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2015. 3. 15. 22:59
언제나처럼 섹피AU입니다. 벌써 네번 째 글이네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매번 적는 것도 번잡스러워, 카테고리를 구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섹피 AU는 :3 카테고리에 올라옵니다^//^!!!! 뭔가 일을 크게 벌리는 것도 같지만 상관 없지 않을까요!
오이카와랑 쿠니미는 합이 좋다고 생각해요. 오이카와의 딸 같은 쿠니미가 좋습니다. 섹피AU에서 둘은 냉혈동물 사촌지간입니다. 예전부터 앗쨩과 토오루라고 불러온 탓에 호칭을 교정하느라 나름 애 먹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
"그래서 그 날 맛키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쿠니미의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끓는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닿았다. 잼을 만드는 것은 쿠니미의 오랜 취미였지만, 오이카와는 그가 부엌에 있는 광경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귀한 집 도련님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란 나이는 부엌에 있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부엌방문을 명백히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는, 부엌에서 쿠니미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잼을 졸인다'는 쿠니미의 취미는 불을 사용하는 놀이였다. 그의 여린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맨 검은색 앞치마 리본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코끝 까지 밀려오는 단 향기에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쿠니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바닥이 보이는 레몬청을 꺼냈다. 다시 만들어 병을 채워야 했다. 이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레몬청 국물과 레몬 몇 가닥을 딸기가 졸여지는 냄비 안에 아낌없이 넣었다. 그렇게 하면 맛있어? 오이카와가 물었고 쿠니미는 응, 하고 대답했다.
"너무 달면 먹기 불편하니까."
"그 말은 앗쨩이 맛키를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 할 수 있나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레몬청을 딸기 과육과 잘 섞었다. 그는 과육이 부서지지 않게 신경 써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저번 사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끈질긴 말이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좌우명인, '치려면 꺾일 때 까지 때려라'를 떠올렸다. 그는 지나치게 끈질겼고, 쿠니미의 인내심은 의외로 얄팍했다.
하지만 그 날, 쿠니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오이카와가 흥미로워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급하게 밖으로 나간 다음, 가로등 아래서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하나마키에게는 숫기가 없었고, 쿠니미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이야기를 진행 할 의지가 없었다. 쿠니미는 이 맥 빠지는 사건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질 고민했다. 그의 고민처럼 잼에서 보글보글, 작은 거품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소녀처럼 기대했고, 쿠니미는 그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는 기분을 양껏 느꼈다. 오이카와는 둘이 손 하나 잡지 않았음에 분노했다. 너희 합숙 때는 끌어안고 있었잖아!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일은 명백한 사고였어요.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기대감을 꺾어버리며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플라스틱 볼에 담았다.
쿠니미는 그 때를 떠올렸다. 하나마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따듯한 체온이 번져왔고, 그의 옆모습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오이카와 씨는 둘이 키스라도 할 줄 알았어. 그는 마법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한숨 쉬었다. 쿠니미는 얼음 볼에 차가운 물을 담았다. 잼이 다 졸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닌걸요."
"하지만 쿠니미야, 너 맛키 좋아하잖아."
"글쎄요? 배구부 안에 도는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면 토오루도 알고 있다시피 그냥, 농담이잖아요."
쿠니미는 별 일 아니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뜨거운 냄비를 얼음물 위에서 식혔다. 쿠니미는 예쁘게 씻어놓은 유리병 세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네 거.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거야? 오이카와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킨타이치라도 주려고?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잼이 식어 병 안에 들어갈 때 까지 오이카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쿠니미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진지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보면서 쿠니미는 '제 편 만들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정략결혼 하기 싫어요? 쿠니미가 뜬금없는 소리를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오이카와는 절대 하기 싫다면서 식탁 위에 엎어졌다.
결혼은 온혈동물이랑 하고 싶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야기했다.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정략결혼 상대나, 지금 애인이나 둘 다 포유류라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는 냄비를 들어 수건 위에 놓았다. 물기를 잘 따르고 쿠니미는 딸기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숟가락으로 잼을 떠서 병 안에 넣었다. 허공만이 차 있던 유리병에 붉은 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쿠니미야."
"네, 토오루."
"그 '농담'에 기분 나쁜 적은 없었지?"
오이카와는 제법 날카로운 곳을 찔러왔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대답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마키 씨는 제법 멋있는 선배잖아요. 쿠니미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골라 썼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쌜쭉 내밀었다. 하나마키 씨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쿠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쿠니미는 냄비를 물에 담갔다. 다음 잼을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냄비를 꺼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냄비였다. 우유와 생크림이 냄비 안에 가득 담겼다. 쿠니미는 그게 느리게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처럼, 혼합물의 온도는 천천히 오르기 마련이었다. 오이카와는 딸기잼이 들어있는 병 세 개를 바라보다가 하나마키가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완전히, 실수 한 것 같은데 어쩌지. 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주어도 실수의 대상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오이카와는 그게 쿠니미 아키라를 의미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잡은 손, 어둠의 장막이 내린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싶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느낌이었니?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말한다면 로마의 휴일 같은 느낌이었겠죠, 하고 대답했다.
"지루한 느낌인가?"
"토오루, '로마의 휴일' 본 적 없죠?"
"그렇지."
나 흑백영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니미는 끓기 시작한 우유와 생크림에 티백을 넣어 우려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았다. 언제 한 번 봐 봐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어째 짐작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짙은 장막 너머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없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마키 씨가 시켰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게 수상하다고 말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홍차가 우러나는 색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눈치도 빠르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 보았다. 그 날에 있던 이야기는 무덤 까지 가져갈 거에요, 쿠니미는 놀리는 듯 말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뱀처럼, 그는 모든 질문을 유연하게 피해갔다. 이런 '밀당'으로 사교회에 꾸준히 나갔으면 벌써 결혼 하고도 남았다면서 오이카와는 혀를 끌끌 찼다.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오이카와가 내뱉는 질문들 보다, 그에게 선물할 잼이 더 중요했다.
쿠니미는 티백을 꺼내고, 새 티백을 넣어 우렸다. 그는 설탕을 부었다. 하얀 설탕이 갈색에 진하게 녹았다. 쿠니미는 숟가락으로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설설 저었다. 잼 만드는 거 재밌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녹아들어 고체로 굳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숟가락에 잼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그는 설탕을 더 넣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것도 맛키와의 사랑에 적용 할 수 있는 말인가요?"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녹아드는 설탕을 바라 볼 뿐이었다. 얼그레이 잼을 만들 때의 포인트는, 설탕과 홍차와, 우유와 생크림이 캬라멜 화 되지 않도록 천천히 저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칭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모두 무시했다. 약한 불에서 액체는 천천히,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그레이 잼을 담을 그릇을 고민했다. 전해줄지 말지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왕 줄 거라면 예쁜 그릇이 좋았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을 찾아 쿠니미는 찬장을 열었다. 병 위쪽에 레이스 모양을 한 종이를 둘러야 할지, 혹은 만든 날짜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를 붙일지, 쿠니미는 깊게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위한 포도 잼을 만들어 달라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쿠니미는 포도는 없다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고 보니까 맛키가 얼그레이 스프레드를 좋아한다던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예요?"
쿠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만들어 주라는 뜻이잖아! 라며 되려 화를 냈다. 쿠니미는 그의 모든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급한 불은 잼을 태우기 마련이었다. 쿠니미는 그에게 제 앞에 붙은 불이나 끄라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잼이 느리고, 또 느리게 끌어 올랐다. 잼이 다 되면 오이카와는 식빵을 굽자고 말했고, 쿠니미는 이미 바게트를 사 놓았다고 잘라 말했다.
흰 바게트 위에 올린 딸기잼은 최고야, 오이카와는 반드시 무염 버터에 구워달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금새 달아오른 손을 찬 물에 툭툭 털면서 그러겟다고 대답했다. 계속 불 앞에서 냄비를 저었던 지라, 손이 화끈거리게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하품을 했다. 왜, 만들었을까. 약간의 후회가 그의 잼 안에 풍덩, 빠져 유영했다.
***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하나마키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라커룸 안에 있던 세 개의 유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병에 붙어 있던 단정한 글씨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마키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어줍잖게 넘겨 짚었다가 실수하기 싫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 보다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기도 싫었다. 그는 잼 병을 쓰다듬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것은 쿠니미었다. 하나마키는 머릿속에 든 망상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쓸모 없는 일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얼굴을 쓸었다. 그 날 밤도 그런 실수를 했다. 이름 모를 정원수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에서, 그는 쿠니미를 흰 벤치에 앉혔다. 달은 동그랬고, 둘이 나눈 이야기들은 의미없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사소한 말 속에서, 하나마키는 바게트가 좋다는 말과, 그 위에 잼을 바르고 계란을 반숙 프라이해서 올리는 걸 사랑한다고 말했다. 쿠니미는 매우 소박한 식단을 보며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뿐이었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도 모자랄 타이밍에서 거나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 문제였다. 하나마키는 멋있는 말을 해야 한다던 그 때의 강박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남자아이 앞에 처음 선 것처럼 행동하던 자신을,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뛰는 심장을 넥타이로 누르고, 잘 맞는 정장으로 옭아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나마키는 딸기 잼과 얼그레이 잼, 레몬청을 끌어안았다. 쿠니미야, 나 어떡하니.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부끄러운 말이 들려왔다. 사교회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그의 번민이 문가에 서 있었다. 쿠니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마키가 안고 있는 세 개의 잼병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가득 차 있는 잼과 청은 레이스 모양의 종이와, 제조일자를 적은 마스킹테이프로 장식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그 것을 흥미롭게 보는 듯 했고, 하나마키는 죽어버리고 싶었다.
여자한테 받았어요? 인기 많네요. 쿠니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는 변명하려는 자신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 쉬었다.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하는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누가 물어 봤대요? 쿠니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봄 날씨는 따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잡아줄 수도 없는 포근함이 번져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지 않았다. 쿠니미는 락커룸을 열었다. 하나마키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락커룸에 유리병 세 개를 넣었다. 한숨 밖에 쉴 수 없는 아침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얼굴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하나마키는 자신이 내린 답을 쿠니미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건 그의 전공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괜히 옷을 갈아입고 먼저 라커룸을 나섰다. 뒤에서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도 같았지만, 그는 눈부시게 부서지는 아침이 보여주는 환청이라 생각하며 얼른 코트로 나섰다.
하나마키가 나간 자리에 오이카와가 인사하며 들어왔다. 쿠니미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제 만들었던 거 다 맛키 거였지? 오이카와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너무 감추는 것도 재미 없을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하나쿠니] 어느 밤 (0) | 2015.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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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점심시간, (0) | 2015.02.26 |
[하나쿠니] 아침 (0) | 2015.02.25 |
:D | 2015. 3. 15. 22:29
스가른 전력에 [사탕]이라는 주제로 참가했습니다.
오이카와를 짝사랑하는 슈가 군이 보고 싶었습니다 ^//^!!!! 남자답게! 서툴게! 고등학생!답게 짝사랑하는 슈가가 좋습니다. 사랑은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오이스가 연애 해~ 사랑 해~!!!
***
첫 홍삼사탕의 기억은 ‘리시브는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다’는 설교를 마친 후였다. 오이카와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말을 한 다음에 멋있게 뒤를 돌았고 몇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다 넣었을 때 쯤, 그는 후두부를 무언가가 자신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멋없게 다시 뒤를 돌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봉지를 들었다. 검은색 포장지에, 붉은 홍삼이 그려져 있었다. 난데 없는 ‘홍삼사탕’의 등장이었다. 그가 어리둥절 하면서 홍삼캔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자, 까마귀 무리에 있던 한 사람이 소리쳤다. 아까 벤치 쪽에 있던 멤버였다.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홍삼사탕의 달짝지근하고 늘그수레한 맛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오히려 상쾌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이카와는 사탕으로 맞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다시 뒤를 돌았다. 스가 선배 후두부 서브는 너무하잖아요, 하면서 스님 머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까마귀 쪽에서 들려오는 여러 목소리들은 팝콘 같은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뒤를 돌았다. 까마귀들은 무리지어 교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탕을 던진 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상큼하게 늙은 군. 상큼-늙은군. 애늙은이군. 오이카와는 그의 애칭을 고민하면서 뒤를 돌았다. 포지션이 어떻든 코트 위에서는 통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노을이 그의 머리카락에 진하게 들었다.
오이카와가 두 번째 홍삼사탕을 받은 것은 연습시합 때였다. 여름 인터하이가 시작되기 전에 ‘카게야마’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 싶다는 감독의 고집 때문이었다. 같은 지구에 있는 상대와, 인터하이 한 달 전에 연습시합을 하는 건 ‘불문율’을 어기는 행위였지만, 연습시합은 의외로 쉽게 성사되었다. 아오바죠사이는 3세트를 해서 두 번 연달아 이겼고, 그 ‘상큼 군은 연습시합의 스코어보드를 넘기는 역할이었다.
여전히 리시브가 약하다면서 카게야마를 보며 웃자, 얼굴을 찌푸리는 건 ‘상큼-늙은’군이었다. 그는 툴툴 거리면서 서브를 넣는 폼을 취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비닐봉지는 그의 이마를 정확히 강타했다. 허둥지둥하며 손을 밑으로 내려 받으니, 그 곳에는 ‘홍삼 사탕’이 있었다. 여전히 늙은 취향이었다. 오이카와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스가와라 선배! 카게야마는 그의 뒤를 곧장 따라 갔다. 오이카와는 그의 건방진 후배를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뒤를 쫓아갈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취향이 늙은 상큼한 소년’의 이름이 ‘스가와라’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손에 홍삼 사탕을 쥐어주었다. 이와는 쉬는 날에 방에서 배만 지지고 있는 늙은 취향이니까, 이런 거 잘 먹지? 라는 말과 함께.
이와이즈미는 그의 가슴팍에 홍삼 사탕을 던졌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웃음을 터트린 가운데, 오이카와는 자신의 가슴에서 떨어지는 사탕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저번에 ‘받은’ 홍삼 사탕을 먹지 않은 채였지만, 왠지 챙겨가야 할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짐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스가와라’를 회상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리시브가 약하다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싫나 짐작 할 뿐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세 번째 사탕의 기억을 떠올렸다. 역 앞 분수대에서 받은 물건이었다. 상쾌 군도 약속 있어? 라고 묻는 말에 응 있어, 하고 대답하면서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그것 또한 먹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사탕을 받을 때 마다 기분이 멜랑콜리 했다. 그저 스가와라가 그 사탕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짐작 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걸 주는 건 날 좋아한다는 뜻인가? 오이카와는 철없이 생각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홍삼 사탕’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고, 하나마키는 좋아했다면 좀 더 상큼한 걸 던졌을 거라고 대답했다. 마츠카와는 그래도 그 홍삼사탕 군이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고, 쿠니미는 어찌 되었든 그걸 먹지 않는다는 건 오이카와가 상쾌 군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다.
신경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섯 번째 홍삼 사탕을 만졌다. 역 앞 분수대에서 세 번째 사탕을 받은 그 날, 그는 네 번째 사탕도 받았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둘은 옆자리에 앉았다. 별 이야기를 할 사이가 아니었기에, 둘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Maroon 5의 ‘Sugar'를 듣고 있었고, 그의 이름에 들어가는 ‘스가’가 ‘슈가’와 비슷한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내린 건 ‘홍삼사탕 군’이었다. 그는 내리기 전에 주머니에서 손을 꼬불거렸다. 그는 후드 집업의 주머니에서 검은색 사탕을 꺼냈다. 예의 그것이었다. 너 이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오이카와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너 진짜 눈치 없구나,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을 때, 버스가 멈췄다. 스가와라의 대답은 ‘환승입니다’ 라는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오늘 받은 홍삼사탕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경기가 끝나고 받은 것이었다. 그는 버스에 타기 전 홍삼사탕을 건넸다. ‘서브’가 아니라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오이카와가 내민 두 손에 그는 사탕 여러 봉지를 쏟아두었다. 나 홍삼 사탕 싫어해, 오이카와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새로운 종류의 이지메인가요? 그가 눈치 없이 물었고, 상큼 군은 멋대로 생각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홍삼 사탕이라니 너무하잖아.”
“너무 해?”
스가와라는 그의 말꼬리를 잡고 샐쭉 웃었다. 그 동안은 낱개였는데, 지금은 왜 봉다리 채인데? 오이카와가 다시 물었다.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그들의 머리카락에 들어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정수리가 둥그렀고, 얼굴은 좀 붉은 것도 같았다. 지기 시작한 해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단박에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의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야 다른 사탕은 여자애들이 많이 주잖아? 스가와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나도 상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눅진거리는 홍삼젤리, 홍삼사탕의 느낌이 났다. 너 꼭 이거 같아. 오이카와가 말하자 스가와라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홍삼 사탕이야? 오이카와 씨는 우유 맛이 좋아.”
“그 편이 기억하기 쉬우니까?”
스가와라는 즉답했다. 오이카와는 어? 하고 물었다. 스가와라는 다시 똑똑히 말했다. 그 편이, 기억하기 쉽잖아. 그의 말은 노을처럼 느리게 오이카와에게 퍼지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보다 스가와라는 멀리 멀어져 있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 하면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그는 두 손에 가득 담겨 있는 홍삼사탕을 하얀 져지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그의 주머니가 잔뜩 울퉁불퉁해졌다. 스가와라는 여자애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는 입술을 쌜쭉하게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그가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스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다 갈게, 라고 그는 크게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 울림에서 마룬파이브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음들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그의 눈앞에 있는 ‘슈가’가 입을 땠기 때문이었다.
“홍삼 사탕은 스가와라 코우시이다.”
너 내 이름은 알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시인 건 지금 알았어. 그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진작 알려줄 걸 그랬다면서 웃었다. 여전히 상큼한 느낌이었다. 여름 한 가운데서 부는 바람 같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뭔가 자신이 대단한 말을 했다는 듯, 오이카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의 메타포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너무 어렵게 돌려 말했다.
“나 잘 모르겠어.”
“뭐, 별 할 말 없으면 간다.”
스가와라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그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기 스가 쨩, 하고 부르니 그는 지체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의 말은 입 안에서 머뭇거렸다. 맛없는 홍삼사탕을 혀 위에 올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갈 거야!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이 홀가분해 보였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핀치 서버로 나갔었던 첫 번째의 연습시합부터, 다섯 번의 홍삼사탕을 받을 때 까지 그는 나름의 은유를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스가와라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이 비유를 직관적으로 알아 챌 수 없었다. 멀어진 스가와라의 키가 더더 작아졌을 때 까지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그가 뒤를 돌았다.
야! 오이카와! 하고 악을 쓰는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어!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건강히, 잘 지내시나요!’를 외치던 절박함과 닮아 있었다. 그는 야구의 와인드 업 포즈를 취했다. 오이카와는 몸을 살짝 숙이고 두 손을 꽃처럼 펼쳤다. 포수의 미트 같은 손에 스가와라는 정확히 뭔가를 꽂아 넣었다. 먹어!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또 홍삼사탕이겠거니 싶었지만 잡히는 모양이 달랐다.
츄파츕스였다. 홍삼사탕과 딸기우유 맛 츄파츕스 간의 거리감에 오이카와가 당황 해 있는 사이, 스가와라는 멀리 달려가 버렸다. 검은색 유니폼 무리들이 파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오이카와의 뒷덜미를 이와이즈미가 잡았다. 오늘은 수거 물품이 적다?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져지 주머니 속의 홍삼 사탕을 보여주었다.
걔도 참 한결같다. 이와이즈미는 혀를 툴툴 찼다. 오이카와는 손에 쥔 딸기우유 맛 사탕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참 달았다. 매번 홍삼만 주더니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입에 넣은 사탕 꼭지를 잡아 뺐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섞인 달달함이 그의 입 안에 여즉 남아 있었다. 홍삼보다 꼭 세 배쯤 달달했다. 그 날 그는 내내 홍삼사탕과 딸기우유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쾌 군이 깨물어 먹은 사탕의 잔여물처럼 남아있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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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14. 22:19
하나마키 선배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쿠니미가 좋습니다^0^ 맛키의 연애 레벨이 100이라면, 쿠니미의 레벨은 한 10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맘을 감추고 쿠니미에게 덥썩덥썩 다가가는 맛키가 좋습니다. 이 뒤의 하나쿠니는 아마 곧 사귀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q^!!!
***
시작은 킨타이치가 가라오케에 가면 항상 부르던 노래였다.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이었다. 쿠니미는 문득 그 노래를 떠올렸다. 뜬금없는 일이었다. ‘부서질 만큼 사랑해도, 3분의 1도 전해지지 않아.’ 로 시작하는 느린 구간이 그의 혀 위에 사탕처럼 올라, 달달함처럼 굴려졌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르는 가사들이 눅눅하게 어물거렸다.
화장실에 간다던 킨타이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쿠니미는 아무도 없는 락커룸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박하사탕을 씹어 먹었을 때, 이에 남는 잔여물처럼 한 번 떠오른 음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 노래가 좋았다. 킨타이치가 불러도 ‘나쁘지 않은’데다가, 가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품을 했다.
6어서 집에 가서 자야 하는데 락커룸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요함은 상념을 불러오기 마련이었고, 쿠니미는 이 락커룸에서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생각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명백하게 졸음을 담고 있던 행동은, 그가 ‘그 일’들을 회상할 때 마다 ‘망설임’으로 모습을 바꿔갔다. 그는 뒷머리를 쓸었다.
“「얼마만큼 너를 사랑해야 이 마음이 전해지는 걸까」.”
쿠니미는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입 밖으로 냈다. 음이 없는 가사는 제법 시적으로 들리고, 하나의, 온전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바꾸었다.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제 락커 바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이름표가 들어 있었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쿠니미는 자신의 이에 찝찝하게 남은 선배를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마키가 건네줬던 레몬사탕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이지. 쿠니미는 그 관용 어구를 혀끝에서 굴려봤다. 인터넷에 따르면 어느 어린이 드라마의 유행어라고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먼 나라의.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 쿠니미는 그 말의 기원이 퍽 하나마키처럼 엉뚱하고, 그처럼 다정하며, 하나마키처럼 먼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 때도 지금처럼 고요했다.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조구치 코치는 쿠니미가 설렁설렁 뛴다고 말하며 나머지 훈련을 시켰고, 그 순간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하나마키에게 나머지 연습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카라스노에게 진날이었고, 코트 위의 카게야마가 웃고 있던 걸 본 날이었다. 마음이 뒤죽박죽했고 싱숭생숭하다는 것을 미조구치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입술울 쭉 내밀고 미간을 좁히고 있던 쿠니미에게 하나마키는 금세 다가왔다. 그는 긴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올렸다. 여자 친구예요? 쿠니미는 그렇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썸 타고 싶은 사람. 그는 쿠니미의 말을 정정하며 대답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마키는 제법 시원시원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두근거렸던 것도 같았다. 쿠니미는 핸드폰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인터넷검색창을 천천히 훑었다. ‘레몬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정보만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었다. 아무리 답을 찾아도 인터넷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쿠니미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림자처럼 다시 하나마키가 밀려왔다.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이었다.
쿠니미와 같은 포지션의 선배는 토스를 전혀 올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잔뜩 스파이크를 치게 해 주고, 점프하게 하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다면서 하나마키는 네트 반대편에서 서브를 넣었다. 공이 하나 둘, 늘어 갈 때마다 쿠니미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킨타이치는 이미 돌아간 후였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끊길 것 같았다.
체력이 이래 약해서야 어쩌누. 하나마키는 공을 주우며 말했다. 쿠니미는 코트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하나마키는 바지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소리’모드로 해놓은 핸드폰의 버튼음이 요란했다. 궁금해? 그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 나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하나마키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쿠니미에게 뭔가를 던졌다.
쿠니미는 뒤로 넘어지며 그가 던진 물건을 받아냈다. 사탕이었다. 노란 사탕. 생각이 많을 땐 레몬 사탕이라는 말이 따라왔다. 입에 넣으니 싸한 민트와 함께 상큼한 맛이 번져왔다. 맛있지? 그가 눈웃음치며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저 사탕 별로 안 좋아해요, 라는 퉁명스러운 말에 하나마키는 나도, 라고 대답 해 왔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여자가 이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멋있게 주려고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건데. 하나마키는 발랄하게 사탕의 기원에 대해 말했고, 쿠니미는 그 말이 모두 듣기 싫었다. 그의 뚱한 얼굴에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생각 많은 표정이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하나마키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쿠니미의 얼굴에 짙게 내렸고, 하나마키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쁘네.”
그리고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쿠니미는 몸을 떨었다. 그 때의 목소리가 번져 온 탓이었다. 그 말을 생각할 때면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사탕 한 개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레몬 사탕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 사탕. 쿠니미는 그것을 까 입에 넣었다. 그녀에게 줄 사탕을 하나마키는 꼭 쿠니미에게 건네곤 했다. 자신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쿠니미는 사탕을 혀 위에서 굴렸다. 그것은 키스와 닮은 행위였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눈 위에 그림자가 번져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하나마키와 키스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의 혀에서는 레몬 사탕 맛이 날 것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슈크림 같은 스위츠보다는 민트가 섞인 싸인 향이 ‘쿠니미 아키라와 하나마키 타카히로와의 키스’에 어울렸다.
숨이 찬 느낌에 쿠니미는 눈을 서서히 떴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 그 백열등 빛이 쿠니미의 눈 속으로 깊게 쏟아져 내려왔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서 사탕 맛이 났다. 기분이 나빠졌다. 쿠니미는 그의 주머니에 여전히 레몬사탕이 들어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한다던 레몬사탕.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레몬사탕.
쿠니미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레몬사탕이 없어지길 바랐다. 그 대신 그 주머니 안을 소금 캬라멜이 가득 채우는 상상을 했다. 더 이상 그가 스파이크를 위해 점프할 때, 껍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의 소원은 단순한 ‘바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차올랐다가, 금세 메말라갔다.
사랑은 레몬사탕 맛으로 왔다. 쿠니미는 입 안에 든 둥그런 사탕을 세게 깨물었다. 이 사이에 사탕이 껴서, 그 자리에 상큼함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혀로 그 부분을 설설 문질렀다. 정말로 키스하는 느낌이 들어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고, 당황스러움에 멈추어 섰다. 그 곳엔, 하나마키가 있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백열등 빛이 들어 반짝였다. 나 보려고 남아있었어? 하나마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쿠니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서 있을 때면 요령을 부릴 수 없어졌다. 쿠니미는 제 그림자 위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런 쿠니미를 보면서 짧게 웃었다.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는 입술위에, 쿠니미는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그의 까칠까칠한 입술과 립밤을 잔뜩 바른 자신의 입술이 부벼지는 공상은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분홍색 이름표가 붙은 락커를 열었다. 쿠니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 이 시간대면 버스 끊기는 거 아냐?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킨타이치가 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부실 안은 하나마키가 락커룸 안의 물건을 정리하는 소리가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락커룸을 천천히 정리하다가,
“걔 내가 보냈어.”
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네? 하고 되물었다. 하나마키는 너랑 같이 돌아가는 게 질투 나서 보냈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정말요? 하고 묻는 쿠니미의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럼, 하고 대답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문득 뒤를 돌아 쿠니미에게 사탕을 던졌다.
아직도 이에 남아있는 것과 같은 맛이었다. 생각이 많을 땐 레몬사탕, 이라고 말하면서 키득거리는 하나마키의 뒷모습을, 쿠니미는 진득하게 눈에 담아냈다. 왠지 네 앞에 있으면 장난을 치고 싶더라. 그는 능글맞게 말했다. 쿠니미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여자 친구랑은 잘 돼가요? 그가 다시 물었고, 하나마키는 썸 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의 마지막 부분은 “부서질 정도로 사랑해도, 3분의 1도 전해지지 않아. 순수한 감정은 헛돌기만 할뿐, 사랑하는 말조차 할 수 없는 내 마음.” 이란 가사로 자리한다. 쿠니미는 그 노래를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고, 쿠니미는 그의 농담에 멋대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짝사랑이란 깊은 수렁에서 쿠니미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생각이 많아?”
“네.”
“레몬사탕 하나 더 줄까?”
하나마키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탄 가슴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내가 락교 보낸 게 그렇게 서러워 쿠니미야? 하나마키가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쿠니미는 아까 먹은 레몬 사탕이 이에 남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 숨기는 거 어색하구나?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완고한 표현에 하나마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제 후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운 입술에 짙게 바른 색 없는 립밤이 반짝였다. 하나마키는 그의 볼과 입술을 설설 쓸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같이 갈래?”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레몬 사탕 하나를 더 던졌다. 착한 아이에게는 레몬사탕이지, 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여자 친구에게나 잔뜩 주라는 말을 내뱉었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은 말이었다. 하나마키는 키득키득 웃었다. 쿠니미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정말, 울고 싶었다.
같이 갈 거지? 하나마키가 다시 물었다. 네, 하고 쿠니미가 다시 대답하자 그는 주머니에서 캬라멜 하나를 까서 쿠니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너 이거 좋아한다며? 하고 묻는 목소리에 쿠니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는 여우의 심정을 백분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탕과 다른 진득한 맛이 혀 안에 감겨왔다.
밤이 어두우니까 손잡아 줄게. 하나마키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쿠니미는 그의 빈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너 손 부드럽구나? 하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게 가깝게 들렸다. 쿠니미는 손과 손이 얽힌 자리가 녹아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였다.
“누가 그러는데 단거에 소금을 치면 더 달콤한 느낌이 든데.”
하나마키가 문득 말했다. 맥락 없이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서 소금 캬라멜을 만드는 건가요? 쿠니미의 어색한 말에 하나마키는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웃었다. 하나마키는 날이 춥다면서 그의 재킷 주머니에 쿠니미의 손을 끌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사탕 봉지가 손끝에 닿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로등 길게 늘어진 밤길을 걸으면서 쿠니미는 매우 불쾌했고, 하나마키는 실실 웃고 있었다.
헤어지는 골목에서 하나마키는 먼저 멈추었다. 생각이 많은 표정을 하고 있네, 하면서 웃는 모습은 여전히 멋있었기에,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고, 쿠니미는 바짝 얼어 입술을 깨물었다. 고운 입술이 다 망가진다고 말하면서 하나마키는 그의 주머니 속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넣었다. 쿠니미는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정말이지 엉망인 하교였고, 생각만 많아지는 밤이었다.
“내일 봐.”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니미는 왜 먼저 갔냐는 킨타이치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뒤를 돌았다.
하나마키 타카히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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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2015. 3. 12. 01:03
아침 과, 점심시간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간보는...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여시 같은 쿠니미와 은근히 눈치 있으면서도 둔한 하나마키 씨가 좋습니다...☆★
***
“그래서 오늘 같이 갈 거야?”
오이카와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상 위에 놓여있는 두 장의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 너머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수면 위에 비가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축 젖은 연잎과 나무수국을 바라보다, 쿠니미는 나가기 싫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똑부러지는 의사표현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키라, 오늘 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주면 안 돼? 오이카와가 물었다. 나 냉혈동물이라서 이런 날 밖에 못 나가요 토오루, 하고 쿠니미는 능숙하게 넘어갔다. 누가 뱀 아니랄까봐, 하면서 오이카와는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사촌 형의 부탁 정도는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혈연을 이용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귀찮은 남자였다.
쿠니미는 다 식어가는 핫팩을 꼭 쥐었다. 하늘이 꾸물거리고 비가 몇 방울 떨어질 때 받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오늘은 꼭 가면 안 되냐면서 쿠니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쿠니미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설설 쓰다듬었다. 나 체온조절하기 힘들어서 밖으로 못 나가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자신도 악어라고 대답했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키라야,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도 안 가요.”
“너 지금 내가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오이카와 씨는 모르는 게 없어.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쿠니미는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의 오이카와와 달리, 그는 사교회가 귀찮았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배구보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오이카와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잘생긴 이마가 드러났고, 쿠니미는 엄지와 중지를 튕겨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왜 가기 싫어하는 건데? 오이카와가 물었다. 귀찮잖아요, 쿠니미는 다시 대답했다. 그는 예쁘게 차려입고 웃는 자리가 취향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 우리 엄마 같은 소리를 한다, 라는 그의 말에 쿠니미는 오이카와 또한 제 엄마 같은 소리를 말한다면서 받아쳤다. 쿠니미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자리를 불편해 하는 걸 잘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사교회에 나올 것을 권하곤 했다. 쿠니미는 그게 오이카와 나름의 친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류 사회에서 결혼과 연애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다분히 품은 도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쯤이면 선자리가 설설 들어올 테니, 그 전에 미리 얼굴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다는 것은 쿠니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답지 않게 연애결혼 하고 싶은 거야?”
“답지 않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말 그대로라고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그는 그의 불퉁한 입술을 두어 번 더 잡아당기고는 조금만 있다 가겠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정장을 골라주겠다고 신이 나서 말하는 사촌형을 바라보다가, 쿠니미는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꽤나 추울 것 같았다. 그는 핫팩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핫팩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다 식은걸 뭐 하러 쥐고 있어? 중종 악어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고, 흰뱀 중종은 그의 표정을 따라하면서 손이 심심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핫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쿠니미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다 식은 핫팩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요.”
“정말?”
쿠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놀라 되물었다. 쿠니미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는 게 너무 귀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오이카와 씨의 친사촌동생이며 뱀목이라는 것을 대신 말해 달라 했다. 오이카와는 별로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 말하면서 웃었다.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일어났다. 정장을 골라주겠다는 말에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곤해? 그의 말에 쿠니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피곤함을 감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사촌동생의 모순 된 말과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한 옷방으로 발걸음 했다. 쿠니미는 의욕 없이 그의 발자국을 쫓아 갈 뿐이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하는 건 싫다. 쿠니미는 반짝거리는 조명을 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몇 사람이 그에게 말을 붙여왔고 그의 옆에 있던 오이카와는 그 대신 자기소개를 했다. 모임에 꾸준히 참석 해 왔는지, 오이카와는 사람무리 속의 중심처럼 이동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베란다 안에 기대어, 환한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많은 인파를 천천히 관찰했다. 다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이미 여며진 재킷을 쓸었다. 코트를 하나 더 입으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들었어야 했다. 쿠니미는 회장 한 가운데서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빛에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파티장 구석에서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명처럼 반짝이는 오이카와를 놓치기 싫다는 듯 굴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하품을 했다.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눈길을 끌만한 반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일 연습을 좀 더 성의 있게 설렁거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해야 했으나, 그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인기인은 괴롭다고 생각하며, 쿠니미는 제 목을 옥죄고 있는 보타이를 풀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는 파티장 안을 돌아보았다. 멀리, 튀는 머리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하나마키였다. 쿠니미는 그의 혼현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 넣었던 보타이를 꺼내 천천히 맸다. 일찍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회장에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뱀은 원래 눈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마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서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자 오이카와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쿠니미에게 몰렸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소개할게요, 라고 운을 띄우는 경쾌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이제부터 소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엮어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쿠니미는 자신의 등 뒤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마키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까이 하지 말자, 라는 말은 쿠니미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그는 식어버린 핫팩을 생각했다. 파티장 구석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우습기만 했다. 쿠니미는 가볍게 눈웃음 쳤다. 하나마키의 앞에 있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면서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를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쿠니미에게 대상이 누군지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웃기는 질투심이었고, 반항심의 발현이었다. 쿠니미는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귀찮은 일도 감수해야만 하는 때가 오는 법이었다. 쿠니미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온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촌동생인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
어느 밤, 하나마키 타카히로의 기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에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섞인 명백한 불쾌함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키, 하고 부르니 하나마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년 동안 그를 겪어왔음에, 오이카와는 그의 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란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그의 눈길의 끄트머리에는 짙은 붉은색 보타이를 맨 쿠니미가 있었다. 신경 쓰여? 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
“애인이 신경 쓰여?”
“맛키 씨는 솔로인데요?”
하나마키는 즉각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니미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오이카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가 내 애인이에요?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배구부 안에선 아예 공인이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맛키는 쿠니미가 싫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었으면 저렇게 안 놔뒀다는 고지식한 말이 뒤따라왔다. 싫지는 않은가 보다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가득 즐기면서 키득거렸다. 쿠니미가 공중에 옅게 친 거미줄에, 하나마키가 덥석 걸린 꼴이었다.
“예쁘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 잘 맞는, 투 버튼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이었다. 교보을 입었을 때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마키는 활발하게 웃고 있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나마키는 곤란하게 웃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 마다 철벽을 치면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저런 모습의 그 보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미미하게 멈춰있는 쿠니미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마키가 모르는 중종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웃고 있었다. 백합처럼 우아하고, 프리지아처럼 수줍은 모습이었다. 그는 태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오는 게 아니었어, 하고 넋두리처럼 말하자 오이카와는 오지 않았어도 불안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분명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체크 할 거잖아?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하면 말이라도 걸러 가 보는 건?”
“그럴까.”
하나마키는 계속 쿠니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렇게 밝게 웃는 쿠니미에, 하나마키는 적응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살짝 몸을 틀었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손을 흔들자, 쿠니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쿠니미는 자신이 이야기 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서, 천천히 하나마키의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마키는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유연하게 걷는 고양잇과 동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혼현이 눈처럼 하얀 뱀이라는 것을 하나마키는 가끔 잊곤 했다. 쿠니미는 하나마키와 눈을 맞추고 눈웃음 쳤다.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지는 눈에, 하나마키는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애매한 소유욕이 천천히 번져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웃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그는 쿠니미의 손목을 잡았다. 선배? 하고 묻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쿠니미는 잠시 놀란 것처럼 얼어 있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그의 이름을 똑바로 말했다. 쿠니미 아키라입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추울 것 같은데요.”
“괜찮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해?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에, 하나마키는 그의 혼현이 여우였던가를 잠시 고민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둘에게 잘 다녀오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이카와 씨도 변온동물이라서 밖에 따라가고 싶진 않거든, 이와랑 놀러 갈 거야. 그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이끌었다. 오이카와가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품안에 가두고 싶었다. 하나마키는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향수 뿌렸어? 그의 질문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좋은 향이 난다는 칭찬에는 선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마키는 자신처럼 친절한 사람이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하나마키는 그를 천천히 에스코트했다. 쿠니미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 구두라도 신은 것 마냥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신은 구두 굽에서 꽤나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나마키는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타카히로 씨는 핫팩 같네요. 쿠니미가 웃음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만 그래. 하나마키는 그 말을 애써 씹어, 삼켰다. 말이 들어간 위가 더부룩했다. 하나마키의 표정을 보던 쿠니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웃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후배의 당돌한 선언에, 하나마키는 애써 웃어 보였다. 쿠니미는 느릿하게 웃었다. 비온 후의 꽃이파리처럼 예쁜, 모습이었다.
[하나쿠니] 밤, 그리고 아침 (0) | 2015.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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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니] 점심시간, (0) | 2015.02.26 |
[하나쿠니] 아침 (0) | 2015.02.25 |
:C | 2015. 3. 10. 23:37
***
궁 안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그는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침소로 향했다. 거친 발걸음 소리에 시종들이 놀라 길을 비켰다. 시종장이 그를 황급히 막아섰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 하옵니다. 고하는 그에게 죄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자루를 잡았다. 나는, 왕을 뵈어야 한다. 강직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잘 갈린 금속마냥 날카로웠다.
“이와, 죄 없는 시종을 괴롭히면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살지 않잖니.”
창호지를 바른 문 너머에서 오랜 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이즈미는 수도 성벽에 닿은 어제 밤에서야 전해들은 그 지독한 장난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말해 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상이 혼례복을 입었으며, 그걸 본 죄 없는 시동들이 궐 안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 자체를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강직하며 사리분별이 정확한 남자였다. 들라 하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라기에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여러 겹의 문 너머, 오이카와는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길게 늘어진 흰 옷을 보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화 내지 말아줘,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길고 긴 애원을 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가. 이와이즈미는 친우로서 말했다. 그는 이 허술한 서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싸구려 연극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왕의 주도 하에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쿠니미가 아프다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린은 나라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앓지 않는다. 이와이즈미의 진한 침묵을 헤아리던 오이카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니 어쩔 수 없단다, 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식탁에는 조그마한 다과와 다구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창 너머에서 들어왔다. 그의 방 안에 있던 새장 안에 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왕의 침소에서 발견되는 모든 정황들은 불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 예전, 이와이즈미가 올바르게 맞춰놓은 조각을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스로 흩트리고 있었다.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이와이즈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의 웃음과 시선은, 한 구석에 있는 새장 안에 쏠려 있었다. 그 안에는 유리로 세공한 까마귀 장식이 들어 있었다. 악취미, 하고 질려하는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는 무응답으로 화답했다.
“스가는, 이제 한 나라의 재상이야.”
“그럼, 이와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오이카와,”
이와, 난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내가 과거에 매여 있을 뿐이지. 오이카와는 먼 새장을 보며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이 독대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데, 이와이즈미는 따져 물었다. 그의 언사는 왕에게 하는 것이라기엔 건방진 것이었다. 허나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목을 덮어 내려온 비단 소매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야, 왕에게 직언하는 신하 정도는 있어야 성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이카와의 질 나쁜 장난에 대한 대답과 해명을 듣고 싶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각 ‘계절’과 야하바 정도였다. 한 나라의 대신을 욕되게 한 것이 새어나간다면, 이와이즈미는 최악의 가정을 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는 걱정이 너무 많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식은 찻잔을 집었다. 식어버린 녹차에서 쓴 맛이 강하게 우러났는지 그의 미려한 얼굴이 구겨졌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자신의 눈에 담아냈다. 그 시선이 불편한 듯, 오이카와는 찻잔에 고인 달을 바라보았다. 대답, 해. 그가 요구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
이와이즈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눈을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의 눈이 그랬고, 자신을 보는 쿠니미 또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령을 부려 카라스노로 떠난 자신의 기린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실도하실 겝니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뇌리에 선했다.
잘못 된 집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 많은 기간 동안 그의 전에 들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내 궁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몸뚱이를 불렸을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오이카와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릇 된 일이야. 이상한 방식이었고, 너는 흔들려선 안 된다. 이와이즈미의 충언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까마귀 같은 짓이었다. 그의 손끝은 식은 찻잔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들어 놓은 보험에 대하여 셈하였다. 결론을 낸 그는 스가와라는 절대 내가 한 일을 말하지 않을 거야, 라고 느릿하게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사랑해서 그랬어.”
오이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그를 노려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떠나보냈던 그 밤을 회상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던 날이었다. 국경께의 서원. 쿠니미와 스가와라의 마차가 향한 곳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날의 일들은 언제나 그에게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사무쳤다. 다신 그러지 않을게, 그는 형식적인 사과를 내뱉었다.
“왕이시여.”
“이와.”
이제 스가와라는 곧 카라스노에 돌아갈 거야. 꿈결 같은 시간은 지났고, 나는 이제 카라스노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전쟁을 하기엔 우리는 모두 지쳐있고, 아오바죠사이를 상대하기에 그 나라는 너무나도 약해. 오이카와 씨는 앞으로 그 쪽에 머리를 두고 자지 않을 거란다. 오이카와는 느릿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감언이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남자였다.
정에 약한 그는 언제나 사랑하고 싶어 했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오히려 오이카와답다면 오이카와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으로써 그는 최악의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를 왕으로 옹립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 해 본적이 없었다. 아오바죠사이에는 그가 반드시 필요했다. 기린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네게 쿠니미의 사령이 달려갔던 이레 전 출발했으니 이게 서서히 오겠구나. 오이카와는 셈하여 대답했다.
“사랑해서 그랬어."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것도 같았고 지나치게 추억을 마신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침대로 몸을 옮겼다. 그는 비단 이불 위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미련이란 이름의 씨앗이 눈 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자리에 오른 이상 버려야만 할 것이었다.
이제 나가 보렴. 오이카와는 권유하며 말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이와이즈미의 검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에 달빛이 들어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검자루를 보다가, 문득 그에게 자신을 믿느냐 물었다. 이와이즈미의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인간적인 감정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부유하는 상념들은 허무맹랑한 망령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왕으로써 오이카와가 내린 명령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의 왕은 언제나 옳으며, 언제나 존엄하신 분이었다. 그에게 틀린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을 반추했다. 언제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이와이즈미의 왕은 흔들리더라도 다시 축을 잡아 일어 설 것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대나무 숲을 잠시 스쳐가는 바람의 짓이라 믿기로 했다.
이와이즈미는 왕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든 진심을 끌어 모은 말이 공중에 울렸다.
“나는 당신의 결정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습니다.”
***
“이 곳에 계시면 카라스노 쪽에서 데리러 오실겝니다.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해와 같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스가와라는 말갛게 웃었다. 쿠니미는 달빛을 받은 그를 보다가 살짝 머리를 까딱였다. 그의 대랍시 기두에 달린 푸른 술이 흔들렸다. 어린 기린은 스가와라가 작은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본 뒤에야 뒤를 돌았다. 그는 목이 답답하다 느꼈다. 그는 옥색 의복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갈 길이 멀었다. 사령을 이용한다면 빠르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괜히 국경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곳은 난민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지 않았다. 국경에 있던 하나마키를 수도로 불러들인 탓이었고, 재상이 난데없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왕의 잘못 된 결정 때문에 몇 가지의 일이 틀어졌는지. 쿠니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숨결에 그의 대랍시 기두가 흔들렸다. 왕실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비단 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상상하다가 턱을 괴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 마다 그의 대랍시가 흔들렸다. 쿠니미의 정수리 위쪽에는 비단 꽃이 풍성하게 자리했고, 은색으로 만들어진 이파리가 봉황의 모양을 한 채로왼쪽에 달려 있었다. 오른쪽은 수국과 자잘한 쪽색 비단 꽃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어깨에 두른 망토를 좀 더 끌어 올렸다. 오늘따라 밤이 추웠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쏘아야 합니까.”
쿠니미는 며칠 전 꿈을 반추했다. 아직도 뒷맛이 썼다. 그는 개의 모양을 한, 작은 사역마를 불러냈다. 쿠니미의 손길에 어둠이 뭉쳐져, 온기를 가진 짐승이 되었다. 쿠니미는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이 가진 온기라도 끌어다가 덮고 싶었다. 수도에 있을 정인이 간절하였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굴복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문득 웃었다. 여러모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라꼴이 미쳐가는 게지, 쿠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머리를 쓸었다.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쪽 지어 준 것은 그의 정인이었다. 사랑의 형태는 언제나 은유적이었다. 사랑이라는 그 두 글자가 무엇이기에. 쿠니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라지 않는 이유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쿠니미 아키라는 공범이었다. 이미 같은 배에 올라탔음에, 뒤를 돌 수 없었다.
“꼴에 잘 웃는구나.”
낯선 목소리에 쿠니미의 무릎에 있던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전방을 경계하였다. 쿠니미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 셋 있다는 흑기린 중 하나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카게야마의 모습을 보며 쿠니미는 비릿하게 웃었다. 넌 참 예의 없게 오는구나,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안광이 빛났다. 무례한 것은 너희겠지.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단호하였다.
“참지 못하고 화풀이라도 하러 온 게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쿠니미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불안했다. 그의 마차에 들어온 것도 충동적인 일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두 눈을 제 안에 담았다. 떨리는 것이 꼴사나워,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가린 손가락에는 금으로 만든 호갑투가 씌워져 있었다.
주인을 풀어주었더니 그 개가 나를 물려하는구나. 쿠니미는 손가락을 살랑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호갑투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옛날,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작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면서 미소 짓는 어린 기린의 모습을 본 카게야마는 성급하게 소리 질렀다.
“쿠니미!”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하거라.”
쿠니미는 그를 나른하게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 속에는 순도 높은 불안함이 서러 있었다. 스가와라가 아오바죠사이에 연금되었던 것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미 잃은 새끼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 하얀 새를 연모하기라도 하느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그 표정에 담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애매한 질투,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경멸. 불안함과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울렁임. 쿠니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웃겼다. 애초에 하늘이 기린을 내릴 때,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용건이 없으면 내리거라, 쿠니미는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말하였다.
“겁이 나느냐? 네 감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조용히 해라.”
“마음에, 그 하얀 새를 품기라도 했던 것이냐?”
쿠니미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모라도 하였느냐? 불안하였느 사랑하였느냐? 그 사람이 너의 정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왜, 마음에라도 품었더냐? 진심이었느냐? 그래서 이렇게 불안하여 타국의 마차에 몸을 실었느냐? 나에게 무엇이라도 화풀이 하고 싶었느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두 기린의 몸을 잔혹하게 짓이겼다. 쿠니미, 하고 카게야마가 낮게 그의 이름을 말하였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같은 말이었다. 쿠니미는 호갑투를 살랑거렸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손이 어린 기린의 목을 두 손으로 세게 잡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그의 두 손가락이 쿠니미의 목을 세게 눌렀다. 숨이 막혀왔다. 그의 머리에 가지런히 올려 있던 대랍시가 흐트러졌다. 의자에 등을 세게 부딪친 충격에 머리가 아팠다. 쿠니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악력 차이가 나는지라, 그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찔한 어둠이 그를 가득 덮었다. 카게야마는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쿠니미는 몸을 떨며 기침했다. 내 스가와라님을 모욕하지 마, 그는 소리쳤고, 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비단 창 안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 흑기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가리던 호갑투가 마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게야마의 표정을 보며 쿠니미는 확신했다.
“미친 놈.”
쿠니미의 조소에 카게야마는 그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손을 떨었고, 쿠니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았다. 대랍시에 달려 있던 커다란 비단 꽃망울이 떨어졌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마차 벽면에 부딪힐 때, 쿠니미의 화려한 머리장식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술이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쿠니미는 그럼에도 웃었다. 기침과 섞인 웃음이 기묘하게 들렸다.
연정.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역병이 모두에게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미쳐가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 외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정도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쿠니미는 왜 왕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라고 했는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깨달음을 지금 당장 입 밖으로 내보낸다면- 가장 공감할 흑기린은 제가 한 짓에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속셈이냐.”
카게야마가 다시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너머에 있는 모든 의미를 카게야마 토비오는 알지 못하였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기침했다. 그는 비단 발을 걷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이, 그에게 괜찮으냐 물었다. 어린 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친우가 찾아왔다는 말에 그는 별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빈껍데기 같은 시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는 서원에 스가와라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꼴에 자존심이 있는지, 카게야마는 말없이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처음 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차에서 그림자의 형태로 녹아내리려던 카게야마가, 멈추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왕의. 뜻을 지켜볼 뿐이다.”
쿠니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소리 없이 카게야마는 서원으로 떠났고, 마차 안에 홀로 남은 쿠니미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인지, 목 끝이 따끔거렸다. 그는 숨을 천천히 뱉었다. 쿠니미는 분홍색 작은 꽃잎이 연달아 수놓아진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너무 지나친 비일상들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쿠니미는 처음부터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목을 잘라 효시하는 상상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아오바죠사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카라스노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아득한 어둠이 몰려왔다.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기에, 그는
하나마키가 보고 싶었다.
***
스가와라는 먼지 쌓인 서원의 안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날과 변한 점은 거의 없었다. 그는 카게야마와 같이 쓰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비밀 방이 나타났다. 카라스노의 전대 왕. 그 인정받지 못한 폭군이 사와무라를 찾으려고 군대를 보낼 때 마다 그를 숨기던 공간이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그 곳에 들어갔다.
그동안 있던 일이 꿈결 같았다. 그에게 이 서원을 마련 해 준 것은 오이카와였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거둔 것은 아오바죠사이의 현대 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얄팍한 약조를 아직까지도 품고 있는 오이카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왕이 되면 모든 감정을 거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좁은 공간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어린 카게야마는 군대가 올 때만 항상 제가 숨고 싶어 했다.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기 때문이었고, 피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모습이 자라고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도. 심지어 인간 아이가 아니라 기린이라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스가와라에게 아이 같았다.
이제 드디어, 돌아 갈 수 있다. 그는 궁 안에 마련 된 자신의 공간에 발을 디디고 싶었다. 사와무라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던 그 시절이 사무쳤다. 그는 그 비밀 방 안에서 멀리 보이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자리였던 곳이었다. 그는 그 전각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지체 높은 귀족 자제가 이 서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와무라는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념의 끝은 언제나 번뇌일 뿐이다. 스가와라는 그 방에서 천천히 나가, 전각으로 향하였다. 오이카와가 좋아하던 자리는 인공 호수 위의 복숭아꽃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사랑가를 부르던 한량은 어느새 왕이 되어 아오바죠사이 전체를 호령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스가와라는 실감하고 있었다.
현재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과거로는 돌아 갈 수 없다. 오이카와도 이번 볼모행을 통하여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던 그의 모습과, 애잔하게 울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애써 지워냈다. 연모한다는 말을 담을 수 있는 것은 허락받은 자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멀리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림자 진 자리에서 형체가 올라왔다. 카게야마, 하고 부르자 상기 된 얼굴을 한 기린이 그에게 다가왔다. 스가와라와 이 서원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큰 키와, 몸이 흘러간 세월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슨 일, 없으셨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문제였다. 혼자만 간직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돌아갈까?”
카게야마의 선생이던 시절처럼, 스가와라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 듯, 카게야마는 전각을 이리저리 둘러 보다, 복숭아꽃이 가장 보이지 않는 장소로 스가와라를 끌었다. 옷자락이 끌리자 넘어지듯 스가와라는 그 곳에 자리했다. 그 곳에 계신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발치에 있던 그림자들이 사령이 되어 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모두가 기다리는 그 곳으로 스며들며,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카라스노의 땅을 디딜 것이었다. 피로하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카게야마의 요청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피로 대신 그의 어깨에 올라 탄 미련이, 그의 머리를 자꾸만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가와라는 스스로, 새장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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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9. 00:18
권태롭고 지루한 오이스가가 보고 싶었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이에요. '꽃샘추위'라는 주제를 받았었습니다.
***
봄이 왔다. 바라던 봄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리벽 너머의 거리에서,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유연하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다가, 숨을 내쉬었다. 잔에 담긴 커피의 수면이 흔들렸다. 꼭, 저 같은 흔들림이었다.
이번 봄은 춥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너무 따듯하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역시 뜨겁지 않았다. 그의 수려한 외모는 요즘 들어 수척해져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많이 말랐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의미를 가진다. 스가와라는 그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상 힘든 일이었으나, 그는 반드시 그러고 싶었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늦게 오느냐 물었다. 스가와라는 약속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안해, 오이카와.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말간 미소였다.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모습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지리함이 단순한 권태라 믿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청춘이 퇴색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미성숙한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에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 권태라는 단어에는 이 미련들을 다 넣을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찻잔을 보면서 오이카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이카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예전처럼 뜨겁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스가와라는 쉽게 대답 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권태'나 '익숙해짐' 이라는 익숙한 단어들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이 헤어짐의 전초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는 종말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매끈했던 입술이 꽃피는 봄 잠시 찾아 온 추위에 터 버리는 과정과 같았다. 언제나 상처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는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무게있는 걸 생각했다. 네 번째 약지에 끼워져 있는 커플링이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변기에 넣고 내리는 상상을 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쏟아지는 물에서도 백금 반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지루한 사랑에서 퇴색되지 않는 것은 그 반지 뿐일지도 모른다. 미약한 반짝임과 부질없는 약속을 매일 성실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에는 잡초가 자란지 오래였지만, 이미 습관이 된, 그 행위는 멈추기 힘들었다. 사랑보다 습관적인 것은 일상이며, 그 일상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게 돕는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 함께했던 모든 비일상을 떠올렸다.
같은 성별, 같은 지역 출신. 이 두 가지 단어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비일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제법 열렬하게 사랑했다, 스가와라는 사랑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따듯하게 내리쬔 햇살에 드러누운 고양이가 보였다. 복슬복슬한 꼬리는 끊임 없이 아스팔트를 때렸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 같았다. 사랑 또한 저렇게 귀찮은 과정을 동반한다.
사랑을 하면서 잃어버린 일상을 복구하려면 얼마의 시간을 들여야 할까. 오이카와는 의외로 궤도에 쉽게 정착할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잔을 매만졌다. 잔 안에 들어있는 음료는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영원히 뜨거운 것은 없음으로 그들의 사랑 또한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 라는 말을 스가와라는 입에 머금었다.
놀랍게도, 어색했다. 이 말을 처음 쓰지 않았던 날이 언지였던가. 스가와라는 천천히 반추했다. 카페 안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다섯 번 쯤 끝을 고했을 때야 그는 그 시작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목이 뻐근했다. 숨이 찼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말이 그의 목에 천천히 매달렸다.
익숙한 권태일 거야. 가끔식 찾아오는 거고, 봄에 귀속된 꽃샘추위 같은 거지.....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어. 나는 여전히 코우시를 좋아하고, 너도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의 그도, 저번 주의 그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벚꽃 같은 소리였다.
한참 몽우리진 꽃망울을 시샘하기에 하늘은 바람을 보낸다. 피기 전에 흐트러지는 봉오리라기에 자신들은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스가와라는 이별을 준비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먼저 집을 구할 것이다.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작은 원룸으로. 가스레인지 구가 두 개 정도 되는 부엌이 있고 햇볕이 간간히 들어오는. 그는 상상해오던 미래에서 천천히 오이카와를 뺄셈했다. 꽃망울이 한없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미성숙함이 털어졌다.
혼자 있는 집은 외로웠다. 그는 자신이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사실을 더했다가, 다시 뺐다. 그 조건을 충족하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별 한 후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시 공상을 시작했다. 알알이 나눠진 설탕가루가 솜사탕이라는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그의 상상은 천천히 몸을 불려갔다.
그는 창문에 묻은 물방울 자국을 바라보았다. 비가 온 후 남은 자국이었다. 신문지로 닦아내는 상상을 하다가, 스가와라는 아스팔트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햇살은 여전히 따듯했으나 고양이가 누운 자국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창 너머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 모습에서 스가와라는 난데없는 꽃샘추위가 왔음을 떠올렸다.
올 봄은 춥다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돋아왔다.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때의 꽃샘추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절이 지나면 언제나 따듯한 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여전히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모습이었다. 스가와라는 고양이가 떠나버린 아스팔트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눈에 담다가 그는 떨어지는 벚꽃망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같이 한 권태만큼이나 눌러 댄 전화번호를 누르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하고 받는 그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난데없이 고백했다. 마땅히 외쳐야 할 말이었다. 그는 이 지루한 말이 그들의 '내일'을 일시적으로 연장시켜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랑해."
그 꽃샘추위 같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 말 말고 사랑한다는 확신이 필요했으나 스가와라는 애써 조르지 않았다. 봄처럼 느리고 천천히 찾아왔던 불안이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하고 스가와라는 다시 속삭였다. 오이카와는 기쁜 듯, 나도, 하고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으나 스가와라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반찬이 될 꽁치조림과 시금치 된장무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저녁이 인스턴트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권태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불안은 확신처럼 그를 덮쳣다. 창 밖의 몽우리들이 사정없이 날리고 있었다. 따듯한 봄에 적응했던 꽃은 갑자기 추워졌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동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스가와라는 그가 버릴 수 있는 가장 가벼운 것을 생각했다.
그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벚꽃 피는 계절에, 스가와라는 카페 테이블에 제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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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7. 03:20
킹스맨 AU입니다. 이 글과 시간대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킹스맨의 추천인 제도는 키잡을 위한 최고의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가 반바지에 니삭스 신을 때 부터 길러온 하나마키가 보고 싶네요 ^0^!!!
***
쿠니미는, 그를 봤을 때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후보는 단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추천인이 랜슬롯이라고 확신했다. 그 카게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할 상대는 그의 추천인 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오래 된 이불을 털었을 때,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개의 목줄을 꽉 쥐었다. 이미 지워진 이름을 가진 도베르만은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와 달리 충직한 견공은 쿠니미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그가 신은 밑창이 두꺼운 구두가 소리를 냈다. 쿠니미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 나른한 햇살에, 그의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의 세상의 축은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미 결심한 이상 망설이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서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니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의 상냥한 모습에 쿠니미는 짧게 목례했다. 그는 그와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선 욕망을 그는 혀 아래에 숨겼다. 먹기 싫은 알약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썼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쿠니미의 목소리에 랜슬롯은 문에서 비켜주었다.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갤러해드의 집무실에서는 언제나 단 향이 났다. 어린애 같은 입맛 탓이었다. 쿠니미는 개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 지워진 이름의 개는 러그에 편하게 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갤러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햇빛이 들어 반짝였다.
안녕,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쿠니미가 물었다. 나는 네 추천인이 아니란다. 갤러해드는 따듯한 물을 주전자에 담으며 말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웨지우드의 파란색이 쿠니미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언젠가의 밤하늘 같은 색이었다.
합격 축하라면 가웨인에게서 듣도록 해. 갤러해드는 쿠니미의 추천인 이름을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단호한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에 건 아침나절 하늘을 담은 넥타이에 든 수국모양의 스치치가 반짝였다. 가웨인이 이런 말은 안 해주던? 갤러해드는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하얀 모래알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쿠니미가 대답하자 갤러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쿠니미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말꼬리를 돌리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갤러해드는 잔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찻잎은 내 멋대로 고를 거라는 목소리에 그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밤하늘 여러 겹을 겹쳐놓은 듯 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갤러해드는 그저 하얀 모래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련한 남자 앞에서 쿠니미는 경험 없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다. 갤러해드는 웨지우드 티팟을 손에 들었다. 그는 거름망을 잔에 얹었다.
쿠니미의 마음에 들어 있는 찻잎은 ‘어수선함’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질투’를 블랜딩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물을 붓지 않아도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그는 갤러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에 그의 도베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앉아, 하고 쿠니미가 개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게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갤러해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찻잔 두 개를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그는 흔들림 없이 찻잔 두 개를 탁자로 옮겨두었고, 찬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버터과자와 스콘을 꺼내두었다. 쿠니미는 제 앞으로 놓인 찻잔에 설탕을 두 개 넣었다. 갤러해드 또한 그리하였다. 단 건 좋아, 라고 속편하게 말하는 그에게,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림으로 화답했다.
“언제 산 거예요?”
“오늘 아침.”
“왜.”
“네가 올 줄 알았거든.”
갤러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반짝임이 스며 있었다. 쿠니미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그가 어른 같아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갤러해드 앞에서는 어린애의 유치한 놀잇거리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문득 외로워졌다.
나는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것이 쿠니미가 쌓아올린 모든 행적에 대한 그의 최종 평가였다. 쿠니미는 찻잔에 손을 댔다. 도자기 너머로 희석된 따듯함이 전해져 왔다. 찻잔의 다른 이름은 분명 ‘갤러해드’의 이명일 것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불완전한 킹스맨은 고개를 숙였다.
“왜 날 추천하지 않았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 어른 같은 척 하는 얼굴을 싫어했다. 그는 코끝이 찡해온다고 생각했다. 따듯함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갤러해드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도베르만과 제법 닮은 눈길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임을 확인받는 게 싫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날 추천해주길 바랐어요.”
“그래?”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스콘을 뜯어 쿠니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쿠니미는 입을 벌려 빵조각을 받아먹었다. 그는 그의 손끝을 핥았다. 대담하네, 갤러해드는 그이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 웃었다. 쿠니미가 언제나 따라가고 싶어 했던 미소였다. 그는 개에게 손짓했다. 도베르만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섰다. 앉아, 하고 그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바랐어요.”
그는 절박하게 말했다. 갤러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웨인이, 오이카와 씨가 나를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걱정했나요? 아니면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쿠니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큰 알약을 물 없이 입안에서 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내 프로방스 별장에 가서 청소나 하고 수틀에 수나 놓아.”
“갤러해드.”
“안전하게 지내. 총, 칼, 독, 킹스맨. 어느 것도 너한테 안 어울려. 쿠니미 너 귀찮은 거 싫어하잖아. 효율적이고 안전하고, 내 새장에 든 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쿠니미는 황량하게 빈 프로방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사용인 몇 외에는 오지 않는 그 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처럼 부유하던 빈 날을 떠올렸다. 갤러해드가 ‘원래 이름’을 가지고 오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쌍무지개가 뜨는 것만큼 가끔씩 찾아왔고, 그 마저도 하루를 머물지 않고 떠났다.
쿠니미는 그 빈 침실을 기억한다.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는 프로방스의 따듯한 햇살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쿠니미는 잔을 놓았다. 그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부터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잔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들이 찬 자신은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태양처럼 멀었다. 쿠니미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나는,”
“미안한데, 난 어린애 투정 듣기 싫어.”
비수가 꽂히는 기분에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생명줄마냥 잡고 있는 찻잔의 수면이 흔들렸다. 차라리 독약이라, 마시고 죽었으면 싶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그의 세계는 첫사랑 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고독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쿠니미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마음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마음이 우러나고 있었다. 넓게 퍼지는 그 향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는 듯, 갤러해드는 그저 스콘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뻑뻑한 빵이 그의 목을 막으려 할 때 마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쿠니미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잔인한 사람, 그가 말하자 갤러해드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웃었다.
“넌 곧장 내 방문을 나서야 해. 그리고 쭉 직진해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서, 네 추천인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렴, 오이카와 씨 저를 추천해주신 건 감사할 일이나 저는 이제부터 프로방스의, 미스터 갤러해드 씨 소유의 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석인 퍼시빌 자리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채울 것입니다. 갤러해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쿠니미는 그의 독단적인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함께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작은 꿈마저 갤러해드는 담뱃불을 구두로 밟아 끄듯, 소화하고 있었다.
“하나마키 씨.”
“이게 내 사랑이야.”
쿠니미는 갤러해드가 프로방스의 침실에 놓고 온 이름을 말했다. 그의 본명을 기억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쿠니미는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노력의 반절도 알지 못했다. 빈 침대 시트에 누워 지새웠던 밤을, 그 밤이 여러 겹 겹쳐져 만든 검은 색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은 한없이 이기적이였다.
그는 멋대로 쿠니미가 사랑하게 만들고, 따라온 모든 다리를 끊고자 했다. 쿠니미 아키라의 모든 세계는 하나마키 타카히로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슬펐고, 그게 아쉬웠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도, 킹스맨이 될 거예요, 하나마키는 그 말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말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나마키가 기억하는 것 보다 5cm는 더 자란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쉼표와 같은 한숨이 자리했다. 당신과 같은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를 신고, 프로방스의 날씨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 런던 거리를 걸어다닐 거예요, 그는 확정된 것 같은 미래를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것을 불확실한 망상으로 만들었다.
계속 반복되는 문답에, 쿠니미는 울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베르만에게 손을 뻗었다. 갤러해드가 지워버린 이름을 가진 개였다. 그는 그의 귀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는 귀 뒤와 목을 솜씨 좋게 쓰다듬었다. 날 불안하게 하지 말아줘요, 쿠니미는 애원하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은 주어진 온기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이 어미 새라도 되는 양 따라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자라온 그의 사랑은 이미 맹목적인 움직임이었다. 난, 불안해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쿠니미가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 안에는 혼자 있던 밤이 고여 있었다. 쿠니미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하나마키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가 짧게 떨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눈 아래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이 닿은 자리, 반대편에 눈물길이 생겼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나마키는 마법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변명이라면 듣기 싫어요.”
쿠니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눈가에 담긴 눈물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에 대한 동정은 받지 않겠다는 그 당돌함에, 하나마키는 침을 삼켰다. 지금 그에게 서툰 감언이설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에게 손을 뻗은 것은 하나마키의 자의였다. 그 손길에 의해 세계가 돌아갔고, 재구축 된 이상 책임져야 마땅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을 말해 줄 타이밍이었다.
“난, 널 이명으로 부르기 싫어.”
“네?”
“퍼시빌이니, 가웨인이니, 랜슬롯이니 하는 역할놀이에 네 이름을 가리기 싫다는 뜻이야.”
쓴 물이 우러난 쿠니미의 세계에, 하나마키는 설탕을 한 스푼 더했다. 그는 멈춰버린 모래시계를 반대로 뒤집었다. 설탕 같은 하얀 모래알이 다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침이 째깍거리며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간은 허비한 뒤에야 아까워지는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반쯤 식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혀가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나마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날 갤러해드라고 부르는 게 싫어. 나는 너에게 영원한 ‘아저씨’고, ‘하나마키 씨’야. 그의 서툰 고백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해드란 이름 속에 담긴 그 이름을, 나만 기억하면 되잖아요? 그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햇번처럼 사랑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려진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하면서 제 머리를 쓸었다. 목이 답답해 옴에, 그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예법에 어긋나고 매너 없는 행동이지만 용서 해 다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매너보다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말해 주세요. 쿠니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하나마에게 곧장 닿았다.
“셋째, 난 널 전장에 내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네가 들 날붙이는 수를 놓을 바늘이면 충분 해.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제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초조해질 때만 피우시죠, 쿠니미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연극이 아니라서 그래. 갤러해드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미는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 사포와, 성냥을 꺼냈다. 그는 불을 피워, 손으로 주변을 감쌌다.
그의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하나마키는 한동안 담배를 피웠고, 쿠니미는 달지 않은 스콘을 먹었다. 그는 라즈베리가 든 스콘을 좋아했고, 버터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유, 더 말해주세요. 쿠니미가 말했다. 그와 웨지우드는 퍽 어울리는 그림이었기에 하나마키는 혀를 차냈다.
집 안에서만 가두고 싶어서 그렇다, 는 이유에 쿠니미는 기각, 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하나마키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쿠니미는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마키의 기억 속 어린아이는 이렇게 집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많이 컸다고 대답했다. 그 엉뚱한 문답에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네 이름을 좋아한다.”
“그래서요.”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 아키라.”
아키라, 하고 하나마키는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그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닿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마지막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나마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재들이 불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내가 혼자 지새웠던 밤을 알고 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없이 그의 셔츠 아래의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우리 쿠니미는, 스물네 시간 동안 예법과 예의, 매너를 중시하는 가웨인에게 가게 될 텐데. 하나마키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었다. 그는쿠니미의 흰 셔츠에 자신과 비슷한 색의 타이를 매어, 매듭을 지었다. 그는 그 매듭과, 그의 목울대에 입을 맞추었다.
숨이 닿아 간질거리는 목에, 쿠니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색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떨어지면 프로방스로 가서 자수나 배워.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의 흰 손가락은 넥타이 매듭이 영원을 약속한 징표라도 된다는 듯, 서툴고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만약 붙으면, 내 정장은 하나마키 씨가 맞춰주세요.”
한참의 침묵 끝에,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꺼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의 변주였기에, 하나마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웨인이 화낼 거야, 갤러해드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앞에서는 갤러해드가 아니라 하나마키 씨. 그의 긴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다.
하나마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킹스맨 안에서 심리전의 대가라고 불리고 있던 그는, 한참 어린 후보생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갤러해드는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의 눈 안에 있던 짙은 밤하늘은, 어느새 새벽을 가득 겹쳐 놓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홍차 더 마실래? 하나마키가 물었고, 쿠니미는 우유와 설탕을 넣어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햇살이 느리게 움직여, 시계초침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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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7. 01:42
킹스맨 AU입니다^0^ 영화를 볼 때는 참 좋았는데 글로 옮기려니까 제가 너무 부족해서 혼났네요8ㅅT.,.
수트와 남자와 칵테일의 조합은 세계 최강이라구 생각합니다^0^!!!!!
***
랜슬롯은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는 청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가 청하였다. 평소와 같이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문에서 살짝 몸을 비켜 주었다. 비밀임을 당부하는 그는 꽤나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시 멈추어 그를 감상한 것뿐이었으나, 언제나 효율적이고 냉정함을 추구하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소년이 들어갔다. ‘가웨인의 추천인’ 쿠니미 아키라는 온전히 갤러해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그는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갤러해드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었고, 스가와라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의 몸을 감은 짙은 회색 양복에 복도를 밝히고 있는 백열등 빛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시계를 확인했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추천인과 함께하는 스물 네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을 이 세계에 발들이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언제나 킹스맨은 그들의 추천인과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이벤트를 열곤 했다.
그 때, 그는 마티니를 타는 법을 배웠다. 베르무트를 기본으로 한 마티니, 젓지 말고 섞어서. 007 스리즈의 제임스 본드 같은 느낌이 난다고 지적하자, 그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다. ‘킹스맨’은 예법과 품위, 약간의 위트를 가진 젠틀맨이지.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지론을 떠올렸다. 그는 작약과 같은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작약의 꽃말을 떠올렸다.
여러 겹의 꽃잎이 겹쳐 만들어낸 풍성한 꽃망울과 달리, 그 꽃이 품고 있는 말은 ‘수줍음’ 이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과, 작약과의 공통점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웨인이란 남자는 그 단어와 닮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부분을 찾아보자면 작약의 꽃심처럼, 그의 속내 또한 알기 어렵다는 것 정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잠시 멈추어 섰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의 뒷굽에 망설임이 가득 고여, 미련을 담아 흘러내렸다.
신사에게 고민은 사치와도 같은 것이다. 스가와라는 곧장 걸었다. 이미 방문하기로 연락 한 이상, 그는 가웨인을 만나야만 했다. 그는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리드미컬한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당당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의 추천인이 알려 준 ‘예의’였다. 가웨인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를수록 토양이 퇴적되는 것처럼 몸 안에 스며 있었다.
똑, 똑. 그리고 시간을 담아 똑. 스가와라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 까지 대기했다. 이 역시, 가웨인의 예법이었다. 들어와, 그의 옛 추천인이 말했고, 그는 문고리를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돌렸다. 그는 뒤를 돌고 있었다. 그의 방 안은 어두웠고, 달달한 꽃향기가 들어 있었다. 가웨인, 하고 부르니 그는 랜슬롯, 하고 화답해왔다. 몇 년째 이어져 오는 호칭이었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에 쉽게 익숙해 질 수 없었다.
“랜슬롯, 네 추천인은 어디다 남겨두고?”
“가웨인도 마찬가지인걸요.”
스가와라는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추천인을 둬서 기쁘겠어, 눈앞의 그는 빈정대며 말했다. 수려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문을 닫고 두어 걸음 다가섰다. 그의 책상 위에는 진과 베르무트가 있었다. 익숙한 블랙 올리브에 스가와라는 마티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추천인과의 마지막 날에 마티니를 마셨다는 가웨인의 소문을 떠올렸다.
쿠니미 군은 좋겠네요, 스가와라가 웃으며 말했다. 가웨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쿠니미가 의외로 술이 약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구닥다리를 싫어하니, 이 올드한 마티니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서 웃었다. 토비오와는 뭘 할 생각이야? 가웨인이 물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추천한 아이가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라고 운을 땠다. 그리고 예법을 가르치겠죠, 라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토비오는 우수한 학생이니까 예법도 순식간에 배울 걸.”
“그런가요?”
“스물 네 시간을 소비하려면 뭔가 더, 가르쳐야 할 거야.”
“예를 들면?”
스가와라가 물었다. 가웨인은 음, 하고 고민했다. 그는 얼음에 들어 있던 진을 꺼냈다. 우리 원래 목적에 들어맞는 이야기를 할까? 그의 제안에 랜슬롯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마티니를 마시러 오라는 원래의 전보를 그제야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가웨인의 집무실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쇼파의 광택에 감탄하며 시선을 앞으로 두었다.
난, 토비오가 협동심 항목에서 떨어질 줄 알았어. 가웨인이 말했다. 스가와라는 자신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도 그쯤에서 떨어질 줄 알았지. 가웨인은 노래하듯 말했다. 그는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면서 조소했다. 스가와라는 화병 안의 작약을 만지작거렸다. 여린 꽃잎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미적지근한 향이 났다. 피려면 이틀에서 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는 봉우리를 보며 말했다.
“가웨인 씨는 말야, 쿠니미의 이름은, 스물 네 시간이 지나도 아키라일 거라고 확신해.”
“카게야마 때문인가요?”
“퍼시빌은 토비오의 자리가 되겠지. 떨어질 이유가 없어.”
내가 가웨인인 이유는 토비오가 불완전했기 때문이지. 그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진 병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광택이 반짝거리는 잔 두 개를 쥐었다. 스가와라는 불과 오년 전, 갓 중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킹스맨’이 될 뻔 했다는 카게야마의 말을 떠올렸다. 청소년기에 하곤 하는 허풍으로 취급 한 말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그가 취조하듯 물자, 가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안 좋아. 가웨인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추천인이 매우 우수하다면서투덜거렸다. 스가와라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는 무기사용, 대인응대, 협동심 등, 모든 자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남자였다. 무기력한 아이였는데, 사랑의 힘은 역시 대단해. 가웨인은 스가와라가 쉽게 알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는 마티니 잔에 진을 담았다.
“어떻게 해 줄까?”
“이미 진을 따른 것 같지만, 보드카 마티니. 섞지 말고 저어서.”
“오, 이런.”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닌 슬픔만큼이나 깊은 수심이 그의 한숨에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진은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스맨이라면 싫은 것도 마셔야지.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베르무트를 부었다. 눈대중으로 섞는 것 같지만 의외로 정확하게 계량했을 게 분명했다. 오늘의 그는 매우 심기 불편한 고양이 같았다.
온 몸의 털이 바짝 선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다리를 꼬았다. 젠틀맨, 하고 가웨인이 그를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그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스승’이곤 했다. 엷게 켠 조명이 가웨인의 ‘작업’에 별빛처럼 흘러내렸다. 반짝이는 마티니 잔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자신과 그의 스물 네 시간을 떠올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잔 안에서 섞이는 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비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주진 말아줘.”
“그렇지만, 우리는 킹스맨이고, 토비오가 ‘퍼시빌’이 된다면,”
“동료이기 때문에 모든 걸 알려주어야 한다? 로맨틱 한 말이야.”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의무적인 소리죠.”
“정답. 랜슬롯도 많이 컸는걸. 어엿한 킹스맨이 되었어.”
가웨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잔 안에 올리브를 띄웠다. 그는 소리 없이 걸을 줄 아는 남자였다. 그가 건넨 잔을 스가와라는 기꺼이 받았다. 유리잔과 유리잔이 키스하며,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윙크했다. 랜슬롯이 이렇게 성장하다니! 가웨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랜슬롯은 마티니로 입술을 축이며 당신에게 배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웃음을 담은 눈은 호선을 그리며 감겼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서로를 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웨인은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받은 것은 되돌려 준다.’ 또한 가웨인의 오랜 신조였다. 어떤 느낌이 들어? 그가 물었고, 랜슬롯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같은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아찔했겠군, 가웨인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방에는 큰 회중시계가 있었다. 1과 2사이에서 유달리 큰 소리를 내는, 어설프게 고장난 시계는 전(前)‘가웨인’이 남긴 유품이었다. 가웨인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를 셈했다. 멀린과 아서가 우리에게 얼마를 줄지 감도 못 잡겠어, 그는 의외로 솔직하게 말했고, 스가와라는 삼십 분 정도는 남았을 거라 장담했다.
가웨인은 랜슬롯의 손에 들린 잔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했다. 머릿속에 담긴 모든 생각마저 훑어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 네 시간 동안 체념을 가르쳐야하는 건 슬픈 일이야.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형식적’인 위로를 내뱉었다.
“랜슬롯, 이미 결과는 정해진 일이겠지.”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과 같은 일이지요 가웨인.”
“나는 그게 매우 불쾌해.”
재능덩어리들을 일반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몇 년을 고민했지만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가웨인은 잔을 흔들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우수한 인재가 원탁에 들어오는 것보다 좋은 일이 없다는 회유로는 그의 불쾌함을 씻어 낼 수 없을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천재였고, 쿠니미 아키라는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했다.
“쿠니미는 개를 못 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야 그 개 이름이 짝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웨인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스가와라는 허락 없이 키스를 구하는 행동이 ‘예의’에 얼마나 어긋날지를 고민했다. 가끔 ‘랜슬롯’과 ‘가웨인’이라는 이름은 난데없는 곳에서 무게를 가지곤 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본래 이름을 입속에 머금었다. 그는 하염없이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섞인 체념은 어려운 법이라는 말을 꺼냈다. 스가와라는 쿠니미와 갤러해드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유추 할 수 있었다.
가웨인은 마티니를 마셨다. 반절 빈 잔을 그는 체리목으로 단단하게 짠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마티니 잔의 둥근 바닥은 그가 전까지 보고 있던 편지 한 통을 덮었고, 줄어든 수면(水面)을 옐로우 라이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이 채웠다. 그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몸에 딱 맞춘 감색 양복에 스가와라는 잠시 넋을 놓을 뻔 했다. 여러 장 꽃잎이 겹쳐 만들어내는 작약처럼 화려한 모습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가웨인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웃음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등 뒤를 바라보고 걷기로 결심 했을 때부터 익혔던 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 가웨인은 마티니 잔을 다시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칵테일의 표면이 한숨에 간간히 흔들렸다. 스가와라는 그 모든 장면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포장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포장지였다. 허나 가웨인의 날카로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포장임에는 틀림없었다.
“캉가루, 혹은 진 앤 잇.”
“진 앳 인?”
“랜슬롯, 질문을 하나 할게. 이 두 칵테일에 대해서 알고 있나?”
가웨인은 엄숙하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윗한 발음이라는 것만 알겠어요. 그가 당당하게 말한 대답에 가웨인은 살포시 웃었다. 모른다는 건 넌센스야.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교양이 부족한가요? 그가 이어 말한 말에 가웨인은 전혀, 하고 대답했다.
“랜슬롯이 들고 있는 칵테일의 옛 이름이지.”
“아?”
“가령, 가웨인 경의 ‘오이카와 씨’ 같은.”
스가와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은 이제 캉가루나 진앤잇 같은 이름이 될 거고, 쿠니미 아키라의 이름은 ‘마티니’ 같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 가웨인은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잔을 비웠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 마다, 그는 멜랑콜리한 감정을 위 너머로 삼켜내고 있었다.
이 기묘하고 불쾌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웨인이 한탄하듯 말했다. 스가와라는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먼 사람 같은 감각을 느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티니 안에 들어있는 올리브를 입에서 굴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하고 가웨인이 운을 뗐다. 스가와라는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말 대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체리목 책상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작약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브로드 없는 옥스퍼드에서 제법 진중한 소리가 났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은 없다. 그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스가와라가 묻자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오늘은 짐승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토비오 앞에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더 가르칠 걸 생각 해 보라면서.”
“오, 랜슬롯. 내가 네 집 창문을 깨지 않도록 언행에 신경 써 주지 않겠니?”
“내게 좀 더 시선을 준다면 고려는 해 볼게요.”
보시다시피 손을 잡을 때 허락을 구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같은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눈높이는 여전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쓰다듬었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터키옥색 타이에는, 회색 스티치가 들어 가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넥타이죠? 스가와라가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에게는 기쁜 날로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는 서툴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타이 매듭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단단하게 묶인 매듭에 마른 입술이 닿았다. 그 당돌한 짓을 가웨인은 멀뚱하게 보고 있다가, 랜슬롯의 회색 머리카락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던데, 스가와라가 흘리듯 말한 말에 오이카와는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연인들은 흔히 짐승이 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의 불안감 중의 한 매듭 정도는 풀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내심 뿌듯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스가와라는 이미 잊혀진, 그래서 이제는 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토오루, 라는 이름은 마티니의 옛 이름인 ‘진 앤 잇’, 같은 멋스럽거나, ‘캉가루’와 같이 동글동글하게 뭉쳐 사랑스러운 느낌을 내기도 했다.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코우시, 라는 이름으로 화답 해 왔다. 그는 그의 목소리에서 ‘수줍음’이란 단어를 담은 소담스러운 작약 꽃봉오리를 떠올렸다. 개화의 순간은 이처럼 따듯할 게 분명했다.
“당신은 솔직하지 못한 게 흠이에요.”
“그래서 너랑 있으면 기분이 나빠.”
“날 추천하고, 선택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널 싫어해.”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싫어한다면 벌써 이 방에서 내쫓겼을 게 분명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와, 그 위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가웨인은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연인의 이름으로, 스가와라의 손길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쾌활하게 웃었다.
날 너무 좋아하는구나, 그는 안심한 듯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좋아한다는 단서조항을 내걸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어깨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피로한 사람이었고, 스가와라는 그를 백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그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다시금 정리했다. 완벽한 모양을 갖춘 매듭에, 그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왈츠의 박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마티니 한 잔 더 마실래?”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이 아닌 보드카로. 오픈되지 않은 버무스 보틀을 바라보며 10초정도 흔들어서. 그의 주문에 오이카와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내 추천인에게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진 베이스에 ‘흔들지 않는’ 마티니를 마시는 것도 고려 해 볼게요. 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입안에서 충실히 발음했다.
너무 어려운 조건이야. 할 수 없어. 가웨인 씨는 못 해. ‘가웨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매너, 라고 내뱉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그는 검지를 올렸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마티니 한 잔 주실래요? 스가와라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그의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댔다. 마티니처럼 묵직하게 감겨오는 애정표현이었다.
가웨인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뒤를 돌아 다시 술잔을 잡았다. 스가와라는 테이블 위에서 빈 잔을 가져다가, 그의 체리목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가웨인은 다시 솜씨 좋게 진과 베르무트를 다뤘다. 스가와라는 그가 허락하지 않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기대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스틱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문득,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랜슬롯이 아니라 스가와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담고 있었다. 마티니 때문일 거예요. 스가와라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마티니는 약으로도 썼다는 말 못 들어 봤어요? 그가 능글맞게 말한 내용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느새 양 손에 마티니 두 잔을 들고 스가와라의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터키옥색 넥타이에 들어있는 회색 스티치가 멋스러웠다.
“스물 네 시간 뒤에 집무실로 오면 되나요?”
“뒤로 하게 해 줄 거야? 코우시?”
오이카와는 ‘지워진 이름’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가에 가 있는 마티니 잔의 입구를 바라보다가, 스가와라는 어둑어둑한 조명이 그의 입술에 묻었다는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못 이긴 척 잔을 내려두고, 탁자 위에 한 무릎을 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놔요 토오루, 스가와라는 마티니 가득 묻은 입술로 그의 숨을 서툴게 탐했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마티니에 들어간 블랙 올리브 같은 키스였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아,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을 움켜쥐려는 움직임 같아,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의 귓불과, 등을 쓸었다.
정말 싫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진 다음, 가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랜슬롯은 스물 네 시간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화가 다시 경쾌한 울림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쾌한 바람이 열리지 않은 창 안으로 작약꽃 향기마냥 퍼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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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5. 14:37
예전에 시린님과 풀었던 순수의 시대 느낌의 카게스가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글이 되었네요..
***
―이 천한 손이 그대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으로, 낯을 붉힌 두 순례자 같은 내 입술로, 그대에게 점잖게 키스하여 추한 자국을 씻고자 하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오페라글레스 안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줄리엣과, 머리를 잘 빗어 올린 로미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녀가 사뿐거리며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입맞춤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줄리엣이 걸음을 멈추자, 카게야마는 자신의 귓가에 다가온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쪽, 하면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은 순례자의 그것처럼 엄숙하면서도 악마의 입맞춤처럼 장난스러웠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물길 너머를 꿈결처럼 이야기 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그 끝에 땅이 있다던 이야기를 전 믿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실증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법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굳은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줄리엣 역 배우가 숨을 멈추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셋을 새는 그의 프랑스어는 키스처럼 유려했다.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 결심을 할 때, 그의 눈가는 어린 새의 날갯짓처럼 떨리곤 했다. 카게야마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착한 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너무 욕되는 일이랍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예견 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손가락에, 카게야마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귓가에서 줄리엣의 나머지 대사를 옮겼다. 성자의 손은, 순례자가 가져다 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었다. 카게야마는 오페라글라스를 두 눈에서 땠다.
그의 하얀 소악마는 카게야마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키스가 아닌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가 웃었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이, 그의 눈꼬리에 자리한 야살스러운 점과 대비되어 있었다. 그는 남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성자나 거룩한 순례자도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박스석은 이미 연극의 한 무대였다. 스가와라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목례했다. 하얀 문조의 깃털처럼 부스스한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카게야마 또한 얼떨결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그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짧은 연극이 끝남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확대되어 보이는 세상에, 좁은 무대가 다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차례 입맞춤을 교환한 상태였다. 그들의 죄는 입술 안에 있지, 스가와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커튼에 손을 뻗었다. 옳지, 하며 칭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박스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뿐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더니, 자신의 숨결을 내어 불을 꺼트렸다.
“스가와라 씨.”
“그대의 눈에서 빛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는 어린애 같이 말했다. 치기어린 그 목소리에는 분명 카게야마의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과도 관련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종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는 느리게 스가와라의 얼굴 선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튼 너머의 세계를 상상했고,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성녀님, 손으로 하는 키스를 입 안에 담게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그래요, 스가와라가 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 줄리엣은, 서툴게 흔들리는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카게야마는 엷게 꿀을 발라 반짝이던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의 세계에 다가갔고, 그의 신앙에게 입을 맞추었다. 숨과 숨이 닿은 순간은 환희였으나, 탐욕스러운 혀가 섞이며 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절망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가와라씨, 짧은 치욕 끝에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살포시 웃었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닿아 있었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가와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들어줄지라도 성자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의 천사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흘렸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불안함은 숨결에 담아, 서로의 위 속에 가만히 담기곤 한다. 그 침전의 순간을 카게야마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서툴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다리는 스가와라의 다리 사이로 서툴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폭력적인 애정에 스가와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계집아이의 소리 같은 그 음색에, 카게야마는 그제 만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좋은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내 입술의 기도를 받아주세요.”
스가와라는 그녀와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스가와라의 목덜미를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였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뛰는 그의 맥에 키스했고, 뱀파이어처럼, 그 곳을 혀로 핥아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가이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자신의 입술이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 제 목이, 당신의 죄를 짋어지겠군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제 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고, 이내 자신의 왼손이 그의 목울대를 자르듯 쓸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파국이겠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종교가 될 수 없지요, 스가와라는 예쁘게 말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를 담고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죄인이었어요.”
“그럼 내 죄를 돌려주오.”
카게야마는 로미오처럼 말했고, 스가와라는 ‘코우시’처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줄리엣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익숙한 곡의 변주, 그 날선 느낌.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들리다,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키스에게도 이유를 붙이시네요.”
스가와라가 말했다. 한 막이 끝난 듯 박스석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오페라글라스를 챙겼다. 스가와라가 연 문에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의 성자는 밖에서 성냥을 꺼냈다. 은제 성냥갑 안에는 인이 발린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약간의 부딪힘은 다시 일렁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한동안,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심해 같아요, 카게야마가 속삭인 말을 스가와라는 무시했다. 그의 종교는 불친절하였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 시간을 인내할 만큼 똑똑하지도,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스가와라는 턱을 괴었고, 커튼을 열었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목 카라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하얀 목 아래에 피어난 붉은 열락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돌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스가와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말하는 어조로 큰일을 말하였다. 그는 긴 검지를 제 목울대에 대고, 천천히 그었다. 교수형 당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카게야마가 말하는 목소리에 그는 엷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에 꽃을 실은 마차를 보내고, 나를 보러 오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내뱉어진 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 씨와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가 목을 쓸며 물었고, 스가와라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 나는 노란 장미가 좋아. 신사는 벗어둔 실크햇을 건드리며 말했다. 곧장, 가겠습니다. 카게야마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오늘 등이 꺼지지 않음을 예고했다. 너의 꾀꼬리 같은 줄리엣이 건너편 박스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자신의 오페라글라스를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죄를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당신은 꼭 고전처럼 말하시는군요.”
또 다시 한 걸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사랑은 치기어린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지 뭐예요, 라고 호들갑 떨며 말하던 유모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는 두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빨간 장미를 보내 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강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질투심 많은 노란 장미를, 아니면 주인공처럼 핀 안개꽃을.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깊은 바다, 그 끝을 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아직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다에는 끝이 없었고, 다만 침전만이 자리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꿈결을 걷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그의 손톱을 쓸어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련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탈함 속에 숨겨진 울음과 울분, 카게야마는 그것을 다만 엿볼 분이었다.
가라앉거나, 혹은 녹아들거나. 카게야마는 그들의 끝을 상상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장미같은 아가씨는 오페라글라스로 그 둘이 앉아있는 박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빛 너머에 있는 것은 명백한 질투였고, 카게야마는 그 시선에 목을 매달고 싶었다. 그의 종교가 사랑한다, 짧게 속삭이는 것이 그가 살아갈 이유였기에 그는 스가와라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함께 수장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사랑한다고 정면을 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상대의 눈은 곧 바다였기에, 그는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스가와라는 대답 없이 그에게 노란 장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노란 장미와 안개꽃을 담은 상자를 보낼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관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가라앉은 시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숨결을 기억하며, 익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음 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언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막을 올리는 종소리가 물 위에 떨어진 파문처럼 넓게 퍼졌다. 물 아래로 가라앉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목을 긋던 손길이 선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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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4. 23:25
쌍방 짝사랑을 하는 고등학생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는 잠이 많은 이미지? 느낌? 이 좋습니다ㅠㅠㅠ쿠니미의 요즘 고민이 너무 귀여워서 살기가 힘들어요..
동인설정이지만 맛키랑 맛층은 제 안에서 배구유학을 세죠로 온 이미지가 있습니다...(당당)
***
하나마키는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데워 온 도시락에서 작게 김이 났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방이 차가운 탓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점심시간, 약 60분 정도가 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난방을 돌리는 건 가난한 자취생에겐 사치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은 적자였다. 그는 얄팍한 지갑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항상 먹는 불고기정식이 아니라, 계란정식 도시락이었다. 그는 반찬이 한 가지 정도 줄었음에 안타까워마혀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배구부 후배의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선배, 자취하시죠?’라고 묻던 그의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줍고, 당돌한 말투였다.
그는 그 날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도시락을 놓고 온 날이었다. 그는 학교와 5분 거리의 원룸에 자취하고 있었다. 주방. 그리고 거실 겸용 침실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쿠니미는 그 날 하품을 했다. 내리기 시작한 벚꽃잎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머리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몇 개의 꽃잎은 마치 여자아이의 귀걸이 같기도 했다.
쿠니미는 항상 달고 다니던 친구를 놓고 왔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름은 기억했지만, 락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미들 블로커’였고, 쿠니미는 ‘윙 스파이커’였다. 같은 포지션의 레귤러 후배에게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 있어? 하나마키는 곧잘 넘어가는 벽 앞에서 쿠니미의 말을 들었다. 쿠니미는 좌우를 돌려보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하나마키는 그 울림이 퍽 재미있었다. 쿠니미는 제법 간절해 보였다. 그의 눈은 많이 졸려 보였고, 그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 ‘락교’와 떨어졌을 때 의외로 커 보이는 키라던지, 단정한 머리카락이라던지는 하나마키의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취향은 없다-는 하나마키의 지론을 쿠니미 아키라는 2년 후배는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 블로킹, 쭉 뻗은 팔에 네트가 걸린 기분이었다. 강한 힘으로 쳐낸 그물망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하나마키의 마음은 봄철 숫처녀만큼 설레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란말이를 잘랐다. 가까운 곳에서 쿠니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 혹은 도시락의 포장을 제거하는 것 따위의 생활소음이 가득한 하나마키의 공간에서, 그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게 신기했다. 온전한 타인의 공간에서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운동부의 2년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거리감이 전혀 없다는 듯 행동했다. 제 멋대로 하는 꼴이 꼭 고양이 같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짧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뻗어오는 모양새는, 그가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들어온 그 첫날, 같이 담을 넘으면서 쿠니미는 수업시간에 깨어 있는 게 힘들어서 잘 곳을 찾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의 그 나른해 보이는 입술에서 하품이 나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하품을 받아 제 입에서 굴렸다. 봄의 나른한 햇살이 둘의 머리카락을 데우고 있었다.
나 자취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하고 하나마키가 묻자, 쿠니미는 오이카와에게 들었다고 대답했다. 키타이치 시절 선배? 라고 물으니 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던 꽃잎이 바람에 실려 공중에 나풀거렸다. 하나마키는 그것을 잡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진 않았다. 입 속에, 비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숨겼다. 졸지에 그의 혀는 씨앗을 숨기게 되었다.
하나마키의 침대는 싱글이었다. 집이 좁은 탓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침대가 좁다고 불평하면서도, 얌전히 그 안에 들어가서 몸을 뉘었다. 선배 향이 나요, 하는 무심한 목소리에 하나마키의 위에서는 벚꽃이 자랐다. 바람에 삼킨 말이 자란 탓이었다. 하나마키가 별 말을 하지 않자, 그는 곧장 돌아누웠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교복 니트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그의 다른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었다.
잠옷을 가져다 놓을까 봐요, 쿠니미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고
내 꺼 입을래? 하고 하나마키가 대답했다. 쿠니미는 핑크가 좋다고 대답했다. 핑크, 그리고 핑크였다. 하나마키는 그의 말에서 저의 머리카락을 생각하다가, 그래, 하고 말했다. 그 뒤에는 곧바로 숨소리가 이어졌다. 쿠니미는 빨리 잠드는 타입이었다. 예민하게 생긴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진 않았다. 하나마키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쿠니미는 등을 돌리고 자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천장을 보기 시작한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 잠버릇을 귀여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놀릴 시간이 마땅찮았다. 막 깨어났을 때 쿠니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을 함부로 걸 수 없었다. 막 잠들려고 할 때의 그에게 묻기에는 자는 애를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배구부에서 흘리듯 놀릴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에 자러 온다는 것을 킨타이치가 알게 된다면, 분명 실례가 되느니 하면서 방해 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계란말이를 씹었다. 은근한 단맛이 혀끝에 들었다. 지금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소음은 쿠니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많이 줄어든 거리감에 눈을 깜빡였다. 아마도, 일방적인 마음이겠거니 싶어 그는 귓불을 매만졌다. 고민은 개화하는 꽃송이처럼 제 부피를 늘려갔다.
하나마키는 의욕 없이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어째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 안에서 단맛이 빠지지 않은 터였다. 그는 자리를 옮겼다. 쿠니미의 옆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하나마키의 손끝에 닿았다.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쿠니미는 정말로 고왔다.
피부가 하앴고, 머리카락은 가지런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결이 좋았다. 윤기가 흐르면서도 찰랑거렸다. 특별히 린스나 헤어컨디셔너를 가지고 와서 씻는 것도 아닌데 좋은 향이 났다. 눈매는 졸려 보이는 모양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 졸린 눈과 다물린 입을 볼 때면 하나마키는 중국의 포사를 떠올렸다. 웃지 않은 후궁을 위해서 거짓 봉화를 올리다 죽은 왕을 절절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고, 매일 같이 집에 오는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었다. 담을 넘고 나서, 집으로 걸어올 때의 그 5분, 쿠니미는 벚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화사한 프리지아처럼 걸었다. 그는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매우 기뻐 보였다. 연왕이 포사의 미소를 위해 봉화를 올리고 군수와 제후들을 놀라게 했듯, 하나마키는 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며 그의 입가에 편안함을 얹는 것이었다.
쿠니미가 뒤척였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귓불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귀가 드러났다. 하얀 귀에서부터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고왔다. 하나마키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위속에 들어간 벚꽃 탓이었다. 그 날, 쿠니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그 꽃자락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나마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란 이름을 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의 눈감은 모습은 제법 어린아이 같은 태가 났다. 어른스러운 척 하려는 그 모습이 벗겨진 채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몇 백 년을 잤어도, 왕자에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하나마키는 익숙한 동화를 생각하다가 자리에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쿠니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에게서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났다. 그는 킁킁 향을 맡다가, 그의 말간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서툴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쿠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제 입술을 쓰다듬었다.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마법이 풀리지 않은 공주를 보며 하나마키는 그의 입술에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째깍이는 시계가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험했다. 하나마키는 바닥에 풀썩 앉아서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여전히 숨만 색색 내뱉고 있었지만, 하나마키는 오늘 아침 받은 진로조사서의 장래희망 칸에 ‘왕자님’ 이라고 적을까, 하는 공상을 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했을 때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먹은 벚꽃잎이 그의 위 속에서 여실히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음박 쳤다. 차가운 물을 틀었고, 그 물이 그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가려주고 있었다. 공주님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였지만, 왕자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며 급하게 세수를 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은 탓이었다. 하나마키는 화장실 벽에 기대었다. 다리가 풀려왔다. 그는 봄 때문에 미쳐간다고 애꿎은 계절에 화를 내뱉었다. 얇은 화장실 벽이 웅웅 울렸다. 하나마키는 이 점심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이 걸리고 가시덤불이 생겨, 멍청한 초침이 더 이상 달리는 상상을 하다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없는 핸드폰 알람은 지나가는 시간을 나타냈다. 5교시가 시작되기 10분이 남았다는 ‘모닝콜’이었다. 왕자가 아닌 선배가 로맨틱하다기보다는 기계적으로, 후배를 깨울 시간이 왔다. 하나마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다. 그는 쿠니미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학교 가야지, 일어 나.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나 조금만 더 잘래, 하고 웅얼거렸다. 아직 ‘후배 쿠니미 아키라’가 되기 전의 잠자는 자취방의 공주님을, 하나마키는 눈 속에 가득 담았다. 그는 진로조사서에 장래희망을 ‘왕자님’이라고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쿠니미를 세게 흔들었다. 방 밖에 벚꽃이 피어있었다. 쿠니미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 깊은 잠을 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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