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청어 간장 조림과 토마토 된장국에 어울리는 반찬에 대하여

 스가른 전력, [눈물] 이라는 키워드로 쓴 글입니다ㅠㅠㅠ...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를 보니까 요리하는 오이카와랑 받아 먹는 스가와라가 쓰고 싶어져서...:3c... 






 ***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울했다. 그랬기 때문에 청어간장조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청어는 겨울 생선이었고, 이 날씨에 퍽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그 푸른 생선을 꺼냈다. 겨울 청어는 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었다. 동그란 눈에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나무도마 위에 그 생선을 얌전히 놓았다.


    생선을 자를 때에는 언제나 눈을 가리고 싶어진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보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안타깝지만 오이카와 씨는 널 먹을 거란다, 그는 일부러 흥얼거렸다. 생선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머리를 빼고 간장에 조릴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청어의 맛은 머리에 몰려 있는 법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청어를 도마 위에 올리는 그 사이에 정이 든 건지, 오이카와는 청어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아까 방 안 한 구석에서 울던 자신과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도마 위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날 먹지 마, 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요리사였다. 그는 차조기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몸통을 사선으로 처리했다. 생선의 몸통을 사선으로 자르는 것은 의외로 현명한 일이었다. 어디가 ‘몸’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젓가락이 고루 가게 만든다. 분명한 부위는 눈뿐이다. 오이카와는 울고 있는 청어의 내장을 손질했다.


   요리를 하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 되는 법이었다. 배구를 그만 두던 날, 그는 청어를 졸였었다. 정종과 미림, 설탕과 진간장, 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섞으며 울었고, 그 간장에는 오래 된 염좌가 오롯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청어처럼 졸여졌다. 오이카와는 찬장에서 간장을 꺼냈다. 조림은 가장 눈물과 닮은 맛이었다. 오늘 경기에서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가 활약했다. 둘은 같은 팀이었고, 오이카와는 그게 퍽 슬펐다.


   파트너를 오랜 라이벌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가 코트를 떠난 건 오래 전 일이었고, 그는 이제 부엌의 식기구를 지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그의 마음은 청어처럼 팔딱이고, 쉽게 가라앉을 때가 있었다. 그는 조림간장을 만들면서 민어나 우럭을 졸일까 생각했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는 나름의 발악이었다.


   그는 실파를 한 손에 잡고 도마에 눌렀다. 완전히 순서가 잘못 된 요리법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경기 하나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청어 냄새 가득 나는 도마에 칼질을 했다. 배구 코트와 배구화가 마찰하는 소리와는 퍽 다른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목에 갈치 뼈가 걸린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동거인의 직업을 떠올렸다. 배구 코트에 제법 가까이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보통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청양고추와 통생강을 꺼냈다. 그는 생강을 얇게 저몄다. 생강의 알싸함이 손끝에 묻을 때 마다, 그는 우울해졌다.



   음식에 묻은 사연 때문에 우울한 건지, 아니면 원래 우울한 기분을 청어가 만드는 건지 오이카와는 영 알 수 없었다. 대파와 청양고추가 내는 향에 코가 찡해졌다. 눈물이 났다. 그는 오늘 조기조림에 내놓을 반찬들을 떠올렸다. 간장조림에는 야채와 매실 장아찌도 들어간다. 일품요리인듯, 일품요리 같지 않은 애매함이 묻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손을 얼굴 가까이 대니 매운 내가 돋아왔다. 그가 내는 도마 소리처럼,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를 치는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돋아왔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부엌이 아니라 그 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애매한 생각들이 그에게 떠올랐다, 다시 사라졌다. 마치 국물의 대류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볼로 눈물이 떨어졌기에, 그는 토마토 된장국을 하기로 결심했다.


   토마토 된장국과 청어 간장조림. 맛이 센 반찬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 줄 음식이 필요했다. 그는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조금 있다가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냉장고를 열었다. 요리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내심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그는 손을 한 번 씻고 냄비를 불에 올렸다. 그는 간장 소스를 넣은 다음 청어와 재료들을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청어 간장 조림은 강한 불에 세게 졸여야 한다. 간장냄새와 고추 향이 그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알토란을 꺼냈다. 돼지고기를 렌지에 해동시키고, 오이카와는 쌀을 세 컵 퍼 씻었다. 쌀뜨물은 토란을 삶을 냄비에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그는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눈물이 더 번져왔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쌀을 마지막으로 씻어 밥통에 올려두었다. 약하게 기침이 났다. 눈물이 목에 걸린 탓이었다. 스가와라는 흰 쌀밥 같은 남자였다. 재미있는 구석은 없는데다가, 쾌청한 날 보다 우울해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그게 자신과 같은 이유일까, 오이카와는 토란을 끓는물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토란이 냄비의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는 오늘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혼자 밥 먹어, 라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였다. 그게 오이카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왔다. 혼자 먹는데도 둘이 먹는 것처럼 반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일이고, 그 습관에 비롯되는 감정들은 대부분 우울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두기로 결심 한 다음 날 그는 다섯 시에 일어났었고, 애인과 헤어지고 난 다음 날에는 이인 분의 식사를 만들곤 했다.


   그 비틀어진 사건들을 그는 간장에 진하게 조렸다. 그는 냄비 뚜껑을 열고 끓고 있는 조림간장을 청어 위로 부었다. 눈물 같은 맛이 우러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혼자 식탁에 앉는 일을 싫어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외로움이었고,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홀로 밥을 먹는 일이었다. 빈 식탁은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버석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괜히 입을 움직였다. 그는 토란이 든 냄비 불을 서둘러 껐다.


   그는 토란을 깠고, 쌀뜨물에 익혔다. 그는 돼지고기 안심을 볶았고, 된장국 육수를 우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이미 그의 서브에는 깊은 군살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 외로웠고, 그 과정은 여러 울음을 동반한 길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불이 꺼진 식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숨은 짙게 내렸고, 그는 청어 밑 가스레인지를 껐다.


   그는 청어 간장 조림을 그릇에 담았다. 홍고추를 어슷썰기 해서 갈색으로 졸여진 청어 위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독한 우울함이 그 위에 있었다. 그는 토란을 안심과 함께 볶아냈고, 된장국에 토마토를 넣었다. 스가와라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오늘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인분의 식사를 만들었다.




   밥통이 소리를 냈다. 뜸이 들려면 삼분 정도가 남았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스가와라가 들어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외로운 날 혼자 먹는 밥맛은 최악이었다.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고,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탄 간장만큼 암담했다. 우연이 겹쳐서 최악이 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기분이 울렁거렸다. 밥통이 뜸을 들였다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장하네, 하고 그는 밥통을 칭찬했다. 그는 플라스틱 주걱으로 밥을 잘 저었다. 밥 김이 손에 닿아 뜨거웠다. 그 따듯함에 괜히 더 울컥했다. 그는 식탁 앞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김나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채소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눈앞에 네가 있다면 당장 양배추를 자를 텐데.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조금 떴다. 둘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혼자 하는 식사가 어색했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잘 먹겠습니다, 뒤에 돌아오는 웃음은 없었다. 원래는 스가와라가 하는 말이었다. 그 다음에는 ‘맛있게 먹어주세요’ 라는 말이 따라와야만 마땅했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 셔벗을 먹을까. 그는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는 청어에 손을 댔다. 간장 맛이 진하게 스며서 맛있었다. 토란도 나쁘지 않았고, 토마토 된장국도 평소보다 더 잘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깊게 울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사춘기 소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세게 문질렀는지 눈가가 당겼다.


   그는 일부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세게 냈다. 외로움을 쫓기 위한 방법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옆집에서 넘어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늦게 들어온다. 그는 어두침침한 무드등 아래에서 토란을 집었다. 얇게 썬 돼지고기와 함께 먹으니 식감이 제법 좋았다. 코끝이 다시 아려왔다. 따듯함을 위 속으로 집어넣을수록 속이 뒤틀렸다.


   항상 멋있게 있으니까, 오늘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엉망인 얼굴로 뒤를 돌았다. 눈앞에 스가와라가 서 있었다. 그는 양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 버스, 아슬아슬하게 탔지롱, 하면서 그는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입 안에 들어 있던 토란을 어색하게 씹어 삼켰다.


    “내 밥 있어?”


    스가와라는 ‘울었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선택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 빨간 것 좀 봐, 스가와라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볼에 차가운 두 손을 댔다. 셔벗처럼 달콤한 손길이었다. 나 아까까지 되게 우울했어, 하고 오이카와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와, 청어네. 스가와라는 방어였으면 서운 할 뻔 했다면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그의 앞에 젓가락과 밥그릇을 놓았다. 스가와라는 제 쪽에 있는 밥통에서 밥을 꺼내 적당히 퍼서 담았다. 고요하던 부엌이 순식간에 지저귐으로 물들었다. 그는 오늘 버스를 놓칠 것 같아서 먼저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간표가 꼬이는 바람에 빨리 오는 버스를 탔다는 말까지의 여정을 내뱉었다.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울함이 점점 가시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에서 파란 하늘을 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가 내리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급격한 변화였다. 그는 스가와라의 홍조 띈 얼굴과, 그가 앉은 맞은 편 식탁을 바라보았다. 왜?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카게야마랑 이와이즈미 잘 하더라.”

    “응.” 

   “그거 봤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청어에 슬픈 게 가득 묻어 있더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토란을 입에 넣었다. 있잖아, 식탁에 야채 부족하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그가 양배추를 써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 없어서 이 칙칙한 걸 채소도 없이 그냥 먹고 있던 거야? 그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말하기 미묘한 사실이 있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양배추와 양상추로 간단하게 만든 샐러드를 앞에 놓았다. 오늘 뭐가 널 우울하게 했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의 경기가 잘 풀렸고, 오늘 밥을 혼자 먹는 것도 싫었고, 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토마토 된장국을 마시면서 그의 말을 천천히 들었다.


   “이해 안 가지?”

   “아니 이해 가는데.”


   살다보면 갑자기 울고 싶을 때가 생기거든. 나도 배구 코트 가까이에서 처음 봤을 때 그랬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표정 이면에 있는 ‘닮은 감정’을 생각했다. 짭쪼름 한 눈물 맛이었다. 스가와라는 청어 간장 조림 같은 맛이었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오이카와는 그럴 때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먹는 사람이 ‘둘’이라는 것만으로도, 오이카와는 행복했다. 쉽게 찾아온 우울함은 약간의 비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이래서 밥이 좋아, 그가 문득 말한 말에 스가와라는 나도 그래, 하고 대답했다. 밥도 잘 안 먹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슈가? 오이카와가 다시 질문했고, 스가와라는 글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오이카와는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상쾌하고 상큼한 맛이 혀끝에 돋았다. 그는 그 아삭아삭함을 입 안 가득 굴렸다. 이거 금방 했는데 맛있네? 스가와라가 물었다. 너랑 같이 있어서 그래,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이나 가만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익숙하기 때문에 말까지 식사와 함께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풍경을 퍽 좋아했다.


   “아.”


   스가와라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뭐 잊은 거 있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반쯤 남은 자신의 공기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대박 큰 거 잊어버렸어. 그는 토란을 괜히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밥 다 먹고 하면 되는 거지, 오이카와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까의 눈물은 이미 소화시킨 뒤였다. 아냐, 지금 할 거야. 스가와라는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는 남긴 밥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잘 먹겠습니다.”


   스가와라는 그 말 이후 합장을 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오이카와는 괜히 토마토 된장국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너 말 안 해? 스가와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우울함은 이미 그의 뱃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밥이 덮은 것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까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은 미소장국보다 짙었고, 다시마와 멸치가 들어간 육수나, 국수장국보다 진했다. 그는 자신의 슈가에게 웃어보였다.


   “맛있게 먹어 주세요.”

[하나쿠니] 점심시간,

 섹피au 하나쿠니입니다. '아침' 이라는 글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쿠니가 얼른 연애했음 좋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약일까요.... (오열)










***


   삼학년 층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항상 원 플러스 원 세트상품처럼 묶여 다니던 배구부 일학년 레귤러 중 하나인 킨타이치였다. 하나마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킨타이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고, 킨타이치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더니 쿠니미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왜?”

   “어디서 자고 있을 것 같아서요.”


   킨타이치는 체온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그는 합숙 다음 날 꽤나 늦게 일어났었다. 하나마키는 다 알고 있다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뱀은 이래저래 불편하네, 하나마키가 흘리듯 말하자 킨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는 아이스팩을 잊지 않고 챙겨줘야 하고, 겨울에는 핫팩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하자, 하나마키는 그런 몸으로 배구를 할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그는, 어쨌든 하고 있긴 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킨타이치의 어깨가 으쓱이는 걸 보면서 하나마키는 자신도 찾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역시 쿠니미 ‘애인’ 답네요, 킨타이치가 요즘 배구부 안에서 도는 농담소재를 섞어 말했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브이를 그려 보이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겨울과 가을 사이에 있는 바람이 제법 쌀쌀맞은 날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느긋하게 들어 낮잠을 자기 좋은 날이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킨타이치가 삼학년 층에 올라오면서까지 쿠니미를 급하게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느긋하게 걸었다. 종이 어떻게 되었든 결국 하나마키는 ‘큰 고양잇과’ 동물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넓은 교정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결국 ‘강아지’인 (물론 킨타이치는 중종 늑대개였다.) 킨타이치가 쉽게 찾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하품을 하며 교사 뒤편에 있는 ‘신데렐라 계단’으로 다가갔다. 마법이 풀리기 전, 그녀가유리구두를 벗어가며 내려오던 그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공터가 나왔다. 높은 나무가 별로 없는 그 반원의 작은 정원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하나마키는 사교회에서 만난 ‘동문’에게 들어 알고 있던 곳이었다. 그는 쿠니미가 그 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비밀의 정원’의 분위기와 쿠니미는 퍽 닮아 있었다.


   그는 신데렐라 계단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너 온 곳에는 익숙한 공주님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182cm라는 키가 무색하게, 그는 얌전히 의자에 수납되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는 것은 고양잇과 동물에게는 하품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는 풀 밟는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벤치 뒤편에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여름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그만큼 햇볕이 강하게 든다는 소리였다. 하나마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쿠니미의 옆에 앉았다. 그의 고개는 앞, 뒤로 까딱거렸다. 차라리 벤치를 전부 사용해서 누웠으면 편했을 것을, 그는 일부러 불편하게 자고 있는 듯 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 쯤 깨기 위해서일까, 하나마키는 하품을 하며 쿠니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고왔다.


   하나마키는 언젠가의 하교길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요즘 수업 시간에 깨 있는 게 힘들어요, 하는 목소리는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체력이 남들보다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다가 체온까지 불규칙하니 운동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체질이 아니었다. 귀한 집에서 귀한 손으로 자라서 온실에서 길러져야 할 도련님 같았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햇살 향이 났다.


   그는 쿠니미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틈만이 그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로 옮겼다. 진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그는 꽤나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래서는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 또한 놓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엮었다. 팔짱을 낀 다음, 그의 손을 잡았다. 혼자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뱀은 두 손으로 잡아도, 능청스럽게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 흰 뱀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먼저 깨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그는 쿠니미의 손을 꽉 잡았다.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잠이 그렇게도 좋은지 쿠니미는 반응 하나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숨소리를 간간히 들으면서 목 안으로 웃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아, 그는 입 속에서 내내 머물던 말을 떠올렸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은 햇살 향을 가득 머금고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목에 이를 박고 사냥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뭔가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고, 소유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이 들쭉날쭉한 마음을 참아보기로 결심했다. 뱀은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하나마키는 하품을 했다. 점점 햇살이 그에게도 녹아오는 것 같았다. 고양잇과 동물과 변온동물의 유일한 공통점은, 따듯한 햇살 아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둘의 목적은 제법 다르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타나는 행동은 같았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은 느낌이었던지라,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합숙에서 끌어안았을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예민한 코끝을 간질였다.


   찾으면 바로 알려달라던 킨타이치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평소의 쿠니미라면 절대 30cm 이하의 거리감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 변덕 심한 동물이 얌전한 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대부분이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하나마키는 흑표범이었다. 그는 목 끝으로 다시 웃었다. 햇살은 진하게 내리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애매한 추위에도 볕은 따듯했다. 어깨에 기댄 쿠니미가 새삼스럽게 예뻐, 하나마키는 눈을 감기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든 그의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주잡은 손을 괜히 바라보았다. 깨기 전 까지는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잠에서 깨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말할까. 나 손 안 잡고 잤는데 네가 자면서 잡더라, 너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네가 안 놔줘서 수업에 늦었잖아, 따위의 말을 생각하면서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햇살처럼 졸음이 느릿하게 몰려왔다. 잡은 손으로부터 온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이 마음을 자신의 후배가 얼른 알아줬으면 했다. 실실,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목 끝에서 고롱고롱 퍼져나왔다.






***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에 쿠니미는 눈을 떴다. 잠시 점심시간에 눈을 붙이려던 게,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것 같았다. 목이 뻐근해서 그는 목을 양 옆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누가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옆을 돌았다. 익숙한 선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합숙 첫날밤이 자연스럽게 번져와 쿠니미의 얼굴에 붉은 노을이 들었다. 지금 하늘에 걸쳐져 있는 것과 퍽 닮은 것이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주황이 들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쿠니미의 것보다 뻣뻣한 머리카락이었지만 만지고 있는 느낌은 좋았다. 그는 언제나 소리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고양이의 특징이라 하지만, 쿠니미는 그가 이렇게 다가 올 때 마다 불안했다. 하나마키는 쿠니미가 치는 모든 방어기제를 차근차근 녹여가고 있었다.


   합숙 때도 그랬다. 엉겨오는 180 넘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는 성실하게 꼬리까지 엮어 오며 그를 안심시키고 체온을 나눠 주었다. 사람에게 나눠 받는 체온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고, 날이 쌀쌀해질 때면 그가 생각났다. 쿠니미는 이 사실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선배에게 의지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체온 조절 같은 사적인 문제 까지 도움 받고 싶진 않았다.


   뱀은 불편하다. 변온동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체온을 조절하려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했다. 쿠니미는 차라리 여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사람보다는 아이스팩에 의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가을과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그리웠다. 핫팩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사무치곤 했다. 쿠니미는 괜히 그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개성있게 잘 생긴 얼굴이 무너지는 게 제법 웃겨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계속 이러고 있었다면 어깨는 안 아팠을까, 쿠니미는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윙스파이커 선배의 안위를 걱정했다. 자주 쓰는 손인 오른쪽 어깨에 기댔다는 게 아쉬웠다.


   쿠니미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예쁘다고 어깨를 빌려주고 체온을 나눠주는지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하나마키는 간간히 쿠니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후배와 선배 사이의 ‘좋아함’이라는 단어로 이런 헌신을 설명 할 수 있는 걸까, 쿠니미는 하나마키가 자신에게만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자고 있는 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목에서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쿠니미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긁었다. 중종이라고 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라,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제법 귀여운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일어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마키를 설설 밀었다. 그는 잠귀가 의외로 밝은 지, 얼른 눈을 떴다.


    “잘 잤어 허니?”


    하나마키가 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쿠니미는 잡은 손을 반대편 손으로 가리켰다.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쿠니미를 깨우러 왔는데 말야, 날 너무 좋아했는지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거 있지-로 시작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쿠니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나마키 또한 그의 손마디에 힘을 주었다. 연인들 끼리 하는 손장난과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놓아 준 하나마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배구부 연습에도 늦었다는 말을 꺼냈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쿠니미의 팔을 하나마키가 잡아 당겼다. 그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으슬으슬해 지는 기온에 그는 짧게 떨었다.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추워? 하고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하나마키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강한 팔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의 체온은 적당히 따듯했다. 겨울에는 내가 필요할 것 같지? 그는 능청스럽게 물어왔다. 손난로보다는 좋은 것 같네요, 쿠니미가 건성으로 대답 한 말에 하나마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쿠니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 지고 있었다. 너 아까 나 잘 때 목 쓰다듬었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마키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어깨 안 아파요? 쿠니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반대편 손을 어깨에 얹고 몇 번 돌리더니 유연해서 괜찮다는 말을 꺼내왔다.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마요, 쿠니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왜?”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하나마키는 또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떤 의미의 좋아함인지 물어보려다가, 쿠니미는 말을 말았다. 그의 말이 멈춘 걸 알았는지 하나마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하나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교복 재킷을 벗어 쿠니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하나마키의 향이 강하게 났다. 꽃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고, 따듯한 햇살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나마키는 그에게 팔짱을 꼈다. 선배? 하고 행동의 경위를 묻자 하나마키는 그저 ‘춥잖아’ 하고 대답 할 뿐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금은 의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르는 척 하나마키의 손을 잡았다. 하나마키가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 느끼면서 쿠니미는 애매하게 웃었다. 참으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마키의 손은 가을과 겨울의 과도기마저 잊을 정도로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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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Europa


 스가른 전력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원래 일인칭이라면 '그'라고 지칭하지 않고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너무 글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이번엔 '그'라는 호칭으로 타협 해 보았습니다. 위성과 행성의 관계는 참 로맨틱한 것 같아요.










01.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 싸고 있다. 표먼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02.



   스가와라 코우시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볼 때면 울컥하고 치받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그의 관계에서 비롯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나는 이 감정을 오롯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어붙은 유리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꼭 울 것 같았다. 익히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경쾌하게 부르지 않았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다 녹은 아이스크림 국물의 끈적함을 닮았고, 길고 긴 여름의 더위를 닮았다. 평소 상쾌한 얼굴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가 얼어붙은 것처럼 날 대했다면, 나는 내 이 짝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하얀 손가락으로 라떼가 든 머그컵 입구를 쓸었다. 저기, 있잖아, 하고 그의 목소리는 망설임을 가득 담아냈다. 나는 괜히 빨대를 돌려 유리잔에서 소리를 냈다. 맑은 소리에 그가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 씨는 말야, 상쾌 군의 망설임을 들어 줄 정도로 한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일은 내게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의 앞에서 표정을 만들 때 마다 가슴 한 가운데서 열기가 치받쳤다. 스가와라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부르는 귀여운 후배의 이름만으로 그가 품고 있는 서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두 번째' 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

   "뭐, 그 녀석 대놓고 무심하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장 된 표현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배우들은 일부러 몸짓을 크게 하여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는 들은 적이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해야만이 다른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입술을 오물거렸다. 전혀 상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어 붙은 스가와라에게서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라는 말은 가혹하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나는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는 오이카와는 이런 거 모르잖아, 라는 말로 응수 해 왔다. 고개를 들어 본 그의 얼굴은 '이런 마음도 모르면서 그런 말 하지 마'라는 문장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애석 한 일이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 있으니까 사랑하는 데 실패는 안 했을 거 아냐, 라면서 나름의 이유를 드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이처럼 타인을 이해 할 줄 모른다.


   대부분 실패 한 적 없으니까 이렇게 네 연애 상담도 해 주는 거잖아? 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재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스가와라를 볼 때면 먼지 우주가 생각났다. 햇살 안에 들어 반짝반짝하고, 성운의 모습을 만드는 것은 결국 '먼지'일 뿐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지면 결국 바닥에 깔릴 뿐인 하찮은 우주인 것이다. 사랑을 하는 그는 먼지 우주 속의 유로파였다.


   나는 다시 스가와라를 사랑하게 된 경위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신을 슬프게 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해서 듣기 좋았지만, 카게야마와 그 간의 서사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도 이 카페의 이 자리였다. 배경음악으로는 우타타 히카루의 'fly to the moon'이 흐르고, 눈을 들면 고흐의 '아몬드 나무' 그림이 보였다. '파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 스가와라와 같은 자리에 앉은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얼음이 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앞자리에 누가 앉는 지도 모르고 고갤 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민트초코맛 음료가 있었고, 나는 눈처럼 흰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라떼를 들고 있었다. 내가 휘핑크림을 반절 정도 퍼먹을 때야,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짓무른 그에게 나는 티슈를 건넸다.


   나도 그 맘 잘 알아, 였나. 아니면 나도 알아. 였나. 나는 그 때 스가와라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 한 건 그는 배구 이야기 아니야, 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자신을 유로파에 빗대었다. 에우로페의 이름을 한 그 위성. 하늘과 별은 생긴 이래로 언제나 소년의 로망이었음으로, 나는 그 위성이 담고 있는 서사를 잘 아고 있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 67만 1050km라는 한 번에 헤아리기 어려운 거리 밖에서 목성을 바라보며 제 거리를 걷는 '별'이었다. 목성에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아주지 않으며, 단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성이었다. 지독한 짝사랑의 별이었다.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그 단어가 품고 있는 깊이는 다 녹은 민트초코프라페가 가지고 있는 텁텁함보다도 쓴 맛이었다.


   목성에게 다가가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하고 그가 물었다. 시적인 말이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형편 없이 갈라져 있어서, 나는 그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 다음에야 대답 할 수 있었다. '우주의 질서'가 무너져서? 하고 대답하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끄덕이는 머리카락은 가볍게 나풀거렸고, 나는 얼떨결에 나도 짝사랑을 하고 있어서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거짓말이 시작이었다. 그 거짓말이 내 사랑의 '핵'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먼지와 가스들이 뭉쳐져서 별이 되는 것처럼,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두 번째 위성이 되었다. 나는 그의 유로파였고, 스가와라는 토비오의 유로파였다. 우리의 목성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나와 스가와라의 목성이 가지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내 우주의 시작은 스가와라였다.


   별 거 아닌 울음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 있다. 스가와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지루하지? 내 짝사랑, 하는 목소리에는 얼음이 서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손을 뻗었다. 내가 뻗는 손길은 얼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는 그것이 위로라도 되는 양 가볍게 잡았다. 소행성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내 그림자, 내 뒷면, 혹은 내 내핵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는 얼음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하얬고, 예뻤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타입을 좋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날 좋아 해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보다 주는 걸 받는 게 좋았다. 좋아 할 여유도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주의 첫 대폭발처럼 다가왔다. 먼지와 가스만 차 있던 어둠뿐인 공간에 별이 뜨는 것처럼, 그는 나를 위성으로 만들었다.


   나는 위성이었다. 오이카와 미안해, 하고 그가 다시 사과했다. 토비오의 이름을 부를 때 보다 짙은 목소리였다. '슬픔' 같은 약한 모습은 너 한테만 보여주고 싶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라는 말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오이카와 씨는 착한 사람이라서 네 지루한 사랑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 줄 거거든? 내 허풍 가득 한 말에 스가와라는 다시 웃었다.


   유로파의 표면은 얼음으로 덮여 있다. 100km 두께의 얼음 아래에는 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물의 다른 이름은 분명 슬픔일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붙여도 하등 모순이 없을 것이었다. 나중에 토비오랑 잘 되면 맛있는 거나 사 줘.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 웃는 모습은 내가 봐도 홀릴 만큼 잘 생겼으나, 다른 쪽을 보고 공전하는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오이카와 토오루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일이었으나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우리 둘, 그리고 토비오를 낀 이 관계에서는 '우주의 법칙'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두 번째였고, 나는 두 번째의 두 번째였다. 우리는 서로를 사이에 두고 공전하고 있다. 우리는 유로파였음으로, 우리는 3.5512일을 지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갈 것이었다. 별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야말고 충실하고 충직한 사랑이었다.


   오이카와, 너는 잘 되고 있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하고 대답하니, 스가와라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소설가가 된다. 헛점 하나 없는 거짓말, 알리바이를 지어내는 추리 소설가였고, 둘도 없는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로맨스 작가였다. 스가와라는 나와 달리,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 곧은 눈에 나는 다시 소행성과 충돌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왜 스가와라 코우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나는 다시 의문을 제시한다. 내가 왜 걔를 좋아하게 됐을까, 라는 형태로 그 말은 입 밖으로 나갔다. 대명사를 사용한 서툰 연막에 스가와라는 운명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주는 우연에 가까운 필연에 의해서 만들어 진 거라는 과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쾌 군은 똑똑하네, 라고 칭찬하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뭐, 두 번째들 끼리 힘내자구, 하면서 서툴게 하는 말에 스가와라는 그래, 하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그 하이파이브를 할 때 마다, 나는 얼음층을 쌓았다. 두껍고, 두터운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스가와라와 사랑하는 꿈 속에서 산다. 내민 손에 나는 손을 얹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손이, 아래로 추락해 떨어졌다. 창 밖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려, 아무 것도 아닌 먼지를 '우주'로 바꿔놓고 있었다. 예쁘다, 하고 스가와라는 먼지우주처럼 웃었다.


   위성은 자신의 축과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궤도를 끝없이 돌 뿐이었다. 내 끝나지 않는 공전은 스가와라 코우시를 축으로 한 노래였고, 사랑이었고, 꿈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더 가까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으로.






03.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싸고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하나쿠니] 아침

트위터에서 풀었던 하나쿠니 섹피au의 한 장면을 옮겨왔습니다. 리얼 한 장면이라서 그른가 레알 짧네요... 

아 하나쿠니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늘’했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오이카와나 마츠카와가 질 나쁜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옷 아래로 파고드는 손을 느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가장 베스트일까, 하나마키는 쫄보로 보이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 대담한 손길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자는 척을 해야 할까, 그는 망설이며 몸을 뒤척였다.


   손은 그의 배에서 멈추었다. 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하나마키는 어제 누구의 사이에서 잠들었는지를 기억하려 했다. 그의 왼쪽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는 핫팩과 침낭으로 중무장한 오이카와의 옆에 있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변온동물의 보모는 이래저래 귀찮은 역할이었다. 하나마키는 구석자리에 누운 친구를 생각하려 노력했다.


   배앓이를 할 것 같았다. 손은 좀처럼 뜨거워지려 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벽처럼 자리했음으로 오이카와는 아니었다. 하나마키는 슬쩍 눈을 떴다. 의외의 사람이 그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두텁게 친 (마츠카와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햇빛을 직접 받는 걸 싫어했다.)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살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떨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손을 쥐었다.



   쿠니미였다. 언제나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연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투명한 그의 피부 아래로 뱀 비늘이 언뜻언뜻 비쳤다. 하나마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는 후배의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쿠니미의 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누가 새벽에 보일러를 끈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혀를 찼다. 전혀 반류인 것처럼 보이지 않던 그의 예쁜 후배는 변온동물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불을 들추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의 두꺼운 잠옷 아래에서 뱀 꼬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그 매끈한 하얀색을 보다가, 얼른 자신의 이불을 겹쳐 그에게 덮어 주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 아래로 춥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쩐지 애처로워 하나마키는 그를 얼른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몸이 얼음장 같았다. 그의 하얀 피부에 비늘이 간간히 번져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쿠니미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이 좁아져 있었다. 뱀과 비슷한 눈이 커졌다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춥지? 하나마키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팔 안쪽에 그의 머리를 대게 했다. 쿠니미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아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얇은 허리를 제 다리로 감았다.


   경계심 많은 후배는 떨어질 법 한데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꼭 기계의 ‘절전모드’ 같아서, 하나마키는 일부러 그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그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지 말라는 말 또한 나오지 않았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반응들이 돌아오지 않는 기분은 신선했다. 그가 내뱉는 숨이 가슴에 가쁘게 닿았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바로 아래의 목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애인이 반류면 이런 재미가 있겠구나. 하나마키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고양잇과 동물의 체온은 다른 동물보다 더 따듯하다. 하나마키는 흑표범 중종이었다. 따듯하지? 하나마키가 물었다.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울자울 한 모양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장난치는 맛이 있었다. 정작 눈 앞의 하얀 뱀은 정신이 없는 듯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눈을 감았다. 졸음과 함께, 따듯한 벤치에서 간간히 낮잠을 자던 쿠니미의 모습이 밀려왔다. 가까운 기억이었다. 그는 항상 햇살을 받고자 했다. 교복 위에 겉옷을 몇 겹씩 껴입던 모습 또한 이해가 됐다. 따듯해서 기분 좋아? 하나마키의 말에 쿠니미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예상외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선배, 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하나마키가 물었다. 고개를 젓는지, 눌린 팔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게, 저요, 비늘이요, 그러니까, 하면서 쿠니미는 머뭇거렸다. 반류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같은 변온동물인 오이카와가 핫팩이니 침낭이니 뭐니 하면서 부산을 떨 때, 얌전히 열선이 있는 보일러 자리를 차지한 걸까 싶어서 하나마키는 짧게 웃었다.


   품속의 쿠니미는 잔뜩 굳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더듬다가, 제 혼현을 내었다. 그는 짙은 검은 꼬리를 하얀 뱀 꼬리와 엮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자, 하나마키가 느긋하게 말했다. 쿠니미의 머리가 품 안에서 움직였다. 꼬물거리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품 안에서 똬리를 튼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하나마키는 그의 등줄기를 토닥였다.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 같아서 하나마키는 코를 묻어 킁킁거렸다. 선배, 하고 나지막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쿠니미를 꼭 끌어안았다. 싫을 법 한데도 얌전히 안겨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무심하고 애어른 같은 구석이 있는 후배의 의외의 면이었다. 얼음장 같던 몸이 서서히 온기를 머금어갔다. 그 느낌이 너무나도 포근해, 하나마키는 문득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오는, 그런 아침이었다.이대로 다시 잠이 든다면 아침 내내 놀림감이 될 게 확실했다. 하지만 하나마키는 제 가슴에 쏟아져 내리는 숨결을 가만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번 일 때문에 엮여서 커플 취급을 받게 된다면 나름 ‘이득’이었다. 쿠니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하나마키가 기억하기로, 그는 이런 놀림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하나마키는 오늘 저녁에는 같은 이불에서, 이불 두 개를 덮고, 같이 자자는 제안을 할까 고민했다. 추운 걸 싫어하는 이 변온동물이 어떻게 대답할 지 상상하는 것은 나른한 아침의 즐거움이었다. 하나마키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는 것 마냥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선배, 하고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문득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에 두른 손을 때었다. 꼬리를 풀고, 그의 허벅지에 올려둔 다리를 내리려 하자, 쿠니미는 다급하게 하나마키 선배, 하고 불러왔다. 그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쿡쿡 웃었다. 그는 다시 그를 제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이런 모습 처음이야, 하면서 달콤하게 중얼거린 말에, 쿠니미는 이런 모습 보여주는 게 처음이라고 툴툴댔다. 참,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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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새장 안의 작은 새 7.



紫簫聲裏彤雲散 자줏빛 퉁소 소리에 붉은 구름 흩어지고

簾外霜寒鸚鵡喚 발 밖엔 찬 서리 내리고 앵무새 지저귀네

夜闌孤燭照羅帷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時見踈星度河漢 때때로 성근 별 은하수 건너가네





***

   홍등 위에 쌍희(囍)자가 적혀 있었다. 스가와라는 눈물 흘리는 여식의 팔을 잡고 움직였다. 왜 울고 있습니까, 그가 물었고 여종은 아무것도 아니라 연신 대답 할 뿐이었다. 잠시 멈추라 고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스가와라는 그녀가 비단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을 기다렸다. 조금 더 가십시다, 여종은 다시 그가 자신의 팔을 잡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가 물었다. 스가와라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은은히 퍼지던 수국 향이 지루하게 퍼졌다. 왕께로 가시나이다. 지금 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혼례복을 입으셨나이다.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 했다. 스가와라는 혀를 찼다. 그는 슬며시 눈을 뜨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눈꺼풀이 단단히 달라붙어 떠지질 않았다.


   카라스노 국의 재상, 스가와라 코우시 님이 드십니다. 문간에서 여종이 크게 말하였다. 사람을 미리 물려 놓은 것인지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치에 닿아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여종이 정리하였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만질 수 있는 마지막 비단이었다. 스가와라는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의 하얀 손을 남색 비단이 가리었고, 그의 뒤로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긴 비단이 늘어져 있었다.


   수고하였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와, 스가와라는 귀를 쫑긋거렸다. 곧장 돌아가거라, 하나마키 공이 기다리고 계실 게다. 왕은 자애롭게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그 잔혹한 목소리에 그녀가 신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미 걸어오면서 예견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등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나갔다. 발걸음 소리마저 이미 죽어있는지라, 카라스노의 하얀 새는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창호지 너머에서 우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스가와라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그의 마지막 날, 자신만을 담게 요구해도 모자란 날에 한 여자아이의 개인적인 비극이 끼어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 눈앞의 하얀 새를 바라보았다. 매번 상상했던 그 풍경으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침소에 앉아 있었다.


   “스가와라.”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가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푸른 용이 새겨진 자수 천을 쓰다듬었다. 스가와라의 단정한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이었다. 그는 그 가리개에 농염하게 입을 맞추었다. 가까이 다가온 숨결을 느낀 것인지, 하얀 새는 자신의 날개를 가벼이 떨었다. 긴장하였느냐, 하는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스가와라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무슨 짓입니까,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황제의 차가운 손이 스가와라의 목선을 쓸었다. 그 꼴이 매우 우스웠다. 자신을 능멸하고 욕보이는 것만 같아, 스가와라는 주먹을 꼭 쥐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싫으냐, 하고 왕이 물었다. 타국의 재상은 자신이 담고 있는 치욕을 입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였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려 했다.”

   “당신의 진심은 ‘조롱’입니까?”


   스가와라가 쏘아 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그의 눈에 두른 천을 풀었다. 스가와라의 색이 옅은 속눈썹에 꿀이 붙어 반짝였다. 그것은 보석 결정과도 같았다. 옥보다 맑고 진주보다 투명한 아름다움이 그 곳에 위치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손목을 감싼 세 겹 소매와, 목에 딱 달라붙는 옷고름을 바라보았다. 옥 단추로 고정 된 망토와, 긴 옷자락이 그의 발목까지 아름답게 감싸 내렸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비록 양피두나 점취(点翠)로 고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총새의 꼬리깃으로 만든 나비장식들이 그의 머리카락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싶었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파란 수국만큼 맑은 옥구슬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에서부터 흘러내려, 여인의 머리인 것 마냥 모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구슬과 구슬이 닿아 소리를 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달빛마냥 은은하였다. 스가와라가 걸친 모든 왕의 장신구는 빛을 머금었다. 해를 담아 빛을 낸다는 달과 같은 모습에 오이카와는 그의 눈두덩이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손대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스가와라는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그 서슬퍼런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짧게 웃었다. 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어도 그는 그였다. 그 깃털을 잘라 유폐시키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었다.


   “사랑해서 그리하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벌려지는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물렸다. 왕의 것을 물어볼 참이냐고 묻는 그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질릴 것만 같았다. 그가 반응하지 않아 마음이 식었는지, 그는 그의 입 속을 간질이다 손길을 거두었다. 나는 한 나라의 재상입니다. 스가와라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다는 듯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나의 왕이 자리를 온전히 보존할 때까지, 그 때까지만 기다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스가와라가 한탄하듯 말하였다.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남자의 옆에 있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어깨를 쓸었다. 그가 걸친 청룡무늬 망토의 결이 흐트러졌다. 나를 믿어주십시오, 스가와라는 약효가 다 한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그 절실함이 싫지 않았다. 허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타국의 왕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다.


    마음을 나눈 적이 있었다. 하나의 곡옥을 반으로 갈라, 정표로 삼았었다. 그가 기린의 부름을 받기 전 까지, 타당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이런 돌발행동을 마음 전체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이었다. 왕이시여, 하고 그가 부르자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코우시, 오이카와가 자신을 갈구하는 마음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어 화답했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지 않느냐.”

   “돌아온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널 신뢰할 수 없다.”


   애석한 일이군요, 스가와라는 엷게 웃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옷섶에 손을 대다, 그만 내려 놓았다. 그는 대신 그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굳어버린 속눈썹을 천천히 핥았다. 그의 숨결과, 농밀한 입맞춤이 닿아 결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과, 그의 영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애달픈 행위조차 스가와라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타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어미 젖을 찾는 아이처럼 스가와라를 끌어안았다. 스가와라는 떨리는 그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거나, 포옹을 받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토록 바라던 움직임, 바라던 장소와 의복이었다. 허나 왕의 첩이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닌 왕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당신이 왕인 이상,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합니다. 스가와라는 눈 내린 듯한 어조로 종언을 고하였다.


   이미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구나. 오이카와는 반대편 눈에 입을 맞추었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했다. 제 마음을 찢어 기어코 피를 보는 그 날선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충실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런 사람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돌려보내기 전에 여인의 옷을 입히고, 자신을 찾아오게 하며, 황후의 것으로 준비된 서관을 준 것은 자신을 봐 달라는 구애였다.


   명석한 그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오이카와는 알을 깨고 나온 아기새처럼 천천히 눈을 뜨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색 옅은 머리카락에 달려있는 아오바죠사이의 파란 색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자신의 색을 입고 있으나 스가와라의 마음은 이미 검은색으로 물든 이후였다. 그들은 보색관계에 위치 해 있었다. 평행선은 영원히 닿지 않는 선이었다. 나를, 봐 주지 않겠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달린 구슬장식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결별이자, 영원한 상실을 의미했다. 이런 행동을 한 것을 고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신하들을 물리고, 이미 죽을 아이들에게 날 이 곳으로 안내한 것 또한 그런 연유겠지요, 스가와라는 천천히 이별을 고하였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주련? 코우시,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이별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우리는, 왕께서 어떻게 하든지간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코우시,”

   “그걸 가장 잘 아시는 것은 왕이시지 않습니까.”

   “이름, 불러줘.”


   그 때처럼. 오이카와는 말갛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오이카와의 의복은 왕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 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고이는 것을 스가와라는 하늘을 보며 무마했다. 나에게 다정하지 마십시오, 다가오지 마십시오. 당신은 왕이고, 나는 타국의 신하입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동안 너를 가둬 두었던 이유를 알고 있니,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도, 모르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남자는 깊게 상심했다. 그는 스가와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마치 신부에게 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하얀 새의 입술에 발려 있던진한 연지가, 신랑의 입술에 조금의 색을 옮겼다. 이름 불러줘, 오이카와는 다시금 속삭였다. 토오루, 하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처음 그 사람의 옆에서 너를 봤을 때 나는,”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스가와라는 말을 잘랐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견고하게 쌓아올리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국경 근처에 있던 서원, 카라스노에 왕이 세워지기 이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쿠니미가 미운 건 오늘이 처음이구나. 오이카와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약 왕이 아니었다면, 네 마음은 여전히 내게 닿아 있었을 것이냐?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재차 말하는 것은 카라스노의 예절이 아니었다. 그 깊은 한숨에 오이카와는 체념한 듯 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숙인 그의 등을 보았다. 왕은 한참이나 일어선 채로, 자신의 발끝을 보다가 방울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났다. 조금 있다가, 쿠니미가 안으로 들어올 게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난 것 같았습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실도할까봐 무서운 게지.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이 달려 있었다. 어떻게 하든 그는 왕이었다. 스가와라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절하였다. 오이카와는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 그곳이 몰리는 자리에서 스가와라는 그에게 오롯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드러난 흰 목이 흰 사슴 같았고, 그가 여러 겹 걸쳐 입어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흰 까마귀의 깃털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슬펐다. 소꿉장난도, 잠깐의 유희도 이제 끝이구나. 그가 애매하게 웃었다. 스가와라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울 소리가 들리며 쿠니미가 부리는 사령이 당도하였다. 그가 눈을 깜빡이는 그 작은 순간, 사령과 함께 스가와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느리게 얼굴을 쓸었다. 체념만이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평소에 입던 하늘거리는 옷이 아닌, 딱 달라붙는 정식 혼례복이었다. 소꿉놀이는 다 하셨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예복을 갖춰 입는 그에게 다가왔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기린은 화가나 보였다. 마지막 날이기에 장난을 좀 쳐봤단다. 오이카와는 농을 거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쿠니미야, 당분간은 하나마키의 방에서 기거하거라, 피 냄새가 진동하여 살 수가 없겠어. 왕의 명령에 쿠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널 이해할 수 없단다.”


   쿠니미는 제 분에 차 식식거렸다.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술이,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그가 걸친 소매 없는 망토에서 혼례복 차림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원래 의복을 갖추어 입고 침대에 앉았다. 이리 오거라 쿠니미야, 그는 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기린을 불렀다. 어린 기린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리와 앉거라, 오이카와의 다정한 말에 쿠니미는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는 제게 가까이 다가온 쿠니미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게다. 그 말을 어린 기린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쪽 나라에는 네가 데려다 주련? 오이카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는 귀찮은 일은 질색입니다. 기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라면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다녀오고 와선 이제 ‘아무런 일’도 없을 게다.”


   쿠니미는 왕의 확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제 품안에 가득 들어오는 기린을 끌어안았다. 나라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혼례복을 입고 있던 제 옛 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토록 좋아했었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기연이 닿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오이카와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쿠니미가 능청스럽게 묻는 말 뒤에,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암시를 덧붙였다.






***


   “마지막 변덕은 즐거우셨습니까?”


   스가와라는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가와라의 주변에 휘장을 쳤다. 머리장식과 의복을 탈의하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스가와라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미미한 피 냄새를 맡으면서 괜찮다는 답변을 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덮은 화려한 머리장식을 풀었다.


    더 이상의 희생을 치루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요. 스가와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휘장 너머의 하나마키는 잘 알고 계셔서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와이즈미 공이 저 대신 다테와의 국경에 가 계신 것도 천운이지요. 하나마키는 농을 섞어 진심을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다행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이즈미 님께서 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저는 한 품에 담기는 상자에 타고, 목 위로만 카라스노에 돌아갔을 게지요.”

   “제법 살벌한 농담을 하십니다.”


   하나마키는 휘장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는 수건으로 피 묻은 칼날을 닦았다. 피 냄새가 하루 빨리 사라지게 해야만 했다. 스가와라가 내뱉는 한숨 소리가 속이 비치지 않는 천을 타고 흘러 나왔다. 수심이 깊으십니까, 아니면 미련이 있으십니까? 하나마키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대답을 신중히 선택하여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우리의 위치가, 위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친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키는 그의 농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구슬 장식을 하나하나 머리에서 때어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점점 더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보석함에 구슬 장식을 갈무리 해 넣었다.


   그는 미리 받아놓은 물로 얼굴을 씻었다. 오이카와의 지문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덩이를 쓸던 그의 혀 끝, 그 감촉을 생각하다가 얼굴을 세게 씻었다. 휘장 너머에서 콧노래가 들려왔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유행가였다. 스가와라는 그 가락과,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때때로 성긴 별이 은하수 건너가네, 스가와라가 노래를 화답하자 하나마키는 밖에서 경박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노래를 아십니까?”


   하나마키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경 지대에서도 익히 유행했던 노래가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목 끝으로 웃었다. 언제나 유행하던 노래였습니다. 사랑이 이뤄지는 만큼 이별도 많으니까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긍정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걸쳐진 망토와, 길게 늘어지는 겉옷을 벗으면서 애처롭게 노래의 전문을 떠올렸다.


   내일 날이 밝으시면, 우리 기린과 함께 카라스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마키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스가와라는 적지 않게 놀라며 말했다. 직접 ‘아프지 않은 것’을 보여주라 하셨습니다. 하나마키는 제 손등에 묻은 피를 씻어내며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아 온 여자는 저항이 거셌다. 오늘 몸과 옷에 든 피 때문에,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자 하나마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왕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는 무뎌진 마음에 새 봄이 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스가와라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물 젖은 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얼굴에 피가 몰려 금세 붉어졌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사와무라의 얼굴과 카라스노의 상황을 보면 오늘의 두근거림도 묽게 희석 될 것이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런 전례를 남겨서는 아니 되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원래 의복을 걸쳤다. 그의 마음이 다시 재단(裁斷)되고 있었다. 그는 사와무라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약속했었다. 자신의 모든 정情을 버릴 만큼, 그는 나라가 소중했다.


   그는 휘장 너머로 나아갔다. 공께서는 목간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가와라는 온통 피를 뒤집어 쓴 하나마키에게 권하였다. 하나마키는 집안에서 의복이 도착하는 대로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웃음은 비린 느낌을 주고 있었다. 피 냄새 짙은 방 안을 스가와라는 서둘러 빠져 나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바람이 불어 오이카와 토오루의 향이 짙게 든, 하얀 새의 깃털을 흐트러트렸다.






 ***



   松暗水涓涓 소나무 숲 어둑하고 물은 맑게 흐르는데

   夜凉人未眠 밤이 차가워 아직 잠 못 이룬다

   西峰月猶在 서쪽 봉우리엔 아직도 달 떠 있고

   遙憶草堂前 아득히 초당 앞에 있을 그대를 생각한다

[오이스가] 새장 안의 작은 새 6.




***


    쿠니미는 눈을 떴다. 방에는 꽃향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덮은 남성의 겉옷을 바라보았다. 그는 엷은 홍색이 들어있는 의복을 쓸었다. 그는 손을 더듬었다. 그의 작은 손끝에 남성의 심장 소리가 걸렸다. 그는 그 위로 쓰러졌다. 쿠니미, 하고 잠이 든 목소리가 그를 간질였다. 그는 쿠니미의 비단옷을 슬슬 쓸어내렸다.


   "왜 더 자질 않구."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저런, 이리 와 안기거라."


   하나마키는 혀끝을 짧게 찼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는 몸을 옮기었다. 그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남자의 몸에는 온통 꽃냄새가 스며 있었다. 무슨 꿈을 꾸었느냐, 하고 그가 그의 귓가를 쓸며 물었다. 하나마키의 손가락은 쿠니미의 동지冬至밤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쿠니미는 말을 삼켰다. 하나마키가 그의 귀를 물었다.


   귀에 혀가 닿았다. 그는 귓바퀴를 느리게 쓸었다. 눅눅한 숨이 닿아왔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웃었다. 말하기 싫으냐? 그가 물었고,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입니다, 하는 목소리에 그는 흥이 식었는지 바싹 붙여오던 몸을 땠다. 쿠니미는 하얀 속적삼에 하나마키의 큰 옷을 걸쳤다. 어깨와 품이 맞지 않는 옷이었다. 가야겠습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귀찮은 걸 싫어하면서 어찌 밤을 걸으려구, 하나마키는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쿠니미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나마키는 손을 뻗어 그것을 느리게 쓸었다. 나쁜 꿈에 대해서 묻지 않으신다면, 하고 조건을 거는 목소리가 꽤나 앙큼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는 흘러내리는 하나마키의 겉옷을 움켜쥐었다. 내 꼴이 어떻습니까? 그가 물었고, 하나마키는 요염하다 말하며 그의 허리를 간질였다.


   "왕실 모독입니다."

   "내 옷을 걸친 건 너였다."


   쿠니미는 목 끝으로 웃었다. 밤이 짙게 내린 방 안이었다. 쿠니미는 그가 벌린 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의 팔에 머리를 뉘였다. 코끝이 가득 꽃향기로 물들었다. 향낭을 차십니까? 쿠니미가 작은 소리로 물었고, 하나마키는 널 위해서라는 말을 내뱉었다. 네 앞에서 완벽하고 싶다는, 내 바람일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쿠니미의 눈을 가려주었다. 쿠니미의 긴 속눈썹은 하나마키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제 잘 것입니다. 작은 기린이 속삭였다. 하나마키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그것을 허락했다. 쿠니미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가지런하고 일정한 움직임으로 속삭일 때쯤에, 쿠니미는 눈을 슬며시 떴다. 그는 기분 나쁜 꿈에 대해 생각했다. 짙은 피바람이 부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하나마키와 함께 있었다. 그의 겨울은 전방으로 활을 쏘고 있었다. 바람이 멈출 때 마다 그의 화살촉은 큰 짐승들을 쓰러트렸다.


   꿈속의 기린은 시든 동백꽃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폭포수가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그는 제 몸에 맞는 연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은실과 금실로 새겨진 옷은 바람에 흔들렸고, 그는 하나마키에게 어리석게 질문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쏴야 합니까,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꿈이었다. 쿠니미는 꿈은 항상 반대를 보여준다는 격언을 생각하려 했다. 밖에서 바람이 불어 나무의 어린잎들이 흔들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짙은 어둠이 그의 눈꺼풀 밑을 간질였다. 그는 새벽을 틈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마키의 품속이 너무나도 따스했기에 그는 쉬이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는 왕의 기린이었고, 왕의 봄이었다. 모든 계절의 시작이자 왕의 방패여야만 했다. 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가려진 창과, 짙은 발, 그 너머 여러 겹으로 쳐진 비단 휘장을 바라보았다.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쿠니미야, 하고 하나마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거라, 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가 눈을 감자 하나마키는 옳지, 하고 그를 칭찬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어디를 쏘아야 합니까. 쿠니미는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하나마키는 네가 많이 졸린가 보구나, 하며 대답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쏘다, 라는 말과 다치다는 말은 같은 선상 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쿠니미는 제가, 졸린가 봅니다.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하나마키의 입가에 가 살랑거렸다. 실로 봄이구나.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약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꼭,  쏘아야 한다면 자주 사용하는 손의 반대쪽 손등이겠지. 기린은 한숨섞인 정인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다시 꿈이 어린 기린을 등나무마냥 옭아매기 시작했다. 쿠니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하나마키의 품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옷을 추슬렀다. 밤길이 차가웠고, 그는 큰 옷울 여몄다. 풀린 머리카락이 그의 발걸음마다 어지럽게 흔들렸다. 날이 밝자마자 왕을 뵈어야 했다. 그의 집착 때문에 나라가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돌려보내야만 한다. 쿠니미는 떨리는 가슴을 느리게 쓸었다.


   정사(政事)는 어린애들 손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왕은 성군이어야만 했다. 그는 한 번 무릎을 꿇었던 자를 제 손으로 베려 했다던 아카아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쿠니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왕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벤다면 그가 품고 싶어 하는 하얀 새 쪽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멈춰야 했다. 그것이 아오바죠사이의 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눌러야 한다. 쿠니미는 자신이 스스로 한 생각에 떨었다.


   온기가 그리웠다. 그는 냉한 방 안에서 홀로 헤매었다.





***


   카게야마는 한숨지었다. 밤이 길었다. 스가와라가 기거하던 방 앞에서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달빛이 가장 환하게 들어오는 방이었다. 국경에 있던 서원과 비슷하게 꾸며진 방이기도 했다. 호수 한 가운데 섬처럼 선 스가와라의 방 앞에서 카게야마는 한참을 서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는 먼 곳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물에 들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퍽 불안정하다 느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카라스노로 향한 서신은 하나도 없었다. 국경을 넘으려던 난민을 사살했다는, 국경지대 수비대장의 보고만이 연일 들어오고 있었다. 전서구를 날리려 해도 쉽지 않았다. 단 하나의 생명도 통과하지 말라는 왕의 엄명이 내려 있었다. 그들은 푸른 하늘에도 금을 그었다. 카게야마는 이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인한 처사였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쿠니미의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카게야마는 앓아누웠다는 것이 단순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언가 속에 품은 것이 음험해 보이기도 했다. 쿠니미가 왜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는지, 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가 걷는 발걸음마다 그림자가 짙게 내렸다.


   그는 오이카와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국경지대에서 기거할 때도 그랬다. 카라스노의 황실이 옹립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의 속은 열 길 물속보다도 깊었다. 카게야마가 보기에 그의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집착이었다. 그는 절대로 성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성급하게 걸었다. 인간의 겉모습을 벗어 던지고 아오바죠사이로 길을 달릴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람에 그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깃털 장식이 흔들렸다. 그는 그 미미한 무게에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떠나기 전에 그가 걸어 준 것이었다. 기린 님은 언제나 급한 성격이 문제십니다. 무언가 결정할 일이 있을 때에는 절 생각하시어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는 가슴을 쓸었다. 그는 한 나라를 짊어지고 있었다. 성급한 행동은 전란을 부를 뿐이었다.


   그는 오이카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호수 한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삼 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틀을 잡겠습니다. 스가와라는 성난 그 앞에서 당당히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오이카와 공의 은혜는 잊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조금의 말미를 주십시오. 카게야마는 그의 당당함이 부러웠으나, 그 당당함으로 인하여 아오바죠사이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되었다.


   토비오, 강직한 자는 언제나 꺾이기 마련이다. 유연한 자가 되거라. 그는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미워했다. 기억을 잃은 기린임을 미리 알고 있던 탓이었을까, 혹은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카게야마는 바람 부는 정자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행동을 돌아봤자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는 스가와라가 아직은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걸었다. 경비 인원을 빼고서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게 누구냐, 카게야마는 짐짓 위엄 있게 소리쳤다. 날세. 익숙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는 자신의 왕에게 무릎을 꿇어 사죄했다. 그럴 필요 없어, 사와무라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왜 잠에 들지 않았느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걱정 되느냐?”

   “그렇습니다.”


   사와무라는 호수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신의 새장에서 날아간 하얀 새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했다. 그는 손을 뻗어 흑기린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오바죠사이의 왕은 스가와라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해. 그는 확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사와무라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손을 땠다. 그는 등 뒤로 두 손을 가리었다.


   약조했기 때문이다. 카라스노의 왕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증인이었고, 둘은 피로 지장을 찍었어. 사와무라는 카게야마가 모르는 이야기를 말하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자. 그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카게야마의 마음은 그 정도의 말로 진정될 파랑이 아니었으나, 그는 자신의 왕께 무릎을 숙여 인사하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기린의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왕이 아니라 그 수족이겠지. 사와무라는 자신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을 잘 부려. 몇 수 앞까지 미리 예측하고 장기를 두는 느낌이야. 그의 왕은 혀를 차냈다. 그 안타까운 소리에 카게야마의 마음에 다시 소란이 일었다.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듯 하였다.


   “그 쪽과 제가, 이야기를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가와라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카라스노의 기린은 그의 말뜻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쿠니미라도 보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청하였다. 왕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네가 스가를 아끼는 건 잘 알고 있단다. 사와무라는 자애롭게 말했다. 찬바람이 둘의 사이를 가르며 불었다. 멀리서 까마귀가 우는 듯 했다.


   그쪽 기린은 총명한 아이지? 사와무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쿠니미는 기린 중 가장 먼저 개화한 아이였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아오바죠사이를 지탱할 정도면 대단하다는 증거겠지. 사와무라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하였다. 그렇다면 스가는 조만간 카라스노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말은 카게야마에게 선언처럼 들렸다. 카라스노의 기린에게 이 인과관계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알기 힘듭니다.”

   “둘 사이가 갈등처럼 엮여서 그렇단다.”


   사와무라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 선을 지킬 줄 알 것이라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알았다 말하였다. 이제 들어가 편히 쉬거라, 그의 왕은 자애롭게 명령했다. 기린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였으나, 그는 왕에게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사와무라는 아이를 어르듯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기린으로서의 자아가 성립한 지 얼마 안 된지라, 그는 아직도 기린의 예절에 어색했다.


   나를 믿느냐? 사와무라가 물었다. 왕께 무릎을 꿇은 이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였다. 그럼 네 마음속에 자리한 파랑(波浪)도 잠재우거라.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왕이 나아가는 자리를 가만히 따라 걸어갔다. 사와무라에게 무릎을 꿇기 전 스가와라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왕이 하시는 말에는 한 점 의심이 없어야 하며,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백 번 천 번, 만 번까지 생각 해 보거라. 카게야마는 숨을 골랐다.


   스가와라가 그리하라 했으니 카게야마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미로 같은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그가 매어준 깃털장식을 소중하게 쥐었다. 갈림길에서 그는 그의 왕과 반대편에 섰다. 강녕하시옵소서. 기린은 자신의 왕께 다시 무릎을 굽히었다. 그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스가와라가 세우길 원한, 스가와라 코우시의 왕이었다. 카게야마는 밝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동이 트기엔 아직 먼 새벽이었다.






***


   동이 튼 것이 확실한데도 스가와라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시동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그의 귀를 간질일 뿐이었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어두운 시야에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저 가만히 고여 있으시면 됩니다. 산들바람 같은 야하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하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스가와라를 안심시키려 했다.


   왕의 명령이십니까? 하얀 새가 물었다. 야하바는 그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단장을 하여 진상하라는 말이 내려왔습니다.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스가와라의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밤 같은 시야였다. 나는, 한 나라의 재상입니다. 그는 강직하게 말하였다. 야하바는 다시 왕의 명령이라는 말만 반복 할 뿐이었다.


   당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가와라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그는 날이 선 채로 대답했다. 아오바죠사이의 동장군, 하나마키 타카히로입니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혔다. 왕의 용안을 함부로 보셔서는 아니 되는지라,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그의 눈에 천을 두르겠다는 설명을 했다. 그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 전하였다.


   여러 겹의 천이 스가와라의 몸에 둘러졌다. 파란색으로 장식 된 전자를 보며 하나마키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색을 둘러 침소로 데려오지 않으련, 하나마키는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자신의 왕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왕의 색을 다른 나라의 재상에게 입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스가와라가 머무르는 곳은 서관이었다.


   그 오랜 은유를 하나마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눈 색과 닮은 자수정으로 세공한 귀걸이를 스가와라의 귀에 거는 시동을 쳐다보았다. 이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 아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걸려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베는 것은 언제나 괴로웠지만 할 수 없었다. 왕의 평판에 흠이 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하나마키는 왕께 하사받은, 낭아초가 새겨진 검을 쥐었다.


   이와이즈미가 자신 대신 국경으로 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사였다. 이와이즈미가 이 모습을 본다면 격노할 게 분명했다. 그의 검 끝은 오이카와가 아니라 스가와라를 향할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볼모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제 모습이 어떠하기에 그리 숨을 쉬시나이까.”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워 말을 잃었습니다.”

   “곧 질 날만 남겠습니다.”


   스가와라가 농을 걸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백일홍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린 아이가 그의 손가락에 옥으로 만든 호갑투를 씌웠다. 그는 여인처럼 단장했다. 연홍빛 물감이 그의 눈가에 찍혔다. 하나마키는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는 꿀을 발라 반짝이는 스가와라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색이 없는, 하얀 재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화려한 모습이었다. 혼례를 올릴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왕께서 들라 하십니다. 하나마키는 뒤를 돌았다. 물총새 깃으로 만든 점취장식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진주알이 촘촘히 박힌 비녀로 긴 머리카락을 고정한 쿠니미가 있었다. 그는 소매가 없는 긴 털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표정이 거의 없던 그의 얼굴에 강한 혐오가 일어 있었다. 얘야, 재상님을 데리고 갔다 이리로 와 주련? 하나마키는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녀에게 부탁하였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 해괴한 짓의 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하나마키는 그녀의 가족을 따로 거둬야 겠다 생각하였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이니 걷는 데 신경 쓰셔야 하실 겝니다. 쿠니미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하나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거칠게 자른 뒷머리가 흰 천에 가리어, 선이 엷은 그의 뒷모습은 정인에게 시집가는 여인의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서궁을 벗어나 동궁으로 향했고, 쿠니미는 한참을 들여 제 속에서 말을 정리하였다.


   우리 왕께서는 드디어 실도 하려는 겝니까? 그가 분노에 차 일갈한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믿어보지 않으련, 하나마키는 정복을 갖춘 제 기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동궁으로 향하는 길에 모든 사람을 물렸습니다. 쿠니미는 한 자 한 자 똑바로 곱씹어 발음하였다. 하나마키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한동안 서궁에서 멀리 떠나 있거라. 피냄새가 가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멀쩡한 시종들을 반란죄로 싸잡아 처형하는 것을 보면 분명 까무라칠 것이다. 그는 한 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보며 말하였다. 이 파괴적인 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를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이토록 오이카와 혼란스러운 오이카와를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왕은 언제나 강직하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성군이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먼저 왕을 만났어야 했습니다. 쿠니미는 야하바를 노려보았다. 기린의 손끝에 걸려있는 호갑투의 흑요석이 눈물처럼 반짝였다. 왕의 직접적인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야하바는 그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기린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정리했다. 그는 이 웃긴 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야하바와 하나마키는 대답할 수 없었다.


   피냄새가 서궁을 물들이기 전에 먼저 떠나 보겠습니다. 아오바죠사이의 흑기린은 길고 긴, 불안한 밤이 지난 다음 날이 이런 혼란스러움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는 듯 조소했다. 그는 자신의 왕이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만 했다. 정正하지 못한 왕은 끌어 내려야만 했다. 쿠니미가 걸친 일구종의 끝자락이 냉기를 먹어 무겁게 흔들렸다. 야하바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의 생각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한 식경 정도가 지난 후에 묻혀야 할 피의 무게가 상당하였다. 왕의 개를 자처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가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 할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이번 일은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오이카와의 말을 믿기로 했다. 마지막,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의 검에 새겨진 낭아초(狼牙草) 장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이스가] 오랑제뜨

   오랑제뜨를 받았었다. 이와이즈미의 것이었다. 때는 1월 14일이었고, 그는 부활동이 시작하기 전에 부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었다. 이와이즈미는 클래스메이트가 준 거라고 말하면서, 오랑제뜨 여러 개가 들어있는 투명한 포장지를 흔들었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햇빛에, 오렌지에 졸여진 설탕입자들이 반짝였다. 쿠니미는 제 손에 들린, 그 손이 많이 가는 디저트를 들고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부실에서 유일하게 오이카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안 먹어? 오렌지 싫어해?”


   이와이즈미가 쿠니미를 보며 말했다. 쿠니미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하고, 초콜릿 발린 부분을 입에 넣었다. 이와이즈미는 아빠라도 된 양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무심함에 감탄했다. 오이카와는 오늘 날짜가 매우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없는 날짜였다. 쿠니미는 아직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누나가 있다고 했던가, 아니면 소금 캬라멜 같은 디저트를 좋아해서 그런가. 오이이카와는 만약 쿠니미가 오랑제뜨를 만드는데 드는 노력을 알고 있다면, 먹는 게 꺼려질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와가 좀 더 세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가 장난기를 섞어서 말하자 쿠니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끄덕임에 흔들렸다. 이와이즈미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오이카와에게 다가오는 그 느린 풍경 뒤로, 하나마키가 오랑제뜨를 하나 더 집으려는 걸 막는 쿠니미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제 몫의 디저트를 얼른 입에 넣었다. 오렌지에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게, 오렌지필부터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오랑제뜨는 오렌지필에 초콜릿을 묻혀 굳힌 디저트이다. 초콜릿 샵이나 쿠킹클래스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메뉴이지만, 완성도 있는 제품을 만드는 건 의외로 까다롭다. 특히 주재료인 오렌지필은 직접 제작하기 매우 어려우므로, 다소 비싸더라도 구입할 것을 추천하는 편이다. 이 디저트는 초콜릿이 입에서 너무 빨리 녹아 허전할 때 생각나는 디저트이다.



   오이카와는 설탕을 계량했다. 흩어질 가루눈처럼 모여 있던 설탕을 볼에 붓고, 미리 체에 걸러둔 시럽을 부었다. 설탕이 눈물처럼 녹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작은 결정 하나 남지 않도록 녹이려했다. 그의 가벼운 손길에 설탕은 쉽게 풀어졌다. 오이카와는 이제 좀 이 과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처음 소금으로 오렌지를 씻은 날로부터 정확히 사일 째 되는 날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집은 조용했다. 그의 오렌지필을 보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던 엄마도, 뭔가 먹을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기웃거리던 타케루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시럽을 불에 올렸다. 약한 불에 올린 시럽은 이제 사랑처럼, 착실하게 온도를 올릴 것이었다. 그는 괜히 시럽을 저었다.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가운데서 아까 타케루가 그에게 조잘대던 말이 형체를 가지고 다가왔다.


   여자 친구도 없으면서 정성이다 토오루. 오이카와는 그 정직한 말이 오렌지의 흰 부분 같다고 생각했다. 꽤나 많은 양의 설탕을 바르고 졸여내도 쓴 맛을 담아내는 그 ‘흰색’처럼, 타케루는 오이카와의 약한 부분을 단번에 찌르고 들어갔다. 쓴 맛이 혀에 올라타는 과정 같았다. 누가 우리 누나 아들래미 아니랄까봐, 오이카와는 괜히 툴툴거렸다.


   그는 따로 빼둔 오렌지를 바라보았다. 고작 부엌에 달린 백열등 빛을 흡수했을 뿐인데, 별처럼 반짝였다. 공을 들여 커팅한 보석 같았다. 오이카와는 오렌지필 하나를 집었다. 시럽으로 여러 번 코팅했기 때문에 모양이 가장 못난 것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법 볼만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다행이도 쓴 맛은 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다 끓지 않은 시럽을 보며 이 디저트가 손이 매우 많이 가는 음식임을 재차 실감했다.


   ‘그 날’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시 번져왔다. 이와이즈미가 단순한 ‘클래스메이트’에게 받아 온 오랑제트의 맛이 오이카와의 오렌지필에 번져오는 것 같았다. 서툴지만 신경 쓴 맛이었고, 끝 맛이 썼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완성품도 그녀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괜히 시럽을 저었다. 냄비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켰다. 그는 그에게 사랑의 달달함만 맛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괜히 마음에 스크래치가 났다.


   그 날 연습시간에 하나마키는 쿠니미에게 ‘왜 먹는 걸 막았냐’라고 물었다. 그의 어린 투정에 쿠니미는 우리가 모두 남자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게 굉장히 멋들어진 답변임을 알고 있었다. 보통 남고생라면 이 디저트의 이름도, 안에 들어있을 노력도 알아챌 수 없었다. 오랑제뜨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오렌지를 설탕에 여섯 날 동안 조린다는 사실을 어느 고등학생이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겠는가. 쿠니미는 그걸 나눠먹는 생각을 하는 것도 실례라고 단언했다. 맞는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끓어오르기 시작한 시럽을 얼른 들어, 오렌지필이 가득한 볼에 부었다. 부엌의 백열등에서 반짝임을 빼앗은 듯, 스테인리스 볼 안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오랑제뜨를 바라보며 그 사람을 생각했다. 부엌 식탁 위에 달린 백열등마냥 강하게 내리쬐는 배구코트의 조명 아래에서 산뜻하게 빛나던 그를. 스가와라, 오이카와는 그의 이름을 어색하고 서툴게 발음했다.


   오랑제뜨를 만드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다. 시럽을 만들어 달콤함을 오렌지 안에 가두는 과정은 육일에 걸쳐 진행되고, 오렌지를 식힘망에서 말리는데 또 하루가 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육일에 걸쳐 생성하시고 하루를 쉬셨다는데, 오랑제뜨를 만드는 데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 보다 ‘하루’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을 온전히 담금질 하는 데는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시럽이 오렌지 안에 얌전히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나무 숟가락으로 오렌지들을 저었다. ‘오렌지를 졸이는 밤’이 하루하루 늘어갈 수록,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얼마나 무심한 남자인지 새삼 깨달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소금으로 오렌지 표면을 벅벅 문지르던 첫 날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라는 말을 꼭꼭 씹어 발음하는 스가와라를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 목소리에는 오이카와만을 향한 미소가 따라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둘째 날 또한 ‘맑음’이었다. 상쾌한 그에게 오렌지의 상큼함을 선물한다는 게 의외로 센스 있지 않은가, 하는 자아도취도 따라왔다. 그가 제 눈앞에서 토끼마냥 입술을 오물거리는 걸 보는 게 꽤나 즐거울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는 ‘구름 많음’과 ‘흐림’이었다. 그는 자신과 스가와라의 심리적 거리에 대해서 고민했다. 시럽에 절여지는 오렌지를 마주하는 시간이 심란했다. 이와이즈미의 클래스메이트도 아마 이런 기분이 들었겠지 싶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오랑제뜨를 부실에서 나눠먹는 카라스노를 생각했다. 어제까지 좋았던 기분은 날개가 꺾여 단번에 추락했다.


   솔직히 말해서 쿠니미 같은 사람이 카라스노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온전히 스가와라만을 생각하며 졸인 일주일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게 기분 나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오랑제뜨를 주는 일을 없는 걸로 하는 것도 싫었다. 그는 설탕시럽을 마시는 오렌지필을 살펴보았다. 오렌지가 품고 있는 칸마다 그의 감정이 설탕물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꾸덕거리며 반짝이는 감정의 편린.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랑제트에 들어가는 오렌지에 설탕을 입히는 데는, 1kg가 넘는 양이 필요하다. 매 회 250g의 설탕을 따로 먹으며 굳어간 오렌지필이 가끔 과하게 쓴 맛을 내는 것은, 만드는 시간이 길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것을 졸이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감정은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회, 혹은 걱정. 그 부정적인 감정을 먹으면서 오렌지는 제 몸을 불려간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렌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후면 초콜릿을 입고 예쁜 무늬의 폴리백에 들어갈, 오이카와의 감정 조각들이었다. 오이카와는 식탁 위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발렌타인데이가 머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의 숫자를 세었다. 발렌타인데이 전날에 주자, 그는 다시 한 번 날짜를 결심했다. 기념일에 맞춰 주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 초콜릿을 줄 다른 여자애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 싫었다. 오이카와는 특별하길 원했다. 그가 스가와라의 세계에 간섭할 수 있길 원했다.


   일주일, 그 칠 일 동안 오이카와는 설탕에 졸여지는 오렌지였다. 질투와 애정, 순수한 마음과 후회 등이 그의 몸에 더덕더덕 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결국 사랑이라는 초콜릿으로 갈무리되어 스가와라의 앞에 전달 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없었다. 마냥 스가와라가 보고 싶었다. 그의 감정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그가 아무리 사려깊고 세심하다 해도, 예쁘게 포장된 오랑제뜨 앞에서 그는 분명 일반적인 남자 고등학생처럼 행동할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과 디저트를 공유하고, 나눠먹을게 분명했다. 어떤 감정이 녹아있을지 하나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초콜릿 입힌 오렌지를 주는 행위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라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흡한 마음 한 톨, 그 한 조각이라도 주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괜히 오렌지가 든 스테인레스 볼을 흔들었다. 그의 손길을 타고 고민이 볼 안에 들어갔다. 오렌지는 여전히 반짝이며, 달콤한 향을 냈다. 사흘 내내 담긴 감정들이 볼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오랑제뜨 안에는 고민마저 녹아 있었다. 사랑에서 파생 된 긍정과 부정 모두 오렌지 칸 안에 숨어 있었다.


   오렌지에 달달함을 묻히는 과정 내내 감정은 파랑처럼 요동쳤다. 그렇지만 그것은 ‘애정’이라는 대단원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오이카와는 괜히 볼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쾌 군, 하고 그는 다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마음에서 다시 사랑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부디 ‘스가와라의 아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는 자신의 오랑제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준’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오고 있었다.


   오랑제뜨는 오렌지필에 초콜릿을 묻힌 디저트이다. 초콜릿 가게나 쿠킹 클래스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메뉴이지만 완성도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운 일이다. 특히, 주재료인 오렌지필은 직접 제작하기, 까다로우므로……, 다소 비싸더라도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오랑제뜨의 주재료인 오렌지 필을 만들 때는 번민하는 여섯 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디저트는 외사랑이 입에서 너무 빨리 녹아 허전할 때 생각, 나곤 한다.

[카게스가] 나는 이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이 그림을 봤습니다. 짝사랑이 좋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나 라벨의 '물의 유희'를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림을 한 장 본 적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여러 번 덧발린 회색이 꼭 그를 생각나게 했다. 담담하게 발린 눈들은 멀리 돌아 먼 숲을 비췄다. ‘유화’라는 단어에 으레 붙어 있곤 하는 거친 붓 느낌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복사본을 잘라내, 책 안에 담았다. 녹지 않은 길, 그 너머 쌓인 먹구름들은 꼭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의 겨울이었다.


   목 끝까지 얼어붙은 계절을 겪다보면 그 뒤에 봄이 있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카게야마는 옷깃을 여몄다. 패딩 너머로 겨울이 스몄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겨울」과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는 먼 길에 있던 흰 나무숲을 상상하며 걸었다. 발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계절만 되면 그를 떠올리곤 했다. 카게야마의 겨울은 ‘그’와 마주닿아 있었다. 그에게 봄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끝에 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겨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그 일방적인 쌀쌀함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대용품이었다.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대신하는 편의점 초코파운드 빵이나, 눈이 내리는 모양을 흉내낸 스노우볼이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또 멀리 떠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조금 추웠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랭한 방이 그를 반겼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 정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카게야마는 화가의 이름 중에서 ‘알렉세이’라는 단어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다음을 쫓아오는 이름은 그에게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그 네 음절을 맘에 담아둔 것은,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 닮은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에게 의미 있는 계절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발 끝부터 톱밥이 차오름을 느꼈다. 겨울이 찾아올수록 속이 마모되는 것 같았다. 추위는 따듯함을 먹는 짐승이었음으로,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리 걸려있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겨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봄은 찾아오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겨울과 봄, 그 어드매의 ‘아무것도 아닌 계절’을 살고 있었다. 스페어 키, 스노우 볼, 싸구려 초코 파운드, 준초콜릿, 그는 자신과 비슷한 물건들을 나열하다 소파에 누웠다. 겨울 향기가 짙게 났다.


   보자고 했으면서요, 카게야마는 뒤늦게 문자를 보냈다. 죄책감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었다. 그사람은 선배가 친구밖에 안 될걸요, 그는 괜한 말을 덧붙였고, 전송했다. 손가락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는 가끔씩 최소한의 온기마저 앗아간다. 뼈가 굳는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각이었으나, 이 계절에는 흔해 빠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먹구름이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회상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 다 읽은 편지, 낡아빠진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로 손을 쓸었다. 겨울이 쓸었던 자리였다. 그의 지문이 묻은 자리들은 미미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손끝은 따듯한 편이었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고장 난 메트로놈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나, 그 사람이랑 키 비슷해요. 완벽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선배보다 크니까요,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을게요. 당신 몸에 흔적 하나 내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와 당신이 봄을 찾을 때 까지만 날 이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카게야마가 서툴게 내민 손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잡았다. 그 또한 겨울날, 온기가 간절했을 것이었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기에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뒷모습, 그 발끝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카게야마 어느 날 스가와라가 흘리듯 했던 말을 반추했다. 이름에 그림자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 할 수 없었다. 웃었던가, 혹은 울었던가. 그는 그가 뒤돌길 그저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봄을 흉내 내는 계절이었다. 껍데기 같은 사랑, 박제품 같은 사랑, 카게야마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싸게 구한 복제품이지만 그 아득함은 깊게 담겨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나무 숲은 멀리 있고, 드문드문 자라있는 풀들은 색이 없었다. 그 끝없는 겨울, 그 짝사랑.


   둘이 겪고 있음에도 이어지는 짝사랑. 둘이서 하고 있지만 혼자서 하는 연극, 모노드라마. 여러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연기, 그 향은 기억할 수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배구공이 손에 잡혔다. 그는 배구공을 위로 올렸다, 다시 받고 위로 올리길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니, 겨울이 겨울임을 알았기 때문에 봄을 자처했었나, 카게야마는 배구공을 아래로 내렸다. 공은 힘없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혔다. 꼭 저 같은 꼴이었다. 그는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방안에 외풍이 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찬 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속은 온통 톱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박제된 채, 틀린 방향으로 이어간 사랑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알렉세이가 그린 「겨울」에는 길이 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얇은 부분은 온전히 숲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고정된 길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겨울에게는 봄이 필요하다. 얼어붙은 제 몸을 녹이고, 따듯함을 찾기 위해선 봄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는 회전한다. 카게야마는 소파 등받이를 보고 돌아누웠다. 눈꺼풀에 먹구름이 올랐다.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얼어있는 채로 가만히,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다. 지독한 슬픔이었다. 유화에서 색을 만든 것처럼, 그의 사랑은 슬픔에 개어 캔버스에 여러 번 덧바른 채 겨울로 나타났다. 그는 입술을 쓸었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숨결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딪히지 않는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몸 위에 안개처럼 서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봄이 될 수 없었다. 혼자 누운 소파는 한 사람분의 슬픔을 담았다.


   겨울이 돌아야 봄이 온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그 그림은, 스가와라의 짝사랑과 닮았던 그림은 어느새 카게야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걸음쯤을 앞으로 다가갔고, 액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깰 수 없었다. 던질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속삭였다. 사람의 바람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액자 뒤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액자 뒤편을 감싼 판, 그 판을 갈아 놓은 톱밥같은 것이 그의 목 끝을 답답하게 덮었다. 그의 그림자에 서리가 피어올랐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다시 속삭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

[오이스가] '좋아'의 다른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예전에 썼던 템페스트와 피아노 맨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스가와라 씨는 분명 귀엽고 직설적일 거라구 생각합니다. 교류회 뽕을 맞아서 그른가 금방금방 써지네요... 아 교류회 또 가구 싶다.....






***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유려한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를 배회하다가 음을 만들어 냈다. 그는 쇼팽의 혁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 콩쿠르의 연습곡이었던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저번 주의 오이카와가 말하던 콩쿠르 내용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곡에 이름-혹은 별칭-이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호들은 클래식을 더 어렵게 만들곤 했다. 음악실 창 너머로 햇빛이 들어왔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같던 스가와라의 점심시간을 오이카와는 매우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이 퍽 좋았다.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날과 같은 설렘이 돋아왔다. 잔잔한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돋은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쉬웠다. 그의 귀는 오이카와의 음악소리만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에 내리 앉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멋있는 사람이었다. 봄철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상냥하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그가 예술 반의 하얀색 교복을 입고 있을 때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이카와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피아노 앞에 있을 때였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양 손을 마주잡았다. 그가 음을 만들어 낼 때 마다 손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혁명에 별칭을 붙인다면 아마 '지독한 불만을 담아'라는 이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랜드피아노 너머로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집중해, 라고 말하는 연주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귀 너머로 흘리며 그가 나간다던 대회를 검색했다. 이미 보도자료가 돌았는지 ‘두 사람’의 이름이 메인에 떴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오이카와 토오루, 콩쿠르의 왕좌는 누구에게? 스가와라는 소리 내어 기사를 읽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의 혁명은 짜증을 더해갔다. 오이카와, 그렇게 하면 혁명이라기보다는 ‘때 쓰기’ 같잖아. 그의 신경질적인 타건을 보면서 스가와라가 첨언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 오이카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그는 흰색 교복 상의가 불편했는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웬일인지 항상 갖춰 입고 있던 크림색 니트가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팔을 걷어붙이는 게 퍽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연미복 차림의 오이카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여기 여자애들도 없는데, 스가와라가 농을 걸자, 오이카와는 네가 있으니 괜찮다는 의미 불명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금 그의 혁명이 시작됐다. 스가와라는 그 일괄적인 음의 흐름을 들었다. 여전히 난폭하고 정제되지 않은 맛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들었던 우시와카의 ‘쇼팽 연습곡 op. 10-12 in c minor’을 떠올렸다. 난폭한 오이카와의 혁명과 다르게 고요한 맛이 있었다. 그 극도로 정제된 고요함 속에 흘러나오는 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그 곡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의자를 피아노 옆에 끌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앞에 두었다. 스가와라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5교시가 무슨 과목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고민을 깨트린 것은 오이카와였다. 아 진짜 짜증나, 오이카와의 다물린 입 너머로 말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 난폭함을 좀 더 다스리다가 손바닥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세게 쳤다.


   미처 음이 되지 못한 소리들이 한데 뭉쳐 올라갔다. 스가와라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이카와는 피아노 건반 위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눌린 건반은 아무런 음을 내뱉지 않았다. 머리 쓰다듬어 줘, 오이카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술 하는 애들은 다 이렇게 제멋대로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이와이즈미 군은 안 그러던 것 같은데, 스가와라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걔도 목 안 풀리면 성질 장난 아니라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자기 보온병에 누가 손대는 것도 싫어해, 하나마키는 누가 자기 바이올린 건드리는 거 싫어하고, 마츠카와는 첼로 때문에 면허 따는 걸 벼르고 있고, 그리고 쿠니미는 손에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고, 그리고, 킨타이치는 … 하며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친구들의 나쁜 버릇을 이야기 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꼬집었다.


   “누가 친구 험담하랬어?”

   “물어본 건 너잖아!”


   오이카와는 신경질을 내며 다시 피아노를 마주앉았다. 우시와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등을 세게 친 다음에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처음 그를 신경 쓰게 된 날 보다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부쩍 스가와라에게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콩쿠르를 주기로 일주일 전후가 가장 심하니까 피해 다녀, 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을 떠올렸다.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는 일등이 왜 하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혁명의 초입을 연주했다. 음이 끊임없이 질주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면 매력이 없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니 스타일대로 하는 게 어때?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듯, 오이카와는 음을 단정하게 쓰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 신경 쓰는 거구나. 스가와라는 머쓱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오이카와는 반복되는 주제부에서 다시 음을 세고 화려하게 가져갔다. 그 강한 음 위에서 놀아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트로피를 차지 할 수 있다는 말을 그의 손가락이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음이 뽑아지는 것부터가 신기 한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진짜 싫다- 하고 내뱉으면서도 음을 예쁘게 만들어 내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스가와라는 왜 그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하면 그게 끝인가, 그는 인문계인 자신이 알 수 없는 범위에 오이카와가 있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스가와라는 괜히 검은 가쿠란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더 좋게 위로 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혁명’의 마지막 음을 연주하고, 그의 가느다란 두 손이 건반 위에서 나가자 스가와라는 박수를 쳤다. 못한 연주에는 박수 안 쳐도 괜찮아 상쾌 군, 오이카와는 의기소침해서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듣기 좋았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둘만 있는 음악실에서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한 번 정도 더 연주하고 갈 수 있겠지? 그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동수업이지만.”

   “상쾌 군 이동수업이야? 근데 왜 안 가? 맞다, 오늘 수요일이지.”


   오이카와가 놀랐다는 식으로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서 치기나 하라면서 그의 팔목을 잡아 건반 위에 올려주었다. 오이카와의 음이 다시금 시작됐고, 그는 가만히 그걸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가? 그가 다시 물었다. 스가와라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는 시계를 확인 했다. 수업에 조금 지각할 것도 같았다. 그는 우카이 선생님이 오늘 기분이 좋길 바라면서입을 열었다.


   “너 피아노 치는 거 좋아서.”

   “방금 좀 느끼했어.”


   오이카와는 바로 대답하면서 음을 만들어갔다. 스가와라는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라면서 다리를 쭉 폈다. 오이카와는 그게 뭐냐면서 타박했다. 혁명의 강한 음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소녀의 기도’ 소리를 따온 수업 종이 울렸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끝낼 법도 하지만 그는 건반을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점이 오이카와 토오루 같아서, 스가와라는 좋았다.


   너 늦겠다,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스가와라를 일으켰다. 스가와라는 그의 하얀 교복 마이를 건네면서 별로?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잘 들었다면서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느긋한 걸음에 초조해졌는지, 오이카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니 오늘 수요일이니께 수학이자너, 그의 말투에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걸었다. 오이카와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일종의 ‘일탈’이었다.


   “오늘 어땠어?”


   헤어지기 전 복도에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5교시가 이미 시작 되었는지, 복도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연주회장 3층에서 듣는 ‘볼레로’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박자도, 음도 들리지 않지만 곧 몸을 키워내는 음악소리처럼, 두근거림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는 글쎄, 라고 머뭇거리면서 고백을 입에서 굴렸다.


   “정말 좋아.”

   “니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좋았어.”


   스가와라는 활짝 웃었다. 니 해바라기 닮았다. 오이카와는 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어떻게 하냐? 니 내 클래식 잘 모르는 거 알잖아. 스가와라는 투덜거리면서 그의 옆구리에 툭툭 잽을 날렸다. 오이카와는 옆으로 움찔대면서 그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니 연주 정말 좋아. 스가와라는 장난기 가득한 풍경에 진심을 던져 넣었다. 오이카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고만 하지 말아줄래?”

   “좋은 걸 어떡해.”

   “아 몰라!”


    오이카와는 복도를 달렸다. 예술동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 발소리가 세게 울렸다. 스가와라는 언뜻 본 오이카와 토오루의 붉어진 귓바퀴를 생각하다가 볼을 긁었다. 다시 스가와라 코우시의 세계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그는 햇살을 통과하는 먼지우주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귀여운 것도 같았다. 볼레로 같은 마음이 점점 제 몸집을 키워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보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붉어진 얼굴만큼, 뛰어가던 뒷모습만큼, 서툰 혁명만큼 오이카와가 좋았다. 스가와라는 괜히 볼을 긁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사히가 보낸 문자가 들어 있었다. 니 책 옮겨 놨어, 스가와라는 땡큐,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만 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달려간 반대쪽으로 달렸다. 햇살은 느리고 따듯한 박자로 움직였다.  

[카게스가] 아버지를 찾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서툴게 따라 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꾼 꿈을 바탕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어렵네요. 세터샌드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좋습니다. 단편으로 쓴 것 중에 가장 길게 나와서 당황스럽구 그렇습니다. 생각 한 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 못 해서 서러워요.. 역키잡 느낌을 내고 싶었ㅆ씁니다.....










***


    야치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원할 것처럼 켜져 있던 불빛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수신음이 길었다. 시미즈는 아직 깨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기묘한 생활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낮동안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관처럼 꾸며진 방은 여러 겹의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야치는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단지 독특한 것 뿐이었다.


   야치는 오늘 늦는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룸메이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퇴근하고, 잠에 들기까지의 단 몇 시간뿐이었다. 그는 오늘 잔업을 설명해야만 했다. 시미즈는 눈에 띄게 실망할 것이었다. 그녀는 안경다리를 매만지다가, 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겠지. 야치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상상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야치? 하고 묻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잔업이니?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광고를 내시는데, 그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시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피를 쓰기 위해서는 사연을 들을 필요가 있는 법이란다.


   시미즈는 조곤조곤히 이야기했다. 야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오늘도 사장님이 짙은 남색 벨벳 코트와, 모노클을 끼고 오셨냐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야치는 사장님의 ‘옷차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질 좋은 실크 셔츠와 남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양복을 입고 왔다. 그는 항상 양산을 받치고 있었으며, 가죽 장갑과 외알 안경을 상비하고 다녔다.


   별난 사람이었다. 야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빙글거리는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 시간 됐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병아리 같은 목소리구나, 그럼요, 그녀는 몇 가지 안부를 더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야치 씨, 하고 히나타가 그녀를 불렀다. 야치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사장실로 통하는 깊은 문을 열었다. 시미즈의 방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우리 사장 참 독특하지, 히나타가 야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야치에게 불빛이 나오는 건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녀가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작은 녹음기와 카세트테이프뿐이었다.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잘 다녀와, 그의 태양 같은 목소리에 그녀는 위안을 얻었다. 사장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장의 화내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기억했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힘 내. 히나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같은 문이 닫혔다. 그녀는 어둠속을 잔잔히 걸어갔다. 작은 등불이 그녀가 앉을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히나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의 취향이었다. 야치는 조금씩 그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카세트테이프를 장착했다. 그는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벨벳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항상 끼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놓은 채 였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잡아먹지 않으니 안심해도 괜찮아.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님, 야치 히토카입니다. 녹음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매뉴얼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 어스름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분위기는 죽음처럼 무거웠다. 장례식장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테이프가 가만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메모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뷰는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음악소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야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가 첫 마디를 때길 기도했다.


   “오늘 아침, 자네가 입사할 때 냈던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었어.”


   그는 한탄하듯 흘려 말했다. 야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학 시절에 썼던 레포트였다. 그녀는 사장이 그것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별다른 스펙이 없는 그녀가 바로 메이저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장의 젊은 외견과는 비교되는 취향이었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것을 좋아했다. 그는 아날로그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고전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야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괴짜 같은 말이었다. 그는 빛에서 멀어지듯,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어렴풋하게 촛불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얬다. 오늘은 화장을 하지 않았어,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소포클레스는 나보다 몇 세기나 나이가 많아.”

   “그렇죠.”

   “나는 거기서 위안을 느낄 때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야치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겠나? 카게야마가 말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벳으로 만든 자신의 양복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 끝에 닿는 감촉에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숨결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이 유리 안에서 반짝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쓸었다. 그는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네에게 손 끝 하나도 대지 않아. 나는 자네에게 이 거리 이상 다가갈 생각이 없다네. 위협이 들면 나에게 등불을 던져도 좋아.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이 선 육식동물 앞에 서 있는 감각이었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약속해. 그가 말했고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보호자에게 연락은 했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미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에게서는 그녀와 같은 느낌이 났다. 겨울철 나무수국처럼 비쩍 말라버린, 수분 따위 없는 그 건조함이 닮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룸메이트와 같은 느낌이라 생각 하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 할 때 질문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지시했다.


   “네 기준에서 늙은이라서, 풀어 놓을 이야기가 많아. 늙은 사람은 보통 자신의 말이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세월을 기억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부터 힘들어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질문이나 의문점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을 ‘세월’이 얼마나 큰지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는 공고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허락받은 칸을 생각했다. 가로 10cm에 세로 5cm. 그 작은 공간 안에 담길 추억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앞자리에 있는 물을 가리켰다. 그녀는 물병을 쥐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물병 소리조차 나지 않게 해주게. 그의 요구에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한 밤하늘 색 벨벳 재킷에 오렌지빛 등이 들었다. 그는 그게 거슬리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등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게. 나는 불을 피울 수 없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준비 되었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고아였네. 나의 아버지는 이런 나를 거두어준 분이지.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코우시, 일본 출생이지만 우리는 영국에서 살았어. 나는 왜 내가 동양인임에도 그 곳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이런 몸을 가지기 한참 이전의, 일이니까. 나는 스가와라의 화동이었네. 화동을 알고 있나? 요즘 ‘화동’이라는 말은 결혼식장에서 주로 쓰이곤 하지. 버진로드의 앞자리를 채우면서 꽃을 뿌리는 아이들을 의미하곤 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의 화동은 아니었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어. 나의 아버지, 앞으로 스가와라라고 지칭하겠네. 내 아버지는 두 사람이니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메모지가 있다면 메모해도 좋아. 자네의 앞자리에 놓아두라고 히나타에게 부탁했으니까. 그래, 내가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적어두게. 아무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부들이 모이는 장소로 갔네. 마차를 꽃으로 장식하는 게 예의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곳은 꽃을 파는 집시들이 모이곤 했지.”


   야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라고 하셨나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서나 쓰였던 이동수단의 이름이 생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옛날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야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니, 실로 괴물이지. 마차가 자동차가 되고, 그 자동차마저 비행기가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세월에 갇혀 지내는 짐승이니까. 자네의 시간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해하네.”

   “이해하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나?”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체처럼 말라가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미즈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하고 묻고 혼자 그 답을 찾아냈다.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겁이 나면 등불을 쥐게, 그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등불은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숨결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얇은 유리막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등불 뒤에 달린 숨구멍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노련하게 그를 배려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쓸었다. 인간적인 행동이었기에 야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꽃을 좋아했어.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것은 짧게 호흡하고 짧게 져버리는 생물이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생물이지 않나, 나는 그것들을 매일 아침 화병에 꽂아 놓는 일을 했네. 어린아이가 한 아름 품에 안아봤자 얼마나 안을 수 있겠나? 나는 맨 손으로 갔다가 바구니 두 개에 꽃을 실어 움직였어. 실로 비효율적인 인사人事였지만 나는, 스가와라가, 내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이제는 알고 있어. 어린아이가 뛰어다닐 때 그 작은 심장이 뛰는 것이 퍽 신기했던 것이지. 낮에는 그가 자느라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밤이 가까워 오고 어스름이 질 때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는 마치 시계처럼 그를 잠에서 깨웠겠지.

   그는 시체처럼 잠을 잤어. 아니 시체, 그래 시체야. 우리의 심장은 네 것처럼 뛰지 않으니까. 꽃을 살 때는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 백작님 앞으로 라는 인사를 했단다. 나는 집시들의 유명 인사였어. 매일 아침마다 꽃을 사러 왔으니까. 마차에 처음 꽃을 장식할 생각을 한 것도 나의 아버지였어.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했으니까. 실로 감상적인 뱀파이어, 가 아닐 수 없었지. 오래 살다 보면 으레 하게 되는 일이지. 그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영원히 그 시절에 고정당해 있었어. 지금의 나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치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그녀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국, 스가와라 백작, 화동. 그녀는 몇 가지 키워드를 메모했다. 그는 그것을 다 적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제 먹은 반찬을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야치는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이 어떤가? 그가 농담을 건넸다. 야치는 심장이 떨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무슨 느낌인지 잊어버렸어. 그는 연극 배우처럼 웃었다.


   “내 아버지는 꽃이 많이 필요했어. 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과 친구였지. 그들의 아버지와도 친구였어. 그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경조사에 꽃과 돈을 보냈네. 「미스터 메이플에게, 자네의 결혼식에 꽃을 보냈던 것이 어제인 것 같고, 당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낸 지가 바로 정오 같은데, 이제는 자네의 장례식에 꽃을 보내네.」 라는 메시지와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지. 이걸 전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네. 어린아이가 반바지와 스타킹을 신었을 때부터, 벨벳으로 된 정장을 맞출 때 까지 내 일이었어. 아직도 그의 필체와, 그가 하던 서명이 기억나네. 아직도 죽지 않은, 스가와라 코우시로부터. 블랙 유머였지.

   스가와라는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지. 햇빛을 보기 싫어했어. 관처럼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다가, 내가 사온 꽃들을 보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 그는 항상 나한테 이렇게 말하곤 했어. ‘어린아이는 볼레로처럼 자라는구나.’ 하고. 그 때 라벨의 곡을 좋아했는데…, 그 때 마다 나는 물었지. 멍청했으니까. 그럴 때면 스가와라는 태양과 가장 먼 존재인 주제에 햇살처럼 웃었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어. ‘볼레로는 처음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점점 그 몸집을 키우잖니. 눈치 채지 못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처럼. 너는 꼭 그렇게 자란단다.’ 하고.

   어린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나는 매번 그의 무릎에 앉아서 스가와라 씨, 나는 얼마나 자랐나요? 오늘도 자랐나요? 볼레로처럼? 하고 물어보곤 했어. 날 향해 웃어주는 그 얼굴이 좋았네. 사랑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사랑이었네. 지독한, 짝사랑이지.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단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시체처럼 차가웠지. 냉한 겨울밤 같았어. 마른 자작나무 같기도 했지. 그러나 나는 그게 이상한다고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나는 그가 스라와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야치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잠시 멈추겠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슬퍼 보였다. 그는 잠시 일렁이는 불꽃을 쳐다보다가, 제 손목을 매만졌다. 항상 실크 셔츠로 가리고 있던 부분에 두 개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아닌가?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 살았어, 그리고 오래 살 거야. 카게야마는 별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야치, 너와 히나타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고, 너희의 아들들에게 화환을 보내겠지. 나는 너희의 장례식에도 꽃을 보낼 거야. 아마 결혼식에 보냈던 것과 닮은 꽃이겠지. 내 나름의 유머니까, 그리고 이렇게 서명하지 않을까. 아직도 죽지 않은, 카게야마 토비오로부터. 그는 농담을 하는 듯 웃었다. 그의 목 끝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야치는 공감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 할 거야. 그가 통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쌓였음에도 그의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야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무섭지 않나? 카게야마가 질문했고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 끝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그는 잠시 멈추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가끔 외출을 했네. 밤이었고, 우리는 사냥을 나갔어. 그는 라이플을 가지고 있었네. 은으로 장식된 건 아니었어. 금으로 세공 된 것이었지. 그는 거기에 납으로 만든 총알을 채워 넣고 다녔지만 한 발만은 은이었지.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모든 탄환이 은이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어.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을 속삭일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스가와라에 대한 것들은 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지.

   그는 명사수였단다. 프록코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사냥을 했지. 탕, 하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총에 맞은 짐승들을 찾으러 갔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단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개들이 피를 먹게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찾은 사냥감들은 피가 하나도 없었어. 그가 마신 것이었지. 아니, 마신 것이겠지. 내 가정이지만. 그 때 마다 나는 그에게 물었어. 왜 이렇게 되었나요? 그는 능숙하게 말했지. 은으로 된 탄환을 써서 그렇단다. 은은 피를 마시지.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빛났단다. 달빛은, 환한, 은색이지.

   나는 은색이 그의 색이라고 믿었어. 그의 성에는 은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또한 겨울의 눈 색이 그라고 믿었어.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닮은 색이지. 그는 나의 세계였고,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순애의 대상이었어.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지. 더러운 영국의 뒷골목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였고, 나에게 그의 이름에 쓰인 언어, 그러니까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것이었지.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어. 나는 내 이름에 쓰인 글자를 퍽 좋아한단다. 그가 나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지. 이름이란, 대단한 물건이야.

   그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의무였다. 나는 볼레로처럼 그에게 젖어들었어.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소리로 들리지도 않던 소리로 노래하던 마음은 그렇게 점점 처졌단다. 내 음악이 온전히, 오롯이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안 건 어느 양복점이었어. 구름이 겹겹이 낀 어느 날 그는 검은색 양산을 들고 외출을 나섰단다. 그는 검은 모자를 썼어. 여성용이었지. 장례식에 나가는 것처럼, 그의 흰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검은 레이스가 가리고 있었어. 그는 검은 코트를 입었지. 벨벳이었다.

   늙은이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해.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청년기를 관통했던 물건이라고 생각하곤 하지. 그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인지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뒷골목에 있는 낡은 양복점으로 들어왔단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면서 노부부는 호들갑을 떨었어. 그들은 ‘메이플’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단다. 그들은 스가와라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 양장점의 불이 꺼졌고,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노파가 물었어.


   오늘도, 스가와라님의 양복을 맞추십니까?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어. 달빛이 흔들렸고, 내 세계가 흔들렸지. 이 친구의 양복을 맞출 거야, 벨벳으로, 가장 좋은 벨벳으로. 그는 노래하듯 말했어. 그는 오랜만에 외출에 기분이 좋아 보였지. 집에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꽃을 끌어 모아 화병에 급히 꽃은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서 사이즈를 쟀지. 나는 그 때, 백 팔십 센티미터였어. 지금과 똑같은 키고, 똑같은 몸무게였지. 아드님이 건장하시군요, 노인은 내 뛰는 심장을 신기해 하며 물었어. 스가와라는 예쁘게 웃으면서 장성하였지, 하고 키득거렸단다.

   기묘한 광경이었어.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분은 거의 없어진 시기였지.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여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어.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존대를 쓰며 몸을 굽실거리는 모습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스가와라 코우시는, 스가와라는, 코우시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세계였고 절대적인 존엄자였다. 그는 양복이 완성 되면 직접 받으러 올 거라고 대답했어. 메이플 부부는 부디 날이 계속 흐렸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지. 그는 그 농담에 머리를 숙여 인사했단다. 실로 우아한 광경이었지,

아직도 나는 그 때의 꿈을 꾼단다. 영원을 사는 자들은 추억에 기댈 수밖에 없어. 모두가 변하는 그 상황에서 혼자 변하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야치는 그가 느낄 고독을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 오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야기는 더 길거야, 역사책 같은 이야기지. 그의 배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치는 녹음하던 테이프를 멈추고서 등불을 들었다. 히나타에게 말해 두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야치는 그가 핸드폰에서 펜을 꺼내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왜 카게야마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그녀는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난데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파자마파티를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그녀가 문에 도착할 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히나타도 알고 있었어? 야치가 물었다, 히나타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셋만 끌어안고 있는 비밀이야. 그 ‘비밀’이라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 속의 ‘메이플 부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에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야치는 다시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도망칠 줄 알았다. 카게야마의 말에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니까요, 하는 이야기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그의 웃음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손을 매만졌다. 물이 닿아 일시적으로 온기를 빼앗긴 탓이었다. 야치는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는 다시 비밀을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한 것이 또 하나가 있네. 왜, 그가 인간에게 접근했고, 나를 길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어. 나는 이 사색을 백 년 가까이 지속했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답을 할 수 있었어. 영원을 사는 존재는 변화에 무뎌진단다.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혹시 나날의 자그마한 변화에 관심을 둔 적이 있는가? 어제 봉오리 져 있던 목련이 오늘은 소담스럽게 꽃을 틔우고, 그 꽃잎이 내일 혹은 일주일 후에 떨어져서 갈색으로 변하는 광경에 시선을 둔 적이 있는가? 그런 사소한 변화도 몇백 년이 쌓이다 보면 특별할 수 없는 일이 된단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야. 인간은 백 년 가까이 삶을 지속하지. 사유하는 동물이야. 어제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며, 어제의 호흡과 내일의 호흡이 다르지.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변화해. 달이 줄어들고 차오르는 것 같은 기계적인 변화가 아니야. 또한 심장소리, 그 심장소리를 가지고 있단다. 나와 가장 닮았지만 다른 존재가 인간이지. 그 성장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사치이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표현하는 시계와 같은 일이지.

   그래서 먹지 않고, 기다렸던 거야. 참아가면서, 또 참아가면서. 스가와라 또한 그랬을 거야. 내게 이 대답을 알려준 것은 히나타였어.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단다. 그에게 꽃 심부름을 시킬 수 없었지. 대신 나는 그에게 신문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어. 그가 커가는 과정을 눈 안에 담고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이자 내 사랑, 내 영원인 스가와라를 이해할 수 있던 거지. 영원이란 존재는 이렇게 미련하단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까? 다행이 양복을 받은 날도 짙은 안개와 구름이 함께 하는 날이었단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내가 날씨를 이야기 하자 그는 소년처럼 기뻐했었다. 그 웃는 얼굴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그래 뛰게 만들었었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듣는 것 같았어. 첼로 같은 선율로 사랑했었고, 그 반주를 하는 피아노의 음색처럼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

   그와 나는 같은 마차를 탔어. 그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자신의 아들로 설명했지. 마차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어. 네가 점점 더 커간다면, 너는 나의 아버지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 그는 영특했고,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그 양복점에서 메이플 부부에게,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단다. 물론 부정적인 사실이었지. 베토벤의 「운명」처럼 난폭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였단다.

   미스터 오이카와께서 서신을 남기셨어요. 노파는 그렇게 말했어. 스가와라는 동요하지 않았지. 그는 천천히 시간을 들였어. 내가 벨벳 양복을 입은 걸 바라보았지. 그는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었단다. 그의 눈 색과 닮은 호박이었어. 그 보석은 송진이 박제된 거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위에 달린 브로치는 제법 멋있었어. 나는 화동에서 이렇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게 들떠 있었지.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처음 말한 그 ‘사랑한다’로 받아들였지. 나도, 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단다.

   아픈 말이지. 아픈 말일 수밖에 없어. 내가 들었던 유일한 대답이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소리였으니까. 내가 기억할 때 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착각’이라는 말이 따라온단다. 나는 그 말이 싫어. 네가 쓴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착각’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었어. 물론 다른 말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소포클레스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어쩜 그렇게, 욕망을 담고 있는지. 인간들이 고전에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다고 말했지. 미스터 오이카와 때문인가요?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어. 그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단다. 나의 아버지야,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려 있었다. 그는 그의 라이플에 은제 탄환을 가득 채웠어. 그 탄환을 채운 것은 나였다. 그가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지. 그는 나의 그 행동에 감사했어.

   나는 그에게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사랑이었지. 그는 고개를 저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란다. 나는 짐을 쌌어. 그가 만들어준 양복은 가방 가장 안쪽에 넣었지. 그는 마부를 고용했다. 메이플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달라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바라지 않았어. 그는 보석들을 챙겨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 그 때, 증기선이 막 만들어졌던 때였어. 그는 증기선 두 표를 끊었단다. 급하게 끊었기 때문에 후미진 삼등석 방이었어.

   우리는 열흘 후에 출발하는 그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다시 기반을 찾기로 한 거지. 그러나 언제나 운명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오이카와’의 짓이었어. 무언가 질문이 있나?”


   야치가 손을 든 것을 발견하고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까, 처음에,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장님께서 찾고 있는, 그녀의 지적이 반갑다는 듯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거야. 너는 꽤나 좋은 청자로구나.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궁금한 게 끝났냐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벅찼다.


   “중간에 마부가 도망쳤다. 말들이 죽었어. 그는 그걸 허탈하게 보면서 오이카와의 짓일 거라고 말했지. 숲 속에는 동물들이 없었고 햇빛이 들어왔단다. 나와 그는 밤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간이었고, 그는 나 때문에 느리게 걸었지. 그는 심하게 배고파했어. 허기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의무와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힘들어서 멈춰 서 있을 때 그는 숲을 돌았어. 아무것도 마실 게 없다는 걸 알고 그는 나무수국처럼 웃었지.

   우리는 버려진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 성모상이 나와 그의 위에 있었단다. 자애롭게도 팔을 벌리고 있었지. 나는 그에게 팔을 내밀었어. 나를 마시고, 도망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게 마셔져 죽는 것을 희망했다. 지금 나이로 갓 고등학생이었어. 그 때는 성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피를 마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로, 내 손목을 세게 그었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그는 매우 갈망했어. 지독한 갈증이 피어올랐고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그 광경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천사, 나의 영혼, 나의 불꽃, 나의 모든 일렁이던 세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를. 그는 작게 난 내 상처를 서툴게 핥았다. 나는 그와 섹스하는 기분이었어. 지독한 오르가즘이 내 몸을 가득 채웠지. 나를 비워 주세요, 내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울면서 나를 마셨어. 그의 하얀 피부를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더럽혔고,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살갗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흡혈의 순간은 황홀했단다. 나는 어지러웠고 그는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어. 그는 자신의 송곳니가 나에게 상처를 낼 까봐 무서워했어. 이상한 일이었지. 뱀파이어인데,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인데! 자식에게 못된 짓을 한 아버지 같았지. 그가 핥은 상처는 멎지 않았어. 나를 죽여줘요, 나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했어. 왜냐하면, 내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게 가장 베스트였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부성애든, 미물을 사랑하던 자비던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은 매우 달콤한 일이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끝이 결국 자살인 것도 그와 같아. 사람의 기억은 끊임없이 마모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잊히는 것을 슬퍼한단다. 모순된 일이야. 기억되려고 하고 끊임없이 이름을 만들지.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고 그는 착한 아이야,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오이카와’의 손길에서 벗어나길 바랐을 뿐이었지.

   스가와라는 나를 성당 바닥에 눕혔어. 나는 그의 얼굴과, 성모상을 바라보았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도피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어. 그는 나의 손목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지. 나는 그가 도망친 줄 알았어.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끊기려던 시점에 나의 또 다른 아버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완벽했겠지.


   그는 나를 보면서 웃었어. 나의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것은 분명이 악마였지. 그는 나를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면서 웃었어. 오이카와는 입에 스가와라의 이름을 담았지. 안녕, 난 네 아버지가 될 오이카와 토오루란다, 너의 스가와라가 나에게 울면서 부탁했어. 뱀파이어가 우는 걸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너는,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강제로 의식을 붙들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는 나의 손목을 보았다. 나는 내 손목을 감추었어. 대단한 사랑이구나,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나의 멱살을 잡았지. 그는 내 피를 밟고, 내 목에 입을 맞추었어. 그의 송곳니로부터 피가 빨리는 게 아니라 독이 들어왔다. 뱀파이어의 피였어. 그는 자신이 나의 아버지가 될 거라 속삭였지. 라벨의 「현악 사중주, F장조 2악장」처럼 내 심장에서 독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날 이후 라벨을 듣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는 내가 변화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봤어. 성당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잠들지 않았지.

   나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견뎌냈어. 그는 내가 모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사랑했고, 나 때문에 스가와라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하지만 내 볼모는 스가와라였지. 그가 담보가 되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어. 그가 없어진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는 빈 껍데기였다.

   오이카와는 여자를 잡아왔다. 손목을 무는 것도 베스트야, 그는 나에게 뱀파이어로서의 기본 자질을 알려 주었어. 나는 그렇지만 목을 물었다. 상처를 크게 내어 피를 빨았어. 손목은, 나의 순수한 사랑의 장소였다. 그는 그 때 마다 나를 비웃었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를 떠나갔어.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스가와라가 남긴 보석을 바꾸어 증기선의 일등석 칸을 예약했다. 나는 파티에 나갔고, 매너 있는 신사인 척 행동했다. 여자를 잡아 그들의 피를 빨아 버렸어.

   돈이란 건 대단하더구나, 왜 뱀파이어들이 재물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지. 나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여자들이 사라졌지만 내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더군. 여자들은 끊임없이 다가왔고 나의 식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목을 물었어. 섹스의 전초전 같은 느낌으로, 애무하듯이. 그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다 죽어갔다. 나는 프랑스에 갔고, 거기에서 노인들을 꼬셔냈어. 노인이란 어린아이에게 친절하지. 나는 그것마저 이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스가와라를 만나야했어. 그것이 나의 삶의 이유였다.”


   무섭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의 순애에 눈물지을 뿐이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사람의 부분이 남아있다는 거야. 카게야마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야치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비효율적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거란다. 카게야마는 담담히 쏟아냈다.


   야치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쯤,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계속 해도 괜찮겠니, 그는 아이에게 묻는 것처럼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 같구나,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작고 여린 동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시미즈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이름을 꺼냈다. 그렇구나,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롤리타」의 앞부분을 기억 하니?”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 리- 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카게야마는 연극배우처럼 책의 첫 문장을 읊었다. 야치는 짧게 떨었다. 똑똑한 아이구나, 카게야마는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둘 사이에 쌓인 서사들이 그녀가 그 문장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야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자작나무 같을 것이라고 짐작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안타깝게 읽었고, 재미있게 읽었어. 나는 그걸 쓴 게 사랑을 하다 영원에 박제당한 뱀파이어인줄 알았다. 스가와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 정도, 그 느낌이었어.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를 잠식할 듯 태워가면서 나를 살아있게 만든 욕망. 언론사를 차린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모든 정보들을 매일 아침 히나타에게 가져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오이카와 토오루, 늙지 않는 사람! 어둠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길 가장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신문사였으니까.

   그래서 광고를 내고자 했다. 스가와라, 라는 이름, 그리고 코우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자 했지. 이 결심을 한 것은 얼마 전 깨달았던, 그가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부성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삶의 이유였던 적이 있어. 이렇게 변한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한테 남아 있는 영원만큼 그를 갈구할 거란다. 그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지.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고집이 늘어가는 거란다. 내 입 속에서 스가와라, 라는 이름이 발음될 때 마다 나는 그를 욕망한다. 욕망 할 수밖에 없어. 너의 그 칸에는 이 이야기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 십 센티미터와 오 센티미터, 그 작은 공간 안에 내 이야기를 담는다면 쌀알에 글씨를 새길 정도의 글자로 이야길 해야 할 테니까. 너는 다만 세 문장을 적어두면 된단다.“

   “무슨, 문장인가요?”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


    야치는 그 문장을 포스트잇에 받아 적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정의 된 이름 속에는 여러 사연이 스며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잔떨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치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떨림이 어떤 느낌으로 비춰질 지를 고민했다. 그 세 문장은 욕망이자, 욕정이자,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야치는 그들이 겪을 영원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녀는 그 지독한 콤플렉스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것을 눈여겨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아버지를 살해 할 건가요? 그녀가 주제넘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네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앞에는 파멸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도 살아있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너희의 결혼식에 축하 화환을 보낼 것이니. 그는 옛날 사람처럼 말하였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그의 마지막 마침표에 야치는 녹음 되어있는 테이프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그는 자애롭게 말했다. 그의 웃는 모습은 그림자처럼 서늘했다.


   “너는 평소처럼 너의 룸메이트에게 가서 오늘 있었던 ‘비밀’을 이야기하면 된단다. 너의 룸메이트 또한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게야. 너를 채용한 건 그녀 때문이었어. 그녀의 소문과 작은 논문, 네 친절함에 기댔던 거다. 세월을 먹을수록 결과만을 중요시하게 된단다. 오이카와가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결국 그의 손아귀에 스가와라가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나도 내 최선의 결말만을 남기고 싶을 뿐이란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불렀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야치의 태양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 안을 나섰다. 카게야마는 관처럼 만들어진 제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의 숨은 깊었고, 또 깊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 틈 새로 들어오는 인공적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 한 후였다. 카게야마는 빛 사이로 나아갔다. 조명은 그에게 티끌 같은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빛에 카게야마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돋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기원을 생각하며 웃었다. 스가와라처럼 웃고 싶어 세월을 들여가며 연습한 결과였다. 그는 벨벳 코트를 입었다. 그의 목을 장식한 레이스에는 호박 브로치를 달았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빛을 원한다. 그렇지만그 빛은 또 다른 그림자를 낳을 뿐이었다. 빛에서 파생된 작은 어둠.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다만 추측하고, 또 추측했다.


   어디선가 볼레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는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었다. 끊임없이 반복하며 몸집을 키워가는 영원의 사랑처럼. 카게야마는 살포시 웃었다. 그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박제 된 나비와도 같았다. 그는 제 맘속에 품고 변주해간 마음을 생각하다가 뒤를 돌았다. 피 냄새가 요란하게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변하지 않는 밤하늘만큼이나 지독한 어둠이었다. 달빛이 내는 은색만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