 무거웠다. 히나타는 그것이 쿠로오가 남긴 마지막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마왕은 너희를 위해 세상의 절반을 준비 해 뒀어. 히나타는 그 말을 곱씹었다. 모두 같이 이야기 해 볼만한 주제였으나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의 절반, 그 무게가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숨이 텁텁 막혀왔다.


   “저기.”


   먼저 입을 연 건 카게야마였다. 그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목소리였다. 이와이즈미는 모닥불이 꺼지지 않게 마른 장작을 불 속에 넣었다. 불꽃이 일렁이며 타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났다. 히나타는 그가 ‘세상의 절반’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할 이야기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 쉬었다. 책임감이 막중했다. 히나타는 이와이즈미의 좁혀진 미간과,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카게야마답지 않은 일이었다. 히나타는 그를 재촉했다. 바보 히나타, 라는 말이 그들의 중간을 가르자,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는 나름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짙게 달라붙어 있었다. 코즈메는 다 마신 약 병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많은 생각이 날벌레처럼 태어나, 불 속에 뛰어들듯 산화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의 반절이 뭘까.”

   “바보 카게야마, 당연히 말 그대로 세상의 반절이잖아.”


   히나타는 캬게야마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이와이즈미는 그 점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왕의 전 측근이었다. 코즈메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오네 또한 말하지 않았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둘 밖에 알지 못하는 추론을 어서 알고 싶었다. 그가 재촉하듯 카게야마의 이름을 부르니 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절반일까.”

   “그야 마왕님이 아직 능력이 없어서겠지!”

   “아니, 능력은 차고 넘쳐.”


   히나타의 직관적인 대답을 이와이즈미는 단번에 꺾어버렸다. 그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카게야마 또한 이와이즈미에게 전적으로 동의했다. 마왕의 부하는 마왕의 능력의 최대치를 넘을 수 없다. 마족은 본디 약육강식을 모토로 했다. 그의 하수인인 쿠로오보다 마왕은 몇 배나 더 강할 거라는 그의 추측에, 히나타는 기겁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쿠로오가 딸기향 회복약을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용사 파티는 전멸이었다. 세상의 절반이 이미 마왕의 손에 들어 가 있었다. 히나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감이 몰려왔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퍽 무서운 모양이었다. 카게야마 또한 왜 절반을 쥐고 찾아오라고 하는지, 그의 저의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시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무에 불이 붙는 소리는 밤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

나는, 어제를 만나러 갈 거야.


   “오늘도 거기에 가요?”


   오이카와는 졸린 눈을 하고 있는 흑발의 마족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름대로 공들여 빚은 피조물이었다. 쿠니미야, 오이카와는 손짓하여 쿠니미를 가까이 불렀다. 그는 그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그 표정을 보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까지 갈 생각이에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글쎄, 라는 예정되지 않은 대답만을 흘렸다. 그럼 언제 까지 쿠로오를 보낼 생각이에요? 쿠니미가 다시 질문했다. 오이카와는 말 대신 웃어 보이는 걸 선택했다. 마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가장 지엄하신 분은 가끔 이렇게 애매할 때가 있었다. 쿠니미는 확정되지 않은 것을 싫어했음으로, 이런 대답을 하는 오이카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쿠니미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게 사랑이란다. 오이카와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치게 익숙한 일이었다. 출정하기 이전에 모든 병사와 고위 마족들에게 ‘언제나 믿는다’-고 속삭이는 것 같이, 오이카와는 항상 사랑을 노래하곤 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가 언젠간 이해하게 될 거라고 말하며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얌전히 쓰다듬었다.

   사랑이란 마족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과 가까운 감정이었다. 혼돈에서부터 마왕의 마력을 먹어 창조된 피조물인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장 타락한 존재의 가장 순수한 마음. 그 성질에서부터 모순적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쿠니미는 마음속으로 체념했다. 그것을 들었는지, 오이카와는 살포시 웃어보였다.


   “가끔씩, 신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어떤 때요?”

   “바로 지금이란다.”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그래서 보러가지 않고서는 못 배길 때,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물을 뿌렸다. 그의 마력을 먹은 덩어리들이 움직여 진을 만들었다. 물이 만든 투명한 공간 안에는, 이팝나무와 조팝나무의 새끼손톱만한 하얀 꽃으로 덮인 한 집이 보였다. 끊임없이 어제를 살고 있는 집이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식의 생각을 아버지가 읽게 되는 것은, 마족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미미한 서늘함이 밀려왔다. 겨울에 피는 서리꽃 같은 미소였다. 쿠니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정의였다.

   오이카와는 만들어 낸 공간이동 포탈을 타기 전에,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아름다운지를 확인하고, 인간의 복장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의 머리에 달려있는 큰 뿔 두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뾰족한 꼬리마저 자취를 감췄을 때,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인간 같다는 뜻이었고, 오이카와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그 스스로 마법을 걸었다. 사람의 향과 체온을 만들어 주는 마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름의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쿠니미는 끊임없이 어제를 사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쉼표를 찍는 마을,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마족의 사랑은 인간에게는 버거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열심히 매만져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내가 이상하니?”


   포탈에 들어가기 전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양 마왕은 환하게 웃었다. 아름답기에 서늘한 미소였다. 쿠니미는 자신의 왕이 부디 그에게 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쿠니미는 어느 구석으로는 오늘도 오이카와가 세상의 절반을 잃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신이 이 땅의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축복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럼 갈게, 란 말고 함께 오이카와는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오이카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그는 어느새 이팝나무그늘이 드리워진 통나무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신사적으로 통나무집 대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의 사랑이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마법진 근처에 다가가, 발로 식을 흐트러트렸다. 깨진 물방울들이 다시 아무것도 아닌 물로 돌아가 스스로 그릇에 담겼다.

    쿠니미는 사랑이 매우 확실하지 않으며, 효율성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세상의 나머지 반절을 포기한다는 것을 쿠니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이카와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반드시 ‘네가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렇단다.’ 일 것이 분명했기에, 쿠니미는 가볍게 공중을 박차고 날아 자신의 방으로 천천히 밀려갔다.






2.

오늘이 밀려 어제가 되는 건, 새벽의 일인가요?


   스가와라는 분주했다. 그는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을 생각했다. 실로 간만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꽃병에 이팝나무를 장식했다. 줄기에 다닥다닥 달려 있는 꽃망울들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콧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였다. 같은 토벌대에서 마족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서신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스가, 오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이야기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그가 말하는 ‘중요함’은 무게가 달랐다.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바람 같은 남자였다. 진지할 때는 폭풍 같았고, 가벼울 때는 산들바람과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가 팀을 해산하던 날을 떠올렸다.

   더 이상 마왕을 토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그의 오른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기가 가득 찬 탓이었다. 그는 노련한 마법사였지만 그 이후로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몸의 기운을 손끝에 모아 마법적 처리가 된 스태프로 발사하는 그 메커니즘을 더 이상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마왕성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마치 어제처럼 선명한 기억이었다.

   스가와라는 동료들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를 빼고 마왕성에 진군하기로 한 다음 날, 그들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스가와라의 주변에는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는 그 아이러니한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이카와는 그걸 보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을 뿐이었다.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가 상념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소리였다. 그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 쪽으로 다가섰다. 기쁨에 문을 여니 그 곳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가 왼팔을 벌렸고, 스가와라는 그를 기꺼이 끌어안았다. 키가 큰 그가 몸을 숙여줬고, 그제야 스가와라는 그의 양 볼에 키스를 할 수 있었다. 쪽, 하는 소리에 오이카와는 간지럽다는 듯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오른손을 전혀 쓰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의 코트를 받아 걸었다. 오이카와는 그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같기도 했고, 연민이 가득 섞인 것도 같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체리색 눈동자가 켜 놓은 향초 빛에 반짝였다.


   “오랜만이야.”

   “몇 년 만이지?”

   “그러게, 잘 모르겠어.”


   오이카와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해 있었다. 테이블에 핀 이팝나무 같았다. 그는 오이카와에게 의자를 꺼내 주었다. 통나무를 잘라 대충 만든 의자는 오이카와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스가와라는 마왕성을 토벌하던 예전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노숙을 하며 성에 찾아가는 그 과정 속에서도 오이카와는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 때의 기억이 스가와라에게 찾아왔다.

   뭐 하고 있었어?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토비오도 마왕성 토벌을 떠났지?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무 그릇 두 개에 스프를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랑, 날아오는 서신을 보면 곧 성 근처에 갈 건가봐. 스가와라는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해는 없대?”

   “마왕의 측근이었던 이와이즈미 씨가 있어서 괜찮다고 하더라.”

   “와, 이와가?”

   “아는 사람이야?”


   그럼, 잘 아는 사람이지. 오이카와는 그가 유능한 검사라고 설명했다. 마왕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성의 지리도 잘 알고, 함정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신나 보였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매우 부드러웠다. 귀 위쪽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오이카와는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 할 말이 있어.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가 선언했다. 갑자기 무거워진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프 두 그릇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불안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앞에 바로 앉았다. 오이카와가 한숨을 내 쉬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입으로 낼 때 마다 떨려. 그는 스가와라가 바로 알지 못 하는 말을 꺼냈다.


   “항상 하던 말인데,”

   “항상?”

   “응. 너에게.”

   “나한테?”

   “응.”


   그런데, 왜 떨리는지 모르겠어.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가와라는 말의 맥락을 잡지 못했다. 미안해, 나 잘 생각이 안 나서 말야. 스가와라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말했지만 지금의 너는 처음 듣는 말이야, 수수깨끼 같은 소리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에 뿔 두 개가 돋고 있었다. 체리색 눈동자는 피 빛처럼 진해져갔다. 스가와라, 하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스가와라가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해.”


   오이카와가 말하는 순간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게 물들었었던 오이카와의 팔은 매끈한 피부가 되었다.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속삭이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오이카와 토오루였지만 스가와라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두려움에 뒷걸음쳤다.

   가장 신께 가까운 말을 하는데도 왜 날 받아들이지 않는 거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스가와라에게로 뻗어갔다. 강한 힘이 그를 붙들었다. 스가와라는 선반 위에 있는 활을 바라보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오이카와의 구두굽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뱀이 다가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랑해.”


   그가 다시 종언을 선언했다. 그와 함께 스가와라의 시간이 멎었다. 오이카와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바라봤던 모습이었다. 그는 변함없는 오늘이 마냥 웃겼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오늘의 결말은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는 손을 들어 스가와라의 눈을 가렸다. 그는 작게 벌려진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따듯하고 말랑거리는 입술이었다.

   어째서 내가 바라는 말을 해 주지 않는 거니, 오이카와는 대답 없는 목소리에게 물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굳어버린 스가와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 오이카와는 그것을 보며 웃음 지었다. 하나로 묶인 그림자에서부터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는 다시 시간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아른거리며 스가와라의 오늘을 다시 어제로 만들었다.


   “나의 어제야,”


   그가 속삭였다. 사랑해, 라는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문을 닫았다. 시간이 다시 뒤를 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마왕성으로 가는 포탈을 열었다.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사랑의 증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픈 상처였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왕좌를 향해 걸었다. 몇 천 년 간이나 굳건히 지켜온 곳이었다.

   미련하네요, 쿠니미가 속삭였다. 오이카와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와 쿠로가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껏 웃었다. 내일도 가실 거죠? 하고 쿠니미가 물었다. 그의 작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기쁨을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작은 확률이라도 그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미래가 있다면, 그걸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돌릴 거야. 오이카와의 말에 어린 마족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오늘은 미래 없이 반복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절망 속의 달콤함을 보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 세계를 손아귀에 움켜쥐는 것에 관심이 없는 그의 마왕은 한껏 사랑에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반복 되고 있는 어제에 쌓이는 죄를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일이었다.

    미친 것 같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는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가 꺼낸 수정구에 용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에게 세상의 반절만 준비 해 주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내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쿠니미야?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광기를 동반한다. 오이카와의 감정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오이카와는 영민했음으로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그의 애정은 원래부터 그리하였고,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스가와라의 잘못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가던 그를 떠올렸다.

여전히 그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

태양은 밤에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을까요?


   카게야마는 멀리서 날아오는 까마귀를 팔에 얹었다. 스가와라가 기르던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까마귀의 발에 묶인 하얀 리본을 바라보았다. 까마귀는 매일 날아오지만 별다른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다가 하품했다. 세상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일들이 많다. 카게야마는 빈 종이를 손에 쥐다가 웃었다.

   마왕을 물리치면 가장 먼저 그는 스가와라에게 찾아 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받은 활 덕분에 이겼다고 말하면서, 환한 웃음을 짓는 스승을 끌어안고 싶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생각하면서 카게야마는 흰 종이를 품에 넣었다. 마왕이 말하는 ‘세상의 반절’ 또한 빈 종이와 같이 별 의미 없는 말일게 분명했다.

   그는 모닥불을 껐다. 새벽이 발라오고 있었다. 타다 남은 불씨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뉘였다. 이와이즈미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하세요? 그가 물었고, 이와이즈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모든 행동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어딘가 축이 나가버린 것 같은 모습이 불안하다는 말에 카게야마는 별 일이 아닐 거라며 위로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낮은 모든 불안감을 종식시킬 것이었다. 그는 멀리서 밝아오는 햇빛을 보며 눈을 감았다. 중천에 뜨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음으로, 좀 더 잘 수 있을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약속된 승리를 취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잠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날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오이스가] 『스가와라 소년』中, 19장


    오이스가 트친오락관에 참여한 글입니다. ' 착각 '을 주제로 썼던 글이에요>ㅁ<)/ 이거 쓸 때 일부러 뒷 주자분 햇깔리라고 '봄'이랑 '고백'을 섞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백 받은 다음에 두근두근거리는 스가와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고백에 면역 없는데다가, 진짜진짜 좋아해서 저게 장난이면 어쩌지ㅠ 고민하는 슈가는 분명 사랑스러울거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거대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가장 환상적인 연극. 주연은 ‘나’라는 이름의 자신. 배우는 막이 걷히는 그 순간, 가면을 쓴다. 스가와라는 봄볕을 받으며 샤프를 까딱였다. 한 뼘 정도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다가와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봄바람은 저 멀리, 교실 구석부터 다가온 것이었다. 그는 멀리 창가를 보다가, 정면에 있는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칠판 가득 수식이 적혀 있었다. 미분이니 적분이니 하는 이름이었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 쉬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산더미였다. 그는 연습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들을 간질였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수식 앞에 limit를 붙였다. ‘극한’ 이라는 말이었다.

   리미트. 그 밑에 영, 그리고 화살표. 화살표의 뾰족한 부분은 8을 눕혀놓은 무한대로 향한다. 스가와라는 그 당연한 규칙에 의문을 품었다. 과연 한계 없는 영원이 가능한가. 제약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는 연습장에 하트를 그렸다. 안을 채우지는 않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가벼운 어조를 생각했다. 봄바람 같은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수식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묘한 떨림이 그가 수식을 풀어내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배구 코트에 들어 가 있는 기분이었다. 러너즈 하이를 똑 닮은 느낌이기도 했다. 머릿속이 간질거렸고,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로 침식되었다. 그는 그 침식이 ‘부식’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점점 녹슬고 있었다. 그에게 그의 고백은 딱 그 정도의 무게였다.

   수열의 ‘극한’에서 나오는 답은 근사치이다. 정확한 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랑이라는 비정확하고 무한정이라 여겨지는 감정의 답을 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가와라는 감히 확언할 수 없었다. 그는 연습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어냈다. 동글동글한 글자 두 개가 자리했다. 그는 히라가나 아래에 한자를 적었다.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는 유달리 꽁꽁 싸매진 느낌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가 고민한다고 해도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애매한 문제였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둘째 가는 문제였다.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랑이 그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애매한 생각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 안을 더듬었다.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아즈마네와 사와무라가 함께 있는 단체 대화방을 틀어 낸 스가와라는 어제 밤부터 꾸준히 입력하려고 했던 말을 써냈다가 지웠다. 이런 생각을 남에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를 믿지 못한 걸 동네방네 떠벌리는 꼴과 다름없었다.

   날 좋아하는 게 착각은 아닐까.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핵심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개의 수식을 겹쳐 풀어야 하는 문제처럼, 혹은 사인 - 코사인 - 탄젠트를 적절히 배합해서 풀어야 하는 삼각함수와 수열의 극한 문제처럼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가와라’라는 이름의 연극의 19막에서, 지금이 가장 뜬금없는 대목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라는 글자 또한 사랑을 나타내는 글자처럼 단단하고 유려했다. 이름 글자마저도 잘 생겼네, 그는 짧은 감상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오이카와가 보낸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멋없는 고백이 별 파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스가와라는 그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미리보기했다. 차마 대화방으로 볼 용기는 없었다.


   「배고픈데 아직점심시간도아니다상쾌군은어때 어제일아직」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애매한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그는 샤프를 손끝에서 돌렸다. 그는 다시 칠판을 보고, 멀리서 불어오는 따사로운 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았다. 봄,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쌀쌀했었는데,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는 괜히 춥다고 말하면서 연습장에 수식을 적어 내려갔다. 수학문제처럼 쉽게 풀리는 문제면 좋을 텐데. 그는 목 끝을 간질이는 재채기를 뱉어냈다.

   연극이 아닐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신용해야 하는 문제일까. 과연 그의 사랑이 막힘없이 저에게 수렴하는 것을 믿어야 할까. 스가와라는 진한 착각 속에서 표류했다. 일랑일랑, 일렁이는 봄바람이 그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뒷목을 쓸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질 문제가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대답해야 할 문제였다. 착각이면 어쩌지,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꺼풀 위에 짧은 어둠이 내리 앉았다.


   그는 머지않은 일을 회상했다. 꿈결 같은 일이었다. 아직 쌀쌀함이 가득한 저녁, 둘은 잠시 만났다. 오이카와는 월요일이라 연습이 없었고, 스가와라는 연습 도중에 성급하게 빠져나왔다. 학교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가로등이 하나하나 빛을 먹어갔고, 멀리서 노을이 차츰차츰 밤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얼마 전에 본 책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밤하늘을 ‘장막’이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라는 말이었다.

   밤이 장막이라면, 지금은 무대 뒤가 되는 걸까?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렇겠지? 하고 대답했다. 그는 그것이 고백의 초석이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너한텐 항상 솔직해야 겠네? 오이카와는 진지하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내리 앉은 목소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는 멀리 내린 봄바람을 보다가 어깨를 쓸었다. 좀 춥네, 하고 말하자 오이카와는 자신이 걸친 후드 집업을 벗어주려고 했다.

   가로등 아래의 반짝임 속에서 둘은 걸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 침묵을 좋아했다. 딱히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서로 편한 관계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반 보 정도 앞에서 걸어가는 오이카와의 흔들리는 손을 보는 걸 좋아했고,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바람이 들어가 새의 걸음걸이처럼 총총 뛸 때면 사랑이 폼폼 돋는 것도 같았다.

   그가 애매한 짝사랑을 되새김질 하고 있을 때 오이카와는 반 보 차이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스가와라는 그 보다 반보 앞에 서서 살짝 몸을 돌렸다. 둘 밖에 없는 길에서 오이카와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는 요즘 고백의 트렌드에 대해 아느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결심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스가와라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랄하게 걸었다.

   스가와라의 걸음이 그의 걸음보다 세 보 정도 앞섰을 때, 오이카와는 그를 불렀다. 코우시, 하고 내리 앉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것이었지만 좀 더 무거웠다. 스가와라가 뒤를 돌자 그는 정말 좋아해, 라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멋없었고, 뜬금없는 말이었다. 스가와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손을 내밀어왔다. 스가와라는 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저기 스가, 하고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 진득한 목소리에는 끝이 담겨 있을까, 아니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일렁이는 착각이 꽃처럼 피어 거짓말로 다가온 것이었을까.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번뇌도 이 일의 파생이었다. 스가와라는 제 심장에 뿌려진 씨앗, 그 곳에서 싹을 틔운 꽃을 떠올렸다. 한숨을 쉴 때 마다 가지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봄바람이 그의 손끝에 잡혀있다, 이내 흘러갔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봄바람 같은 남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느긋한 한낮에 찾아오는 춘곤증을 닮아있었다. 그랬기에 착각 한 것이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 맥 빠지는 고백은 ‘키스해도 괜찮고, 섹스 할 만큼 사랑하는’의 뜻이 아니라 ‘친구로서 좋아해’일 게 분명했다. 그의 생각은 갈수록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쓴 가면의 이름이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칠판 안에는 여전히 수식이 가득했으며, 스가와라는 착각의 이름만을 연습장에 적고 있었다. 그는 계산할 수 없었고 답에 확신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그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이카와가 보낸 메시지의 미리보기가 바뀌어 있었다. 미안해, 그 짧은 말에 스가와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오이카와가 사과 할 문제가 아니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였다.

   핸드폰 액정 위에서 스가와라의 손가락이 방황했다. 시급하게 대답 할 일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좋아, 라고 대답 했을 때 ‘몰래카메라 였습니다-’라는 구식 포맷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스가와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다. 그의 상상은 봉우리를 부풀리기 시작한 꽃잎처럼, 그 속에 봄을 가득 머금고 있는 벚꽃처럼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이건 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무대에 ‘착각’이라는 무대장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연극, 19장에서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 계속, 계속 상상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의 망상을 돕는 기폭제였다. 스가와라는 그가 쓰고 있을 가면과, 자신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착각을 기조로 한 무대미술 위를 걸었다.

   수업종이 울려도 그의 생각은 끝을 낼 줄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봄바람이 그의 볼을 분홍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가로등 아래의 멋없는 고백이 그의 머리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후후,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숨이 봄바람과 섞여 그의 마음을 더 부풀렸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좋아할까, 좋아할까, 좋아할까. 스가와라는 점심시간에 꽃이라도 따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꽃잎이라도 뜯고 싶은, 그런 봄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 벚꽃은 피기 전이었고, 스가와라 소년의 연극의 19장은 느리게 또 느리게, 봄날 춘곤증처럼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엉망인 연습장 페이지를 뜯어냈다. 부디, 착각만은 아니길. 그는 기원을 담아 종이를 구기고, 그 마음을 가방 안에 넣어 지퍼를 닫았다. 봄 햇살이 그의 얼굴에 짙게 내렸다.

   봄이었다. 

[오이스가] 내 나름의 로맨틱!

   스가른 전력에 참여했습니다. '꽃'이라는 주제였어요.

   저는 왕자님 같고 로맨틱한 오이카와가 좋습니다. 사랑에 빠진 딸기 같은 연애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솔직하고 자신감도 있으니까 표현도 왕왕 해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전력 글은 억지가 왕왕이지만 8ㅅT...! !! 오이스가가 꽃 같은 연앨 했음 싶네요!








0.

   밤에 좌석버스를 타는 것은 그들 만남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창 밖에 있는 스가와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들어가, 라는 목소리가 봄철 벚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흔들거리고, 오이카와는 살짝 열어 둔 창문 틈으로 손 키스를 보낸다. 그는 이 순간을 좋아했다. 그게 뭐야, 다음에 이어져 오는 웃음은 해바라기처럼 환했다. 어두운 밤, 주황색 등만 켜 어두컴컴한 풍경이었지만, 스가와라를 바라볼 때면 밤은 한 낮처럼 밝아지곤 했다.

   버스가 출발하면 그는 이어폰을 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핸드폰이 노래를 두어 곡정도를 재생하면, 좁은 길이 나온다. ‘시골길’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의 일차선 도로를 달리는 버스, 그 차창에는 두 가지 풍경밖에 보이지 않는다. 분명 낮에는 논과 밭이었을 어둠과, 그 너머를 밝히는 가로등과, 국도를 달리는 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에서 밝히는 불빛이 만들어내는 꽃다발. 오이카와는 그 두근거리는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것은 확실하게, 꽃이었다. 흩어져 있는 안개꽃처럼, 혹은 작은 꽃을 피우고 무리를 이루고 있는 벚꽃처럼 확실하게 반짝였다. 별을 따다가 정제해, 피워낸 것처럼 아름다웠다. 오이카와는 그 광경을 볼 때 마다 안개꽃과, 프리지아와, 리시안셔스와 라넌큘러스를 떠올렸다. 알이 큰 꽃도 있었고, 작은 꽃도 있었다. 매번 같은 도로를 달리면서도 그가 생각해내는 꽃은 달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꽃들은 스가와라 코우시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풍경을 보면서 오늘 하루를 되감기했다. 그는 스가와라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가 얼마나 상쾌했는지를, 또 라멘에 들어 가 있는 삶은 계란을 먹을 때 노른자를 빼 국물에 휘젓는 모습이나 민트초코프라페를 시키면서 ‘민트가 치약 맛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 할 수 없어!’ 라고 선언하는 모습을 반추했다. 떠나 온 지 십 분 정도 되었으나 다시 보고 싶은 마음. 오이카와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1.

   이와이즈미는 엎어져 있는 오이카와의 등짝을 때렸다. 풀 스파이크를 치는 것 처럼 세게 때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힘이 실린 것이었다. 오이카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나자, 이와이즈미는 도시락통을 들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될 때 까지 쳐 잤냐 멍청아, 라는 험담 뒤에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가 어제 누굴 만나러 갔었는지를 얼추 알 수 있었다.

    스가와라와 오이카와는 원거리 아닌 원거리 연애 중이었다. 카라스노가 위치 해 있는 지역과, 아오바죠사이가 위치한 센다이는 의외로 거리가 멀었다. 좌석버스를 타고 50분을 곧장 지나야 하는 거리였다. 이와이즈미는 매번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만나러가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연애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해서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는 0이 되는 것이었다.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오이카와의 책상에 도시락을 내려 놓았다. 주섬주섬 푸르는 손길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크게 하품을 했다. 너 그렇게 졸면 미조구치가 너 당장 헤어지라고 할 거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말에 고개 끄덕였다.


   “요즘 미조구치가 내 성적 가지고 뭐라고 하기 시작했어.”

   “이번에 전국 못 가면 입시해야 하니까.”


   하나마키의 말에 마츠카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면서 도시락을 열었다. 그는 흰 쌀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니까 연애 자중 하라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거야. 이와이즈미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널 따라다니는 여자애들한테 이런 걸 찍어 팔아야 하는데. 하나마키가 아쉽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좀 인기가 없어 봐야 해, 라는 말이 따라왔다. 오이카와는 수업시간에 자니까 연습에는 지장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도시락 반찬을 뺏어 먹으면서 결국 마이너스가 될 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만나러 가는 걸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넌 걔한테도 좀 오라 해라.” 

   “맞아, 다른 애랑 사귈 때는 잘도 하더만.”

   “안 돼, 안 돼.”


   오이카와는 입술을 쭉 내밀고 말했다. 그의 억지에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등짝을 때렸다. 오이카와의 표정이 한순간에 못난이처럼 구겨졌다가 펴졌다. 그는 입으로 불평불만을 쏟아 내렸다. 왕자님 놀이 하다가 너 훅 간다, 하나마키가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고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건데? 라는 질문에 오이카와는 스가가 꽃이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는 어린왕자는 장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고 말했고, 마츠카와는 지갑사정은 보면서 만나는 거냐는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항상 꽃다발을 사느라 지갑이 털려, 라는 비현실적인 말에 이와이즈미는 그의 등을 한 대 더 때렸다. 맞은 자리가 욱씬거려 오이카와는 그 곳을 설설 쓸었다.


   “손해 보는 연애 하지 말랬지!”

   “니가 내 엄마에요?”

   “엄마는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손해 보지 말랬지.”

  “이와도 연애 해 보면 알 걸! 연애를 못 해서 모르는 거야!”


   오이카와는 퉁명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마츠카와는 왜 꽃다발을 사 주는 건데? 하고 물었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마키 또한 열심히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추었다. 막 연애를 시작한 그에게 있어서 오이카와의 행동은 ‘참고할 만한 표본’ 중의 하나였다. 이와이즈미는 효율적인 용돈 관리에 대해서 지적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열심히 흘려들었다. 스가와라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비웃지 않는다면 이야기 해 줄 게. 오이카와는 선심 쓰듯 말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가 비웃으면 어떡해? 그가 물었고,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의 입 속에 밥을 가득 채워버린다는 명쾌한 해결법을 내놓았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레몬녹차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매번 좌석버스에 타고 돌아올 때, 빛무리들이 꽃과 같았고, 그걸 주고 싶어서 닮은 꽃을 사 간다. 그는 이 간단한 명제가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로맨틱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셨다. 하나마키가 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마츠카와 또한 흥미가 있는 듯 했다. 오이카와는 그가 의외로 로맨스 소설을 자주 읽으니, 자신을 이해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항상 보면서 돌아오는 야경이- 

   안개꽃 같기도 하고- 꽃다발 같기도 하고- 별을 꽃으로 묶어놓은 것 같아서-

   그래서 항상 두근거리는데- 내 핸드폰이 별로- 안 좋으니께-

   사진을 찍으면- 이상하게 나와서 말야- 근데 이걸- 나는 상쾌 군한테-

   꼭 보여줘야겠거든- 근디- 상쾌 군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논밭이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니께 말이여- 그런 야경- 하나도 못 볼 꺼구-

   그러니까- 그거 비슷한- 안개꽃이나- 꽃다발을 안겨서- 내 마음을- 주고 싶었- 달-까-


   하나마키가 제 도시락 통의 밥을 한 가득 떠 이와이즈미의 입에 넣는 것을 신호로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의 입에서 밥이 튀어나올까, 혹은 배구 명문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의 에이스 스파이커의 손힘으로 등짝을 세게 맞지 않을까 고민하는 바람에, 오이카와 소년의 목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쉼표를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노래를 하듯 말을 늘렸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와이즈미의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었다. 그는 가끔씩 오이카와의 엄마처럼, 그가 손해 보는 것과 사랑에 빠져 헛손질을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와이즈미는 효율적인 연애를 하라고 몇 번씩이나 설교하곤 하던 남자였다. 그의 입은 과다하게 먹은 밥을 여전히 씹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미리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머리만은 맞을 수 없었다. 추억이 하나라도 날아간다면 매우 아쉬울 것 같았다. 스가와라의 웃는 모습 하나라도 잊을 수 없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었다. 너 진짜 순정만화 남주 같다, 라는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으면서 주말드라마 서브남주나 되면 잘 된 거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어쩌누, 이것이 내 나름의 로맨틱인걸.”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는 억울한 듯 흰 밥을 꼭꼭 씹었다. 그래서 그 상쾌 군은 기뻐 해? 마츠카와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야경을 보여주고 싶어’라는 건 모르지만, 그래도 활짝 웃는 게 예뻐. 그가 그렇게 말하자, 이와이즈미는 또 호구 잡혔다는 말을 하면서 혀를 쯧쯧 찼다. 그의 혀 차는 소리에 오이카와는 혀를 내밀었다.

    아, 상쾌 군 보고 싶다. 오이카와는 동그랑땡을 씹으면서 말했다. 하나마키는 돈도 없는 게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한다며, 스팸 두 조각을 오이카와의 밥 위에 올렸다. 자취생 신분에 스팸 두 조각이면 금쪼가리다 야, 라면서 마츠카와도 그의 밥 위에 참치 통조림 몇 점을 올려주었다. 오이카와는 그걸 입 안에 넣고 씹으면서, 다시 한 번 어제의 야경을 떠올렸다. 스가와라가 잔뜩 담겨 있었다.

    지평선-에 가까운 넓은 평야에 논-밭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열린 창틈으로 올린 바람이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였고, 얼굴 전체에 흐르는 바람에 눈을 야트막하게 뜨면서 창밖을 바라보면 별꽃 같은 빛무리들이 가득했다. 언젠가 스가와라와 함께 본 밤벚꽃을 생각하면 그것 풍경은 그에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 그 꽃의 이름은 언제나 사랑이었고, 스가와라였다.

    그 광경을 봤기에, 그게 소중하다고 생각했기에 계속 좌석버스 막차를 타는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뒷머리를 슬슬 긁었다. 혼자만의 로맨틱, 그 만의 은유를 스가와라가 눈치 채 주면 좋겠지만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는 문득 푸스스 웃었다. 애인 생각했냐, 하는 이와이즈미의 큰 한숨은 오늘따라 즐겁게만 다가왔다. 다음번에는 환하게 핀 프리지아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스가와라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하나마키에게 연애 하면 다 이렇게 되느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마키는 뭐 그렇지, 나도 매일 사랑한다고 외치지 않으면 뭔가 목 막혀서 죽을 것 같고. 오이카와는 바로 그런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사랑은 봄이었고, 야경이었고, 신문지로 포장한 안개꽃다발이었으며, 넓게 펼쳐진 꽃 같은 가로등 불빛을 달리는 버스였다.


    사랑해, 하고 그의 엄지손가락이 움직여 말을 만들었다. 어제 같은 말이었다.





[하나쿠니] 사랑은 가끔, 증거를 바라요

  엔피 님께서 커플링 맞추는 하나쿠니가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오래 잡고 있던 것 치고 퀄리티가 안 나와서 슬픕니다. 둘은 연애할 때 합이 잘 맞을 것 같아요. 쿠니미는 어른스러운 척 하는 어린애라서 맛키가 간간히 보듬어주고 길러(?) 줘야 할 타이밍이 있을 것두 같습니다! 

   아무래도 엔피님께 AS 해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커플링 하나 맞추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절레절레)










***

   "그래서 쿠니미 군, 종종 데리러 오는 선배 말야, 여자 친구 있어?"


   누구? 쿠니미는 웃으면서 되물었다. 종종 받는 질문이었다. 그는 눈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있다는 여자였다. 쿠니미는 그녀가 새로운 악세사리를 구하는 걸 알아차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모른 체 하자, 그녀는 분홍색 머리에 차 있고, 스타일 좋은 남자, 라고 대답했다.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그녀는 하나마키를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숨겨서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녀가 차 없는 남자는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타입을 매우 싫어했다. 쿠니미는 이런 여자가 자신과 같은 취향이라는 게 불쾌했다.


   "사귀는 사람 있을걸?"

   "그래? 커플링 없던데."


   쿠니미는 '사귀는 사람'에 강세를 주어 발음했다. '여자 친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매번 깨끗했다면서, 깊게 사귀는 관계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쿠니미는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웃팅은 안 된다는 생각이 쿠니미의 이성을 잡아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쿠니미의 옆에 앉아있던 킨타이치가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다. 쿠니미는 심술을 부려 야하바를 소개시켜 주려다가 그만 두었다. 킨타이치의 위장을 조각조각 낼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거니와, 그녀가 한 말이 그에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커플링이 없어도 사귈 수도 있지, 그는 나름 반격했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니까, 걔랑 맞추기 싫으니까 커플링이 없는 거야. 쿠니미 군은 연애를 진심으로 한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지. 그녀는 제법 예의 없게 쏘아 붙였다. 쿠니미는 이 말의 의미가 '내가 알아서 꼬실 거니까 닥치고 연락처나 알려줘'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 섹스도 하는 관곈데'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날 것이었지만, 그 '모든 것'에는 쿠니미와 하나마키의 평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게이가 자유롭게 아웃팅하지 못하는 상황을 마음 깊이 아쉬워했다. 그는 그 형이 전화번호 다른 사람한테 알려 주는 거 싫어한다는 변명을 댔다. 그녀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기 싫다고 말해."

   "너 같은 사람한텐 선배가 아깝긴 하네."


   쿠니미는 쏘아 붙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마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찾을 수도 없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저것 귀찮아 하는 쿠니미와 달리 하나마키는 인스타그램이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SNS를 성실하게 관리 하는 편이었다. 쿠니미는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분에 차 씩씩거렸다.

   킨타이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쿠니미는 시계를 확인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서 집에 가야만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하나마키에게 뭐라도 쏘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니까, 커플링도 맞추기 싫었던 거 아냐? 쿠니미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엿을 먹여야겠다고 결심 하면서도, 하나마키가 자신에게 커플링을 맞추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점점 확신이 없어졌다. 그는 가방을 챙기고 우산을 들었다. 오늘은 하나마키의 자취방에 가기로 한 날이었으나, 쿠니미는 그가 오기 전에 얼른 달려,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자신의 자취방에 틀어 박혔다.






***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게 거짓 한 톨 없는 진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흥미 없는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제 마음에 솔직한 남자였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훌쩍 떠나버릴 것도 쿠니미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얽매고 싶지 않았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 둔 것은 쿠니미였다.

   그는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가만히 두었다. 분명 약속 장소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찾고 있을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 쿠니미는 돈나물을 찬물에 씻었다. 손끝이 차갑게 단단해졌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론 서운했다.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부모님 네 분이 다 개방적인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다행이도 하나마키와 쿠니미는 그 확률에 당첨 된 행운아였다. 집에서 이해를 받는 관계라고 해도, 주위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 결국 모난 돌이었다. 평평한 땅에서 툭 튀어 나온 돌.

   흔적이 남는 모든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이 년 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쿠니미는 돈나물을 헹구어 채에 걸렀다. 물기가 천천히 빠져 나갔다. 그는 조리대 한 구석에 그것을 방치하고 두부를 꺼냈다. 튀긴 두부가 다 떨어지고 말랑말랑한 것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두부를 굽기로 결심했다. 한숨이 그의 손가락에 매달렸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자는 건 이미 합의를 본 일일 텐데도, 쿠니미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일렁였다. 저번에 동거를 조르던 하나마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한숨을 내 쉬면서 두부를 잘랐다. 두부가 삐뚤빼뚤하게 잘라지고, 그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 있어? 하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하나마키가 들어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면서, 두부에 계란 물을 묻혀 팬에 올렸다. 계란이 익는 소리가 자글자글하게 들려왔다.


   "오늘 우리 집 가기로 하지 않았었어 자기야?"

   "나 오늘 기분 좀 안 좋은 일 있어서, 이런 기분으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쿠니미는 능숙하게 변명했다. 그는 저녁 같이 먹을 거죠? 하고 물었다. 하나마키는 물론이라고 대답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는 그의 소유욕이 아직 건재함에 감사했다. 그는 여전히 하나마키의 일순위인 것이었다. 오늘 반찬 뭐냐는 질문에 쿠니미는 돈나물을 무치고, 튀긴 두부와 영양부추 샐러드를 만들 거라고 대답했다.

   나 스팸도 구워줘.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이요리가 두 개가 되지만 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반찬은 먹어야 한다가 그들의 지론이었다. 쿠니미는 코를 킁킁거렸다. 뒤를 돌지 않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코가 시큰거릴 것 같았다. 연애란 행복 아래의 불안함을 맛보는 행위였다. 그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대학에 들어와서까지 더 자란 하나마키와, 자라는 게 멈추는 쿠니미 사이에는 은근히 체격 차이가 났다. 전화도 안 받고,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오늘 아키라 별로 맘에 안 들어. 하나마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두부를 부쳤다. 튀김 두부가 없는 거 있죠, 라는 속이 뻔히 보이는 화제전환에 하나마키는 끌려오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깨금발을 들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좋아하고 있는데, 한 순간이라도 의심했다는 사실이 쿠니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커플링이라는 징표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데도 불안 해 했다. 그는 묵묵히 두부를 부쳤다. 그는 선반을 열어 스팸을 꺼냈다.

   그는 조리대에서 양파를 썰었다. 돈나물 무침과 영양부추 샐러드에 둘 다 들어갈 것임으로, 하나를 온전히 잘라냈다. 그는 그릇을 꺼내 저민 양파를 넣고 찬물을 담았다. 매운 기를 빼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그 과정 내내 쿠니미에게 끈덕지게 붙어 있었다.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네."

   "치사하게 이러기야? 침대에서도 안 알려줄 거지?"

   "네."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간간히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큰 문제는 아닌데, 내가 짜증나서 그래요. 쿠니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나한테도 못 말해? 하고 물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쿠니미의 검은 눈동자에 그의 갈색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새장 문을 연 것은 쿠니미 자신이었으나, 그는 그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언제든 가버릴 것 같은 그를 옭아매고 싶었다.

   쿨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어린 만큼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 ‘이 년’이라는 간격을 한 순간에 뛰어 넘을 만큼, 하나마키가 자신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크고 싶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숙여 하나마키의 매끈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목에 있는 팔찌와는 다르게, 손은 깨끗했다. ‘그녀’들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싶어, 쿠니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냈다.

   오늘의 아키라는 이상하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멋대로 화대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자책하며 제멋대로 울기까지 하는 연인은 마음에 들지 않죠? 쿠니미가 말하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마키는 가스불을 끄고 다시 그의 앞에 섰다.


   “나, 하나마키 선배가 좋아요.”

   “나도 좋아해.”

   “그래서 옭아매기 싫었는데.”


   나 진짜 오늘 반지 맞추고 싶어요. 쿠니미는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오늘 무슨 일 있었구나, 하고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깔렸다. 쿠니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싸구려 로맨스 소설ㄹ의 여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속삭이는 쿠니미가, 하나마키는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내가 싫으면 바로 떠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될 것 같다는 뜬금 없는 말들이 다가왔다.

   쿠니미는 가끔씩 멋대로 상상하고 스스로 지칠 때가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마다 얌전히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그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투정을 부릴 때. 그 때 받아주고 사랑을 퍼부어주는 게 하나마키는 퍽 즐거웠다. 어른인 척 하는 어린애가 어린애 티를 내는 이 순간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왼손을 잡아 들었다. 맞추자, 커플링. 우리 사랑도 이제 증거가 필요 할 때가 됐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쿠니미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고, 느릿하게 핥았다.


   “사랑해?”

   “사랑해.”


   즉각적인 언어가 다가왔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손을 깍지를 끼어 세게 잡았다. 무슨 이유로 커플링을 맞추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스스로 지쳐버린 쿠니미를 위로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그의 투정 가득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입술을 핥고, 혀를 감싸자 쿠니미는 익숙하게 응해왔다. 하나마키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감정’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증거를 바라기 마련이었다. 밥 먹고, 우리 반지나 보러 가자. 그는 그의 윗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하나마키는 그가 솔직해지는 이 타이밍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는 쿠니미를 이런 상태로 몰아 간 누군가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쿠니미는 다시 가스불을 켰다. 하나마키는 식탁 의자에 앉아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쿠니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유성 매직을 꺼내, 그의 왼손에 선을 그어 반지를 만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는 ‘평소의 쿠니미’에게, 하나마키는 빨리 맞추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하면서 제 손에도 매직으로 선을 그었다. 밥 먹고 나서 기깔나는 거 채워 줄게,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그러든가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내민 입술에 다시 쪽, 하는 소리를 남겼다. 아까의 ‘사랑해’ 라는 말에 미처 다 담지 못하고 남은 것이었다. 그는 그 남은 사랑을 담아 다시 그의 이를 혀로 톡 톡 노크했다.




[하나쿠니] 라 캄파넬라,


  피스틸버스 AU입니다. 하나花마키와, 아키라英의 이름에는 둘 다 꽃이 들어가죠. 관계를 가질 때 마다 가지에 꽃이 핀다는 피스틸버스는 어쩌면 하나쿠니를 위한 세계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맛키의 꽃은 꽃 전체를 포괄하는? 느낌이고, 쿠니미의 꽃은 꽃부리, 그러니까 꽃잎 전체로 이루어진 '꽃송이'라는 점이 또 매력적인 것 같아요. 하나쿠니 어서 사귀었으면..! 

  자기가 원하는 걸 얻고 싶어하고, 그걸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쿠니미를 이미지하면서 썼습니다. 뭔가 쿠니미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만큼, 좋아하는 걸 위해서라면 장난감을 위해 기꺼이 우는 애 마냥 노력할? 자신이 애껴둔 체력을 쓸?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나마키와 쿠니미가 가지는 아슬아슬한 섹슈얼 텐션이 좋습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부족 한 것 같습니다. 







***


   “등에 꽃나무가 있는 게 불편할 때가 있나요?”


   의사가 물었다. 쿠니미는 이 무례한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 등에 새겨진 큰 벚나무를 떠올렸다. 첫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서야 생긴 것이었다. 등에 파인, 척추 선을 따라 돋은 깊은 줄기와, 마치 날개마냥 뻗은 가지. 그것은 쿠니미가 피스틸인 것을 의심했다.

   피스틸의 등에는 꽃나무가 있다. 관계를 할 때 마다 마른 가지에 꽃이 피어난다. 쿠니미는 그의 나무가 꽃을 잉태하지 않는 나무였으면 싶었지만, 그의 성장통을 딛고 자란 것은 벚꽃나무였다. 그는 등허리가 화끈거린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손톱 끝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의사는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딱히 불편한 점은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간간히 신경 쓰일 때는 있어요.”

 

   부 활동 시간에 옷을 갈아입는다던지 할 때?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선배를 떠올렸다. 그의 꽃나무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아 본 사람이었다. 하얀 등에 새겨진 나무에서 좋은 향이 난다 말하던 목소리가 다가왔다. 진료실 한쪽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흐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음표 안에서, 쿠니미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직관적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느낌이 닮았다. 《라 캄파넬라의》초반부의 잰 듯한 섹시한 음률들은, 후반부의 격정을 위해 존재한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자신의 변화를 유일하게 눈치 챈 그 모습이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선배는 의외로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쿠니미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스테먼은 피스틸에게 격정적인 감정을 느끼나요?”


   쿠니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자신의 피스틸이 있다고, 운명적으로 느끼나요? 의사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벚꽃을 피우는 스테먼이라면 벚꽃 가지를 가진 피스틸에게 끌리겠지요. 그 대답을 듣자 쿠니미는, 그로써는 드물게 웃었다.


  그는 귀찮은 일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은 전혀 쓸모없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편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을 처음 봤을 때의 하나마키를 떠올렸다.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낱낱이 훑고 있었다. 어딘가 핀 꽃은 없는지, 무슨 나무인지. 쿠니미는 그 눈빛을 생각하며 짧게 떨었다.

   신기하죠? 벚꽃나무 가지래요. 라고 말했을 때, 하나마키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선배는 스테먼인가요? 쿠니미는 아무것도 없는 그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푹신푹신한 물건을 처음 굴리는 고양이 같은 순진함에, 하나마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순진한 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은 하나마키의 색으로 물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결정했음으로,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궁금했던 몇 가지를 더 물은 다음에서야 상담실을 나섰다. 그는 물감을 사기로 결심했다. 벚꽃과 닮았지만 모든 게 다른 매화를 그릴 물감. 지워지지 않을 그런 장식을.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숨이 나간, 빈자리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


   하나마키는 라커 문에 붙어 있는 거울로 후배의 등을 훔쳐보았다. 얼마 전 피스틸로 발현했다는 그의 후배의 나무에는 몇 송이 꽃이 붙어 있었다. 분홍색 벚꽃이 아니라 하얀색 매화였다. 그는 거울에 비친 쿠니미의 등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저기에 꽃을 새기는 것은 자신이 처음이어야 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백지 같던 나무에 새겨진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유니폼을 개켜 놓는 중이었다.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느긋했다. 하얀 유니폼이 그의 손에서 정사각형이 되었다. 그는 교복 셔츠를 걸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하나마키가 꽃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은유를 알아차렸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쿠니미는 느긋했다.


   “제 등, 뚫어지겠어요. 하나마키 선배.”


   쿠니미가 말을 걸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라커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유 없는 눈빛을 하고서, 그 만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쿠니미의 목에 새겨진 꽃을 바라보았다. 뚫은 자국이 하나도 없는 귓불까지 번져있는 가지에는 아직 하나의 꽃도 피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에 있는 자국의 주인이 궁금했다.

    성급하게 물을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중하게 물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피스틸의 등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알지도 못하는 놈의 꽃을 피운 그의 등을 파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날지 못하게 그의 날갯죽지를 도려내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다시 뒤를 돌았다. 쿠니미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하나마키는 라커에 붙은 거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쿠니미는 다시 닳겠다고 말했다. 보는 걸로 닳는다면 좋겠네,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했다. 쏘아 붙인 말의 의미를, 그의 후배는 모르는 듯 했다. 너무나도 순진해 보이는 그 모습에, 하나마키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처음은 자신이 거둬 가고 싶었다. 그의 목에 이를 박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어야만 했다.

   저 매화의 주인이 독초라면, 하나마키는 아찔한 가정을 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그는 뒤를 돌아서 쿠니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에게서는 매화 향이 나고 있었다. 그는 쿠니미의 귓가에서 향을 맡았다. 향수는 아닌 것도 같았다. 하나마키 선배, 하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었다. 그는 쿠니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 벚꽃을 피워.”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가지를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이 알 건 아니네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꽃, 있잖아. 하나마키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쿠니미의 날갯죽지에 핀 꽃을 꾹 눌렀다. 피가 나도록 긁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면서, 하나마키는 그의 날개에서 손을 놀렸다. 간지러워요, 하면서 쿠니미의 목울대에서 웃음 소리가 피어났다.

   묻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질문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매화 향을 모두 거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의 라커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신경한 것 같은 쿠니미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얇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나무는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알 수 없는 소유욕이 하나마키의 마음을 간질였다.





***


   쿠니미는 입을 올리며 웃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는 자신을 뒤에서 안은 하나마키에게 가볍게 기대었다. 단순한 꽃 두 송이, 그 하얀 매화 두 조각이 이런 상황을 불러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손을 들어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벚꽃 단 내가 났다. 가까이서 맡고 싶었던 향이었다. 쿠니미는 제가 친 거미줄에 그가 걸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연탄連彈은 이제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선배, 날 좋아해요?”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물었다. 목에 뜨거운 숨과, 혀가 닿았다. 말캉하게 닿은 혀는 그의 살을 부드럽게 쓸다가 세게 빨았다. 꽃에 있는 나뭇가지에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이거 말고, 다른 것도 줄 수 있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응, 하고 대답했다. 귓가에 걸린 그의 목소리가 꿀 보다 더 달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하나마키는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첫사랑으로 앓은 다음, 벚꽃나무가 피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는 미처 헤아릴 수도 없을 게 분명했다. 올바른 나무에 알맞은 꽃을. 쿠니미는 그의 마음이 생리적인 현상인지, 일시적인 불확실성인지, 아니면 진짜 사랑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틀린 마음을 꽃잎으로 감추며 쿠니미는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줘요, 나, 확신 없는 관계는 싫어.”


    쿠니미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귓불에 숨을 불어 넣으며 사랑해, 라고 속삭였다. 그 애처로운 무게감에 쿠니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아이마냥 쿠니미의 마른 배를 쓸었다. 하나마키의 손끝은 불안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는 분명,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나한테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건 하나마키 씨가 처음이에요. 쿠니미는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을 먹었다. 간지러워,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과 자신의 손을 포개 잡았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는 절대로 도망 갈 수 없다. 쿠니미는 뒤를 돌았다. 마주보고, 키스해달라는 후배의 요청에 하나마키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쿠니미는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달콤함이 몰려왔다. 

   분명, 사랑이었다. 사랑임에 틀림 없는 감정이었다.

[오이스가] 라일락 마파두부, 하얀 우산

  

   청춘 소설 같은 느낌을 쓰고 싶었습니다. 짝사랑 소재는 언제 써도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내리는 봄비처럼, 가벼워보이지만 촉촉한 사랑을 하는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었습니다.. 으으 짝사랑 하는 이케남은 언제나 옳아요!!!

  라일락 이파리를 씹으면 정말 첫사랑 같은 맛이 납니다. 5월은 라일락의 계절이니까 한 번쯤 입에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ㅁ<)/













***


가슴을 짓눌러 오는 햇살에 대한 이 그리움, 차라리 꽝꽝 어두웠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에게도 들키지 않는 시간 속을 부풀어만 가는 눈뜨지 못하는 세월.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중,





***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시합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경기 중에 후보 선수들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었다. 오랜 버릇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 은밀한 습관에 대해서, ‘성격이 나쁘다’고 평가하곤 했다. 이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의 이 관찰은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남의 불행을 깎아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후보 선수를 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배구 시합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리베로를 포함해서 단 일곱 명 뿐이다.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하고, 그럼에도 목소리를 높여 응원하는 모습은 충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가 박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후보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중요한 시합을 치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히 긴장하고 코트 앞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심지어 이와이즈미에게도) 귀찮았음으로, 이 취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빼고서 오이카와의 습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도 비슷했다. 오이카와는 코트 밖에 있는 ‘2번 군’을 바라보았다. 이 시기에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받는 3학년은 대부분 경험이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내 코트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올라왔다면 공식전을 치룬 적이 적을 게 분명했고, 넘친다면 1학년, 혹은 2학년부터 3학년을 밀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애석하게도 ‘2번 군’은 전자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목청을 낮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유려하게 서브를 넣을 때도, 카라스노의 서툰 리시브와 블로킹이 뚫려 점수를 잃을 때도 선수들을 응원했다. 오이카와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 날 연습시합은 아오바죠사이의 승리였고, 허탈한 표정을 짓는 일학년 세 명을 추스른 것도 ‘2번 군’이었다. 그는 한 번도 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있는 이상 출전은 어려울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지만 동정하진 않았다. 경기 중에 그들은 몇 번 눈을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굳은 느낌의 눈동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단한 라일락 나무를 떠올렸다. 

   이대로 그들의 인연이 끝났더라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그 ‘2번 군’의 별명은 ‘안타까운 소년’ 정도였을 것이었다. 그 날에는 비가 내렸다. 포슬포슬한 봄비였다. 부슬부슬 내리지만 온 살이 끈적거렸다. 연습경기 내내 땀을 흘렸기에 불쾌함은 더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부원들에게 한 번 샤워를 한 다음에 쿨-다운과 마무리 연습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여름에 한 발짝 걸쳐 있는, 늦봄에 내리는 비에 모두들 지쳤는지 군말 없이 샤워실로 향했다.

   매사에 의욕 없어 보이는 쿠니미가 먼저 샤워실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짧게 웃었다. 그는 뒤를 돌아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경기가 끝난 다음 체육관은 비 내릴 때의 적막감을 닮았다. 오이카와는 코트 한 구석에 검은색 스포츠백이 있음을 발견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라고 적힌 물건은 지금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귀찮아 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은 봄비를 다시 말하면 초여름 비가 된다. 가랑비는 여름에 걸맞게 점점 장대비가 되어갔다.


   오이카와는 스포츠 백을 어깨에 걸치고 체육관을 나섰다. ‘처음’ 연습시합을 가졌을 때와 같은 곳에 차가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는 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추적추적한 빗줄기가 그의 흰색 우산을 적셨다. 그리고 그 때, 오이카와는 낯선 울음소리를 들었다. 봄비에는 가려지지 않을 목소리였다. 두리번거리면서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카라스노의 ‘2번 군’이었다.

   2번 군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먹구름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합에 진 게 분한 걸까, 아니면 못 나간 게 분한 걸까. 오이카와는 작은 고민을 하면서 다가갔다. 분실물을 전해줄 요량이었다. 그는 짙게 내리는 봄비를 막아주었다. 저기, 감기 걸려. 라는 목소리에 그는 뒤를 돌았다. 우는 걸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는 한참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얼굴에 비 잔뜩 묻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닦았다. 눈물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 말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승자가 패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 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오이카와는 만약 오늘 연습시합에서 아오바죠사이가 졌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2번 군의 손에 우산을 쥐어 주고, 어깨에 스포츠 백을 매 주었다.

    고마워, 하고 그가 입을 땠다. 아까 목이 터지라 응원하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오이카와 씨는 친절하니까, 하는 말에 2번 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감기 걸리니 어서 돌아가 보라고 말하면서 2번 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너 맑은 날에 만나자, 오이카와는 괜히 ‘너’ 라는 말에 힘주어 발음했다.

   너, 그리고 너였다.

   2번 군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이카와는 비를 맞으며 두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2번 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의상 짓는 표정이라고 치기에는 좀 더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 사이에 내리쬐는 햇볕을 떠올렸다. 봄의 끝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오이카와는 제 어깨를 쓰다듬으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


   오이카와 토오루는 봄의 끝에 감기에 걸렸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을 겨우 피해갔다는 마츠카와의 말에 그는 그저 웃었다. 한 번 빨아 말린 연습복에서는 그 날 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육관 한 구석, 의자에 앉아 팀원들의 연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을, 비 내리는 그 곳에서 파생되는 햇살에 대한 그리움을.

   봄과 여름 사이에 끼인 그 애매한 계절에 찾아오는 감기란, 보통 며칠 앓고 끝나는 것이라 오이카와는 그의 이 풋사랑-사실 사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이었지만-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살랑살랑 내리는, 포슬포슬한 봄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 감정이 묽게 희석되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봄비란 언제든 장대비로 몸을 바꾸어, 피기 시작한 꽃잎마저 낙하하게 하는 것이었다. 삼한사온이라는 봄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주말 연습을 하는 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하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 우산 잘 썼어. 라고 말하는 말간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2번 군은 그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동백 같기도 했고, 언젠가 받아본 꽃송이가 풍성한 꽃 같기도 했으며 5월 말에나 피는 이팝나무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모든 꽃송이의 이름을 그에게 붙이고 싶었다. 그럼, 하면서 그가 손을 들자 오이카와는 잠깐만,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2번 군’이 뒤를 돌았다. 그에게서 라일락 섬유 유연제 향이 나서, 오이카와는 그를 마음속으로 ‘라일락’이라 불렀다. 이름을 모르는 탓이었다.


   “나 그날 너 때문에 감기 걸렸어.”

   “저런, 좀 미안하네.”


   라일락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표정은 ‘왜 그걸 나에게 말하지?’ 라는 생각을 여실히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뭔가 더 말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술은 오물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뱉지는 않았다. 그의 라일락은 음, 하고 고민하더니 나중에 마파두부라도 먹으러 가자, 하고 제안했다. 라일락과 마파두부는 별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 이름은 알아?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카게야마한테 번호 물어봐. 그의 라일락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았다.


   2번 군에게 있어 오이카와는 별로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잘 있어 오이카와-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봄비처럼 그의 얼굴에 닿았다. 봄은 점점 여름이 되어가고, 온도는 서서히 높아지고, 하늘은 파랗고 더 파래질 것이었다. 포슬거리는 늦봄비가, 장대처럼 쏘아 붙이는 초여름비가 되는 것 같이 오이카와의 미미한 풋사랑은 그 날 하얀 우산에 맺힌 빗방울마냥 살랑거리며 몸집을 키워갈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뒷문에 주저앉았다. 작은 문을 통해 나가 한 숨 돌리려던 쿠니미가 오이카와가 있는 걸 보고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고, 쿠니미는 대담하게 그가 있는 문을 빠져 나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맑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어두운 비를 희망했다. 다시 한 번 우산을 건네주며 말을 붙이고 싶었다.

   그 날처럼 울면서 받아줄까, 상쾌한 웃음을 터트려줄까.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면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쿠니미야, 하고 그가 말을 걸었다. 쿠니미는 네, 하고 대답했다.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그는 라일락 잎사귀의 맛을 아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음, 하고 고민하다가 안다고 대답했다. 그게 뭔데?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핀 라일락 향을 맡으며 물었다.


   “첫사랑의 맛이요.”


   쿠니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오이카와는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쿠니미의 앞으로 걸어가 라일락 잎사귀 한 장을 땠다. 그 날, 같이 봄비를 맞던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에 잎을 넣었다. 첫사랑의 맛이 났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쿠니미야, 토비오 전화 번호 알아?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원하면 졸업 앨범을 뒤져보겠다고 말했다. 저 보다는 킨타이치가 가능성 있을 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이카와는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았다. 5월의 끝이 오기 전에 비가 한 번 더 내렸으면 했다. 그의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몽글몽글하게 부풀었다.


   봄비가, 봄비가, 봄비가, 그리고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카게스가] 너 ; 반짝반짝 빛나는,

   시린님이랑 연성교환 하기로 했던 카게스가 동갑AU입니다. 뭔가 둘이 동갑이라면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따라가느라  힘들어 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그가 약한 모습을 보여 줄 때 마다 점점 좋아하게 됐고, 카게야먀는 스가와라의 노력이 효율없다고 생각하다가, 그가 의외로 강하다는 걸 알면서부터 폴인럽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참 트위터 주소가 또 바꾸ㅣ었어요.... 52sugar22daze에서 52kawa322daze입니다... 더 이상 계정 옮길 일이 없었으면 싶네요! 



 





***


언덕이 요구하는 것은

발끝을 위로 하고 걸으라는 것과

숨가쁜 순간을 몇 번이고 넘기라는 것, 그리고

남기고 온 발자국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

―「말들이 요구하는 것」中




***


   별을 보는 걸 좋아했다. 반짝이기 때문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거리에서 조용히 호흡하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삼월 하늘에 아직 겨울이 걷히지 않았는지 오리온자리의 허리띠가 보였다. 그는 시선을 위로 올리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었다. 정돈되지 않았기에 발치에 돌이 밟혔다.

   스가와라는 시계를 확인했다. 버스 막차가 간당간당했다. 그는 아즈마네와 다이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집에서 신세지는 것은 미안했다. 염치를 아는 남자였기에 그는 길을 걸었다. 비포장도로를 십 분 쯤 걷다가 시가지가 나오면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삼십분을 걸으면 도착하는 길이었다. 귀찮음을 감수하면 충분히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스가.”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별의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걸음을 멈춰 섰다. 카게야마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상당한 거리를 뛰어 온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카게야마의 입술은 까마귀 부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유니폼 위에 대충 걸친 교복이 웃겼다.

   삐졌어?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글쎄, 하고 대답했다. 그의 얼굴이 단박에 어물거렸다. 사와무라나 아즈마네와 달리 그는 좀 놀리고 싶은 매력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리온자리의 허리띠와 양 팔, 양 다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깝고도 먼 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까웠고, 하늘에 걸려있다는 점에서 멀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유니폼을 바라보았다. ‘4’번은 에이스 스파이커의 번호였다. 주전 세터가 가질 번호가 아니었다. 그는 3학년에 올라 온 카게야마가 유니폼을 받던 날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그와 정확히 두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 두 걸음은 오리온자리와 같았다. 감독과 시미즈에게 4번을 받겠다고 말했다며 수줍게 고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스가와라는 예뻐 할 수가 없었다.


   “토비오 난 네가 왜 4번을 받겠다고 한 지 모르겠어.”

   “또 그 이야기야?”

   “어. 너도 알다시피 나 되게 쪼잔하거든.”


   스가와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천재랑 삼 년을 같은 포지션으로 있다 보면 느는 건 능청스러움이었다.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키타가와 제 1중의 세터도 (놀랍게도 카게야마가 주전이 아니었다.) 능청스러웠을 거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의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못생김으로 물드는 광경은 웃기기까지 했다. 

    차 끊겼지?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나머지 연습 봐 주느라 늦었잖아, 하고 말하니 그는 미안하다고 곧바로 사과해왔다. ‘남자 친구랑 학교에 단 둘이 남았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밤이었다. 스가와라는 모른 척 손을 뻗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손을 마주잡은 카게야마가 그의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키 차이가 나는 게 어쩐지 분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의 앞에 있었다. 키도 배구도, 실력도 체격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별이었다. 가까이 있지만 너무나도 먼 별. 스가와라는 별에 줄을 매달아 손을 잡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놀이동산에서 파는 헬륨풍선 같이 가벼워서 손을 놓으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잡은 손은 따듯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얼기설기 엮어, 손바닥 위쪽에 힘을 주었다. 이런 관계가 된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였다. 초삼월 밤은 추워서, 미미한 입김이 났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둘은 같은 학년임에도 멀었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와 친했고, 카게야마는 아즈마네와 가까웠다. 연인이라는 카테고리는 의외로 얄팍할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그게 불편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카게야마의 미간을 눌렀다. 얼굴 좀 풀고 말하란 충고에 그는 이번엔 입술을 내밀었다. 카게야마의 표정은 매우 다이나믹하게 변화하곤 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다. 그는 괜히 깨금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서툴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이 닿은 후, 카게야마의 볼에 홍조가 돋았다. 스가와라는 모든 게 완벽한 제 동기가 자신에 의해 당황하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는 괜히 콧노래를 불렀다. 반칙이야, 라고 외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제법 다급했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를 공정하게 심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가와라는 괜히 그의 팔을 이끌었다. 갈 길이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동갑이기 때문에 좋아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초조했다. 그와 걸어가는, 말 없는 하굣길에서 스가와라는 후배인 카게야마를 상상했다. 차라리 조금 더 차이가 났다면 초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숨이 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덕길을 쫓아가느라 상처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살, 아니면 한 살 정도라도 앞걸음에 있었더라면 그에게 순수하게 사랑만 해주지 않았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발 앞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를 차냈다.

   주전경쟁에서 조금 더 자유로웠을 수도 있다. 배구를 좀 더 즐겁게 했을 수도 있겠고, 대학도 배구로 진학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스가와라는 그와 자신의 나이차이가 나서 가질 수 있는 이득을 계산했다. 카게야마는 말 없는 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입을 오물거렸다. 스가와라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눌렀다. 후배였다면 카게야마가 망설이는 구석을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좀 아쉬웠다.


   “무슨 생각 해.”

   “네 생각.”

   “내가 옆에 있는데?”


   카게야마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스가와라는 그럴 때가 있는 거라면서 손을 끌었다. 오리온자리는 여전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먼 것도 같고 가까운 것도 같은 별자리였다. 스가와라는 하품을 했다. 졸려?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꼬리에 작은 눈물이 맺힐 만큼 잠이 왔다. 카게야마는 버스 타고 가지 그랬냐는 말을 하려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실수 한 걸 아는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연하일 경우 생기는 이득을 계산하다가 곧 그만 두었다. 그는 오리온자리의 허리띠를 다시 보았다. 저렇게 평행선상에 있는 게 좋을 때도 있었다. 그는 괜히 카게야마의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그의 딱딱한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공을 올리는 손이었다.


   “더 이상 배구 안 할 거야?”


   카게야마가 물었다. 대학 진학 후의 일을 묻는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구로 진학하는 건 이미 무리였다. 그는 대학을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알기 쉬웠다. 스가와라는 그가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스가, 하고 다시 카게야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애절했고 먹먹했다. 재능 없는 사람에게 ‘같이 하면 즐겁다’는 이유로 배구를 강요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뒤틀린 감정을 별님은 모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입술을 내밀었다. 왜 그를 좋아하게 됐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사랑은 언제나 퐁퐁, 솟아났다. 그는 그 처음을 찾으려다 이내 그만 두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스가와라의 입술에 닿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까 준 것을 되돌려 주려고 한 것 같았다. 불안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연하는 절대로 안 되겠네, 정도를 생각하다가 웃었다. 역시 자신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이 어울린다고 확신하며,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배구 말고, 네 옆자리는 안 그만 둬.”

   “스가.”

   “대학 너랑 같이 갈 수도 있다는 뜻이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낙제점에 대해 말했다. 카게야마는 어차피 배구로 갈 거니까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언제 들어도 얄미운 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날의 하늘이 너무나도 깨끗해서 별이 잘 보였다. 카게야마와 함께 걷는 밤하늘 아래가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별이 예쁘네, 스가와라는 그들이 같이 걸어온 길을 보며 말했다. 너무나도 소중해서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시선을 따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같은 학교라서 좋았고, 같은 학년이라서 좋아. 그의 목소리에 따라오는 사랑에, 카게야마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불안감은 포옹에 어느 정도 사라졌다.


   “내가 지금 제일 원하는 말 해줘.”

   “우리집에서 라면 먹고 가라.”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입력 된 대답’을 하자 선심을 쓰는 듯 그래, 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그럼 여기로 가면 안 되잖아, 라고 말하며 카게야마는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이 아니라, 인도로 스가와라의 손을 이끌었다. 굳게 잡힌 손과 손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스가와라는 제 손바닥이 별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카게야마는 언제 봐도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게, 좋았다. 카게야마는 유니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4는 2가 두개니까, 세터 두 명의 번호라는 나름의 뜻에 스가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역시 너희 집에서 라면 못 먹고 가겠어. 그의 말에 카게야마는 한 번 말한 이상 못 무른다면서 스가와라는 제 품에 가두었다. 따듯한 온기가 닿는 느낌은 나쁘지 않아서, 스가와라는 그저 별이 예쁘네 하고 딴청 밖에 부리지 못했다.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