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2015. 3. 7. 03:20
킹스맨 AU입니다. 이 글과 시간대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킹스맨의 추천인 제도는 키잡을 위한 최고의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가 반바지에 니삭스 신을 때 부터 길러온 하나마키가 보고 싶네요 ^0^!!!
***
쿠니미는, 그를 봤을 때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후보는 단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추천인이 랜슬롯이라고 확신했다. 그 카게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할 상대는 그의 추천인 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오래 된 이불을 털었을 때,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개의 목줄을 꽉 쥐었다. 이미 지워진 이름을 가진 도베르만은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와 달리 충직한 견공은 쿠니미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그가 신은 밑창이 두꺼운 구두가 소리를 냈다. 쿠니미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 나른한 햇살에, 그의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의 세상의 축은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미 결심한 이상 망설이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서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니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의 상냥한 모습에 쿠니미는 짧게 목례했다. 그는 그와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선 욕망을 그는 혀 아래에 숨겼다. 먹기 싫은 알약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썼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쿠니미의 목소리에 랜슬롯은 문에서 비켜주었다.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갤러해드의 집무실에서는 언제나 단 향이 났다. 어린애 같은 입맛 탓이었다. 쿠니미는 개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 지워진 이름의 개는 러그에 편하게 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갤러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햇빛이 들어 반짝였다.
안녕,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쿠니미가 물었다. 나는 네 추천인이 아니란다. 갤러해드는 따듯한 물을 주전자에 담으며 말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웨지우드의 파란색이 쿠니미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언젠가의 밤하늘 같은 색이었다.
합격 축하라면 가웨인에게서 듣도록 해. 갤러해드는 쿠니미의 추천인 이름을 말했다.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단호한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에 건 아침나절 하늘을 담은 넥타이에 든 수국모양의 스치치가 반짝였다. 가웨인이 이런 말은 안 해주던? 갤러해드는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하얀 모래알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쿠니미가 대답하자 갤러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쿠니미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말꼬리를 돌리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갤러해드는 잔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찻잎은 내 멋대로 고를 거라는 목소리에 그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밤하늘 여러 겹을 겹쳐놓은 듯 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갤러해드는 그저 하얀 모래알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쿠니미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련한 남자 앞에서 쿠니미는 경험 없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다. 갤러해드는 웨지우드 티팟을 손에 들었다. 그는 거름망을 잔에 얹었다.
쿠니미의 마음에 들어 있는 찻잎은 ‘어수선함’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질투’를 블랜딩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물을 붓지 않아도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그는 갤러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에 그의 도베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앉아, 하고 쿠니미가 개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게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갤러해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찻잔 두 개를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그는 흔들림 없이 찻잔 두 개를 탁자로 옮겨두었고, 찬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버터과자와 스콘을 꺼내두었다. 쿠니미는 제 앞으로 놓인 찻잔에 설탕을 두 개 넣었다. 갤러해드 또한 그리하였다. 단 건 좋아, 라고 속편하게 말하는 그에게, 쿠니미는 얼굴을 찌푸림으로 화답했다.
“언제 산 거예요?”
“오늘 아침.”
“왜.”
“네가 올 줄 알았거든.”
갤러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반짝임이 스며 있었다. 쿠니미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그가 어른 같아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갤러해드 앞에서는 어린애의 유치한 놀잇거리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문득 외로워졌다.
나는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것이 쿠니미가 쌓아올린 모든 행적에 대한 그의 최종 평가였다. 쿠니미는 찻잔에 손을 댔다. 도자기 너머로 희석된 따듯함이 전해져 왔다. 찻잔의 다른 이름은 분명 ‘갤러해드’의 이명일 것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불완전한 킹스맨은 고개를 숙였다.
“왜 날 추천하지 않았어요?”
쿠니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 어른 같은 척 하는 얼굴을 싫어했다. 그는 코끝이 찡해온다고 생각했다. 따듯함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갤러해드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도베르만과 제법 닮은 눈길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임을 확인받는 게 싫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날 추천해주길 바랐어요.”
“그래?”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스콘을 뜯어 쿠니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쿠니미는 입을 벌려 빵조각을 받아먹었다. 그는 그의 손끝을 핥았다. 대담하네, 갤러해드는 그이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 웃었다. 쿠니미가 언제나 따라가고 싶어 했던 미소였다. 그는 개에게 손짓했다. 도베르만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섰다. 앉아, 하고 그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바랐어요.”
그는 절박하게 말했다. 갤러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웨인이, 오이카와 씨가 나를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걱정했나요? 아니면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쿠니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큰 알약을 물 없이 입안에서 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내 프로방스 별장에 가서 청소나 하고 수틀에 수나 놓아.”
“갤러해드.”
“안전하게 지내. 총, 칼, 독, 킹스맨. 어느 것도 너한테 안 어울려. 쿠니미 너 귀찮은 거 싫어하잖아. 효율적이고 안전하고, 내 새장에 든 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갤러해드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쿠니미는 황량하게 빈 프로방스의 저택을 떠올렸다. 사용인 몇 외에는 오지 않는 그 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처럼 부유하던 빈 날을 떠올렸다. 갤러해드가 ‘원래 이름’을 가지고 오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쌍무지개가 뜨는 것만큼 가끔씩 찾아왔고, 그 마저도 하루를 머물지 않고 떠났다.
쿠니미는 그 빈 침실을 기억한다.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는 프로방스의 따듯한 햇살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쿠니미는 잔을 놓았다. 그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부터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갤러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잔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쿠니미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들이 찬 자신은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태양처럼 멀었다. 쿠니미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나는,”
“미안한데, 난 어린애 투정 듣기 싫어.”
비수가 꽂히는 기분에 쿠니미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생명줄마냥 잡고 있는 찻잔의 수면이 흔들렸다. 차라리 독약이라, 마시고 죽었으면 싶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그의 세계는 첫사랑 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고독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쿠니미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마음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마음이 우러나고 있었다. 넓게 퍼지는 그 향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는 듯, 갤러해드는 그저 스콘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뻑뻑한 빵이 그의 목을 막으려 할 때 마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쿠니미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잔인한 사람, 그가 말하자 갤러해드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웃었다.
“넌 곧장 내 방문을 나서야 해. 그리고 쭉 직진해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서, 네 추천인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렴, 오이카와 씨 저를 추천해주신 건 감사할 일이나 저는 이제부터 프로방스의, 미스터 갤러해드 씨 소유의 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석인 퍼시빌 자리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채울 것입니다. 갤러해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쿠니미는 그의 독단적인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함께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작은 꿈마저 갤러해드는 담뱃불을 구두로 밟아 끄듯, 소화하고 있었다.
“하나마키 씨.”
“이게 내 사랑이야.”
쿠니미는 갤러해드가 프로방스의 침실에 놓고 온 이름을 말했다. 그의 본명을 기억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쿠니미는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노력의 반절도 알지 못했다. 빈 침대 시트에 누워 지새웠던 밤을, 그 밤이 여러 겹 겹쳐져 만든 검은 색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입에 담는 사랑은 한없이 이기적이였다.
그는 멋대로 쿠니미가 사랑하게 만들고, 따라온 모든 다리를 끊고자 했다. 쿠니미 아키라의 모든 세계는 하나마키 타카히로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슬펐고, 그게 아쉬웠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똑똑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도, 킹스맨이 될 거예요, 하나마키는 그 말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말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나마키가 기억하는 것 보다 5cm는 더 자란 모습이었다. 쿠니미는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쉼표와 같은 한숨이 자리했다. 당신과 같은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를 신고, 프로방스의 날씨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 런던 거리를 걸어다닐 거예요, 그는 확정된 것 같은 미래를 말했고, 갤러해드는 그것을 불확실한 망상으로 만들었다.
계속 반복되는 문답에, 쿠니미는 울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베르만에게 손을 뻗었다. 갤러해드가 지워버린 이름을 가진 개였다. 그는 그의 귀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는 귀 뒤와 목을 솜씨 좋게 쓰다듬었다. 날 불안하게 하지 말아줘요, 쿠니미는 애원하듯 말했다. 하나마키는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은 주어진 온기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는 자신이 어미 새라도 되는 양 따라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자라온 그의 사랑은 이미 맹목적인 움직임이었다. 난, 불안해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쿠니미가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 안에는 혼자 있던 밤이 고여 있었다. 쿠니미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하나마키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가 짧게 떨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눈 아래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이 닿은 자리, 반대편에 눈물길이 생겼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나마키는 마법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변명이라면 듣기 싫어요.”
쿠니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눈가에 담긴 눈물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에 대한 동정은 받지 않겠다는 그 당돌함에, 하나마키는 침을 삼켰다. 지금 그에게 서툰 감언이설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에게 손을 뻗은 것은 하나마키의 자의였다. 그 손길에 의해 세계가 돌아갔고, 재구축 된 이상 책임져야 마땅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을 말해 줄 타이밍이었다.
“난, 널 이명으로 부르기 싫어.”
“네?”
“퍼시빌이니, 가웨인이니, 랜슬롯이니 하는 역할놀이에 네 이름을 가리기 싫다는 뜻이야.”
쓴 물이 우러난 쿠니미의 세계에, 하나마키는 설탕을 한 스푼 더했다. 그는 멈춰버린 모래시계를 반대로 뒤집었다. 설탕 같은 하얀 모래알이 다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마키는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침이 째깍거리며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간은 허비한 뒤에야 아까워지는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반쯤 식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혀가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나마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쿠니미의 볼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날 갤러해드라고 부르는 게 싫어. 나는 너에게 영원한 ‘아저씨’고, ‘하나마키 씨’야. 그의 서툰 고백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해드란 이름 속에 담긴 그 이름을, 나만 기억하면 되잖아요? 그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햇번처럼 사랑스럽게 물었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려진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하면서 제 머리를 쓸었다. 목이 답답해 옴에, 그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예법에 어긋나고 매너 없는 행동이지만 용서 해 다오,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매너보다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말해 주세요. 쿠니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하나마에게 곧장 닿았다.
“셋째, 난 널 전장에 내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네가 들 날붙이는 수를 놓을 바늘이면 충분 해. 하나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제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초조해질 때만 피우시죠, 쿠니미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연극이 아니라서 그래. 갤러해드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미는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 사포와, 성냥을 꺼냈다. 그는 불을 피워, 손으로 주변을 감쌌다.
그의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하나마키는 한동안 담배를 피웠고, 쿠니미는 달지 않은 스콘을 먹었다. 그는 라즈베리가 든 스콘을 좋아했고, 버터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유, 더 말해주세요. 쿠니미가 말했다. 그와 웨지우드는 퍽 어울리는 그림이었기에 하나마키는 혀를 차냈다.
집 안에서만 가두고 싶어서 그렇다, 는 이유에 쿠니미는 기각, 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하나마키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쿠니미는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마키의 기억 속 어린아이는 이렇게 집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많이 컸다고 대답했다. 그 엉뚱한 문답에 쿠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네 이름을 좋아한다.”
“그래서요.”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 아키라.”
아키라, 하고 하나마키는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그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느냐 물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닿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마지막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나마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재들이 불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내가 혼자 지새웠던 밤을 알고 있나요? 쿠니미가 물었다. 하나마키는 대답 없이 그의 셔츠 아래의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우리 쿠니미는, 스물네 시간 동안 예법과 예의, 매너를 중시하는 가웨인에게 가게 될 텐데. 하나마키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었다. 그는쿠니미의 흰 셔츠에 자신과 비슷한 색의 타이를 매어, 매듭을 지었다. 그는 그 매듭과, 그의 목울대에 입을 맞추었다.
숨이 닿아 간질거리는 목에, 쿠니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마키는 자신의 색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떨어지면 프로방스로 가서 자수나 배워.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쿠니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의 흰 손가락은 넥타이 매듭이 영원을 약속한 징표라도 된다는 듯, 서툴고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만약 붙으면, 내 정장은 하나마키 씨가 맞춰주세요.”
한참의 침묵 끝에,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꺼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의 변주였기에, 하나마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웨인이 화낼 거야, 갤러해드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앞에서는 갤러해드가 아니라 하나마키 씨. 그의 긴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다.
하나마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킹스맨 안에서 심리전의 대가라고 불리고 있던 그는, 한참 어린 후보생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갤러해드는 한숨을 내 쉬었다. 쿠니미의 눈 안에 있던 짙은 밤하늘은, 어느새 새벽을 가득 겹쳐 놓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홍차 더 마실래? 하나마키가 물었고, 쿠니미는 우유와 설탕을 넣어달라는 말을 내뱉었다. 햇살이 느리게 움직여, 시계초침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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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7. 01:42
킹스맨 AU입니다^0^ 영화를 볼 때는 참 좋았는데 글로 옮기려니까 제가 너무 부족해서 혼났네요8ㅅT.,.
수트와 남자와 칵테일의 조합은 세계 최강이라구 생각합니다^0^!!!!!
***
랜슬롯은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있었다. 랜슬롯, 하고 부르는 청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가 청하였다. 평소와 같이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문에서 살짝 몸을 비켜 주었다. 비밀임을 당부하는 그는 꽤나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시 멈추어 그를 감상한 것뿐이었으나, 언제나 효율적이고 냉정함을 추구하는 ‘가웨인의 추천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소년이 들어갔다. ‘가웨인의 추천인’ 쿠니미 아키라는 온전히 갤러해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그는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갤러해드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었고, 스가와라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스가와라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의 몸을 감은 짙은 회색 양복에 복도를 밝히고 있는 백열등 빛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시계를 확인했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추천인과 함께하는 스물 네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을 이 세계에 발들이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언제나 킹스맨은 그들의 추천인과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이벤트를 열곤 했다.
그 때, 그는 마티니를 타는 법을 배웠다. 베르무트를 기본으로 한 마티니, 젓지 말고 섞어서. 007 스리즈의 제임스 본드 같은 느낌이 난다고 지적하자, 그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다. ‘킹스맨’은 예법과 품위, 약간의 위트를 가진 젠틀맨이지.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지론을 떠올렸다. 그는 작약과 같은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작약의 꽃말을 떠올렸다.
여러 겹의 꽃잎이 겹쳐 만들어낸 풍성한 꽃망울과 달리, 그 꽃이 품고 있는 말은 ‘수줍음’ 이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과, 작약과의 공통점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웨인이란 남자는 그 단어와 닮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부분을 찾아보자면 작약의 꽃심처럼, 그의 속내 또한 알기 어렵다는 것 정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잠시 멈추어 섰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의 뒷굽에 망설임이 가득 고여, 미련을 담아 흘러내렸다.
신사에게 고민은 사치와도 같은 것이다. 스가와라는 곧장 걸었다. 이미 방문하기로 연락 한 이상, 그는 가웨인을 만나야만 했다. 그는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리드미컬한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당당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의 추천인이 알려 준 ‘예의’였다. 가웨인의 가르침은 시간이 흐를수록 토양이 퇴적되는 것처럼 몸 안에 스며 있었다.
똑, 똑. 그리고 시간을 담아 똑. 스가와라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 까지 대기했다. 이 역시, 가웨인의 예법이었다. 들어와, 그의 옛 추천인이 말했고, 그는 문고리를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돌렸다. 그는 뒤를 돌고 있었다. 그의 방 안은 어두웠고, 달달한 꽃향기가 들어 있었다. 가웨인, 하고 부르니 그는 랜슬롯, 하고 화답해왔다. 몇 년째 이어져 오는 호칭이었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에 쉽게 익숙해 질 수 없었다.
“랜슬롯, 네 추천인은 어디다 남겨두고?”
“가웨인도 마찬가지인걸요.”
스가와라는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추천인을 둬서 기쁘겠어, 눈앞의 그는 빈정대며 말했다. 수려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문을 닫고 두어 걸음 다가섰다. 그의 책상 위에는 진과 베르무트가 있었다. 익숙한 블랙 올리브에 스가와라는 마티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추천인과의 마지막 날에 마티니를 마셨다는 가웨인의 소문을 떠올렸다.
쿠니미 군은 좋겠네요, 스가와라가 웃으며 말했다. 가웨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쿠니미가 의외로 술이 약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구닥다리를 싫어하니, 이 올드한 마티니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서 웃었다. 토비오와는 뭘 할 생각이야? 가웨인이 물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추천한 아이가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라고 운을 땠다. 그리고 예법을 가르치겠죠, 라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토비오는 우수한 학생이니까 예법도 순식간에 배울 걸.”
“그런가요?”
“스물 네 시간을 소비하려면 뭔가 더, 가르쳐야 할 거야.”
“예를 들면?”
스가와라가 물었다. 가웨인은 음, 하고 고민했다. 그는 얼음에 들어 있던 진을 꺼냈다. 우리 원래 목적에 들어맞는 이야기를 할까? 그의 제안에 랜슬롯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마티니를 마시러 오라는 원래의 전보를 그제야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가웨인의 집무실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쇼파의 광택에 감탄하며 시선을 앞으로 두었다.
난, 토비오가 협동심 항목에서 떨어질 줄 알았어. 가웨인이 말했다. 스가와라는 자신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쿠니미도 그쯤에서 떨어질 줄 알았지. 가웨인은 노래하듯 말했다. 그는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면서 조소했다. 스가와라는 화병 안의 작약을 만지작거렸다. 여린 꽃잎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미적지근한 향이 났다. 피려면 이틀에서 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는 봉우리를 보며 말했다.
“가웨인 씨는 말야, 쿠니미의 이름은, 스물 네 시간이 지나도 아키라일 거라고 확신해.”
“카게야마 때문인가요?”
“퍼시빌은 토비오의 자리가 되겠지. 떨어질 이유가 없어.”
내가 가웨인인 이유는 토비오가 불완전했기 때문이지. 그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진 병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광택이 반짝거리는 잔 두 개를 쥐었다. 스가와라는 불과 오년 전, 갓 중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킹스맨’이 될 뻔 했다는 카게야마의 말을 떠올렸다. 청소년기에 하곤 하는 허풍으로 취급 한 말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그가 취조하듯 물자, 가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안 좋아. 가웨인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추천인이 매우 우수하다면서투덜거렸다. 스가와라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는 무기사용, 대인응대, 협동심 등, 모든 자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남자였다. 무기력한 아이였는데, 사랑의 힘은 역시 대단해. 가웨인은 스가와라가 쉽게 알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는 마티니 잔에 진을 담았다.
“어떻게 해 줄까?”
“이미 진을 따른 것 같지만, 보드카 마티니. 섞지 말고 저어서.”
“오, 이런.”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닌 슬픔만큼이나 깊은 수심이 그의 한숨에 가득 담겨 있었다. 스가와라는 진은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스맨이라면 싫은 것도 마셔야지.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베르무트를 부었다. 눈대중으로 섞는 것 같지만 의외로 정확하게 계량했을 게 분명했다. 오늘의 그는 매우 심기 불편한 고양이 같았다.
온 몸의 털이 바짝 선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다리를 꼬았다. 젠틀맨, 하고 가웨인이 그를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그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스승’이곤 했다. 엷게 켠 조명이 가웨인의 ‘작업’에 별빛처럼 흘러내렸다. 반짝이는 마티니 잔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자신과 그의 스물 네 시간을 떠올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잔 안에서 섞이는 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비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주진 말아줘.”
“그렇지만, 우리는 킹스맨이고, 토비오가 ‘퍼시빌’이 된다면,”
“동료이기 때문에 모든 걸 알려주어야 한다? 로맨틱 한 말이야.”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의무적인 소리죠.”
“정답. 랜슬롯도 많이 컸는걸. 어엿한 킹스맨이 되었어.”
가웨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잔 안에 올리브를 띄웠다. 그는 소리 없이 걸을 줄 아는 남자였다. 그가 건넨 잔을 스가와라는 기꺼이 받았다. 유리잔과 유리잔이 키스하며,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스가와라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윙크했다. 랜슬롯이 이렇게 성장하다니! 가웨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랜슬롯은 마티니로 입술을 축이며 당신에게 배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웃음을 담은 눈은 호선을 그리며 감겼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서로를 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웨인은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받은 것은 되돌려 준다.’ 또한 가웨인의 오랜 신조였다. 어떤 느낌이 들어? 그가 물었고, 랜슬롯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같은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아찔했겠군, 가웨인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방에는 큰 회중시계가 있었다. 1과 2사이에서 유달리 큰 소리를 내는, 어설프게 고장난 시계는 전(前)‘가웨인’이 남긴 유품이었다. 가웨인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를 셈했다. 멀린과 아서가 우리에게 얼마를 줄지 감도 못 잡겠어, 그는 의외로 솔직하게 말했고, 스가와라는 삼십 분 정도는 남았을 거라 장담했다.
가웨인은 랜슬롯의 손에 들린 잔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는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했다. 머릿속에 담긴 모든 생각마저 훑어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 네 시간 동안 체념을 가르쳐야하는 건 슬픈 일이야.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형식적’인 위로를 내뱉었다.
“랜슬롯, 이미 결과는 정해진 일이겠지.”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과 같은 일이지요 가웨인.”
“나는 그게 매우 불쾌해.”
재능덩어리들을 일반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몇 년을 고민했지만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가웨인은 잔을 흔들며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우수한 인재가 원탁에 들어오는 것보다 좋은 일이 없다는 회유로는 그의 불쾌함을 씻어 낼 수 없을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천재였고, 쿠니미 아키라는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했다.
“쿠니미는 개를 못 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야 그 개 이름이 짝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웨인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스가와라는 허락 없이 키스를 구하는 행동이 ‘예의’에 얼마나 어긋날지를 고민했다. 가끔 ‘랜슬롯’과 ‘가웨인’이라는 이름은 난데없는 곳에서 무게를 가지곤 했다. 스가와라는 가웨인의 본래 이름을 입속에 머금었다. 그는 하염없이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섞인 체념은 어려운 법이라는 말을 꺼냈다. 스가와라는 쿠니미와 갤러해드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유추 할 수 있었다.
가웨인은 마티니를 마셨다. 반절 빈 잔을 그는 체리목으로 단단하게 짠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마티니 잔의 둥근 바닥은 그가 전까지 보고 있던 편지 한 통을 덮었고, 줄어든 수면(水面)을 옐로우 라이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이 채웠다. 그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몸에 딱 맞춘 감색 양복에 스가와라는 잠시 넋을 놓을 뻔 했다. 여러 장 꽃잎이 겹쳐 만들어내는 작약처럼 화려한 모습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가웨인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웃음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았다. 스가와라는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등 뒤를 바라보고 걷기로 결심 했을 때부터 익혔던 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 가웨인은 마티니 잔을 다시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칵테일의 표면이 한숨에 간간히 흔들렸다. 스가와라는 그 모든 장면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포장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포장지였다. 허나 가웨인의 날카로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포장임에는 틀림없었다.
“캉가루, 혹은 진 앤 잇.”
“진 앳 인?”
“랜슬롯, 질문을 하나 할게. 이 두 칵테일에 대해서 알고 있나?”
가웨인은 엄숙하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스윗한 발음이라는 것만 알겠어요. 그가 당당하게 말한 대답에 가웨인은 살포시 웃었다. 모른다는 건 넌센스야.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교양이 부족한가요? 그가 이어 말한 말에 가웨인은 전혀, 하고 대답했다.
“랜슬롯이 들고 있는 칵테일의 옛 이름이지.”
“아?”
“가령, 가웨인 경의 ‘오이카와 씨’ 같은.”
스가와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은 이제 캉가루나 진앤잇 같은 이름이 될 거고, 쿠니미 아키라의 이름은 ‘마티니’ 같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 가웨인은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잔을 비웠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 마다, 그는 멜랑콜리한 감정을 위 너머로 삼켜내고 있었다.
이 기묘하고 불쾌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웨인이 한탄하듯 말했다. 스가와라는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먼 사람 같은 감각을 느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티니 안에 들어있는 올리브를 입에서 굴렸다. 베르무트와 진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하고 가웨인이 운을 뗐다. 스가와라는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말 대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체리목 책상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작약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브로드 없는 옥스퍼드에서 제법 진중한 소리가 났다.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은 없다. 그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스가와라가 묻자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오늘은 짐승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토비오 앞에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더 가르칠 걸 생각 해 보라면서.”
“오, 랜슬롯. 내가 네 집 창문을 깨지 않도록 언행에 신경 써 주지 않겠니?”
“내게 좀 더 시선을 준다면 고려는 해 볼게요.”
보시다시피 손을 잡을 때 허락을 구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같은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눈높이는 여전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쓰다듬었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터키옥색 타이에는, 회색 스티치가 들어 가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넥타이죠? 스가와라가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에게는 기쁜 날로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는 서툴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타이 매듭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단단하게 묶인 매듭에 마른 입술이 닿았다. 그 당돌한 짓을 가웨인은 멀뚱하게 보고 있다가, 랜슬롯의 회색 머리카락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던데, 스가와라가 흘리듯 말한 말에 오이카와는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연인들은 흔히 짐승이 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의 불안감 중의 한 매듭 정도는 풀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내심 뿌듯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스가와라는 이미 잊혀진, 그래서 이제는 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토오루, 라는 이름은 마티니의 옛 이름인 ‘진 앤 잇’, 같은 멋스럽거나, ‘캉가루’와 같이 동글동글하게 뭉쳐 사랑스러운 느낌을 내기도 했다.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코우시, 라는 이름으로 화답 해 왔다. 그는 그의 목소리에서 ‘수줍음’이란 단어를 담은 소담스러운 작약 꽃봉오리를 떠올렸다. 개화의 순간은 이처럼 따듯할 게 분명했다.
“당신은 솔직하지 못한 게 흠이에요.”
“그래서 너랑 있으면 기분이 나빠.”
“날 추천하고, 선택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널 싫어해.”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싫어한다면 벌써 이 방에서 내쫓겼을 게 분명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와, 그 위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가웨인은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연인의 이름으로, 스가와라의 손길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쾌활하게 웃었다.
날 너무 좋아하는구나, 그는 안심한 듯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좋아한다는 단서조항을 내걸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어깨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피로한 사람이었고, 스가와라는 그를 백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그는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다시금 정리했다. 완벽한 모양을 갖춘 매듭에, 그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왈츠의 박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마티니 한 잔 더 마실래?”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이 아닌 보드카로. 오픈되지 않은 버무스 보틀을 바라보며 10초정도 흔들어서. 그의 주문에 오이카와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내 추천인에게 심술부리지 않는다면 진 베이스에 ‘흔들지 않는’ 마티니를 마시는 것도 고려 해 볼게요. 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입안에서 충실히 발음했다.
너무 어려운 조건이야. 할 수 없어. 가웨인 씨는 못 해. ‘가웨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매너, 라고 내뱉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그는 검지를 올렸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마티니 한 잔 주실래요? 스가와라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그의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댔다. 마티니처럼 묵직하게 감겨오는 애정표현이었다.
가웨인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뒤를 돌아 다시 술잔을 잡았다. 스가와라는 테이블 위에서 빈 잔을 가져다가, 그의 체리목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가웨인은 다시 솜씨 좋게 진과 베르무트를 다뤘다. 스가와라는 그가 허락하지 않은 소파에 앉아 허리를 기대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스틱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문득,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랜슬롯이 아니라 스가와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담고 있었다. 마티니 때문일 거예요. 스가와라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마티니는 약으로도 썼다는 말 못 들어 봤어요? 그가 능글맞게 말한 내용에, 오이카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느새 양 손에 마티니 두 잔을 들고 스가와라의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터키옥색 넥타이에 들어있는 회색 스티치가 멋스러웠다.
“스물 네 시간 뒤에 집무실로 오면 되나요?”
“뒤로 하게 해 줄 거야? 코우시?”
오이카와는 ‘지워진 이름’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제스처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가에 가 있는 마티니 잔의 입구를 바라보다가, 스가와라는 어둑어둑한 조명이 그의 입술에 묻었다는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못 이긴 척 잔을 내려두고, 탁자 위에 한 무릎을 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놔요 토오루, 스가와라는 마티니 가득 묻은 입술로 그의 숨을 서툴게 탐했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마티니에 들어간 블랙 올리브 같은 키스였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아,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을 움켜쥐려는 움직임 같아,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의 귓불과, 등을 쓸었다.
정말 싫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진 다음, 가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랜슬롯은 스물 네 시간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화가 다시 경쾌한 울림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쾌한 바람이 열리지 않은 창 안으로 작약꽃 향기마냥 퍼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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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5. 14:37
예전에 시린님과 풀었던 순수의 시대 느낌의 카게스가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글이 되었네요..
***
―이 천한 손이 그대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으로, 낯을 붉힌 두 순례자 같은 내 입술로, 그대에게 점잖게 키스하여 추한 자국을 씻고자 하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오페라글레스 안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줄리엣과, 머리를 잘 빗어 올린 로미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녀가 사뿐거리며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입맞춤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줄리엣이 걸음을 멈추자, 카게야마는 자신의 귓가에 다가온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쪽, 하면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은 순례자의 그것처럼 엄숙하면서도 악마의 입맞춤처럼 장난스러웠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와는 상반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물길 너머를 꿈결처럼 이야기 하던 스가와라를 떠올렸다. 그 끝에 땅이 있다던 이야기를 전 믿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실증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법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굳은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줄리엣 역 배우가 숨을 멈추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셋을 새는 그의 프랑스어는 키스처럼 유려했다. 스가와라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 결심을 할 때, 그의 눈가는 어린 새의 날갯짓처럼 떨리곤 했다. 카게야마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착한 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너무 욕되는 일이랍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예견 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손가락에, 카게야마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귓가에서 줄리엣의 나머지 대사를 옮겼다. 성자의 손은, 순례자가 가져다 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었다. 카게야마는 오페라글라스를 두 눈에서 땠다.
그의 하얀 소악마는 카게야마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마주대었다.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키스가 아닌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가 웃었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눈이, 그의 눈꼬리에 자리한 야살스러운 점과 대비되어 있었다. 그는 남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성자나 거룩한 순례자도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카게야마가 물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박스석은 이미 연극의 한 무대였다. 스가와라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목례했다. 하얀 문조의 깃털처럼 부스스한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카게야마 또한 얼떨결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그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짧은 연극이 끝남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확대되어 보이는 세상에, 좁은 무대가 다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차례 입맞춤을 교환한 상태였다. 그들의 죄는 입술 안에 있지, 스가와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커튼에 손을 뻗었다. 옳지, 하며 칭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스가와라는 언제나 갑자기 다가왔다. 박스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스가와라의 곁에서 타오르는 촛불뿐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더니, 자신의 숨결을 내어 불을 꺼트렸다.
“스가와라 씨.”
“그대의 눈에서 빛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는 어린애 같이 말했다. 치기어린 그 목소리에는 분명 카게야마의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과도 관련 있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종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성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는 느리게 스가와라의 얼굴 선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튼 너머의 세계를 상상했고,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성녀님, 손으로 하는 키스를 입 안에 담게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그래요, 스가와라가 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 줄리엣은, 서툴게 흔들리는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카게야마는 엷게 꿀을 발라 반짝이던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의 세계에 다가갔고, 그의 신앙에게 입을 맞추었다. 숨과 숨이 닿은 순간은 환희였으나, 탐욕스러운 혀가 섞이며 죄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절망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스가와라씨, 짧은 치욕 끝에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살포시 웃었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닿아 있었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가와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들어줄지라도 성자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의 천사가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흘렸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불안함은 숨결에 담아, 서로의 위 속에 가만히 담기곤 한다. 그 침전의 순간을 카게야마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서툴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다리는 스가와라의 다리 사이로 서툴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폭력적인 애정에 스가와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계집아이의 소리 같은 그 음색에, 카게야마는 그제 만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좋은 가문의 여식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내 입술의 기도를 받아주세요.”
스가와라는 그녀와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스가와라의 목덜미를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였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뛰는 그의 맥에 키스했고, 뱀파이어처럼, 그 곳을 혀로 핥아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가이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자신의 입술이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럼 제 목이, 당신의 죄를 짋어지겠군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제 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고, 이내 자신의 왼손이 그의 목울대를 자르듯 쓸어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파국이겠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종교가 될 수 없지요, 스가와라는 예쁘게 말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를 담고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에서, 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죄인이었어요.”
“그럼 내 죄를 돌려주오.”
카게야마는 로미오처럼 말했고, 스가와라는 ‘코우시’처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줄리엣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려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익숙한 곡의 변주, 그 날선 느낌. 그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들리다,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키스에게도 이유를 붙이시네요.”
스가와라가 말했다. 한 막이 끝난 듯 박스석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오페라글라스를 챙겼다. 스가와라가 연 문에 빛이 스며들어왔다. 그의 성자는 밖에서 성냥을 꺼냈다. 은제 성냥갑 안에는 인이 발린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약간의 부딪힘은 다시 일렁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한동안,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심해 같아요, 카게야마가 속삭인 말을 스가와라는 무시했다. 그의 종교는 불친절하였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 시간을 인내할 만큼 똑똑하지도, 신앙심이 깊지도 않았다. 스가와라는 턱을 괴었고, 커튼을 열었다. 빛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목 카라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하얀 목 아래에 피어난 붉은 열락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돌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스가와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말하는 어조로 큰일을 말하였다. 그는 긴 검지를 제 목울대에 대고, 천천히 그었다. 교수형 당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카게야마가 말하는 목소리에 그는 엷게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에 꽃을 실은 마차를 보내고, 나를 보러 오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내뱉어진 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 씨와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가 목을 쓸며 물었고, 스가와라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 나는 노란 장미가 좋아. 신사는 벗어둔 실크햇을 건드리며 말했다. 곧장, 가겠습니다. 카게야마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오늘 등이 꺼지지 않음을 예고했다. 너의 꾀꼬리 같은 줄리엣이 건너편 박스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자신의 오페라글라스를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죄를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당신은 꼭 고전처럼 말하시는군요.”
또 다시 한 걸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사랑은 치기어린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마법을 쓴다지 뭐예요, 라고 호들갑 떨며 말하던 유모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는 두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빨간 장미를 보내 줘,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강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질투심 많은 노란 장미를, 아니면 주인공처럼 핀 안개꽃을.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깊은 바다, 그 끝을 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아직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의 바다에는 끝이 없었고, 다만 침전만이 자리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꿈결을 걷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그의 손톱을 쓸어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련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탈함 속에 숨겨진 울음과 울분, 카게야마는 그것을 다만 엿볼 분이었다.
가라앉거나, 혹은 녹아들거나. 카게야마는 그들의 끝을 상상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장미같은 아가씨는 오페라글라스로 그 둘이 앉아있는 박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빛 너머에 있는 것은 명백한 질투였고, 카게야마는 그 시선에 목을 매달고 싶었다. 그의 종교가 사랑한다, 짧게 속삭이는 것이 그가 살아갈 이유였기에 그는 스가와라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함께 수장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사랑한다고 정면을 보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상대의 눈은 곧 바다였기에, 그는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스가와라는 대답 없이 그에게 노란 장미 이야기를 꺼낼 뿐이었다. 노란 장미와 안개꽃을 담은 상자를 보낼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그것이 제 관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가라앉은 시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숨결을 기억하며, 익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음 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언의 때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막을 올리는 종소리가 물 위에 떨어진 파문처럼 넓게 퍼졌다. 물 아래로 가라앉은 사랑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목을 긋던 손길이 선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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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4. 23:25
쌍방 짝사랑을 하는 고등학생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쿠니미는 잠이 많은 이미지? 느낌? 이 좋습니다ㅠㅠㅠ쿠니미의 요즘 고민이 너무 귀여워서 살기가 힘들어요..
동인설정이지만 맛키랑 맛층은 제 안에서 배구유학을 세죠로 온 이미지가 있습니다...(당당)
***
하나마키는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데워 온 도시락에서 작게 김이 났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방이 차가운 탓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점심시간, 약 60분 정도가 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난방을 돌리는 건 가난한 자취생에겐 사치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은 적자였다. 그는 얄팍한 지갑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항상 먹는 불고기정식이 아니라, 계란정식 도시락이었다. 그는 반찬이 한 가지 정도 줄었음에 안타까워마혀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배구부 후배의 것이었다. 하나마키는 ‘선배, 자취하시죠?’라고 묻던 그의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줍고, 당돌한 말투였다.
그는 그 날을 떠올렸다. 하나마키가 도시락을 놓고 온 날이었다. 그는 학교와 5분 거리의 원룸에 자취하고 있었다. 주방. 그리고 거실 겸용 침실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쿠니미는 그 날 하품을 했다. 내리기 시작한 벚꽃잎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머리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몇 개의 꽃잎은 마치 여자아이의 귀걸이 같기도 했다.
쿠니미는 항상 달고 다니던 친구를 놓고 왔었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름은 기억했지만, 락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미들 블로커’였고, 쿠니미는 ‘윙 스파이커’였다. 같은 포지션의 레귤러 후배에게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 있어? 하나마키는 곧잘 넘어가는 벽 앞에서 쿠니미의 말을 들었다. 쿠니미는 좌우를 돌려보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하나마키는 그 울림이 퍽 재미있었다. 쿠니미는 제법 간절해 보였다. 그의 눈은 많이 졸려 보였고, 그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 ‘락교’와 떨어졌을 때 의외로 커 보이는 키라던지, 단정한 머리카락이라던지는 하나마키의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취향은 없다-는 하나마키의 지론을 쿠니미 아키라는 2년 후배는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 블로킹, 쭉 뻗은 팔에 네트가 걸린 기분이었다. 강한 힘으로 쳐낸 그물망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하나마키의 마음은 봄철 숫처녀만큼 설레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란말이를 잘랐다. 가까운 곳에서 쿠니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 혹은 도시락의 포장을 제거하는 것 따위의 생활소음이 가득한 하나마키의 공간에서, 그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게 신기했다. 온전한 타인의 공간에서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운동부의 2년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거리감이 전혀 없다는 듯 행동했다. 제 멋대로 하는 꼴이 꼭 고양이 같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짧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뻗어오는 모양새는, 그가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쿠니미가 그의 세계에 들어온 그 첫날, 같이 담을 넘으면서 쿠니미는 수업시간에 깨어 있는 게 힘들어서 잘 곳을 찾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의 그 나른해 보이는 입술에서 하품이 나왔다. 하나마키는 그의 하품을 받아 제 입에서 굴렸다. 봄의 나른한 햇살이 둘의 머리카락을 데우고 있었다.
나 자취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하고 하나마키가 묻자, 쿠니미는 오이카와에게 들었다고 대답했다. 키타이치 시절 선배? 라고 물으니 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던 꽃잎이 바람에 실려 공중에 나풀거렸다. 하나마키는 그것을 잡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진 않았다. 입 속에, 비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숨겼다. 졸지에 그의 혀는 씨앗을 숨기게 되었다.
하나마키의 침대는 싱글이었다. 집이 좁은 탓이었다. 쿠니미는 그의 침대가 좁다고 불평하면서도, 얌전히 그 안에 들어가서 몸을 뉘었다. 선배 향이 나요, 하는 무심한 목소리에 하나마키의 위에서는 벚꽃이 자랐다. 바람에 삼킨 말이 자란 탓이었다. 하나마키가 별 말을 하지 않자, 그는 곧장 돌아누웠다. 하나마키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교복 니트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그의 다른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었다.
잠옷을 가져다 놓을까 봐요, 쿠니미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고
내 꺼 입을래? 하고 하나마키가 대답했다. 쿠니미는 핑크가 좋다고 대답했다. 핑크, 그리고 핑크였다. 하나마키는 그의 말에서 저의 머리카락을 생각하다가, 그래, 하고 말했다. 그 뒤에는 곧바로 숨소리가 이어졌다. 쿠니미는 빨리 잠드는 타입이었다. 예민하게 생긴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진 않았다. 하나마키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쿠니미는 등을 돌리고 자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천장을 보기 시작한다. 하나마키는 그의 이 잠버릇을 귀여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놀릴 시간이 마땅찮았다. 막 깨어났을 때 쿠니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을 함부로 걸 수 없었다. 막 잠들려고 할 때의 그에게 묻기에는 자는 애를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배구부에서 흘리듯 놀릴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에 자러 온다는 것을 킨타이치가 알게 된다면, 분명 실례가 되느니 하면서 방해 할 게 분명했다. 하나마키는 계란말이를 씹었다. 은근한 단맛이 혀끝에 들었다. 지금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소음은 쿠니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많이 줄어든 거리감에 눈을 깜빡였다. 아마도, 일방적인 마음이겠거니 싶어 그는 귓불을 매만졌다. 고민은 개화하는 꽃송이처럼 제 부피를 늘려갔다.
하나마키는 의욕 없이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어째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 안에서 단맛이 빠지지 않은 터였다. 그는 자리를 옮겼다. 쿠니미의 옆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하나마키의 손끝에 닿았다.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쿠니미는 정말로 고왔다.
피부가 하앴고, 머리카락은 가지런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결이 좋았다. 윤기가 흐르면서도 찰랑거렸다. 특별히 린스나 헤어컨디셔너를 가지고 와서 씻는 것도 아닌데 좋은 향이 났다. 눈매는 졸려 보이는 모양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 졸린 눈과 다물린 입을 볼 때면 하나마키는 중국의 포사를 떠올렸다. 웃지 않은 후궁을 위해서 거짓 봉화를 올리다 죽은 왕을 절절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고, 매일 같이 집에 오는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었다. 담을 넘고 나서, 집으로 걸어올 때의 그 5분, 쿠니미는 벚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화사한 프리지아처럼 걸었다. 그는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매우 기뻐 보였다. 연왕이 포사의 미소를 위해 봉화를 올리고 군수와 제후들을 놀라게 했듯, 하나마키는 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며 그의 입가에 편안함을 얹는 것이었다.
쿠니미가 뒤척였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귓불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귀가 드러났다. 하얀 귀에서부터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고왔다. 하나마키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위속에 들어간 벚꽃 탓이었다. 그 날, 쿠니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그 꽃자락 때문이었다. 하나마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나마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뒤를 돌았다. 쿠니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란 이름을 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의 눈감은 모습은 제법 어린아이 같은 태가 났다. 어른스러운 척 하려는 그 모습이 벗겨진 채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몇 백 년을 잤어도, 왕자에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하나마키는 익숙한 동화를 생각하다가 자리에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쿠니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에게서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났다. 그는 킁킁 향을 맡다가, 그의 말간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서툴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쿠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제 입술을 쓰다듬었다.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마법이 풀리지 않은 공주를 보며 하나마키는 그의 입술에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째깍이는 시계가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험했다. 하나마키는 바닥에 풀썩 앉아서 초조하게 얼굴을 쓸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여전히 숨만 색색 내뱉고 있었지만, 하나마키는 오늘 아침 받은 진로조사서의 장래희망 칸에 ‘왕자님’ 이라고 적을까, 하는 공상을 했다.
저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했을 때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먹은 벚꽃잎이 그의 위 속에서 여실히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음박 쳤다. 차가운 물을 틀었고, 그 물이 그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가려주고 있었다. 공주님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였지만, 왕자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며 급하게 세수를 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은 탓이었다. 하나마키는 화장실 벽에 기대었다. 다리가 풀려왔다. 그는 봄 때문에 미쳐간다고 애꿎은 계절에 화를 내뱉었다. 얇은 화장실 벽이 웅웅 울렸다. 하나마키는 이 점심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이 걸리고 가시덤불이 생겨, 멍청한 초침이 더 이상 달리는 상상을 하다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없는 핸드폰 알람은 지나가는 시간을 나타냈다. 5교시가 시작되기 10분이 남았다는 ‘모닝콜’이었다. 왕자가 아닌 선배가 로맨틱하다기보다는 기계적으로, 후배를 깨울 시간이 왔다. 하나마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다. 그는 쿠니미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학교 가야지, 일어 나.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나 조금만 더 잘래, 하고 웅얼거렸다. 아직 ‘후배 쿠니미 아키라’가 되기 전의 잠자는 자취방의 공주님을, 하나마키는 눈 속에 가득 담았다. 그는 진로조사서에 장래희망을 ‘왕자님’이라고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쿠니미를 세게 흔들었다. 방 밖에 벚꽃이 피어있었다. 쿠니미가 하나마키의 세계에서 깊은 잠을 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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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3. 1. 22:27
스가른 전력, [눈물] 이라는 키워드로 쓴 글입니다ㅠㅠㅠ...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를 보니까 요리하는 오이카와랑 받아 먹는 스가와라가 쓰고 싶어져서...:3c...
***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울했다. 그랬기 때문에 청어간장조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청어는 겨울 생선이었고, 이 날씨에 퍽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그 푸른 생선을 꺼냈다. 겨울 청어는 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었다. 동그란 눈에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나무도마 위에 그 생선을 얌전히 놓았다.
생선을 자를 때에는 언제나 눈을 가리고 싶어진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보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안타깝지만 오이카와 씨는 널 먹을 거란다, 그는 일부러 흥얼거렸다. 생선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머리를 빼고 간장에 조릴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청어의 맛은 머리에 몰려 있는 법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청어를 도마 위에 올리는 그 사이에 정이 든 건지, 오이카와는 청어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아까 방 안 한 구석에서 울던 자신과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도마 위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날 먹지 마, 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요리사였다. 그는 차조기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몸통을 사선으로 처리했다. 생선의 몸통을 사선으로 자르는 것은 의외로 현명한 일이었다. 어디가 ‘몸’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젓가락이 고루 가게 만든다. 분명한 부위는 눈뿐이다. 오이카와는 울고 있는 청어의 내장을 손질했다.
요리를 하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 되는 법이었다. 배구를 그만 두던 날, 그는 청어를 졸였었다. 정종과 미림, 설탕과 진간장, 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섞으며 울었고, 그 간장에는 오래 된 염좌가 오롯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청어처럼 졸여졌다. 오이카와는 찬장에서 간장을 꺼냈다. 조림은 가장 눈물과 닮은 맛이었다. 오늘 경기에서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가 활약했다. 둘은 같은 팀이었고, 오이카와는 그게 퍽 슬펐다.
파트너를 오랜 라이벌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가 코트를 떠난 건 오래 전 일이었고, 그는 이제 부엌의 식기구를 지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그의 마음은 청어처럼 팔딱이고, 쉽게 가라앉을 때가 있었다. 그는 조림간장을 만들면서 민어나 우럭을 졸일까 생각했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는 나름의 발악이었다.
그는 실파를 한 손에 잡고 도마에 눌렀다. 완전히 순서가 잘못 된 요리법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경기 하나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청어 냄새 가득 나는 도마에 칼질을 했다. 배구 코트와 배구화가 마찰하는 소리와는 퍽 다른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목에 갈치 뼈가 걸린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동거인의 직업을 떠올렸다. 배구 코트에 제법 가까이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보통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청양고추와 통생강을 꺼냈다. 그는 생강을 얇게 저몄다. 생강의 알싸함이 손끝에 묻을 때 마다, 그는 우울해졌다.
음식에 묻은 사연 때문에 우울한 건지, 아니면 원래 우울한 기분을 청어가 만드는 건지 오이카와는 영 알 수 없었다. 대파와 청양고추가 내는 향에 코가 찡해졌다. 눈물이 났다. 그는 오늘 조기조림에 내놓을 반찬들을 떠올렸다. 간장조림에는 야채와 매실 장아찌도 들어간다. 일품요리인듯, 일품요리 같지 않은 애매함이 묻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코를 킁킁거렸다.
손을 얼굴 가까이 대니 매운 내가 돋아왔다. 그가 내는 도마 소리처럼,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를 치는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돋아왔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부엌이 아니라 그 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애매한 생각들이 그에게 떠올랐다, 다시 사라졌다. 마치 국물의 대류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볼로 눈물이 떨어졌기에, 그는 토마토 된장국을 하기로 결심했다.
토마토 된장국과 청어 간장조림. 맛이 센 반찬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 줄 음식이 필요했다. 그는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조금 있다가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냉장고를 열었다. 요리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내심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그는 손을 한 번 씻고 냄비를 불에 올렸다. 그는 간장 소스를 넣은 다음 청어와 재료들을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청어 간장 조림은 강한 불에 세게 졸여야 한다. 간장냄새와 고추 향이 그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알토란을 꺼냈다. 돼지고기를 렌지에 해동시키고, 오이카와는 쌀을 세 컵 퍼 씻었다. 쌀뜨물은 토란을 삶을 냄비에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그는 눈을 깜빡였다. 스가와라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눈물이 더 번져왔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쌀을 마지막으로 씻어 밥통에 올려두었다. 약하게 기침이 났다. 눈물이 목에 걸린 탓이었다. 스가와라는 흰 쌀밥 같은 남자였다. 재미있는 구석은 없는데다가, 쾌청한 날 보다 우울해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그게 자신과 같은 이유일까, 오이카와는 토란을 끓는물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토란이 냄비의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는 오늘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혼자 밥 먹어, 라는 스가와라의 메시지였다. 그게 오이카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왔다. 혼자 먹는데도 둘이 먹는 것처럼 반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일이고, 그 습관에 비롯되는 감정들은 대부분 우울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두기로 결심 한 다음 날 그는 다섯 시에 일어났었고, 애인과 헤어지고 난 다음 날에는 이인 분의 식사를 만들곤 했다.
그 비틀어진 사건들을 그는 간장에 진하게 조렸다. 그는 냄비 뚜껑을 열고 끓고 있는 조림간장을 청어 위로 부었다. 눈물 같은 맛이 우러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혼자 식탁에 앉는 일을 싫어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외로움이었고,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홀로 밥을 먹는 일이었다. 빈 식탁은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버석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괜히 입을 움직였다. 그는 토란이 든 냄비 불을 서둘러 껐다.
그는 토란을 깠고, 쌀뜨물에 익혔다. 그는 돼지고기 안심을 볶았고, 된장국 육수를 우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이미 그의 서브에는 깊은 군살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 외로웠고, 그 과정은 여러 울음을 동반한 길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불이 꺼진 식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숨은 짙게 내렸고, 그는 청어 밑 가스레인지를 껐다.
그는 청어 간장 조림을 그릇에 담았다. 홍고추를 어슷썰기 해서 갈색으로 졸여진 청어 위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독한 우울함이 그 위에 있었다. 그는 토란을 안심과 함께 볶아냈고, 된장국에 토마토를 넣었다. 스가와라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오늘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인분의 식사를 만들었다.
밥통이 소리를 냈다. 뜸이 들려면 삼분 정도가 남았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스가와라가 들어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외로운 날 혼자 먹는 밥맛은 최악이었다.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고,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탄 간장만큼 암담했다. 우연이 겹쳐서 최악이 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기분이 울렁거렸다. 밥통이 뜸을 들였다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장하네, 하고 그는 밥통을 칭찬했다. 그는 플라스틱 주걱으로 밥을 잘 저었다. 밥 김이 손에 닿아 뜨거웠다. 그 따듯함에 괜히 더 울컥했다. 그는 식탁 앞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김나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채소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눈앞에 네가 있다면 당장 양배추를 자를 텐데.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조금 떴다. 둘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혼자 하는 식사가 어색했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잘 먹겠습니다, 뒤에 돌아오는 웃음은 없었다. 원래는 스가와라가 하는 말이었다. 그 다음에는 ‘맛있게 먹어주세요’ 라는 말이 따라와야만 마땅했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 셔벗을 먹을까. 그는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는 청어에 손을 댔다. 간장 맛이 진하게 스며서 맛있었다. 토란도 나쁘지 않았고, 토마토 된장국도 평소보다 더 잘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깊게 울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사춘기 소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세게 문질렀는지 눈가가 당겼다.
그는 일부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세게 냈다. 외로움을 쫓기 위한 방법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옆집에서 넘어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오늘 늦게 들어온다. 그는 어두침침한 무드등 아래에서 토란을 집었다. 얇게 썬 돼지고기와 함께 먹으니 식감이 제법 좋았다. 코끝이 다시 아려왔다. 따듯함을 위 속으로 집어넣을수록 속이 뒤틀렸다.
항상 멋있게 있으니까, 오늘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엉망인 얼굴로 뒤를 돌았다. 눈앞에 스가와라가 서 있었다. 그는 양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 버스, 아슬아슬하게 탔지롱, 하면서 그는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입 안에 들어 있던 토란을 어색하게 씹어 삼켰다.
“내 밥 있어?”
스가와라는 ‘울었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선택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 빨간 것 좀 봐, 스가와라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볼에 차가운 두 손을 댔다. 셔벗처럼 달콤한 손길이었다. 나 아까까지 되게 우울했어, 하고 오이카와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와, 청어네. 스가와라는 방어였으면 서운 할 뻔 했다면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그의 앞에 젓가락과 밥그릇을 놓았다. 스가와라는 제 쪽에 있는 밥통에서 밥을 꺼내 적당히 퍼서 담았다. 고요하던 부엌이 순식간에 지저귐으로 물들었다. 그는 오늘 버스를 놓칠 것 같아서 먼저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간표가 꼬이는 바람에 빨리 오는 버스를 탔다는 말까지의 여정을 내뱉었다.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울함이 점점 가시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먹구름에서 파란 하늘을 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가 내리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급격한 변화였다. 그는 스가와라의 홍조 띈 얼굴과, 그가 앉은 맞은 편 식탁을 바라보았다. 왜?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카게야마랑 이와이즈미 잘 하더라.”
“응.”
“그거 봤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청어에 슬픈 게 가득 묻어 있더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토란을 입에 넣었다. 있잖아, 식탁에 야채 부족하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그가 양배추를 써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 없어서 이 칙칙한 걸 채소도 없이 그냥 먹고 있던 거야? 그가 물었고,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말하기 미묘한 사실이 있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양배추와 양상추로 간단하게 만든 샐러드를 앞에 놓았다. 오늘 뭐가 널 우울하게 했니? 스가와라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의 경기가 잘 풀렸고, 오늘 밥을 혼자 먹는 것도 싫었고, 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토마토 된장국을 마시면서 그의 말을 천천히 들었다.
“이해 안 가지?”
“아니 이해 가는데.”
살다보면 갑자기 울고 싶을 때가 생기거든. 나도 배구 코트 가까이에서 처음 봤을 때 그랬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표정 이면에 있는 ‘닮은 감정’을 생각했다. 짭쪼름 한 눈물 맛이었다. 스가와라는 청어 간장 조림 같은 맛이었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오이카와는 그럴 때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먹는 사람이 ‘둘’이라는 것만으로도, 오이카와는 행복했다. 쉽게 찾아온 우울함은 약간의 비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이래서 밥이 좋아, 그가 문득 말한 말에 스가와라는 나도 그래, 하고 대답했다. 밥도 잘 안 먹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슈가? 오이카와가 다시 질문했고, 스가와라는 글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오이카와는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상쾌하고 상큼한 맛이 혀끝에 돋았다. 그는 그 아삭아삭함을 입 안 가득 굴렸다. 이거 금방 했는데 맛있네? 스가와라가 물었다. 너랑 같이 있어서 그래,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이나 가만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익숙하기 때문에 말까지 식사와 함께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풍경을 퍽 좋아했다.
“아.”
스가와라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뭐 잊은 거 있어? 오이카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반쯤 남은 자신의 공기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대박 큰 거 잊어버렸어. 그는 토란을 괜히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밥 다 먹고 하면 되는 거지, 오이카와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까의 눈물은 이미 소화시킨 뒤였다. 아냐, 지금 할 거야. 스가와라는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는 남긴 밥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잘 먹겠습니다.”
스가와라는 그 말 이후 합장을 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오이카와는 괜히 토마토 된장국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너 말 안 해? 스가와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우울함은 이미 그의 뱃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밥이 덮은 것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까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은 미소장국보다 짙었고, 다시마와 멸치가 들어간 육수나, 국수장국보다 진했다. 그는 자신의 슈가에게 웃어보였다.
“맛있게 먹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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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25. 22:57
스가른 전력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원래 일인칭이라면 '그'라고 지칭하지 않고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너무 글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이번엔 '그'라는 호칭으로 타협 해 보았습니다. 위성과 행성의 관계는 참 로맨틱한 것 같아요.
01.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 싸고 있다. 표먼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02.
스가와라 코우시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볼 때면 울컥하고 치받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그의 관계에서 비롯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나는 이 감정을 오롯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어붙은 유리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꼭 울 것 같았다. 익히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경쾌하게 부르지 않았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다 녹은 아이스크림 국물의 끈적함을 닮았고, 길고 긴 여름의 더위를 닮았다. 평소 상쾌한 얼굴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가 얼어붙은 것처럼 날 대했다면, 나는 내 이 짝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가와라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하얀 손가락으로 라떼가 든 머그컵 입구를 쓸었다. 저기, 있잖아, 하고 그의 목소리는 망설임을 가득 담아냈다. 나는 괜히 빨대를 돌려 유리잔에서 소리를 냈다. 맑은 소리에 그가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 씨는 말야, 상쾌 군의 망설임을 들어 줄 정도로 한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일은 내게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의 앞에서 표정을 만들 때 마다 가슴 한 가운데서 열기가 치받쳤다. 스가와라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부르는 귀여운 후배의 이름만으로 그가 품고 있는 서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두 번째' 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
"뭐, 그 녀석 대놓고 무심하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장 된 표현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배우들은 일부러 몸짓을 크게 하여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는 들은 적이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해야만이 다른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입술을 오물거렸다. 전혀 상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어 붙은 스가와라에게서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라는 말은 가혹하지? 스가와라가 물었다. 나는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는 오이카와는 이런 거 모르잖아, 라는 말로 응수 해 왔다. 고개를 들어 본 그의 얼굴은 '이런 마음도 모르면서 그런 말 하지 마'라는 문장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애석 한 일이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 있으니까 사랑하는 데 실패는 안 했을 거 아냐, 라면서 나름의 이유를 드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이처럼 타인을 이해 할 줄 모른다.
대부분 실패 한 적 없으니까 이렇게 네 연애 상담도 해 주는 거잖아? 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재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스가와라를 볼 때면 먼지 우주가 생각났다. 햇살 안에 들어 반짝반짝하고, 성운의 모습을 만드는 것은 결국 '먼지'일 뿐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지면 결국 바닥에 깔릴 뿐인 하찮은 우주인 것이다. 사랑을 하는 그는 먼지 우주 속의 유로파였다.
나는 다시 스가와라를 사랑하게 된 경위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신을 슬프게 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해서 듣기 좋았지만, 카게야마와 그 간의 서사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도 이 카페의 이 자리였다. 배경음악으로는 우타타 히카루의 'fly to the moon'이 흐르고, 눈을 들면 고흐의 '아몬드 나무' 그림이 보였다. '파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 스가와라와 같은 자리에 앉은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얼음이 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앞자리에 누가 앉는 지도 모르고 고갤 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민트초코맛 음료가 있었고, 나는 눈처럼 흰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라떼를 들고 있었다. 내가 휘핑크림을 반절 정도 퍼먹을 때야,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짓무른 그에게 나는 티슈를 건넸다.
나도 그 맘 잘 알아, 였나. 아니면 나도 알아. 였나. 나는 그 때 스가와라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 한 건 그는 배구 이야기 아니야, 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자신을 유로파에 빗대었다. 에우로페의 이름을 한 그 위성. 하늘과 별은 생긴 이래로 언제나 소년의 로망이었음으로, 나는 그 위성이 담고 있는 서사를 잘 아고 있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 67만 1050km라는 한 번에 헤아리기 어려운 거리 밖에서 목성을 바라보며 제 거리를 걷는 '별'이었다. 목성에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아주지 않으며, 단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성이었다. 지독한 짝사랑의 별이었다.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그 단어가 품고 있는 깊이는 다 녹은 민트초코프라페가 가지고 있는 텁텁함보다도 쓴 맛이었다.
목성에게 다가가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하고 그가 물었다. 시적인 말이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형편 없이 갈라져 있어서, 나는 그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 다음에야 대답 할 수 있었다. '우주의 질서'가 무너져서? 하고 대답하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끄덕이는 머리카락은 가볍게 나풀거렸고, 나는 얼떨결에 나도 짝사랑을 하고 있어서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거짓말이 시작이었다. 그 거짓말이 내 사랑의 '핵'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먼지와 가스들이 뭉쳐져서 별이 되는 것처럼,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두 번째 위성이 되었다. 나는 그의 유로파였고, 스가와라는 토비오의 유로파였다. 우리의 목성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나와 스가와라의 목성이 가지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내 우주의 시작은 스가와라였다.
별 거 아닌 울음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 있다. 스가와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지루하지? 내 짝사랑, 하는 목소리에는 얼음이 서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손을 뻗었다. 내가 뻗는 손길은 얼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는 그것이 위로라도 되는 양 가볍게 잡았다. 소행성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내 그림자, 내 뒷면, 혹은 내 내핵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는 얼음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하얬고, 예뻤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타입을 좋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날 좋아 해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보다 주는 걸 받는 게 좋았다. 좋아 할 여유도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주의 첫 대폭발처럼 다가왔다. 먼지와 가스만 차 있던 어둠뿐인 공간에 별이 뜨는 것처럼, 그는 나를 위성으로 만들었다.
나는 위성이었다. 오이카와 미안해, 하고 그가 다시 사과했다. 토비오의 이름을 부를 때 보다 짙은 목소리였다. '슬픔' 같은 약한 모습은 너 한테만 보여주고 싶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라는 말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오이카와 씨는 착한 사람이라서 네 지루한 사랑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 줄 거거든? 내 허풍 가득 한 말에 스가와라는 다시 웃었다.
유로파의 표면은 얼음으로 덮여 있다. 100km 두께의 얼음 아래에는 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물의 다른 이름은 분명 슬픔일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붙여도 하등 모순이 없을 것이었다. 나중에 토비오랑 잘 되면 맛있는 거나 사 줘.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 웃는 모습은 내가 봐도 홀릴 만큼 잘 생겼으나, 다른 쪽을 보고 공전하는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오이카와 토오루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일이었으나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우리 둘, 그리고 토비오를 낀 이 관계에서는 '우주의 법칙'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두 번째였고, 나는 두 번째의 두 번째였다. 우리는 서로를 사이에 두고 공전하고 있다. 우리는 유로파였음으로, 우리는 3.5512일을 지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갈 것이었다. 별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야말고 충실하고 충직한 사랑이었다.
오이카와, 너는 잘 되고 있어? 스가와라가 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하고 대답하니, 스가와라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소설가가 된다. 헛점 하나 없는 거짓말, 알리바이를 지어내는 추리 소설가였고, 둘도 없는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로맨스 작가였다. 스가와라는 나와 달리,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 곧은 눈에 나는 다시 소행성과 충돌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왜 스가와라 코우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나는 다시 의문을 제시한다. 내가 왜 걔를 좋아하게 됐을까, 라는 형태로 그 말은 입 밖으로 나갔다. 대명사를 사용한 서툰 연막에 스가와라는 운명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주는 우연에 가까운 필연에 의해서 만들어 진 거라는 과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쾌 군은 똑똑하네, 라고 칭찬하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뭐, 두 번째들 끼리 힘내자구, 하면서 서툴게 하는 말에 스가와라는 그래, 하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그 하이파이브를 할 때 마다, 나는 얼음층을 쌓았다. 두껍고, 두터운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스가와라와 사랑하는 꿈 속에서 산다. 내민 손에 나는 손을 얹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손이, 아래로 추락해 떨어졌다. 창 밖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려, 아무 것도 아닌 먼지를 '우주'로 바꿔놓고 있었다. 예쁘다, 하고 스가와라는 먼지우주처럼 웃었다.
위성은 자신의 축과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궤도를 끝없이 돌 뿐이었다. 내 끝나지 않는 공전은 스가와라 코우시를 축으로 한 노래였고, 사랑이었고, 꿈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더 가까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으로.
03.
유로파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로서,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깝기 때문에, 67만 1050km 떨어져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때문에 지표 온도가 낮에도 -130도를 웃돌며, 이 때문에 유로파는 하얀 색으로 보인다.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산맥과 깊은 계곡, 화산이 터진 자국은 보이지 않고, 다른 위성에서 볼 수 있는 운석구덩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얼음은 100km 두께로 유로파를 둘러싸고 있다. 표면을 덮은 얼음 아래로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유로파'는 에우로페라고도 읽으며, 이는 목성의 영어 이름인 주피터. 즉 제우스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로파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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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14. 16:35
오랑제뜨를 받았었다. 이와이즈미의 것이었다. 때는 1월 14일이었고, 그는 부활동이 시작하기 전에 부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었다. 이와이즈미는 클래스메이트가 준 거라고 말하면서, 오랑제뜨 여러 개가 들어있는 투명한 포장지를 흔들었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햇빛에, 오렌지에 졸여진 설탕입자들이 반짝였다. 쿠니미는 제 손에 들린, 그 손이 많이 가는 디저트를 들고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부실에서 유일하게 오이카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안 먹어? 오렌지 싫어해?”
이와이즈미가 쿠니미를 보며 말했다. 쿠니미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하고, 초콜릿 발린 부분을 입에 넣었다. 이와이즈미는 아빠라도 된 양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무심함에 감탄했다. 오이카와는 오늘 날짜가 매우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없는 날짜였다. 쿠니미는 아직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누나가 있다고 했던가, 아니면 소금 캬라멜 같은 디저트를 좋아해서 그런가. 오이이카와는 만약 쿠니미가 오랑제뜨를 만드는데 드는 노력을 알고 있다면, 먹는 게 꺼려질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와가 좀 더 세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가 장난기를 섞어서 말하자 쿠니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끄덕임에 흔들렸다. 이와이즈미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오이카와에게 다가오는 그 느린 풍경 뒤로, 하나마키가 오랑제뜨를 하나 더 집으려는 걸 막는 쿠니미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제 몫의 디저트를 얼른 입에 넣었다. 오렌지에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게, 오렌지필부터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오랑제뜨는 오렌지필에 초콜릿을 묻혀 굳힌 디저트이다. 초콜릿 샵이나 쿠킹클래스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메뉴이지만, 완성도 있는 제품을 만드는 건 의외로 까다롭다. 특히 주재료인 오렌지필은 직접 제작하기 매우 어려우므로, 다소 비싸더라도 구입할 것을 추천하는 편이다. 이 디저트는 초콜릿이 입에서 너무 빨리 녹아 허전할 때 생각나는 디저트이다.
오이카와는 설탕을 계량했다. 흩어질 가루눈처럼 모여 있던 설탕을 볼에 붓고, 미리 체에 걸러둔 시럽을 부었다. 설탕이 눈물처럼 녹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작은 결정 하나 남지 않도록 녹이려했다. 그의 가벼운 손길에 설탕은 쉽게 풀어졌다. 오이카와는 이제 좀 이 과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처음 소금으로 오렌지를 씻은 날로부터 정확히 사일 째 되는 날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집은 조용했다. 그의 오렌지필을 보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던 엄마도, 뭔가 먹을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기웃거리던 타케루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시럽을 불에 올렸다. 약한 불에 올린 시럽은 이제 사랑처럼, 착실하게 온도를 올릴 것이었다. 그는 괜히 시럽을 저었다.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가운데서 아까 타케루가 그에게 조잘대던 말이 형체를 가지고 다가왔다.
여자 친구도 없으면서 정성이다 토오루. 오이카와는 그 정직한 말이 오렌지의 흰 부분 같다고 생각했다. 꽤나 많은 양의 설탕을 바르고 졸여내도 쓴 맛을 담아내는 그 ‘흰색’처럼, 타케루는 오이카와의 약한 부분을 단번에 찌르고 들어갔다. 쓴 맛이 혀에 올라타는 과정 같았다. 누가 우리 누나 아들래미 아니랄까봐, 오이카와는 괜히 툴툴거렸다.
그는 따로 빼둔 오렌지를 바라보았다. 고작 부엌에 달린 백열등 빛을 흡수했을 뿐인데, 별처럼 반짝였다. 공을 들여 커팅한 보석 같았다. 오이카와는 오렌지필 하나를 집었다. 시럽으로 여러 번 코팅했기 때문에 모양이 가장 못난 것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법 볼만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다행이도 쓴 맛은 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다 끓지 않은 시럽을 보며 이 디저트가 손이 매우 많이 가는 음식임을 재차 실감했다.
‘그 날’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시 번져왔다. 이와이즈미가 단순한 ‘클래스메이트’에게 받아 온 오랑제트의 맛이 오이카와의 오렌지필에 번져오는 것 같았다. 서툴지만 신경 쓴 맛이었고, 끝 맛이 썼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완성품도 그녀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괜히 시럽을 저었다. 냄비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켰다. 그는 그에게 사랑의 달달함만 맛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괜히 마음에 스크래치가 났다.
그 날 연습시간에 하나마키는 쿠니미에게 ‘왜 먹는 걸 막았냐’라고 물었다. 그의 어린 투정에 쿠니미는 우리가 모두 남자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게 굉장히 멋들어진 답변임을 알고 있었다. 보통 남고생라면 이 디저트의 이름도, 안에 들어있을 노력도 알아챌 수 없었다. 오랑제뜨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오렌지를 설탕에 여섯 날 동안 조린다는 사실을 어느 고등학생이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겠는가. 쿠니미는 그걸 나눠먹는 생각을 하는 것도 실례라고 단언했다. 맞는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끓어오르기 시작한 시럽을 얼른 들어, 오렌지필이 가득한 볼에 부었다. 부엌의 백열등에서 반짝임을 빼앗은 듯, 스테인리스 볼 안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오랑제뜨를 바라보며 그 사람을 생각했다. 부엌 식탁 위에 달린 백열등마냥 강하게 내리쬐는 배구코트의 조명 아래에서 산뜻하게 빛나던 그를. 스가와라, 오이카와는 그의 이름을 어색하고 서툴게 발음했다.
오랑제뜨를 만드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다. 시럽을 만들어 달콤함을 오렌지 안에 가두는 과정은 육일에 걸쳐 진행되고, 오렌지를 식힘망에서 말리는데 또 하루가 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육일에 걸쳐 생성하시고 하루를 쉬셨다는데, 오랑제뜨를 만드는 데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 보다 ‘하루’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을 온전히 담금질 하는 데는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법이었다.
오이카와는 시럽이 오렌지 안에 얌전히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나무 숟가락으로 오렌지들을 저었다. ‘오렌지를 졸이는 밤’이 하루하루 늘어갈 수록,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얼마나 무심한 남자인지 새삼 깨달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소금으로 오렌지 표면을 벅벅 문지르던 첫 날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라는 말을 꼭꼭 씹어 발음하는 스가와라를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 목소리에는 오이카와만을 향한 미소가 따라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둘째 날 또한 ‘맑음’이었다. 상쾌한 그에게 오렌지의 상큼함을 선물한다는 게 의외로 센스 있지 않은가, 하는 자아도취도 따라왔다. 그가 제 눈앞에서 토끼마냥 입술을 오물거리는 걸 보는 게 꽤나 즐거울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는 ‘구름 많음’과 ‘흐림’이었다. 그는 자신과 스가와라의 심리적 거리에 대해서 고민했다. 시럽에 절여지는 오렌지를 마주하는 시간이 심란했다. 이와이즈미의 클래스메이트도 아마 이런 기분이 들었겠지 싶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오랑제뜨를 부실에서 나눠먹는 카라스노를 생각했다. 어제까지 좋았던 기분은 날개가 꺾여 단번에 추락했다.
솔직히 말해서 쿠니미 같은 사람이 카라스노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온전히 스가와라만을 생각하며 졸인 일주일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게 기분 나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오랑제뜨를 주는 일을 없는 걸로 하는 것도 싫었다. 그는 설탕시럽을 마시는 오렌지필을 살펴보았다. 오렌지가 품고 있는 칸마다 그의 감정이 설탕물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꾸덕거리며 반짝이는 감정의 편린.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랑제트에 들어가는 오렌지에 설탕을 입히는 데는, 1kg가 넘는 양이 필요하다. 매 회 250g의 설탕을 따로 먹으며 굳어간 오렌지필이 가끔 과하게 쓴 맛을 내는 것은, 만드는 시간이 길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것을 졸이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감정은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회, 혹은 걱정. 그 부정적인 감정을 먹으면서 오렌지는 제 몸을 불려간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렌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후면 초콜릿을 입고 예쁜 무늬의 폴리백에 들어갈, 오이카와의 감정 조각들이었다. 오이카와는 식탁 위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발렌타인데이가 머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의 숫자를 세었다. 발렌타인데이 전날에 주자, 그는 다시 한 번 날짜를 결심했다. 기념일에 맞춰 주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 초콜릿을 줄 다른 여자애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 싫었다. 오이카와는 특별하길 원했다. 그가 스가와라의 세계에 간섭할 수 있길 원했다.
일주일, 그 칠 일 동안 오이카와는 설탕에 졸여지는 오렌지였다. 질투와 애정, 순수한 마음과 후회 등이 그의 몸에 더덕더덕 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결국 사랑이라는 초콜릿으로 갈무리되어 스가와라의 앞에 전달 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없었다. 마냥 스가와라가 보고 싶었다. 그의 감정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그가 아무리 사려깊고 세심하다 해도, 예쁘게 포장된 오랑제뜨 앞에서 그는 분명 일반적인 남자 고등학생처럼 행동할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과 디저트를 공유하고, 나눠먹을게 분명했다. 어떤 감정이 녹아있을지 하나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초콜릿 입힌 오렌지를 주는 행위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라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흡한 마음 한 톨, 그 한 조각이라도 주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괜히 오렌지가 든 스테인레스 볼을 흔들었다. 그의 손길을 타고 고민이 볼 안에 들어갔다. 오렌지는 여전히 반짝이며, 달콤한 향을 냈다. 사흘 내내 담긴 감정들이 볼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오랑제뜨 안에는 고민마저 녹아 있었다. 사랑에서 파생 된 긍정과 부정 모두 오렌지 칸 안에 숨어 있었다.
오렌지에 달달함을 묻히는 과정 내내 감정은 파랑처럼 요동쳤다. 그렇지만 그것은 ‘애정’이라는 대단원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오이카와는 괜히 볼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쾌 군, 하고 그는 다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마음에서 다시 사랑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부디 ‘스가와라의 아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는 자신의 오랑제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준’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오고 있었다.
오랑제뜨는 오렌지필에 초콜릿을 묻힌 디저트이다. 초콜릿 가게나 쿠킹 클래스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메뉴이지만 완성도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운 일이다. 특히, 주재료인 오렌지필은 직접 제작하기, 까다로우므로……, 다소 비싸더라도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오랑제뜨의 주재료인 오렌지 필을 만들 때는 번민하는 여섯 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디저트는 외사랑이 입에서 너무 빨리 녹아 허전할 때 생각,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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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8. 22:00
이 그림을 봤습니다. 짝사랑이 좋습니다. 스가른 전력에 참여한 글입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나 라벨의 '물의 유희'를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림을 한 장 본 적 있었다.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여러 번 덧발린 회색이 꼭 그를 생각나게 했다. 담담하게 발린 눈들은 멀리 돌아 먼 숲을 비췄다. ‘유화’라는 단어에 으레 붙어 있곤 하는 거친 붓 느낌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복사본을 잘라내, 책 안에 담았다. 녹지 않은 길, 그 너머 쌓인 먹구름들은 꼭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의 겨울이었다.
목 끝까지 얼어붙은 계절을 겪다보면 그 뒤에 봄이 있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카게야마는 옷깃을 여몄다. 패딩 너머로 겨울이 스몄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겨울」과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는 먼 길에 있던 흰 나무숲을 상상하며 걸었다. 발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계절만 되면 그를 떠올리곤 했다. 카게야마의 겨울은 ‘그’와 마주닿아 있었다. 그에게 봄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끝에 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겨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그 일방적인 쌀쌀함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대용품이었다. 달달한 초코 케이크를 대신하는 편의점 초코파운드 빵이나, 눈이 내리는 모양을 흉내낸 스노우볼이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또 멀리 떠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조금 추웠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랭한 방이 그를 반겼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 정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러시아 화가의 그림이었다. 카게야마는 화가의 이름 중에서 ‘알렉세이’라는 단어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다음을 쫓아오는 이름은 그에게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그 네 음절을 맘에 담아둔 것은,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 닮은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에게 의미 있는 계절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발 끝부터 톱밥이 차오름을 느꼈다. 겨울이 찾아올수록 속이 마모되는 것 같았다. 추위는 따듯함을 먹는 짐승이었음으로,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리 걸려있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겨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봄은 찾아오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겨울과 봄, 그 어드매의 ‘아무것도 아닌 계절’을 살고 있었다. 스페어 키, 스노우 볼, 싸구려 초코 파운드, 준초콜릿, 그는 자신과 비슷한 물건들을 나열하다 소파에 누웠다. 겨울 향기가 짙게 났다.
보자고 했으면서요, 카게야마는 뒤늦게 문자를 보냈다. 죄책감을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었다. 그사람은 선배가 친구밖에 안 될걸요, 그는 괜한 말을 덧붙였고, 전송했다. 손가락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는 가끔씩 최소한의 온기마저 앗아간다. 뼈가 굳는 것 같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각이었으나, 이 계절에는 흔해 빠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먹구름이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회상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 읽은 책, 다 읽은 편지, 낡아빠진 감정들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로 손을 쓸었다. 겨울이 쓸었던 자리였다. 그의 지문이 묻은 자리들은 미미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손끝은 따듯한 편이었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얼굴이, 차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고장 난 메트로놈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나, 그 사람이랑 키 비슷해요. 완벽히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단 선배보다 크니까요,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을게요. 당신 몸에 흔적 하나 내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와 당신이 봄을 찾을 때 까지만 날 이용해줬으면 좋겠어요. 카게야마가 서툴게 내민 손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잡았다. 그 또한 겨울날, 온기가 간절했을 것이었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기에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뒷모습, 그 발끝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카게야마 어느 날 스가와라가 흘리듯 했던 말을 반추했다. 이름에 그림자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 할 수 없었다. 웃었던가, 혹은 울었던가. 그는 그가 뒤돌길 그저 바라는 것뿐이었다. 사랑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봄을 흉내 내는 계절이었다. 껍데기 같은 사랑, 박제품 같은 사랑, 카게야마는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싸게 구한 복제품이지만 그 아득함은 깊게 담겨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나무 숲은 멀리 있고, 드문드문 자라있는 풀들은 색이 없었다. 그 끝없는 겨울, 그 짝사랑.
둘이 겪고 있음에도 이어지는 짝사랑. 둘이서 하고 있지만 혼자서 하는 연극, 모노드라마. 여러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연기, 그 향은 기억할 수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배구공이 손에 잡혔다. 그는 배구공을 위로 올렸다, 다시 받고 위로 올리길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니, 겨울이 겨울임을 알았기 때문에 봄을 자처했었나, 카게야마는 배구공을 아래로 내렸다. 공은 힘없이 굴러가다 벽에 부딪혔다. 꼭 저 같은 꼴이었다. 그는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방안에 외풍이 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찬 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속은 온통 톱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박제된 채, 틀린 방향으로 이어간 사랑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알렉세이가 그린 「겨울」에는 길이 있다.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 얇은 부분은 온전히 숲으로 뻗어 있다. 그렇게 고정된 길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탄식했다. 겨울에게는 봄이 필요하다. 얼어붙은 제 몸을 녹이고, 따듯함을 찾기 위해선 봄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는 회전한다. 카게야마는 소파 등받이를 보고 돌아누웠다. 눈꺼풀에 먹구름이 올랐다.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얼어있는 채로 가만히,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다. 지독한 슬픔이었다. 유화에서 색을 만든 것처럼, 그의 사랑은 슬픔에 개어 캔버스에 여러 번 덧바른 채 겨울로 나타났다. 그는 입술을 쓸었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숨결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하고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딪히지 않는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몸 위에 안개처럼 서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봄이 될 수 없었다. 혼자 누운 소파는 한 사람분의 슬픔을 담았다.
겨울이 돌아야 봄이 온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그 그림은, 스가와라의 짝사랑과 닮았던 그림은 어느새 카게야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걸음쯤을 앞으로 다가갔고, 액자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깰 수 없었다. 던질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속삭였다. 사람의 바람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액자 뒤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액자 뒤편을 감싼 판, 그 판을 갈아 놓은 톱밥같은 것이 그의 목 끝을 답답하게 덮었다. 그의 그림자에 서리가 피어올랐다. 봄이 되고 싶다, 그는 다시 속삭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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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8. 18:48
예전에 썼던 템페스트와 피아노 맨 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스가와라 씨는 분명 귀엽고 직설적일 거라구 생각합니다. 교류회 뽕을 맞아서 그른가 금방금방 써지네요... 아 교류회 또 가구 싶다.....
***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유려한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를 배회하다가 음을 만들어 냈다. 그는 쇼팽의 혁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 콩쿠르의 연습곡이었던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저번 주의 오이카와가 말하던 콩쿠르 내용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곡에 이름-혹은 별칭-이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호들은 클래식을 더 어렵게 만들곤 했다. 음악실 창 너머로 햇빛이 들어왔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같던 스가와라의 점심시간을 오이카와는 매우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이 퍽 좋았다.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날과 같은 설렘이 돋아왔다. 잔잔한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돋은 것도 같았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쉬웠다. 그의 귀는 오이카와의 음악소리만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에 내리 앉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멋있는 사람이었다. 봄철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상냥하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그가 예술 반의 하얀색 교복을 입고 있을 때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이카와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피아노 앞에 있을 때였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양 손을 마주잡았다. 그가 음을 만들어 낼 때 마다 손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혁명에 별칭을 붙인다면 아마 '지독한 불만을 담아'라는 이름일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그랜드피아노 너머로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집중해, 라고 말하는 연주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귀 너머로 흘리며 그가 나간다던 대회를 검색했다. 이미 보도자료가 돌았는지 ‘두 사람’의 이름이 메인에 떴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오이카와 토오루, 콩쿠르의 왕좌는 누구에게? 스가와라는 소리 내어 기사를 읽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의 혁명은 짜증을 더해갔다. 오이카와, 그렇게 하면 혁명이라기보다는 ‘때 쓰기’ 같잖아. 그의 신경질적인 타건을 보면서 스가와라가 첨언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 오이카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그는 흰색 교복 상의가 불편했는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웬일인지 항상 갖춰 입고 있던 크림색 니트가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가 팔을 걷어붙이는 게 퍽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연미복 차림의 오이카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여기 여자애들도 없는데, 스가와라가 농을 걸자, 오이카와는 네가 있으니 괜찮다는 의미 불명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금 그의 혁명이 시작됐다. 스가와라는 그 일괄적인 음의 흐름을 들었다. 여전히 난폭하고 정제되지 않은 맛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들었던 우시와카의 ‘쇼팽 연습곡 op. 10-12 in c minor’을 떠올렸다. 난폭한 오이카와의 혁명과 다르게 고요한 맛이 있었다. 그 극도로 정제된 고요함 속에 흘러나오는 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그 곡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는 의자를 피아노 옆에 끌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앞에 두었다. 스가와라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5교시가 무슨 과목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고민을 깨트린 것은 오이카와였다. 아 진짜 짜증나, 오이카와의 다물린 입 너머로 말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 난폭함을 좀 더 다스리다가 손바닥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세게 쳤다.
미처 음이 되지 못한 소리들이 한데 뭉쳐 올라갔다. 스가와라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이카와는 피아노 건반 위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눌린 건반은 아무런 음을 내뱉지 않았다. 머리 쓰다듬어 줘, 오이카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술 하는 애들은 다 이렇게 제멋대로야?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이와이즈미 군은 안 그러던 것 같은데, 스가와라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걔도 목 안 풀리면 성질 장난 아니라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자기 보온병에 누가 손대는 것도 싫어해, 하나마키는 누가 자기 바이올린 건드리는 거 싫어하고, 마츠카와는 첼로 때문에 면허 따는 걸 벼르고 있고, 그리고 쿠니미는 손에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고, 그리고, 킨타이치는 … 하며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친구들의 나쁜 버릇을 이야기 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꼬집었다.
“누가 친구 험담하랬어?”
“물어본 건 너잖아!”
오이카와는 신경질을 내며 다시 피아노를 마주앉았다. 우시와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등을 세게 친 다음에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처음 그를 신경 쓰게 된 날 보다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부쩍 스가와라에게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콩쿠르를 주기로 일주일 전후가 가장 심하니까 피해 다녀, 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을 떠올렸다.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는 일등이 왜 하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혁명의 초입을 연주했다. 음이 끊임없이 질주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면 매력이 없어-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니 스타일대로 하는 게 어때?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듯, 오이카와는 음을 단정하게 쓰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 신경 쓰는 거구나. 스가와라는 머쓱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오이카와는 반복되는 주제부에서 다시 음을 세고 화려하게 가져갔다. 그 강한 음 위에서 놀아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트로피를 차지 할 수 있다는 말을 그의 손가락이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음이 뽑아지는 것부터가 신기 한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진짜 싫다- 하고 내뱉으면서도 음을 예쁘게 만들어 내려고 했다.
우시와카의 혁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스가와라는 왜 그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하면 그게 끝인가, 그는 인문계인 자신이 알 수 없는 범위에 오이카와가 있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스가와라는 괜히 검은 가쿠란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더 좋게 위로 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혁명’의 마지막 음을 연주하고, 그의 가느다란 두 손이 건반 위에서 나가자 스가와라는 박수를 쳤다. 못한 연주에는 박수 안 쳐도 괜찮아 상쾌 군, 오이카와는 의기소침해서 중얼거렸다. 스가와라는 듣기 좋았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둘만 있는 음악실에서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한 번 정도 더 연주하고 갈 수 있겠지? 그가 물었고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동수업이지만.”
“상쾌 군 이동수업이야? 근데 왜 안 가? 맞다, 오늘 수요일이지.”
오이카와가 놀랐다는 식으로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서 치기나 하라면서 그의 팔목을 잡아 건반 위에 올려주었다. 오이카와의 음이 다시금 시작됐고, 그는 가만히 그걸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가? 그가 다시 물었다. 스가와라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는 시계를 확인 했다. 수업에 조금 지각할 것도 같았다. 그는 우카이 선생님이 오늘 기분이 좋길 바라면서입을 열었다.
“너 피아노 치는 거 좋아서.”
“방금 좀 느끼했어.”
오이카와는 바로 대답하면서 음을 만들어갔다. 스가와라는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라면서 다리를 쭉 폈다. 오이카와는 그게 뭐냐면서 타박했다. 혁명의 강한 음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소녀의 기도’ 소리를 따온 수업 종이 울렸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끝낼 법도 하지만 그는 건반을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점이 오이카와 토오루 같아서, 스가와라는 좋았다.
너 늦겠다,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스가와라를 일으켰다. 스가와라는 그의 하얀 교복 마이를 건네면서 별로? 하고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잘 들었다면서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느긋한 걸음에 초조해졌는지, 오이카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니 오늘 수요일이니께 수학이자너, 그의 말투에 스가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걸었다. 오이카와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일종의 ‘일탈’이었다.
“오늘 어땠어?”
헤어지기 전 복도에서 오이카와가 물었다. 5교시가 이미 시작 되었는지, 복도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연주회장 3층에서 듣는 ‘볼레로’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박자도, 음도 들리지 않지만 곧 몸을 키워내는 음악소리처럼, 두근거림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는 글쎄, 라고 머뭇거리면서 고백을 입에서 굴렸다.
“정말 좋아.”
“니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좋았어.”
스가와라는 활짝 웃었다. 니 해바라기 닮았다. 오이카와는 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어떻게 하냐? 니 내 클래식 잘 모르는 거 알잖아. 스가와라는 투덜거리면서 그의 옆구리에 툭툭 잽을 날렸다. 오이카와는 옆으로 움찔대면서 그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니 연주 정말 좋아. 스가와라는 장난기 가득한 풍경에 진심을 던져 넣었다. 오이카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고만 하지 말아줄래?”
“좋은 걸 어떡해.”
“아 몰라!”
오이카와는 복도를 달렸다. 예술동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 발소리가 세게 울렸다. 스가와라는 언뜻 본 오이카와 토오루의 붉어진 귓바퀴를 생각하다가 볼을 긁었다. 다시 스가와라 코우시의 세계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그는 햇살을 통과하는 먼지우주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귀여운 것도 같았다. 볼레로 같은 마음이 점점 제 몸집을 키워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보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붉어진 얼굴만큼, 뛰어가던 뒷모습만큼, 서툰 혁명만큼 오이카와가 좋았다. 스가와라는 괜히 볼을 긁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사히가 보낸 문자가 들어 있었다. 니 책 옮겨 놨어, 스가와라는 땡큐,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만 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달려간 반대쪽으로 달렸다. 햇살은 느리고 따듯한 박자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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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2015. 2. 5. 14:43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서툴게 따라 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꾼 꿈을 바탕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어렵네요. 세터샌드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좋습니다. 단편으로 쓴 것 중에 가장 길게 나와서 당황스럽구 그렇습니다. 생각 한 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 못 해서 서러워요.. 역키잡 느낌을 내고 싶었ㅆ씁니다.....
***
야치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원할 것처럼 켜져 있던 불빛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수신음이 길었다. 시미즈는 아직 깨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기묘한 생활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낮동안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관처럼 꾸며진 방은 여러 겹의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야치는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단지 독특한 것 뿐이었다.
야치는 오늘 늦는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룸메이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퇴근하고, 잠에 들기까지의 단 몇 시간뿐이었다. 그는 오늘 잔업을 설명해야만 했다. 시미즈는 눈에 띄게 실망할 것이었다. 그녀는 안경다리를 매만지다가, 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겠지. 야치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상상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야치? 하고 묻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잔업이니?
“오늘 저희 사장님께서 광고를 내시는데, 그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시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피를 쓰기 위해서는 사연을 들을 필요가 있는 법이란다.
시미즈는 조곤조곤히 이야기했다. 야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오늘도 사장님이 짙은 남색 벨벳 코트와, 모노클을 끼고 오셨냐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야치는 사장님의 ‘옷차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질 좋은 실크 셔츠와 남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양복을 입고 왔다. 그는 항상 양산을 받치고 있었으며, 가죽 장갑과 외알 안경을 상비하고 다녔다.
별난 사람이었다. 야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빙글거리는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 시간 됐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병아리 같은 목소리구나, 그럼요, 그녀는 몇 가지 안부를 더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야치 씨, 하고 히나타가 그녀를 불렀다. 야치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사장실로 통하는 깊은 문을 열었다. 시미즈의 방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우리 사장 참 독특하지, 히나타가 야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야치에게 불빛이 나오는 건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녀가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작은 녹음기와 카세트테이프뿐이었다.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잘 다녀와, 그의 태양 같은 목소리에 그녀는 위안을 얻었다. 사장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장의 화내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기억했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힘 내. 히나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같은 문이 닫혔다. 그녀는 어둠속을 잔잔히 걸어갔다. 작은 등불이 그녀가 앉을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히나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의 취향이었다. 야치는 조금씩 그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카세트테이프를 장착했다. 그는 시체처럼 조용히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벨벳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항상 끼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놓은 채 였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잡아먹지 않으니 안심해도 괜찮아.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님, 야치 히토카입니다. 녹음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매뉴얼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 어스름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분위기는 죽음처럼 무거웠다. 장례식장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테이프가 가만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메모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뷰는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음악소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야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가 첫 마디를 때길 기도했다.
“오늘 아침, 자네가 입사할 때 냈던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었어.”
그는 한탄하듯 흘려 말했다. 야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학 시절에 썼던 레포트였다. 그녀는 사장이 그것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별다른 스펙이 없는 그녀가 바로 메이저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논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장의 젊은 외견과는 비교되는 취향이었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것을 좋아했다. 그는 아날로그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고전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야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괴짜 같은 말이었다. 그는 빛에서 멀어지듯,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어렴풋하게 촛불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얬다. 오늘은 화장을 하지 않았어,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소포클레스는 나보다 몇 세기나 나이가 많아.”
“그렇죠.”
“나는 거기서 위안을 느낄 때가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야치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겠나? 카게야마가 말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벳으로 만든 자신의 양복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 끝에 닿는 감촉에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숨결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이 유리 안에서 반짝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쓸었다. 그는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네에게 손 끝 하나도 대지 않아. 나는 자네에게 이 거리 이상 다가갈 생각이 없다네. 위협이 들면 나에게 등불을 던져도 좋아.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이 선 육식동물 앞에 서 있는 감각이었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약속해. 그가 말했고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보호자에게 연락은 했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미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에게서는 그녀와 같은 느낌이 났다. 겨울철 나무수국처럼 비쩍 말라버린, 수분 따위 없는 그 건조함이 닮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룸메이트와 같은 느낌이라 생각 하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 할 때 질문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지시했다.
“네 기준에서 늙은이라서, 풀어 놓을 이야기가 많아. 늙은 사람은 보통 자신의 말이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세월을 기억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부터 힘들어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질문이나 의문점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을 ‘세월’이 얼마나 큰지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는 공고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허락받은 칸을 생각했다. 가로 10cm에 세로 5cm. 그 작은 공간 안에 담길 추억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앞자리에 있는 물을 가리켰다. 그녀는 물병을 쥐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물병 소리조차 나지 않게 해주게. 그의 요구에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진한 밤하늘 색 벨벳 재킷에 오렌지빛 등이 들었다. 그는 그게 거슬리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등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게. 나는 불을 피울 수 없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야치는 준비 되었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고아였네. 나의 아버지는 이런 나를 거두어준 분이지. 그의 이름은 스가와라 코우시, 일본 출생이지만 우리는 영국에서 살았어. 나는 왜 내가 동양인임에도 그 곳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이런 몸을 가지기 한참 이전의, 일이니까. 나는 스가와라의 화동이었네. 화동을 알고 있나? 요즘 ‘화동’이라는 말은 결혼식장에서 주로 쓰이곤 하지. 버진로드의 앞자리를 채우면서 꽃을 뿌리는 아이들을 의미하곤 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의 화동은 아니었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어. 나의 아버지, 앞으로 스가와라라고 지칭하겠네. 내 아버지는 두 사람이니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메모지가 있다면 메모해도 좋아. 자네의 앞자리에 놓아두라고 히나타에게 부탁했으니까. 그래, 내가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적어두게. 아무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부들이 모이는 장소로 갔네. 마차를 꽃으로 장식하는 게 예의인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곳은 꽃을 파는 집시들이 모이곤 했지.”
야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라고 하셨나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서나 쓰였던 이동수단의 이름이 생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옛날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야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니, 실로 괴물이지. 마차가 자동차가 되고, 그 자동차마저 비행기가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세월에 갇혀 지내는 짐승이니까. 자네의 시간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해하네.”
“이해하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나?”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체처럼 말라가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미즈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하고 묻고 혼자 그 답을 찾아냈다.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겁이 나면 등불을 쥐게, 그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등불은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숨결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얇은 유리막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등불 뒤에 달린 숨구멍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노련하게 그를 배려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쓸었다. 인간적인 행동이었기에 야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꽃을 좋아했어.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것은 짧게 호흡하고 짧게 져버리는 생물이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생물이지 않나, 나는 그것들을 매일 아침 화병에 꽂아 놓는 일을 했네. 어린아이가 한 아름 품에 안아봤자 얼마나 안을 수 있겠나? 나는 맨 손으로 갔다가 바구니 두 개에 꽃을 실어 움직였어. 실로 비효율적인 인사人事였지만 나는, 스가와라가, 내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이제는 알고 있어. 어린아이가 뛰어다닐 때 그 작은 심장이 뛰는 것이 퍽 신기했던 것이지. 낮에는 그가 자느라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밤이 가까워 오고 어스름이 질 때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는 마치 시계처럼 그를 잠에서 깨웠겠지.
그는 시체처럼 잠을 잤어. 아니 시체, 그래 시체야. 우리의 심장은 네 것처럼 뛰지 않으니까. 꽃을 살 때는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 백작님 앞으로 라는 인사를 했단다. 나는 집시들의 유명 인사였어. 매일 아침마다 꽃을 사러 왔으니까. 마차에 처음 꽃을 장식할 생각을 한 것도 나의 아버지였어.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했으니까. 실로 감상적인 뱀파이어, 가 아닐 수 없었지. 오래 살다 보면 으레 하게 되는 일이지. 그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영원히 그 시절에 고정당해 있었어. 지금의 나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치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그녀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국, 스가와라 백작, 화동. 그녀는 몇 가지 키워드를 메모했다. 그는 그것을 다 적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제 먹은 반찬을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야치는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이 어떤가? 그가 농담을 건넸다. 야치는 심장이 떨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무슨 느낌인지 잊어버렸어. 그는 연극 배우처럼 웃었다.
“내 아버지는 꽃이 많이 필요했어. 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과 친구였지. 그들의 아버지와도 친구였어. 그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경조사에 꽃과 돈을 보냈네. 「미스터 메이플에게, 자네의 결혼식에 꽃을 보냈던 것이 어제인 것 같고, 당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낸 지가 바로 정오 같은데, 이제는 자네의 장례식에 꽃을 보내네.」 라는 메시지와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지. 이걸 전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네. 어린아이가 반바지와 스타킹을 신었을 때부터, 벨벳으로 된 정장을 맞출 때 까지 내 일이었어. 아직도 그의 필체와, 그가 하던 서명이 기억나네. 아직도 죽지 않은, 스가와라 코우시로부터. 블랙 유머였지.
스가와라는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지. 햇빛을 보기 싫어했어. 관처럼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다가, 내가 사온 꽃들을 보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 그는 항상 나한테 이렇게 말하곤 했어. ‘어린아이는 볼레로처럼 자라는구나.’ 하고. 그 때 라벨의 곡을 좋아했는데…, 그 때 마다 나는 물었지. 멍청했으니까. 그럴 때면 스가와라는 태양과 가장 먼 존재인 주제에 햇살처럼 웃었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어. ‘볼레로는 처음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점점 그 몸집을 키우잖니. 눈치 채지 못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처럼. 너는 꼭 그렇게 자란단다.’ 하고.
어린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나는 매번 그의 무릎에 앉아서 스가와라 씨, 나는 얼마나 자랐나요? 오늘도 자랐나요? 볼레로처럼? 하고 물어보곤 했어. 날 향해 웃어주는 그 얼굴이 좋았네. 사랑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사랑이었네. 지독한, 짝사랑이지.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단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시체처럼 차가웠지. 냉한 겨울밤 같았어. 마른 자작나무 같기도 했지. 그러나 나는 그게 이상한다고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나는 그가 스라와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는 야치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잠시 멈추겠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슬퍼 보였다. 그는 잠시 일렁이는 불꽃을 쳐다보다가, 제 손목을 매만졌다. 항상 실크 셔츠로 가리고 있던 부분에 두 개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아닌가?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 살았어, 그리고 오래 살 거야. 카게야마는 별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야치, 너와 히나타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고, 너희의 아들들에게 화환을 보내겠지. 나는 너희의 장례식에도 꽃을 보낼 거야. 아마 결혼식에 보냈던 것과 닮은 꽃이겠지. 내 나름의 유머니까, 그리고 이렇게 서명하지 않을까. 아직도 죽지 않은, 카게야마 토비오로부터. 그는 농담을 하는 듯 웃었다. 그의 목 끝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야치는 공감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 할 거야. 그가 통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쌓였음에도 그의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야치는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무섭지 않나? 카게야마가 질문했고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 끝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그는 잠시 멈추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가끔 외출을 했네. 밤이었고, 우리는 사냥을 나갔어. 그는 라이플을 가지고 있었네. 은으로 장식된 건 아니었어. 금으로 세공 된 것이었지. 그는 거기에 납으로 만든 총알을 채워 넣고 다녔지만 한 발만은 은이었지.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모든 탄환이 은이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어.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을 속삭일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스가와라에 대한 것들은 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지.
그는 명사수였단다. 프록코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사냥을 했지. 탕, 하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총에 맞은 짐승들을 찾으러 갔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단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개들이 피를 먹게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찾은 사냥감들은 피가 하나도 없었어. 그가 마신 것이었지. 아니, 마신 것이겠지. 내 가정이지만. 그 때 마다 나는 그에게 물었어. 왜 이렇게 되었나요? 그는 능숙하게 말했지. 은으로 된 탄환을 써서 그렇단다. 은은 피를 마시지.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빛났단다. 달빛은, 환한, 은색이지.
나는 은색이 그의 색이라고 믿었어. 그의 성에는 은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또한 겨울의 눈 색이 그라고 믿었어.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닮은 색이지. 그는 나의 세계였고,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순애의 대상이었어.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지. 더러운 영국의 뒷골목에서 나를 꺼내준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였고, 나에게 그의 이름에 쓰인 언어, 그러니까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것이었지.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어. 나는 내 이름에 쓰인 글자를 퍽 좋아한단다. 그가 나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지. 이름이란, 대단한 물건이야.
그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의무였다. 나는 볼레로처럼 그에게 젖어들었어.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소리로 들리지도 않던 소리로 노래하던 마음은 그렇게 점점 처졌단다. 내 음악이 온전히, 오롯이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안 건 어느 양복점이었어. 구름이 겹겹이 낀 어느 날 그는 검은색 양산을 들고 외출을 나섰단다. 그는 검은 모자를 썼어. 여성용이었지. 장례식에 나가는 것처럼, 그의 흰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검은 레이스가 가리고 있었어. 그는 검은 코트를 입었지. 벨벳이었다.
늙은이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해.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청년기를 관통했던 물건이라고 생각하곤 하지. 그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인지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뒷골목에 있는 낡은 양복점으로 들어왔단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면서 노부부는 호들갑을 떨었어. 그들은 ‘메이플’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단다. 그들은 스가와라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 양장점의 불이 꺼졌고,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노파가 물었어.
오늘도, 스가와라님의 양복을 맞추십니까?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어. 달빛이 흔들렸고, 내 세계가 흔들렸지. 이 친구의 양복을 맞출 거야, 벨벳으로, 가장 좋은 벨벳으로. 그는 노래하듯 말했어. 그는 오랜만에 외출에 기분이 좋아 보였지. 집에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꽃을 끌어 모아 화병에 급히 꽃은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서 사이즈를 쟀지. 나는 그 때, 백 팔십 센티미터였어. 지금과 똑같은 키고, 똑같은 몸무게였지. 아드님이 건장하시군요, 노인은 내 뛰는 심장을 신기해 하며 물었어. 스가와라는 예쁘게 웃으면서 장성하였지, 하고 키득거렸단다.
기묘한 광경이었어.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분은 거의 없어진 시기였지.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여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어.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존대를 쓰며 몸을 굽실거리는 모습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스가와라 코우시는, 스가와라는, 코우시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세계였고 절대적인 존엄자였다. 그는 양복이 완성 되면 직접 받으러 올 거라고 대답했어. 메이플 부부는 부디 날이 계속 흐렸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지. 그는 그 농담에 머리를 숙여 인사했단다. 실로 우아한 광경이었지,
아직도 나는 그 때의 꿈을 꾼단다. 영원을 사는 자들은 추억에 기댈 수밖에 없어. 모두가 변하는 그 상황에서 혼자 변하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야치는 그가 느낄 고독을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 오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야기는 더 길거야, 역사책 같은 이야기지. 그의 배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치는 녹음하던 테이프를 멈추고서 등불을 들었다. 히나타에게 말해 두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야치는 그가 핸드폰에서 펜을 꺼내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왜 카게야마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그녀는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난데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파자마파티를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그녀가 문에 도착할 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히나타도 알고 있었어? 야치가 물었다, 히나타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셋만 끌어안고 있는 비밀이야. 그 ‘비밀’이라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 속의 ‘메이플 부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에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야치는 다시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도망칠 줄 알았다. 카게야마의 말에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니까요, 하는 이야기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그의 웃음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손을 매만졌다. 물이 닿아 일시적으로 온기를 빼앗긴 탓이었다. 야치는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는 다시 비밀을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한 것이 또 하나가 있네. 왜, 그가 인간에게 접근했고, 나를 길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어. 나는 이 사색을 백 년 가까이 지속했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답을 할 수 있었어. 영원을 사는 존재는 변화에 무뎌진단다.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혹시 나날의 자그마한 변화에 관심을 둔 적이 있는가? 어제 봉오리 져 있던 목련이 오늘은 소담스럽게 꽃을 틔우고, 그 꽃잎이 내일 혹은 일주일 후에 떨어져서 갈색으로 변하는 광경에 시선을 둔 적이 있는가? 그런 사소한 변화도 몇백 년이 쌓이다 보면 특별할 수 없는 일이 된단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야. 인간은 백 년 가까이 삶을 지속하지. 사유하는 동물이야. 어제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며, 어제의 호흡과 내일의 호흡이 다르지.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변화해. 달이 줄어들고 차오르는 것 같은 기계적인 변화가 아니야. 또한 심장소리, 그 심장소리를 가지고 있단다. 나와 가장 닮았지만 다른 존재가 인간이지. 그 성장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사치이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표현하는 시계와 같은 일이지.
그래서 먹지 않고, 기다렸던 거야. 참아가면서, 또 참아가면서. 스가와라 또한 그랬을 거야. 내게 이 대답을 알려준 것은 히나타였어.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단다. 그에게 꽃 심부름을 시킬 수 없었지. 대신 나는 그에게 신문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어. 그가 커가는 과정을 눈 안에 담고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이자 내 사랑, 내 영원인 스가와라를 이해할 수 있던 거지. 영원이란 존재는 이렇게 미련하단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할까? 다행이 양복을 받은 날도 짙은 안개와 구름이 함께 하는 날이었단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내가 날씨를 이야기 하자 그는 소년처럼 기뻐했었다. 그 웃는 얼굴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그래 뛰게 만들었었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듣는 것 같았어. 첼로 같은 선율로 사랑했었고, 그 반주를 하는 피아노의 음색처럼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
그와 나는 같은 마차를 탔어. 그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자신의 아들로 설명했지. 마차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어. 네가 점점 더 커간다면, 너는 나의 아버지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 그는 영특했고,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그 양복점에서 메이플 부부에게,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단다. 물론 부정적인 사실이었지. 베토벤의 「운명」처럼 난폭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였단다.
미스터 오이카와께서 서신을 남기셨어요. 노파는 그렇게 말했어. 스가와라는 동요하지 않았지. 그는 천천히 시간을 들였어. 내가 벨벳 양복을 입은 걸 바라보았지. 그는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었단다. 그의 눈 색과 닮은 호박이었어. 그 보석은 송진이 박제된 거라고도 말할 수 있었지.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위에 달린 브로치는 제법 멋있었어. 나는 화동에서 이렇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게 들떠 있었지.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처음 말한 그 ‘사랑한다’로 받아들였지. 나도, 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단다.
아픈 말이지. 아픈 말일 수밖에 없어. 내가 들었던 유일한 대답이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소리였으니까. 내가 기억할 때 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착각’이라는 말이 따라온단다. 나는 그 말이 싫어. 네가 쓴 「『외디푸스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착각’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었어. 물론 다른 말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소포클레스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어쩜 그렇게, 욕망을 담고 있는지. 인간들이 고전에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다고 말했지. 미스터 오이카와 때문인가요?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어. 그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단다. 나의 아버지야,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려 있었다. 그는 그의 라이플에 은제 탄환을 가득 채웠어. 그 탄환을 채운 것은 나였다. 그가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지. 그는 나의 그 행동에 감사했어.
나는 그에게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사랑이었지. 그는 고개를 저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란다. 나는 짐을 쌌어. 그가 만들어준 양복은 가방 가장 안쪽에 넣었지. 그는 마부를 고용했다. 메이플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달라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바라지 않았어. 그는 보석들을 챙겨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 그 때, 증기선이 막 만들어졌던 때였어. 그는 증기선 두 표를 끊었단다. 급하게 끊었기 때문에 후미진 삼등석 방이었어.
우리는 열흘 후에 출발하는 그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다시 기반을 찾기로 한 거지. 그러나 언제나 운명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오이카와’의 짓이었어. 무언가 질문이 있나?”
야치가 손을 든 것을 발견하고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까, 처음에,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장님께서 찾고 있는, 그녀의 지적이 반갑다는 듯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거야. 너는 꽤나 좋은 청자로구나.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궁금한 게 끝났냐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벅찼다.
“중간에 마부가 도망쳤다. 말들이 죽었어. 그는 그걸 허탈하게 보면서 오이카와의 짓일 거라고 말했지. 숲 속에는 동물들이 없었고 햇빛이 들어왔단다. 나와 그는 밤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간이었고, 그는 나 때문에 느리게 걸었지. 그는 심하게 배고파했어. 허기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의무와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힘들어서 멈춰 서 있을 때 그는 숲을 돌았어. 아무것도 마실 게 없다는 걸 알고 그는 나무수국처럼 웃었지.
우리는 버려진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 성모상이 나와 그의 위에 있었단다. 자애롭게도 팔을 벌리고 있었지. 나는 그에게 팔을 내밀었어. 나를 마시고, 도망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게 마셔져 죽는 것을 희망했다. 지금 나이로 갓 고등학생이었어. 그 때는 성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피를 마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로, 내 손목을 세게 그었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그는 매우 갈망했어. 지독한 갈증이 피어올랐고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그 광경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천사, 나의 영혼, 나의 불꽃, 나의 모든 일렁이던 세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를. 그는 작게 난 내 상처를 서툴게 핥았다. 나는 그와 섹스하는 기분이었어. 지독한 오르가즘이 내 몸을 가득 채웠지. 나를 비워 주세요, 내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울면서 나를 마셨어. 그의 하얀 피부를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더럽혔고, 그의 말캉한 혀가 내 살갗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흡혈의 순간은 황홀했단다. 나는 어지러웠고 그는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어. 그는 자신의 송곳니가 나에게 상처를 낼 까봐 무서워했어. 이상한 일이었지. 뱀파이어인데,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인데! 자식에게 못된 짓을 한 아버지 같았지. 그가 핥은 상처는 멎지 않았어. 나를 죽여줘요, 나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했어. 왜냐하면, 내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게 가장 베스트였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부성애든, 미물을 사랑하던 자비던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은 매우 달콤한 일이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끝이 결국 자살인 것도 그와 같아. 사람의 기억은 끊임없이 마모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잊히는 것을 슬퍼한단다. 모순된 일이야. 기억되려고 하고 끊임없이 이름을 만들지.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고 그는 착한 아이야,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오이카와’의 손길에서 벗어나길 바랐을 뿐이었지.
스가와라는 나를 성당 바닥에 눕혔어. 나는 그의 얼굴과, 성모상을 바라보았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도피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어. 그는 나의 손목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지. 나는 그가 도망친 줄 알았어.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끊기려던 시점에 나의 또 다른 아버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완벽했겠지.
그는 나를 보면서 웃었어. 나의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것은 분명이 악마였지. 그는 나를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면서 웃었어. 오이카와는 입에 스가와라의 이름을 담았지. 안녕, 난 네 아버지가 될 오이카와 토오루란다, 너의 스가와라가 나에게 울면서 부탁했어. 뱀파이어가 우는 걸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너는,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강제로 의식을 붙들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는 나의 손목을 보았다. 나는 내 손목을 감추었어. 대단한 사랑이구나,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나의 멱살을 잡았지. 그는 내 피를 밟고, 내 목에 입을 맞추었어. 그의 송곳니로부터 피가 빨리는 게 아니라 독이 들어왔다. 뱀파이어의 피였어. 그는 자신이 나의 아버지가 될 거라 속삭였지. 라벨의 「현악 사중주, F장조 2악장」처럼 내 심장에서 독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날 이후 라벨을 듣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는 내가 변화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봤어. 성당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잠들지 않았지.
나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견뎌냈어. 그는 내가 모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사랑했고, 나 때문에 스가와라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하지만 내 볼모는 스가와라였지. 그가 담보가 되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어. 그가 없어진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는 빈 껍데기였다.
오이카와는 여자를 잡아왔다. 손목을 무는 것도 베스트야, 그는 나에게 뱀파이어로서의 기본 자질을 알려 주었어. 나는 그렇지만 목을 물었다. 상처를 크게 내어 피를 빨았어. 손목은, 나의 순수한 사랑의 장소였다. 그는 그 때 마다 나를 비웃었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를 떠나갔어.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스가와라가 남긴 보석을 바꾸어 증기선의 일등석 칸을 예약했다. 나는 파티에 나갔고, 매너 있는 신사인 척 행동했다. 여자를 잡아 그들의 피를 빨아 버렸어.
돈이란 건 대단하더구나, 왜 뱀파이어들이 재물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지. 나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여자들이 사라졌지만 내가 범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더군. 여자들은 끊임없이 다가왔고 나의 식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목을 물었어. 섹스의 전초전 같은 느낌으로, 애무하듯이. 그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다 죽어갔다. 나는 프랑스에 갔고, 거기에서 노인들을 꼬셔냈어. 노인이란 어린아이에게 친절하지. 나는 그것마저 이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스가와라를 만나야했어. 그것이 나의 삶의 이유였다.”
무섭나? 카게야마가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의 순애에 눈물지을 뿐이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사람의 부분이 남아있다는 거야. 카게야마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야치는 목을 축였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비효율적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거란다. 카게야마는 담담히 쏟아냈다.
야치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쯤, 카게야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야기를 계속 해도 괜찮겠니, 그는 아이에게 묻는 것처럼 물었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 같구나,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작고 여린 동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시미즈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녀는 자신의 룸메이트의 이름을 꺼냈다. 그렇구나, 카게야마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롤리타」의 앞부분을 기억 하니?”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 리- 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카게야마는 연극배우처럼 책의 첫 문장을 읊었다. 야치는 짧게 떨었다. 똑똑한 아이구나, 카게야마는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둘 사이에 쌓인 서사들이 그녀가 그 문장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야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자작나무 같을 것이라고 짐작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안타깝게 읽었고, 재미있게 읽었어. 나는 그걸 쓴 게 사랑을 하다 영원에 박제당한 뱀파이어인줄 알았다. 스가와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 정도, 그 느낌이었어.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를 잠식할 듯 태워가면서 나를 살아있게 만든 욕망. 언론사를 차린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모든 정보들을 매일 아침 히나타에게 가져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오이카와 토오루, 늙지 않는 사람! 어둠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길 가장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신문사였으니까.
그래서 광고를 내고자 했다. 스가와라, 라는 이름, 그리고 코우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자 했지. 이 결심을 한 것은 얼마 전 깨달았던, 그가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부성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삶의 이유였던 적이 있어. 이렇게 변한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한테 남아 있는 영원만큼 그를 갈구할 거란다. 그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지.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고집이 늘어가는 거란다. 내 입 속에서 스가와라, 라는 이름이 발음될 때 마다 나는 그를 욕망한다. 욕망 할 수밖에 없어. 너의 그 칸에는 이 이야기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 십 센티미터와 오 센티미터, 그 작은 공간 안에 내 이야기를 담는다면 쌀알에 글씨를 새길 정도의 글자로 이야길 해야 할 테니까. 너는 다만 세 문장을 적어두면 된단다.“
“무슨, 문장인가요?”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
야치는 그 문장을 포스트잇에 받아 적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정의 된 이름 속에는 여러 사연이 스며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잔떨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치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떨림이 어떤 느낌으로 비춰질 지를 고민했다. 그 세 문장은 욕망이자, 욕정이자,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야치는 그들이 겪을 영원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녀는 그 지독한 콤플렉스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것을 눈여겨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아버지를 살해 할 건가요? 그녀가 주제넘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네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앞에는 파멸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도 살아있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너희의 결혼식에 축하 화환을 보낼 것이니. 그는 옛날 사람처럼 말하였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그의 마지막 마침표에 야치는 녹음 되어있는 테이프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그는 자애롭게 말했다. 그의 웃는 모습은 그림자처럼 서늘했다.
“너는 평소처럼 너의 룸메이트에게 가서 오늘 있었던 ‘비밀’을 이야기하면 된단다. 너의 룸메이트 또한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게야. 너를 채용한 건 그녀 때문이었어. 그녀의 소문과 작은 논문, 네 친절함에 기댔던 거다. 세월을 먹을수록 결과만을 중요시하게 된단다. 오이카와가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결국 그의 손아귀에 스가와라가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나도 내 최선의 결말만을 남기고 싶을 뿐이란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불렀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야치의 태양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 안을 나섰다. 카게야마는 관처럼 만들어진 제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의 숨은 깊었고, 또 깊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 틈 새로 들어오는 인공적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 한 후였다. 카게야마는 빛 사이로 나아갔다. 조명은 그에게 티끌 같은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빛에 카게야마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돋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의 기원을 생각하며 웃었다. 스가와라처럼 웃고 싶어 세월을 들여가며 연습한 결과였다. 그는 벨벳 코트를 입었다. 그의 목을 장식한 레이스에는 호박 브로치를 달았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빛을 원한다. 그렇지만그 빛은 또 다른 그림자를 낳을 뿐이었다. 빛에서 파생된 작은 어둠.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다만 추측하고, 또 추측했다.
어디선가 볼레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는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었다. 끊임없이 반복하며 몸집을 키워가는 영원의 사랑처럼. 카게야마는 살포시 웃었다. 그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박제 된 나비와도 같았다. 그는 제 맘속에 품고 변주해간 마음을 생각하다가 뒤를 돌았다. 피 냄새가 요란하게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변하지 않는 밤하늘만큼이나 지독한 어둠이었다. 달빛이 내는 은색만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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